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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시모음 / 김소월시인과 담배, 술, 진달래꽃
2015년 07월 04일 22시 42분  조회:5198  추천:0  작성자: 죽림

<소주에 관한 시 모음

+ 삼겹살과 소주 

소중한 친구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삼겹살 같은 사람은 
소주 같은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찌푸린 일상에 
그만 지친 그대여 
이제 편히 쉬어도 좋다
(김병훈·시인)


+ 소주(燒酒)

술 한잔 마시는 데에
너무 많은 의미는 지겹다.
둥글둥글 살자는 세상이
너무 많이 기울어 있으니
세상에 한결같은 건
소주 맛을 쳐줄까.

도시에 내린 어둠은
너무 오래 잠을 자고
이리 저리 얽힌 매듭이
너무 깊이 조여 있구나.
우리는 소주맛에 빠져
마냥 젖어나 볼까.
(강세화·시인, 1951-)


+ 막소주라도 한 잔 

막소주라도 한 잔 처억 걸치고 나면 
한오백년이나 어랑타령 같은 노래 듣고 싶어진다. 
젊고 이쁜 여자가 아니라 얼금뱅이* 중년 여자 
조금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듣고 싶어진다. 
(나태주·시인, 1945-)  
* 얼금뱅이: 곰보, 마마자국


+ 안동소주 
  
이 풍진 세상을 
아무리 아모리 
저 세상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해도 

때없이 맞닥치는 
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 
들켜지고 마는 굴욕과 수모 …를 
불싸질러 흔적 없이 사루어주는 
45도 화주 안동소주 

사나이의 눈물 같은 
피붙이의 통증 같은 
첫사랑의 격정 같은 
내 고향의 약술 그 얼로 취하여 

이 풍진 시대도 
저 시대의 너털웃음 웃어가며 
성큼성큼 건너뛰며 나 살으리.
(유안진·시인, 1941-)


+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시인, 1960-)


+ 소주병 

나는 소주병을 보면 
연어가 알을 낳고 죽어가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입과 항문이 하나인 이 소주병이 
제가 먹은 제 속을 다 비워주고 
푸른 외눈을 뜨고 누워 있는 것이 
남대천 바닥에 누워있는 연어와 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가 그 먼 바다에서 회귀할 때는 
알에서 깨어나기 前, 다시 이곳에 돌아와 
속을 다 비워주고 죽어야 함을 배웠을 것이다 
이 푸른 소주병 속에는 연어의 그런 고집이 숨어 있다 
속을 다 비워주는 그 푸른 고집을 앞세워 
연어가 회귀하듯 걷다보면 
이 세상이 갈지(之)자로 움직인다 
남대천 연어도 갈지자로 그 먼 길을 회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귀 할 수가 없다 
이 푸른 소주병 속에는 
연어가 회귀하는 갈지(之)자가 숨어 있다 
이 세상을 연어처럼 살아가라고
(임영석·시인)


+ 소주병 
  
스스로 말문 열어본 적이 없다 
늘 파다한 소문 옆에 있을 뿐 
얇아진 호주머니와 노동의 사회학과 
보수총액이 아니라 실수령액이 아니라 
말이 잘리고 가슴들 화통 앓는 
풍경 속에서 
흔들리면서 고개를 꺾으면서 
내 허전한 입구 물고 벙어리가 되고 마는 이들 
오장육부 게워내고 
메아리도 없는 소음에서 
결국 뿌리 없는 고요에서  
텅 빈 뱃심으로 콧노래 불러보는 꿈만 지닌 사람들 
그들의 입술에서 목젖에서 
뒷간에서 선짓국 집에서 
부아가 치미는 핏발 선 눈으로 
하나 둘 내 뚜껑을 열던 사람들 
내가 싸한 냄새 풍겨 시작된 
그들의 희로애락이 
오뉴월 세참 시간 밭고랑에서 
떠돌이 봇짐 속에서 
언제나 마무리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반문한다 
내가 말문 열면 
정말 세상은 뒤집어지는가를
(천봉현·시인)


