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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를 읽는법
2016년 01월 01일 23시 19분  조회:5740  추천:0  작성자: 죽림
난해한 시를 읽는 법 

 

 

     
어려운 시를 읽는 법 / 신준봉

 

 

  신준봉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문학 위기론’만큼 자주 듣는 말도 없다. 3년 전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떠오른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얘기하며 한국을 사례로 들어 국내 문학판이 시끄러웠다. 1970∼80년대, ‘소심한’ 정치를 대신해 사회현실에 개입하며 번창했던 한국문학이 90년대 들어 정치적 발언권을 내준 뒤 쇠퇴했다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위기론은 30여 년 전에도 있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白手(백수)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기각성의 몸부림이다.’ 비장한 글이다. 평론가 김윤식과 고(故) 김현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1973년) 서문의 한 대목이다. 가라타니의 진단대로라면 문학이 가장 잘 되던 시기에 위기론이 일었던 것이다. 어떤 위기론은 과장 혹은 엄살인 것일까.

 요즘의 위기론은 문학의 난해함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난해함은 소설보다 시에서 두드러진다. 가뜩이나 시 독자가 줄어든 판에 문학과지성사·창비·민음사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이 점점 읽기 어려워지고 있다. 한 번 뜨거운 맛을 본 독자는 조심하게 마련이다. ‘난해’가 ‘위기’를 재촉하는 일종의 상승작용이다. 오죽하면 서울대(국문과)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은 최근 일부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難解詩)를 “정신분열적”이라고까지 비판했겠는가.

 문제는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 선호가 질타로 해결될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에 예민한 젊은 시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궁핍을 자초하면서까지 난수표 같은 난해시에 매달릴 게 뻔하다. 방법은 하나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한다. 난해시는 한편으론 한국 현대시를 풍성하게 하는 귀한 존재 아닌가.

 시인 K에게 난해시 감상법을 물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정확하게 보기로 소문난 이다. 그에 따르면 난해 시집은 우선 ‘속독(速讀)의 대상’이다. 그는 실내자전거 위에라도 앉아 시집 전체를 30∼40분간에 걸쳐 빠르게 훑는다. 이때 무언가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으면 계속 읽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둔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시집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 단계를 통과했다면 다음은 각개격파. 시 한 편을 앞에 두고 어느 시간대인지, 장소는 어디인지, 시의 화자가 무언가에 쫓기는 상태는 아닌지 등 구체적인 시의 정황을 그려보려고 노력한다. 이게 잘 안 된다면 단어 하나하나를 소리 내 발음하며 의미가 분명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는다. 이렇게 해서 시 한 편을 온전히 이해한 후 다음 시로 넘어간다.

 K는 시집 한 권 읽는데 예닐곱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장편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다. 시집이 어떤 기쁨을 주기에. “세계가 넓어지고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한다. 그의 감상법을 실천해보고 싶어진다.


  
  _중앙일보 

 

곁에

 


  심지아

 

 

 

 

  머리카락은 잠들어 있다 공기 중에서 산호처럼 흔들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쪼개진 석류의 아름다움처럼 꿈의 틈새가 벌어진다 손가락은 꿈에 잠긴다

 


  암실에는 물이 흐른다 네 혈관 속 물고기가 피워 올린 노래들 돌멩이의 형상으로 물속 깊이 가라앉는다 우주의 하얀 잠속에서 부푸는 이야기처럼 돌멩이가 자란다 물결은 돌의 꿈을 방문한다 꿈이 느리게 용해된다 손가락은 물의 뿌리처럼 돌멩이를 감싸 쥔다 네 몸속 심장처럼

 


  내 귓속 초록 밀밭을 불태우며 가꾸는 것들 네 심장 소리는 모스부호처럼 외롭고 단단한 문장으로 도착한다 너는 물기 많은 계절을 부른다 나는 장님처럼 또렷하고 모호한 너의 살갗을 쓰다듬는다

 

 

 


                            —《시산맥》2011년 여름호

 


-----------------

심지아 /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아주대 경영학부 졸업.
201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이규리

 

 

 


시멘트와 물을 비벼 넣으니 단박에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로 순식간에

안과 밖이 나왔다

 


단단하구나 너에게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비벼 넣었으니

어쩌자고 저물녘을 비벼 넣어 백년을 꿈꾸었을까

 


벽이 없었다면 어떻게 너에게 기댈 수 있었겠니

기대어 꿈꿀 수 있었겠니

 


벽이 없었다면 날 어디다 감추었겠니

치사한 의문들 어떻게 적었겠니

 


받아주었으니, 기대었으니

그거 내 안으로 들어온 밖 아니겠니

밖이 되어 준 너 아니겠니

 

 

 


                            —《문학마당》



       
 
 [평론]

난해 시에 대한 소회 

 

