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이상(李霜, 1910~1937)은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으로, 한일 합방이 일어나던 해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상은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1914년(5세)에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 때 백부는 총독부의 기술관이었는데, 자상한 백부와 달래 백모는 이상을 달갑지 않게 대했다고 한다. 이상은 백모가 무서워 “슬금슬금 문 밖으로 숨었”다고 한다.
이상은 1918년(9세)에 신명학교에 들어갔는데, 특히 지리와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이후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그림을 열심히 그려 교내 미술 전람회와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상을 받기도 한다. 보성고보에서 이헌구, 임화 등과 동기였으며, 1년 후배로는 김기림, 김환태가 있었다.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고학을 해야 했던 이상은 1929년(20세)에 백부의 설득대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간다. 이상이 건축 용어와 숫자,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한 것 등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그런데 이미 이 시기부터 이상의 내면에서 현실 도피나 자살을 추구하는 병적인 심리가 나타난 듯한다. 이 무렵의 소설 <12월 12일>, <휴업과 사정>과 시 <선에 관한 각서> 등을 보면 그러한 이상 심리가 다량 발견된다. ‘이상’이라는 필명을 쓴 것도 경성고등공업 때부터였다.
이상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은 1931년(22세)의 <이상한 가역 반응>이다. 이후 1933년(24세)에는 가족과 합쳤다가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나오고, 백부의 유산으로 ‘제비’ 다방을 개업하면서 온천 여행 중 만난 술집 여급 금홍을 불러 들여 마담으로 앉힌다. 두 사람은 곧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 때 금홍은 겨우 스물 두 살이었고 이상은 스물 네 살이었다.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과 어울리던 이상은 1934년 (25세) ‘구인회’에 가입하고, <오감도>, <혈서 삼태>, <산책의 가을> 같은 파격적인 실험적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아 문제 작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다방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제비’는 1935년(26세) 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인사동의 ‘카페 쓰루’, 종로 1가에 ‘69’, ‘무기’, ‘맥’ 같은 다방을 계속 열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는 동안 금홍은 바람을 피우며 다시 술집에 나가더니, 결국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얼마 후 이상은 다시 여급 출신 권순옥과 사귀지만, 정인택이 그녀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을 맺어 주기도 했다. 정인택과 권순옥은 1935년 바로 결혼한다.
이상은 이후 셋방을 전전하면서 방세를 못 내 쫓겨나기도 하고, 동생의 봉급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거듭된 다방 경영 실패, 쇠잔해진 몸, 연애의 후유증 등으로 고독을 느끼던 이상은 김유정에게 같이 자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그러던 중 1935년(26세) 말,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구본웅의 서모 소생인 변동림을 만나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리고 을지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이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창작에 매달려 1935년(26세) <정식>, <지비>, <찬손 여정>, 1936년(26세) <작가의 호소>, <지비 1, 2, 3>, <이단> 등의 수십 편을 마구 쏟아낸다.
1936년(27세) 이상은 김기림과 함께 프랑스로 가겠다는 꿈을 안고 도쿄로 간다. 그곳에서 하숙집을 정해 놓고 <종생기>, <권태>, <실락원> 등을 써 내는데, 결핵이 계속 악화되어 프랑스 행은 무산된다. 그러던 중 1937년(28세) 2월 일본 경찰에 불령선인으로 검거되자 폐결핵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병상에 눕는다. 아내 변동림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도쿄로 갔으나, 결국 4월 17일 28세의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이었다.
1933년(24세) 발표한 작품으로, 이상이 즐겨 사용한 ‘거울’ 모티프를 중심으로 거울 밖의 나, 즉 현실 속의 자아와 거울 속의 나, 즉 내면의 자아 사이의 갈등, 다시 말해 자의식의 갈등을 드러낸 작품이다.
<거울>은 ‘거울’이 대상을 거꾸로 비춘다는 점에 착안하여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의 분열을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과 같이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상은 거울 밖에 있는 현실적 자아와 거울 속에 있는 내면의 자아의 갈등, 즉 자의식의 갈등을 표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반성한다.
1934년(25세)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작품으로, 독자들로부터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항의를 받아 제15호를 끝으로 게재를 중단하고 만 시이다. 우리 현대 문학사 1백 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3인의 아해’에 대해서는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13인’, ‘위기에 당면한 인류’, ‘해체된 기아의 분신’, ‘이상 자신의 기호’, ‘인간 역사의 한계성’, ‘일제하의 13도’, ‘언어 도단의 세계’ 등 무수한 해석이 나왔지만, 그 어떤 해석도 ‘13인의 아해’의 상징성을 다 풀어내지 못했다.
한편 <오감도>에는 여러 측면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이 사용되었다. ‘조감도’의 ‘조(鳥)’를 ‘오(烏)’로 대치한 것부터가 그렇다, 불길함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조감도를 내려다보듯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적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애초에 시를 낯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13’이라는 불길한 숫자, 그리고 ‘아이’를 낯설게 표현한 ‘아해’ 역시 낯섦을 조장하여 시 전반에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1935년(26세)의 작품이다. 획일화된 근대 문명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던 1930년대에, 시대를 상징하는 백화점과 시계를 제재로 하여 그 성격을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백화점은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간으로, 재래시장과 달리 직선과 사각형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자 한 층 한 층 개성 없이 규격화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백화점의 폐쇄성은 단조롭고 획일화된 문화를 직접적으로 상징한다. 또 ‘시계’는 쉼 없이 시간을 가리키지만 인간의 삶의 흐름을 재지는 못하는 근대 문명의 첨병이다. 화자는 이 백화점과 ‘시계’를 통해 근대 문명의 무의미함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 병으로 죽던 해인 1936년(27세)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이상의 다른 시처럼 집의 모습을 낯설게 표현하고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인 ‘가정’을 제재로 하며 ‘제웅’처럼 변해가는 자아의 무력감을 그려낸 시이다.
