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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2016년 01월 02일 05시 04분  조회:5462  추천:0  작성자: 죽림

1.<용어사전>

해체주의[deconstruction, 解體主義]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학이론으로 1960년대에 프랑스의 비평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제창한 비평이론을 말한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전체성, 즉 신(神)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表象), 중심과 주변 따위 이원론을 부정하고 다원론(多元論)을 내세운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현상에 대하여

 

 


Ⅰ.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현대에 이르러 한때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명확한 개념이나 한계가 분명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세련됨의 대화의 대명사처럼 마구 사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대체로 모더니즘 뒤에 나타난 예술 문화의 운동이라고 이해되었지만 이는 사상 영역의 후기 구조주의와도 대응하고 있다.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이 하나의 경향은 문학 및 전 예술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현대 사회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모더니티의 이성상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급진화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인간이 견인하는 역사의 진보성, 사회의 합리화, 주체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실제라는 모더니티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을 지적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기존의 관념들을 해체하고 요란하게 분해, 조립하여 정작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저에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해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체 현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대중문화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어떤 의의를 가지며 문제점을 무엇인가?

 

본론에서는 이러한 '주체의 죽음', '인간의 종말' 현상의 근저에 있는 해체 현상에 대해 철학적 시각에서 근본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조건 거부가 아니라 진리, 규범, 양식 속에 깃들어있는 절대성과 중심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며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중심이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게 된다. 데리다, 푸코, 료타르, 라캉, 하버마스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진리관을 거부하고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을 통해서 여러 가지 탈주체 이론 - 특히 현대 프랑스 철학계를 중심으로 - 을 그 형성 배경과 함께 제시하며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중심화 해체 현상이 문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분야에서 그 특성이 나타나지만 특히 문화에서는 문학, 미술, 연극과 대중문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특히 '작가의 죽음', '메타픽션'등으로 대표되는, 문학 분야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체 현상은 열병처럼 퍼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써 기존의 이론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에 입각해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존 사상을 비판하고 주체를 해체시키는 관점의 이론들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는 그러한 탐구가 활발해짐으로써 포스트 구조주의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자체적으로 가진 모순점역시 많이 비판되고 있다. 따라서 결론에서는 이러한 해체 현상에 대한 전반적이고 개괄적인 관찰과 의의 및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며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논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Ⅱ. 본론

 

1. 해체 현상에 대한 철학적 이해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히 문학, 예술 면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몰고 왔다. 이렇듯 복잡 다단한 변화들 중에서 중심된 특징과 경향을 살펴보고자 할 때 사회와 개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는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 되므로 먼저 이에 대해 알아보아야 겠다.

 

1) 해체 이론의 기원과 생성

서양의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자아의 발견이라고 할 때, 인식의 주체, 사유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탐구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아 중심의 철학은 자의식의 풍부한 활동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창조적 능력과 상상력을 강조하여 창조적 주체, 자유로운 개인을 핵심으로 삼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한 토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표방하는 것은 주체에 의해 파악된 객관적 실재가 진리의 기준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회가 이성의 힘에 의해 총체적으로 합리화될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념의 거부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성 중심의 세계상이 해체되고 거시적 일반 이론도 거부되며 인식론 상의 기초 이들은 서구에서 상식처럼 통용되어 온 견해, 즉 이성적 '주체'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마련하여 '진리'로 비이성적인 현실의 장막을 제거하고 '이성적인' 사회,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적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모든 관계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성 중심주의 , 과학지상주의 , 체계화와 총채성의 이념은 해체와 다원화 탈중심과 불연속으로 대체된다. 이성과 비이성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고 의미의 능동적 창출자로서의 주체는 갈가리 흩어져 종말을 맞이한다.

 

특히 이 모든 해체 현상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선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체의 해체'현상이다. 사실 '주체'라는 개념 자체는 모호한 것으로 인식의 주체 일수도 있고 정치권력의 주체 일수도 있으며 인간의 자의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우선성과 보편적 타당성을 제공하는 절대절명의 원리인 이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세계를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특권화된 인식의 주체이며 자신의 삶과 역사의 원동력을 우리는 주체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은 의미의 능동적 구성자이며 창조적 인물인 이성적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성적 주체라는 것은 인간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구성된 존재와 인식자연과 타자 등의 모든 세계관적 문제를 주제 삼고 있는 것이다.

 

'신의 죽음'을 주창한 니체에게서 인간의 규정은 사고의 핵심을 이루며 우리는 그의 철학을 '자아의 해체 작업'이라 명명할 때 그러한 점에서 니체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은 고대로부터 이성을 가진 동물로 구분되어 왔으며 데카르트이후 근세 철학은 이성을 '자의식'형태로 전수하여 철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데카르트에게서 확실한 학문의 기반으로서의 사유, 칸트에게서 모든 통일성의 기반으로서의 초월적 자아의 통일성, 헤겔에게서 모든 현실성의 기반으로서의 객관정신등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의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도치된 인간 이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인식을 "인간의 핵심, 영원한 것, 근원적인 것, 확고히 주어진 것"등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과대평가와 오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우선적이고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하고 모순된 욕망과 의지의 충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충돌로부터 일종의 화해, 계약이 성립되며 그것이 곳 우리가 일컫는 지성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의식이나 지성이란 결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원리에 입각한 독립적 능력, 모든 다른 비이성적 충동들을 상호간의 투쟁이 서로 화해하며 끝날 때까지의 최후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힘, 의지로서의 생의 힘은 의식이 아니라 충동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체에게서 의식은 생의 비본질적 부분적 영역으로 축소되어 이해될 뿐 아니라 나아가 생의 가장 약한 부분, 가장 표피적이며 가장 나쁜 부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니체에게서 의식이란, 인간에 의한 특수한 내적소여방식을 뜻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여 충동이나 기쁨이나 고통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간접적인 소여, 즉 언어를 매개로 하여 주어진 것을 뜻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한마디로 '언어적 파악', '언어적 사고'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의식의 기원과 기능을 밝혀 주는 단서는 바로 의사 전달 기호로서의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 사고를 따르는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인간 각자의 본래적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일반적이며 군중적인 속성에 속하게 하여 자의식이란 것도 역시 인간의 개별적 자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의 길은 못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의 본질을 개인의 고유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존재'에서 찾았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이상과 위대함은 오로지 신의 속성으로 피안에서 설정된 가치이며, 차안의 인간은 단지 작고 힘없는 왜소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는 더욱 심화되어 끝에는 인간이 너무도 왜소하여 신의 위대한 자체가 인간에게 자기 모순적으로 나타나 결국 인간이 신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의 대비자로써 생각되고 세워진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에 의해 파멸되고 만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인간이 곧 신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신의 살상자라고 강조하는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에 의해 설정된 가치, 피안적 진리, 불변하는 진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본래적 자아가 되고자 하는 인간은 사고되고 의식된 표상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에 의해 자유로운 긍정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인간은 그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 나가야 할뿐이며 자기 자신을 자신 이외의 다른 이상이나 목적 아래 둔다거나 혹은 자신을 표피적 의식이나 일반화된 군중의 척도에 따라 평가하고 그에 예속시키려 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의 철학 정신을 한마디로 일반성과 군중을 앞서는 인간 각자의 고유성과 개별성의 강조, 즉 실존의 강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반형이상학적 정신들은 하이데거에 이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계승되고 그들에 의해 니체의 정신은 방법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심화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와 동일한 맥락으로 연계되어 있다. 즉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해체 이론의 발달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관점에서도 그 이전의 입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새로운 철학적 입장은 주로 프랑스에서 1960년대 말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하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가장 잘 대변한다. 해체 주의를 포함한 포스트 구조주의는 후기의 롤랑바트르를 비롯하여 데리다, 푸코, 라캉, 료타르 그리고 들뢰즈 등의 이론가들이 주로 주창하였다. 이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삶의 실재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실재를 편린적,이질적,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에 회의적이면서 '존재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있다. 몇몇 철학자들이 흔히 '주체의 죽음'으로 일컫는 현상이다. 이 '주체의 죽음'은 장소의 고정성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 역사에서의 권위나 가치의 확실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의미한다. 또한 거대 이론의 붕괴를 몰고 와 신학과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각 분야에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① 자크 데리다

 

지난 60년대 후반에 등장해 오늘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해체 이론은 서구인들의 바로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잘 표출해 주고 있는 중요한 사고 체계이다. 이의 창시자인 자크데리다는 <<문자학에 대하여>>(1967)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해체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레비스트로스등 이에 앞선 구조주의자들역시 전통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할 때는 과학적 방법 등을 사용하여 접근하였다. 그들이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방법이나 가설, 가정 등에 의존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체계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우선, 서구의 형이상학적이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언어인 글보다도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언어인 말에 더 우선권을 주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이 글보다 더 본원적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전통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말 역시 글처럼 불완전한 이차 언어에 불과하며 서구인들이 말속에 현존해 있다고 믿는 본원적 의미란 다만 착각일 뿐 사실은 부재 속에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자신의 이론을 <문자학grammatology>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문자학 또는 해체 이론은 신이 사라진 시대, 곧 절대적 진리가 사라진 시대의 이론이 된다. 해체 이론은 아직도 신의 음성 곧 절대적 진리가 현존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시대착오적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에 도전하여 그것들의 눈먼 확신을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체제전복적 이론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 이론은 서구 사고 체계 전체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는 서구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문화와 사상은 사물을 둘로 나누어 그중 첫 번째 것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두 번째 것은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양분법적 태도 위에 세워져 있다. 데리다는 바로 이와 같은 이분법적 태도가 그 동안 사회의 모든 구조에서 타자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배제시키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고 합법화시켜 주는 논리적 근거의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 스며들어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지배올로기의 억압 구조를 드러내 보이고 그 횡포를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데리다는 그와 같은 양분법적 흑백 논리가 실은 상호보족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며 그 둘 사이의 경계에 해체를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해체 이론의 궁극적 목적은 인식론적 변혁을 통한 지배 체제의 해체가 된다. 그러므로 '해체'라는 말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탈구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은 예전부터 항상 그에게 고유한 종말로서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종말이다"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절대적 진리에의 확신이었다고 하며 그 현존을 부정한다. 그의 해체 이론에 따르면 진리란 당대의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언술행위이고 또다른 진리를 침묵시킨 결과로 얻어지는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체 이론은 진리와 허위의 오랜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데리다는 해체 이론을 통해 이성, 질서, 총체성 등의 존재와 회복을 신뢰하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비이성, 무질서, 파편성 등을 특성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해체 이론은 가시적인 투쟁 대상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투쟁 대상까지도 찾아내어 붕괴시킬 수 있는, 현대의 고도로 복합적인 시대의 한 효과적인 저항 이론이 된다.

 

②질 들뢰즈

 

데리다가 철두철미한 반개념적인 철학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들뢰즈는 철저히 개념 철학에 의존하여 차이가 이 세계의 철학적 원인임을 규명해 나간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인정함은 존재가 곧 차이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복은 차이의 대긍정이며 그러므로 긍정을 역설하고 찬양함은 존재하는 것에 기대는 수동적 측면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분석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야말로 자연인에 가깝다고 보고 그야말로 기호의 세계에서 살면서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의미의 경계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체가 사회적으로 분절된, 훈련받은, 기호화된, 주체화된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된 것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정신분열증에서 찾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를 긍정하고 창조하고 평가하는 자는 원한과 질투에 의해 비교하는 비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반복하는 영원 회귀는 동일성이 없이 연루된 세계 속에서 서로 서로 손잡고 있는 차이의 세계와 같다. 존재는 사실상 하나의 다양성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철학은 어떤 전체성도 거부하고 중심이 없는 것이다.

 

③ 료타르

 

료타르는 전체화, 중심화, 절대화는 그것을 통한 획일화를 조장하게 되므로 그것을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합리화하려는 행위와 차이점보다 동일성을 창조하는 행위를 비판,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료타르는 보다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가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투쟁과 갈등이 불가피하게 생기고 그런 사회적 갈등과 압력의 해결을 위한 보편적 법칙일 인간이 발견하기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인간관계는 '언어 놀이'와 '문장 놀이'에서 표출되고 이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문장 놀이는 쉽게 다른 사람의 것과 일치되지 않는 각자의 특유 어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철학이 큰 체계를 중시하는 것에 반대하여 '조그만 이야기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④푸코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총체성의 관점은 그 자체로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는 기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진리'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투명한' 사회를 목표로 삼는 혁명적 이상이 전면적 감시 프로그램과 연결된다고 본다 (이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푸꼬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연속적이고, 특수하고, 지역적인 비판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꼬는 해석의 다원론을 강조하며 열려진 해석학적 체계를 선호한다. 그에게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곤 없다. 모든 것은 이미 해석이며, 모든 기호는 그 자체가 해석에 제공된 사물이 아니라, 다른 기호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세계에 관한 공유된 합의일 수 없고 그 상황에서의 힘의 균형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푸꼬는 사회· 역사에 관한 총체적 지식이 권력에 대한 주장을 지닌다고 본다. 그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밝히듯이 그것은 배제의 체계--참과 거짓의 구분, 특정한 담론에 대한 금지 등--에 의한 것이다. 참과 거짓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명제의 의미는 과학적 담론이 짜여진 실천의 체계와 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제도적 배열은 항상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나타낸다.