홍형표 
 


그러니까 난해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

대단하고 경이롭다.
사실 난해 시만큼 쓰기 쉬운 시도 없다.
자신만 아는 은유로 빤지르르하게 처바르면 그만이다.
아니다. 자신조차 몰라도 된다.
어차피 남들도 모를 테니 상관없다.
문제는 또 있다. 난해 시를 평하는 비평가다.
그들의 비평도 난해하긴 매한가지다.
그 또한 그들만 알 테니 말이다.
평범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난해 시를 깔보지 않는다.
반면, 난해 시를 쓰는 사람은 평범한 시는 시도 아니라며 코웃음을 친다.
평범한 시는 평범한 시 끼리
난해 시는 난해 시 끼리 어우러지면 그뿐
진짜, 더 큰 문제는 난해 시가 아니라 쓴 사람의 자세다.
한번은 난해 시를 흉내 내 봤더니 난리다.
그것도 30초 만에 쓴 글이다.
그래서 난, 난해 시를 안 쓴다.
난해 시라는 것이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척 시침을 떼는 것 같아
쓰기 싫다. 솔직히 못쓴다.
재미도 없고... 
이거 또 와락 할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火 超

시는 쉬워야합니다 
쉬우면서 깊이가 있어야합니다 
난해한 시는 혼자만의 은유입니다 
시는 혼자 보려는 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를 어렵게 괴롭히며 읽어주길 바랍니다 
그런 글 곤란하지요 
안 보면 그만입니다. 
제멋에 사는 것이니까요 
더러는 난해시가 수준작으로도 대접 받지요 
추천한 분이 과하게 척 하다가 그러는 건 아닌지 아리송하기도....ㅎㅎ 
그럴리는 없겠지만요 
모르는 걸 어찌합니까...ㅎ 
퇴근해야지요. 
 

 

낭만사유

글을 쓰다가 
蛇足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지를 잘라 냈더니 줄기만 남더군요

줄기만 있으니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족을 붙여 봤더니 그럴싸하게 보였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커스
 
  난해시 읽는 재미에 푸욱, 빠져보십시요,^^ 
참 난해하게 재밌습니다.홍시인님.(농담,,지송)^^* 
피카소의 그림과,,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쟝르는 틀리지만 
비슷한 맥락을 지닌 난해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쉬운 그림을 못그리는 분들은 아니구요.^^ 
애들이 설명좀 해 달라고 하면 참,,,화장실 가고 싶어집니다. 
어려워서...ㅎ~ 넘, 조잘 거렸습니다.시인님. 
즐거운 한주 보내십시요..건강은 필수과목입니다..^^ 
 

 

꿈속의 꿈

  난해 시라는 것이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척 시침을 떼는 것 같아 
쓰기 싫다. 솔직히 못쓴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요....^^ 
한국시의 근간은 서정시 라고 합니다. 
난해시도 역시 시의 한 쟝르라고 볼 수 있지만 서두, 
쉽게 읽혀지고 감동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면. 
더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더듬는 다는 것. 
골조든 가지든,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노안이 와서, 쉽게 쓰기도 읽기도 어렵습니다.^^

난해시든, 서정시든, 역사시든, 철학 시든, 선시든..... 
암튼, 좋은 시는 좋은 마음과 생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우리 홍형표님의 좋은 작품 잘 감상하고 물러갑니다. 
암튼..............^^ 
 

 

오영록
 

  참 어려운 화두지요.. 시인님. 
난해시를 써야 문학으로 인정받는 
구어를 쓴다고 결코 가벼울 수도 
깊이나 낮을 수도 없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시는 쉽게 읽혀야 하며 
그래야 감동이 생기든 말든 하겠지요 
시인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써 놓고 
독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시란 시인이 되서어 자연 발생적 시상을 가지고 
기술적 기교로 감을을 돋우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그저 
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혼자만의 시라면 
공상이나 망상이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불경/시경/3경중 시를 작하는 
사람들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는 잘 모르나 
정말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존경합니다. 홍형표 시인님... 
 

 

홍형표
  네... 그렇습니다. 평범 속의 비범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동감하는 말씀이지요. 
복잡 난해한 시를 쓰는 만큼 조금만 더 깊이 생각을 기울인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공감으로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낭만사유 시인님 가지가 무성하 건 잘라 내 건 
중요한 건 소통이겠지요. 소통의 부재를 노린다면 
구태여 시를 택할 필요가... 
차라리 입 꽉 다물고 아무 말 안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저의 짧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빠지고 싶어도 뭘 알아야 빠지고 
추상화 것도 뭘 알아야 보겠죠. 
그냥 편하게 살겠습니다. 
사실 난해의 대표 시인 이상의 시가 누구에게 감동을 줬습니까 
누가 이상의 오감도를 보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켰습니까 
마찮가지로 피카소의 추상화를 보고 누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누가 흥분으로 몸을 떨었겠습니까. 
물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아주 아주 소수의 이방인들 ... 
걍, 저의 모자란 생각이니 무지의 소치라 여겨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커스 시인님 언제 쪼~옥 할 날 있겠지요.