‘제웅’은 집 밖에 내다버리는 주술적 도구를 말한다. 흔히 집에 아픈 사람이나 살이 낀 사람이 있으면 제웅을 만들어 집 밖에 버리곤 했는데, 화자는 자신이 바로 그 ‘제웅’과 같다고 여기고 있다. 이상은 <문벌>에서도 드러나듯 자신을 유교적 가족 이념에 희생된 존재로 간주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을 제웅으로 여기는 이상의 자의식, 이른바 ‘제웅 의식’이 문학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1936년(27세) <조광>에 발표된 작품이다. 자동기술법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시공간의 전환을 무시함으로써 자폐적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말 부분의 정오 사이렌 소리는 ‘나’의 내적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37년(28세) 작품으로, 이상의 유작 중 하나이다. <날개>와 같은 계열의 신심리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화자의 잠재의식이 도처에 불쑥불쑥 표출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는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정희’를 사랑하는 주인공 ‘나’의 모습을 자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상 자신의 어두운 개인사적 면모를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종생기>는 이상 스스로가 거부하려 했던 윤리관에 얽매여 충격 받고 괴로워하는 또 다른 이상의 모습이 주인공 ‘나’를 통해서 철저히 해부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더한 내면의 어둠과 감동을 자아낸다. 이 소설에서 특기할 점은, 화자인 ‘나’가 바로 이상 자신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나’가 자기 인생과 죽음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는, 자기 인생에 대한 자학과 그 극심한 자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냉소의 극치를 보여 준다. 끊임없이 자신의 부정을 감추는 정희의 부정한 행실이, 그 자신에게 탄로 나자 ‘나’는 자가당착에 빠져 버린 것이다.
거울의 시인 이상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만 26년 7개월을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시인 이상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이상의 시는 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지금 현재에도 가장 문제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탈장르, 새로운 실험과 전위 미학 등의 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장 최전방에 서 있던 시인이다. 이미 한 세기 일찍 모든 문학적 실험들을 가장 개성적인 문학적 태도와 신념을 가지고 구현해 나간 시인이다.
2010년은 시인 이상이 탄생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많은 문학 단체와 지자체와 예술 각 방면에서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교하아트센터에서는 이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상이 문을 열어 가게를 시작했던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을 갖는다. 이상이 차렸던 ‘제비다방’은 2년여 만에 문을 닫아 실패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유정, 박태원 같은 문화 예술인들이 문우의 정을 나누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장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비다방은 유럽의 살롱과 같이 중요한 문학적 생산처였으며, 문인들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더불어 이상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연내 마련된다고 한다. 이상 100주기를 추모하는 학술행사나 출판 등도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출간된 이상 전집뿐 아니라 이상 관련 서적이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가수 조용남도 이상 시 해설서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를 최근 출간했다.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는 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 한국의 예술가 20여명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이상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문화예술기획모임인 ‘랩 201’은 파리시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 라 제네랄과 공동으로 ‘2010 파리/서울 이상-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만큼 이상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 건축가, 예술 곳곳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력을 끼친 문인이다.
이상의 삶은 괴팍하기로 소문나 있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으며,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이상은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 백부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곧 그만두었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오감도(烏瞰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재시는 한국 문단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인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은 이천 점의 작품 중에서 삼십 편을 고르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문법 파괴, 띄어쓰기 무시, 이해 불가능한 수사 등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상의 시에 당황했다.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로 가서 원고를 불사르자”, “작가를 죽여야 한다” 등의 격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상의 시를 연재하기로 한 작가 이태준은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만 했다. 이태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오감도>는 30회 연재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15회로 끝나고 만다.
1937년에는 사상불온 혐의로 동경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러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이상의 대표적인 시는 역시 <오감도>이지만,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으로 인해 시의 유명세에 비해 독자들에게 두루 읽혀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상의 시 <거울>은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시가 아닐까 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몰으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 전문
위의 시 <거울>은 식민지 시절 지식인의 고뇌를 초현실적인 기법과 무의식의 언어로 표출해내고 있는 시이다. 거울은 소리가 없으며,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는 악수를 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인지함으로 인해 지식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분열과 착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이 시가 착란의 언어라고 하지만, 시의 구조를 볼 때 이성적으로 잘 질서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에서 보여주는 거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대비해서 보여줌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울이라는 연결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이상의 성찰이 개성적인 까닭은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개성적인 주체를 서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감성과 보편적인 깨달음을 줄곧 받아왔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전혀 낯설고, 다소 충격적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다른 자신을 반추하고 비춰보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성찰을 넘어 미학적 체험의 즐거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여름 이상의 시를 읽으며 ‘이상한 가역반응’을 느끼며, ‘무한건축육면각체’의 비밀들을 탐사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_ 논산문화,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