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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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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소월과 그 사랑의 궤적
2016년 01월 07일 03시 56분  조회:7337  추천:0  작성자: 죽림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오랫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김소월은 설움과 애한(哀恨)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비롯하여 ‘못잊어 생각나겠지요(제목은 思欲絶)’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 하였고, 김동인(金東仁)·김찬영(金贊永)·임장화(林長和)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하여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발표하였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식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따이렌,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떻게 해서 평북 영변땅에 오게 됐고, 민족 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당시 진주는 관기 제도의 폐지로 교방도 따라 폐지되었고, 진주기녀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직업형태로 바꾸기 위해 기생 조합을 조직했다. 이 기생조합이 다시 권번(券番)으로 바뀌어 교방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채란은 진주 권번에서 정식 가무를 익힌 기녀는 아닌 듯하다. 손님을 따라 떠도는 들병이(삼패기생)였다고 짐작된다.
13세때 전라도 행상에게 팔려 팔도를 떠돌면서 ‘뿌리없는 몸’으로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춤과 노래를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부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붓들면 님이지.

花紋席 돗자리
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발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三千里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이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 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이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는 “‘팔베개 노래’가 김소월의 붓에 의해 표현되었다 함은 온당한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김소월은 그의 창작 노트에서 이 팔베개 노래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때를 빌어 채란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팔베개 노래’ 역시 김소월의 다른 창작시들과 마찬가지로 발표지면마다 개작과 첨삭을 거듭하여 내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팔베개 노래’의 원작에 해당하는 노래를 기생 채란이 불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해 팔베개의 노래가 채란이 불렀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채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겨줄 사람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다.
“집 뒷山 솔밭에/버섯 따던 동무야/어느 뉘집 家門에/시집가서 사느냐.//嶺南의 晉州는/자라난 내故鄕/父母없는/故鄕이라우.”
평범한 부모를 만나 고향에서 평범한 사내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채란의 바람이 노래속에 녹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돌아갈 故鄕은/우리 님의 팔베개” 고향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오직 자신을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님의 팔베게만이 채란의 안식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주 기녀 채란은 교방의 기녀도, 권번의 기녀도 아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들병이 기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리땅 영변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면서 부른 노래 곡조가 민족의 대시인이라고 불리는 김소월의 마음에 메아리 져서 아름다운 민요시로 재탄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진주 기녀들의 또 다른 멋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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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상대를 다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겪고 도망치다시피 돌아와 술과 여자, 아편으로 점철하는 삶을 사는 소월, 그리고 영변의 어느 색주가의 떠돌이 기생 채란. 두 사람의 이야기는 1924년 진달래꽃 필 무렵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디 한 곳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의 팔베개에 의지하고 싶지만 사랑조차 하룻밤이면 무너져 내릴 것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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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팔베개 노래調(조)  _  
 
이러구러 제 돌이 왔구나. 지난 甲子(갑자)년 가을이러라. 내가 일찍이 일이 있어 영변읍에 갔을 때 내 성벽에 맞추어 성내 치고도 어떤 외따른 집을 찾아 묵고 있으려니 그곳에 한낱 친지도 없는지라, 할 수 없이 밤이면 秋夜長(추야장) 나그네방 찬자리에 갇히어 마주 보나니 잦는 듯한 등불이 그물러질까 겁나고, 하느니 생각은 근심되어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잠 못들어 할 제, 그 쓸쓸한 정경이 실로 견디어 지내기 어려웠을 레라. 다만 때때로 시멋없이 그늘진 뜰가를 혼자 두루 거닐고는 할 뿐이었노라. 

그렇게 지나기를 며칠에 하루는 때도 짙어가는 초밤, 어둑한 네거리 잠자는 집들은 人氣(인기)가 끊였고 初生(초생)의 갈구리 달 재 넘어 걸렸으매 다만 이따금씩 지나는 한 두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고요한 골목길 시커먼 밤빛을 드둘출 뿐이러니 문득 隔墻(격장)에 가만히 부르는 노래 노래 淸怨悽絶(청원처절)하여 사뭇 오는 찬 서리 밤빛을 재촉하는 듯, 고요히 귀를 기울이매 그 歌詞(가사)됨이 새롭고도 질박함은 이른 봄의 지새는 새벽 적막한 床頭(상두)의 그늘진 화병에 芬芬(분분)하는 홍매꽃 한 가지일시 분명하고 律調(율조)의 高低(고저)와 斷續(단속)에 따르는 풍부한 풍정은 마치 泉石(천석)의 우멍구멍한 산길을 허방지방 오르내리는 듯한 감이 바이없지 않은지라, 꽤 사정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윽한 눈물에 옷깃 젖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을레라. 

이윽고 그 한 밤은 더더구나 빨리도 자취없이 잃어진 그 노래의 여운이 외로운 베갯머리 귀밑을 울리는 듯하여 본래부터 꿈 많은 선잠도 슬픔에 지치도록 밤이 밝아 먼동이 훤하게 눈터 올 때에야 비로소 고달픈 내 눈을 잠시 붙였었노라. 

두어 열흘 동안에 그 노래 주인과 熟眠(숙면)을 이루니 금년으로 하면 스물 하나. 당년에 갓 수물, 몸은 기생이었을레라. 

하루는 그 妓女(기녀) 저녁에 찾아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밤 보내던 끝에 말이 자기 신세에 미치매 잠깐 낯을 붉히고 하는 말이, 내 고향은 晋州(진주)요, 아버지는 정신 없는 사람 되어 간 곳을 모르고, 그러노라니 제 나이가 열 세 살에 어머니가 제 몸을 어떤 湖南行商(호남행상)에게 팔아 당신의 후살이 밑천을 삼으니 그로부터 뿌리 없는 한 몸이 靑樓(청루)에 零落(영락)하여 東漂西泊(동표서박)할 제 얼울 없는 종적이 남으로 門司(문사), 香港(향항)이며, 북으로 大連(대련), 天津(천진)에 花朝月夕(화조월석)의 눈물 궂은 생애가 예까지 구을러 온 지도 이미 반 년 가까이 되었노라 하며 하던 말끝을 미처 거듭지 못하고 걷잡지 못할 설움에 엎드러져 느껴가며 울었을러니. 이 마치 길이 자 한 치 날카로운 칼로 사나이 몸에 아홉 굽이 굵은 심장을 끊고 찌르는 애달픈 뜬 세상일의 한가지 본보기라고 할런가.

있다가 이윽고 밤이 깊어 돌아갈 즈음에 다시 이르되 妓名(기명)은 채란이라 하였더니라. 이 ‘팔베개 노래’調(조)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臨時(임시)하여 빌어 그이 親手(친수)로서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 무슨 내가 이 노래를 가져 감히 諸大方家(제대방가)의 시적 안목을 욕되게 하고자 함도 아닐진댄 하물며 이맛 鄭聲魏音(정성위음)의 현란스러움으로써 예술의 神嚴(신엄)한 궁전에야 하마 그 문전에 첫 걸음을 건들어 놓아 보고자 하는 僭濫(참람)의 의사를 어찌 바늘끝만큼인들 염두에 둘 리 있으리오마는 역시 이 노래 야비한 세속의 浮輕(부경)의 일단을 稱道(칭도)함에 지나지 못한다는 비난에 마출지라도 나 또한 구태여 그에 대한 遁辭(둔사)도 하지 아니 하려니와, 그 이상 무엇이든지 사양없이 받으려 하나니, 다만 지금도 매양 내 잠 아니오는 긴 밤에와 나 홀로 거닐으는 감도는 들길에서 가만히 이 노래를 읊으면 스스로 금치 못할 가련한 느낌이 있음을 취하였을 뿐이라, 이에 그래도 내어 버리랴 버리지 못하고 이 노래를 세상에 전하노니 지금 이 자리에 그 옛날 일을 다시 한 번 끌어내어 생각하지 아니치 못하여 하노라. 


이상의 글은 김소월의 것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잘 모를 수 있는 어휘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멋없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멋이 없다. 隔墻(격장): 담 넘어, 淸怨悽絶(청원처절): 사무친 원망이 처절하다는 뜻, 斷續(단속): 끊어짐과 이어짐, 우멍구멍: 이리저리 터져있는 모습, 허방지방: 허겁지겁, 바이없다: 전혀 없다, 후살이: 여자가 再嫁(재가)해서 사는 것, 동표서박: 동으로 서로 떠돌아다님, 門司(문사): 중국의 샤먼, 香港(향항): 홍콩, 花朝月夕(화조월석): 아침에 피는 꽃과 저녁에 뜨는 달, 덧없는 기생의 삶을 일컬음, 諸大方家(제대방가): 각 방면의 여러 大家(대가), 鄭聲魏音(정성위음):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이란 뜻으로서 지나치게 음란한 음악을 일컫는 말, 僭濫(참람): 격이나 분수에 맞지 않음, 浮輕(부경): 가볍고 경박함.)  

