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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의 불가사의와 자의적(恣意的)태도
///김상현
1. 글에 들어가며
일상의 기쁨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시인들로부터 배달되어 온 시집을 읽는 재미이다. 시집을 읽다보면 수 백리, 수 천리 밖에서 시집을 보내 준 시인의 삶은 물론 따뜻한 숨결까지도 느낄 수가 있어서 좋다. 그것은 소설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소설은 글을 쓴 작가 보다는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떠오르지만 시집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예리한 지각과 삶의 열정이 담겨져 있어서 마치 인격체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것이 독자가 시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근자에 정독을 거듭해도 시집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난해한 시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암호화된 언어의 퍼즐과도 같아서 어렵게 한 편의 시를 이해하고 나면(물론 나의 자의적인 이해는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지만) 다음 페이지에서 다시 지독하게 어려운 퍼즐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서 시집이라기보다는 암호를 해독해야하는 무슨 게임과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시인의 삶이 독야청청하는 것은 보기가 좋은데 은유와 비유와 상징으로만 표기된 난해한 시로 인해 독자가 없이 고답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모름지기 좋은 시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에서 시인과 독자 간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의식에서와 같이 시인의 존재를 독자가 인식할 때 비로소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김춘수의 '꽃'이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바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처럼 독자가 시를 이해했을 때만 시는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라는 실존의식을 갖게 된다. 물론 은유와 상징과 같은 표현상의 기법이 다양한 현대시를 일반대중이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시인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선 시의 난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난해성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
시의 난해성에 대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성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한 다다이즘1)과 데카탕2)의 예술사조와 함께 초현실주의가 등장한 이래 시의 난해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의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과학기술의 만능화 의식과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의식이 만연되면서 인간이 노동에너지로 계량화 되어지는 현실에서 새롭게 등장한 해체주의의 영향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시의 난해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미래파의 특징은 매우 개인적인 일상을 비트는 것 외에 뚜렷한 의식을 찾을 수가 없다. 원래 미래파라는 용어는 이탈리아 시인이며 잡지의 편집인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프랑스의 신문 〈피가로〉에 "박물관과 도서관을 파괴할 것이며 도덕주의, 여성다움, 모든 공리주의적 비겁함에 대항해서 싸울 것"을 선언한 기고에서부터 출발되었는데 1909년에 사용한 '미래파'라는 용어는 미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발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최근 한국에 나타난 소위 미래파는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미래파와 어떤 공통점이나 상이점을 분명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만 획일적인 전자정보사회, 경제지상주의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싶다. 이들은 남과 다르게 쓰면 쾌감을 느낀다며 시인이 얻는 만족도가 중요하지 독자나 평론가는 그 다음이라는 말을 한다. 관심을 끌기 위한 극히 의도적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독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는 시인이 자기만족을 위한 배설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엽기적, 자극적이고, 환상적이고, 소통되지 않는 의식구조와 낯선 언어들이 난무하는 이들 시는 내가 보기에 시시껄렁한 개인사적인 넋두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현대인의 삶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들 시는 난해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고민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소통이 부재한 다른 쪽의 난해시이다. 현자의 입장에서 계몽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 시집이라기보다는 지혜서 같기도 하고 절대자를 대변하여 계시를 하는 듯한 시편들을 보면 묵시록 같기도 한, 전체적으로 난해한 시집이 던지는 의미는 내게는 생게망게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시는 삶에 대한 진지한 인식인 동시에 언어로 불러지는 노래인데 삶의 현장과는 동떨어진 시편들이 독자에게 따뜻하게 다가설 수 있겠는가. 언어는 예언적, 주사적, 치유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행위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우주의 생명의 숨결이 스며있는 언어, 그것에 대한 통찰이 없이 단순한 언표화의 도구로서만 언어를 대해서는 안 된다.3) 는 말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막중한 책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시에는 시인의 생생한 체험이 담겨져 있어야 함은 시인의 진정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시 이전에 시인은 기능적, 사회적 책무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 민중이 시와 멀어지는 이유는 소통부재에 있다. 시니피앙이 되었든, 시니피에가 되었든 간에 시가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무의미는 일종의 분열증적 사고를 낳는다. 해체시가 곧 난해시라고 볼 수는 없다. 자칫 시의 경건성을 저해할 수는 있지만 해체시에는 전통서정시가 간과한 해학과 현실에 대한 저항이 들어있다. 난해시의 특징은 독자가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의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작가만의 심오한 뜻은 헤아리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유의 배경에는 시인의 철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인류학적 사고가 담겨져 있는데 체계화되지 않은 난해시를 과연 대중이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감동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의구심이 든다. 보다 이해가 되지 않은 점은 평자들이 왜 열광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솔직하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나에게는 시를 해부하는 기술은 없다. 이 같은 시를 해부하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얄팍한 지식을 뭉텅 거리로 포장해서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기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는 이 난해한 시집들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시인과 독자와의 소통부재이다. 