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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치환과 그 사랑의 궤적 -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 - " 내 죽어 바위가 되리라"
2016년 01월 06일 22시 18분  조회:7482  추천:0  작성자: 죽림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러브스토리 

 

- 행복(幸福) / 유치환 -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靑馬)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깃발'이란 시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국어수업을 참관한 후 담당 국어교사를 불러

"내 시가 그렇게 어려워요"라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시 <깃발>은 난해했다.

해설이 필요한 시다.

시 <행복>은 언제 읽어도 가슴에 짠하게 전달이 된다.

이는 연가(戀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남몰래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시에 공감을 하게 된다.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李永道, 1916~1976)

 

19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우선 간결한 표현이 맘에 든다.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행복>은 청마 유치환이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보낸 시이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다.

당시 통영으로 시집 온 그녀의 언니집에 머물러있었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만주로 떠돌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청마는 정운보다 아홉살이 많은 38살의 유부남이었다.

정운은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반도 끝자락의 작은 도시 통영은 예향(藝鄕)이다.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이중섭 등

수많은 예술인이 나고 자라고 활동한 곳이다.

통영의 골목골목에는 예인들의

수많은 사연이 깃들어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시에 나오는 청마거리의 통영 중앙동 우체국이다.

빨간 우체통 옆에 <행복>시비가 있다.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운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한 청마와 홀로 된 정운은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연서로 그리움을 달랬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청마는 1947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창였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과 그의 언니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옷가게 '시선집중'터다.

청마의 집필장인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2000년 폐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불과 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 그리움 / 유치환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정운은 유교적인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에

마침내 바위같이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신적 사랑은 시작됐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였기에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무제 1>은 정운의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에 실렸던 작품이다.

청마와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 무제Ⅰ/ 이영도 -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사랑도 끝이나고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뛰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이였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녀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리로 남는 것이다.

 

 

 

 - 탑(塔) / 이영도 -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정운은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 주었고, 정운에게 청마는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불륜이라고 지탄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예술인에게 영원한 테마다.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다.

 

청마 유치환(1908~1967)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23세인 1931년 문예 월간에 <정적>시를 발표 하면서

문단에 등단했으나 문학청년과 어울려 술만 마셔 그의 아내는

신학공부를 권유하였으나 시작에만 전념했다.

 

평양으로 이주해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일제의 검속 대상에 몰리면서 잠시 만주로 나갔다가

1945년 37세 되던해 통영으로 돌아와서 부인은 유치원을 경영하고

윤이상.김춘수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통영여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경주여중·대구여고·부산여상 교장을 지냈다.

 

살아 생전 청마는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 통영여고 둔덕중 대구여고와 부산고 동래고 등.

시비가 국내 시인 중 가장 많다.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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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벌판을 기차로

 

  2010년 5월5일 동랑· 청마기념사업회에서는 거제시문화체육과의 협조을 받아 청마유치환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북만주 기행을 하게 되었다. 동랑· 청마기념사업회 회원, 거제문인협회회원, 그리고 청마선생의 따님이신 인전, 춘비(80), 자연(79), 그리고 외손녀가 동행을  하여 매우 의미 깊은 문학기행이 되었다.

  문학기행을 떠나는 회원들도 청마선생의 북만주생활을 더듬어 볼 기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지만 청마선생의 세 따님은 벌써 60년도 더 지나버린 아버님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북만주를 찾는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회한이 서려있었다.  특히 세따님들은 아직도 기억속에 가물가물 살아나는 추억의 북만주를 한번쯤은 찾아가서 그 옛날 아버님과 같이 거닐었던 하얼핀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고,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어쩔수 없이 조국을 등지고 떠나와 살아야했던 그 아픔의 현장을 꼭 한 번 찾고 싶은 맘을 한 시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여행을 하면서 청마 유치환 시인을 거론하면 언제나 함께 등장하는 이영도 시인 보다는 수면위로 떠오른 적이 없지만 청마선생님을 훌륭한 사랑 시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권재순 여사에 대한 뒷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은 마음에 여행 기간 내내 세따님과 외손녀와 함께 유치환시인과 그리고 권재순여사의 이야기를 나누며 귀한 시간을 가졌다.

  연길공항에서 마중나온 사람들의 접대를 받고 윤동주 생가를 참배하고, 박경리의 '토지' 배경이 되었던 회령시가 보이는 삼합에 도착했을 때에도 세따님은 말없이 복사꽃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시기만 했다. 그리고 두만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면서 연셍-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곱고 단아한 모습을 보이며 내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건넬 여유를 주지 않으셨다. 여행도중 거리를 걸을 때면 의도적으로 세다님의 곁에서 걷거나, 혹시 버스속에서 자리가 나면 얼른 옆 자리에 동석을 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일행은 흑룡강성 성도로 향하는 하얼핀 기차를 타게 되었다.

  4인1실의 침대칸 기차에 세따님과 외손녀가 함께 취침으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칸을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야간 기차는 아무리 달려도 4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밤을 하얗게 새며 10시간도 넘게 하얼핀을 향하여 달리는 기차는 어둠에 밀려서 북만주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긴 밤을 보낸 후 드디어 광활한만주 대지를 깨우는 황홀한 태양 한 줄기가 창틈으로 기어들기 시작했고 밤새워 숨도쉬지 않고 잠을 자던 대륙의 주인공들이 아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수런거리자 우리 일행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참 넓은 대륙이다. 어디를 보아도 끝이 없는 대지에서 태양은 어디 숨었다 일어났는지 넓은 대지에 골고루 햇살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때 세 따님의 방문이 열렸다. 필자는 얼른 그 방으로 들어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여든이 넘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단아한 체격에 언제 세수를 하였는지 예쁘게 화장한 세 따님의 얼굴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따님 모두 하얼핀이 청마선생님의 시 '극락사'가 있고, 청마선생님이 거닐었던 공원이 있으며 청마선생님의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어서 아침 기분을 이렇게 홤하게 한 모양이다. 차가 도착하기 전 필자는 정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 나의 아버지 유치환

 

하얼핀에 도착하려면 1시간은 족히 남았다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필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정식으로 취재하고 싶다는 청탁을 드리자 쾌히 승낙을 하시고 동승한 문협 사무국장의 동영상 촬영을 하는 가운데 세 따님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청마선생님은 부인인 권재순여사와 1살 차이로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며 같은 교회의 주일학교 친구였다고 한다. 청마선생님은 그 당시 청마선생님보다 더 인텔리이신 권재순여사를 흠모하여 권재순여사에게 구애편지을 많이도 보냈다고 한다. 권재순여사는 그런 편지들을 안타깝게도 6·25로 인하여 간수하지 못했고 청마는 권재순여사와 결혼을 하여 세따님을 낳으셨다고 한다. 세따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아버님의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을 지금까지도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다정다감한 성격탓에 항상 아버지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특히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엔 입가에 웃음을 보이셨다. 이렇게 사람들을 좋아하다보니 아버지는 사람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으나 가정에서는 정말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유치환선생님은 일제치하의 어려움 때문에 늘 가슴 아파했으며 문인으로서의 올곧게 살아가는 삶에 어려움을 느끼셨다고 한다. 하루는 학교에서 일본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는 통지를 받고 세따님도 아버지께 예쁜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 이름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며 끝끝내 인전, 춘비, 자연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였다고 했다.

  이처럼 아버지의 문학활동과 개인생활이 일본의 간섭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자 청마선생님은 형이신 유치진 선생님께 자신의 거처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에 청마선생님의 형이신 유치진 선생님의 부인이 대한제국의 귀족집 따님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재물로 유치진 선생님은 북만주에 넓은 들판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동생인 청마를 불러 정말 대한민국 생활이 어렵다면 자신을 알고 괴롭히는 일본 사람이 없는 북만주로 와서 북만주의 농사관리를 해 주고 문학 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형의 의견에 따라 청마선생님의 북만주 생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청마선생님은 유치진 형의 농사일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때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독들의 눈이 되고 길을 열어주며 조선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일이 오인되어 아버지가 일본의 일을 봐 준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는 씁쓰레한 친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비치기도 했다.