 

푸꼬는 어떤 체계도 실재의 복합성을 밝힐 수 없다고 보고, 그 자신의 탐구의 무질서하고 파편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체계적 통일을 거부한다. 이처럼 그는

참된 지식의 이름으로 걸러 내고, 위계화하고, 질서지우는 단일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항하며, 견고하고 동질적인 이론적 地形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이고, 비특권적이고, 정당화되지 않은 지식에 머물고자 한다. 푸꼬는 '보편적' 지식인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지식인은 자신의 작업장, 수용소, 병원, 연구실, 대학 등에서 특정한 투쟁에 충실해야 한다. 이론은 단지 특수한 투쟁에 봉사하는 도구 상자일 뿐이며, 그것의 유용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곧바로 버려야 한다.

 

한편 푸꼬는 권력 이론을 크게 3가지로 구별한다. 즉 1)'경제적' 이론, 2)권력을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비경제적' 이론과 3)권력 관계를 일종의 '전쟁'으로 보는 자신의 관점으로 대비시킨다. 권력을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 또는 그물망으로 본다. "권력, 그것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유된다기 보다는 행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계급의 '특권'이 아니며, 전략적 상황의 효과이다. 따라서 국가를 지배계급의 정치적 도구로 보고, 권력의 핵심을 국가 기구로 이해해서 모든 권력 현상을 국가 기구에 의해 설명하는 방식은 일면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권력이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고 '권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권력은 자연, 본능을 억압하고, 개인이나 계급을 억압한다고 본다 (헤겔, 프로이트, 라이히 등의 견해). 권력을 권력이 오로지 제한하고 구속하며, 금지하는 법률과 금지의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푸꼬는 권력을 단순히 금지하는 힘으로 보지 않고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으로 보며 일종의 전쟁, 적대적 세력 관계들간의 상호 투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감시와 처벌>>을 통해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푸꼬는 18세기 후반에 감옥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일반화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규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감옥 제도를 규율적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면서 이런 권력이 사회 전체에 침투해서 현대 사회를 규율적 권력이 편재하는 '유폐적'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고 본다. 푸꼬는 이러한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이 인간의 신체에 주목하면서 그 신체를 권력이 작용할 수 있는 유용한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권력의 작용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작업장, 군대, 감옥, 병원, 학교 등--에서 규율이 생산, 수행되는 일정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규율적 권력이 '위계질서적 관찰'과 '정상화하는 판단'을 결합시킨 형태를 통해 작용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이 '정상화하는 판단'이다. 이것은 일탈을 없애 그것을 정상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이를 위해 일정한 정상적 질서를 정해 놓고 사소한 위반에 관해서도 처벌한다. 그래서 일상 행위의 가장 미세한 측면을 특정화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처벌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정상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않거나 반항하는 자들은 규율의 감시, 처벌, 교정 대상이 된다. 푸꼬는 이와 관련해서 인간 과학이 탄생하고, 그것은 개체들을 인식론적 무대 안에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정리, 분류된 기록은 권력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체를 길들이고, 유용하게 만드는데 최대한 이바지하게 한다.

 

푸꼬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고 특질화하는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권력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화의 생산과 축적, 유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권력은 '진리'를 생산함으로써 작용한다. 푸꼬는 권력이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 사실은 정신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규율 체계는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를 심화시키면서 모든 개인을 정상적으로 기능 하는 위계질서의 한 지점에 배치시킨다. 이처럼 '비정상성', 위반이 배제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안으로 흡수, 통합된다. 그리고 규범적인 것의 '보편적' 지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권력이 완성된다.

 

푸꼬는 지식을 지식 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입장--역사유물론,사회학주의 등--을 거부하고, 지식이 의식과 관념의 (제도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입장--인간학주의--도 거부한다. 푸꼬는 인간 과학의 관리적 역할, 권력과의 공모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지식과 권력은 쌍둥이며, 지식 자체가 권력이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용한다. 모든 지식 형태는 그 자체가 권력의 형태이며, 동시에 그 존재와 기능에서 다른 형태의 권력과 연결된 의사 소통, 기록, 집적, 대체의 체계가 없이는 행사될 수 없다. 푸꼬는 권력과 지식이 서로를 함축하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강화시킨다고 본다. 그는 지식-권력이 지식의 형식과 가능 영역을 결정한다고 본다.

 

⑤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는 언어의 상대성과 불명료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관을 비판하게 된다. 언어 자체가 확실한 것임을 전제로 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사실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나 자각 이외의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는 무기력한 것에 불과하나 그러한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적 진리 그 자체를 언어 속에 붙들어 둘 수도 없으며 언어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사유, 전략 따위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과 유리되어진 진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에 의해 통제되고 발견되고 창조되는 진리란 이미 절대성을 손짓하기보다는 상대성을 드러내게 된다. 절대라는 말은 그러한 상태가 결핍된 인간이 만들어 낸 욕망과 미몽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언어가 환기시켜 주는 느낌은 일종의 현기증이나 현혹 작용을 일으켜 구원, 초월, 절대, 중심 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주관과 그 주관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은폐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롤랑바르트, 데리다, 푸코등은 언어에 기반을 두는 진리관을 철저하게 해부하며 그것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 허구성을 사유의 공간 속에서 소멸시키려 한다. 나아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인식론적, 역사적, 미학적으로 훨씬 다채롭게 발전시킨다.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 중심적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화 현상을 이론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2. 문화에서의 해체와 탈중심화 경향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과 예술 전통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안고 있는 모순과 한계, 예술적 허상을 비판하는 문예적 개념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 부분에서 시작하여 문학과 미술, 연극등 다양한 분야로 퍼져 갔는데 이는 기술의 발달과 사회 변화로 인한 문화의 패턴이 변하여 대중매체에 뿌리내린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면서 더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제국적 자본주의가 다국적 자본주의 형태로 세계 시장에 파고드는 것을 도와주는 후기 자본주의 논리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징을 '미학적 대중 주의, 문화 생산물의 깊이 없음, 역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비판적 거리의 말소, 재현 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판단의 공통적인 현상인 해체 현상은 문학에 경우 특히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이후 현대문학 이론의 전개와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데리다가 해체 이론서인 <<문자학에 대하여>>에서 보여주는 탈중심지향은 활발한 유희와 해석 작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중심의 횡포나 억압과 현존을 거부하게 했다. 그는 체제 내부에서의 해체 작업을 위해 패러디와 다원성 긍정의 두 가지 책읽기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에 상호 텍스트성, 파편화현상, 메타픽션 등의 경향을 보이며 현재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 상호 텍스트성

 

'상호텍스트성' 현상은 다른 문학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중시한다. 하나의 작품을 텍스트라고 한다면 작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의도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하여 장르 개념을 해체시킨다. 상호 텍스트 성은 무조건적인 모방이 아니라 비판이 개재되어진 텍스트의 적극적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독창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진정한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마치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작가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작가는 더 이상 초월적인 신으로 간주되지 않고 한낱 언어라는 재료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생산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이 보여주는 의미란 무엇인가. 이는 무엇보다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비판으로 형성되었고 독자성, 또는 독창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창작을 둘러싸고 있는 규제를 비판해 자율과 자유를 철저히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탈 장르, 탈 양식의 일환인 상호텍스트성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함유되게 되는 생명력이 중시되게 되었다. 각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비평이 독자적 기능의 하나였던 해석은 중시되었다. 소설은 영화를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회화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상품광고의 한 장면을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고전주의 문학작품을 텍스트로 하기도 한다. 여기에 패러디와 혼성 모방까지 뒤엉켜 사실상 장르나 양식 개념은 해체되고 있다.

 

여기서 작품의 형식적 요소는 더 이상 판단이나 비판의 기준이 되지 못하며 중요한 것은 작품이 지닌 설득력이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아닌, 텍스트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재창조로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는 장르 개념이나 양식 개념을 비판하여 양식상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대항 문화'의 기능을 함유하려 드는 것이다.

 

2) 파편화 현상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적인 비젼의 제시나 모든 현상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분산화, 파편화의 방법을 지향하게 된다. 전체화를 지향할 할 경우 중심을 만들고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 내며 구체적 현실과는 유리된 이념의 허구적 중심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전체적 현상보다는 미시적이고 파편화된 현상에 접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 분야에서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차용하여 개인 서술의 단편적 나열을 통한 심리묘사 방법을 쓰는 현대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아무런 상관도 없고 의미없을듯한 장면의 나열로 총체적 이미지를 주는 광고들에게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구체적이며 파편화된 현상에 대해 접근하며 그 미세함 속에 나타난 세계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도외시되었던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묘사를 거리낌없이 함으로써 도덕의 구현이나 종교적 구원, 이념의 생활화 따위의 식상한 구호들과는 먼 거리의 현대인들의 좌절감을 그려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총체적인 개념 제시보다 후기 현대사회의 인간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은 전체적인 전망이나 총체적인 시도가 가지는 거대 체계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써 제시되고 있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점을 부각해 본성의 차이를 비롯하여 사유와 구체적인 현실간의 차이를 드러내어 사유가 표방하는 진리, 합리화된 제도가 내세우는 목적 등과 상치되는 미세한 현상들을 부각시켜 그러한 사유와 제도가 갖는 허구성을 노출시키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현상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로 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의 등장한 특이한 소설 장르로써 메타 픽션을 살펴보겠다.

 

지난 60년대부터 서구의 소설들은 종래의 관습적인 소설 양식으로부터 탈피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대신 소설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성찰과 반성 속에서 스스로의 특성을 찾아갔다. 소설의 이러한 변화는 바로 소설이 더 이상 리얼리티를 제현할수 없으며 더 이상 진실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페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 대해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스스로가 하나의 인공품임을 의식적`체계적으로 드러내는 소설 쓰기"라고 지칭하며 이를 통해 "해석과 해체의 개념 속으로 혼합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위에서 서술한 예술 작품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그를 밝혀 보이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창작 행위 그 자체에 대해 극도의 자의식을 보여주게 되는데 작품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픽션이며 환영이고 작가의 인식이나 감정의 소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그 자체가 현실이나 실제도 아니며 그러한 대상을 가리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성의 투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만든 환영에 현혹되어 그것을 실제로 착각하면 그를 만든 작가의 의도는 은폐되고 일종의 우상 숭배 현상이 일어나므로 메타픽션은 그러한 허구적 노력들을 거부하고 작품을 작가의 의도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이 속에서 작가의 자의식은 극도로 개입되게 되어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의 권력 구조가 극도로 복합되있는 상태에서 진실과 허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 소설의 저항 역시 복합적이고 불 가시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메타픽션이 현실 도피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워교수는 부연한다. 메타픽션의 자아반영적 요소 역시 작가들의 부단한 자기 성찰과 반성일 뿐 결코 현실 상황으로부터의 단순 도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또한번 패러디의 효용이 언급되고 있다. 패러디는 곧 하나의 창작이자 동시에 비평이 되고 새로운 것이 고갈된 어떤 것의 말기 현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교훈적 의도도 없이 다만 관습에 대한 과감한 조롱과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출구를 찾는 행위라 할때 메타픽션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

 

 

Ⅲ. 결론

 

이상으로 해체 이론의 이론적 토대와 그 현상 등을 살펴보았다. 
해체 이론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 우리가 당연시해 왔던 모든 형태의 지배 문화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합법성과 억압에 대해 새삼 회의와 의문을 던지게 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인들에게 자신들도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한 심오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해체 이론은 또한 단순한 서구의 사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사회와 문화 모든 분야에서 전세계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중요한 지적 움직임처럼 보인다..그것은 결코 진리나 전통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진리와 전통으로써 그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온 것들을 심문하고 외부로부터의 단순한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해체를 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 이론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 정치적 역사적 담색을 소홀히 하는 단점이 있다. 또한 해체 이론은 텍스트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창작과 비평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비평이 창작을 압도하는 소위 비평 만능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해체 이론은 사변적 이론으로 인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그 스스로 유리화를 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전통과 진리를 해체한 후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가 또하나의 전통과 진리가 되어 갈 가능성도 보이는 것이다. 대안적 형이상학의 구축을 꾀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동은 그것이 대항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가 이후 역설들에 의해 일단 무력화되면,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어 미세한 차이들의 세계로 만들것다. 한편, 이 차별화 전략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무한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다. 새로운 유행의 창조와 광고를 통해 새로운 상품에 대한 구매 의욕의 자극이나 다품종 소량 생산과 같은 것이 그 구체적인 전략일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권위와 교조적 주체를 해체시켜 줌과 동시에 더 물을 수 없는 단절을 가져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다양해진 세계상은 또한 그만큼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체를 통해 이성적 우상들은 해체되었을지라도 해체라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따라서 이성적인 로고스는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이성 중심의 로고스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된다. 또한 다양성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상품화를 통해 제도 권의 지배 문화에 종속되어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는 점이나 저자의 죽음을 역설하며 해석자를 크게 부각시킨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자기반영성 상호텍스트성 등을 통해 이를 이해하는 일부의 엘리트 해석자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닌 채 스스로 대중에게서 차단되어 엘리트 문화로부터 더 먼 거리를 보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 자신의 논리에 묶여 새로운 논리로 세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략은 사회 내의 개인의 경우여도 마찬가지여서 차별성의 원리야말로 자아 동일성을 담보해 주는 원리이며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일관되고 공동체적인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것이 아닌, 오히려 끝까지 고무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 내의 문화 전략으로 극단화되면 사회의 자기 분열의 상황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며 극도의 산만성, 집중성등으로 사회는 무책임한 자유방임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해체가 극단화되면 주체가 해체되고 인식과 대화는 불가능해지며 객관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학도 자기 정체성을 잊고 세계의 유령으로 방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 이론은 탈 중심과 탈구축의 인식과 전략을 제시해 줌으로써 오늘날 기존의 지배 문화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현실에서 새로운 시각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모더니즘의 정형들, 이성 중심주의, 근원 주의 과학 지상 주의 역사주의 세계의 총체화 대신에 파편화 불연속성, 다원화, 분산화등 탈 정형화 등의 폐쇄와 분리를 통해 인류 문화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과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혼란성과 더불어 문화 주체로서의 인류가 유념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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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 서광사, 1993