김소월이 남긴 시중에 ‘팔베개 노래’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이는 그가 지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 잠시 정을 맺었던 어느 기생의 노래가락이었음을 이 글은 밝히고 있다. 

먼저 ‘팔베개 노래’라는 시부터 감상해보자. 

첫날에 길 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 동무 되지요.

날 끓다 말아라
家長(가장)님만 임이랴
오다가다 만나도
정 붙이면 임이지.

花紋席(화문석) 돗자리
녹燭臺(촉대) 그늘엔
칠십 년 고락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 얻은 팔베개.

조선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삼천리 서도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서도를 
내가 여기 왜 왔나
南浦(남포)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가문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 고향
부모 없는 
고향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내일은 想思(상사)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 놓지 말아라
품 속에 있던 임
길 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금강) 斷髮嶺(단발령)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하라우.

영남 진주는 
내 태어난 고향
돌아갈 고향은
우리 임의 팔베개.

(이 시 역시 약간의 어휘 설명이 필요하다. 

끓다: 물이 끓고 식듯 변덕부림,
녹燭臺(촉대): 놋쇠로 만든 촛대, 斷髮嶺(단발령): 마의태자가 속세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갈 당시 머리를 잘랐다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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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당의 감상: 

정처 없이 이리저리, 중국의 홍콩에서부터 요동반도의 대련에까지 팔려 다니면서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 품에 안겨야 하고 그로서 잠시 정을 붙였다 떼었다 해야 하는 기생 채란의 서글픈 심경을 나타내고 있는 시. 

그래도 비교적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나면 잠시라도 정을 붙이고 싶은 心思(심사)가 보인다, 누구는 팔자가 좋아 칠십 년 고락을 팔베개 베고서 기약할 수 있건만 스스로는 사람 분주하게 드나드는 곁방에서 잠시 만난 남자와 하룻밤 팔베개를 한다는 처지.

조선의 삼천리 강산을 좁다 하고 떠도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남포의 뱃사공이 실어다 주었기 때문이라 변명해야 하는 심사가 참 그렇다. 

마의태자야 금강산 경내에 들어서면서 세속의 미련을 떨치고자 머리를 잘랐다고 하지만, 그나마 나은 편, 스스로는 갈 곳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떠도는 몸이다.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는 어느 집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려니 하는 마음, 그래도 스스로 역시 언젠가는 내 임을 만나서 팔베개 한 번 편히 베어보리라 하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어린 기생의 마음이 이 팔베개 노래라 하겠다. 

1902 년생인 김소월이 기생 채란을 만난 것이 1924 갑자년이니 그의 나이 만 스물 둘이었고 채란의 나이 만 열 아홉에 만났음을 알 수 있다.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풀어나가는 소월의 문장은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가히 大家(대가)의 격조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중국 시문학의 情調(정조)를 충실이 이어받는 한편 우리 가락 고유의 정서 역시 지극히 잘 살려내고 있다.

흔히 김소월의 문학을 ‘恨(한)의 情調(정조)’라고 풀이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소월의 문학을 좁게 평가하는 결과에 그친다는 생각이다. 김소월의 시는 쉽고 단순해보여서 그렇지, 그가 보여준 시의 律格(율격)은 그 이후 만해 한용운이나 해방 이후 미당 서정주로 이어지는 우리 시문학에 있어 그들보다 한결 더 높은 경지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문학 중에서 20 세기를 통틀어서 이 ‘팔베개 노래調(조)’보다 더 아름답고 격조 높으며 심금을 울리는 산문을 나는 대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말의 고유한 리듬과 박자, 호흡의 斷續(단속)을 이처럼 구성지게 표현하고 있는 현대 산문을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싶다. 

김소월의 시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에 눈으로 읽기 보다는 조용하게라도 소리를 내어 읽어보시길 권하는 마음이다.
두 어번 낭독해보면 그 정서와 맛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만에 선생님의 수적(手跡)을 뵈오니 감개 무량하옵니다.
그 후에 보내 주신 책 『망우초(忘憂草)』는 근심을 잊어 버리란 망우초이옵니까?
잊어 버리라는 망우초이옵니까?
잊자하는 망우초이옵니까?
저의 생각 같아서는, 이 마음 둘 데 없어 잊자 하니 망우초라고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

저 구성(龜城) 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올시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란 모양이외다.
산촌에 와서 10년 있는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이 뵈여도, 인사(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중략…)

 

요전 호(號) <<삼천리>>에 이러한 절귀가 있어서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質[부운자체본무질] 生死去如亦如是[생사거여역여시]

 

라 하였아옵니다.

저 지금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초조하지 말자고, 초조하지 말자고,

 

(…중략…)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중추명월(仲秋明月)을 일컬어 왔읍니다. 오늘밤 창 밖에 달빛(月色) 옛소설에 어느 여자 다리(橋) 난간에 기대여 있어, 흐느껴 울며 또 죽음의 유혹에 박행한 신세를 소스라지게도 울던 그 달빛, 그 월색(月色), 월색이 백주(白晝)와 지지 않게 밝사옵니다.


*이 편지는 1934년 번역작품집 [망우초]가 간행된 이후, 
김소월이 스승인 김억에게 전해진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素月[소월]의 追憶[추억]](김억) 중에 인용돼 있음.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1934년 번역시집 [망우초]


소월 문광부 복원초상(문화관광부에서 복원한 소월의 초상)


[김소월 시선집](1955년 북한에서 출판된 소월시선집의 표지)


[망우초](호화판 역시집, 1943.8.1, 김억의 역시집)

 

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의 경우

 

 

 

 

Ⅰ 무엇엔가 미친다는 것

 

   1992년 어느 날. 월북작가인 이태준의 작품을 텍스트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느라 작가의 고향인 철원을 헤매고 청계천 헌책방을 뒤질 때의 일이다.

   북한의 한 고철수집소에서 이태준을 만났다. 사진으로만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상허 선생이 아니십니까’하는 인사에 빙긋이 웃으며 내 손을 잡은 그의 얼굴은 90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연구하며 궁금했던 점을 몇 가지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일하러 가야 한다며 일어서는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상허 이태준 선생을 만난 것이다.

   마침, 한국전쟁 직후 남로당의 몰락과 함께 비판을 받은 상허 이태준이 숙청되어 함경도 어디론가 파쇄공으로 쫓겨갔다는, 어느 탈북자의 증언을 잡지에서 읽은 직후였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고철수집소에 있는 그를 만났을 것이다. 연구를 하다 보니 그의 사진을 봤고, 그런 이미지가 꿈속에 그대로 나타났으리라.

   동료 연구자들과 한담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나를 ‘이태준에 미쳤다’고 했다. 맞다. 그때 분명 미쳤었다. 이태준이라는 작가에 미쳐 있었다. 미쳐 있으니 꿈속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미친 덕에 이듬해 <이태준 소설의 창작기법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한 ‘미친’ 모습을 이번에 다시 만났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이란 부제가 붙은, <진달래꽃, 김소월>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시인 김소월 그리고 그의 시에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만들어내지 못할 자료집이다. 내가 이태준에 미친 3년의 결과가 박사학위 논문이었는 데에 비해, 구자룡 시인의 60년 미친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문학을 알고 그리고 김소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시인 구자룡과 김소월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의 엮은이, 즉 김소월 컬렉터인 구자룡이 누구인가.

   일찍이 정한모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중·교교 국어교사로 30년을 재직하면서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를 비롯한 25권의 시집과 여섯 권의 수필집, 동화 혹은 문학연구서 십여 권을 집필했고 일흔이 넘은 요즘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인이다. 20여 년 전, 국어교사로 재직할 당시 부천 지역의 여러 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늘날의 ‘복사골문학회’를 만든 장본인이자, 부천의 문학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 여러 모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경기도 특히 부천시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천 문학의 대부’이다. 부천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만큼 부천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부천이 자랑하는 시인 수주 변영로를 기념하는 여러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가 하면, 잡지 창간호 수집부터 시작하여 그간 장서 5만여 권을 모아 ‘부천문학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김소월 컬렉션을 출간했다. ‘컬렉션’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연구서나 작품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김소월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아 소개하는 책이다.

사진1 -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 <진달래꽃, 김소월> 표지

 

   책의 머리글에서 구 시인은 김소월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숙제를 하기 위해 김소월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베껴간 일, 그런 그를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 준 담임 선생, 대학시절 1학년생의 개인 시화전에 ‘죽은 김소월이 돌아온 것 같다’는 혹평을 해 준 영문학 교수, 그 후 우연히 접하게 된 소월의 후손에 관한 잡지 기사 등이 바로 구 시인을 김소월에게 연결시켜 준 필연 같은 사건들이었단다.

   그렇게 시작한 소월 시집 모으기가 단순한 시집만이 아니라, 소월 시를 수록한 학교 교재들로 넓혀졌고, 나아가 소월이란 이름 혹은 소월의 시 한 구절이 등장하는 온갖 물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시집, 소설집, 문예지, 잡지,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신문, 음반, 영화포스터, 행사 현수막, 하다못해 소월 시 한 구절이 적힌 우산에 이르기까지……

   381쪽에 이르는 이 자료집을 보고 있노라면 이태준을 연구하며 ‘미쳤다’는 소리를 듣던 필자의 경우는 참으로 하찮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구 시인은 김소월에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많은, 다양한 자료들을 어찌 구하겠는가.

