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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와 초현실주의의 교주 - 조향시인
2016년 01월 03일 01시 07분  조회:5040  추천:0  작성자: 죽림
 
조향(趙鄕) 시인의 시, 에스뀌스

 



ESQUISSE

 

 


                            ―조향(趙鄕)


              1
눈을 감으며.
SUNA는 내 손을 찾는다.
손을 사뿐 포개어 본다.
따스한 것이.
―――― 그저 그런 거예요!
―――― 뭐가?
―――― 세상이.
SUNA의 이마가 하아얗다. 넓다.


             2
SUNA의.
눈망울엔.
내 잃어버린 호수가 있다.
백조가 한 마리.
내 그 날의 산맥을 넘는다.


             3
가느다랗게.
스물다섯 살이 한숨을 한다.
―――― 또 나일 한 살 더 먹었어요!
SUNA는 다시 눈을 감고.
―――― 그저 그런 거예요!
아미에 하얀 수심이 어린다.

  
             4
―――― 속치마 바람인데.……
―――― 돌아서 줄까?
―――― 응!
유리창 너머 찬 하늘이 내 이마에 차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됐어요.

  
             5
SUNA가 화장을 한다.
―――― 화장도 예술 아녜요?
SUNA의 어깨 넘으로 내 얼굴이 쏘옥 돋아난다.
나란히 나와 SUNA의 얼굴이. 거울 안에서.
―――― 꼭 아버지와 딸 같아요.


             6
SUNA의 하얀 모가지에 목걸이.
목걸이에 예쁜 노란 열쇠가 달려 있다.
―――― 이걸로 당신의 비밀을 열어 보겠어요.


             7
STEFANO의 목청에 취하면서.
눈으로 SUNA를 만져 본다. 오랜 동안.
――――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 이뻐서.
―――― 그저 그런 거예요!


             8
나의 SUNA와 헤어진다.
까아만 밤 ․ 거리 .
택시
프론트 그라스에 마구 달겨드는.
진눈깨비 같은 나비떼 같은.
내 허망의 쪼각 쪼각들.
앙가슴에 마구 받아 안으며.
SUNA의 눈망울이.
검은 하늘에 참은 많이 박혀 있다.
깜박인다.
「그저 그런 거예요」



               自由文學, 4월호(1960년)


*조향(趙鄕)전집 <열음사> 1994년 간행(刊行). 

 

 

 

 

 

바다의 층계(層階)

 

                             조향(趙鄕, 본명 조섭제)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개정신보판 現代國文學粹, 自由莊(1952간)에서 발췌하여 엮은

<열음사> 1994년 간행 <趙鄕全集> 1詩,를 원문으로 옮겨 적었음. 찬

 

 

*
시인 조향은 1917년 경남 사천군 곤양면에서 태어나
진주고보를 나와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대학 예술학원에서 수학했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첫날 밤'이 입선되어 문단에 발을 디뎠다. 
동아대 국문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역임했으나 말년은 쓸쓸했다. 
문단 쪽에서 그를 반기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해
서울로 온 뒤 그의 초현실주의 시학에 동조하는 
모임이 있던 강릉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67세, 1984년의 봄이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 조향 시비. 

열 오른 눈초리, 한 잔 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손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려다 봤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구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시 'EPISODE'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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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1917~1984) 시인은 부산에 거주했던 20년(1947~1966) 동안 한국 시에 전위적 정신과 형식을 제공하는 최선봉에 섰다. 1952년 발표한 시 '바다의 층계'와 '에피소드'는 한국 모더니즘시의 문제작이다. 두 시는 조향 시인의 대표작이자 초현실주의, 해체시의 선구작으로 손꼽힌다. 조 시인은 그림, 영화 등 다른 예술과의 접목으로 장르 패러디를 시도하고 기존 언어와 문화의 관습을 무너뜨리며 초현실주의 확산에 주력했다. 

조향 시인에게서 시를 배운 구연식(1925~2009) 시인은 초현실주의나 모더니즘을 타고 넘어 자신의 체취로 채워진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초기 시가 허무주의적 실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후기 시는 동양적 명상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소박한 언어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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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鄕 시인 연보>

 

조향 <본명:조석제>

 

 

*1917; 음력 9월 2일(양력 12월 9일) 경남 사천군 (현재의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외가에서
아버지 조용주, 어머니 강숙희의 장남으로 출생.(친가는 사천군 곤양면 환덕리)

*1920; 산청군 지곡으로 이사 (부친 산청군청 근무), 22년에는 산청읍내로 이사.

*1924; 산청공립보통학교 1학년 입학.

*1926; 아버지 실직으로 귀향, 곤양보통학교 3학년 전학.

*1927; 아버지 생명보험회사에 직을 얻어 진주로 이사, 진주 제1공립보통학교 4학년 전학

*1930; 진주 제1공립보통학교 졸업.

*1932; 진주 고등보통학교 입학, (수록 산문 「20년의 발자취」에 재학시절 자세히 회고)

*1937; 진주고보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응시했으나 실패, 대구사범 강습과 입학.

*1938; 대구사범 강습과 수료, 경남 김해 가락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본가 마산으로 이사.

*1940; 매일신문(현재의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3석으로 입선(작품;「초야」)

*1941; 일본대학예술학부 창작과 합격, 동 대학 전문부상경과로 옮겨 수학.
편지검열에 걸려 퇴학당함. 마산으로 돌아와 김수돈, 정진업 등과 교류, 일본시지에 일어 시 (詩) 투고.

*1942; 마산 성호초등학교 교사로 복직, 이듬해 함안 북월천초등학교로 전근됨.

*1945; 광복 후 마산 월영초등학교 교감으로 발령.

*1946; 김춘수, 김수돈 등과 시 동인지 《魯曼派(로만파)》 창간(4집까지 발간)

*1947; 서정주 후임으로 동아대학교 국문과 전임강사 발령.

*1949; 김경린, 박인환, 이한직, 이상로 등과 서울서 <후반기 동인회> 결성.
문총 경남지부 문학부장 겸 출판부장 역임.

*1950; 6.25 전쟁으로 동인지 《후반기》1집 조판했으나 발간 못하고 서울 동인들 피난.