좋은 시는 좋은 마음과 생각// 바로 그겁니다. 
난해 시든 평범 시든 무에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만, 인격, 성품을 말함이지요. 
물론 저도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러나 적어도 
행동은 미흡할 수 있으나 가슴만이라도 정의로 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정의, 별거 아닙니다. 
타인을 업신여기지 않은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러한 것도 물론 저만의 생각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말입니다. 
여러모로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깊은 마음을 지니신 우리 꿈속의 꿈 시인님


참, 공감 하신다면서, 감을을//이케 난해한 글을 주시면 
저 보고 어쩌라는 말씀이신지^^* 
글구, 존경은 제가 진심으로 시인님을 존경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게 그러시면 복수하시는 게지요. 
뭐 그런 복수라면야 얼마든지 지요. 
하지만, 전 시인님께 그럴만한 인물이 못되옵니다. 
담 부턴 그런 말씀일랑 삼가주세요. 
그리고 그 말씀은 저만의 특허품이니 사용금집니다.

또 그러시면 놀리는 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옥천 김선근
  시인들이 모이면 꼭 약방의 감초처럼 말하는 것이 난해시입니다 
저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저는 시력이 짧아 쓸 수도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대충 훑어보는 정도지요 
제 생각으론 보다 높은 상상력과 독특한 것을 추구하는 
신춘문예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정시다 난해시다 무엇이다 하는 것은 
시인의 입맛에 따라 꼭 김치가 있는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 
당연히 포크질을 해야 식사한 것 같은 사람 
취향에 따라 식성이 다르듯 서로 누가 옳다라 
이것이 진짜다라 강요하지 말고 
공존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걱정되는 것은 시인들도 잘 해석 못하는 시를 
스피드 시대에 일반 독자들이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겠느냐 
과연 시는 시인들만의 소유물인가 
일반대중들이 쉽게 시와 교감하며 가까워 지겠는냐 하는 것이지요 
그나저나 저와 같이 쉽고도 단박에 시를 쓰는 사람으로선 
난해시를 쓰는 시인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제 눈에는 편한 길을 놔두고 암벽을 타며 모험과 도전을 즐기며 
협착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쯤 꼭 생각해 보야할 시인들의 화두인 난해시에 대한 글 
시인님 덕분에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드기
  요즘 공부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 댓글에 보면, 저같은 사람이야 어쩌고 저쩌고 하시면서두... 
필력이 속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ㅎㅎ

저는 요즘 시집 한 두어 권 더 보았더니 
저 스스로 시쓰기가 그냥 겁납니다.

시 앞에 천만 겹이 있다면 이제 한두 꺼풀 벗겨진 것 같은...

시평은 생략하겠습니다. 
시심을 오독할 것도 같고... 
아무튼, 관심 항상 가는 우리 홍 시인님.

건안, 건필 하시옵소서. 
이만 물러갑니다. 
 

 

홍형표
  네... 김선근 시인님 반갑습니다. 
제가 뭘 알아서 난해시 운운하겠습니까. 
다만 저의 좁은 생각을 나름 피력한 것 뿐이지요.

전 그렇게 생각 합니다. 
특정인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면 
그 시는 시로서의 가치를 상실 했다고 봅니다. 
모름지기 시는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는 덕목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순전히 모자란 이 사람의 짧은 견해 일 뿐입니다.

저는 난해 시를 비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진 각자의 몫에 달려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형표
  글쎄요...제가 공부를 전혀 안 한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아님 무장 많이 한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건, 중요치 않구요. 
저두 요즘 한드기 쉰님께서 뭔가 변화를 추구하시는 듯한 
느낌을 강렬하게 받고 있습니다.

두어 꺼풀 벗겨 내셨으니 나머진 시간문제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겹의 표지도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웅숭깊은 시를 꺼내실 것 같으신 시인님과는 
비교할 바 아니라 생각합니다.

늘 관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한드기 시인님 건강만한 것도 없겠죠. 
 

 


  좋은 시는 쉽게 읽히는 시이고, 더좋은 시는 어려우면서도 
잘 이해가 되는 시일것 같습니다. 간혹 요즘 젊은이들의 
전매특허처럼 어렵게 갈긴 시들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다가도 한 번 눈길을 주곤 합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나름 시공부가 덜된것 같기도 합니다. 
시는 너무 숨겨서도 안되고 너무 드러내도 안되며 
감칠맛나게 적당히 드러내고 숨기면서 독자들의 약을 
바짝 바짝 올려야 결국에는 무릎도 치면서 쾌감을 주지 
않을까요, 저는 어려운 시보다는 울림이 있는 시를 선호 
합니다만 결국은 시도 간을 잘 보아야 맛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11-08-01
 

 

청둥배락
  쨘~~~ 재미있는 토론.....ㅋ

난해시를 잘못 보고 .. 만해시라고 읽었네용. ㅎ 
만해시는 쉽게 읽혀지는데 뭔 소린가.... 오해 할뻔. 
제 눈이 난독증인 것 같습니다.

난해하면 안 읽으면 되죠. 
골 아프게 왜 읽어요? 수능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닌뎅. 
허기사 수능시험에는 그런 시 안 나오기는 하지만요.