실로 난해함이란 독자가 지각할 수 없음을 말한다. 시가 인식과 표현이라고 볼 때 시인 개인이 지고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하더라고 독자가 지각할 수 없는 표현이라면 이는 보편적 진리를 벗어나 개인적인 상징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독자는 시인에게 잠언이나 묵시를 요구하지 않는다. 삶의 이해와 사랑의 발견, 사람과 사람끼리의 어우러짐과 따뜻함을 요구한다. 시는 예수의 산상보훈처럼 산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민중의 삶을 떠난 외침은 한낱 소리에 불과하며 시작의 본류에서의 일탈된 행위이다. 시인은 삶이 똥밭이면 민중과 함께 똥밭을 구르면서 반 발짝씩 앞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를 배태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지적 오만 내지 경멸이 그 밑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난해시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만 소유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역사적이며 반민중적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는 이점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4) 결국 난해한 시는 대중적 바탕을 잃게 되며 종래에는 시의 사막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둘째로 시인과 시인과의 거리두기이다. 장차 살아남는 시는 이것일 뿐이라는 오만은 경계해야 할 독소이다. 갑작스런 천지개벽은 오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느리게 변한다. 생물의 유전자를 포함해서 진화의 속도는 아주 느리다. 시도 시대적 환경에 따라 아주 완만히 변화한다. 인류역사에 시는 상고시대로부터 존재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난해한 시를 쓰면서 시대가 천재를 요구하는 시대에 천재가 없다고 하는 말 속에는 천재를 몰라본다는 오만이 숨겨져 있다. 이 같은 독선의 뿌리는 모든 시인들은 엇비슷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듯하다. 하지만 시인이 사유하는 세계는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모두가 길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근원적세계에서 타인을 본다면 모두에게서 낯섦과 경이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5) 한 권의 시집에는 한 권 분량의 시인의 삶이 녹아져 있다. 고뇌와 희락 그리고 성찰이 종이에서 발원한 강물이 되어 읽은 이의 심금을 적시며 공명(共鳴)하게 한다. 시인이 시집을 펴내는 행위는 배설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보여 주는 행위예술이다. 시인은 가슴 속에 있는 밀어들을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며 가난을 털어 자비(自費)로 시집을 낸다. 이렇게 출간 된 시집을 두고 이 속에서 나름의 가치를 지닌 시가 없다는 식의 평가절하는 시인에 대한 모독이다.
세 번째로 시적감수성을 간과한 가르침이다. 시는 정서적 함축성과 직관력이 아주 중요하므로 지적학습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시 교육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바 있다. 즉 한 편의 시를 놓고서 학교교육은 살아 숨 쉬는 시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기보다 은유법과 상징법을 찾아 낱낱이 해부해 버리고 만다. 시를 대할 때에는 시인이 언어 속에 숨겨 둔 비밀의 열쇠를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시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고 맥박이 뛰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언어로 된 생명체다.6) 타고난 감수성과 감각적 지각을 갖춘 좋은 시인으로서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환상과 시적상상력을 강요하고 언어의 뒤틀기 기술을 가르침으로서 오히려 생명의 싹을 잘라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시인은 언어를 지키고 키우는 목장의 목동과 같다. 목동이 지켜야 할 가축을 잡아 이 부위는 등심, 저 부위는 목살, 이 편은 등골이라고 해부해버리는 순간 가축은 생명이 없는 한낱 고깃덩이가 되고 만다. 이것은 생명을 지키는 목동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도축업자나 할 일이다. 시를 해부하는 기술만을 가르침으로써 시도 죽고 시인도 죽게 하는 죽음의 학습은 깊은 반성을 요구 한다.
4. 글을 맺으며
문제는 시에 있지 않다. 사람이다. 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는 것인가? 바로 보편적 진리에 대한 경건함이 사라졌다는데 근원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지자 보편적 진리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부류들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사회현상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모든 진리를 배척하고 삼라만상을 통틀어 오직 '나'의 주장만이 정당하다는 왜곡된 인간주의, 나는 이것을 '극인간주의(極人間主義)hype humanism'로 이해하고 싶다. 이들 부류들은 시인으로서 겸허함이나 자중함이 없이 '내 자신이 하는 말이 최고다'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내 시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식의 지적테러를 도처에서 자행하고 있다. 환상과 환청, 그것은 종교적 신비체험이나 정신분열 증세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편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시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이 떨림은 키에르케고르는 신과의 조우로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넘는 순간으로 생각했다. 바라건대 난해시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작가의 순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작가를 아끼는 시인이나 독자를 위해 당연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 즉 하나의 사물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용 속에 있다고 강조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삶과 괴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특히 시어로서 사용될 때에는 시인의 치열한 삶의 경험적 기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야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요소를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언어의 대상(말걸이)과 밖으로 말해진 언어, 전달코자 하는 내용 그리고 화자의 의사표현을 들고 있다8) 시에 있어서 이는 곧 언어의 대상인 독자와 표현수단인 문자와 시인의 인식과 표현으로써 시작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아무튼 난해시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호성과 혼돈 속에 방치된 언어의 실타래를 명징하게 풀어 보이면서 존재의 심연을 진지하게 드러내는 시인이 다시 이 땅의 중심에 서 있게 되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다.
1) 사회적, 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운동.
2) 기존사회의 도덕을 무시하고 예술의 목적을 일시적인 육체적 향락추구에 둔 19세기 낭만주의 쇠퇴에 따른 문학사조.
5)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테커」동녁 2004. 95쪽
6) 나탈리 골드버그 저, 권진옥 역,「뻣속까지 내려가 써라」한문화 2006,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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