  아버지가 북만주로 떠난 후 맏달 인전씨도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가게 되고 11살의 나이로 3학년에 편입되었고 뒤이어 모든 가족의 북만주행이 이루어져 동생 둘도 만주의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때 만주에서의 생활을 평생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신진에서 가끔 하얼핀으로 갸셨는데 그때 만주에서의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학년 3학년 2학년인 세 딸을 데리고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던 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나들이를 갈 때면 세 딸이 햇살에 타지 않도록 언제나 모자를 꼭 씌운 후 나들이를 하셨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하얼핀 거리를 걸을때에는 그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 풍이 흐르는 가게의 쇼윈도에 물방울 무늬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원피스가 걸려있던 모습이 지금도 수채화처럼 하나하나 그리워진다고 했다. 이런 기억들을 붙들고 회원들과 북만주 현지주민들이 가신진, 연수현을 쥐졌지만 그 때 청마선생님과 가족들이 살았던 방앗간이 있었다던 장소는 불타버려서 그 터를 찾을 수 없어 함께한 모든 일행들이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이렇게 세 따님들은 아버니데 대한 기억을 너무나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 사랑하는 어머님 권재순여사

 

  권재순여사는 통영  출신으로 지금의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의 전신인 조양보육과를 나와 신여성으로서 유아교육계에 몸을 담고  진명유치원보모로 열심히 교사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권재순 여사는 청년 유치환보다 훨씬 인텔리급에 속한 신여성으로서 통영의 유수한 젊은이들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아온 아가씨였다고 한다. 청년 유치환은 이런 아가씨를 사모하여 통영의 젊은이들이 모를 사람이 없을만큼 권재순여사를 향한 대단한 구애작전을 했다고 한다. 권재순여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많은 편지를 보내왔고, 권재순은 내 여자라고 대자보에 실을 정도로 권재순여사를 향한 사랑이 짙었다고 한다.

  청년유치환선생님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28년 통영을 떠들썩하게 한 신 학문을 공부한 두 젊은이가 하는 결혼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결혼을 한 후 어머니는 문화유치원을 경영하며 청마의 뒷바라지를 위해 남모르는 노력을 하신 분이라고 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통영의 이름 있는 여러 여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여성으로 한산일보에 훌륭한 교육가로 소개되고 있다.

  어머니 권여사는 아버지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어서 평생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해 주신분이며, 어머니의 그런 경제적 뒷바라지 덕분에 대부분의 문인들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해 왔지만 아버지는 생활의 궁핍함을 모른 채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며 아무도 모르게 어려운 문인들의 술값과 담배값을 뒷바라지 해 왔다고 한다.

  셋째 따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진 꽃과 물을 찾아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 따라 그름ㄸ라 떠돌아 다니는 김삿갓 같은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늘 회고하셨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를 어머니 권여사는 말없이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였닥 한다. 아버지가 통영에서 생활하실때, 어머니께서는 세 딸들에게 아버지가 글을 쓰고 계실 땐 발바닥을 마루에 모두 놓고 걸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단다. 늘 까치발로 아버지가 글을 쓰시는 주변을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소리나지 않게 걸어가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걸어가다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나 권여사가 진정 바랐던 남편상은 시인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의 길을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평양신학교 입학을 3일 앞둔 날 잠시 서울을 갔다 오겠다고 집을 나간 유치환은 돌아오지 않아 끝내 신학대학을 다니지 못한 것에 늘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권여사의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남편 유치환은 신학을 접어둔 채 시인으로 거듭났고, 권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생을 교회의 반주자로 일하며 남편을 주님의 전으로 붙들어 주려고 했지만 끝내 남편에게 전도를 하지 못한 것에 죄스러워했다고 한다.

  또한 권여사는 일제시절의 교육과정 중 좋은 점을 잘 받아드려서 자신의 삶을 기독정신에 입각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아오셨다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반듯한 모습으로 남편과 자녀 앞에 서 있어 어린 딸들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저렇게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만주 가신진에서 생활할 땐 하얼핀으로 출장을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고 세 딸을 데리고 일몰의 지평선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고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글을 쓸 땐 절대 방해하지 않았고 세 딸에게도 아버지를 방해하면 안된다며 글 쓰는 남편을 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한다.

  유치환선생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 좋은 유치환 선생님 주변엔 늘 스스로가 연인이라고 자처하는 여성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가운데 이영도 시인이 나타나면서 어머니는 마음의 병을 많이 앓으셨다고 한다.

  처음엔 어머니 권여사도 남편 없이 혼자의 몸으로 딸 한 명을 데리고 살고 있는 이영도시인에 대해 여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고 이렇게 잘 지내던 사이에 어느새 유치환과 이영도시인은 세기에 남을 편지의 주인이 되게 되었다. 세 자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절대 아버지가 먼저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이영도시인이 먼저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왔으며, 그 편지를 계속 불태웠다고 말했다.

 보통의 여인들은 이런 경우에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으로 가슴에 쌓인 화풀이를 하면서 스스로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권여사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남편 유치환이 예사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아무나 붙들고 무슨 말이든지 쏟아놓지 못한 아픔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 인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아내를 유치환선생님의 모를 리가 없었다.  세따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런 어머니를 두고 유치환은 열녀비를 세워줘야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청마 유치환선생님이 아내 권재순여사를 사랑하는 글은 그가 남긴 '병처'에서 만날 수 있다.

 

病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

한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宇宙를 다 하야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이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有情의 거미줄을 觀念하며

遙遙한 太虛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星芒을 지키며

蕭條(소조)히 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읜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찌기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蕭條(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내 그대 앓음을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으로 담아두고, 나의 가난한 인생에 애증의 푸른 나무로 살아온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조강지처와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오랜 동안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미운 짓 많이 하여도, 세월 넘기며 가정을 찾지 않아도 조강지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 다 묻어두고 열두 폭 치맛자락으로 덮어두고 보듬고 나가는 그런 사랑이 조강지처의 사랑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보이지 않는 끈을 유치환도, 권재순 여사도 함께 잡고 살아온 것이다.

  권재순여사의 인품과 덕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가장 아픈 부분을 보면 아버지 유치환선생님이 작고하신 후 이영도시인이 유치환이 보낸 편지를 모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시집을 내게 되었을 때라고 말했다. 이 때 가족 모두는 이영도시인의 글이 아니라 아버지의 글인데 이영도시인이 유치환선생님의 가족 동의도 없이 시집을 출판하고 한권 모두를 자신의 소유로 하여 가족들 간에 소송을 해야겠다는 의논이 돌았다고 한다. 그때도 권여사가 유치환선생님을 위하여 소송문제를 절대 허용하지 않아서 모든 유족들이 참고 그 책의 출간을 묵인해 주었다고 한다.

  유치환선생님의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글은 모두 청마선생님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음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청마선생님이 남긴 '그리움'과 '행복'속에서 모든 이들은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독자만의 감동에 휘몰아치는 사랑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시인 청마유치환과 이영도의 플라토닉사랑은 속도와 감흥에 민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20여년에 걸친 그 사랑이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이야기 보다 이런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남편을 향한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지성으로 섬기며 그 모든 어려움을 열두폭 치마로 둘둘 감아 덮어주고 막아준 가슴아픈 부인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영도를 향한 유치환의 플라토닉한 사랑도 아름답고, 이영도의 유치환에 대한 그리움도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그 모든 아픔을 견디며 남편을 사랑한 권재순여사의 지고지순한 참 사랑이 있었기에 유치환은 이시대의 사랑시인으로 남아 <행복>도 <그리움>도 우리의 가슴속에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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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연서는 절절하다. '…내가 당신의 안으로 육신마저 들어가고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려도 시원치 않을 안타까움!'
 
절대적 사랑이었다. '오직 하나 당신의 가슴에 안겨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은 욕망!' 
 
최애(最愛)였고, 익애(溺愛)였다. '…당신의 고운 사진을 보고…거기다 얼굴을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내면의 절규도 터져 나온다. '운! 죽으리까? 죽어버리리까?' 
 
유치환이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보낸 사랑편지는 이랬다. 청마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46년. 그는 해방되는 해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이영도는 그곳에서 수예와 가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청마는 서른여덟, 정운은 스물아홉의 나이. 이때부터 '푸른 말'의 울음소리는 '정운'이었다. 둘은 기혼자와 미망인의 몸이었다. 이 넘지 못할 강의 가교는 편지였다. 20년 세월, 5천 통으로 이어진 길고 긴 다리였다. 
 
다리 놓기는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청마는 애걸 조였다. '편지를 쓰지 말라는 당신의 말씀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종이를 대해서나마 당신을 불러 보지 못한다면 어디서 이 애틋한 그리움을 풀겠습니까.' 이영도에게 청마의 연문은 설렘이자 괴로움이었다. 통영은 자신의 남편이 저세상으로 간 도시였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마의 여성 편력도 나타난다. '…내가 몇 번의 연애를 가져 본 것은 사실입니다….' 딴 연인이 있음을 비치는 대목도 있다. '설령 지금 내가 어떤 여성과 탐애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청마에게 이 고백들은 장치로 작용한다. 정운을 우뚝 세우기 위한. '정운! 당신은 내게 세상에 흔한 그러한 애인이 아닙니다….' 이래서 시인의 사랑은 다른가. 