난해한 시도 제대로 된 시가 있긴 있더군요. 
느낌으로 딱 오잖아요. 뭔가 말을 하고 있긴 있구나 하고요.

다만 악성버전시라고..... 일부러 뿌옇게 안개 뿌리고 나가는 시... 
그건 좀 그래요. 일종의 사기죠.

그렇지만 작가 당사자가 나타내려는 메타포와 내 해석된 메타포가 일치되지 않아서 
난해하게 느끼는 경우는 흔한 거 같습니다.

저는 쉽고 깔끔하고 팍팍 그림을 찍어내는 듯한 시가 좋습니다. 
사회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될 수 있는 시라고 할까.. 
그게 좋습니다.^^ 
 

 

오정자
  아프리카 사람들 백설공주 이해 못해요. 눈(雪)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들에게 말하려면 곰팡이(그들에게 제일 희다고 각인된 사물)공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나 개인의 취향까지 감안하는 것 중요합니다. 상식에 어느 정도 걸맞으면 통과. 
단, 일반인들이 봤을 때 저들만의 리그다 하는 소린 안 들어야 할 것 같네요.^^ 
 

 

홍형표
  시에는 핵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라 할지라도 핵심이 분명하면 잠시 이해를 미루더라도 
언젠간 마음을 잡아 당기기 마련이지요. 
어렵기만 하고 핵심마저 불분명 하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디카프리오 시인님께서 바른 정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변태 과정을 거치며 논리가 아닌 체험으로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시원한 해답을 주신 디카프리오 시인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쨘, 하시며 정의의 망토를 펼치시고 방문해 주신 청둥 어르신 
저도 이해하기 쉬우면서 속 깊은 시를 좋아합니다. 
제 능력의 한계로 하여 더는 깊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시인님의 구수한 입담 같으신 시에 마음이 많이 끌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무더위에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청둥 
 

 

홍형표
  이크, 그래요 머... 
제 글중에 가장 긴 대끌을 달아 주신 우리 오정자 쉰님 
부드러운 깔침을 놓아 주셔서 기분 좋습니다. 
눈을 처음 본 아프리카인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맞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프리카인들의 사고방식을 
누가 이해하고 이해 시킬까요.

문화나 개인의 취향까지 감안하는 것 중요합니다. //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를 위시한 많은 분들의 문화나 취향을 이해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제 말에 어폐가 있었다면 용서 하시구요.

우리 흠모하는 오정자 쉰님의 방문에 저는 그저 어깨가 덩실덩실 합니다. 
왜 있잖아요 걍, 이유없이 좋은 것 
감사합니당..... 
 

 

최준건
  시는 타인에게 읽혀질려는 의도 이외에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는그릇으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잘보고 갑니다...
 

 

이종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 중에도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요. 
화자는 독자에게, 독자는 화자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서로의 마음과 배려가 그 폭을 좁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시단의 화두!!!! 
난해시에 대하여 깊은 고찰의 울림 또한 깊습니다. 
홍형표 시인님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난해시는 가라, 극서정시 들고 나온 60대 시인 셋 

 

[중앙일보] 2011년.

조정권·이하석·최동호씨 새 시집
“언어 최대한 줄이고 행간 넓혀”

나란히 시집을 낸 최동호·이하석·조정권 시인(왼쪽부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게 됐다.”

 예순 줄에 접어든 중진 시인 세 명이 뭉쳤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너무 어려워 독자들이 시에서 멀어지고 있다며 ‘읽기 쉬운’ 시집을 나란히 냈다. 조정권(62)·이하석(63)·최동호(63)씨가 그들이다. 각각 시선집『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상응』『얼음 얼굴』(서정시학)을 ‘서정시학 서정시’라는 이름을 달고 냈다. 지향점을 짧고 알기 쉬운 ‘극(極)서정시’라고 규정했다. ‘서정시’ 앞에 ‘극’이라는 문패를 붙인 것은 언어를 최대한 줄이고 압축하되 행간의 의미가 넓고 깊이 있는 시를 써보겠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 출현해 ‘미래파’의 기치 아래 결집한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難解詩)에 대한 저항감은 시단에서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동료 시인은 물론 광범위한 시 독자를 상대로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들도 난해시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했다.

▶<본지 1월 14일자 22면 보도>

 세 명이 발의한 극서정시 운동은 문학전문 출판사를 거점으로 하고 있어 보다 집중력이 느껴진다. 출발부터 젊은 세대와의 대립각을 명확히 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최동호 시인은 “4월 말이나 5월 초 김종길·오세영·유안진씨의 시집 세 권을 나란히 낼 계획”이라고 했다. 중량감 있는 시인들을 자신들의 운동에 계속해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조정권씨는 “반드시 세대간 대립으로 보지는 말아달라. 요즘 시의 언어가 너무 과소비로 치닫고 있어 언어의 경제를 발휘하는 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극서정시의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최동호씨의 ‘얼음 얼굴’ 전문이다.