*1953; 동아대학교 학보사 주간 취임(1966년까지)

*1956; gamma 동인회 결성 동인지 《geiger》1집 발간.

*1957; 문총부산지부 대표위원,

*1959; 민중서관 판『한국문학전집 35권에 시 작품 4편과
연보 수록, 문총 부산지부 주 최 제1회 부산예술제 총지휘.

*1960; 동아대학교 문리대학장 피선(1962년까지)

*1961; 신구문화사 판 《세계전후문학전집》8권인
《전후한국문제시집에 시 13편과 시작노 트 <데페이즈망의 미학> 수록.

*1062; 예총부산지부 초대 지부장, 동인회 <일요문학회> 대표 동인지《일요문학》 1집 발간.

*1963; 동아대학교 도서관장(1966년까지)

*1964; 대한교련 감사(1965년까지)

*1966; 동아대학교 교수 및 보직 사임, 서울로 이주.

*1968: 한국신시60주년기념 『한국시선』에 작품 2편 수록.

*1969; 문화방송 해설위원(문화 방면)(1970년까지)

*1972; 명지대 강사.

*1973; 초현실주의문학연구회 결성하여 1984년 작고 할 때까지 강연, 출판 활동,

*1974; 어문각 판『신한국문학전집』36권에 시 6편 수록, 초현실주의 동인지《雅屍體》창간.

*1978; 《전환》동인으로 1984년 작고할 때까지 활동.

*1984; 8.9 새벽 동해안 피서지에서 심장장애로 급서.

 

 

<가족관계>

부인 정복진 여사(생존) 사이에 3남(붕래,향래,웅래), 2녀(유영,미정)의 자녀가 있음.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
ㅡ후반기 동인 조향 시인 출생지 환덕리
 
조향(趙燮濟)시인은 1917년 곤양면 환덕리 환덕마을에서 태어났다. 환덕리는 골짜기 마을이라 마을 사람들이 무얼 먹고 사는지가 궁금하여 조한제 선생에게 물었더니 과거에는 고구마를 생산했고 지금은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고 했다. 경남도지사 조익래가 이 마을 출신이라는 것 등 이것 저것 묻고 있는 중에 이 마을 좌장 조한제 선생은 조향의 동생 조봉제에게 연락해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때사 필자는 조향 시인에게 동생이 있고 그 동생 역시 시인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을에서 돌아온 필자는 시인명부에서 조봉제(趙鳳濟)를 찾았다. 이름을 찾기 전에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최근까지 시작품을 잡지에 발표하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남자가 받았는데 조봉제 시인의 장남 조석래(63)였다. 아버지와 백부 조향 선생의 출생과 유년에 관해 묻고 싶어 전화했다고 하니 “작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알고 계시죠?”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잠시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선생의 별세에 대해 애도를 표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예를 표했다.

장남은 어머니를 바꿔 드리겠다 하여 조봉제 시인의 부인을 통해 다음의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조향 시인의 아우 조봉제는 9살 밑이다. 조향은 사천 환덕리에서 태어났지만 아우 조봉제는 산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산청에 공무원 발령이 나서 식구들이 산청으로 이사를 했다. 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뒤 진주로 이사를 나와 초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조향은 진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다시 집은 마산으로 이사를 했고 조봉제는 고등학교와 전문학교를 일본에 가서 다녔다. 유학을 마치고 마산으로 귀향했다. 여기까지가 조봉제시인의 부인이 증언한 내용이다. 조향은 거주지를 “사천 곤양--산청--진주--마산--부산”으로 이동했고 조봉제는 “산청--진주--마산--부산”으로 이동했다.

필자는 이어 조향 시인의 장녀 조유정(65)을 통해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는 것을 알았다. 조유정(장녀·65), 조붕래(장남·64·조선해운 부사장), 조미정(차녀), 조향래(차남·사망), 조욱래(삼남·48·회사원) 등이 그들이다. 조향은 알려진 대로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교) 8회로 졸업했다. 동기들은 1932년 4월 1일 입학하여 1937년 3월 5일 졸업했는데 모두 59명이었다. 명단을 훑어보니 조향은 조섭제(趙燮濟)로 되어 있고 배종호(裵宗鎬·산청 생초출신·경성제대졸·연세대 철학과 교수 역임)가 눈에 띄고 김재원(金在元·인하공대 명예교수), 안동선(安東善·대구사범·기업인·정치인) 등 이름이 보인다. 배종호 교수가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을 다닐 때 산청 생초로 귀향하면 산청군수가 길목까지 마중나와 있었다는 이야기가 산청 곰내 언저리에는 전설처럼 퍼져 있다. 학생복을 입고 흰 장갑을 끼고 지팡이를 드는 것이 경성제대의 교복 차림이었다. 권위가 군수를 눌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조향의 선배인 진주고보 7회 졸업생 중에는 교육자들이 많아 보인다. 박우진(朴宇震·전 진중 교장), 강극영(姜極瑩·전 진주고 명신고 교장), 정원용(鄭原鎔·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전 진주고 진주여고 교장·전 검찰총장 정구영·시인이자 세종대 석좌교수 정순영의 부친) 등이 있고 경남일보 사장과 개천예술제 대회장을 지낸 박세제(朴世濟)라는 이름이 보인다. 한 해 후배인 9회 졸업생으로는 구기회(具麒會), 고한준(高漢俊·전 경남대 교수), 박충권(朴忠權), 방재원(方在源), 이병선(李炳銑·전 한독실업학교장), 조무준(趙武駿·내과의사), 최기윤(崔其鈗·전 교장) 등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조향은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이어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원을 다녔다. 귀국후 교육계에 발을 디뎌 마산상고 교사를 거쳐 동아대학 교수 문리대 학장을 역임했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첫날밤’이 입선돼 문단에 올랐다. 그 뒤 동인회 후반기 멤버로 활약하고 마산에서 ‘노만파’ 동인을 이끌었다.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
ㅡ후반기 동인 조향 시인 출생지 환덕리
 
조향은 출생지 곤양 환덕리에서 아버지 공직 근무지 산청으로 가서 몇 년 있다가 진주로 나왔다.
그의 동생 조봉제 시인이 산청에서 났고 그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일가가 진주로 나와 산 것으로 보인다. 조봉제의 출생지는 문학사전에 따라 다르다. 어떤 데는 ‘산청’이고 어떤 데는 진주로 되어 있다. 진주에서도 옥봉동에서 났다고 적혀 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조봉제가 산청에서 났지만 전국적으로는 산청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봉제 스스로 진주 출생으로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의령 출신이나 함안 출신들이 서울 사람들에게 마산이 집이라 한다거나 하동이나 산청, 함양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 진주에 집이 있다고 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겠다.