윤평중,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서광사, 1992

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교보문고, 1990

김성곤,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 미국 소설>>, 열음사, 1990

김성곤 편, <<탈 구조주의의 이해>>, 민음사, 1988

이광래, <<미셀 푸코>>, 민음사, 1989

김동욱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김욱동 편,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구조주의>>, 현암사, 1991,

이승훈 외,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비평>>, 고려원, 1994

F.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정정호, 강내희 편, <<포스트모더니즘 론>>, 도서출판 터, 1989,

함세진,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의 해체 현상에 관한 연구>, 홍익 대학교 교육대학원, 1991

 

 


3.
데리다, 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매스를 든 철학자 
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메스를 든 철학자  
 

-『목소리와 현상』(자끄 데리다, 2006. 인간사랑)에 대한 서평

   

 

  신승철 : 동국대 철학과 박사과정, 노동자의 책 집행위원

           공역서 <사이버맑스>(이후, 2003),

           저서 <눈 밖에 난 철학, 디지털로 본 철학>(중앙 M&B, 2005)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끄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췌장암으로 숨을 거두면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마지막 기고문을 남긴다.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최후의 앙숙이었던 하버마스와 화해라도 하는 듯,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그는 새롭게 열리게 될 계몽의 사회는 세계질서를 이분법으로 몰아가는 일방주의와 일류 공통의 적들의 논리를 극복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후의 그의 표현은 죽음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삶의 목소리를 희망하는 데리다의 바램마저도 담고 있어 더 여운이 남았다.

2006년도를 예감하는 데리다의 책 『목소리와 현상』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해체주의의 반격서이며, 의사소통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는 멋진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는 상상력이 넘치는 책이다. 우선 그는 반복적 동일성의 재현과 상호주관성에 의해 형성된 객관성의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에 대하여 로고스의 언어이자, 실지로는 주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매개성을 거부하고, 삶이라는 직접적 현전 속에서 현상학의 기본개념들인 생, 체험, 살아있는 현재, 정신성 등의 개념을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재독해하면서,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삶의 영역을 환원주의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삶이라는 영역에서 타자와의 조우는 이상적 담화상태를 이끄는 동화같은 스토리가 아니다. 담화는 끝없이 불-안정적이며, 의식과 언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이 복잡함의 해답은 단순한 하나로 결집되는데, 그것이 ‘목소리’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을 연쇄적으로 표시하는 행위의 일부라는 로고스적 기호체제, 즉 글로 기록하는 행위로 대표되는 행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표현한다는 것은 표시가 아니라 말이며, 말은 일종의 몸짓이며, 혼잣말하는 고혼의 생의 절대적인 낮은 목소리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중얼거리는 독백이 외출을 할 때, ‘나’라는 주체와 ‘여기’, ‘지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의 표시체제인 인칭대명사와 공간성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 바깥으로 그것을 전염시킨다. 이것을 발화와 매질, 음소, 음운 등으로 판단하는 이상야릇한 언어이론들은 우리의 신체에서 뿜어 나오는 숨결이 표현하면서 만들어내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을 때, 타자에게 노출될 때 굳이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을 매개하지 않고도, 근원적 직관과 직접적 지각에 의해서 타자의 현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타자와의 관계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피드백이라는 단순명제의 함수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관계는 표지를 필요로 할 뿐이다. 독백을 하는 사람들인 이 사람들은 상징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낱말은 상상된 것이며, 아무리 기호로 발화된 것이든, 인쇄된 것이든 현존하지 않는 비실재적인 것이다.

‘내면발화를 하는 나’라는 사람은 재현과 상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할 뿐이지, 소통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통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기호질서를 삶에 이식하는 로고스적 언어이론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줄곧 독백하며, 이따금씩 외출한다. 그것은 절대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늘 가지고 있는 반복이다. 절대적 반복인 이념은 표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표시라는 기호작용은 나의 죽음의 공간을 의미할 뿐이다. “동지, 자아비판 하시요.”, “판결을 속기하세요.”라는 기호작용의 공간은 사실 절대적 반복의 이념의 공간이자, 내면발화가 불가능하며, 상상작용으로서 여유롭게 외출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불가능한 현시적 공간일 뿐이다. 살아있는 지금, 여기서의 경험과 지각이 모든 사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험적 심리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월적 삶의 근원성, ‘나’의 비가시성과 표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기 없는 음향 상태로 말하지 않고, 혼을 가진 신체의 상태에서 말하며, 그러한 자기촉발로 인해 목소리가 된 그 낱말은 신체의 일부로서 변양된다. 그 낱말이 만일 말뜻이 부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카다브라’처럼 대상이 부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화, 반복, 기표작용이 기록처럼 뚜렷하게 이루어지려면, 사실 나의 죽음이 수반되어야 하며, 어떤 무명씨에 의해서 쓰인 글을 모노드라마 형태로 번갈아 읽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은 죽기 전에 하버마스와 화해를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진보의 희망을 다시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하버마스와의 팽팽한 대결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창의적인 역작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2006년 초 이 책은 살아있는 데리다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와 호흡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표되었지만, 삶을 표현하려는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계를 자극하여 도도히 시작되고 있는 열린 신질서를 꿈꾸게 하는 책이다. 

 


4.

구축주의연구의 논리
 

 

 

 

1. 머리말

2. 구축주의 연구의 기본 논리

1) 다원주의

2) 언어 중심주의

3. 구축주의 연구이 방법론

1) 구축주의 연구의 방법론적 특성

2) 언설 분석의 방법

3) 언설 분석의 사회적 지향성

4. 구축주의 연구의 실례

1) 성격의 ‘규정과정’에 대한 분석

2) ‘카테고리 배치’를 둘러싼 언설과 현실

3) 가족에 대한 ‘역사사회적인 언설’분설

5. 한국교육에 대한 시사점

1) 언설과 교육

2) 가족과 교육

6. 맺음말
 

 

1. 머리말

변화와 다양성이 주도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전 시대와 같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믿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나의 입장이나 우리의 입장만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다양한 세계관과 기치관이 통용되는 가운데 자신의 입장이나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고 선택해 나가는 것이 개인의 인생에서나 국가의 발전에서 모두 중요한 과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원적인 현실을 전제로 하고 각자의 입장을 인정하는 구축주의적 시각은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구축주의적 시각의 기본적인 입장은 역사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며,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유일무이한 본질이란 것을 부정하는 구축주의는 오직 하나만의 진리 혹은 본지리라는 것을 학문이 추구해야 할 지고한 목표로 보기보다는 학문을 구속하는 허구적인 것으로 본다.

구축주의자들은 우리가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 단계인 ‘사실’ 자체를 다원화하고, 인식의 도구로만 여기기 쉬운 ‘언어’를 현실을 구성하는 힘을 가진 대상으로 탈바꿈 시키는 작업에 힘을 기울인다. 또한 ‘보편’이나 ‘본질’ 그리고 ‘실재’라고 여겼던 것들이 인간의 인식이나 활동에 의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밝히는 과정을 통해서 본질주의나 실재주의가 가진 허구성을 드러내고 있다.


 

2. 구축주의 연구의 기본 논리

구축주의자들은 인간들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속에서 형성되어 만들어진 ‘언설’이 원래부터 존재하여 왔던 자연적인 것, 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게 존재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탈바꿈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언설(discourse) 분석을 통해 그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는 구축주의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전개되므로 다원주의적이며, 그 분석 작업은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 다원주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피상적인 겉부분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본질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은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상식에 속하는 것이자 건전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발상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절차와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축주의는 이러한 소박한 믿음을 의문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식과 그러한 이해과정에서 필요한 언어와 카테고리와 개념들은 결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성격을 띠지 못한다는 것이 구축주의의 기본 관점이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수성을 배경으로 태어난 언어와 인식방법을 토대로 보편타당한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구축주의 논리에서,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소박한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구축주의자들의 주된 연구 경향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동적인 과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구조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그들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지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닌 서로가 ‘만들어 가는 행위’의 일부라고 본다. 따라서 구축주의 연구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적인 이론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간에는 다양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진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구축주의자들이지만, ‘실재’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언설’과 ‘사회적 맥락’간의 관계와 비중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구축주의자들은 언어란 단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기존의 언어관을 부정한다. 그들은 우리가 언어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 바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라고 본다. 인간이 세계를 사고하는 방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틀을 제공하는 것이며, 언어로 구성된 ‘틀’이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인 대상(세계)_를 지배하고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구축주의자들은 언어와 사회적 맥락 대한 그들의 입장에 따라 ‘엄격파’와 ‘맥락파’로 나뉜다.

▶맥락파: 언설의 형성에 사회적 맥락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고 보고 언어와 사회적 맥락 간의 관계를 중시함. 사회문제라고 주장하는 특정한 언설뿐만 아니라 그 언설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도 설명변수로 삼는다.

▶엄격파: 언설’만들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택함. 언설만을 분석대상으로 하기 위하여 사회문제에 대한 언설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에 그 상태를 기술하는 ‘언어적 카테고리’에 초점을 맞춘다.

2) 언어 중심주의

실재에 대한 구축주의자들의 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언설이란 단지 현실을 반영할 뿐이라는 기존의 수단적인 언어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언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구축주의가 내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전제이다. 여기서 언설이란 ‘문장보다 길고 완결된 언어사의 단위’를 지칭하는 푸코의 용어이다.

언어론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언어중심적인 관점을 ‘개념’과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간에 직접적인 일대일 대응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소쉬르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구축주의자들은 소쉬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언어가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을 구조화하고 결정하며 ‘현실’은 심층에서 존재하는 언어적 관습의 소산이라는 설명방식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관념론에서 발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실증론에서 말하는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존재가 아닌 언어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데리다: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해체하면서 언어가 사고에, 수사가 논리에, 문체가 의미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함

▶라일: 해체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언어를 통한 해체작업을 건축자재의 강도실험을 하는 건축기사의 작업에 비유함. 이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고층건물이 급증하는 현대사회에서 건축자 재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수 불가결하듯, 매스미디어나 정보매체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인식과 이론에 언어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가 필수라고 함.

▶오스틴;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개념 중의 하나는 ‘언어행위’의 개념이다. 모든 發話(발화)는 문법을 통하여 일정한 의미내용을 표현하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고 명명하기, 약속하기, 사죄하기, 경고하기 등과 같은 사회적 행위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오스틴은 언어가 단지 현실을 표현하는 정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창조하는 동적인 차원의 수행적(performative) 행위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언어행위의 기초를 쌓았다.

▶홀스타인, 구브리엄: 오스틴의 언어행위와 유사한 기술하는 행위(descriptive practice)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언어가 현실을 구축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나 언어와 현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축주의자들 간에도 이견이 존재한다. ‘언어 밖으로 통하는 출구는 없다’는 버(Burr)의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이 절대적으로 언어에 중심을 두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다. 또한 언어는 현실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만 언어만이 현실을 형성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는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도 있다.


 

3. 구축주의 연구의 방법론

1) 구축주의 연구의 방법론적 특성

지식이나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결정하는 요인이 객관적이고 초역사적인 기반 위에 존재한다는 기본신념을 가진 실증주의에 거리를 두고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토대라는 전제하에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을 전개한다.

2) 언설 분석의 방법

구축주의적인 연구방법의 관점으로 교육문제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는 교육문제를 둘러싼 언설을 대상으로 삼아 회화분석과 언설 분석을 동원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주로 회화 장면이나 TV프로그램과 같은 미시적인 자료를 소재로 한 분석방법이다.

둘째, 교육문제와 관련된 특정한 제도적 장면을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조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여관찰이나 현장연구 방법이 이용된다.

셋째, 특정한 교육문제와 그 해결을 둘러싼 집합표상과 그 장면의 과정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주로 의회나 매스컴과 같은 공적인 기관에 의한 언설분표에 대한 조사가 이에 해당한다.

넷째, 교육문제를 둘러싼 집합표상의 역사를 언설사의 접근방법에 의해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언설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의미한다.

