지렁이의 일생
한상순·(아동문학가)
한평생
감자밭에서
고추밭에서
좋은 땅 일구느라
수고한 지렁이
죽어서도 선뜻
선행의 끈 놓지 못합니다.
이제 막 숨을 거둔
지렁이 한 마리
밭고랑 너머
개미네 집으로 실려 갑니다.
지렁이에게 주는 상장
신현득
너는 흙을 깨물지 않고
온몸으로 주물러서만 일구었느니라.
빗물 스미기 좋게 하고
거름 스미기 좋게 하고
민들레 뿌리 뻗기 좋게 하여
그 그늘에 귀뚜라미 숨어살게 하였느니라.
도꼬마리 씨 떨어지면 싹트기 좋게 하고
온갖 벌레알 잠자기 좋게 하고…….
좋게, 좋게만 하다 보니
총으로 서로 쏘던 사람들도
―어, 지렁이 보게!
―지렁이에게 배워야 한다니까!
놀라고 느껴 쏘던 대포도 그리고 해서
좋게만 되었느니라.
네가 발바닥 하나 없이
배밀이로만 기면서 이룬 일이
우리 백두산 높이라, 오늘
인간의 국무총리가 큼직한 도장으로
주는 상장보다도
나무와 햇빛과 흙이 나란히 서서
몇 줄 칭찬을 적어
주느니라.
흙에 생명을 주는 주인공
조춘구
또르륵
또르륵
한여름 밤 고요 속에
풀밭에서
아주 작으나
청량하고 또렷한 소리
그러나
그 소리가
이젠 점점
사라져 간다
그리고
흙의 생명도 잃어간다.
농약과 제초제가 주범이다.
흙이 살아야
인간도 살텐데...
지렁이의 걱정이다.
지렁이와 터널
나호열
시력이 약해지고 있다
끊겨질 길에 대한 불안
감히 뛰어가지도 못한다
너를 통과하는 동안
기쁨은 너무 짧은 마취였다
넝쿨장미가 상처처럼
아득하게 피어났다
지렁이론
오만환·
침묵으로 말한다
드러내지 않는 게 사는 길
꿈틀거린다
꿈틀대도 어쩔 수 없다
고기밥으로 맛있는 지렁이
허리가 잘려도 살아남는 게 지렁이다
암수가 하나
약한 것이 힘
자연스러운 게 지렁이다
눈물 콧물 구정물 섞여서
주변을 기름지게
주면서 사는 게 지렁이다
내버려두세요
사람은 사람, 지렁이는 지렁이
흙내음 맡으며
축축하게 땀 흘리는
지렁 지렁 우리 지렁이
낮은 곳에서
사람들도 지렁이처럼 산다
지렁이
주근옥·
아스팔트 위를
지렁이가 기어가네
비와 자동차 사이로
지렁이
김종익·
억울하게 조사 받은 지렁이
맑은 날 길에 빠져 자살했다
모든 체액을 햇빛에 빨리고
검불이 되는
먼지로 흙으로 돌아가는
소멸
무죄 주장하는
마지막 저항
나와 지렁이
백석·
내 지렁이는
커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천년 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 주면 그 흙이 지렁이가 되었습니다.
장마 지면 비와 같이 하늘에서 나려왔습니다.
뒤에 붕어와 농다리의 미끼가 되었습니다.
내 이과책에서는 암컷과 수컷이 있어서 새끼를 낳았습니다.
지렁이의 눈이 보고 싶습니다.