조향 시인의 제자로 사천 사남면 출신 고 구연식 교수가 있고 진주의 수필가 고 김토근, 시인 이덕이 있다. 조향 시인이 우리나라 초현실주의를 끌고 간 대표적인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제자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초현실주의의 향도로 활약해 왔다. 구연식 교수는 조향의 제자이면서 동아대 국문과 후배교수로 봉직했다. 구교수의 시도 그런 형인데 1955년 조봉제 이인영 등과 초현실주의 동인 잡지 가이가(Geiger)에 참여하고 1962년 첫시집 ‘검은 산호의 도시’를 내어 서정 일변도의 시단에 작은 파장을 주었다.

이덕 시인도 동아대 재학 중 그 가이가 멤버였다. 부산 광복동 다방이나 ‘태백싸롱’을 드나드는 멤버는 조유로, 하근찬, 이호진, 그리고 구연식이었다. 이덕 시인의 시도 경남문학이나 진주문단에 주로 발표해왔는데 시인들 중 가장 이질적인 시를 쓴 것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슈르풍인 점에서 스승의 주장에 합류하는, 철저한 가이가 시인으로 초지일관하는 미덕을 보여 주었다. 조향 시인은 시집 한 권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집고 있다.앞으로 그의 시집을 묶어내는 견실한 출판사가 나오길 기대한다. 어쩌면 경남대학교 박태일 교수의 지역문학 탐구 시리즈에 얹힐지도 모른다. 그간 박교수는 지역문학 총서를 그가 지도한 연구가들과 함께 내고 있는데, 김상훈전집, 포백 김동한전집(한정호), 정진업전집, 신고송문학전집(김봉희), 허민전집, 서덕출전집, 파성 설창수문학의 이해(김봉희 외) 등을 내면서 업적의 탑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소리없이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다.

조향처럼 이덕 시인도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스승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덕시인은 “조향 시인은 캠퍼스 안에서 멋쟁이었어요.상아 파이프에 양담배를 반으로 잘라 비벼넣고 연기를 후 불어내었지요. 술은 양주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인상은 언제나 단정했어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양복 바지는 칼날같이 줄이 섰어요. 양복을 입고 학교에 나온 학생에게는 ‘너 완월동 한 번 다녀와라.’고 농담반 진담반 권고하는 것도 보았지요. 이런 언행이 슈르풍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덕 시인은 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생은 교과서를 직접 저술해 강의했고, 서양 이론에 해박했다는 기억이 납니다. 당시 ‘사상’(월간), ‘신태양’ 등에 연재를 했고 졸업생들 취직 추천서를 귀찮다 하지 않고 써주었지요. 나도 추천서를 하나 받았지만 써먹지 않았지요. 그리고 학교신문 시단에 시를 써내면 조선생께서 뽑아 시평을 써서 발표를 시켜 주었는데 나는 3번 발표를 한 기억이 있어요. 김토근 수필가는 1번 뽑혔어요.“

인터넷에서 본 자료 가운데 K모씨의 회고를 읽어보면 조향시인이 동아대학교 교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나온다. 당시 J씨가 총장이었는데 느닷없이 조향 교수가 총장 후임 출마설이 떠돌았다는 것이다. 술집에서 나온 설인지, 근거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조향 시인은 오너 총장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아닌가. 조향 시인은 결국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1967년경 필자가 명지대학에서 열린 국어국문학 학술 발표회에 갔을 때 조향 시인이 주제 발표자에 끼여 있었는데, 그때 먼빛으로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셈이었다.

====================================시 바다의 층계 해설==========

 

 

 

         -<한국전후문제시집>(195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초현실주의적, 모더니즘적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현대문명과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된 인간의 명암이 미묘하게 깔리면서, 도처에 극적인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하다. 대개 이미지는 시인의 관념의 도구로써 쓰이게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이미지 그 자체로 동원되어 한 편의 시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순수시, 절대시가 되고 만다. 초현실주의 시가 난해하면서도 읽으면 매력이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시는 1950년대 초현실주의 작품을 썼던 조향 시인의 대표작이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평자들은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원리를 도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는 특이하게도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무의식의 자동기술을 시작(詩作)의 근간으로 삼는 초현실주의 시들은 일반 독자에겐 매우 생소하고 난해하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산문적 · 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상상의 영역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의 심상을 발굴한 후 그것들을 비약 · 충돌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시풍을 우리 현대시에 실험한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않은 걸로도 유명하다.

앞서가거나 독창적인 사람은 대개 이단적이고 저항적이다. 그것이 도전과 공격에 대한 유일한 자기방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귀재나 천재들의 이해하기 힘든 기벽이나 기행 등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과 문학적 이념이나 노선을 달리하는 다른 문학 집단이나 문학인들과는 아예 교류를 기피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론화 · 작품화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이며 완고하고 집요하게 자기 영역을 고수했다. 1956년에 조봉제, 이인영 등과 '가이가(Geige)' 동인지를 내었으나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고 전한다. 196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사회정화위원회의 악역을 맡아 부산지역 예술인들의 경원과 기피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이하다. 그는 항상 당당하고 세속적 평판에는 초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곁에는 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비난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나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연애를 한다. 겉으로 도덕군자연하면서 뒷전에선 온갖 부도덕을 자행하는 위선자들과는 다르다. 초현실주의는 가식을 가장 싫어한다. 사랑이란 삶의 원동력이자 흐르는 물처럼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조향 시인의 장례식 장면을 신태범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유족들과 조객들의 흐느낌 속에 천천히 고인의 관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어내며 흐느끼고 있던 한 여인이 갑자기 관을 붙들며 절규했다. "선생님! 이렇게 혼자 가시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잠시 의혹의 시선을 모았다. 첫눈에도 빼어난 미모의 그 여인은 모두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여인은 관을 내리고 있는 사람의 팔에 매달리며 계속 울부짖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이 묻어주세요!" 1984년 여름 초현실주의 시인 조향(1917~1984, 본명 조섭제)의 장례식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 시를 왜 낯설게 써야 하는가 