 “거품 향기, 찬 면도날/출근길 얼굴/저미고 가는 바람//실핏줄 얼어, 푸른 턱/이파리 다 떨군/나뭇가지//낙하지점, 찾지 못해/투명한/허공 깊이 박혀//눈 거품 얇게/쓴/홍시 얼굴 하나”.

신준봉 기자

 


       
 
 [평론]난해한 작품을 난해하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난해한 작품을 난해하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난해시는 비평가가 제 안목을 벗어나는 시에 가하는 가장 손쉬운 복수라고. 가장 손쉬운 복수이면서 가장 무책임한 진단이 또한 난해시라는 용어다."(문학동네, 2009 가을호)
한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물론 잘못된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물론 소설을 포함한 우리 문학작품이 몇몇 성공을 거두는 특정 작가의 작품이 아니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는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중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난해하다라는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된다.
물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의 숨은 소통자들을 미리부터 차단하는 효과를, 난해시는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저 시인의 평가는 옳다고 할 수도 있다. 난해하다는 평론가의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지 않는 것에 대한 좋은 핑계"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들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하는 것이, 개인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고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를 거스르면서 까지 실험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있다.
아방가르드 적인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실험이라고 말하는 것도,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궁금하다. 평론가들이 난해시라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폭력이라면, 그대들은 실험정신, 도전, 혁명, 아방가르드 따위의 말로 독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문학의 위기는 독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난 작가들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대중을 포용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 초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려운 시, 어려운 소설, 당신의 생각. 물론 다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존중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없으면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시, 소설 따위 대중은 좋아하지 않는다.
난해시라는 폭력이 비평가의 무책임한 폭력만은 아닐것이라고 생각된다.



       
 
 [문학칼럼] 陽谷 조수형 시인의『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문학칼럼] 陽谷 조수형 시인의『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을 읽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陽谷 조수형 시인의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을 읽고

                                                      시인 김형출

 

 陽谷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이 세상에 태어났다. 시집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그 심정은 책을 출간한 사람 많이 안다. 첫 시집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긴장했을까, 경험에 의하면 책 출간 뒤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시집을 다시 읽어보면 시집 한 권 안에 내 보일만 시 한 편 없다는 느낌이 들 때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만큼 시에 눈 뜬다는 희소식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위안이 된다. 그런데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은 서정을 노래한 정겨운 시어들이 오랜 친구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조수형 시인은 늦깎이에 등단한 열정적인 시인이다. 사관학교 동기요. 문학 카페 회원이며 동료 시인이기도 하다. 군대생활 할 적에 같은 부대에서 몇 개월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가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 짓는 데는 등단 경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등단 경력보단 열정이 더 중요하다. 시단에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시인이 많다. 그래서 조수형 시인은 훌륭한 시인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조수형 시인의 시 세계는 서정적이면서 난해하고 난해하면서 이해하기 쉽게 압축해서 좋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섣불리 단정 짓지는 못한다. 그만큼 시를 이해하고 시 맛을 알기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요즈음 시도 유행을 타는지 서정적인 짧은 시는 꺼리는 경향이 짙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난해한 시를 써야 만이 좋은 시인지 묻고 싶다.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이상한 난해한 시들이 활기를 친다. 난해한 시가 다 잘못되었고 나쁜 시란 뜻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특정 ‘낄끼리 문화’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한국 문단에도 서정적인 시맥을 이어받기 위해 원료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문제는 문학을 하는 사람,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 그리고 독자에게도 해당한다.


 조수형 시는 화려하지도,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순박하고 절박한 미를 추구한다. 나는 조수형 시인의 시집 제목 『속주머니 숨겨둔 사랑』에 대해 호기심과 상상력 때문에 며칠 골머리를 않았다. 그래서 우선 목차를 펼쳤다.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이란 시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부분 시집은 시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시집 제목으로 선정한다. 시를 감상하기 전에는 좀 아쉬워했다. 조수형 시인의 시집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을 몇 번 읽고는 고개가 끄떡여졌다. “아, 그렇구나!” 

 속주머니는 옷의 안쪽이나 속옷에 단 주머니를 말한다. 하찮은 물건은 속주머니에 절대로 넣어 두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속주머니에는 꼬질꼬질한 지전 몇 장을 꼬깃꼬깃 숨겨져 있다가 응석 부리는 손자, 자식에게 꼭 필요할 때 사랑으로 내밀곤 했다. 조수형 시인의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은 할머니 어머니 같은 사랑 외에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는 숨겨둔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그 사랑은 조수형 시인만이 알고 있다. 독자는 유추나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은 아마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이 아니까 생각한다. 그 사랑이 압축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바로 '너희'와 '너'일 것이다.
 

 조수형 시인은 서각이면 서각, 서예면 서예, 전각이면 전각, 한국화면 한국화 등 다재다능하다. 이 모든 것이 시와 연관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조수형 시집에 대한 시평을 해볼까 한다.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독자에게 사랑받은 시인이기를 여망 한다.