 

   구 시인이 대상으로 삼은 김소월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김소월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학 연구실에서는 그의 생애와 시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제대로 모아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학술적으로 김소월과 그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단순히 취미로 책을 모으는 수집가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자료의 오류까지…… 두꺼운 안경 넘어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김소월이란 시인을 알고 그의 시를 달달 외운다한들 고서점을 뒤지며 어찌 책 속에 숨어 있는, 두꺼운 책 어느 한 쪽에 수록된 그의 이름과 시를 찾아낸단 말인가.

   더구나 구 시인은 아날로그 세대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의 검색 기능을 사용할 줄 모른다. 오로지 발로 찾아낸 것들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미쳤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기에 그의 눈이 찾아낸 것이리라.

 

 

Ⅲ <진달래꽃, 김소월>의 구성

 

   이제 자료집 안으로 들어가 보자.

   본격적인 자료를 제시하기 전에 우선 구 시인은 자료집의 첫머리에 김소월의 뿌리를 밝힌다. 바로 소월의 족보이다.

 

 

 

 

사진2 - 김소월 가계도

 

   <공주김씨 곽산파 세보>에 따르면 김소월은 곽산파의 19대 손이다. 김소월 자료집을 묶으며 이런 뿌리를 먼저 제시하는 구 시인의 의도가 참 멋지다. 어느 날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엄연히 한국인으로서 뿌리가 있는,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진지한 접근이다.

   다음으로 서울 남산에 있는 소월시비 사진을 제시한 후, 소월이 스승 김억에게 보냈다는 친필 편지를 수록하고, 2012년에 관광문화예술 관련 학부 명칭을 <김소월대학>으로 바꾼 배재대학교의 홈페이지 사진을 소개해 놓았다.

   네 점의 자료 사진 배열만으로도 자료를 대하는 구 시인의 자세가 보인다.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설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내일을 설계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전체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된 <진달래꽃, 김소월>에는, 자료목록에 따르면 1,210 점의 김소월 관련 자료가 사진으로 묶여 있다. 말이 1,210 점이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다 포함한다면 1,500여 점이 훌쩍 넘을 것이다.

 

   자료집의 제1부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에는 1925년부터 2014년까지 간행된 <진달래꽃>의 이본(異本)과 시감상집, 연구서, 산문집 등 총 600 종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김소월이란 시인의 이름 혹은 그의 시 제목이 책 제목이 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간 간행된 김소월 시집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에 제시한 자료가 김소월의 첫 작품, 흔히 말하는 데뷔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첫 시집도 아니다. 듣도보도 못한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사진3 ― 박귀송 작 <김소월추도시>

 

 

 

 

김소월추도시(金素月追悼詩)

 

내 오래간만에 조선에 와

불현 듯 그대의 죽음을 듣다.―

그대 나를 모르고, 내 그대를 아다.

아아 그러나 내 그대의 얼골을 모르노라.

 

아아 三十年前, 이 땅에 봄빛이와서

그대 꽃동산에 뚜렷이 태여낫엇고

아아 三十年後, 이땅에 가을이와서

그대 落葉우에 외로히 돌아갓도다.

 

영원히 그대는 가다.

아아 그러나, ―그대 오히려 世上에 잇어

이나라의 <노래>를 듣고, <山川>을 보고,

아름다운 이나라의 색이 될진저.

 

내 그대를 못잊어,

고요히 그대의 詩를 읊어보다.

<먼後日 당신 나무리면

무척 생각다 잊엇노라>

 

   1935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시는, 평양 출신의 일본 유학생으로만 알려진 박귀송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김소월 작가론이나 작품론 어느 글에서도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문예미학적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우선 당시 소월을 추모한 시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소월시 연구자들에게도 생소한, 이런 시를 발굴해 낸 구 시인의 꼼꼼함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아니 사진 한 장만으로도 문예지의 한 꼭지를 장식할 기사이다. 여기에 구 시인이 알고 있을 설명이 붙는다면 학계에 ‘새로운 자료 발굴’을 알리는 깜짝 놀랄 글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구 시인은 그런 허명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여 이렇게 조용히 한데 묶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이어 시집 <진달래꽃>의 초판, 신문에 실린 시집 광고, 영인본으로만 볼 수 있다는 1925년판 <진달래꽃>, 시집 <소월시초(素月詩抄)>와 잡지의 광고, 1939년판 <진달래꽃> 등 해방 전에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들이 연대순으로 소개된다. 또한 김소월의 시 작품이 수록된 여러 시집, 예컨대 1926년의 <조선시인선집>, 1936년의 <조선명작선집>, 1938년의 <현대 조선문학 시집>…… 등이 그것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해방 후 처음으로 김소월의 시가 수록된 교과서이다.

 

사진4 ― 김소월의 시가 처음으로 수록된 교과서. 1948년

 

   1948년 1월 20일 조선교학도서에서 발행한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중등국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교과서에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수록되어 있단다.

 

   이 1부에는 재미있는 자료도 있다. 1950년 2월 1일에 숭문사에서 <소월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에도 이 시집을 계속 간행했다. 

 

 

 

 

사진5 ― 1951년 3월 5일에 발간된 숭문사 판 <소월시집 진달래꽃>

 

   전쟁 중에 발간된 <소월시집 진달래꽃>의 판권에는 ‘군검열필(軍檢閱畢)’이란 글이 인쇄되어 있다. 바로 전쟁 중이었기에 군이 출판물까지 검열을 했다는 증거 자료가 된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시집은 후에 또 출간을 하면서 판권의 인쇄와 발행일이 잘못 인쇄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인쇄일은 4284년 11월 19일(필자 주 - 檀紀이다)인데 발행일은 4287년 11월 21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정확한 발행연도가 4284년인지 아니면 4287년인지는 모르나(필자 생각에는 4287년-1954년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4284년이 정확한 것이라면 서기 1951년 11월이고 이 때에는 위의 자료와 마찬가지로 ‘군검열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오자 탈자까지 이 자료집은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것이 1955년에 발행한 정음사판 <소월시집>인데 여기에는 발행연도 1955년에서 5 글자 하나가 빠진 채 195년 인쇄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속해서 1부에서는 시집 제목과 판권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시집, 소월의 아들 판권인지가 붙은 시집에 이어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 책 표지가 소개된다.

사진6 ―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가 연재되었던 잡지 <여원>의 표지(우)와 소설 표지(좌)

 

   1950년대 후반 대중적 사랑을 많이 받고 있던 소설가 정비석은 <여원>으로부터 연재소설 집필을 부탁받는데 마침 새로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을 받은 때였단다. 소설의 소재를 찾던 그는 소월의 시 <산유화>를 읽고는 대학교수와 여학생 제자 둘의 삼각관계를 생각해 내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연애편지에 소월의 시를 여러 차례 인용한다. 연재소설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고,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됨과 동시에 영화화까지 기획되었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과 맞물려 교수와 제자의 불륜이 소재가 된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결국 1957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불러왔다고 한다.

   여기에 수록된 소월시집 자료들을 보면 19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우리 출판계의 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다. 잘 팔리는 책이라면 동일한 내용임에도 표지만 바꾸거나 아니면 시집 제목만 바꾸어 재출판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목격된다. 게다가 문을 닫게 된 출판사가 시집의 판형을 넘겨 제목과 내용 그리고 판형까지 동일한 시집이 출판사 이름만 바뀌어 출간된 예도 있다.

 

사진7 ― 1966년 혜명출판사에서 발행한 동일한 내용에 다른 제목의 시집

 

   그만큼 당대 독서대중들에게 김소월이란 시인이 팔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우리 출판계가 열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소월시집의 99%가 저자 혹은 판권자의 인지도 없는 무단복제품이라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2. 자료집의 2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이렇게 토로한다.

 

   어느 책인들 김소월의 작품과 이야기가 없을까마는 그래도 책 속에 숨어있는 소월을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 권의 시집 분량을 묶을 만한 편 수가 숨어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달랑 한 편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월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구 시인은 2부의 소제목을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 했는지 모른다. 2부에는 독서대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책 속에 숨어 있는 김소월의 시와 소월의 시세계를 풀어낸 글이 수록된 200여 점의 자료가 실려있다.

   1950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작고시인선>, 1952년 향음사에서 출간한 <현대시감상>부터 시작하여 6, 7, 8, 90년대를 거쳐 2014년에 출간된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까지의 여러 시집과 시 감상 해설서에 연구서들. 그것뿐이 아니다. 1984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소명여중 학생들이 자필로 베낀 소월시가 포함된 작은 시집들까지 자료로 묶여 있다.