3) 언설 분석의 사회적 지향성

구축주의의 관점에서 언설분석을 하는데 사회문화적 배경 자체를 연구 과제에서 제외하는 연구자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사회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고 분석에 임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젠더나 동성애를 테마로 하는 연구자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경우도 잇다. 그들은 젠더나 동성애란 카테고리를 분석할 때 거기에 내포된 사회적 성격을 중요한 논점으로 설정한다. 또한 젠더나 동성애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대항적인 패러다임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들은 본질주의란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특성을 시공간을 초월한 본질에 환원시키고 내부적으로는 동질성을, 외부적으로는 이질성을 절대화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성애라는 성적 카테고리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문화와는 독립된 변수로 여기기 때문에 근대 서구 이외의 문화권에서 다양한 성행동을 이해하는데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한편 성(sexuality)을 ‘자연’이나 ‘본능’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보는 구축주의는 ‘동성애적 해위’나 ‘동성애 정체성’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성물로 본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세를 거치면서 동성애는 서구사회에서 비도덕적인 죄악이자 비합법적이고 종교상의 죄로 치부되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죄악시 되어 비난받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동성애저인 ‘행위’에 국한된 것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는 동성애를 의학적인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동성애는 인간의 일부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과 결부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동성애자’라는 언어적 카테고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은 단지 ‘동성애적 해위’를 하는 사람( 그 행위 이외에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에서 그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이 ‘동성애자’와 등치되어 그 사람자체가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전환된다. 결국, 이 때문에 동성애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부정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고대에는 동성애적 행위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평범한 것이었음에 불구하고, 근대 이후에 동성애적 해위를 보는 관점의 변화로 인해 ‘비정상적인 동성애자’라는 언설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성애자는 유전적으로 혹은 성장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본인들도 스스로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축주의자들은 정체성을 그 사람의 내적인 본질이나 신체적 표면에 각인된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언설과 인간 간의 상호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구축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언설의 실천’에 의해 언설 이전에 존재하거나 언설을 초월하는 불변의 본질과 같은 것으로 전환될 뿐이다.


 

4. 구축주의 연구의 실례

1) 성격의 ‘규정과정’에 대한 분석

▶기타야마의 분석: 기존의 심리학에서는 성격을 인간의 심리 내부에 존재하는 일관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기타야마는 성격의 일관성과 내재성이라는 것이 실재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언어로 상황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만화를 소재로 분석하였다.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이란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을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유의미한 것으로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언설 분석의 입장이다. 도한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 ‘언어화’ 라는 절차인 것이다. 즉 ‘언어화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그가 속한 세상이 비로소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유동성을 가진 잠정적인 대상을 언어화 과정을 통해서 특정한 사실로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자 세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든 수단을 제공받는 것이다.

언어화 과정이란 인간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불가결한 수단을 제공하는 한편 폭력성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자기 이해’는 물론 ‘타자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러나 어떤 성격으로 규정되든 일단 특정한 성격으로 규정되면 그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도 하나의 폭력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한 인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은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검토한 후에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일부분, 즉 단편적인 파편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성격이 탄생하게 된다. 그 파편들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느냐에 따라서 어떤 셩격으로 귀결되느냐가 결정되는데, 언설분석에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파편들이 이어지는 것이 언어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일단 규정된 이후에는 특정 성격이 다양하고 잠정적인 여러 결론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나 본질로 전환되어 버리고, 그 사람과 그를 둘러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사나 부모와 같은 ‘교육관계자’들은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이 아동은 이런 ‘성격’을 가진 아동이라는 추론을 내라고, 자신의 추론에 근거하여 그 아동의 행동과 생각을 분석하거나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곤 한다. 이러한 아주 일상적인 과정 속에서 아동의 성경은 실재로 존재하는 그 아동의 내부적인 속성이 되며, 그 성격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방침에 다라 그에 대한 교육적 행위가 이루어진다. 물론, 교육관계자들이 교육을 행하는 데 대상이 되는 학생에 대한 이해과정은 기초적인 단계이자 필수적인 단계이며, 이를 근거로 교육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대상에 대한 특성이나 성격을 일정하게 규정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부족할 때, 이러한 교육적인 행위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때, 성격을 비롯한 교육현실과 관련된 것에 대해 규정하는 과정에 대한 언설분석이 유용하다.


2) ‘카테고리 배치’를 둘러싼 언설과 현실

▶기타자와의 분석:

문제적인 현실을 규정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는 언어적 카테고리는 해당 카테고리 자체에 누가 그 문제의 당사자인가에 대한 규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누가 그 사태의 당사자인가와는 관련 없이 해당 사태의 당사자를 규정한다. 상식으로 통할 정도로 보편타당한 규정력을 가진 특정한 카테고리는 다른 카테고리가 적용되는 것을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독점적으로 특정한 현실을 규정하는 유일한 틀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믿는 한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은 그 카테고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규정된다. 강력한 지배력을 갖는 언어적 카테고리의 현실규정력은 세상에는 ‘하나의 사실’이 존재할 뿐이라는 믿음과 결합하여 우리의 현실 판단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3) 가족에 대한 ‘역사사회적인 언설’분설

▶우에노의 분석: 근대적인 핵가족에 대한 언설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분석하였다.

인류학에서 가족이라고 부는 것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데 비해, 사회학에서는 가족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너무나 협소한 정의를 내라고 있다고 비교하였다. 그럼으로써 사회학 내의 가족에 대한 언설이 가지는 보편성의 토대가 취약함을 기술하였다.


 

5. 한국교육에 대한 시사점

1) 언설과 교육

구축주의자들은 지금껏 연구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언어를 분석의 주 무대에 세운다. 그럼으로써 언어라는 것을 객관적인 실재가 그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거울 같은 것, 혹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도구 같은 것으로 인식해온 기존의 안이한 언어관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제까지 언어는 종속적인 자리에만 위치하고 언어가 가진 현실에 대한 구성력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기타야마의 성격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언어는 상황에 대한 정의와 인간의 인식과 행동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또한 일상적인 생활이나 교육 장면과 같이 미시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교육제도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구축주의적 관점에 의한 분석은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열이나 평준화제도와 같은 주제들은 대표적인 교육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순한 교육문제에 머물지 않고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교육문제들을 둘러싼 논쟁들을 살펴보면 같은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전제와 논리를 구사하여 대치되는 주장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주장이 교육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진단하는 데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고 명쾌하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예를 들면 평준화 제도가 학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과학적인 논리와 통계적인 기법들을 동원한 분석들이 많이 시도되어 왔지만, 일관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대치되는 결론이 양립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문제나 교육문제는 그것을 탄생시키고 그 탄생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을 필요로 한다. 구축주의에서 말하는 상화작용 과정하에서 사회문제가 탄생한다는 것은, 바로 사회적 문제는 단지 그 문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문제라는 것은 세상의 여러 가지 객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을 전제로 하며, 그 객체라는 것은 사람의 지각과 신념, 관념과 같은 경계선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축주의는 이와 같은 기존의 전제를 뒤집는다. 즉, 실제로 무엇이 사회문제로 존재하는지를 우선시 하지 않고, 무엇을 사회문제라고 주장하는 논점과 언설이 사회문제를 구성하는 부분을 우선시한다.

구축주의자가 분석대상으로 하는 언설은 크게 지배적인 언설과 경쟁적인 언설로 나눌 수 있다.


▶지배적인 언설: 그 시대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구성하는 언설. 남녀 불평등이 동성애자의 비정상성을 구성하는 언설을 테마로 하는 구축주의자들은 性(성)을 둘러싼 지배적 언설이 조성하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는 구성요소와 그 의미 그리고 역사사회적인 맥락을 밝혀낸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언설이 유포하는 보편성과 진리성의 제한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억압적 질서에서 해방을 지향한다.

▶경쟁적인 언설: 특정한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는 주장들을 지칭함. 평준화 체제를 둘러싼 반대론자와 옹호론자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학력에 대한 평준화 효과를 둘러싸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상황 정의 및 문제의 성격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도출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교육문제를 둘러싼 갈등관계에 놓인 주장들을 분석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모색해 온 구축주의자들은 ‘무엇’이 문제를 가진 현상인가를 밝히는 대신, 무엇인가를 교육문제라고 주장하는 언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볼 때 교육학자는 교육문제의 범위와 정도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문제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과정은 2차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축주의적 관점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표방하면서, 교육학자가 아닌 관련 당사자가 직접 교육이 놓인 상태를 도덕적인 객체로서 구축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관련 당사자들은 지각을 가진 주체로서 관찰회고 구축주의자들이 해석할 중요한 대상이 된다. 따라서 구축주의적 관점엣 보면 관련 당사자들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는 과정이 바로 연구대상의 중심이 되며, 관련 당사자가 행하는 해석작업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연구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교육문제란 결국 관련 당사자의 관점이 집적되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준화 체제를 둘러싼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반론에서 구축주의자들은 반대론자들의 주장대로 학력의 하양평준화가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 학력수준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상승하였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결론 도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각각의 주장들이 어떤 전제와 관용어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스타일로 전개되는지에 대한 언설분석을 시도하여 경쟁적인 언설들을 모두 해체하는 것이 구축주의자들(특히 엄격파)의 과제이다.

기존의 학자들은 전문가적인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제공해 줌으로써 문제해결 과정이나 정책수립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결론과 해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구축주의자들의 연구는 무엇이 ‘진정한’ 사회문제인지에 대한 원인분석과 해결책을 제공하는 대신, 사회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관점은 어떤 것이며, 그 주장을 실제의 것으로 만드는 언설의 특징이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구축주의자들의 연구는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설에 대한 해체작업이자 재구성 작업니다. 이러한 구축주의자들의 작업 결과는 우리에게 바로 쓸 수 있는 완제품으로서 지식이나 우리가 따라야 할 지침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점과 언설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결책이나 목표들에 대해 재검토하고 재고찰하는 기회와 재료를 제공한다.


2) 가족과 교육

▶ 우에노의 연구

근대적인 가족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을 분만 아니라 가족과 가정의 형태에 대한 규범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핵가족 이외의 다양한 가족 형태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바람직한 가족 형태의 단란한 핵가족이 가지는 이미지와 정상 가정과 비정상 가정이라는 이항대립적인 구도에 균열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핵가족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가운데도 가족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와 구도가 가지는 공고함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차별적인 용어라는 비판 속에서 ‘결손가정’이라는 용어는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지만 ‘이혼가정’이라는 일견 중립적인 용어로 보이는 카테고리가 구성하는 현실의 결론 부분도 ‘결손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손이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이혼이라는 사실적인 용어로 대치되었다고 해도, 가족의 기본을 핵가족으로 설정하고 아버지의 엄한 지도와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가정과 연관된 언설이 지배적인 언설로 살아 있는 한, 핵가족 이외의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판에 박힌 언설은 계속될 것이다.


 

6. 맺음말

구축주의자들의 언설을 중심으로 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실재를 나타내 주는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믿고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를 갖지 않은 것이거나 중립적이기보다는 특정한 이미지를 강하게 내포한 것이거나 대로는 지배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는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축주의적 접근 방법은 우리에게 언어 자체가 가진 현실 구성력과 사회적 성격을 자각하면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다. 말하자면 진리나 현실이라고 ‘통용’되는 것에 구속되지 않고, 그것이 진리나 현실로 통용되게 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개개인의 삶이나 사회나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보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 구축주의적 접근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축주의적 연구결과는 기존의 실증주의적인 혹은 관념주의적인 접근방법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원인규명이나 대책수립에 필요한 지식을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재구성할 수 있는 참고자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전문가가 교육에 대해 부여하는 정답이나 지침을 구하는 사람보다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지침을 재점검하고 결정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관점과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구축주의적인 연구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구성적 실천의 신지평을 위하여 

  (포스트 알뛰세르주의 비판과 들뢰즈를 중심으로)

                                               ...