편지는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별인사도 없었다. 편지의 전제는 '떨어져 있음'이다. 끝내 육체는 한 공간에 있지 못한 거다. 정신적 사랑이었다.

이영도는 이 편지들을 장롱 서랍 깊이 묻어두려고 작심했다가 마음을 바꾼다. 그녀는 유치환이 작고한 그해 편지집을 펴낸다. 청마의 것만을 모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자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영도는 이에 '다른 여자들이 먼저 낼지 몰라서'라고 대답했단다. 청마의 명예와 그와의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이 예상은 맞았을까.  
 
사랑의 파도를 이으며 띄워 보낸 청마의 육성
이준영 기자 /
 

1967년 청마 유치환의 갑작스러운 타계는 한국 문단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문·잡지들이 그에 따른 일화를 앞다퉈 보도했다. 유치환과 이영도(정운)의 사랑 편지 얘기도 있었다. 정운은 편지 공개를 완강히 거부했다. 연서는 내밀하게 둘만이 나눈 영혼의 교류. 남에게 보여 줄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마음을 바꾼 계기는 여성지였다. 이 잡지들이 청마의 편지들을 하나둘씩 싣는다.

다른 여인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거였다.

여 제자들이 내놓은 편지도 꽤 있었다.

정운은 이 상황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청마와 여러 여성에 얽힌 잡다한 소문을 잠재울 생각이었다.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이렇게 탄생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다. 비난도 뒤따랐다.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 게 아니냐는. 정운의 해명은 이랬다.

"다른 여성들이 낼지 몰라 서둘러 낸 것"이라고. 청마의 가장 소중한 정신적 사랑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또 다른 청마 편지집이 세상에 나온다(1970년). 이영도의 예상대로였다.

제목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 펴낸 이는 반희정이었다. 청마가 '청하'라는 아호를 지어 준 여인이었다. 여기엔 (1958년부터)5년여간 그녀와 청마 사이에 오간 편지 100여 통이 담겨 있었다. 편지만 실린 정운의 서한집과 형식이 달랐다. 청하는 편지 중간마다 자신의 소회와 일상을 차근차근 적었다.
 

청하가 청마를 처음 만난 건 1958년 11월. 유치환의 그때 나이 50세. 이 여인은 30대 후반의 전쟁미망인이었다. 그녀가 먼저 청마에게 편지를 띄운다. 자신이 속한 문학모임에 한번 와 달라는 초빙 서한이었다. 

'사랑한 나의 당신! 마침내 나는 이렇게 자백할 수밖에 없군요!' 청마는 그녀와 만난 지 몇 달 만에 이런 편지를 보낸다. 이영도와 시기가 겹친다. 그는 정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여성과의 탐애'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이 혹시 반희정이었을까. 간호사였던 청하는 청마가 곤궁에 처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 그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신경통으로 기동도 제대로 못 하던 때였다. 

반희정은 청마와 정운의 관계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다. 글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청하는 청마의 부인이 안고 있는 깊은 상처도 읽는다. 그녀와 만나 하룻밤을 같이하면서였다. 정신적 사랑, 그것이 몸을 바치고도 '영혼의 순결'을 지켰다는 주장과 어떻게 다른 걸까. 밤을 하얗게 새우며 나눈 두 여인의 길고 긴 대화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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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가 교류한 여류시인

청마문학회 회장이며 시인인 문덕수 홍익대 명예교수(1928~ 경남 함안출신)는 [청마 유치환 평전-시문학사刊]을 내었는데 “청마는 생명의 소중함을 지상의 가치로 생각했고 그의 문학관은 매우 인생론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靑馬 유치환(1908~1967)이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 정운 丁芸, 1916~1976)와 20년간 주고 받은 5000여통 편지는 詩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주장한다.

 

청마는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만난 후배 여학생 즉 장차 부인이 될 권재순에게 편지를 나누었고 그가 20세인 1928년에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꽃을 들고 있던 소년이 나중에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1922~2004)으로 당시 6세였다.

 

청마가 37세인 1945.10월부터 1948.3월까지 통영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는 29세였으며 21세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가진 가사교사로 같이 근무하였고 그들은 1946년에는 문학동인 죽순(竹筍)에서도 같이 활동했다. 청마가 남긴 글을 보면 순수한 사랑이던 아니던 간에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고 여겨지나 내용은 상당히 애뜻하였던 듯하다. 이영도는 청마와 주고받은 편지중에 청마의 편지 200여통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는 책에 실었으며 이책은 그 해의 베스트 셀러였다,

 

시인이며 반희정(潘姬靜) (청마가 지어준 이름으로 청하(靑霞))이라는 여성과도 1958.11월부터 1963.7월까지 이런 순수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반희정과의 편지도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다.

 

문덕수는 “서한집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남녀의 개인적·사적 밀담(密談)은 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청마는 여느 시인처럼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신, 자연, 죽음, 생명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사색의 영역을 직관적으로 넓혀 나갔던 것이다.

청마에 대하여 시인 김춘수는 ,

“청마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아니다.
사상가·경세가로서의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청마는 ‘意志의 시인, 虛無(Nihilism)의 시인, 生命派의 대가(大家)’ 같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청마는 어느 시인보다도 ‘자연’과 ‘사랑’을 많이 노래하였고 특히 그의 사랑은 유달리 힘차고 따스하고 갚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행복의 두가지 등식속에서 가장 고매하고 진정한 존재양식을 찾아낸 시인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즉 ‘행복’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해 있고, 사랑하였으므로 설사 마지막 인사가 될지어정, 진정 행복하였다’라고 노래하였다. 

 

-첫 邂逅-

靑馬 柳致環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58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 나는 B읍의 어느 교회 일을 돌보면서 교사와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두 오누이의 어머니로서, 전쟁 미망인으로서 온갖 世波에 시달리고 갖은 傷處의 흔적들을 지닌 채 나는 다만, 그리스도 앞에 나의 전부를 바친 몸으로 잔득 도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가노라면 사람은 제가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어떤 것을 간직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은밀한 것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때때로 짐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지만 이때금씩은 스스로만의 세계에 잠길 수 있는 유일한 상념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

50년대말과 60년대의 초기에는 이 나라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 시련의 시기를 똑바로 들여다 보면서 누구보다 올바르게 살아 보려고 진심으로 저항한 청마 그분의 증언 그것이었습니다....  

- 반희정의 편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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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활의 풍류산하] 청마의 우체국 연인
통영에 간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동양의 나폴리라 부른다. 등산로를 따라 미륵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통영이 품고 있는 섬들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빛 밝은 날의 바다색깔은 너무 맑고 푸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작은 방 하나 얻어 한두 달쯤 살고 싶어진다.

통영은 예향(藝鄕)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된 곳이다. 연극인 유치진, 시인 유치환, 시인 김상옥, 소설가 김용익,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화가 전혁림, 음악가 정윤주, 나전칠기 명장 김봉룡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고향은 이곳이 아니지만 통영에서 몇 년 머물며 작품을 남긴 예술가도 더러 있다. 이중섭은 부산 시대와 서귀포 시대를 청산하고 이곳에서 2년간 머물렀다. 그때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을 그렸다. 또 시인 백석은 이곳에서 애틋한 연애 시 몇 편 남긴 것이 지금까지 통영의 자랑거리로 꼽히고 있다.

오늘은 청마문학관을 거쳐 동피랑 벽화마을에 들렀다가 전혁림 미술관에 가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화가의 그림세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프로그램은 관광공사 산하 대경문화발전연구회(회장 강인호 계명대 교수)가 기획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는 팸 투어이다.

청마의 시는 교과서에 실린 ‘깃발’부터 읽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배들로부터 시인의 생애 중에 있었던 사소한 연애담을 너무 많이 들은 데다 그의 시가 연정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시의 주제가 ‘사랑’ 아니면 맛이 없는 것이지만 타인의 연애에는 괜히 재를 뿌리고 싶은 나의 비뚤어진 심사가 다분히 작용했으리라.

그래서 이번 통영 길엔 청마의 내면을 꼼꼼히 챙겨 보리라 마음먹었다. 청마가 평생의 연인이었던 정운 이영도 시인을 만난 것은 38세 때인 1945년이었다. 통영여중의 국어 교사와 가사 교사로 만난 둘은 첫눈에 빠져들어 서로 애욕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청마는 부인이 마련해 준 작업실인 영산장에서 애달픈 편지를 써서 중앙동 우체국으로 걸어나가 연인에게 부쳤다. 죽을 때까지 5천 통이 넘었다.