+ 소주 한잔

소주 한잔 부어놓고
歸天한 자네 생각하니
달근한 맛 옛날 같지 않네.
언제쯤 다시 만날까 하여
바닥난 소주잔 들여다보니
네놈 얼굴이 어리어
또 술잔을 채워도
함께 마주할 날
다시 또 나눌 수 없으니
일찍 간 자네가 서러울까 생각해도
남아 있는 내 모습이 더 서럽네!
(최상고·시인)


+ 한잔의 소주를 마시며 

목포의 어디쯤, 아니면 
서남해의 어느 개펄 속에서 
한 세상 살려던 죄 없는 생명 하나 
조금 전 열반(涅槃)에 들었다 

'맞아, 제일 잔인하지' 

몇 잔의 소주를 마시고 
그가 벗고 간 몸부림을 씹으면서 
우리도 흐느적거리며, 조금씩 
열반(涅槃)으로 옮겨 앉는다
(송문익·시인)


+ 소주에 관한 짧은 詩  

수인선 지하철이 휘돌아 오면서 
건너편에 서있는 너의 모습이 
차창에 깎여 나갈 때 
나는 계단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정하게 손 흔들어 주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驛舍를 나서면서 
씁쓸한 소주가 생각나 
바람과 함께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투명하게 출렁이는 소주는 
너처럼 차갑게 내 안으로 들어와 
조그만 불씨로 모닥불을 피운다. 
너에게 깊이 취했던 것처럼 
소주에 깊이 취한 내 안에서 
파도가 출렁이고 작은 木船 하나가 위태롭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흔드는 것은 
창백하다 못해 차가운 너였다고 
말하지 않겠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아직까지 
나를 흔드는 너는 
이젠 세상까지 흔들고 있구나. 
(다울 김성수·시인)


+ 소주 같은 사랑
  
내 젊은 시절의 사랑은 
풋풋한 레드와인의 맛처럼 지나갔다.  
은빛 갈고리 깊숙이 넣어 
조심스레 코르크 마개를 열면 
맑은 글라스에 떨어지는 선홍빛 방울  
그 향기는 달콤하고 뒷맛은 떫었다. 

내 뜨거운 시절의 사랑은 
시원한 맥주의 맛처럼 지나갔다. 
뚜껑만 따면 펑하고 
하얀 거품으로 쏟아져 나와 
쉽게 갈증을 채울 수 있었지만 
한 번 열린 맥주는 
아무리 꼭꼭 닫아도 김이 새 버렸다. 

아직 나에게 사랑할 힘이 있다면  
이제 소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소주는 빛깔도 향기도 
솟아오르는 거품도 없지만 
탁 쏘는 맛에 취하는 것 하나는 확실하니까. 
유통기간이 따로 없으니 
조금씩 마시고 남겨 두어도 
변질될 염려도 없고.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 태하 등대지기와 소주 - 등대 이야기·33 

당신은 
간밤에 소주만 드시데요 
삼 년이 지난 여성지를 
표지가 닳도록 읽어도 세월은 닳지 않는다며 
그 잡지를 또 찾데요 
광고문까지 다 외웠다며 찢어진 표지처럼 웃데요 
지식이 늘지 않는 대장에 소주만 붓고 
시인들은 언제 소주를 마시느냐 묻데요 
파돗소리 때문에 귀가 멍들었다며 
후비던 귀는 손보다 크데요 
당신은 시를 쓸 가능성이 있다 했더니 
시는 소주보다 싱겁다며 
다음에 올 적엔 시집은 그만두고 
소주만 가지고 오라 하데요
(이생진·시인, 1929-)


+ 참소주를 마시면

수성못 옆 포장마차에서
참소주를 한 잔 마시면
여인이 여인으로 보인다.