      

“(...)때로 협상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 그것이 여전히 전쟁의 일환인지 아니면 벌써 평화의 일환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 철학은 권력이 아니다. (...) 권력이 아니어서 철학은 권력과 전투를 시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철학은 그들에 대항하여 전투없는 전쟁, 게릴라전을 이끈다. 철학은 그들과 대화하지 못한다. 아무 할말도 없고 전해 줄 것도 없다. 그저 담판을 이끌 뿐이다. 권력들이 외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 각자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인 만큼 바로 우리 각자 스스로와 싸움을 벌이고 대담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철학 덕분에 , 

                                               -  들뢰즈의 [대담]중에서

 

 

 

序論

 


 해체적 재구성을 평가하며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는 두개의 대칭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고, 변혁에 대한 지상 명제를 남겨둔채 ‘구천에 떠도는 공산주의 유령’1)이 되어야 했다. 1991년 말, 민주주의와 독재권력타도전선에서 대중 육박전이라는 시대의 ‘불꽃’은 개량/개혁주의의 흐름 속에서 소진되었다. 실존 사회주의의 몰락은 ‘스탈린주의 진영테제’에 근거한 국제적/민족적 연대의 환상과 희망, 혁명적 낭만주의의 현실적 의미를 퇴색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에서 맑스주의운동은 혁명의 이론을 국외로부터 번역하고, 수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채, 국제 맑스주의운동의 소실점을 보아야 했다. 남한 변혁운동의 비극은 스스로 실체를 형성하기도 전에 그 과정의 결과로서 질서 지워진 실존사회주의의 몰락을 직면함으로서 이중의 위기 즉, 기간 지상명제로 인식해 왔던 ‘국제 맑스주의운동의 위기’와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에서 위기’를 이중적으로 맞이해야 했기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선택의 폭이 매우 협소해졌던 데 있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갓 출생신고를 마치지도 못한 맑스주의 이념조직들은 불운한 역사의 유제를 안고 표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어둠을 일시적으로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운동의 핵심 지도부위구축을 위해 분투하던 사회주의운동세력의 움직임은 ‘생성에서 해체로’ 순시간에 역전되었다. 또한 계급지형은 대중운동의 물리력의 유실과 부르조아계급동맹의 강화가 가속화되어 그 결과로 의회민주주의를 포함한 정치적 전 영역이 총보수화되었다. 남한 맑스주의자들은 ‘실존 사회주의의 현실’과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이념’간의 괴리를 느꼈으며, 동시에 맑스주의의 적자인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자신이 담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조직운동을 통하여’ 또는 ‘자신의 이념을 통하여’ 거울반영으로 확인하였다. 남한 맑스주의운동은 외부로부터의 사상적 도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실천적으로 이를 구체화시킬 수 없었던 상태에서 이론/실천적으로 이중적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은 “현실운동의 역전을 기약하며 이미 파산난 맑스주의이론의 원칙들에 대한 현실적 재해석 및 수정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괘도에 오른 사회주의운동을 복원하고,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함으로서 합리적 핵심을 구출하는 이론적 재구성작업을 수행할 것인가?” 협소한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전자의 실천은 한국노동당을 통하여 실물화되는데 일차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의회라는 공간과 법 테두리 내에서 부르조아 정치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동하는 노동자계급운동에 기반하지 않은 채, 부르조아 정치에 대한 개입의 여지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후자의 운동세력들은 ‘비극적 숭고미’를 안고 맑스주의의 내재적 모순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먼저 이들은 70년대 서구 지식인들이 던졌던 역사적 질문 “소련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회구성체는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졌는데, 이러한 문제제기는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구체적 역사와 연관되거나 포함되어 혹은 중첩되어 사회주의 붕괴는 “맑스주의내에 스탈린적 편향이라는 내재적 모순의 폭발한 것” 또는 “타락한 노동자의 국가/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라는 허위이데올로기를 벗어 던지고 추악한 실체를 드러낸 것” 등으로 해석하게 된다.2)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과잉속에서 더욱 분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운동을 역전시키기 위한 전략의 재구축이라는 문제틀에서 시작한 논쟁이 현실운동의 흐름의 변화를 주도했다기 보다는 계급대중운동의 현실과 괴리되거나 멀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마치 유럽지식인들이 스탈린정당과 맑스주의에 대한 환멸을 던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운동의 중심적 설정이었던 프롤레타리아운동으로부터 이탈하는 흐름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포스트 신사회운동의 문제제기의 요지는 “맑스주의는 이미 마지막 숨을 내쉬었고, 이러한 종말에서 이제까지 간과했던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의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맑스주의의 대부분의 논의는 ‘헤겔에서 맑스로’ 이어지는 이념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 해체의 작업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헤겔의 이성주의가 부르조아 국가이성의 거대체제담론이며,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맑스/레닌/스탈린의 이론은 헤겔과 동일선상에서 국가라는 거대한 억압기구를 용인한다”라고 보았다. 이들의 포스트모던한 설정은 근대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이성을 재구성하려는 과도기적 시도로 ‘근대적 이성주의’를 반대한다. 그런데 ‘반이성주의’담론은 헤겔의 이성주의를 실제적으로 돌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것에 대한 반진동으로서 정치적 허무주의, 국가이성에 동전의 양면으로의 시민운동이라는 또 하나의 모던한 ‘이성주의’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해체주의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대안적 운동이라기 보다는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역사적 변질에 따른 소실점을 의미한다는데 이유가 있다. 대부분이 좌익 활동을 경험하던 해체주의자들은 실물적/정치적 최종결론으로서 맑스주의운동의 역사적 현존이었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또는 모순)에서 비롯된 탈중심적 정치지형의 현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90년도 초엽 합종연횡0하던 해체주의의 열풍이 ‘찻잔 속의 태풍’이 되어 잠잠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해체주의가 의도했던 것은 “근대적 맑스주의를 완전히 땅에 묻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인데, 해체주의자, 스스로가 맑스주의에 열광하고, 신뢰하던 대중들이 가졌던 환멸감이 그만큼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정치허무주의라는 탈정치화된 후기 자본주의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정치가 부르조아정치와 준별점이 사라지고, 흡입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체주의자들은 실물적인 현존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탈근대’의 시점에 도달하자마자 탈중심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이기 이를 데 없는 ‘자본의 변증법적 통일’ 즉, ‘전지구화되고 전일화된 자본주의’의 출현을 목도해야 했다. 이때 점차로 해체주의의 동시대에 대한 저항성은 사라지고 후기자본주의의 시대이성을 담지하는 역할로 이행하게 된다. 포스트 산업사회로 나아가면서 자본주의 국가는 “작고 강한 정부”라는 신보수주의적 형태로 사적 영역인 학교/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등을 광범위하게 개입/통제하고, 케인즈적 복지국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인 공공의 이익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부담을 자본의 요소로 재편함으로서 자본의 축척과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의 내재적 모순과 위기를 세련시키고, 조절하려 하였던 것이다. 후기자본주의야말로 생산에서 정치/교육/제도/문화에서 자기모순을 피상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완충장치들을 형성하는 탈근대의 주체가 되었다.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한 부르조아 개혁주의에 열광하며, 신사회운동 바로 자신이 후기 자본주의국가에 종별화된 시민사회의 새로운 운동주체임을 신선한 미풍처럼  느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주도한 것은 개혁을 염원하는 시민운동이 아니라, 후기자본주의로의 진입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실질적 포섭의 경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본이었다. 후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자계급을 노예화시키기 위한 자본의 전략이 더욱 전사회적으로 확대됨으로서 자본은 더욱 자신의 억압적/착취적/약탈적 성격을 드러낸다는데 있다. 자본의 운동은 ‘포디즘의 체제에서 포스트 포디즘체제로의 이행’을 통하여 생산의 현장에서 자본의 이해에 맞게 산노동의 힘을 축출하고, 철저히 핵심노동자와 다수 주변화된 노동자를 분할/견인함으로서 노/노간의 경쟁 속에서 노예화시키려 한다. 후기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최종목표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즉, 자본주의 체제수호의 최후의 관문은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힘을 분쇄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는 대중을 경쟁이라는 집단적 정신분열증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자본이 산 노동에서만 창출된다는 본질적 진리를 은폐시키고 산 노동의 단결된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중세시대의 연금술적 착란증상과는 달리 노동자계급의 힘 즉, 산 노동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대공장 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더욱 확장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전사회적 확장이자, 전지구적 확장은 역으로 골리앗과 같이 더욱 더 거대해져 가는 사회적 공장을 형성할 뿐이다. 후기자본주의는 사회적 생산이라는 사회의 모든 영역이 최종적인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자본주의적 가치로 광범위하게 재조직화되기를 강제하며, 동시에 사회 속에서 노동하는 모든 대중이 자기 스스로 노동의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끔 은폐하려 한다.3) 

그러므로 시대이성으로서의 해체주의는 반이성주의의 한계개념으로서의 국가이성에 대한 극복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몰락이후 가속화된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주요한 특징인 ‘정치적 허무주의’와 ‘대중의 노예화 현상’을 단순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저항담론으로서의 해체주의는 맑스주의가 간과했던 측면들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영역에서의 실천이 실물적인 즉, 외재적인 간섭과 관계를 제거한 채로 - 현상적 괄호치기를 통하여 -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게 되는 물활론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의 한 부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물신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환경파괴의 주된 피해자인 동시에, 환경운동의 실지 주체는 노동자계급대중이며, 여성운동 또한 그것의 특수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여성운동이 여성주의의 외피에서 한치도 전진하고 있지 못한 현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이성적 인식의 불투명/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확실성에 대한 탐구과정은 감성적 대상으로 회귀과정으로 나타난다.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파괴적 비인간화에 대한 진단의 한편으로 인간해방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데, 과소인간적 설정은 과잉인식의 동전의 양면으로 언제나 구조화되었다는 것을 독일고전철학의 정치적 퇴행으로서의 포이에르바하로의 이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4) 포스트주의의 다양한 논쟁은 과잉담론과 과잉문화/과소인간의 용두사미(龍頭蛇尾)한 실천을 즉, ‘대안’, ‘새로운~’, ‘선택’ 등의 미사어구에도 불구하고 이에 못 미치는- 실천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의 전체주의 비판을 실물적 현실운동을 통하여 개방적인 지평으로 나아가게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분열된 부분이 살아서 움직이는 원초적인 마니교도적 의식을 ‘통과제의’라고 칭하며 ‘특별한 인식의 원리’로 가공하였을 뿐이다.5) 최근에 포스트주의와 해체주의가 실제 운동에서 자기 스스로 매장한 맑스주의를 다시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6)은 맑스주의를 또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맑스주의에 대한 조용한 교류를 통해 해체주의 자체의 현실운동에서의 한계를 진솔히 승인하는, 동시에 진정한 대안을 찾기 위한다는 본래의 취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해체주의’의 이론적 한계대상이자, 실제적인 당사자로 볼 수 있는 동구와 구소련 영토에 공산당과 좌익의 재복권 현상은 단순히 선택의 폭의 문제나, 과거의 향수로 치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원한과 부정, 반진동이라는 해체적 흐름인 탈 근대적 시대이성의 소실점을 의미한다. 70년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서구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이념적으로 해체하게 했다면, 90년대 더러운 전쟁인 ‘유고 내전’과 추악한 제국주의 러시아독립국가연합의 ‘체첸침공’에서 동구사회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희망 또한 해체를 겪었던 것이다. 우리는 맑스주의운동의 ‘해체적 재구성’이라는 기획에서 출발하거나, 정치적 비관속에서 맑스주의 운동외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이론적 편력에 종착지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역사의 지각변동에 의해 동시에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들뢰즈의 ‘구성적 유물론’에 대한 제안은 동시대적인 해체된 운동의 흐름에 대해 ‘실천’이라는 발본적(拔本的)인 문제제기를 던지는 것이다, ‘실천’과 ‘구성적 주체’의 제안은 또한 서구 지식인의 해체주의와 포스트주의 흐름을 자체 내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도 하다. 실물적인 맑스주의 운동은 기존의 실천적 전통에서 절단된 채로 복원될 것이다. 오늘날의 맑스주의운동은 맑스/레닌주의라는 구 사회주의이론의 전통으로 협소화되고, 교리화되기를 바라는 - 자신은 결코 레닌이 될 수 없었던 레닌의 충복(忠僕) - 스탈린의 생각과 달리 다양한 이론적 지평과 실천의 전통에서 형성되고 실재화될 수 있다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대중운동만이 이제까지 죽은 것, 창백해지고, 사멸하는 것이 산 자를 지배하는 것, 과거의 원한이 삶의 긍정을 훼손하고 실천적 구성을 억압하는 것, 실천으로 단련되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발전의 과정을 이론의 권위와 전통으로 바꾸는 것등의 실천적 한계를 과감히 전복하고, 돌파하고, 극복할 것이다. 모든 주어진 현실을 승인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투쟁을 통하여 돌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절단된 맑스주의도 다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7)

 


                       바로 만물의 원천 헤라클레이토스의 불꽃을 통하여!

          만물의 지혜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을 통하여!   만물의 구성 디오니소스의 불꽃을 통하여!

 


本論

 


1. 後期資本主義의 諸問題

 

 

 

  가> 一般的인 現象들


 헤겔에 의해 완성된 근대자본주의의 노동은 살아 있는 실천이자 긍정적인 구성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서 법 앞에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노동은 시민의 원초적인 권리이며, 이성의 내부에서 인정투쟁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긍정적인 것은 국가이며 법인 이성일 뿐이었다. 노동의 존재는 자본의 존재의 사법적 질서와 분리되어 비대칭적으로 존재한다. 두개의 계급이 실존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제헌적(制憲的) 권능(權能)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다. 현대의 노동은 자본이 생산/재생산의 영역에서 거대한 사회적 공장을 조직함으로서 거대한 공룡(dinosaurs)이 되었다.   