       
 
 [시창작론]난해시를 위한 변명

입춘

-증상을 앓는 허공

계절은 가장 먼저 허공에 도착한다
허공은 증상을 앓다가 새 떼를 날린다
달을 지나가는 까만 점들의 ㅅ,자 행렬이 잦을 때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사진 읽기>

 

<단순한 나의 시창작론 9 - 난해시를 위한 변명>

  위험을 무릅쓰고 욕하는 것은 용기
  별로 감수해야 할 위험도 없는데 비장하게 욕하는 것은 버릇

이 말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갑자기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리트윗을 했다(자랑질이다). 덕분에 팔로워가 1700명을 훌쩍 넘었다. 비장할 것도 없는데 비장한 각오를 밝히거나 택도 아닌 일에도 심각해 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솔직하지 못한 행태를 비판한 것인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솔직하다면 유머도 감동이고 까부는 것도 보기 좋다. 시의 솔직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솔직한 시는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가 된다. 솔직하지 못한 시는 아무리 쉬워도 용서가 안 된다. 심지어 화가 난다. 이것이 단순한 나의 시론이다.

땅이 진동하고 해일이 일 때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쳐 인간의 마을을 휩쓸 때, 인류는 그 공포스러운 사태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다. 사태 속에서 때로 신의 의지를 읽기도 하고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의 정신은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삶의 의미는 깊어졌다. 신(우주, 대자연)은 여러 가지 기호로 자신의 뜻을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알려왔다. 난해한 기호일수록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의미를 파악하고 난 뒤의 인류의 이성은 늘 한 단계씩 고양되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해석할 필요도, 깊은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중얼거림을 토하고 싶다면 굳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의미를 드러낼 필요는 적다. 시는 신(우주, 대자연)이 쓴 기호처럼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특별한 사태이다. 해독이 어려운 시의 공포 앞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울림을 만져볼 일이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기쁜 만큼 세계는 확장되고 이성은 깊어진다. 난해한 시가 늘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난해한 시를 욕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난해한 시를 생각없이 심각하게 욕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알아듣는 시를 쓴다면 그건 초딩 일기장이 될 확률이 높다.’고 귓속말로 얘기해 주고 싶다.

난해한 시는 현실적 쓸모가 없다고 보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선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마 칼이나 돌이지 시가 아니지 싶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쉽사리 파악하기 어려운 시가 그 칼이나 돌보다 더 강력한 칼이나 돌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생각의 범위 안에서만 그렇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더 깊게 세상을 베어내고 근원적으로 세상을 흔드는 난해한 시가 있다. 시가 중얼거림과 다른 이유는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깊고, 깊기 때문에 오래 간다. 오래 가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의 정신에 광범위한 충격을 줄 수 있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시를 보여 달라고, 우리는 미래를 살지 않고 현재를 사는 이들이라고. 그 말도 맞다. 그래서 나는 또 그런 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게 있다. 행사시, 행사시를 준비해 두었다.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창간일에 실리는 창간 축시가 대표적인 행사시다. 당장의 필요에 의해 쓴 시다. 그런데 그게 시냐? (개소리지) 물론 행사시 중에는 감동스럽고 위대한 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극히 드물다는 게 문제다. 나는 아직 감동스러운 행사시를 본 적이 없다.

아기의 몸짓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울음에 귀 기울이면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말이 들려온다. 그 때 엄마는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준다. 현미경과 씨름하고 밤새워 실험을 하면서 현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과학자에게는 자연의 말이 들려온다. 그 때 과학자는 노트에 새로 발견한 자연의 법칙을 써내려 간다. 사랑하는 이의 말없는 눈을 한없이 깊게 들여다보면 입의 말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말이 눈에서 들려온다. 그 때 연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내밀어 뜨거운 키스를 한다. 아기의 울음, 현미경 속의 움직임, 사랑하는 이의 눈빛. 이것들은 모두 해석을 기다리는 현상이고 무심하면 파악하기 힘든 난해한 기호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진실하게 기울이면 파악되고 해석되는 감동적인 시들인 것이다.

쉽게 파악되는 시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의미들이 솟아나는 어려운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나의 시론이다.

 


난해시의 선조(先朝) 김구용 시인의 시 한 편

고봉준령 설산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평지에 앉아 미인과 술과 더불어 노닥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김구용 시인의 시를 보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비루한 인간을 내려다보는 영혼의 거대한 얼굴을 느낀다. 김구용 선생의 시에 발을 들여놓으려다가 물러나 개새끼처럼 마구 짖어대기를 몇 번, 선생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기를 몇 번, 더러 욕설을 뱉으며 시의 저수지에 침을 뱉기를 몇 번··· 오늘은 기어코 선생의 표제시 「풍미」를 침범한다.

풍미 / 김구용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1970년)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게다가 “이리하여 돌은 노래한다” 이건 또 뭔 소린가. 그리고 두 문장이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건 또 무슨 이유인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들여다 본다.