지렁이의 밤과 집이 부럽습니다
1935년 11월 「朝光」발표
지렁이의 詩
김신용·
그저 온몸으로 꿈틀거릴 뿐, 나의 노동은
머리가 없어 그대 위한 기교는 알지 못한다
구더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지만
내 땀 다 짜내어도 그대 입힐 눈물
한 방울일 수 없어
햇살 한 잎의 고뇌에도 내 몸은 하얗게 마르고
天刑이듯, 그대 뱉는 침 벗삼아 내 울음
알몸 한 벌 지어 오직 꿈틀거림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이 세상의 모든 빛,
그대 사랑에게 겸허히 잡혀 먹히어 주겠다
나를 지킬 무기는 없어
비록 어둡고 음울한 습지에 숨어 징그러운
몸뚱이끼리 얽혀 산다 해도 어둠은 결코
謫所가 아니다 몸뚱이가 흙을 품고 있는 한
간음처럼, 대지를 품고 있는 한
우리 암수의 성기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몸 섞는 풍요로운 꿈으로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그대의 땅을 은밀히 잉태하고 있는 한
지렁이가 따라 올라오다
신현정
조금 남은 공한지에 구덩이를 파서 호박씨 묻으려고
흙 한 삽 떠올렸는데
지렁이가 따라 올라오다
흙 한 삽이 이다지 무거운가 하다
지렁이가 따라 올라오다
흙 한 삽이 저절로 명랑하다
지렁이가 따라 올라오다
흙 한 삽에 포오란 지진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지렁이가 따라 올라오다
아서라 나는 흙 한 삽 도루 내려놓고
구덩이를 포기하다.
지렁이 같은 세상
유일하
핏줄기의 몸으로 울어야했던
죽음의 사투를 난 바라본다.
어이해 갑옷을 벗어던지고
아스팔트 위에서 고뇌하는가!
갑옷 속에서 흐느적거릴 때
따스했던 흙덩이의 사랑은
매몰된 구덩이로 돌변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처참한 생은
하늘의 눈물 때문이었으리라.
개미들의 악착같은 이빨로
붉게 물들어간 너의 삭신.
자연을 정화하고 자연 속을 향해
거룩한 행진을 하고 있구나.
우리의 분신도 그때가 되면 알겠지!
지렁이
정일남
적갈색 고무줄로 된 몸이더라
뼈가 다 녹아 반죽이 되어 고무줄이 된 거지
한 몸에 암수가 같이 껴안고 살아
금실이 너무 잘 다듬어졌다
부부간의 진정한 애무의 전범이다
자네, 지렁이 우는소리 들어봤어?
비닐하우스를 하는 친구가 느닷없이 묻는다
지렁이가 운다고?
아침에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면 공간에
자욱하던 지렁이 울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진다고 했다
귀가 그렇게 밝은 지렁이
지렁이가 살지 않는 땅은 죽은 땅이다
장마 뒤 공기 구멍을 물이 막으면 지렁이는 땅위로 올라와야 산다
악착같이 살려고 헤매다가 햇볕에 말라죽는다
개미들이 몰려와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았다
어릴 때 달밤에 마당 한쪽에서
풀벌레보다 작은 이상한 소리 들었다
그것이 지렁이의 울음소리가 맞을까
그것이 세상을 원망하는 소리라면 더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척추는 없어도 슬픔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렁이와 나는 사는 방식이 달랐다
어느 날 아스팔트길을 건너려고
지렁이는 온몸이 발이 되어
긴 고무줄을 이끌고 갔다
차량이 줄을 이어 오고 가는 그 길을
·
지렁이의 울음을 누가 들었을까
김정희
소낙비 그친 뒤
수 시간 걸려 아스팔트로 올라왔을 지렁이가
후진하던 자동차에 깔린다 수 초 전까지 살아
꿈틀거리던 그가 금세 한 장의 전개도처럼 펼쳐진다
그때, 누가 들었을까? 그 지렁이의 마지막 울음소리를
409호 베란다에 사는 비둘기들이 새파랗게 눈독들이는 소리를
비둘기들이 재빨리 내려가 축축한 전개도를 떼어 물고 간다
아스팔트에 복사된 지렁이의 생이 붉은 우표처럼 붙어있다
바로 그 자리에 짐차 한 대 들어선다
지렁이의 서울
김수우
가을장마가 끝난 오후
흙먼지를 뒤집어쓴 지렁이를 본다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저기 저만치 꽃밭이 보인다
벗겨진 살갗을 찌르는 햇살보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더 아찔하다
쥐똥나무가 있는 화단은 턱이 높다
수 미터 아래서는
지하철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날 이후 밤마다
왝왝 토해낸 슬픔들이
모두 흙투성이가 되어 꿈틀거린다
화단은 날마다 가위질로 다듬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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