낯설게 하기, 즉 데빼이즈망(depaysement)의 본뜻은 고향(paynatal)에 편히 길들어 있는 것들을 일부러 낯선 곳, 타향으로 보내 불편하더라도 낯가림을 겪도록 유도한다는 뜻을 지닌 불어의 어휘(de-paysement)에서 연원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선 표현, 낯선 기법에 의해서만 독자나 감상자의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낯익은 것들은 지겹도록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낯익은 것들은 낡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우리의 지각을 자극시키기는커녕 우리의 의식을 게을러지게 하거나 무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는 농담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재미있는 표현에 웃음이 났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들었을 경우는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훌륭한 문학 작품이란 사물을 이화(異化), 끊임없이 낯선 관점으로 이끌어냄으로써 감상자, 관객, 독자의 의식을 혁신적으로 일깨워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이나 언어 습관은 일상화되거나 기계화, 자동화되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기법으로 기존의 의미나 의식을 파괴하고 자율적 언어에 의한 독창적 의미의 틀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적인 언어와 자율적인 언어의 차이란 평범한 보행과 예술가의 춤, 안무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문학적 언어 표현, 즉 자율적인 언어란 무용가가 창의적인 동작을 만들어 안무하는 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와 반대로 일상적인 걸음걸이는 누구나 타성에 젖어 다만 걸어다니는 것 그 자체, 보행만을 의미하므로 무용가가 취하는 낯선 걸음걸이나 예술적 동작, 무대 위의 스텝과는 아무 연관도 없고 목적의식 자체도 다른 것이다. 자율적인 언어란 새로운 표현,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무기력한 언어습관에 의해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세상을 새롭게 자극, 각성시킴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김영찬)

[출처] 바다의 층계-조향|작성자 꿈꾸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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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외 2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구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리를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 개정증보판 現代國文學粹, 자유장 (1952)

 

 

 

 

 

 

✽1연 1행과 3연 2행을 필자가 행 가름했음.

 

 

 

바다의 層階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개정증보판 現代國文學粹, 자유장 (1952)

 

 

 

砂丘의 古典

 

 

 

 

 

木版 古書를 넘기는

孔子

蒼然한 시간의 上流에서

침침한 咿 唔

 

 

伽藍 병머리에 석양이 퇴색하고

외로운 文王鼎

 

 

東坡冠 고쳐 쓰고

때묻은 보선

銀長竹 빼어 물고

모두 양반이었다.

 

 

Magi는 西쪽으로만……

 

 

砂丘를

靑午 타고

「아라비아」로 가는 老子

달이 파아란 구역질을 한다.

 

 

캐라방은

희미한 童話를 싣고 가고 오고,

 

 

새지 않는

東洋,

다음 페에지에서

낭랑한

지각생 點呼 소리

 

 

- 韓國戰後問題詩集, 新丘文化社(1961)

 

 
 

 

초현실주의의 교주, 조향 시인 에피소드

                     

                                             이유식

 

조향 시인은 1917년생으로 1984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특히 부산에 거주하고 있을 50년대나 60년대에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쉬르레알리즘의 이론가이며 실천가이었다. 그가 봉직했던 동아대학교에서는 자기류의 목소리로 명교수란 명성을 얻었고 또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는 가히 우상이요 교주였다.

그는 1940년에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가 입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조향은 필명이고 본명은 섭제이다. 일본의 시와 시론을 읽고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앙시단에 널리 알려진 것은 46년도에 출발한 시 동인지 ‘로만파’에서 박목월, 김춘수, 유치환, 서정주, 이호우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면서 부터였다. 그 다음이 ‘후반기’동인으로서의 참가였다. 이 동인회는 비록 49년도에 결성은 되었으나 6.25가 나자 부산으로 피난해 온 김경린, 박인환, 이봉래, 김규동 등과 모더니즘을 다시 계승하며 발전시킨다는 취지로 출발은 했다.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회원 간에 뜻이 맞지 않아 비록 2년 만에 끝나버린 모임이긴 하지만 대신 시인으로서 그의 이름과 교류의 폭은 넓혀주었다.

그는 경남 사천군 곤양면 출신이고, 진주고보를 나와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 니혼대학을 중퇴했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용모는 맹랑 궂은 듯 하면서 예리해 보였고 평소에 늘 멋쟁이 인상을 풍겼다. 동아대학 설립자인 정재환 총장과는 처남매제 간인데 갓 30 나이인 1947년부터 일찍 동아대 교수가 되었고 그후 학장으로 또 도서관장으로 있었다.

내가 조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문단에 나와 2,3년이 지난 60년대 초반의 부산시절이었다. 그분이 주재하고 있던 동인회 ‘일요문학회’모임에 평소 알고 지내던 그 동인 중의 한 사람이 조시인과는 바로 고교 동문이 아니냐며 해서 인사도 드릴 겸 그냥 구경삼아 두어 번 참석 한 적이 있다. 같은 서부 경남 출신에다 현재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고보의 후배라고 그나마 다정히 대해 주었다. 모교 진주고보로 보면 평론가로서는 제 1호요 또 자기 뒤를 바로 이은 고교의 문단 후배로서는 두세 번 째라면서 매우 기뻐도 했다.

그런데 그분은 그의 저돌적 성격과 안하무인 격의 유아독존적 행동 때문에 부산에서 종종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나 직접 알게 된 이야기만 해도 서너 가지가 된다.

첫째가 6.25 때 이야기다. 부산 피난시절 삶의 뿌리가 뽑힌채  서울에서 내려온 문인들을 갓 30대 초반의 나이에 교수라는 단단한 신분을 바탕삼아 심한 홀대를 했다. 마치 부산지방의 성주인양 중앙문단이 이제는 자기의 휘하에 들어와야 한다는 듯한 언행을 보여 눈엣 가시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수복 후 그는 중앙문단에서 완전 고립되다시피 되었다.