두 잔을 마시면
여인의 이야기가 들리고
석 잔을 마시면
나의 말문이 트이고
넉 잔을 마시면
여심이 보이고
다섯 잔을 마시면
여인의 가슴이 크게 보이고
여섯 잔을 마시면
여인의 표정이 보이고
일곱 잔을 마시면
여인의 얼굴이 술잔에도 보이고
여덟 잔을 마시면
숙박시설의 상호가 큼직하게 보이고
아홉 잔을 마시면
수성못이 바다로 보이고

참소주 열 잔을 마시면
여인과 또 다른 사연을 만든다.
(김종환·의사 시인, 1951-)


+ 날 부르려거든

날 부르려거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지 말고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 말해 주오
좋은 술집, 비싼 술집이 아니라도 좋소
시장 안, 꼭 시장 안이 아니라도 좋소
돼지국밥집이나 순대국밥집이면 더욱 좋소

술을 사겠다니 부담이 없어 좋지만
주머니엔 술값을 넣어 가지고 나가겠소
마시다 보면 술값은 내가 낼 수도 있고
아니면 2차를 내가 내더라도
그게 술 마시는 기분 아니겠소

한 잔이라고 했지만
한 병씩은 마십시다 그려, 그리고
기분이 동하면 한 병 더 시킵시다

혹시,
술값을 내가 내어도 나무라지는 마오
술 사려다 대접받으니 그대가 좋을 것이고
대접받으려다가 내가 대접을 했으니
내 기분도 좋을 것이라오

날 부르려거든
그냥,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만 하소
어제 과음했어도 나가리라
내일 과음할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나가리라.
(김종환·의사 시인, 1951-)


+ 몸 성히 잘 있거라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권석창·시인, 경북 순흥 출생)


+ 소주 한 병과 노숙자

가을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물기 축축이 베어나는 
지하도 계단 모서리에 쭈그리고 앉아 
김 오르는 사발 면을 앞에 두고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 
돈이 없었을 텐데 착한 이가 건네었나 
깍지 않은 수염 
감지 않은 머릿결 
수염을 깍지 않아도 되고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소주를 마신 것은 그가 아니라 
그 인생이 마신 것이었다 
한 병의 소주를 앞에 두고 
평생을 부어내어도 다 쏟아지지 않을 
허기진 인생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기아(饑餓)에 대한 
욕심덩어리를 버리고 
사발면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넉넉한 식탁을 꾸미며 
그것만이 필요한 것이라고 
여분의 길이 남아 있지 않듯 
그렇게 사는 것이 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곳에 있었다 
(황라현·시인)


+ 소주

나를 빼닮아 잠잠히 
투명한 영혼의 그대여

삶이 즐겁고 기쁠 때  
마음이 힘들고 외로움에 겨울 때면
얼마든지 나를 들이켜도 좋으리

언제든지 그대 가까이 
그대의 호명(呼名) 기다리고 있나니

그대 천 원 짜리 낡은 지폐로
나를 찾아와서

동그랗게 이 몸 안아 주면
나 그대의 좋은 벗 되어주리

애오라지 하나
간절한 소원 있다면

내가 행여 그대의 몸에 
몹쓸 독이 되지 않는 것

그대의 귀한 생명을 응원하는
맑고 순수한 기운이 되는 것

그래서 그대와 나의 
생명의 빛깔이 서로 닮아가는 것
(정연복,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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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김소월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났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 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스러지는 검은 연기,

다만 타붙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어.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김소월이 술꾼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애연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김소월이 일본 유학을 갔다 관동대진재로 인해 중도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스승인 김억친구 나도향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다김억의 회고에 의하면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김소월을 보고 친구들이 자네는 왜 꼭 비싼 카이다만 피우는가?” 하고 묻자 김소월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담배는 왜 피우오담배는 일종 사치요사치하는 바에야 사치스러운 사치를 하는 게 옳지 않소나는 값비싼 사치는 해도 값싼 사치는 하기 싫소.”

김소월이 사치를 즐겨한 사람은 아니었다그의 숙모 계희영에 따르면 부잣집 아들이니 좋은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해도 허름한 바지저고리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그런 김소월이 담배 만큼은 최고급을 고집했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에 전매국을 설치하고 지정된 곳에서만 담배를 팔도록 하는 연초 전매령을 실시하면서 처음 내놓은 담배가 카이다라고 한다카이다의 가격은 한 갑에 15전이었는데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피우던 메이플이나 마코 같은 담배가 5전이었다고 하니 꽤 비싼 담배였다그런데 하필 카이다는 해태(獬駝)’를 일본말로 부르던 이름이다일본인들이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를 못마땅하게 여겨조선 사람들이 해태라는 이름으로 된 담배를 피우면서 해태의 기운을 연기처럼 흩날려 버리게 하려는 의도를 담아서 만든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확증을 댈 수 없는 추론일 뿐이기는 하나 담배 이름치고 특이하기는 했다.