 


“노동시간 - 단순한 노동량 -이 자본의 유일한 규정 요소로서 제시되는 정도에서 직접적 노동 및 그 양은 생산 - 사용가치 창출 - 의 결정적 원리로서 소멸하며, 양적으로는 좀더 작은 비율로, 질적으로는 불가결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반적인 과학적 노동, 자연과학의 기술적 적용과 다른 한편으로는 총생산 속에서 사회적 접합에서 나오는 전반적인 생산력과 비교했을 때, 종속적인 계기로 축소된다. 이처럼 자본은 생산을 지배하는 형태로서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8) 

 


 자본의 노동에 대한 ‘형식적 포섭단계’에서 자본은 경영인이자 관리자의 형상으로 생산에 개입하고, 외재적인 유동자본으로 존재하는 노동을 생산관계내에 결합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실질적 포섭단계’에서 자본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스스로 새로운 노동과정을 창출하고 이러한 내적인 힘으로 노동을 포섭한다.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통해 숙련되고, 교육되고 훈련된 사회적 노동자를 요구하고, 공장과 사회는 이에 조응하여 결국 자본은 사회적 자본으로 전화한다. 자본 스스로는 유통자본의 형태로 노동과 매개하며, 노동은 독립변수로서 자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기계의 도입을 통하여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적 구성도의 강화는 자본의 이윤율 하락의 위기를 형성하는데, 이것을 상쇄하는 요인은 자본이 전사회적 공장화로의 변형을 통해서 창출된다. 자동기계의 시대는 사회적 노동의 과정 속에서 잉여가치를 획득하며, 이것의 형태는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핵심노동자를 최소화하며, 사회적 노동자에게 평균필요임금이하 임금을 지불하고, 착취밀도를 조밀함과 동시에 사회적 근육인 유통과 분배의 조직화를 통하여 가치창출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생산의 사회화를 이루는 진정한 이유는 집합적인 대중노동자에 대한 조직적인 역능을 분쇄함으로서 산 노동의 구성적 힘을 축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의 소재량적으로 본다면 내포적 축척의 형태를 띠는데, 자본의 외연적 확장인 대공업적 생산방식에서의 가치창출은 단지 생산의 현장에서만 이루어졌지만, 내포적 생산형태에서는 全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 외피적인 소재는 축소되지만 자동기계에 이전되는 사회적 가치밀도가 강화되고 유연화됨에 따라 자본주의의 가치창출은 사회 전 영역에서 이루어진다.9) 자본의 사회화된 특징은 자본주의를 위협했던 대중노동자인 산 노동의 조직된 힘을 생산의 현장에서 축출함으로서 유기적 구성도를 강화하는 경향이며, 동시에 사회의 유연화를 통해 착취밀도를 강화함으로서 이를 상쇄하려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국가는 만성불황의 연속 속에서 위기를 스스로 창출하고 조절하는 위기국가의 형태를 띤다. 또, 사회는 자본이 고도로 추상화되고 사회화됨으로서 전사회적 영역은 기존의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시민사회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자 일반으로 존재하게 된다. 국가의 광범위한 시민사회의 포섭의 작용의 결과로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는 종말에 이르고,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창출한 가공의 시민만이 존재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노동은 더욱 생산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나타나는데 이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배제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성불황과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의 명분은 실지로는 산 노동 힘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고자 하는 욕구의 직접적인 표현인데 즉, 더이상 단체협상도 배제하고 파업에 대체근로로 맞서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은 1> 고용불안의 결과로 단체교섭의 조건을 악화시키고, 2> 국가의 단체교섭의 거부 3> 자동기계를 통한 작업장의 제조직화를 통한 생산에서 일부 노동의 축출10)이라는 노동자조직의 배제와 미조직화된 사회적 노동자의 매개라는 변증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교섭 파트너로서의 노동조합의 입지약화시키고 자동기계와 컴퓨터의 도입을 통하여 생산지대를 사막지대로 만들고, 사회적 노동자를 생산에서 우연적이고 화폐라는 추상화된 형태로만 매개하려는 것이다. 노동만이 유일한 잉여가치창출의 근원이라는 본래적 의미는 물신화되어 마치 생산에 종속변수로 나타나며, 유통/교환조직을 통하여 사회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의 정치경제학은 마치 객관을 가장하여 나타나지만 노동의 논리일 수 없다. 자본은 노동의 유연화를 강제함으로서 산 노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조직을 분쇄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비대칭적으로 제헌적 권능을 담지한 더욱 거대한 사회적 노동자의 창출을 의미할 뿐이다. 자본은 산노동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자계급간의 분화와 경쟁사회를 통해 미분화시키려 한다. 노동자계급은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의 영역은 더욱 축소된 핵심노동자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것마저 불완전한 매개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의 종말’로 보여지기도 한다.11) 이는 대공업적 생산방식에서 창출된 대중노동자의 시대의 종말이며, 동시에 더욱 강력한 사회적 노동자의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의 제헌적 권능이라는 잠재력은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실천에 의하여 더욱 실재적인 힘을 이루는데 자본은 이것을 탈중심화시키고, 탈구성화시키기를 희구하며, 경쟁이라는 분열로 나아가기를 획책한다. 사회적 노동자의 존재자적 차별성과 자기운동의 구성적 실천은- 자본은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 제헌적 권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노동의 구성적 힘은 꼬뮤니즘의 전제조건이 이미 성숙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나> 勞動者階級의 中心性문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의 문제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마치 시민의 권리로의 일부의 중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후기 자본주의국가는 작고 ‘강한 정부’의 형태를 띠는데, 국가가 자본에 대해서 완전고용과 복지국가, 수요창출이라는 형태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자유주의와 양날의 칼인 국가권력이 정당/교육/언론/노조 등에 대하여 탈중심적으로 개입하여 행정기관화시킨다는 신보수주의를 내용으로 한다.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축소되거나 소멸함으로서, 국가는 개혁/개량주의를 통해 국가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시민에 이해를 가공한다. (예컨대 시민의 발을 볼모로~, 국민을 위한~) 노동조합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매개됨으로서, 또한 자본의 배제의 칼날앞에서 진정으로 노동의 대표자로서 역할의 한계와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주체로서의 노동자조직이 되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자본의 사법질서는 노동의 제헌적 권능의 잠재력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서 존재하고, 신자유주의의 투명성은 무차별적으로 자유롭게 포획하는 경찰/억압기관의 자유로서만 가능하며,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자에게는 비자유주의적인 억압과 통제를 의미할 뿐이다.12) 노동의 중심성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으로서의 중심성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소멸 속에서 구성적 주체로서의 중심성이자. 사회적 노동자의 창출이라는 의미로서의 사회적 중심성이다. 조절이론은 ‘주체없는 과정’으로서의 자본의 위기조절능력을 분석하면서 실지로는 탈중심화된 자본의 객관적 운동으로만 이를 분석하였을 뿐이다. 이렇게 객관적인 지위에서 구조만을 분석할 때, ‘조절국가’가 아니라 ‘위기국가’라는 후기자본주의의 개혁/개량주의적 계획적인 통치모델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으며, 동시에 구성적 주체로서 노동의 중심성을 간과하고, 산 노동이 ‘국가의 자율성’으로 말미암아 ‘국민을 위한’으로 시민의 권리중의 일부로 간주되게 한다.13) 후기자본주의의 돌입은 만성불황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산노동의 상대적/절대적 궁핍화를 가중시키고, 경쟁사회에서 이탈하지 않게끔 사회적으로 재조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경제위기, 파산으로 달려가는 듯한 불황은 이후 만성불황의 단지 시작일 뿐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경쟁사회라는 노예화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교육시키면서, 산노동의 힘이 분쇄되는 날을 염원한다. (그럴 수 있을까?)    

 

다> 後期資本主義의 文化

 


 후기자본주의는 포스트 포디즘사회로 전화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자신의 문화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문화의 흐름은 극도로 인위적으로 재현된 하나의 시뮬라르크를 형성한다. 이것은 문화구성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일체화된 주체의 인격적 표현을 거부함으로서 실재하는 존재와 거리를 갖는다. 사회적 타당성의 범위 내에서 노동, 성, 인종, 지향성, 욕구, 가치, 성격 등이 극도로 비인격적인 탈중심화된 자율구조로 나타남으로서 실재하는 존재의 인격과 다양한 차이들을 도리어 사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조결정론은 주체들의 연약하고 회피적인 풍경을 형성한다. 이러한 어떤 필연적이고 목적론적인 기호가 없는 미시적이며, 균열된 비일관성의 정치적 의미는 미결정성에 있다. 들뢰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상으로 하는 분절화된 주체성은 정치적 구성의 새로운 주체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본다. 즉, 미시적인 영역과 거시적인 영역을 융합하는 적극적인 노동운동이 이를 극복할 것이라고 본다.14)

 후기자본주의의 상업문화는 문화/기호/욕구체계를 식민화 시킨다. 인위적인 시뮬라시옹으로 재현되는 상업문화는 일상과 역사적 성과물에 대하여 약탈적, 종말론적,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적나라한 통찰’은 구조결정이라는 요소를 전도시키고 제거한다면, 일상과 정치를 넘나들 수 있는 주체의 다수성과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 인격체로서의 모습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구성적 주체의 실천적 몫이다. 이데올로기의 자율성이라는 문화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구조주의의 신화를 제거하고 진정으로 과잉된 차이를 지닌 다수자의 존재를 진솔하게 다룬다면, 문화는 쉽게 산 노동의 진정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산 노동의 구성적 실천은 일상과 정치와 문화의 경계를 결합하는 것, 이론적이고 전형적인 개념으로서의 문화, 전도된 문화가 아니라 실재하는 산노동의 적극적인 발산과 표현으로서 문화를 위해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번즈는 시골지역이나 노동계급의 환경에서 여성을 찾아내려 했다. 한사람이 하버마스에 대해 묻는다 

“이론이 뭐죠” 엘마투미가 묻는다.

“그건 사물에 대한 일반적 설명인데, 그 설명은 당신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또 사물을 올바르게 놓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알튀메트가 용감히 대답한다.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지 못하게 하세요” 씹는담배에서 나온 검은 타액을 뱉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알튀메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알아요 알마투미, 당신의 말뜻을 알아요. 하지만 합리적 정당화는 우리의 대담자가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타당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경우를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 모르겠어요?”   

“당신의 나라는 부자고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을 압니다. 군인들 뒤에 있는 큰 차를 탄 사람들을 나는 압니다. 당신이 그것에 관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한 단어로 정당한 겁니까?”15)


2.포스트알뛰세리안의 失墜와 들뢰즈

 


  가> 초기/후기알뛰세르의 問題提起들

 


 소련사회주의의 붕괴를 전후하여 알뛰세르주의의 수입은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조직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맑스주의운동에 대한 새로운 재구성의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80년초반에 변혁을 고민하는 지식인들은 불법화된 맑스원전보다 먼저 종속이론, 그람시, 알뛰세르등등을 읽었다. 그러나 90년초 알뛰세르의 논쟁과 문제의식이 공개화되고 전면화된 것은 현존 사회주의 붕괴와 관련해서 였다. 알뛰세르의 대표적인 초기저작들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는 맑스주의이론의 창조적 생산,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이라는 희망찬 기획과 열정을 안고 국제 맑스주의운동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여러 가지 편향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현실운동에서 이론가집단으로의 퇴각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기존까지 맑스주의는 계급대중운동에 외부에서 자신의 전략과 과학을 주입하는 위치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이것은 알뛰세르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테제에서도 집약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계급대중운동과의 유기적인 연관관계의 끈을 현실운동에서 발견하지 못할 때, 스스로 학문의 일파로서 강단으로 향하게 되는 결과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알뛰세르의 ‘이론적 실천’이 그리고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 -알뛰세르 스스로 인정하듯이- 이론의 후퇴적 설정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은 알뛰세르가 과학/철학의 분리된 문제틀속에서 과학/철학이 동시적으로 대상으로 하는 직접적인 물질, 현실운동을 ‘경험주의’적 요소로만 사고한 지점에 있다.16)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는 그 유명한 테제는 이론의 실천에 대한 항시적인 우위성과 함께, 이론의 검증과정으로서의 실천이라는 실천의 명제에 대한 협소화를 낳게 되었다. 즉, 중심적인 것은 이론적 전통과 전략의 확립이며 부차적인 것은 이를 검증할 만큼의 현실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편향은 알뛰세르가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내재한 제 2인터네셔널부터 시작된 맑스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뛰세르의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과 과학적 개념의 생산의 계획은 알뛰세르 자신의 독창적인 기획이며, 당시 교조화된 맑스-레닌주의의 전통 안에서 계급운동의 위에 군림했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실망과 변화가능성을 모색하던 청년 맑스주의자들의 시대적 문제의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초기 알뛰세르는 ‘이론내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당시 유럽내의 다양한 이론 - 특히 구조주의/정신분석학등 - 에 대한 유물론내에 포섭을 성공함으로서 이론 진영에서의 압도적인 우위라는 빛나는 길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지형하에서 노동자계급운동과 소련의 지도를 받던 프랑스공산당 내의 모순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알뛰세르의 이론적 기획은 당내에서의 비판세력으로의 알뛰세르의 입지-현실적으로 독자적인 조직적 실천이 아니라 -를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는데 한계가 있다. 프랑스공산당은 스탈린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당내 비판적 지식인을 주기적으로 축출하였으며 항시적으로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이미 결정된 지도에 벗어나는 새로운 정책과 입장을 배제하였다. 또한 68년 혁명과 같이 노동자계급과 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던 시기에 이러한 운동이 자본주의체제의 부정이라는 극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끔 - 당에 의해 지도되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 노동자파업에서는 현장복귀를, 학생시위대와 노동자시위대의 철저한 분리를 유지하려 했다.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제출한 정책은 혁명적 대안의 수립으로 달려가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요구는 무시하였으며 68년 혁명의 불꽃은 무정부주의, 마오주의, 아나코 생디칼리즘이라는 규정 속에서 소실되었다.