   이들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2부 첫머리에 제시한 구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어떻게 소월의 시 혹은 소월의 시를 해설한 글들을 다 찾아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물론 책의 목차를 보면 수록된 시와 글의 제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 시인이 찾아낸 자료들은 단순히 목차에 나오는 소월만이 아니다. 긴 해설의 어느 부분에 인용된 소월의 시까지 찾아냈다. 그러니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 시인이 찾아낸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2부 첫장에 이런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사진8 ― 1959년 출간된 잡지 <진달래> 표지

 

   1959년 7월 국제문화사에서 창간한 잡지 <진달래>의 표지 사진이다. 우선 ‘진달래’가 눈에 들어와 김소월의 시 제목을 사용했기에 김소월 자료로 분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잡지의 내용을 보면 김동리와 박목월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글에서 소월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잡지 창간호를 수집한 구 시인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힘든 김소월 자료일 것이다.

   2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이 이런 것들이다. 시 한 편, 시 한 구절 혹은 소월시의 어휘 몇 개가 포함되어 있는 글을 찾아내 그 책의 표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 자료들 중 압권은 박목월의 짧은 글이다.

 

   1958년 1월 20일 범조사에서 출간한 박목월 감상집 <토요일의 밤하늘>에는 ‘생활(生活)의 시상(詩想)’이란 묶음이 있는데, 여기에 <소월(素月)의 시(詩)>란 박목월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素月의 詩

 

素月의 詩는 눈물겨웁다.

그러나, 素月은 눈물겨운 人間이 아니었으리라.

冷酷한 人間 안에 번지는 눈물, 그것만이 눈물겨운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경우, 이 글이 수록된 묶음이나 책의 제목 어디에도 ‘소월’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구 시인은 이런 자료를 찾아 소개한다. 더구나 이제껏 소월을 소재로 한 어느 글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구 시인이 발굴한 자료이다.

이런 자료들은 또 어떠한가.

 

사진9 ― 대입예비고사 수험서와 각 대학 입시 문제

 

   1969년 선명문화사에서 출간된 대학입학 예비고사 수험서 <국어정복>이다. 이 책 28쪽에 기출문제로 61년 서울대, 63년 연대, 64, 69년 이화여대에서 출제한 문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소월 시와 관련한 국어문제들이다.

   이는 국어교사 출신이 아니었다면 쉽게 생각지 못할 소월시 자료이다. 사실 구 시인이 수집한 중·교교 국어과목 학습용 소월시 문제들은 이것만이 아니다.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시험까지 혹은 어느 중·고교의 중간·기말고사에 이르기까지 소월시와 관련된 문제들은 보이는 대로 모아온 구 시인이다.

 

3. 자료집의 3부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란 부제를 달고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문학지에 수록된 소월시와 소월시 감상 또는 해설과 평론, 그리고 소월문학상, 소월청소년문학상, 소월 청소년 시화전 수상 작품집을 수록하고 있다.

   3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한탄을 하고 있다. ‘대학수능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김소월을 모르는 이 시대의 아이들을 보면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다.

 

사진10, 11 ― 소월시를 수록하고 있는 중고교 교과서(위)와 대학 교재(아래)

 

   그렇다. 대학입학시험이 종합적 사고력을 판단하겠다는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면서 중고교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소월의 시가 수록되는 횟수가 점차 줄더니 7차교육과정 이후 수시로 개편되면서는 이제 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소월을 모르고 자란다.

   물론 소월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문학을 논하는 자리 특히 현대시를 설명하며 어찌 소월을 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중요한 문학사,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한 시인을 모른다? 결국 문화자본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4. 자료집의 4부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 외에 영화, 연극, 음악, 미술, 가요, 가곡, 시낭송 등 각종 행사에 나타난 소월의 문학세계와 그 밖의 삶의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12 ― 소월시를 소재로 한 각종 영화 포스터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화 포스터이다. 김소월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월이 쓴 소설을 각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소월의 시 한 편, 아니 시 한 구절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소월의 시는 우리 문화 깊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7, 1962, 1964년에 제작되어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를 어디서 구했을까. 그 시절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은 것도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에서 있었다는 ‘김소월 시 낭송회’ 현수막과 사진까지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 시인의 활동 범위가 이제 국제적이다.

   그런가 하면, 언론에 보도된 소월 관련 기사, 광고 문구에 사용된 소월시의 한 구절, 이발소에 걸린 그림, 소월관련 행사의 현수막, 소월시 구절이 인쇄된 책갈피, LP판, 녹음테이프, 씨디 자켓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참 시시하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김소월과 다 연결되는 물품들이다.

   이런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문화가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김소월을 만나게 된다. 평소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을, 새삼 ‘아, 그랬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5. 자료집의 부록으로는 수록한 모든 자료 그리고 책의 발간과는 별도로 11월 14일 부천시청역 전시실에 전시할 자료 총 목록을 조목조목, 시시콜콜 정리해 제시하고 있다. 목록만으로는 정확하게 1,210점.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자료들이 목록 없이 전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비고사나 학력고사 시절 출제된 입시문제나 문제집의 자료들은 그 양에 비해 자료집에 사진 한 장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사진으로 소개하지 않은 자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실로 놀라울 뿐이다.

 

   사실 그간 김소월과 소월시를 텍스트로 하는 연구논문, 연구서 등은 수없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진달래꽃, 김소월>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시론이나 해설서가 아니다. 오로지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된 자료들을 제시할 뿐이다. 따라서 서지학적으로는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한 최초의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자료집을 보며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소월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종심(從心)의 구 시인이 마치 지학(志學)의 소년처럼 해맑아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흥을 돋우며 해주던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자료의 소개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 이면에 들어 있을, 구 시인이 들려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다. 구 시인을 알고 있고, 그와 소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라면 ‘아, 이게 그 자료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 없이 제시된 사진자료만으로는 자료를 수집하며 느꼈을 구 시인의 재미를 그리고 흥분을 독자는 알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2014년 11월 14일부터 7호선 전철 부천시청역 갤러리에서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을 추억 하다>가 열리며 자료 1000여 점이 전시된단다. 그리고 2차 작업으로 내년쯤에 이 자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해설서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렵게 수집한 귀한 자료들이 더 빛을 발할 것이리라 기대한다.

Ⅳ 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인, <진달래꽃, 김소월>을 덮으며 문득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바로 판권에 붙어 있는 인지이다.

 

사진13 ― <진달래꽃, 김소월>의 판권표시. 사진은 100번째 책이다.

 

   판권을 나타내는 인지로 엮은이의 도장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내용인 즉,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 권 한 권의 책에 일련번호를 넣어 소장가치를 높이고자 했단다.

   엮은이 구자룡 시인의 의도가 참 반갑다. 김소월과 소월시를 좋아한 것을 넘어 그렇게 모은 자료를 묶은 자료집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구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이런 책, 이런 자료집 한 권쯤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기지 않을까.

 

   어느 고전음악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토벤에 매료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귀가 뚫리면 베토벤은 시시해진다. 좀 더 심오하고 오묘한 곡들을 찾아 들으면서는 정말이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유행가 가락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헨델,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 차이코프스키, 브라암스……를 듣다가 결국에는 다시 베토벤을 들으며 ‘맞아. 이게 클래식이야.’라 외친다. 클래식 - 그 처음과 끝은 베토벤이다.

 

   그만큼 베토벤의 위대함을 역설한 말이지만 그의 말에서 베토벤 대신 김소월의 이름을 넣어 한국의 현대시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 소년소녀 시절, 떨어지는 낙엽에 가슴 아파하고, 부는 바람에도 가슴 설레던 시절, 김소월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고 시인을 꿈꾼다. 그렇게 시작한 문학은 좀 더 어려운 작품, 심오한 뜻이 담긴 시를 찾게 만든다.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를 읽으며 김소월을 폄하하고, 정지용, 김기림, 서정주, 김춘수……의 시를 읽다가 결국 다시 김소월로 돌아온다. 한국의 현대시 - 그 처음과 끝은 김소월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김소월과 관련된 자료들을 우리는 얼마나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모아두고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을까. 어느 도서관에서 어느 기념관에서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 만한 소월 관련 자료를 갖추고 있을까.

   알다시피 구자룡은 문학연구가가 아니다. 서지학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시인 구자룡이 어느 도서관 어느 기념관에서도 하지 못한 자료들을 모아두었다. 오로지 김소월과의 인연만으로, 김소월이 좋아, 소월시가 좋아 시작한 자료수집은 문학연구가나 서지학자의 영역을 훌쩍 넘어 ‘김소월학’이라 해도 좋을 체계적인 자료집 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일은 미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명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

   김소월이란 시인에 미쳤고, 소월시에 미쳤다.

   미쳐도 참 단단히 미쳤다.