판단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전화기의 번호판을 누르던 기억이 내겐 있다. 사랑하던 여자가 죽고 술만 취하면 그 여자의 번호를 눌렀다. 그것은 분명히 판단 이전의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쳐서 세상의 모든 사물들(돌, 풀, 길, 먼지)로부터 죽은 여자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 거리를 헤매고 술집에 앉아 열흘씩 술을 들이켰다. 미쳤다. ‘나는 판단 이전에 앉’아서 ‘돌’의 노래를 들었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 끝난 속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갈수록 태산이다. 어렵다. 뭔 말인가.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불교의 인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잎사귀는’ 우리의 불완전한 눈으로 보는 ‘생김-존재,현상’들 이전에 이미 어떤 근원적 힘(태허, 신, 우주의 원리)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색과 형태를 말하지만 시인은 그 이전의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끝난 것 속에서 시작을 보고 시작 속에서 끝을 보는 윤회’를 말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물음(의문)’ 속에서 썩지 않는 언어의 다이아몬드를 채굴해 내는 것이다. “대답은 반문하고 / 물음은 공간이니 /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 거울로 들어간다. /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낮과 밤, 음과 양의 이치를 터득한 자는 높은 자기성찰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이해하고 흡수한다. ‘너’인들 내게로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생자인 향불.” 희생은 아름답다. 고귀하고 향기롭다. 70년대의 암울했던 시기를 올곧게 살다 간 이들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향불은 죽은 자의 앞에서 기도처럼 타오르고 시인의 마음 속에는 ‘정확’한 이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한 조소가 일렁인다. 그래서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으로 한 시대를 분탕질한 자들에 대한 고요한 분노를 호소한다.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다고 맹신하는 것들의 주둥아리를 쥐어박는다.

또한, 불의의 시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도망이 아니라 당당히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거머리처럼 붙는 간사한 세파를 뚫고 ‘녹빛 도피’를 ‘아름답’게 감행하고 싶었을 것이다. “녹빛 도피는 아름답다. / 그대여 외롭거든 / 각기 인자하시라.”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개처럼 짖던 내 주둥이를 틀어막는다. 독자들이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문학평론가 김동호는 2001출간된 김구용 선생의 시집『풍미』의 해설에서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시는 술술 잘 넘어가는 술 같은 시만 찬미를 받는 것 같다. 자연 예찬의 낭만시나 바보예찬의 천국적 단순시 아니면 대중 앞에 초경을 치르는 듯한 낮 간지러운 감각시만 찬미를 받는 것 같다. 뼈속의 진액으로 쓴 시, 그 진액이 마르도록 쓴 시는 사면초가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전쟁 같은 큰 비극을 겪은 나라, 30년의 군사독재를 치른 나라의 시가 무정란처럼 아프지도 않게 생겨나와 댕글댕글 때깔만 좋아서야 될까. 시의 자존적 위상을 위해서도 깊은 고뇌의 이런 난해시는 깊이 연구, 재음미가 되어야 한다.”

10년 뒤의 오늘에도 딱 맞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백과사전 등에 소개된 김구용 시인의 약력>

김구용(金丘庸, 1922.2.5.~2001.12.28.)

▶본명은 김영탁이며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금강산 마하연에서 불교와 한학을 접했으며 19세 되던 해부터 13년 간 동학사에 기거하며 경전 및 수많은 동서 고전을 섭렵한 김구용은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전통 시서화에 조예가 깊고, 특히 추사 김정희의 예술에 대해 독보적인 해석을 지닌 한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유장한 우리말로 다수의 동양 고전들을 번역한 번역 문학가이다. 중국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시인 특유의 문재가 돋보이는 그의 번역물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건국대학교, 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56년부터 198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 시집「시」「구곡」「송 백팔」「구거」와 산문집「인연」「구용 일기」가 있고, 역서로「삼국지연의」「동주 열국지」「충의 수호전」「옥루몽」「노자」「채근담」과 편서「구운몽」이 있다. 2000년 6월에 시 전집 네 권을 비롯한 산문 전집 두 권을 새로이 교정 편집하여,「김구용 문학 전집」(전6권)을 출간했다.

▶원본 「삼국지연의」의 꾸밈없고 쾌활한 서사성과 웅혼한 문학적 스케일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살려낸 국내 유일의 한국어 완역본「삼국지연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 그 자체만을 즐기는 독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원문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려보고자 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명백하게 역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삼국지연의」의 원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김구용의「삼국지연의」가 다시 출간되는 점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김구용의 번역본에는 「삼국지연의」의 원문에 들어 있는 시문詩文이 빠짐없이 유장한 문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삼국지연의」의 본디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인물의 삽화나 부록으로 묶인 전투지의 지형도 등도 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해서 씌어진 소설이지만 김구용 선생은 「삼국지연의」를 마치 역사 기록을 다루는 자세로 번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서경호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시를 썼다. 본명은 영탁(永卓).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치고 1955년 〈현대문학〉 기자,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해방직전까지 동학사 등에서 유불선(儒佛仙)의 경전과 동서양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36년〈회고〉를 시작으로 1949년 〈신천지〉에 시〈산중야〉·〈백탑송〉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0년에는 관념적이고 한자가 많은 난해한 시를 썼는데〈탈출 脫出〉(문예, 1953. 2)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분광(噴光)의 심장〉(신천지, 1953. 6)·〈오늘〉(문예, 1953. 12)·〈슬픈계절〉(현대문학, 1955. 6) 등에서는 전쟁 뒤의 극도로 불안한 현실을 그렸다. 이어〈관조〉(문학예술, 1956. 2) 등을 발표했는데 이 무렵에는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로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시를 주로 많이 썼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실에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소인〉·〈심장없는 인형〉 등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발표한〈불협화음의 꽃〉(현대문학, 1960. 1)·〈육곡〉(현대문학, 1969. 2) 등은 원고 100장이 넘는 장시이다. 그밖에도 〈현대문학〉·〈자유문학〉에 동양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실험한 시를 발표해 현대시의 범위를 넓혔다. 1955년 제1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시집 1〉(1969)·〈구곡〉(1978) 등이 있고, 역서로 〈채근담〉(1955)·〈옥루몽〉(1957)·〈열국지〉(1990) 등이 있다.