청마는 유부남이었고 이영도는 딸 하나를 두고 홀로 사는 여인이었다. 둘 다 가슴만 타고 마음만 부글거렸지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아 넘지를 못했다. 매일 편지를 부치러 가는 청마는 우체국 부근에서 부업으로 수예점을 열고 있던 이영도를 유리창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 만나지 못했다. 맛있는 과일을 눈앞에 두고 한 입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이나 무엇이 다르랴.

그래서 쓴 시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인도의 금욕주의자 간디도 그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영국 해군 제독의 딸인 미라라는 여성이었다. 간디가 56세 때 33세인 미라가 찾아와 문하생이 된다.

간디가 미라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 350통이 공개되긴 했지만 그들 둘 사이에 육체관계는 없었다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것 자체가 의문이다.

간디가 그러하듯 청마의 연애에도 육체가 개입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5천 통의 연애편지를 쓴 청마가 밋밋한 영혼에다 대고 “날 어쩌란 말이냐”고 매일매일 고함을 지르며 우체통 구멍에 불이 나도록 편지를 밀어 넣었을까. 저승 가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

청마가 숨지기 얼마 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라는 ‘행복’이란 절창의 시를 썼다. 그는 60세 때인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영도는 청마에게 받은 편지로 사후 한 달 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서간집을 펴냈다.

그녀는 ‘돈벌이 속’이란 비난이 쏟아지자,
“내가 서간집을 내지 않으면 다른 여자가 먼저 낼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3년 뒤,

반희정이란 여인이 1958년부터 1963년까지 5년 동안 청마로부터 받은 편지로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이란 책을 펴냈다.


진짜 낚시꾼은 낚싯대 하나로 고기를 낚는다.

구성지게 비가 내리는 날 청마문학관을 나서며 청마의 낚싯대 숫자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엇둘) 하나 둘(엇둘).

///수필가

 

 

 

 

 

이영도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1945년 [죽순]동인으로 활동하며 등단함.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줌.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1968) 등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 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 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 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

그녀는 일찍이 결혼하여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당시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 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 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 가야 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 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19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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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塔) 詩/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바로 <주는 사랑>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이영도 정운 선생이 1976년 예순의 나이로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던 그녀는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 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1940년 대말~50년 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 길입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의 시조를 적어 본다. 

황혼에 서서 - 이 영도


산(山)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진달래 -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이 시조는, 산에 난만히 피어 있는 진달래로 부터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추모와 자기 회한의 정을 읊은 작품이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 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에필로그 ;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을 떠올리며 - 김남식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네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이라지만, 이 두분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청마가 유부남이고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3년 동안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다.


흔히 이별의 가장 많은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기에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혼자서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 시인이 부러웠다. 
과연 청마 외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면 이영도의 가슴 아픔이 저려 온다. 
싫어서가 아닌데..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마음을 그 누가 알까요?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아팠을 그 마음 변함없는 사랑에 어쩜 유치환 보다

더 울었을 이영도 사랑 한다고 할 만큼 아팠을 이영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크게 아팠을까요. 

그리고 바로 건너편 2층 집에 그토록 사랑 할 여인이 곁에 있었으니 
어쩜 유치환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의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이영도는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주었다. 
3년만에 청마에게 마음을 연 이영도로 인하여 그들은 20년 동안 사랑을 키웠다.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현대에서 분명 이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마 유치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긴 세월을 사랑했을 것이다.

 

유치환에게 받은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이영도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훗날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모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출판까지는 꿈꾸지 않았을것이다 
유치환이 이영도를 사랑한 만큼 이영도는 유치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세간에서 불륜이라기 보다는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나의 태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영도(李永道. 1916-1976)는 누구인가.

그녀의 시 세계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잊혀져가는 고유의 우리 가락을 시조에서 재현하여 현대적으로 승화시키며 간결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여성의 맑고 경건한 마음,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다스리며 관조적인 인생관을 보여준다. 

‘죽순’에 시조 ‘제야’로 등단하여 통영여중, 부산 남성여고, 마산의 성지여고, 부산여자 대학(현 신라대학)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산 어린이 회관도 운영하였다.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언약>, 오라버니인 이호우와 공동시조집 <석류(1968)>등을 발간하고 수필집으로 <춘근집>, <비둘기내리는 뜨락>, <애정은 기도처럼>,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머나먼 사념의 길목>등 일곱권이 있으며 수필가로서의 명성도 크게 이루었다. 부산의 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영도는 1966년에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취지의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청마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이영도는 20년간 이어지며 이영도에게 남긴 5000여통의 편지들 가운데 200통을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를 상품화한다는 비난도 감수하며 이영도가 예의 서간집을 펴낸 것은 청마의 이미지 훼손을 막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만5천부나 팔렸던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서간집이다.

그 수익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 문학상(丁芸 文學賞)을 제정하여 재능 있는 시조 시인들을 지도하면서 문단에 등단시키며 시조시인을 양성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다.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 정갈한 몸가짐의 이영도,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아버지가 지방 군수인 좋은 집안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시인 이호우의 누이이기도 하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이규현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과 곧은 성격은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객지로 유학을 가지 못하고 조부모가 운영하는 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이영도는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20세에 대구의 부호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1936년에 딸을 낳은 후 신혼의 꿈도 얼마가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병약하던 남편을 수발하다 결국 1945년 8월, 29세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이영도는 결혼하면서 덮어 두었던 시조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고 1945년 10월, 통영 여자 중학교 가사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청마 유치환과의 숙명적인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유치환 ....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 1940년 가족을 이끌고 떠났던 북만주. 어린 아들을 잃고 삽이 들어가지 않는 허허벌판의 광막한 언 땅에 묻으며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인 북만주를 부인 권재순의 집요한 요구로 떠나와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고향 땅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통영 여중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몇 달 후, 새로 부임한 가사교사 이영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었다. 시조시인이기도한 이영도는 평생 한복을 입었던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고독과 방황으로 북만주를 떠돌다 귀향해 통영여중 국어 교사가 된 38세의 기혼자인 청마는 새로 부임한 이영도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에, 슬프도록 빛나고 청초한 모습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다.

청마의 일방적인 혼자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룰 수 없는 인연이기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힘들고 안타까운 세월, 20년이라는 격랑의 긴 세월동안 지속된 사랑은 서로의 문학 세계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깊은 울림의 아프고 아름다운 시들로 태어났다.

외길 사랑으로 외롭던 청마의 애타는 마음.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절규 같은 그리움이다.



사랑하는 정향 !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은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
울지 않는 하나님의 미련이십니까 ?

정향 !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또 한편의 시 - 애절한 유치환의 절규 - 그리움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 유치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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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이무영 등 文人들의 인간적 면모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서 유족들이 직접 회고

한국작가회의ㆍ대산문화재단 주최로 9일 오후 서울 중구 문학의집ㆍ서울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의 밤' 행사엔 유족들이 나와 탄생 100주년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들려주는 자리가 마련됐다.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외손자 김기성(SBS 기자)씨는 "청마와 이영도 시인의 연애담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오해가 많은데, 할아버지 부부는 함께 살면서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을 만큼 금슬이 좋으셨다"고 말했다.

특히 청마의 부인 권재순씨가 남편에게 기울인 정성이 지극했다고 증언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고양이가 있는 걸 보고 식겁했다. 청마가 말년에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할머니가 고양이가 효험 있다는 얘길 어디서 듣고 요리하셨던 것이다." 이런 아내의 정성에 청마는 "죽으면 열녀문 세워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청마가 고향 통영에서 교편을 잡았던 40, 50년대에 동향 출신 작곡가 윤이상씨와 맺은 깊은 교분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 교직에 있던 윤씨는 중증 폐결핵에 살림도 궁핍한 상황이라, 청마가 "큰 딸(김씨의 모친)을 윤 선생에게 줄 것"이라고 하자 부인 권씨가 "다 죽게 생긴 사람한테 왜 딸을 주느냐"며 타박했다고.

김씨는 "한때 통영 지역 학교 교가 중엔 '유치환 작사ㆍ윤이상 작곡'이 많았는데, 아마 윤씨 생계를 도우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론가이자 국문학자 백철(1908~1985)의 손녀 백지혜씨는 작년 별세한 할머니(최정숙씨)의 유품에서 찾은 할아버지 사진을 여럿 소개하며 고인을 추억했다.

84~85년 조부와 한집에 살았다는 백씨는 "할아버지 하면 2층 서재에서 책 읽고 글 쓰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며 "안 계실 땐 서재 가득한 책을 꺼내 도미노 놀이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 출신인 백철이 유실수가 많던 옛 고향집처럼 집을 꾸미려 마당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것도 손녀의 회고.

