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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났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 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스러지는 검은 연기,
다만 타붙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어.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김소월이 술꾼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애연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김소월이 일본 유학을 갔다 관동대진재로 인해 중도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스승인 김억, 친구 나도향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다. 김억의 회고에 의하면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김소월을 보고 친구들이 “자네는 왜 꼭 비싼 카이다만 피우는가?” 하고 묻자 김소월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담배는 왜 피우오? 담배는 일종 사치요. 사치하는 바에야 사치스러운 사치를 하는 게 옳지 않소? 나는 값비싼 사치는 해도 값싼 사치는 하기 싫소.”
김소월이 사치를 즐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숙모 계희영에 따르면 부잣집 아들이니 좋은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해도 허름한 바지저고리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김소월이 담배 만큼은 최고급을 고집했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에 전매국을 설치하고 지정된 곳에서만 담배를 팔도록 하는 연초 전매령을 실시하면서 처음 내놓은 담배가 카이다라고 한다. 카이다의 가격은 한 갑에 15전이었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피우던 메이플이나 마코 같은 담배가 5전이었다고 하니 꽤 비싼 담배였다. 그런데 하필 카이다는 ‘해태(獬駝)’를 일본말로 부르던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를 못마땅하게 여겨, 조선 사람들이 해태라는 이름으로 된 담배를 피우면서 해태의 기운을 연기처럼 흩날려 버리게 하려는 의도를 담아서 만든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확증을 댈 수 없는 추론일 뿐이기는 하나 담배 이름치고 특이하기는 했다.
김소월이 그런 소문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카이다를 고집한 건 위악이었을까? ‘값비싼 사치’를 통해 식민지 조선 청년의 절망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였을까? 이제 와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니, 그 속내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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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香氣)로운 때를
고초(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김소월은 술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사랑했다기보다 알코올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듯합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몇 달 만에 관동대진재로 돌아온 김소월은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그대로 주저앉고 맙니다. 그 후 김소월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지 못해 좌절감에 빠지고, 더구나 자신들의 협조자로 만들기 위한 일경의 감시와 회유에 괴로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소월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 술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술을 마시긴 했지만 웬만해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김소월이 주막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주정을 하는 단계까지 발전합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처가가 있는 구성으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지만 지국 운영도 뜻대로 되지 않고 술만 늘 뿐입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술을 가르쳐서 부부 술꾼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어깨를 걸고 나란히 주막으로 향하는 김소월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을까요, 아니면 주책으로 보였을까요? 몇 년을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시도 거의 쓰지 않고,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지낸다는 소문이 중앙문단에 퍼질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김동인이 쓴 글에 김소월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그는 말할 수 없는 술주정꾼이 되어 붓을 잡을 생각도 안하며 붓을 잡는다 하여도 그때의 그 힘이 그냥 남아 있을지가 문제라는 것이 어떤 그의 친지의 말이다.
-매일신보, 1932.9.27
김소월이 술을 직접 제재로 삼아 쓴 시는 두 편인데, 작품성으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되어 가는 일에 부채질 하고
안 되어 가는 일에도 부채질합니다.
그대여, 그러면 우리 한잔 듭세, 우리 이 일에
일이 되어 가도록만 마시니 괜찮을 걸세
-「술」 4연
못 먹어 아니 죽는 술이로다
안 먹고는 못사는 밥이로다
別하다 이 세상아 몰을이라
술을 좀 답지않게 못 여길까
-「술과 밥」 1연
둘 다 유고시로 발표된 작품이라 창작의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모두 후기 시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술」에서는 적당히만 마시면 큰 문제없을 거라고, 「술과 밥」에서는 술보다 밥이 중요하므로 술 나눌 친구보다 밥 나눌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식의 새로움도 없는데다 말을 부리는 맛도 별로인, 그저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한 작품들입니다.
그에 반해 1925년에 펴낸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님과 벗」은 훨씬 맛깔스러우면서 낭만성이 살아 있습니다. 설움을 함께 할 벗과 사랑을 나눌 님이 곁에 있다면 마시는 술이 얼마나 향긋할까요?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라고 외치며 한껏 흥에 취한 김소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 유쾌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이 예비한 결말은 행복이 아닌 불행 쪽이어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든 김소월이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김소월의 비극적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도 ‘그대여, 불러라, 나는 마시리’ 호기롭게 술잔을 드는 시인들의 모습이 술집 창문에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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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하면 즉각 ‘진달래꽃’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많은 이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그에 반해 시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에 대한 언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영변에 있는 약산일까? 소월이 자란 고향인 정주 곽산의 남산봉에도 해마다 진달래는 피고 지고 했을 텐데.
약산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구룡강 왼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산에 약초가 많고 약수가 난다고 해서 약산(藥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흔히 약산동대(藥山東臺)라 부르기도 한다. 동대라는 말은 영변이 옛날 무주(撫州), 위주(渭州), 연주(延州)라는 세 고을로 나뉘어져 있을 때 무주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약산보다는 약산동대라는 말이 더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약산동대는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봄이면 진달래가 온산을 붉게 물들인다. 약산동대와 관련해서는 많은 전설과 민요가 있는데, 고을 수령의 외동딸이 약산에 갔다가 절벽에서 그만 강으로 떨어져 죽고, 그 죽은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소월이 약산 진달래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약산 진달래를 시에 끌어들였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말고도 약산 진달래를 소재로 한 문인들의 글이 여러 편 있다. 김억과 노자영은 기행문을 썼고,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은 「약산동대」와 「약산동대가」 두 편의 시를 남겼다. 그중의 한 편을 잠시 살펴보자.