   그런데, 그렇게 김소월에 미친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문학사의 풍경] 소월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病) 기사의 사진

死의 유혹… 스승 김억에게 유서 “三水甲山 내 왜 왓노” 

문학은 문자에 의한 언어적 집적물 이전에 인간학의 또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문학사는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자취이기도 하다. 그 자취는 풍문이나 이설로 떠돌게 마련이어서 결정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시시비비를 가릴 주체가 사라지고 없는 게 아쉽지만 바로 그렇기에 여전히 논쟁적이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아가는 실감의 처지에서 20세기 한국문학사의 논쟁적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현대시사의 터주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의 사인(死因)은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살과 병사(病死)로 갈려 있다. 소월은 평북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1934년 12월 24일 오전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들은 소월 사망소식을 앞다퉈 전한다.  

“방현(方峴)-일찍이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든 재질이 비상 튼 청년 시인 소월 김정식씨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바 지난 24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193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3일 뒤인 12월 30일자로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돌연 별세’(조선중앙일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一期)로’(동아일보) 등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월의 오산학교 은사인 안서 김억(1895∼1950?)은 1935년 1월 22∼26일에 걸쳐 조선중앙일보에 ‘요절한 박행(薄倖)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언제든지 素月(소월)이의 생사에 對(대)하야 이야기하든 것을 생각하면 그의 夭折(요절)은 楮多病(저다병)의 그것이라기보다도 夭折(요절)을 意味(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엇든가 하는 생각도 업지 아니하외다.” 

이를 근거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87년 ‘저다병’을 각기병(脚氣病)이라고 해석했다. ‘저다(楮多)’라는 병명이 일종의 수족병(手足病)을 일컫는 우리말 ‘저다’에서 왔으며 수족병이란 요샛말로 팔다리가 퉁퉁 붓는 일종의 각기병 증세로,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김억이 저다병을 거론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4년 후 다시 이렇게 썼다. “소월의 가냘핀 몸집이 水土(수토)쎄인 龜城(구성) 땅에 와서는 제법 몸이 나서 만년에는 뚱뚱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월이 가늘고 야위어야 할 사람이 뚱뚱해진 것은 뇌일혈을 부르려고 한 때문인 듯싶습니다. (중략)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는데 가까운 곽산 본 고향으로 옮겨온 뒤에 돌비라도 해 세운다고 미망인은 언젠가 서울 와서 쓸쓸히 이야기하고 갔읍니다.”(1939년 6월 ‘여성’ 39호)  

소월의 사인을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핀 이는 소월의 3남 정호(1932∼2004)씨이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로 석방된 뒤 국군으로 복무했던 그의 존재는 1981년 정부가 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노출됐다. 

그는 이후 진행된 강연회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버님 소월의 최후는 1934년 12월 23일 저녁때의 일이었는데 그날 저녁에도 집에 돌아오시어 주무시려 하다가 고단하게 잠에 취한 어머님의 입에 은단 같은 것을 넣어주는 것을 잠결에 귀찮은 듯 내뱉었다고 한다. 한참 주무시던 어머님이 잠결에 아버님의 몹시 괴로워하시는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잠이 깨어 아버님을 흔들어 보고 불러보았으나 숨소리가 이상해서 곧 불을 켜고 자세히 아버님의 주위를 살펴보니 무엇인가 밤톨만큼의 무슨 덩어리 하나가 아버님의 머리맡에 떨어져 있어 주워보니 항상 잡수시던 은단이 아니고 한 덩어리의 아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호씨는 소월 사망 당시 두 살이었으니 이 증언은 정호씨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던 만삭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소월의 아편음독설이 유포된다. 

또 다른 가설은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 1966년 5월 10일∼7월 1일에 걸쳐 12회 연재된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가 재야서지학자 김종욱씨에 의해 발굴돼 2004년 ‘문학사상’에 전재되면서 불거졌다.

연재물은 ‘문학신문’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과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일대를 돌며 현지 취재한 내용이다.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하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에 억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소월 서거 32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탐방기를 끝으로 소월은 북한에서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시인”으로 평가 절하된다. 이는 1967년 주체사상 강화기와 때를 같이한 것이다. 이와 관련, 19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모(54)씨가 북한의 소월 평가와 관련해 남긴 증언이 흥미롭다. “1967년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김소월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유교사상으로 낙인찍혀 연구대상에서 아예 배제됐습니다. 그때 당 선전분야에서는 수정주의와 부르주아 사상과 함께 봉건 유교사상에 물든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장씨는 이어 “내가 북한 중앙방송 재직 시절 김소월의 조카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이름은 김정품(당시 나이 53세쯤으로 추정)”이라고 밝혔다. 항렬을 따져볼 때 김소월과 같은 ‘廷(정)’자 항렬이어서 착오가 있는 듯하지만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그 친구 고향이 정주 곽산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67년 소월이 숙청당했을 때 그의 묘소 앞의 시비는 ‘초당파’들에 의해 깨진 뒤 뽑혀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소월의 사인에 대해서도 자살이라고 못 박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소월은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또 다른 단서는 편지이다.

소월은 1934년 가을, 김억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운다.
“저는 술이나 한 3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쨋든 맘나는 양(樣)으로 하겟다 생각이옵니다. 자고이래로 중추명월을 일컬어왓사옵니다. 오늘밤 창밧게 달빗, 월색(月色), 옛날 소설 여자 다리난간에 기대여서서 흐득흐득 울며 사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든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서(白書)와 지지안케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사훗날 저는 한 십년만에 선조의 무덤을 차저 명일 고향 곽산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편지는 일종의 유서였다. 훗날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소월 선집’(장문각·1970)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어도 십년간 한번도 오지 않았던 소월이었는데, 이번에는 곽산을 찾아와서 일일이 뒷산에 다니며 무덤의 떼가 잘 자라는지 돌보았고 허술한 무덤은 잘 다듬어 떼를 입혔다. 이러한 소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왜 저러고 다니지?’ 했을 뿐이었다. 소월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와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소월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결단을 내려둔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소월 슬하의 자식은 북한에 남은 3남 1녀 외에 1남 1녀가 더 있었지만 큰딸 구생(龜生)은 6·25 피란 중에 병사했고, 아들 정호씨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최후를 아는 이 또한 남아 있지 않다. 

◎ 소월은 누구 

1902년 평북 구성 태생. 1915년 오산학교 입학. 1916년 구성군 평지면 출신 홍단실과 결혼. 1920년 ‘창조’ 5호에 시 발표. 1921년 배재고보 5학년 편입. 1923년 일본 도쿄상업대 입학.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이후 광산업 실패와 신문사 지국 경영 실패로 빈곤에 시달림. 1934년 사망. 대표 작품은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산유화’ 등. 1981년 금관 문화훈장 추서. 

◇자문교수(가나다순)=
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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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金素月 




 

 

​     김소월 초상화

   부모

 

                김 소 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서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가곡으로 불려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미당처럼 ‘아비는 종이였다’가 아니라 소월의 아비는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년 후부터 그 병을 앓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소월의 증조부가 간질병을 앓았다 한다. 간질병 환자는 보통 때는 아무렇지 않으나 발작하게 되면 게거품을 뿜으며 몸이 비틀리는 무서운 병이다. 소월의 아버지 김면도(金冕道)씨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 했다. 나는 어쩌면 태어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그런 시절이었다. 소월의 침울한 성격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면 애수에 찬 부드러운 성품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리라.

소월의 외갓집은 비교적 잘 사는 집안이었다. 소월의 어머니는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별의별 약을 다 썼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월은 어렸지만 집안의 불운을 예감하고 있었다. 소월의 어머니 박씨 부인은 마지막으로 어느 날 이웃 마을로 무당을 찾아갔다. 소문난 무당이었다.

‘우리 영감 간질은 이녀 손에 달렸소......’

‘염려 없다니까요, 걱정을 놔요......

귀신만 쫓으면 다 돼요’

큰 무당은 자신만만했다. 소월의 어머니는 일꾼이 지고 온 쌀과 어물을 무당의 집 마루에 벗어놓았다. 며칠을 두고 무당은 굿을 했다. 그러나 간질병이 낫을 리가 없었다. 재물만 탕진한 것이다. 천치가 태어나는 집안에서 천재가 태어나는 것을 드물게 본다. 소월이야말로 그런 예의 하나일 것이다. 겨울밤에 어머니와 나눈 긴 이야기, 그것은 옛이야기였다. 소월이 시달렸던 어린 시절은 묻지 않아도 알만하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더욱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한국민이 가장 사랑했던 시인 김소월은 아직 문학관이 없다. 이건 나라의 수치다. 살아있는 시인들이 문학관을 세우고 있으니 한국 문단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소월의 문학관은 언제 세워질 것인가. 평론가 조연현은 <어느 시를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긴다.>라고 평했다. 평론가 김현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고 했고 유종호는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했다.>고 했으며 김용직은 <우리 현대사의 한 표본이며 역사다.>라고 평했다.