조부처럼 국문학도(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의 길을 걷고 있는 백씨는 평론가인 남편 곁에서 여러 문인들을 만났던 할머니의 회고담도 전했다. "할아버지와 친한 작가가 누구냐고 할머니께 여쭸더니 정비석, 임화를 꼽았다.

할머니는 소설가 김내성이 제일 잘 생겼다고도 하셨다. 이상은 어땠냐고 물었더니 '너무 신경질적이야'라고 대답하셨다." 백씨는 호방한 성품의 백철이 고서를 팔아 임화를 비롯한 친한 문인들의 술값을 대곤 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소설가 이무영(1908~1960)에 관한 회고담은 부인 고일신(93)씨와 함께 이날 행사에 온 딸 미림씨가 전했다. 이씨는 "자상하고 따뜻했지만, 글 쓰시느라 늘 바빴던 아버지를 독차지하려 기회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다녔다"며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백일장 심사 보는 데 따라갔더니 함께 심사 보던 모윤숙 시인이 '저 애는 왜 또 달고 나왔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오랜 구상 후에 속필로 작품을 써내려갔다"며 "자기 원고에 한 자라도 손대면 펄쩍 뛰셨지만, 어머니가 몇 자 고쳐 보여주면 '제법이야' 하며 웃으셨다"고 회고했다.

이훈성기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깃발’中) 한국에서 문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소절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시인 청마(靑馬). 원로시인이자 청마문학회 회장인 문덕수(文德守·76·1955년 청마추천으로 등단)씨가 처음으로 ‘청마 유치환 평전’(시문학사 刊)을 펴냈다. 평전 머리말에서 문덕수씨는“청마가 가신 지 어언 37년이 지났다”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지상의 가치로 생각했던 그의 문학관은 매우 인생론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버스 사고로 59세에 세상을 뜬 청마에 대해 통영출신의 시인 김춘수는 “청마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아니다. 사상가·경세가로서의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청마는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 생명파의 대가(大家)’ 같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고, ‘대인군자’로 추앙하는 후학들이 적지 않았다. 평전의 첫 출발은 청마 출생지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청마의 출생지가 어디냐’를 놓고 통영시와 인근 거제시는 작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올라가 손해배상(1억500만원)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호적부, 청마의 형이었던 유치진의 구술 기록, 문학작품 속에서 기술된 출생지 묘사, 청마가 주례를 서주었던 시인 허만하처럼 후학들의 연구와 추론 등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출생지가 통영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청마는 작곡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 등과도 광복 직후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오랫동안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 김춘수는 ‘통영읍’이란 시에서 ‘청마 유치환/ 행이불언(行而不言)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 그리고 윤이상,/ 각혈한 그의 핏자국이 한참까지/ 지워지지 않았다/…’라고 읊고 있다. 문덕수는 “대부분 행사는 아이디어 맨인 윤이상이 안(案)을 냈고, 회장인 청마는 묵묵히 따라주기만 했다”고 말했다. 또한 두 사람은 교가의 작사·작곡 콤비로도 유명했다(통영초교·통영충렬초교·통영여중·통영여고·부산고). 청마는 ‘지식인의 만년(萬年) 야당설(野黨說)’이라는 생각을 여러 곳에 남기고 있다. 자유당 때 경주고교 교장직에서 쫓겨난 그에게 4·19 직후 시인 김윤희가 찾아가 “선생님 좋으시겠네요. 민주당이 돌봐 주겠죠”라고 말했더니, “김양, 새 정권과 나와 무슨 상관이지? 지성인은 영원한 야당인 거야”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청마는 여성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다. 시인 최계락은 5000통 정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는 부인 권재순과도 오랫동안 연서를 주고받았고, 또 8세 연하의 동료 교사이자 시조시인이었던 이영도(1916∼1976)와 거의 20년 동안 편지를 교환했다. 또 문학지망생 반희정(潘姬靜), 강릉의 박명자(朴明子), 목포의 김정숙(金正淑) 시인과도 편지 연락이 있었다. 이영도와 주고받은 편지는 그 유명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는 책으로 나왔고, 반희정과의 편지도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다. 문덕수는 “서한집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남녀의 개인적·사적 밀담(密談)은 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청마는 여느 시인처럼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신, 자연, 죽음, 생명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사색의 영역을 직관적으로 넓혀 나갔다.

이런 청마에 대해 문덕수는 평전 마지막 문장을 통해 ,

“미당이 명장(名匠)이라면, 이런,- 
청마는 거장(巨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표현하고 있다.


  내 오십의 부록/정숙자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

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레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들에게 편지를 썼고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썼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울 때는 저승으로 편지를 썼고
  조용한 산책로에선 풀잎에게 벌레에게 공기에게도 편지
를 썼다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쓰며 나는 오늘까지 건너왔노라
  희망이 꺾일 때마다 하느님께 편지를 썼고
  춥고 외로울 때는 언젠가 묻어준 고양이 무덤 앞에서 우
울을 누르며 편지를 썼다
  어찌어찌 발표된 몇 줄 시조차도 한 눈금만 들여다보면
모습을 바꾼 편지에 다름 아니다
  편지는 내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혹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였다
  편지가 있어 내 하루하루는 식지 않았다
  한 가닥 화려함 잃지 않았다
  편집봉투 만들고, 편지지 접고, 우표를 붙일 때마다
  시간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또 믿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빛이 다음 번 징검돌이 되고는 했다

 

 

 -「열매보다 강한 잎」, 천년의 시작, 2006년

 

 

 

편지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습니다.
청마 유치환입니다. 청마는 여성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1967년 교통사고로 홀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20 년간 한 여인(이영도)에게 사과상자 세 상자를 채울 만큼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문학지망생 반희정, 강릉의 박명자, 목포의 김정숙 시인과도 편지 연락이 있었다고 하는데
생전에 그가 쓴 편지는 5000통 정도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유치환의 시를 좋아하던 시기에 청마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기에 사본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때는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글인 줄 알고 있었는데 꺼내보니 반희정 편저 「내죽어 바위가 되리라」 입니다.
1980년 3월301일 초판 발행이고 책값은 2.200원 세로 쓰기로 되어있는데
반희정과의 편지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 이 먼저 출간된 걸로 봐서 이 책은 제목을 바꾸어서 재출간된 모양입니다.

 

이 책에 보면은 반희정과 유치환이 만나는 계기는 반희정이 유치환에게 문학모임에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만남이 시작되는데 수락하는 답장에서 독실한 기독교도인 반희정에게 '반 선생님께서 미리 알아주셔야 될 일은 내가 예수장이 질색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 혹시 어떤 무례를 저지를지 저어되는 것입니다' 하면서 초청을 수락합니다.

 

당시 38살인 반희정은 14년이나 위인 청마의 첫 인상이 자기가 좋아하는 타이프가 아니었으며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 듯한 얼굴 모습과 걸걸하면서 여성적인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 하는데 청마는 첫만남에서 자기가 여기 온 단 한 가지 이유는 반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온 거라고 말을 합니다.

 

반희정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청마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고 몇 번 편지를 보낸 후에 청하靑霞라는 아호도 지어줍니다. 청마가 이영도를 만난 것이 37세였다고 하니 반희정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가 됩니다. 청마는 부인 권재순과도 주일학교에서 만나 편지를 보내 사귀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편지는 단순한 대화만이 아닌 듯 합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그 많은 편지를 끊임없이 썼을 것이고 어떤 고독감이나 허무함, 애련의 정서에서 나오는 극한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쉰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정열적인 편지쓰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청마를 두고 평자는 '의지의 시인' 이라고 하는데 청마는 스스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흔히들 나를 의지의 시인이라고 일컫는데 그것은 아예 틀린 판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은 나의 작품상에 나타난 경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으나 작품상의 그러한 경향은 어디까지나 나의 본질이 의지적인 아닌 때문에 그것을 갈구하는 나머지의 허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나같이 흔들리기 쉽고  꾸겨져 쓰러지기 쉬운 비의지적 나약한 心志의 인간은 드물 것입니다.'

 


의지의 시인이면서 아울러 비의지의 시인인 청마는 다분히 낭만성으로 편지의 산물인 고품격의 연시 「행복」을 남겼습니다.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반인들의 연애편지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행복」은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시작이 되는데 반희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의 첫구절이 되는 글이 보입니다.