 프랑스에서의 68년 혁명의 패배이후에 지식인사회는 맑스주의전통의 밖으로 방출되었다. 많은 젊고 야심에 찬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주의의 영역 밖에서 해체되고, 침묵하거나, 분열되었다.17) 이러한 불운한 상황에서 후기 알뛰세르는 초기에 제출한 계획과 문제제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맑스주의내에는 ‘국가론’과 ‘조직론’이 부재하며, ‘맑스주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18)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기의 이유를 맑스주의이론 내부에 맑스주의의 정치이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맑스주의의 위기’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고유한 정치이론을 생산하지 못하였다는데 있으며, 그러므로 맑스주의는 당대의 정치를 조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후기알뛰세르는 맑스주의를 역사과학에서 계급해방의 이데올로기로 변경하였으며, 맑스는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을 발견하고 생산한 과학자에서 유럽의 노동자계급의 실천적이고 직접적인 실천과 함께 했던 유기적 지식인으로 재규정되었다.19) 우리는 후기 알뛰세르의 입장이 당시 프랑스 좌파지식인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상당히 모호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침잠하거나 일탈하거나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환멸로 말미암아 반대편으로 나아간 지식인들속에서 알뛰세르는 스스로 그토록 비판한 프랑스 공산당에 대하여 - 투쟁의 과정에서 함께 했던 - 애틋한 마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좌파지식인이 모두 탈당하거나 축출된 프랑스공산당내에 남아 당내 비판자로 남아 있기를 원했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소시기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또한 그의 비판들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았다. 그의 대표적인 ‘당내에서 더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적 저작도 단지 이론지형의 변화 즉, 당내 비판지형의 변화로서 서술되었다는데 한계가 있다. 

 프랑스철학자들 - 당내 공식 철학자든, 비공식 철학자든 -이 철학사에 착목하였던 것은 철학적 논쟁 속에서 새로운 권력의 요구를 찾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철학을 통하여, 한 시대를 압박했던 헤겔주의 즉, 부르조아 국가이성, 법이성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 였다. 당시 철학자들은 헤겔주의로부터 지평과 언표, 코드를 결정하는 동시대의 플라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헤겔주의에 대한 꼼꼼한 독해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인 모순점을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하고 선명한 인식에 기반하지 않은 채 단순히 반대한 것이 사실이다. 알뛰세르와 같은 경우는 헤겔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총체성- 변증법의 실체를 형성하는 모순의 전체관- 이 단선적이며, 미분화된 채로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서 독자성을 자지고 있는 심급에 대한 과학적 인식들을 불가능케 하는 경험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므로 헤겔의 변증법을 전도의 형식으로 계승한 맑스주의내부에 헤겔주의의 영향은 경제결정론적 편향의 철학적 원인이 된다. 맑스주의는 경제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경제라는 심급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심급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 정치, 과학에 대한 일방적인 우위를 이룸으로서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불가능하게 가로막는 하나의 장벽이다. 알뛰세르는 맑스주의내에서의 경제주의/주의주의는 맑스주의내에 잔재하는 - 또한번 제거하고 추출해야 하는 - 헤겔주의의 잔재라고 보는 것아다.

 알뛰세르는 헤겔의 전체성으로의 인식체계를 철학/과학 논쟁을 통하여 구조적 총체성으로 세련화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알뛰세르의 문제의식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헤겔의 비판을 ‘인식론 = 존재론 = 논리학이라는 설정 속에서 맑스주의의 역사적 재구성의 작업을 과학/철학의 문제 즉, 인식론적인 문제해결로만 수행하였던 것이다.20) 그런데 우리는 인식론과 논리학과 존재론이 진정으로 동일한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론적 논쟁이 현실 속에서 절대적인 실현을 보증하였는가? 왜 맑스는 이성적 질서 안에서 ’비판적 비판‘을 현실대상에 대하여 실천적이며, 변혁적이지 않다고 보았는가? 맑스가 “이론이 대중을 전취하자마자 물질적인 것이 된다.”21) 고 말했던 때와 “이론만으로 부족하다. 현실이 쇄도해야 한다.”22)라고 말했던 때는 단지 시기적인 고려 속에서 사상적 진화일 뿐 어떠한 모순점도 없는 것일까? 의심해 보아야 한다. 유물론의 전통 속에서 이제까지 간과됐던 부분에 대한 지적은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식이 항상 동일하다는 역사주의의 전제이다. 물론 역사적 조건 속에서 동일지반을 형성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사실임에도, 헤겔주의는 비동시대성을 갖는 역사를 승인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하여 다름 아닌 알뛰세르 자신이 경험주의, 역사주의라는 비판을 통하여 치열하게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인식론적 비판과 단절 속에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는데 문제가 있다.

 헤겔의 동일성의 근원은 무규정적이고 무차별적인 존재자라는 설정에 있다. 헤겔의 존재에는 분리와 적대와 투쟁이 없다. 헤겔이 존재론(존재/무/생성의 원리)에 대하여 승인하는 것은 인식과 존재의 변증법적 통일을 마법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23) 존재론적인 균열과 분리와 차이가 없는 무규정적인, 무근거적인 존재가 생성의 가장 일차적인 것이라는 것을 승인한다면, 현실운동의 본질적 차이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헤겔의 동일성은 프롤레타리아운동과 부르조아운동의 존재적 분리와 적대를 은폐하고, 의회라는 틀 내에서 국가장치의 협력자가 되거나 일국사회주의의 지배권력을 형성하여 ’국가강화‘를 이루어냄으로서 부르조아정치의 근본원리 -억압을 통한 통제-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게 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꼬뮌투사들의 입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원리는 근본적인 존재의 적대를 법이성 / 국가이성내의 대립과 모순으로 환원한다.24)

 존재론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는 그 동안 침묵하였던 분리되고 차별화된 적대를 차이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유물론의 전통은 만물의 근본원리는 물질운동이라는 점을 승인하고, 물질운동의 양태가 사유와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알뛰세르는 사유의 영역을 존재의 영역에서 분리시켜 하나의 물질운동의 연장 - 물질성에 대한 승인- 으로 사고한다. 그것을 통하여 인식의 총체성내에 다양한 자기운동의 심급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존재의 영역은 단일한 존재일 뿐이고 중층화된 의식을 경유하여 진화하는가? 의식과 분리된 존재의 영역에는 차이와 균열과 적대란 없는가? 질문해 보아야만 한다. 만약 선차적으로 자기원인에 의해 생성하는 다수자들이 없다면 현실의 실천은 구조화된 진리의 검증과정으로서 지위밖에 없을 것이다. 즉, 영구불멸한 법질서 테두리, 국가장치의 테두리에서의 존재의 운동과 실천만이 가능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알뛰세르주의는 초기에 ’이론주의‘에서 그러한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후기에 신헤겔주의로의 전향과정에 있다”고 평가한다. 초기 알뛰세르는 헤겔주의에 대한 이론적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여 독창적인 이론적 전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론적 전통을 확립한 시점에서 - 또는 이론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시점에서 - 실천으로 나아가려 했을 때, 실천의 구체적인 무엇이 되기에는 현실에서 쪼그라듦을 막을 수 없었다. 초기 알뛰세르의 ’이론적 실천‘ 개념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한 편향 즉, 카우츠키적인 편향이 아닌가? 또는 베른슈타인의 신칸트주의적 수정주의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던질 수도 있는데, ’이론적 실천‘ 개념은 사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레닌에게 계승되는 하나의 전통으로 이론의 재구성이라는 해부용 메스를 대지 않은 알뛰세르가 중심개념이다. 그런데 말년 알뛰세르는 현실 속에서의 맑스주의 정치적 실천을 해명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경험주의라 힐난하며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것은 모호한 정치, 우연적이며 불확실한 세계상으로의 후퇴를 의미하는데 그에게 침묵을 권고하던 발리바르도 말년에 가지 않을 없었던 길이다.25)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 알뛰세르주의는 결국 유로콤의 정치지형에 흡입되었다. 포스트알뛰세리안의 실추와 더불어 ‘실천적 실천’ - 현실 속에서의 단련과 조직화 - 의 들뢰즈의 제안은 주목될 수 있다. 맑스주의라는 이론논쟁의 지형이 스탈린주의정당내에서 이루어졌던 프랑스의 정치/이론지형에 대한 고찰없이 그에 대해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맑스주의, 신무정부주의, 문화주의라고 낙인짓는 것은 너무 섵부른 규정이다. 들뢰즈는 ‘오늘날의 헤겔주의’인 포스트알뛰세르주의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실천적 실천’이라는 구성적 유물론을 제안한다. 동시에 구성적 유물론은 수미일관성을 편협함과 ‘과거는 구체적으로, 현채는 추상적으로’ 실천하는 교조주의적 전통에 대해, 실천의 다양한 지평과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통해서 유물론이 진정한 개방성과 우위성에 있다는 것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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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理論과 實踐의 一般的 關係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연동되는 문제이다. 맑스의 저작 내에서도 초기의 저작 [헤겔법철학비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임시테제]부터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문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일반론으로 그것의 실재적 의미를 간과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동일화가 평론가적으로, 때로는 이론적 권위와 전통을 보증하는 매개고리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실천에서 괴리된 이론은 순전 스콜라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으며, 스콜라적인 것의 한계지점을 부정하게 된다면, 현실운동에 능동적인 것을 이론으로 인식하는 메시아주의적 태도, 이론적 태도가 현실의 난관을 구출한다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를 퍼트릴 뿐이다. 맑스주의는 청년헤겔좌파의 이론과잉이 바로 후진적 독일의 정치상황을 즉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독일고전철학의 과도한 논쟁들이 실재로는 비실천적이고 무능력한 현실이라는 것을 보았다.27) 맑스가 [신성가족]에서 그것의 부재를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 설정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시 청년헤겔파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현실과의 유일한 매개고리였던 신문평론에 대한 탄압을 직면하여 포이에르바하를 발견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헤겔 좌파를 포이에르바하주의자로 전화시킨 시대적 열광은 사실 정치적인 패배에 따른 이론적 퇴행 즉, 감성적 인간으로의 복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맑스또한 포이에르바하의 문제설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영향은 초기 저작에서 쉽게 발견된다. 포이에르바하와 청년헤겔주의는 사실은 밀접한 내적 연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과소인간/과잉이성이라는 철학적 원환(圓環)은 감성적 존재의 본성을 다루는 철학적 인간주의와 이것을 뿌리로 하고 본질을 획득해 나가는 즉자/대자적인 운동(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물신화된 절대이성으로 나아가는 헤겔주의의 전 체계내에서의 운동인 것이다.

 


   <<<이제까지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맑스는 자신의 11개의 임시테제에서 인간본성론적인 포이에르바하의 문제설정이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실천의 진정한 의미를 신비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실천은 현실운동을 주도하고, 현실적 한계를 돌파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의 원동력을 주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실천은 독자적인 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종별화된 것으로 하위화되어 있다. “실천은 진리의 기준이자, 진리의 검증기준이다.”라는 엥겔스 정식은 이론과 실천의 연관하에서만 실천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28) 피상적으로는 ‘실천’을 변혁의 원리로서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비에트이데올로기의 명제의 문제점은 이론과 관계를 갖는 실천만을 실천으로 봄으로서 실천이 “존재의 원리” 즉,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투쟁)로서 존재를 보존하는 원리이면서 “현실변혁의 근본원리”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실천은 헤겔처럼 이성의 하위의 범주로서 감성적이고 본성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의 검증을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의례적인 절차가 아니다. 또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이론적 권위와 전통’이라는 원리를 자신의 지배권력을 유지하는 원리로 교묘히 차용하고 있을 때, 혁명적 실천의 의미는 이론의 점진적 검증과정을 의미하거나 반대로 우연적인 발견과 도약과 예정된 파국의 의미로 해석될 뿐이다. 제2인터네셔널의 진화주의 / 파국론이라는 편향 속에서 실천의 의미는 기계론적으로 교조주의자들에게는 전통/비전통의 이론적 대립을 검증하고, 수정주의자들에게는 의회의석 확보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진정한 ‘실천’의 의미는 현실운동속에서 단련되고 투쟁하고, 현실의 난관과 한계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돌파하고, 전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29)

 


 다>‘理論的 實踐’에서 ‘實踐的 實踐’으로

 