 


 

 

선비같은 난해시인 김구용  

  추재욱교수님의 시는 난해시를 썼던 김구용(전 성대교수, 시인, 나의 친구 외숙)의 시와 공통분모가 많아 이를 소개하며, 김구용 선생님의 추모전에 관련된 기사를 옮겼습니다.

 

  김구용은 그의 시에 대한 물음에는 무언으로 일관하며 일체의 해석과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추교수님도 그러하실는지? (난해시에 훌륭한 능력이 돋보인다고 소견(?)을 피력하고 싶습니다.)

 

 김구용의 시


- 풍미(風味) -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중앙일보 2002.12.24 자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함.)
 
 

- "마지막 선비' 김구용 시인 1주기 추모 글씨전 -

 

 "우리는 동양 정신을 말살하면서까지 감성적 유행에 경도하리만큼 부박(浮薄:천박하고 경솔함)하지 않다. ···(중략)···

 

 우리는 끝까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투시할 줄 알아야 하며 순수한 정신의 원자(原子)를 추출 폭파하여 인간의 무애자성(無碍自性: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대오(大悟:크게 깨닫는 것)해야 할 임무에 있다."

 

 2001년 12월 28일 타계한 김구용 시인이 1963년 밝힌 글이다. 이어지는 이 글에서 그는 "신·인간 또는 긍정·부정뿐만 아니라 정신·물질의 일체 양반(兩反)되는 차이와 상대성을 그대로 두고도 분별이 없어지는 날이 이 지구의 미래"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김구용은 자신의 시와 글씨와 그림으로 그런 무애자성의 세계를 보여줬다. 김구용 1주기를 맞아 동료 문인, 후학들이 '구용 선생 글씨전'을 마련, 서울 사간동 학고재에서 30일까지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구용이 생전에 동료들에게 써 준 글씨나 그림 80점이 전시되었다. 시·서·화에 거침없이 두루 능했던 김구용은 또 김동리 소설집 '무녀도', 천상병 시집 '새'등 문학 단행본 제자(題字)도 가장 많이 부탁 받은 시인으로 기록된다. 해서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은 "김구용의 모든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올 속에 끼인 표현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언어로 표백하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정"이라고 평했다.

 

 일제 말기 10여년 간 절에 있으면서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면서 스님들에게 강의했던 김구용. 선(禪)적 직관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마저도 초월하려했던 그의 시·서·화 세계를 재평가하기 위해 열린 이번 추모전은 그래서 의미를 더하는 듯하다.

 



       
 
 詩의 홍수 

 

詩의 홍수
 

 

朴民宇

2012년 3월 5일,
하늘에서 홍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느 날이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이 비를 맞으며 쏟아진 쓰레기 더미에서 아주 가끔은 천재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심 詩의 의미를 말하고자 하면 주꾸미 드러누운 솥뚜껑 위에도 한바탕 땟국이 쏟아지는데 쓰레기의 홍수는 연탄불 위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다 곱창, 막창, 똥집, 소주 그리고 친구, 모두가 뒤엉켜 집으로 간다.

아침이라 하기가 무섭게 홍수는 시작되었다. 
밤새도록 내린 詩 때문에 지구촌 곳곳이 홍수에 잠기며 그 운명조차도 작가의 손을 떠나고 이제 종말을 준비한다.

내 평생 사막을 걷다가 곰보를 만나든 째보를 만나든 사람만 보면 반가운 것을 매일 보는 마누라 얼굴은 쓰레기 같더라. 
시인은 쓰레기 더미에서 천재성을 발견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쓰레기만 보일 뿐이다.


 



       
 
 십팔벽 

 

 

십팔벽

 

朴民宇

 

십팔벽 
누운 그대
오십 바람에

니기미 
오시미.

오시미 
가시미에

에라 오시미
왔다리 갔다리.

 

십팔벽 2


백팔벽 
누운 그대
五十 솟아

너의 모습
詩가 되어
돌아가리니

에라 오시미
왔다리 갔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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