 

'나의 청하에게.
글 안 준다고 그렇게 짜증하셨는데, 오늘은 사진과 함께 받아보셨습니까? 청하는 세 번이나 글을 보냈는데 한 번밖에 안 보내니 밑진다고 이제는 안 쓰겠다고요, 그러면서도 글 주시니 당신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진실로 애정에는 밑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은 이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니 말입니다. 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신이 봄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로 쭈욱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화속에서 청마는 '나는 노둔한 사람이요. 시를 쓰지만 요즘의 난해한 시들에 대해 실상 나 자신도 알 수가 없거든.....' 이라는 구절도 보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안 나와 있지만 50년대 후반기쯤인 걸로 봐서 현대 도시문명의 주지적, 감각적 기법으로 처리하는 후반기 모더니즘의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 편지를 우체국을 통해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이전 시대에는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연서를 보내놓고 답장이 없으면 받아보았는지 몹시 궁금하여 우체부가 지나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메일이라는 편리한 우체통이 생겨서 제대로 편지가 갔는지 뿐만 아니라 몇 시에 읽어보았는지 알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편리한 시대에 청마가 살아간다면 오천 통이 아니라 만 통을 넘게 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임보 시인은 부제목을 <시의 길을 가는 젊은이에게 띄우는 글>로 붙이고 시를 지망하는 한 젊은이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시창작 강좌'를 쓴 글도 있습니다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고 시를 쓴다는 것은 편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의 구절처럼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징검다리 같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요. 부모 형제간에 보내는 안부도 친구간의 소식도 연인끼리의 연통도 편지보다 문자나 휴대폰이 먼저 대신 하는 요즘 급한 일이 아니라면 사색을 겸한 긴 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떠실지.

만산홍엽 만추의 이 가을에...

 


 2004년 5월 17일 오후 3시부터 경상대학교 남명학관에서 "청마의 시론"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문덕수(文德守, 1928.12.8~) 교수가 강의하였다. 
올해가 77세라고 하셨다. 연로하심에도 최근 "청마 유치환 평전"이라는 책을 내셨다고 한다.
유치환(柳致環, 靑馬, 음력1908.7.14~양력1967.2.13)은 인생파,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졌는데, 
순수시를 주장했던 김춘수(金春洙, 1922.11.25~2004.11.29)와 대비된다.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유치환은 한국전쟁에서 종군했던 유일한 문인이라고 한다.
그때 남긴 시들을 1951년 9월 "보병과 더불어"로 출간했다.
청마는 이승만의 3선개헌에 반대하였고 최초로 이승만 정권을 "이승만 정권"이라고 
불러 주었다고 한다.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이승만 정권은 유치환에게
무엇으로 다가갔을까? 꽃인가? 여러가지 꽃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고 분류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의 가치 또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보는 것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보는 것은 다르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보아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불교적 깨달음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후의 객관적인 
세상은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세계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벽암록(碧嚴錄)에서 "한 송이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난다(一花開 世界起)"라는 것도 꽃이 
피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일 게다.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했고 또 정조때 학자인 유한준(兪漢雋)의 말을 인용해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는데 정보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말이다.)

청마는 1955년부터 경주고에서 교장으로 계셨는데 그때 교훈이 
"큰 나의 밝힘"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으로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에 속하는 내가 아니다"

설명이 전부 "나는 ~가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문이다. 
나(我)라는 존재는 수 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났고(생성, genesis, 존재 원인),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으며(존재양식, being, 현재 상태),
여러가지 맡겨진 역할을 하면서 살아간다(행함, role, 임무)는 말인 것 같다.
모든 사물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인간이 독립적으로 있다가 차차 사물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관계속에 태어나서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사회화된다는 것도 관계를 알아간다는 것일 게다.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 정운 丁芸, 1916.10.22~1976.3.5)와 20년간 주고 받은 
5000여통의 편지는 남여상열지사가 아니라 시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문덕수 교수는 주장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는데 청마가 남긴 글을 보면 독자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륜이던지 순수한 사랑이던지 청마의 마음은 상당히 애뜻하였던 듯 하다.
청마는 해방후 통영여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었는데(1945.10~1948.3)
여류시조시인 정운은 가사 교사로 같이 근무했었다고 한다. 
1946년부터는 문학 동인 "죽순(竹筍)"에서도 같이 활동한다.
처음 만났을 때 청마는 37세였었고 정운은 29세로 21세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마는 부인 권재순 여사와 살고 있었는데도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내용과 형식으로 나눠보면, 내용은 순수했지만 형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반희정이라는 여성과도 이런 순수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권재순부인과 만나게 된 것도 편지였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만난 
후배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내 사귀게 되었고 1928년(당시20세)에 결혼한다.
청마는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꽃을 들고 있던 소년이 
나중에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당시6세)이라고 한다.
청마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후배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슬하에 인전(仁全, 1929?~), 춘비(春妃, 1932?~), 자연(紫燕, 1935?~)를 두었다.

단테는 젬마와 결혼하였지만 어릴 때 알게 된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연인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의 시를 쓴다.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생뵈브는 유명한 소설가인 위고의 아내 
아델 푸세와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 정신적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위고는 
심한 마음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질문 시간에 인생파와 순수파의 시론이 서로 부족한 것이 있지 않냐는 질문에
문덕수 교수는 개인적으로 시의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시쓰기에서 경지에 오른다면 내용이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서정주를 예로 드셨다.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서정주의 소리가
아니라 소쩍새의 소리일거라고 하신다.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도 시인이 문둥이의 소리를 내는 거라 하신다.
위대한 시인은 개인을 뛰어넘어 마음대로 다른 존재로 변하여 그의 마음을 느끼고
그의 소리를 그보다 더 잘 낼 수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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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은 임기 4년이지만
                    시인은 임기가 없어요”
[우리동네 이사람] 영원한 소녀 반영교(반희정 조카) 시인
 
   
 

간밤엔 
별무리 속에서 
너를 보았고 
오늘은 
초췌한 풀꽃더미 속에서 
또 너를 만났다. 

나는 세월을 잊었고 
그 잊음 속에서 
記憶祭를 올렸는데 
이 가을 
스산한 바람에 묻어오는 
네 목소리 
목소리 

 

   
 

이 시(詩)는 영원한 소녀 시인 반영교 (74)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記憶祭(기억제)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며 ‘어쩌면 시인은 첫사랑을 기억하며 지은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올해 74세의 시인에게 왜 ‘소녀시인’이란 애칭이 붙어다니는지 안다. 자그마한 키에 희고 결 고운 피부를 가진 시인은 아직도 필자가 첫 사랑 운운하자 소녀처럼 볼을 붉힌다. 

반 시인은 풍기가 고향으로 1991년 문학세계에 ‘귀향’ 외 4편의 시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1995년 첫 시집 ‘하늘과 강’을 냈다. 

“반영교 시인은 우리지역 여류시인 1호예요. 등단도 일찍 했고 내가 영주문협지부장 할 때 1995년이지 영주문협 주최로 풍기농협 2층에서 출판기념회를 했어요. 감수성도 풍부하고 할매지만 늘 소녀 같아, 소녀지 뭐”영주문협 박근칠 전 지부장의 말이다. 

반 시인은 2007년 두 번째 시집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를 냈다. 시인은 시집에 이런 글을 실었다. “첫 시집을 낸지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놓자니 부끄럽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시를 사랑할 수 있는 정열과 펜을 잡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반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의 시 중에서 ‘꿈’이 마음에 들어 다포(茶布)로 제작했다며 필자에게 한 장 선물한다. 반 시인은 증조부 대부터 ‘반부자’라는 이름으로 이 지방에서 회자되던 부유한 집안의 후예다.

그리고 조부 대부터 일찍이 기독교에 눈을 떠 교회를 짓고, 교회에 봉사하는 장로만도 십 여명을 배출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시인의 동생 중 한 분은 타 지역에서 교회 목사로 있고 시인은 풍기제일교회 권사이기도 하다. 

“결혼 전 오계 초등학교와 단산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어요. 이동식 선생님이 오계초등학교 교감으로 계실 때 날 불러줬죠. 사범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게 인연이 돼 결혼 전 5년간 교편을 잡았어요. 이동식 선생님과는 인연이 깊어요. 동생 장인이 되었거든요. 또 박근칠 선생이 단산 병산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내가 쓴 일지가 있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라는 반 시인에게 “선생님, 김남조 시인 닮았다는 얘기 듣지 않으세요?”하니 반색을 하며 “그래요. 권석창 시인도 그런 말을 하던데” 하며 얼굴을 붉힌다. 