김소월이 그런 소문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카이다를 고집한 건 위악이었을까? ‘값비싼 사치를 통해 식민지 조선 청년의 절망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였을까이제 와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니그 속내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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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香氣)로운 때를

고초(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김소월은 술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사랑했다기보다 알코올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듯합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몇 달 만에 관동대진재로 돌아온 김소월은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그대로 주저앉고 맙니다. 그 후 김소월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지 못해 좌절감에 빠지고, 더구나 자신들의 협조자로 만들기 위한 일경의 감시와 회유에 괴로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소월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 술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술을 마시긴 했지만 웬만해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김소월이 주막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주정을 하는 단계까지 발전합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처가가 있는 구성으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지만 지국 운영도 뜻대로 되지 않고 술만 늘 뿐입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술을 가르쳐서 부부 술꾼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어깨를 걸고 나란히 주막으로 향하는 김소월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을까요, 아니면 주책으로 보였을까요? 몇 년을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시도 거의 쓰지 않고,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지낸다는 소문이 중앙문단에 퍼질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김동인이 쓴 글에 김소월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그는 말할 수 없는 술주정꾼이 되어 붓을 잡을 생각도 안하며 붓을 잡는다 하여도 그때의 그 힘이 그냥 남아 있을지가 문제라는 것이 어떤 그의 친지의 말이다.

-매일신보, 1932.9.27

 

김소월이 술을 직접 제재로 삼아 쓴 시는 두 편인데, 작품성으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되어 가는 일에 부채질 하고

안 되어 가는 일에도 부채질합니다.

그대여, 그러면 우리 한잔 듭세, 우리 이 일에

일이 되어 가도록만 마시니 괜찮을 걸세

-「술」 4연

 

못 먹어 아니 죽는 술이로다

안 먹고는 못사는 밥이로다

別하다 이 세상아 몰을이라

술을 좀 답지않게 못 여길까

-「술과 밥」 1연

 

둘 다 유고시로 발표된 작품이라 창작의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모두 후기 시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술」에서는 적당히만 마시면 큰 문제없을 거라고, 「술과 밥」에서는 술보다 밥이 중요하므로 술 나눌 친구보다 밥 나눌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식의 새로움도 없는데다 말을 부리는 맛도 별로인, 그저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한 작품들입니다.

그에 반해 1925년에 펴낸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님과 벗」은 훨씬 맛깔스러우면서 낭만성이 살아 있습니다. 설움을 함께 할 벗과 사랑을 나눌 님이 곁에 있다면 마시는 술이 얼마나 향긋할까요?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라고 외치며 한껏 흥에 취한 김소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 유쾌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이 예비한 결말은 행복이 아닌 불행 쪽이어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든 김소월이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김소월의 비극적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도 ‘그대여, 불러라, 나는 마시리’ 호기롭게 술잔을 드는 시인들의 모습이 술집 창문에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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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하면 즉각 진달래꽃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많은 이들에 의해 논의되었다그에 반해 시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에 대한 언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왜 하필이면 영변에 있는 약산일까소월이 자란 고향인 정주 곽산의 남산봉에도 해마다 진달래는 피고 지고 했을 텐데.

약산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구룡강 왼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산에 약초가 많고 약수가 난다고 해서 약산(藥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흔히 약산동대(藥山東臺)라 부르기도 한다동대라는 말은 영변이 옛날 무주(撫州), 위주(渭州), 연주(延州)라는 세 고을로 나뉘어져 있을 때 무주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약산보다는 약산동대라는 말이 더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약산동대는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봄이면 진달래가 온산을 붉게 물들인다약산동대와 관련해서는 많은 전설과 민요가 있는데고을 수령의 외동딸이 약산에 갔다가 절벽에서 그만 강으로 떨어져 죽고그 죽은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소월이 약산 진달래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그런 까닭에 약산 진달래를 시에 끌어들였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말고도 약산 진달래를 소재로 한 문인들의 글이 여러 편 있다김억과 노자영은 기행문을 썼고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은 약산동대와 약산동대가」 두 편의 시를 남겼다그중의 한 편을 잠시 살펴보자.