두 번째는 60년대 초에 있었던 세칭 동아대학 학생들의 ‘부산일보 습격사건’ 이다. 당시 조시인은 44세였는데 이 사건은 그가 조종했다고 뒤에 판명되었다.  시소유로 되어 있는 구덕공원을 동아대학이 캠퍼스 확장을 위해 그 점유를 기도하자 부산일보가 크게 반발하여 여론몰이에 나셨다. 이에 부산일보를 타도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동원해 부산일보사로 몰려가 난동을 부리게 했던 사건이다. 부산 지역신문과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사건이다. 이 일로 차기 총장 자리를 노린다는 낭설이 돌고 또 총장과도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자 결국 20여 년간 봉직했던 대학을 물러나 그 후 60년대 후반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 왔던 것이다.

세 번째는 김상옥 시인과의 불화와 맞고소 사건이다. 평소 부산사회에서 김상옥 시인과 조향시인은 견원지간이었다. 마침 62년도에 한국문학가협회 경남지부장을 김상옥 시인이 맡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조향시인과의 사이에 고소사건이 발생했다. 조시인은 결국 지부 회원에게서 제명처분을 당했는데, 이에 관한 일련의 사건 역시 지역신문에 크게 오르내렸다.

네 번째는  많은 염문도 뿌렸다. 그중 김춘방이란 시인과의 연애사건이 부산 사회에서 한때 화제가 되었다. 김시인은 경기여고  출신의 재원이었다. 6.25 전쟁 중에 중국인과 뜻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동아대 국문과 대학원의 제자가 된 것이 인연이었다. 그녀는 60년대 광복동의 멋쟁이로 통했다. 까만 스카프에 까만 원피스를 즐겨 입고 다녔는데 조향의 시에 자주 나오는 ‘검은색’을 직접 의상에다 실천하고 다닌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그녀는 70년대 초에 서울로 올라 왔는데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고 전화가 와서 한번 만났는데 결국은 자살로서 인생을 종지부 찍었다는 소식을 아주 늦게야 알았는데 웬지 가슴이 아팠다.

또 하나 들은 일화가 생각난다. 어디서건 초현실주의 교주라 그를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서 장례식 날 하관할 때 26세의 초등학교 여교사가 관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저도 함께 묻어 달라’ 고 울부짖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저런 화제를 남긴 조시인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70년대에는 명지대에서 강사생활을 했고 또 생전에는 시집을 내지 않았던 분으로 유명하다. 시의 자동기술법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이외의 물건을 갖다 놓고 낯 선 충격을 창조한다는 ‘데페이즈망’ 기법 등 이른바 초현실주의의 시학을 금과옥조처럼 선전 했던 그는 성격 때문에 고립을 자초된 셈인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그는 능력도 있고 재치와 패기도 있는 시인인데 결국 부산에서건 서울에서건 어쩌다 시단의 주류에 들지 못하고 동시에 문예지에서도 소외를 당해 늘 변방에서만 맴돌다 이렇다 할 큰 평가를 받지도 못한 채 참 아깝게 간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동인활동 외에는 달리 없었던 듯도 싶다. 그처럼 동인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문인은 우리 문단에서는 그 아무도 없다. 50년도 전후에 결성된 ‘후반기’동인, 56년도에 결성된 ‘가이거’(Geiger)동인, 62년도에 결성된 ‘일요문학회’동인, 그 후 서울로 옮겨와서는 73년도에는 ‘초현실주의 연구회’를 만들었고,78년도에는 다시 한국시의 새로운 변모라는 목표 아래 김차영,박태진,박희선,이원섭, 정귀영과 함께 ‘전환’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이외에도 한두 개 더 보탤 수 있는 동인 활동도 있는데 이런 모든 사실들이 바로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해주는 사례들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 서부 경남 출신의 대선배 아니 나의 모교 진고 대선배의 이 글을 마치며 하나의 교훈을 얻고 있다. 비록 좀 시대가 지난 듯한 문학운동에 일생을 바치다시피 했지만, 뭐니 해도 문단 활동에서는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자기관리도 중요하단 사실을 확인해 보고 있다. 만약 조시인께서 이런 인간관리를 잘만 했다고 가정하면, 그의 시단의 위상은 물론 평가도 훨씬 달라졌을 것이고, 달라져 있으리라 본다.

   아무튼 극히 소수였지만 그를 따랐던 후배나 제자들에겐 하나의 신화였고 우상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한국에서 초현실주의라면 그를 따를 자 아무도 없었으니 다시 재평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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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ㅡ조향의 빛과 그늘 <상>


극우 이념성향… 문단'이단아' 낙인
군사 정권시 매카시즘 광풍 주도
스캔들 폭로·신문사 테러 전력도
현대시 업적, 저돌적 기질에 묻혀

 
   
 
조향은 항시 빨간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는 시인으로 보였다. 빨강 물감을 가득 채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뿌리고 칠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는 페인트공은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현대시의 전파자요, 창조자인데다 그 힘이 쩡쩡 구덕골을 울리는 동아대 교수였다. 아니 교수 중의 교수로 자부했던 사람이다.