이동식 선생님과 박근칠 선생님은 아동문학가로 이동식 선생의 동시 ‘개나리 노란 배’, 박근칠 선생의 ‘가랑잎 편지’, ‘나 혼자’가 교과서에 실린 우리지역 대표 아동문학가로 반 시인과는 영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반 시인은 23세에 사촌 형부의 소개로 만난 박영기씨와 현재 반 시인이 다니는 풍기 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5년 전에 먼저 간 남편은 나보다 5살 위예요. 당시 영주군청에 다녔었는데 성품이 곧고 강직한 양반이라 정권이 바뀌면서 공직생활을 그만 두고 나오는 바람에 내가 숱한 고생 했어요. 없는 살림에 4남매 키우느라 책 외판에 보험, 화장품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보험 하니까. 생각나는데 한 번은 시누이가 부자 집을 소개시켜줬어요. 그 집 앞에 서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거야. 집이 너무 크고 좋아서죠. 그런 날 보고 우리 시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언니, 기죽을 것 없어. 이 집 주인은 퓌쉬킨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는 사람이니까.’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라며 웃으며 이야기한다. 

반 시인은 “초등학교(풍기초등) 4학년 때 교내작문대회에서 특상을 받은 나를 보고 ‘너는 이 다음에 시인이 되거라’하시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라며 초등하교 6학년 때 받은 누렇게 퇴색된 상장과 졸업장을 보여준다. 

‘작문 1등 6학년 반영교. 단기 4283년 풍기공립국민학교장’이라고 한자 세로글로 쓰여 있다. 그리고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반 시인의 어머니께서 쓰신 일기 같은 가정사 묶음을 보여주는데 그 문체가 예사롭지 않다. 반 시인의 문학적 소양은 어머니께 물려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권석창 시인에게 어머니 글을 보여줬더니 ‘문체가 한중록이나 조침문에 버금간다.’라고 칭찬해 줬어요.”라는 반 시인은 지난달 각별히 지낸 고모(반희정. 작고)에게 보낸 청마 유치환의 편지 120편을 거제에서 열린 청마문학제에 참석, 동랑 청마 사업회에 전달했다. 

“청마는 고모에게 청하(靑霞)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어요. 그리고 고모에게 쓴 편지 중에는 ‘사랑을 받은 이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니 말입니다. 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신이 봄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라고 쓴 것도 있어요. 

청마의 유명한 연시 ‘행복’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이 되는데 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의 첫 구절이 되는 글이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전 같이 많은 강의 요청은 없지만 심심치 않게 강의도 가고 애들 4남매 장성해서 사회인으로 저마다의 역할을 잘 하고 있고 아이들(손녀, 손자) 잘 자라고요. 자고나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죠.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시인은 임기도 없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국회의원도 4년 임기가 끝나는데 시인은 늘 시를 읽고 시를 쓸 수 있잖아요.” 책으로 가득한 시인의 집을 나서는데 청마의 시, ‘행복’이 머릿속에 맴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안경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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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 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20년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자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붓지 않고
구상. 김준석. 임인규 등 문학상 운영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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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마가 사랑했던 고향 '통영' 


 

 

 

간디와 영국 해군 제독 딸의 사랑


세속의 욕망을 모두 초월한 것처럼 보였던 '위대한 영혼' 간디에게도 애타게 그리운 연인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몇 해 전 인도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와 한 여인의 정신적 사랑을 다룬 전기소설이 출간되어 파문이 인 적이 있다. 인도의 정신분석학자인 수디르 카카르는 간디 탄생 135년을 기해 펴낸 전기 소설에서 간디가 비밀리에 그의 제자이자 영국 해군 제독의 딸인 미라(본명: 매덜린 슬레이트)와 애틋한 정신적 사랑을 나누었던 사실을 공개했다. 이 책은 네루 메모리얼 뮤지엄 도서관에 소장된 1925~1930년, 1940~1942년 사이 간디가 미라에게 쓴 350통의 편지를 토대로 한 실화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6년 <물레를 돌려보지만 잊을 수 없습니다 - 간디의 숨겨진 사랑>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다. 

 


로맹 롤랑이 쓴 간디의 전기를 읽고 간디의 철학에 매료된 33세의 처녀 매덜린 슬레이트는 1925년, 영국을 떠나 간디(당시 56세)가 수행 중이던 사마르마티의 공동체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된다. 간디는 그녀에게 '미라'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미라는 공동체의 일을 도우면서 인도의 독립 운동에도 참여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간디가 1948년 힌두 과격분자의 총탄에 숨을 거두기까지 계속된다. 미라는 1958년 인도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빈의 교외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누구에게도 간디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레를 돌려보지만 잊을 수 없습니다


한 편지에서 간디는 미라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당신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물레를 돌려보지만 잊을 수는 없습니다."


미라 또한 간디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이렇게 애타게 표현한다.
"나의 소중한 바푸. 그래요. 나는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그래요. 나는 뜨거운 눈물로 당신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그 눈물은 당신과 함께 있기에 행복해서 흘린 눈물이었으며, 또한 당신이 나를 또다시 보낼 것을 알기에 흘린 고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의 다리를 내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내 얼굴을 비볐습니다. 오! 나의 사랑하는 의사 선생님이시여! 당신은 내 질병을 진단하셨지만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셨는지요! 나의 질병은 당신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합니다. 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존재입니다. 먼 곳으로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시는 겁니다. 나의 의사는 내 질병의 원인이자, 또한 치료제이자, 유일한 의사입니다. ―당신의 미라로부터"


간디는 31세부터 아내와의 육체적 관계를 끊었고, 37세에는 영원한 순결을 서약해 일생 '순결'을 지켰다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수디르 카카르는 이 전기 소설이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왜곡했다는 일부 간디 제자들의 항의에 대해, '두 사람 간에 육체적 관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간디는 또 그의 자서전에 37세 때 했던 순결의 서약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나는 간디가 육체적 '순결'을 지켰는지 말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 또한 간디를 존경하지만, 간디가 사람이고 한 남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간디가 그의 제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든 간디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변할 까닭은 없다. 다만 간디 같은 사람들이 육체적 관계는 죄악시하고 정신적 관계만 지고 지선인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가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뿐이다. 어째서 간디는 미라를 그토록 갈구하고 영혼까지 사로잡혔으면서도 육체적 관계는 거부했던 것일까. 영혼을 빼앗겼으면서 순결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 통영 청마문학관 

 

 

 


몸은 만질 수 있는 영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영혼을 빼앗기고 '육체적 순결'만을 지킨 것이 진실로 '순결'을 지킨 것인가. 그것은 육체를 타락 속에 내던지고 '영혼의 순결'은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허황하다. 어째서 몸은 사악하고 정신만이 선한가. 어째서 육체적 관계는 더럽고 정신적 관계만이 신성한가. 정신이나 영혼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정신, 영혼만큼이나 몸, 육체 또한 소중하다는 말이다. 영혼의 교감 없이 육체만을 탐하는 사랑이 건조하듯이 몸 부대낌 없이 정신적 교감만을 나누는 사랑 또한 공허하다. 영육이 분리된 어떠한 사랑도 불완전하다. 영혼만큼이나 몸도 소중하다. 몸과 영혼 모두가 온전히 결합할 때 비로소 사랑은 완성된다. 그것은 몸이 곧 영혼이기 때문이다. '몸은 만질 수 있는 영혼'이다. 

 


육체는, 몸은 결코 영혼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특수 물질이 아니다. 몸이 생기면 영혼이 생기고 몸이 자라면서 영혼도 자란다. 마침내 몸이 죽으면 영혼도 소멸한다. 불멸은 없다. 한 번 받은 몸이 소중하고 재생될 수 없는 영혼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영혼뿐이겠는가. 어떠한 존재도 불멸은 없다. 모든 존재는, 몸은, 영혼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 아니라 더없이 소중하다. 그런데 어째서 간디는 영혼의 유일한 실체인 육체를 불결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영혼의 불멸을 믿었던 때문일까. 

 

 


어째서 정신적 사랑은 순결한가?


통영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불쑥 간디 이야기를 꺼낸 것은 통영 출신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과 정운 이영도 시인의 사랑이 육체적 관계가 배제된 정신적 사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이문당 서점 부근에는 청마 거리가 있다. 한국의 도시들 중 문화예술인의 이름을 딴 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 통영이지 싶다. 청마거리 중심부에 청마의 편지 때문에 유명한 그 중앙동 우체국이 있다. 중앙동 우체국 앞 공원에는 청마의 흉상과 시비가 함께 서 있다. 2008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또 남망산 아래 정량동에는 청마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에는 청마의 생가도 복원되어 있는데, 본래의 생가가 그곳은 아니다. 본래 생가는 도로 확장 공사로 철거됐고 그 자리에는 지금 통영 누비 가게가 들어서 있다. 청마 문학관에 있는 생가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문학관에는 청마가 이영도 시인과 주고받은 연서도 전시되어 있다. 한동안 청마의 출생지가 통영이냐 거제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었다. 결국, 거제는 청마가 태어나 두 살까지 살았던 곳이고 통영은 성장했던 고향으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거제에도 청마기념관이 있고 청마의 생가 있다. 묘소 또한 거제에 있다.
 