김소월 시인은 아직도 사진이 없다. 그의 이력에 나오는 얼굴은 초상화다. 1990년 당시 문화부가 김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했다. 당시 문화부 장관 이어령이 ​ 김소월 연구가 서지학자 김종옥(당시 72) 씨를 불렀다. 김종옥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어령 장관이 김종옥 씨를 불러 김소월의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해 경남 거제 출신의 옥문성 화백과 당시 김소월의 아들 김정호와 김정호의 아들 김영돈을 불러 얼굴을 참작해서 그린 것이 오늘의 김소월 초상화가 된 것이다. 북한에는 김소월 사진이 있을 것이나 수집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씨가 아산에서 식당 일을 하며 산다고 한다. 손자 김영돈은 부천에서 살지만 언론에 일체 나타나기를 거부한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집을 팔아 치부한 출판사들. 그들은 양심마저 팔아버렸던가. 새삼 소월이 그리워지는 가을...

[출처] 부모|작성자 솔봉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詩人의눈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 대중가요에
누구나 하나쯤은 외우는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南으로 온 시인의 아들은
가난과 싸우다 쓸쓸히
꿈 못 이루고 하늘로

"아… 할아버지, 아버지"
시인의 손녀도 의지할 곳 없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피자 회사에서 받은
단어 사용료 몇푼이
할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서만, 노래로만
작은 기념관 하나 없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의 오른쪽 뺨에 비둘기가 흘린 분비물이 눈물처럼 남아 있다.
/ 채승우 기자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서울 정동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소장중인‘진달래꽃’초 판본(1925).
이준헌 객원기자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소월의 손녀 김은숙은 식당 일을 하고 있다.

/ 문갑식 기자


나는 시인의 손녀다

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리어 운다.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미스터리-소월의 얼굴 

소월 초상화<사진>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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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할아버지의 시를 외우지만 정작 기념관 하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온 국민이 자다 깨서도 읖조릴 정도로 입에 붙은 '진달래 꽃'의 시인 김소월의 자손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소월에겐 4남 2녀의 자손이 있지만 이중 한국에 살고 있는 이는 3남 김정호씨뿐이다. 나머지 가족은 북한에 있는 것.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온 김소월의 가족들은 현재 김소월을 위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민족 시인 김소월,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없다!

김소월의 손녀인 김은숙씨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이 한창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전국의 국토는 잘 깔린 초록색 융단도 같았다.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 있는 '송일정'이라는 식당을 지나치는 순간,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고 읊조리는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씨(45)는 뜨락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세월을 음미하는 듯 보였다. 첫 대면에서도 그녀가 김소월의 손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김소월의 초상화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런 말을 하면서 뚫어지게 쳐다볼 때가 많아요. 책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불쑥 찾아오는 학생들도 많구요. 하지만 할아버지 초상화는 제 아버지와 동생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컴퓨터 작품이에요. 아버지조차도 할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확인할 길이 없죠. 이 소나무 아래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이곳에 자그마한 기념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예전에 한번 시도하다가 주춤했어요.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외지인이라서…."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깊은 생각에 빠지면 묻지도 않는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그녀가 소월의 기념관에 대해 혼잣말을 한다. 그녀가 연고지 없는 충남에서 정착하게 된 건 힘겹게 살아온 과거와 연결돼 있다.

김은숙씨는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김소월의 손녀'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그녀는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무척 시달렸다. 학교뿐 아니라 온 동네에서 그녀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학교에서 국어 시간만 되면 두렵기까지 했다. 독후감이나 시를 발표해야 할 때, 그녀는 어김없이 지목되기 때문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감도 없었죠. 하지만 모든 생활은 모범적이어야 했어요. '소월의 손녀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죠. 아버진 제게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그녀의 아버지인 김정호씨는(72) 현재 김포에 있는 아들 부부, 두 손자와 살고 있다. 김은숙씨를 만나기 전, 취재진은 김정호씨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언론에 노출되는 걸 무척 꺼려하는 눈치였다. 말로는 '건강상에 문제가 생겨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김소월 추모사업에 관련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선다던 소문과는 달리 무척 소극적인 자세였다. 그에게 자세한 사연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추모사업이 몇 차례 진행되다가 번번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의기소침해진 눈치라고 한다. 게다가 김소월 시인의 유작을 소유한 한 수집가를 우연히 만나났는데, 1억원을 달라는 제안에 난감했다고.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유작을 갖고 싶어하셨지만 우리에게 1억원이 어딨어요. 그저 돈 없는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죠. 결국 복사본만 챙길 수 있었어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죠."

김은숙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내려온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아버지에게 늘상 들어온 탓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눈으로 만난 듯 생생하다.

평생 '소월'이란 두 글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그중 3남 김정호씨(72)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 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딸인 김은숙씨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고.

"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은 괜찮았어요. 아버지는 까다로워 보이긴 해도 당신 어머니한테만큼은 극진했어요.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어요. 원래 할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할아버지께서 '여자 이름으로 안 좋다'며 '실단'으로 바꾸셨대요."

김정호씨는 1932년, 소월이 서른 살일 때 태어났다. 그는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9세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그후 반공 포로로 남한에 잔류하다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휴전을 맞은 그는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1955년 만기 제대를 했다.

연고가 없던 김정호씨는 당시 철도청에서 근무하던 먼 친척 뻘 되는 고모부의 주선으로 교통부 자재부서의 임시직으로 첫 직장을 가졌다. 월급은 쌀 한가마니. 3년간 근무하던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운명'처럼 만난 그녀와 결혼을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반 년이 채 안 돼 친척들이 마련해준 결혼반지까지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였다.

사글셋방에서 근근히 사는 김정호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지난 58년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자신이 소월의 친자식임을 밝혔다.

김정호씨,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 만나는 것이 소원!

시인 이명수씨는 지난 97년 김소월 자손들과 처음 만났다. 천안에 살고 있는 한 고등학교 선생의 제보를 받고 나서였다. 평소 김소월의 시를 흠모하던 그는 한걸음에 김정호씨와 연락을 취했고 그의 어려운 사연을 듣고는 지금은 작고한 시인 서정주 선생을 찾아가 '소월의 아들을 찾았다'고 알렸다.

"미당(서정주의 시호) 선생이 소월의 자손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셨더라구요. 살기 힘들다며 찾아온 소월의 아들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정호씨도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미당 선생을 찾아갔겠어요. 레코드 외판원 등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는 정호씨의 형편을 알고는 미당 선생이 가슴 아파했죠. 그리고는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당시 미당은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김정호씨는 지난 67년 8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됐다.

이명수 시인은 김소월의 후손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그는 "소월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며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소월의 기념사업회 하나 없으니 말이 됩니까? 생가를 복원하고 건축물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작품을 다시 숨쉬게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념사업회가 꼭 있어야죠."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도움으로 반듯한 직장을 갖게 된 김정호씨는 8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러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아내를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는데 그에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퇴직금을 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홍익회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딸 은숙씨 그때를 회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어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죠. 아버지는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타고난 성품이 순하세요.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많죠. 아버지는 특히 예술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세요.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자주 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셨어요. 생활이 여유 있었다면 예술계로 진출하셨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일기를 쓰시는걸요. 언젠가 할아버지 필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 필체와 너무 똑같거든요."

김정호씨의 고단한 삶은 어느새 일흔을 넘겼다. 지금 그가 가장 바라는 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죽기 전에 자북에 남겨진 형제와 자손들을 만나고 싶단다. 김소월은 지난 8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북한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신문을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김정호씨의 둘째 형 은호씨는 중공업청의 간부로, 동생인 낙호씨는 설계기사로 살고 있다는 것.

김정호씨는 4년 전, 가족들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볼 때면 김은숙씨의 마음도 아파온다고.

"아버지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게 해드려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답답해요. 아버지는 자꾸 늙어가시는데… 이러다가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요."

김정호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은숙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읖조리는 '진달래꽃'을 들으며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칼보다 강한 것이 펜'이라고 했다. 김소월의 시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다. 그러나 한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은 마음속에만 있을 뿐 현실에선 흔적조차 없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이것이 비단 가족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이명수(시인)·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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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6일은 김소월 시집 초간본 '진달래꽃' 출간 90년을 맞는 날이다.

얼마 전 필자는 충남 아산에서 배터리 도매상을 하는 소월의 손녀 김은숙씨를 만났다.
문학 연구 목적으로 갔으나, 그 만남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월은 시집 단 한 권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인, 
초판이 문화재로 등록된 시인,
전국에 시비(詩碑)가 20여 개나 세워진 시인,
서울 남산에 길 이름도 가진 시인,
이본 시집이 600종류나 되는 시인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작가들도 하나씩 갖곤 하는 문학관이나 기념관 하나 없는 시인이기도 하다.

손녀는 이게 못내 한으로 남은 듯하다. 친손녀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려고만 할 뿐, 정작 소월 문학관의 문짝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는데 관심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녀는 북한에 남아 있을지 모를 할아버지 자료들을 모으려 여러 번 시도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비(私費)로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많이 필요했다.

친필 육서도 가족이 아닌 남이 가지고 있다.

얼마 전 경매에서 초간본 시집 '진달래꽃'이 1억3500만원에 낙찰됐다. 그녀가 할아버지를 앞세워 돈벌이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할아버지께 한 점 얼룩, 하나의 누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어디 하나 주눅 든 구석 없이 당당한 50대 여인은 영락없이 소월의 손녀였다.