그만큼 그 자신의 시나 쉬르레알리슴에 관한 강의는 딴 사람의 추종을 용납하지 않는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기성문단에선 아예 기피당하거나 상종하지 않으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부득불 그에 대한 사나운 인심의 근원을 찾자면 한국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눠 그가 인심을 잃은 얘기를 해야겠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이념 문제를 들고 나와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더구나 5·16군사쿠데타 때는 군부가 지휘하는 사회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그 나름대로의 안목으로 대상자를 골라 빨강 리스트에 올리는 역을 맡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 보조역을 맡은 그의 제자 교수가 증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어느 날, 서울의 박남수 시인이 부산에 내려왔다. 전화로 '부산 커피'에 좀 나오라는 것이었다. 광복동에 있는 이 다방은 조향이 잘 가는 곳이었다. 얼른 내키지는 않았으나 필자를 문단에 데뷔시켜 준 분의 말이라 거역할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 놀랍게도 박남수는 조향과 마주 앉아 있지 않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내색은 할 수 없고 차를 함께 마셨다. 비단 박 시인뿐 아니라 피란 온 북한출신 문인들이 그의 붉은 리스트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 일단 빨간색으로 낙인찍히면 살아남기 어렵고 살아난데도 생존자체가 위협을 받는 때가 아니던가. 박남수는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맨 먼저 자신에게 페인트칠을 한 조향을 왜 만나는 것일까. 박남수 시인은 "그가 나에게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라고 짤막하게 털어 놓았다. 용서를 빈 자에 대한 예우로써 부산에 오면 맨 먼저 만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관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이데아 문제'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페인트칠을 한 경우지만 다른 사례 하나는 얼굴에 페인트칠을 하여 창피를 준 일대 폭로사건이 있었다. 부산이 피란 수도 때이다. 당시 주간지에 한 페이지에 걸쳐 김동리와 손소희와의 스캔들이 대서특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조향이 직접 제공하고 쓴 기사였다. 이들 두 작가는 정식으로 재혼이 이뤄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파문이 일었다. 두 사람이 한낮에도 남포동 한가운데를 팔짱을 끼고 활보한다니, 그들의 아지트가 영주동 산기슭에 있다느니 하는 매우 구체성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피란지 부산 문단이 곧 중앙문단이었던 시절이다.

피란 온 문인들은 물론 부산쪽 문인들까지 충격을 받을 만한 기사였다. 조향의 저돌적 기질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기성 문단의 우상에 대한 파괴적 행동양식이라고나 할까. 해석 나름의 폭로기사가 그를 일약 겁을 모르는 '부산의 나이트' 쯤으로 인식되게 했다.

그런가 하면 70년대에 와서 동아대의 캠퍼스 확장 문제와 구덕공원 점유관계를 둘러싸고 부산일보가 시민 편에 서서 동아대를 한창 공격하고 있을 때 그가 부산일보를 타도하는 일선에 나섰다. 윤전기에 모래 한 줌 뿌리면 끝장 보는 일이라고 부산일보 바로 뒤에 있는 마로니에 다방에 앉아 거의 공개적으로 테러를 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대생들이 편집국에 난립, 곤봉을 휘두르고 집기를 부수는 등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위의 몇 가지 예를 보듯이 그가 극우적 행동 양식에 젖게 된 것은 해방공간에서 좌파인 건준(建準) 일부 적색인사와 투쟁한 전력 이후라니 그 속내를 소상히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서울 등지의 예술인들에게도 이념적 공세를 가해 기피인물로 간주됨으로써 그의 쉬르레알리슴 운동조차 순수하게 바라보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향의 문학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가 재직한 동아대에 대한 충성은 지극했다. 부산일보를 상대로 한 그의 행동만 봐도 총장이 탄복할 만한 일이 아니던가. 감히 신문사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다니….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차기 총장을 노린다는 모함에 휩쓸려 동아대를 떠난다. 그가 당시 병원에 입원중인 정재환 총장을 만나 해명하려 했으나 정 총장은 이미 결심을 한 터였다. 조향은 예닐곱 번이나 병상을 찾아갔다. 총장은 조향이 왔다하면 눈을 딱 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쪽으로 오면 총장은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저쪽으로 다시 가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을 확인한 그 날 돌아와 짐을 꾸리고 무작정 서울로 떠나야 했다.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ㅡ조향의 빛과 그늘 <하>


거침없는 연애 즐긴 고독한 별
여교수와 팔짱끼고 광복동 거리 활보
장례식때 젊은 여교사가 관 붙들기도
문단서는 냉대받아 쓸쓸한 말년 보내

 
 
 
쉬르레알리슴의 왕국에서 미완의 황제로 군림했던 조향. 그는 일상인으로서, 자기류 시학의 명교수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한 인간으로선 끝내 한을 품고 사라진 고독한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부산의 환락가는 광복동 거리였다. 서울의 명동과 진배 없었다. 조향은 이 거리를 너무 당당히 보란듯이 D대 체육과 여교수와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쯤은 예사로 여겼다. 60년대는 지금의 시각과는 아주 딴판의 시대였다.

조향은 이 거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도 스스로 팔짱은 풀지 않는다. 언제나 푸는 쪽은 여인 쪽이다. 조향은 거리에서 제자를 만나 곁에 팔짱을 끼고 오던 여교수가 팔을 풀면 그 여교수를 향해 "좋아하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뭐가 부끄럽고 죄가 된다고 주저해. 여기 걸어 다니는 저 신사들도 알고 보면 다 위선자야." 그는 이렇게 사뭇 비분강개조로 설파한다. 도리어 제자들이 질려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 여류 시인 김춘방과는 아예 드러내놓고 팔을 끼고 다녔다. 필자도 여러 번 목격했던 사실이다. 김춘방과의 사이에 낳은 딸애를 집에 데려와 기른다는 말과 자기 큰딸이 그 애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 이전 50년대 후반에는 같은 과의 제주도 출신 J양과의 염문이 파다했다. 그는 23세 때 첫 결혼했으나 첫 부인과의 중매에 불만을 품고 초등학교 교사시절 동료와 사랑에 빠지고, 일본인 여교사와의 염문이 말썽이 되어 좌천되기도 했다. 줄곧 별거 해오던 첫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지만 그의 여성 편력은 그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속말을 숨기지 않고 털어 놓는 제자가 바로 신라대 총장을 역임한 시인 김용태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여인들을 가까이 두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 사람아,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 사랑이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라고 말했단다. 이를테면 명예나 돈이 아무리 있어도 애틋한 사랑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다. 김춘방이 늘 불쌍하다고 말해 왔다. 춘방이 일탈의 삶을 산 까닭도 6·25전쟁 중 중국인과의 뜻하지 않은 결혼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녀가 나중에 자살한 것도 결혼 생활의 불행과 더불어 아들의 걷잡을 수 없는 탈선이 복합되었기 때문으로 보고들 있다. 그녀는 경기여고를 나왔고 부산 최초로 부산극장에서 발레를 추었고 그 뒤에 시를 썼다.