약산동대
김동환
내 맘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영변에 약산동대 진달래밭에
봄바람 가로 타고 흘러가노라
거기엔 서도각시 바구니 이고
멀리 간 님 생각에 노래 부르며
고운 꽃 골라 따서 한 아름 담데
바구니 가득 차면 잎은 버리고
꽃만 골라서 화전 지지고
나중엔 꽃다발 틀어얹고 오데
이 시는 소월의 「진달래꽃」보다 나중에 쓰였다. ‘멀리 간 님 생각’ 같은 부분을 보면 소월의 영향을 받은 듯도 한데, 시에 담긴 정서가 너무 단순하고 소박해서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김억은 훗날 약산동대를 다녀온 뒤 기행문을 쓰면서 진달래와 소월의 시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다.
그리고 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 (중략)
이별의 원한(怨恨)을 이렇게 담아 놓고서 하다 많은 진달래꽃에서 하필 약산동대의 진달래를 따다가 가시는 님의 길에 뿌려 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진달래꽃이건만 약산의 그것이라야 보다 더 힘 있게 보다 더 감동 있게 우리의 맘을 다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약산동대는 진달래와 함께 그 이름이 높아집니다.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약산동대의 진달래꽃은 언제나 우리들의 맘속에서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외다.
-「약산동대 영변」(『반도 산하』, 삼천리사, 1944)
우리는 ‘영변’ 하면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떠올리게 된다. 영변의 약산동대가 그토록 풍광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언제나 약산동대에 올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어볼 수 있으려나? 그날을 생각하며 우선은 ‘약산동대’라는 지명이라도 가슴에 새겨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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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이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모작(模作)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 지도 꽤 되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온 사실이다. 「진달래꽃」의 일부 구절이 외국시의 영향 아래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이양하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근거로 든 작품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1865~1939)가 지은 「하늘나라의 옷」(원제: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이라는 시이다. 이 시는 김억이 「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태서문예신보』 11호(1918.12.14.)에 발표했다가 그 후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년)에 실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개벽』에 처음 실린 게 1922년이니,예이츠의 시가 미친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비교를 위해서 당시에 발표된 전문을 소개한다.
내가 만일 광명의
황금, 백금으로 짜아내인
하늘의 수 놓은 옷,
날과 밤, 또는 저녁의
푸르름, 어스렷함, 그리고 어두움의
물들인 옷을 가졌을지면
그대의 발아래 펴 놓으련만,
아아 가난하여라, 내 소유란 꿈밖에 없어라.
그대의 발아래 내 꿈을 펴노니,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지내라.
‘그대의 발아래 펴 놓으련만’, ‘그대여, 가만히 밟고 지내라’ 같은 부분이 「진달래꽃」과 거의 흡사한 발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발아래 펴 놓는 것이 ‘옷’이 아니라‘꽃’이라는 점만 다를 뿐, 기본 맥락은 동일하다. 이양하는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304호(1962.5.7)에 기고한 「소월의 진달래와 예이츠의 꿈」이라는 글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예이츠의 시 발표된 것이 1899년이고 보니 소월이 거기서 시상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꼭 그랬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혹 그랬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환골탈태라 할 것으로 이것이 소월의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감쇄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양하의 말처럼 김소월이 이 시를 보았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자신의 시보다 먼저 발표되었고 스승인 김억이 번역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리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볼 때 두 작품의 영향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월은 예이츠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을지언정, 자신만의 언어와 운율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냄으로써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를 넘어서 자신만의 시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점은 이양하를 비롯해 그 후 논의에 참여한 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실 근대시 초기에는 외국 시인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작품들이 꽤 많다. 비단 김소월뿐만 아니라 흔히 최초의 신체시라고 불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바이런의 시를 모작한 것이며, 심지어 정지용의 「향수」가 미국의 요절한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1874~1904)의 시 「추억(Mnemosyne)」과 흡사하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김소월의 작품을 비교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해 온 이들은 김소월이 아일랜드의 황혼파 시인들인 예이츠와 시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인 작품들을 들어 논증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모방이고 표절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발상의 유사성이나 몇몇 시어의 일치 같은 것들이 아니라 얼마나 새롭게 변용 내지 재창조했느냐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아주 흔한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근대시 양식 자체가 서양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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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③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逆-)’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 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역(逆)겨워’와 ‘역(力)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역(逆)겨워’가 아니라 ‘역(力)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 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 「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 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 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 「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역(力)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 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 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 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 「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역(力)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 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 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 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力-)’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 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 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년)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 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 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 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 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 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출처] 김소월 시 재미있게 읽기 9 - 진달래꽃③ |작성자 우보
[출처] 김소월 시 재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③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逆-)’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 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역(逆)겨워’와 ‘역(力)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역(逆)겨워’가 아니라 ‘역(力)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 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 「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 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 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 「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역(力)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 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 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 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 「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역(力)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 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 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 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力-)’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 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 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년)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 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 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 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 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 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출처] 김소월 시 재미있게 읽기 9 - 진달래꽃③ |작성자 우보
미있게 읽기 8 - 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③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逆-)’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 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역(逆)겨워’와 ‘역(力)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역(逆)겨워’가 아니라 ‘역(力)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 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 「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 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 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 「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역(力)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 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 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 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 「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역(力)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 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 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 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力-)’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 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 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년)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 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 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 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 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 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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