 

약산동대

 

김동환

 

내 맘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영변에 약산동대 진달래밭에

봄바람 가로 타고 흘러가노라

 

거기엔 서도각시 바구니 이고

멀리 간 님 생각에 노래 부르며

고운 꽃 골라 따서 한 아름 담데

 

바구니 가득 차면 잎은 버리고

꽃만 골라서 화전 지지고

나중엔 꽃다발 틀어얹고 오데

 

이 시는 소월의 진달래꽃보다 나중에 쓰였다. ‘멀리 간 님 생각’ 같은 부분을 보면 소월의 영향을 받은 듯도 한데시에 담긴 정서가 너무 단순하고 소박해서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김억은 훗날 약산동대를 다녀온 뒤 기행문을 쓰면서 진달래와 소월의 시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다.

 

 

그리고 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 (중략)

이별의 원한(怨恨)을 이렇게 담아 놓고서 하다 많은 진달래꽃에서 하필 약산동대의 진달래를 따다가 가시는 님의 길에 뿌려 놓을 것이 무엇입니까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같은 진달래꽃이건만 약산의 그것이라야 보다 더 힘 있게 보다 더 감동 있게 우리의 맘을 다져주기 때문입니다이리하여 약산동대는 진달래와 함께 그 이름이 높아집니다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약산동대의 진달래꽃은 언제나 우리들의 맘속에서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외다.

-약산동대 영변(반도 산하삼천리사, 1944)

 

우리는 영변’ 하면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떠올리게 된다. 영변의 약산동대가 그토록 풍광이 뛰어나다고 하는데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언제나 약산동대에 올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어볼 수 있으려나그날을 생각하며 우선은 약산동대라는 지명이라도 가슴에 새겨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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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이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모작(模作)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 지도 꽤 되었다일반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온 사실이다진달래꽃의 일부 구절이 외국시의 영향 아래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이양하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근거로 든 작품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1865~1939)가 지은 하늘나라의 옷(원제: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이라는 시이다이 시는 김억이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태서문예신보』 11(1918.12.14.)에 발표했다가 그 후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에 실었다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개벽에 처음 실린 게 1922년이니,예이츠의 시가 미친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비교를 위해서 당시에 발표된 전문을 소개한다.

 

내가 만일 광명의

황금백금으로 짜아내인

하늘의 수 놓은 옷,

날과 밤또는 저녁의

푸르름어스렷함그리고 어두움의

물들인 옷을 가졌을지면

그대의 발아래 펴 놓으련만,

아아 가난하여라내 소유란 꿈밖에 없어라.

그대의 발아래 내 꿈을 펴노니,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가만히 밟고 지내라.

 

그대의 발아래 펴 놓으련만’, ‘그대여가만히 밟고 지내라’ 같은 부분이 진달래꽃과 거의 흡사한 발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발아래 펴 놓는 것이 이 아니라이라는 점만 다를 뿐기본 맥락은 동일하다이양하는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304(1962.5.7)에 기고한 소월의 진달래와 예이츠의 꿈이라는 글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예이츠의 시 발표된 것이 1899년이고 보니 소월이 거기서 시상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그러나 꼭 그랬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혹 그랬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환골탈태라 할 것으로 이것이 소월의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감쇄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양하의 말처럼 김소월이 이 시를 보았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자신의 시보다 먼저 발표되었고 스승인 김억이 번역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리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그렇게 볼 때 두 작품의 영향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소월은 예이츠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을지언정자신만의 언어와 운율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냄으로써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를 넘어서 자신만의 시를 만들어 냈다이러한 점은 이양하를 비롯해 그 후 논의에 참여한 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실 근대시 초기에는 외국 시인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작품들이 꽤 많다비단 김소월뿐만 아니라 흔히 최초의 신체시라고 불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바이런의 시를 모작한 것이며심지어 정지용의 향수가 미국의 요절한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1874~1904)의 시 추억(Mnemosyne)과 흡사하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김소월의 작품을 비교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해 온 이들은 김소월이 아일랜드의 황혼파 시인들인 예이츠와 시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인 작품들을 들어 논증하고 있기도 하다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어디까지가 모방이고 표절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문제는 발상의 유사성이나 몇몇 시어의 일치 같은 것들이 아니라 얼마나 새롭게 변용 내지 재창조했느냐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아주 흔한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우리나라의 근대시 양식 자체가 서양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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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겨워와 ()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겨워가 아니라 ()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출처] 김소월 시 재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겨워와 ()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겨워가 아니라 ()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미있게 읽기 8 - 역겨워와 즈려밟고’ - 진달래꽃