 
  용두산 공원 내 조향 시비. 
 
그는 여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초현실주의는 위선을 가장 혐오한다. 그것이 사실주의와 다른 점이다. 연애를 하려면 위선적으로 사실주의적으로 하지 말고 자기처럼 초현실주의로 당당하게 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60년대의 일이니 망정이지 요즘 같은 세태였다면 조향은 여인 편력 그 하나만으로도 강단에 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의 여인 편력은 서울에 가서도 쉬지 않아 기어이 장례 날 하관 때 일이 터졌다. 조향의 시신을 하관하려 할 때 26세의 초등학교 교사가 관을 붙들고 늘어졌다. 사랑은 당당히 초현실주의로 해야 가장 순수한 것이라는 교조적 신앙을 가졌던 그의 초현실주의의 연구회 회원이 주위의 눈을 전혀 의식치 않고 몸소 실천한 것이다. 대담하게도 관을 붙들고 "선생님! 저를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리고 "저도 함께 묻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이 지나치다 보니 옆에 있던 부인이 "저 년도 어서 같이 묻어라"고 고함쳤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의 시비는 사후에 용두산 공원에 '부산을 살다간 시인' 속에 포함되어 다음 시가 돌에 새겨졌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손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려다 봤다. /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구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EPISODE' 전문)

시인 조향은 1917년 경남 사천군 곤양면에서 태어나 진주고보를 나와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대학 예술학원에서 수학했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첫날 밤'이 입선되어 문단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일찍 동아대 국문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역임했으나 말년은 쓸쓸했다. 문단 쪽에서 그를 반기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해 서울로 온 뒤 그의 초현실주의 시학에 동조하는 모임이 있던 강릉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67세, 1984년의 봄이었다. 문학과 일상의 행위가 모순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비록 그의 죽음은 릴케 같은 아름다운 모순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문학은 문학대로 평가해야 하는 경우다.
\\조향시인 일화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시인 김상옥의 익살


"예수는 도적… 나는 예술의 킹…"
특유의 해학… 전세 살며 고가 백자 구입
12세때 시 발표, 반일로 세차례 감옥살이

조향과 법정싸움 벌여 사과 받아내기도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조시인이었던 김상옥 선생의 생전 모습.
 
초정 김상옥이 부산 남성여중에 재직할 때 처음 찾아 뵈었다. 고교 졸업반 학생으로서 그의 시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런 용기를 부린 적이 없는 주제에 문단의 대가를 만나볼 생각을 실천에 옮겼던 것은 내겐 대견한 일이었다. 필자가 그의 시조집 '초적'을 비롯, 시집 '고원의 곡' '이단의 시' 등 처음부터 나온 작품집을 죄다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몹시 반가워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내 이름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때 받은 미소가 몹시 따뜻하여 가슴에 오래 남아 있었다. 초정이 처음 시를 발표한 것은 12세에 쓴 동시 '꿈'이다. 이 시인과 가장 오래도록 친근했던 역사학자 김재승 씨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193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 때 프린트 판 교지(여황의 여록)에 발표한 것이다. 대단한 조숙이다.

그는 일찌감치 타고난 재간의 소유자였다. 초정은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의 주술사로서 우리 시사, 특히 시조문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나아가 시적 재능의 발휘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남다른 민족애를 지닌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였다. 일제 때 사상범으로 세 차례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장기간 할 정도로 정의감, 민족애를 가슴에 불덩이처럼 안고 살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고달픈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수많은 진정한 애국지사들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미온적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격은 칼날 같은 데가 있지만 그런 성깔은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예컨대 부산시절인 1960년, 동아대 교수이자 시인 조향이 주관한
부산예술제를 가리켜 "예술제가 아니라 마술제"라고 비꼬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향이 발끈한 것 까지는 이해하지만 급기야 모 일간지에
초정을 두고 남의 시를 훔치는 '도벽시인'이라고 모함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초정의 격분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무학이나 다름없는 초정이 대학을 배경으로 업은 교수의 힘이 막강한 줄 알지만
그렇다고 굴할 수는 없었다.

김상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조향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사회저명 인사들과 문인들, 특히 월탄 박종화, 미당 서정주를 비롯하여
문단 중진들까지 흔쾌히 서명에 동참했다.
이미 피란시절에 서울 문인들을 홀대하여 인심을 잃은지 오래인 조향을 상대한 싸움이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판정에서 조향은 원고를 벌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고,
초정은 "조향을 엄벌할 것"을 바란다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과오를 인정한 조향으로부터 화의 제의를 받아들여
서울과 부산의 일간지에 사과광고를 내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초정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교사자격증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만년 강사로 지냈지만 어느 정규교사보다 든든하고 존경받는 그런 교사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교과서에 몇 편씩이나 실려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서·화 삼절에다 전각까지 그 솜씨가 비범하여 찬탄을 들을 만했다.
그런 반면 너무 엄격한 나머지 제자를 일상적인 정분에 얽매여 문단에 추천한 일이 없다는 사실,
정부가 주는 문화훈장 같은 걸 거절하는 기개에 이르면 보통사람이 쉬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초정은 또 특유의 재치와 해학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해 양가가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의 주례를 맡은 적이 있다. 자신은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성경을 들고 갔다. 양가 가족과 친지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첫 마디가 "예수는 이 지상에서 가장 큰 도둑입니다"로 시작되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말자 참석한 교인들은 모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자못 비분강개하는 분위기였다. 혼란스러워질 판이었다. 곧 이어 "생각해 보세요. 인류역사상 예수만큼 오래도록,
그리고 많은 인간의 마음을 도둑질해간 분이 또 있습니까?
마음을 많이 뺏기면 뺏길수록 행복한 것이 우리 신자들 아닙니까?"라고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이만한 비유법을 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화가 났던 교인들이 웃으며 돌아갔다는 일화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스스로 자신을 한국의 '스리 킹' 중의 하나라고 했다.
권력의 킹은 ..., 돈의 킹은 이병철, 예술의 킹은 단연 자기라고 했다. 그 이유란 이렇다.
자신이 2000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 때 4000만 원짜리 조선조 백자를 샀다.
이병철이 백자나 청자를 10억 원을 주고 사는 것은 쉽다.
자신의 경우처럼 전셋집값의 배를 던져 사는 것은 그만큼 예술품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가 그 점에선 왕임을 자부한다는 익살이다./국제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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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수녀의 오브제

     조향(趙鄕 1917.12.9~1985.7.12)

​  하얀 아라베스크 짓궂게 기어간 황혼

  낙막(落寞)이 완성된 꽃밭엔

  수 많은 수녀의 오브제.