초판본 시집 '진달래꽃' 출간 이후, 이본 시집이 200만 권 팔렸다고 한다.
소월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한두 편이 아니다. 무려 300곡에 이른다.

요즘도 
각종 매체에서 설문을 통해 한국인의 애송시와 사랑하는 시인을 발표하는데 늘 소월이 1등이다.

시집이 사람들 손에서 떠난 지 오래라지만 소월 시집은 지금도 독자들이 찾는다. 그뿐이랴, 대부분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렸다가 사라져도 소월 시는 남아 있다. '국민 시인'으로 문학사에 길이 남은 이런 인물을 기리는 건물 하나 짓지 않는 대한민국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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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미당과의 각별한 인연, 북쪽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 동안 겪은 고생… 이제야 말합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을 서정적인 민요조 운율에 담아낸 시들로 당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시인’ 김소월.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행사들이 열리는 가운데, 남한 내 소월의 유일한 유족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3남 김정호씨와 자녀들을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리나라 시인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은 김소월. 소리 내어 읽기 좋은 가락 위에 평이한 언어로 깊은 시상을 드러내는 소월의 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평북 출생으로 남한에 이렇다 할 연고지가 없는 소월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념사업회나 단체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남산에 소월의 이름을 딴 ‘소월로’와 ‘시비’ 정도가 그를 기리는 상징물 정도일까. 이는 소월과 마찬가지로 올해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는 정지용 시인의 경우와 퍽 대조가 된다. 정지용 시인은 고향인 충북 옥천의 자치단체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문학예술제 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

이런 상태에서 남한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소월의 아들과 손자들의 근황을 전하는 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월의 유족들은 의외로 취재를 반기질 않았다. 그간 ‘미당이 소월의 후손을 먹여 살렸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등의 과장된 보도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기사’를 약속하고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3남 김정호씨(70)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현재 김씨는 부평에서 아들 영돈씨(41·대건정보기술 대표)와 며느리 이진옥씨(36), 그리고 규형(10), 도형(7) 두 손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딸 은숙씨(43)는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서 ‘송일정’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며 아들 하나를 두고 살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아들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제 나이 세살 때 돌아가셨어요. 제 위로 구생, 구원이라는 누님이 두 분 계셨고, 큰형님 준호, 둘째형님 은호,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 낙호와 제가 있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와 동생 손을 이끌고 본가로 들어갔지요. 아주 억척스러운 분이셨어요.”

정호씨가 19세 되던 해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으로 남하한 그는 참전한 지 얼마 안돼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인천 형무소, 부산,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거쳐 반공포로로 남한에 남게 되었다. 석방 후에는 전남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당시는 그의 말마따나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던” 극심한 좌우대립의 시기. 남하한 지 2년 후에 그는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55년 만기제대한 정호씨는 혈혈단신으로 연고지 없는 서울땅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보직은 교통부 자재부서의 임시직. 3년여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58년경 사글셋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정호씨를 안타깝게 여긴 외가 쪽 친척의 말에 따라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박현태 기자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이 ‘소월의 친자’임을 밝혔다.

 

19세에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혈혈단신 남쪽에 남아 고생 많이 해

 

“이북 5도도민회, 직장 할 것 없이 다각도로 확인하더군요. 그래서 맞다는 걸 확인한 후 기사가 나갔지요. 그랬더니 문인들과 출판사 분들이 저를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당시는 저작권이나 인세가 제도적으로 잘 보장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음사와 같은 출판사에서는 소정의 ‘사례금’을 전달하며 ‘소월의 아들’에게 미안함을 전할 뿐이었다. 당시 기억 나는 일화 중에 하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만든 작곡가가 그를 찾아왔던 일이다.

“아버지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잖아요. 전 아버지의 시중에서도 ‘부모’를 가장 좋아해요. ‘낙엽이 우수수~’ 하는 거 있잖아요. 노래 부를 자리가 있으면 항상 그걸 부르지요.”

그후 재단법인 홍익회에서 4년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나와 얻은 직업은 레코드 외판원. 성문사에서 발매하는 <가요 60년사>라는 레코드판을 방문 판매하러 다녔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도 외판일이라는 게 크게 돈이 되지는 않잖 아요. 그러던 중 평소 안면이 있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이 일을 아시고, 마음 아파하시면서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당시 미당은 “소월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쪽에서 외판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이 안다면 얼마나 악선전에 이용하겠느냐”면서, 당시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석달 후 정호씨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8년 가까이 성실하게 근무했으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치료비 마련을 위해 퇴직금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다. 그 후 홍익회로 다시 재취업,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그곳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결혼 후 스무번도 넘게 이사를 다닐 만큼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었다. 딸 은숙씨는 그때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혈혈단신이셨으니 의지할 곳도 없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하지만 너무 성품이 맑으세요. 아기 같은 분이에요. 누굴 짓밟고 올라가거나 하는 건 꿈에도 못 꿀 양반이세요. 그래서 아마 손해도 더 많이 보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코디언, 그림, 서예, 글… 뭐든지 잘하세요. 젊어서 고생만 안 하셨다면 나름대로 그쪽 분야로 나가셨을 텐데, 속상해요. 아버진 지금도 일기를 쓰고 계시거든요? 아버지 필체를 볼 때마다 전 깜짝 놀라요. 할아버지 육필과 너무 유사해서 말이지요.”

식당 곳곳에 김소월이 남긴 육필 원고를 액자로 만들어 진열해둔 은숙씨가 글씨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신부전증으로 아픈 아내를 성심껏 간호했던 성품 따스한 소월의 아들

 

정호씨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진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잖아요? 남 보기엔 깐깐해보이는 양반이었다는데, 어머니에게는 안 그랬대요. 아주 잘하셨죠.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고요. 원래 어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여자이름으로 안 좋다고 ‘실단’으로 지은 게 아버지세요. 가끔 시를 보고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다른 여자는 없었어요.”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는 소월을 닮아설까. 정호씨 역시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고 자식들은 입을 모은다. 며느리 이씨의 경험담. “아버님이 몸이 아프신 어머님께 하시는 행동이 그렇게 극진할 수가 없었어요. 짜증내는 거 다 받아주시고, 잡숫고 싶다는 거 어떻게든 구해서 가져다주시고요. 어머님 씻겨드리는 거나, 밤새 주물러주시는 건 모두 아버님 몫이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여쭈었어요. ‘아버님은 어떻게 그렇게 어머님을 위하실 수 있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나는 결혼할 당시에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하기로 서약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켜서야 되겠느냐’고요.”

정호씨의 아내는 순천향병원에서 혈액 투척만 무려 8년을 받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딸 은숙씨도 “부부간에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진 지금도 가끔 엄마 꿈을 꾸신다고 하더군요”라며 부모님 사이가 각별했음을 전했다.

영광스럽기 때문에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름 ‘김소월’. 남한의 혈육에게 그 이름은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게 한 이름이었다.

“소월의 자식이라는 게 영광스럽지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어요. 제가 아버지 뒤를 잇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 모임이나 술자리에 가도 늘 처신에 신경써야 했죠. 선친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요즘도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면, 친구들이 꼭 ‘김소월 시인의 아들’ 운운하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요. 그럴 때마다 친구들을 막 나무랐어요. 왜 그런 소릴 하냐고.”   

 

 

‘소월의 아들’을 각별히 챙겼던 미당과의 가슴 훈훈한 인연

 

 


정호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들 영돈씨도 말을 거들었다.

“저 역시 자랑스러운 마음이 왜 없겠어요. 저도 원래 문학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할아버지라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느낀 다음 그냥 포기했어요. 그만큼 후손에겐 어려움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무슨 기념일만 되면 카메라를 들고 막무가내로 몰려오는 취재진들에게 시달렸다는 영돈씨는 “아직 어린 아들들은 증조 할아버지가 위대한 시인이라니까 그저 좋아만 해요. 하지만 전 자식들이 있으니까 이제 더 신경이 써져요. 특히 과장 보도된 기사를 보면 화가 나고요”라고 말했다.

과장되게 보도된 내용 중 하나는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 물론 미당이 ‘소월의 아들’인 정호씨를 각별하게 챙겼고, 또 그 자식들인 영돈, 은숙씨를 예뻐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숙씨의 고등학교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거나, 마치 ‘소월 일가’를 먹여 살린 것처럼 보도된 건 지나치다는 것.

“망둥어 낚시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명절이면 세배 가고 그랬지요. 우리 아들을 보면 늘 할아버지를 쏙 뺐다고 입버릇처럼 그러셨고요. 딸이 결혼할 땐 주례도 서주셨지요. 그런데 어느 해인가 수해를 입었을 때, 힘 내라고 쌀 한 가마니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마치 먹여 살린 것처럼 부풀려진 겁니다.” 정호씨의 회고다.

미당이 주례를 섰던 딸 은숙씨는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남편 김원배씨와 함께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

“고기를 잔뜩 준비해갔는데 고기는 안 먹는다고 하시더군요. 당시엔 죽만 드셨나 봐요. 그래서 산나물을 보냈는데, ‘이렇게 많이는 못 먹으니 자네들이 먹게’ 하시더군요.”