 

 

진달래꽃에 사용된 시어 중에 역겨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나 역시 그러했지만 달리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지는 않았다. ‘역겹다(-)’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는 뜻을 담고 있다흔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시에 등장하는 임이 정말 그토록이나 화자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일까그런 임을 꽃까지 뿌려가며 배웅하는 게 정상일까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그러던 차에 평론가 심선옥이 웹진 <문장>(2005년 9월호)에 발표한 ()겨워와 ()겨워의 거리라는 글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이 글에서 심선옥은 역겨워를 ()겨워가 아니라 ()겨워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그러면서 김동환의 시 두 편을 예로 들고 있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위 시들에 쓰인 역거워는 문맥상 분명히 ()거워의 뜻을 담고 있다풀어 쓰면 힘겨워정도가 될 터이다물론 역겨워와 역거워는 차이가 있다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맞춤법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이 쓰였을 수도 있다문제는 역겨워나 역거워가 힘겨워의 뜻으로 얼마나 쓰이고 있었는지를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는 일이다오분 간과 바비도의 작가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왕건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1981년 12월 28일 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짐은 말에 싣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자기 잔등에 지는 것을 역거워한다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산야를 뛰는 보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말을 잃은 기병의 실태다.

 

이 글에 쓰인 역거워도 ()거워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고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 출신이다둘 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경도에서는 역거워가 제법 널리 쓰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그렇다 해도 김소월이 평안도 출신임을 생각할 때김소월의 역겨워가 역거워(-)’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아직 충분한 논거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역겨워를 힘겨워의 뜻으로 해석하고 진달래꽃을 읽어보면 시를 지배하는 감정의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 때문에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소월다운 방식에 들어맞는다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진달래꽃에 쓰인 시어 중에 역겨워보다 더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즈려밟고이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즈려밟다를 지르밟다의 잘못이라고 풀어 놓았다그리고지르밟다’ 항목을 보면 위에서 내리눌러 밟다라는 풀이가 나온다평안도에서 즈려밟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 없어 평안도 방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그냥 잘못된 말이라고 해 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1983)에서 즈려밟고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이것은 정주 방언의 지레’ 또는 지리에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다. ‘지레밟다’ 또는 지리밟다는 발밑에 있는 것을 힘을 주어 밟는 동작을 가리킨다.

-심상(1983년 1월호)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앞부분에 나온 사뿐히와 자연스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지닌다김소월이 죽은 뒤 김억이 그의 시들을 모아 펴낸 소월시초에 지레 밟고라고 고쳐놓았는데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라 그 지방에서 쓰이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즈려밟고가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그래서 권영민 교수는 즈려밟고를 지레 밟고로 풀이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어떤 기회나 때가 무르익기 전에 미리라는 뜻인 지레에 비추어 남이 밟고 가기 전에 먼저 밟고로 풀이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들이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냥 문맥에 비추어 눌러 밟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는데문제는 즈려밟다는 표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그래서 나는 즈려밟다를 김소월이 만든 신어(新語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한다시인은 말을 창조하기도 하는 사람이고시인이 처음 써서 퍼뜨린 말들도 있기 때문이다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나 맨가을’ 같은 시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처럼 말이다김소월의 시에서 비롯한 즈려밟고라는 말이 일상에서 제법 널리 쓰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이제는 사전에 어엿한 우리말 단어로 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진달래꽃② |작성자 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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