  인생이라는. 그럼.

  어둠침침한 골목길에서

  잠간 스치며 지나보는 너를…….

 

  영구차가 전복한 거리거리마다에서

  비둘기들은 검은 까운을 휘감고

  푸른 별이 그립다.

 

  내가 서 있는 소용도는 상황에

  짙은 세피어의 바람이 분다.

  까맣게 너는 서 있다.           

 

  네가 사뿐 놓고 간 검은 장미꽃.

  내 이단(異端)의 자치령에

  다시 꽃의 이교(異敎)를 떨어뜨려 놓고.

  들국화 빛으로 하늘만 멀다.

 

  taklamakannakamalkata

  사막의 언덕엔 갈대꽃

  갈대꽃밭 위엔 파아란

  이상(李箱)의

  달.

 

  달밤이면

  청우(靑牛) 타고 아라비아로 가는

  노자(老子).

 

  꽃잎으로 첩첩 포개인

  우리 기억의 주름 주름 그늘에서

  먼 훗날 다시 서로의

  이름일랑 불러 볼 것인가!

 

  패배의 훈장을 달고

  예상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하면…….

 

  포르말린 냄새만 자꾸 풍기는

  새까만 지구 위에서

  어린애들의 함잉 소리만 나고‥….

  메아리도 없이 하 심심해서

  나는 요오요오나 이렇게 하고 있다.

월간 『현대문학』 1958년 12월호 발표

 

 

   

 

 

조향(趙鄕 1917.12.9~1985.7.12) 시인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는 그의 동생이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를 중퇴했다.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했고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했다.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이다.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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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전설

 

조향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반생을 낭독하는 청승맞은 소리 밤이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을 또박또박 흘리면서 내 곁에 서 있고 진흙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엔 전갈이 따악들 붙여 있다 참새 발자국 모양한 글자들이 마구 찍혀 있는 어느 황토 빛 영토의 변두리에서 검은 나비는 맴을 돌고 아으 다롱디리! 안타까비의 포복(匍匐)이 너의 나의 육체에 의상(衣裳)처럼 화려하구나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 나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나면 물보라 치는 나의 시커먼 종점에서 앙상하게 걸려 있는 세월의 갈비뼈 사이로 레테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검은 수선꽃을 건져 든다 쌕스폰처럼 흰 팔을 흔드는 것은 누굴까! 팔목에 까만 시계줄이 감겨 있다 인공위성 이야길 주고 받으면서 으슥한 골목길로 피해 가는 소년들의 뒤를 밟아 가니까 볼이 옴폭 파인 아낙네들이 누더기처럼 웃고 섰다 병든 풍금이 언제나 목쉰 소리로 오후의 교정을 괴롭히던 국민학교가 서 있는 마을에 아침마다 파아란 우유차를 끌고 오던 늙은이는 지금은 없다 바알간 석양 비스듬히 십자가 교회당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이 명멸한다 소롯한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너는 온다 지도를 펴 놓고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를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늦으리 눈이 자꾸 쌓인다.

 

<자유문학, 1958. 12>

 

  작가 : 조향(1917-1984) 본명 섭제(燮濟). 경남 사천 출생. 일본에 유학, 니혼[日本]대 상경과 수학. 유학중 반일사상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체포. 194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첫날밤」이 당선되어 등단. 광복 후 마산상고 재직시에 『노만파』를 주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이어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한편 『가이거』, 『일요문학』등의 동인지 주재. 동아대 문리대학장 명지대 강사 등을 역임.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산문적․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상상의 영역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의 심상을 발굴한 후 그것들을 비약․충돌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시풍을 우리 현대시에 실험한 대표적 시인이다.

  생전에 시집을 남기지 않았다.

 

 

< 감상의 길잡이 >

  조향은 기성의 문학적 질서와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고 새로운 작품의 창작을 선언한 <후반기> 동인의 일원이다. 전후세대 시인들의, 전세대의 암울하고 상투적인 문학에서 벗어나 1950년대 즉 20세기의 후반기 문학을 선도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후반기> 동인의 시에서도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암울과 해방공간의 혼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는 일몰 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와 화자의 심경의 변화가 검은색을 주조로 하여 암울하게 묘사되어 있다. `까아만 비로오드', `진흙빛 말갈', `검은 나비', `시커먼 종점', `검은 수선꽃', `까만 시곗줄', `어두운 마음' 등의 검은색이 당시의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오전의 공백(空白)'이 `바알간 석양'으로 바뀌는 저녁 나절에 깃든 것은 마치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과 같은 스산함이며 `마지막 피'가 연상시키는 절망과 희생뿐이다. 멀리 `항가리아'에서 소녀들이 `탱크에 깔려 간'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지는 `지구'와 `내일'에 대한 불길한 상상과 묘사가 이 시의 주제이다.

  `내일이면 늦'을듯이 눈이 자꾸 쌓이는 암담한 석양 풍경이 곧 화자의 내면풍경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레테의 강물'로 흐르면서 망각을 일으키고, 이러한 망각의 흐름 속에서 시간과 인생이란 `잠시 놀았'다가 `허겁지겁' 석양이 되는 해의 모습처럼 늘 조급하고 무의미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간에 화자는 `지구의 레이아웃' 즉 `지도'를 펴놓고 우울한 미래와 같은 `검은 전설'을 예감하고 있다.

  시인이 검은 색과 우울한 풍경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과 일상의 평화가 존재 조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폐허 의식으로 확대되는 도시 풍경일 것이다. 전후의 세상이란 시민들의 합창이 가득한 새로운 도시를 꿈꾸었던 젊은 시인들도 벗어나기 힘든 마치 늪과 같은 침체이며 우울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다.
[해설: 이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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