 

 

 

▲ 중앙시장 뒷길을 누비 집 앞 청마의 생가 표지석. 

 

 

 


중앙동 우체국은 청마가 사랑하던 여인 정운 이영도 시인에게 매일 편지를 부치던 곳이다. 우체국 뒤에는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경영하던 유치원이 있었고 그 유치원 마당에 청마의 창작 공간인 이층집 영산장이 있었다. 부인이 마련해준 그 작업실에서 청마는 연인 이영도에게 매일 같이 애달픈 편지를 썼고 중앙동 우체국에 와서 부쳤다. 그 편지가 무려 5000통이다. 


해방 후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청마는 그곳에서 수예와 가사를 가르치던 시조시인 이영도를 만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청마는 부인이 있었고 이영도는 상처해 혼자 몸이었다. 청마는 서른여덟, 이영도는 스물아홉. 이미 가정이 있었으나 청마는 이영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영도는 경북 청도 출신의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이다. 이영도가 통영으로 온 것은 남편의 지병인 폐결핵 때문이었다. 결핵 치료차 언니 이남도가 살던 통영으로 이주했으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영도는 교사생활과 동시에 중앙동 우체국 부근 언니의 가게 안에서 부업으로 수예점도 운영했다. 

 


통영여중에서의 만남 뒤 청마와 이영도는 점차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지만, 현실은 둘 사이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놓고 두 연인은 편지로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는 마침내 완공되었을까. 편지라는 오천 장의 공사일지를 앞에 두고도 우리는 결코 다리의 완공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그 다리는 어쩌면 건너기 위한 다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건널 수 없는 강만 있는 게 아니다. 건널 수 없는 다리도 있는 법이다. 청마는 부인이 마련해준 집필실 영산장에서 연애편지를 쓴 뒤 걸어 나와 수예점에 있는 이영도를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 바로 옆, 중앙우체국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주위의 이목이 있으니 바로 옆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보내야 했던 청마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 편지를 받아든 이영도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편지는 1946년 첫 만남 후 1967년 청마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 계속됐다. 청마 사후 이영도는 청마로부터 받은 연서를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 라는 서간집을 펴냈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2만5000부가 순식간에 팔렸다. 청마가 작고한 지 한 달 만에 이영도 시인이 책을 낸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이영도는 "자신이 먼저 서간집을 내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이 낼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영도에게 중요한 것은 이익이 아니라 청마의 가장 소중한 사랑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의 인세는 후일 정운 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죽을 때까지 간디와의 사랑을 발설하지 않았던 간디의 연인 미라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따질 일은 아닐 것이다. 이영도는 청마가 자신에게만 마음을 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은 혹시 아닐까.
 

 

 

 

▲ 통영 청마문학관에 전시 중인 유품들. 



 

 

 


청마의 또 다른 정신적 사랑 반희정



이영도의 우려처럼 실제로 청마와 그녀 사이의 서간집이 나온 직후 또 다른 여인이 청마와 주고받은 연서를 묶어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 이란 서간집을 펴냈다. 그 여인은 한국전쟁으로 상처한 교사 겸 전도사 반희정이었다. 이영도와 연서를 주고받으면서 동시에 청마는 반희정과도 연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 기간 또한 5년(1958년~1963년)이나 됐으니 결코 짧지 않다. 이영도와 20년이 아니었다면 반희정과의 5년 또한 세상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마는 이영도와 마찬가지로 반희정과도 결코 육체적 관계는 갖지 않고 정신적 사랑만을 했다고 한다. 간디가 그랬듯이 청마 또한 육체적 사랑을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정신적 사랑만을 추구했던 것일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육체적 결합을 이룰 수 없으니 더더욱 정신적 사랑에 몰두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청마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나그네는 여기서 또 한 의문에 직면한다. 당시 보수적인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청마와 여인들이 정신적 관계가 아니라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말았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육체가 배제된 정신적 사랑만을 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사랑이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는 육체적 순결만큼이나 정신적 순결이 소중하다고 떠받들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청마 부인으로서는 결코 청마가 정신의 순결을 지킨 것이 아니다. 이영도의 입장에서도 반희정과 청마가 맺었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순결이 지켜진 것이 아니다.

 



정신적 사랑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정신적 순결만은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적 사랑은 무조건 고결하다고 칭송하면서 육체적 사랑은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이중적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육체적 순결만 지키면 수백, 수천 명과 정신적 사랑을 해도 순결한 사랑인가? 


사람은 때로 정신적 사랑만 추구할 수도 있고 육체적 사랑만을 탐닉할 수도 있다. 또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하나 되는 사랑을 이룰 수도 있다. 어떤 판관이 있어 어느 사랑은 옳고 어느 사랑은 그르다고 재단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랑이 있을 뿐인 것을. 나그네는 어떤 사랑도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다만 육체적 사랑보다 정신적 사랑이 순결하다는 편견이 깨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청마는 그의 시 <행복>에서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육체적 욕망을 버리고 정신의 고결함을 추구했던 간디나 정신적 사랑만을 했다는 청마는 정말 행복했을까. 그렇다면 순결 서약까지 한 간디가 왜 350통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며 미라에게 열렬한 구애를 보냈던 것일까. 청마는 어째서 이영도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며 5000통이나 되는 연서를 쓰는 동안 반희정과도 5년이나 또 다른 연서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출처] 

 


이영도(李永道. 1916-1976)는 누구인가.

그녀의 시 세계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잊혀져가는 고유의 우리 가락을 시조에서 재현하여 현대적으로 승화시키며 간결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여성의 맑고 경건한 마음,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다스리며 관조적인 인생관을 보여준다. 

‘죽순’에 시조 ‘제야’로 등단하여 통영여중, 부산 남성여고, 마산의 성지여고, 부산여자 대학(현 신라대학)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산 어린이 회관도 운영하였다.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언약>, 오라버니인 이호우와 공동시조집 <석류(1968)>등을 발간하고 수필집으로 <춘근집>, <비둘기내리는 뜨락>, <애정은 기도처럼>,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머나먼 사념의 길목>등 일곱권이 있으며 수필가로서의 명성도 크게 이루었다. 부산의 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영도는 1966년에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취지의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청마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이영도는 20년간 이어지며 이영도에게 남긴 5000여통의 편지들 가운데 200통을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를 상품화한다는 비난도 감수하며 이영도가 예의 서간집을 펴낸 것은 청마의 이미지 훼손을 막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만5천부나 팔렸던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서간깁이다.

그 수익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 문학상(丁芸 文學賞)을 제정하여 재능 있는 시조 시인들을 지도하면서 문단에 등단시키며 시조시인을 양성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다.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 정갈한 몸가짐의 이영도,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아버지가 지방 군수인 좋은 집안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시인 이호우의 누이이기도 하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이규현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과 곧은 성격은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객지로 유학을 가지 못하고 조부모가 운영하는 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이영도는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20세에 대구의 부호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1936년에 딸을 낳은 후 신혼의 꿈도 얼마가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병약하던 남편을 수발하다 결국 1945년 8월, 29세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이영도는 결혼하면서 덮어 두었던 시조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고 1945년 10월, 통영 여자 중학교 가사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청마 유치환과의 숙명적인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유치환 ....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 1940년 가족을 이끌고 떠났던 북만주. 어린 아들을 잃고 삽이 들어가지 않는 허허벌판의 광막한 언 땅에 묻으며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인 북만주를 부인 권재순의 집요한 요구로 떠나와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고향땅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통영 여중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몇 달 후, 새로 부임한 가사교사 이영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었다. 시조시인이기도한 이영도는 평생 한복을 입었던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고독과 방황으로 북만주를 떠돌다 귀향해 통영여중 국어 교사가 된 38세의 기혼자인 청마는 새로 부임한 이영도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에, 슬프도록 빛나고 청초한 모습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다.

청마의 일방적인 혼자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룰 수 없는 인연이기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힘들고 안타까운 세월, 20년이라는 격랑의 긴 세월동안 지속된 사랑은 서로의 문학 세계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깊은 울림의 아프고 아름다운 시들로 태어났다.

외길 사랑으로 외롭던 청마의 애타는 마음.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절규 같은 그리움이다.



사랑하는 정향 !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은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
울지 않는 하나님의 미련이십니까 ?

정향 !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또 한편의 시 - 애절한 유치환의 절규 - 그리움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 유치환 -

마와 권재순여사|작성자 마당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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