정호씨는 우리나이로 일흔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건 북의 가족들일 수밖에 없다. 81년 10월 김소월 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될 당시, 신문을 통해 가족들 소식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동생 낙호는 설계기사로 둘째형 은호는 중공업청 간부로 있다고 하는데, 그후 동정은 전혀 모른다. 그동안 수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음에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2년 전 방북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여태 안되네요. 우리 고향이 곽산면 남단동인데, 그 밤나무 숲이 눈에 선해요. 보고 싶지요, 정말….”

 

변변한 소월 기념사업 하나 없는 게 안타까워

 

소월의 유족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소월이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이름을 단 조촐한 문학관 하나 없다는 점이다. 비록 북쪽 출신 문인이라 자료가 적고, 기념사업이라는 게 워낙 돈이 들지만 말이다. 정호씨는 뜻 있는 독지가나 국가가 나서주지 않는 한 영영 요원한 일이 아닐까 걱정스러워했다.

“10년 전에 정길복 선생이라고, 라이온스 클럽 회장을 하셨던 분이 소월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 분이 정계, 문학계 열심히 뛰어다니며 약 10억원을 기탁금으로 모으셨거든요. 그런데 덜컥 지병으로 쓰러지시면서 사업이 무산됐어요. 인계자가 나와주질 않아 기탁금은 전부 반환했고, 결국 유야무야 되어버렸어요. 돌이켜보면 마음만 아프지요.”

올해는 소월이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9월 26, 27일 탄생 1백주년을 맞은 김소월, 정지용, 나도향, 주요섭, 채만식 등 6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심포지엄을 연다. 또한 9월27일 시인들의 시와 산문 낭송 대회가 열리는 ‘명동 문학카페’ 행사에 6인의 유가족을 초청한 상태다.

중요한 건 이런 행사가 ‘반짝 행사’로 끝날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소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어렵게 살아온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정성이 아닐까.   (끝)

 

 

 

 

 

그때 그 뉴스ㅡ

 

소월(素月) 시인 그 아들 김정호씨 

"아버지는 어머니와 대작하며 고독을 달랬어요" / 김두호

 

[인터뷰 365]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1902~1934)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김정식씨를 인터뷰한 때는 1981년 11월 이맘 때 였다. 정부에서 소월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서울에 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정식 씨는 서울 봉천동 달동네의 전셋집에서 살며 용산에 있는 기업체의 경비원으로 제직중인 가난한 서민이었다.그가 기자를 만날 때 쉰살이 었으니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면 77세가 되지만, 몇해 전 작고하셨다고 전해진다.

 

학교 공부를 시작해서 시(詩)라는 장르를 접하게 되면 처음 만나는 시인이 <진달래 꽃>의 시인 소월이다. <산유화> <금잔디> <못잊어> <초혼> <먼 후일> <접동새> <달맞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우리민족 고유와 언어의 정서를 민요적 운율로 노래처럼 담아낸 소월의 서정시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학생시절에 가장 많이 애송한 시들이다. '소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동경심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인데 까막득한 시대의 인물로 생각했던 소월시인의 유일한 혈육이 서울에 있다는 소식은 신기한 느낌까지 들게했다. 

김정호씨는 성품이 조용하고 온화해 보였다. 아버지를 이야기 한는 동안 시종 표정이나 감정의 동요없이 차분하게 묻는말에 대답만을 해 주었다.

 

소월선생의 아드님이 서울에 살고 계시다니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누구라고 소문 낼 틈도없이 먹고 살기에 바빴어요. 그래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서 어려울 때 도와주셨어요.

 

어떤 분들인데요? 

아주 힘들게 살 때 내가 누구의 아들인줄 아시게 된 서정주, 구상, 박종화 선생님들이 이효상 국회의장께 부탁을 해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지요, 국회 경비실에 취직이 되어 11년 동안은  그럭저럭 살았지만 아내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쓰러져 퇴직금을 타려고 그만 두었어요.

 

고생이 많으셨군요.

건축 공사장 노동도 하고 연탄배달도 하고 무슨일이든 다 했어요.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는 것 빼고는 안해 본 일이 없었지요.

 

소월시인의 몇째 아드님이신가요? 다른 가족분은 어디 사세요?

내가 4남 2녀중 끝에서 둘째입니다 .모두 전쟁 때 내가 집을 떠나면서 혜어졌고 6.25전 남쪽으로 온 누이가 천안에서 사셨으나 별세하고 이곳 남쪽에는 이제 혼자뿐입니다.

 

언제 서울로 오셨습니까?

전쟁이 날 때 내 나이 19살이었지요. 여름에 인민군에 입대해 그 해 10월 평안남도 양덕에서 유엔군에 귀순하면서 혈혈단신이 되었고 그 후 서울에서 살게되었어요. 젊을 때는 국군에 복무하기 위해 혈서지원까지 하고 지리산 공비 토벌군에서도 활동했어요.

 

북쪽 고향에는 아직도 다른 가족들이 살고있겠군요

알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형제가 많아서 살고 있을 겁니다.

 

어릴 때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버지가 살던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외갓집 이웃동네가 되는 나의 외가이며, 아버지의 처가 동네인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이사를 해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외가인 서산면 왕인동에서 출생해 본가인 남단동에서 자라셨지요. 아버지는 내 나이 세 살 때 별세하셨으니 내 어릴 때 아버지의 기억은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것들이 전부입니다. 돌아가시기로 작정한 아버지가 곽산에 있는 조상어른들의 산소를 찾아 제례를 올리고 떠나셨다고들 하지만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들려주지는 않았지요. (소월시인은 서울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둘러 본 뒤 시장에서 사온 다량의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으로 전해진다)

 

소월시인은 가족을 몹시 사랑했다는 이야기, 부부 금술이 남달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14 때 맞아들인 어머니는 미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무척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남양 홍씨) 가 한 살 연상이었는데 심성이 깊고 너그럽기가 바다같은 분이셨습니다.  6남매를 낳고 돌보는 동안 아버지는 서울과 동경으로 유학생활과 작품활동을 하시며 집을 비웠지만 조금도 불만없이 자식들과 어른을 뒷바라지 하시며 사셨어요. 한동안 고향 곽산에 사실 때는 어머니에게 술을 권하고 가르쳐 대작을 하시며 말벗으로 삼아 외로움을 푸셨다고 해요.

 

아버지 고향 곽산은 정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고장이었다지요?

맞습니다. 봄이 오면 산이 온통 붉게 물들었어요. 그곳 능한산 남쪽 줄기 끝에 남산이 있고 그 남산봉 냉정골에는 이름없는 폭포가 있습니다. 사시장철 주옥같은 물길이 사송강으로 흘러 흘러 갔지요. 서해 바다도 멀지 않고 정주로 이어지는 철로변 산기슭은 모두 진달래가 곱게 물드는 산골이었지요.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기 전 까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아름다운 산천에 묻혀 성장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었던 아버지가 왜 서른둘 젊은 나이에 세상을 저버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생존기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이긴 했지만 남긴 시마다 또 애절한 정서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 할아버지(소월의 부친 김성도)가 금을 캐는 광산도 하고 토지도 많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나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인에게 뭇매를 맞고 정신이상자가 되면서 집안이 슬프게 변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였으니 성장하면서 성격이 좀 어두웠던것 같아요.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자랄 때 부터 친구가 별로 없었고 산 위에 있던 학교에서 돌아 올 때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온 후 가장 마지막에 홀로서 내려왔다고 해요.

 

소월시인은 그 자신의 가정환경도 우울했지만 시대적으로 더욱 암울할 수 밖에 없었던것이 그가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시작활동을 하던 말년은 일제에 의해 모국어가 말살되는 수난기였다. 3.1운동으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그 곳에서 은사인 김 억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은 소월은 1920년대 부터 <창조>지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5년에 시집 <진달래 꽃>을 간행했다.

배제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에는 동경대 상과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그 해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8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가 사망한지 5년 후 스승 김 억에 의해 <소월 시초>가 발간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가족이 있고 꿈을 키우던 고향 산천을 좋아해 자주 낙향했다. 1924년 조부의 광산일을 돕기도 했고 1926년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한 시기도 있었다.

 

지금 가족분은 어떻게 되세요?

28세 때 결혼한 아내(염경자  / 당시 45세)와 스므 살 스물 두 살된 딸이 있습니다. 살고 있는 집도 봉천동 친구의 집이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서 사는데 큰 걱정은 없어요.

 

아버지를 대신해 훈장을 받으신 소감은 어떠세요?

어릴 때 우리 고향 동네에 살며 아버지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 분이 정자나무 밑에서 장기를 두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하더군요. 그냥 그립지요.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이 않나지만.... 살아 계신다면 일흔 아홉인데 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산소앞에 가져가 올려 드려야지요. 그냥 고향생각 밖에 나는게 없네요. 어머니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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