 맑스주의는 자신의 역사속에서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변화와 창조를 억압하고, 봉쇄한 채로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가 결정적인 의존한 것은 그 자신의 이론과 실천이 대상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역사적 선명성과 구체성에 있었다. 즉, 혁명의 구체성과 선명성이 맑스주의의 억눌린 실천적 전통을 그나마 보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뛰세르의 ‘이론적 실천’은 이러한 봉쇄된 맑스주의 이론에 생명력을 주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수정주의라는 이상한 딱지를 감내하고30) 레닌주의의 ‘구체에서 구체로’의 분석기획을 계승하여야 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현재의 역사는 추상적 보편의 원리로 바라보는 소비에트이데올로기의 교조주의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카우츠키, 레닌, 알뛰세르까지 계승된 전통으로 ‘미리 설정해야 하는 전략’이라는 이론설정이 갖는 ‘진리효과’로서 현실개입과 실천의 전통이다. 이러한 실천의 모델은 선차적으로 이론전략을 재구성하고 세련화/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뛰세르는 보편적 원리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에 하위화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역사과학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식론적인 단절’이라는 구조주의적인 방법을 차용한다. 동시대적 인식으로서 철학에서 비동시대적 인식으로서 과학을 구원하기 위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은 이론내 혁명/생산/실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알뛰세르는 합리론적 전통아래에서 현실과 사유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경험주의적 인식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서 ‘선험적인 의식’내에서 ‘주어진 대상에 대한 인식’을 비생산적인 초험적 의식(철학)과 대상성이 명확하며 생산적인 의식(과학)으로 분리함으로서 과학의 우위성을 검증하려 하였다. 이러한 철학과 과학의 분리는 스피노자적 일원론적 인식의 도입을 통하여 즉, 신(=자연)의 본성의 연장으로서의 사유와 존재의 속성들은 독자적인 자기원인을 갖는 심급으로서의 분리될 수 있다고 검증하였다. 알뛰세르는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 자기운동의 심급은 과학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선언한다. 알뛰세르는 역사과학의 재구성이라는 기획을 통하여 구체적인 역사의 운동속에 정치/경제/과학/이데올로기의 자율적인 심급을 분리시키고 이들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스탈린주의의 경제결정론은 돌아오지 않는 역사의 시간인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며, 중요한 것은 불균등한 발전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생산관계라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기획이 이론의 선험적 설정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마치 이론의 우위성속에서 마치 철학의 혁명/경제학의 혁명/정치학의 혁명/과학의 혁명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론적 실천’이라는 중심범주 속에서 ‘과학의 생산작업’이 ‘경험주의’라는 맑스주의정당의 인식론적 오류를 정정할 것이라 본 것이다. 알뛰세르는 구체적인 역사속에서의 맑스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의 극복은 현실운동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맑스주의정당이 과학적 생산자로서 자신과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던 오욕을 투명하게 - 있는 그대로 - 보았을때, 맑스주의는 변화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31)

 알뛰세르는 이론의 실천적 의미를 이론내적 실천으로 가둠으로서 결국 ‘실천’을 질식시키고 압박하는, 실천의 의미를 변혁적인, 현실운동의 도약과 결절, 이행의 현실운동의 원동력으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이론에 의해 전취될 수 밖에 없는(‘대중=독자들?’) 진리효과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알뛰세르가 과학의 중립성에 근거한 이론의 자율성의 한계를 승인한다면 이론은 결국 스콜라적인 것, 논쟁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한계를 명확히 갖는 것으로서, 실천보다 우위에 서서 이론을 메시아적으로 만들고 실천을 스콜라적으로 만드는 타협점을 동시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물론 이론과 실천은 각기 상이한 속성을 가진 심급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험주의는 이론과 실천의 한계를 모호하게 하며, 타협시킴으로서 주관적 관념론과 기계적 존재론이라는 상보적인 이론지형을 형성한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이론과 실천은 동시적이고, 상보적인 원환을 형성하여 이것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이라는 각기 개념은 극한적인 지점인 한계테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알뛰세르의 이론의 자율성의 테제는 이러한 분리작업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은 이론과 존재를 대립시킴으로서 실천을 이론에 종속되게 하였다. 이론과 실천의 차이와 분리는 현실이라는 유일한 장에서 실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이 말은 모든 실천에서 이론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효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론이 과연 얼마나 실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잠재하고 있는가로 다루자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이론은 실천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에 자신이 실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계내에서만 유효성을 갖는다. 극한적인 실천의 개념은 실재적인 것의 자기운동이자 이론의 개입은 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므로 이차적이다.32)

 이제까지의 실전과 이론의 관계는 “실천의 한계는 이론의 한계라는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이론의 극복이 실천의 지평을 연다”라고 사고되는 편향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반대로 실천의 우위성 속에서 판단한다면 실천은 존재론적인 한계와 다양한 논쟁의 한계를 돌파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즉, 이론과 실천은 하나의 계주를 형성하며, 이론과 실천은 상보적으로 평행을 달리지만 계주의 끝에서 실천만이 이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전통은 ‘이론의 자율성과 발전과정’이 아니라 실천의 현실적 도약을 인식하는 것이다. 극한적으로 실천의 상승발전은 ‘실천적 실천’- 단련과 조직화, 투쟁- 이외에 개념의 외부개입의 여지가 없다. 이론의 독자성은 예컨대 실천의 과정에서 그 한계와 위기를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33) 즉, 수많은 이론의 해석이 한계의 지점에 다다르면 실천이 이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은 이론과 실천의 유효적 차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함으로서 ‘이론의 권위와 전통’과 ‘이론의 재구성작업’을 과도하게 착목함으로서 실천을 유대교적인 천한 것으로 만들었다.34)

 결국 신성가족의 비밀은 세속가족에 있듯이 지상에서 해결하여야 할 문제를 이론주의로 우회하는 것은 다양한 실천을 신비화하고, 과도하게 자임/자만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된다.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은 현실의 실재적인 것이 자신의 역능을 획득하여 가는 과정이외의 존재의 배후에 의식이 메시아적으로 능동성을 갖고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즉, 대중은 항상 수동적이며, 지식인은 능동적이라는 해묵은 발상은 노동자운동의 실재적이며, 적극적인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론과 실천의 유효적 차이와 이에 따른 평행적 계주로의 소묘는 이원론에 대한 거부로 의미한다. 이는 맑스주의와 노동운동의 융합이라는 역사 속에서 권위주의적이고 이론주의적인 전통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실천의 영역속에 이론의 영역을 실재적인 역능의 구체적인 장에서만 마련하고, 이를 통하여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유효적 차이 - 비변증법적인 분리 - 를 설정함으로서 유물론의 ‘실천적 전통’을 방어한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실천적 실천’의 범주의 우위속에서 분리되어 나타나고 평행을 형성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주는 유효적 차이로서만 이러한 분리는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평론가이자 과학자로서의 당’을 유념하여 이론에 대한 우위를 강조하는 편향(알뛰세르)과 이론의 유효적 영향력을 전향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동일화시킴으로서 결국 실천을 존재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편향(네그리)에 대해서도 적절히 비판할 수 있다.   

 

라> 意識의 外部導入테제와 關聯하여

 


 그러므로 의식의 외부도입테제는 이론과 실천의 분리(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이원론적 설정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역사적인 혁명조직의 역능과 이것의 실물적인 영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에 대한 이론이다’라는 테제는 ‘의식의 외부도입반대테제’로서의 보편적 이론설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에 존재하는 역능, 잠재력을 서술하는 것이어야 한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은 존재자체가 현존재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의식과 의지의 최고 구현체로서의 당이 계급의 항상 상위에 위치하게 된다.35) 루카치는 계급의 즉자/대자적인 발전을 통한 개별에서 보편적 구현체로의 상승발전이라는 의식적 발전모델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발전모델은 스탈린주의적 편향인 주의주의/경제주의라는 이원론적 문제의식과 일치한다. 즉, 인과론적인 결정형태로서의 사회나 자연의 필연적인 과정의 수동적 심급에 대한 의식적인 주체의 자유의지가 대자적으로(주/객의 동일화)발전하여 능동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루카치의 당이론은 계급의지의 최고산물로서 인데 이 당이 계급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당의 정책과 실천이 어떤 조건하에서만 진정한 계급의지의 최고산물이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스탈린주의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카치는 노동자계급운동을 현실변혁의 역동적인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해진 역사인과론에 의해 움직이는 주어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현존재와 개인적 의식이라는 이원론을 매개하는 것은 초월적 원리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루카치의 (동시에 스탈린의)당이다. 36)

 이러한 당이론에 대한 편향은 알뛰세르에 의해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는데 즉, 당과 계급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는 당인가? 노동자계급운동의 상승발전가운데 사용되어야 할 무기로서 당인가?를 해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편향은 이론 내에서만 ‘의식의 외부도입인가? 반대인가?’를 말했을 뿐 ‘당조직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선물과 같은 것이 아니며, 동시에.  노동자계급 또한 주어진 역사의 경로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이고 자연사적인 운동의 담지체가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은 노동자계급의 소시기의 투쟁에 의하여 발현되며, 운동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적대를 재생산한다. 맑스주의정당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일부이며, 다양한 노동자계급운동에 조류중에서 반자본주의의 과도기적 이행기에 있어 제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에 있어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이자 도구로서 의미를 갖는다.

 후기알뛰세르는 피상적으로는 의식의 외부도입에서 반대테제로의 이행을 통하여 ‘주체 없는 과정’에서 ‘계급대중주체’로의 대전환을 이룩한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 일관되게 그는 “과학자로서의 당” 또는 “지성적 당”이라는 설정 속에서 선험적 보편전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논의는 실물적인 형태를 표현할 때 현실적이다. 현실의 투쟁과 자율성이 존재하는 한 무제한적인 폭력적 적의 설정은 현실운동의 억압을 위한 가공적인 것이다.37) 전략자체가 먼저 세워지고 수정되었던 알뛰세르주의는 유럽의 정치지형변동 스탈린주의적인 편향 내에서 ‘전략수정을 통한 혁신’이라는 “스탈린주의정당에서 유로콤정당으로의 선회”와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작은 미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숙련노동자를 핵심으로 한 동맹계급에 대한 의식적 지도속에서 혁명적 이행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계급지형의 변화를 거쳐 4월테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당시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과정에서 어떠한 부위보다 선진적이며, 사회주의로의 성장전화는 노동자계급의 분출하는 혁명적 요구가 있을 때야만 ‘가능성과 슬로건의 영역에서’ 현실의 흐름으로 전화될 수 정확한 지적이다. 러시아혁명의 시기에서 이러한 슬로건은 실재적인 노동자계급운동의 성장전화의 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회주의조직의 태도를 다루는 초기저작은 계급의 선도성을 인민주의의 ‘농민계급과 인텔리’를 혁명세력의 중심으로 본 실천에서 ‘혁명적 직업가와 직업적 혁명가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의 당조직의 토대마련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 레닌의 이론은 이미 인민주의자들의 실천과정속에서 느껴지고 있는 한계(인민주의자의 일부와 울리아노프도 이미 느끼고 있었던)과 현실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레닌의 이론은 ‘인민주의의 실천이 사회주의로 진화한다는 이론적 문제틀을 생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38) 레닌의 이론은 단순히 현실을 논쟁으로 이끌기 위한 평론적 원리가 아니고 실천이 돌파해야 할 구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제2인터네셔널은 ‘경제와 정치의 엄격한 분리’라는 이원론속에서 계급과 당의 엄격한 위계와 분리, 당의 현실운동에 대한 이론적 권위가 노동자계급의 외각에서 스스로 제헌적 권능으로서 변질하게 하였다는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제시한다. 제 2인터네셔널은 사회주의정당과 노동자계급과의 융합을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잠재력을 통한 변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내에 의석 수를 확보하기 위한 표밭으로 대중의 욕구를 한계짓고, 철저히 의회라는 계급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선전과 담론들, 전통과 비전통의 논쟁과정에서 이론적/실천적 무능을 의미하는 당의 폐쇄성이라는 문제점들을 남겼다.39) 역사의 구체운동은 러시아혁명의 진군이 가지고 있는 난점들, 후진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가 발전한 자본주의의 국제적인 지원없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결국 당의 역사적 타락이라는 형태를 통해 해결됐다. 전쟁과정에서 많은 선진노동자가 유실되었고, 혁명과정을 주도한 숙련노동자의 일부는 경영인으로의 전화를 통해서(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 혹은 당내 경영인의 영입을 통해 새로운 지배계급은 형성되었다. 맑스레닌주의정당이 스스로 제헌적인 권능을 가진 지배세력으로 전화하여 계급으로부터 분리하고, 계급을 통제함으로서 스탈린주의는 혁명을 변질시켰던 제 2인터내셔널의 각 정당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인 편향들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포스트 알뛰세르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이론적인 심급에서 선택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론적인 면에서는 초기 알뛰세르주의 급진적인 과학적 태도에서 모호한 정치학으로의 퇴행, 실천적으로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잠재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국가내의 제헌적 범위로 억누르고 한계 지웠던 제 2인터네셔널과 스탈린주의, 그것에서 입장선회한 유로코뮤니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40)    

 

마> 헤겔辨證法의 또 다른 問題點들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와 방법을 자신의 이론적 작업에 적극적인 도입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주지해 온 바다. 맑스는 헤겔의 적극적인 반대자이면서 동시에 비판적 재구성을 통한 헤겔의 계승자였다. 초기에 맑스는 청년헤겔좌파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는 헤겔 체계의 전도를 통하여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서 있거나(도이취이데올로기), 정치경제학의 재구성작업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도입하거나(1844경철수고). 헤겔의 논리학을 도입(정치경제학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에 진정한 계승자, 이성의 왕국을 필연의 왕국으로 전도시킨 ‘빈자의 헤겔’인가?

 헤겔의 변증법은 감성적 세계와 이성적 세계로의 즉자/대자적인 진화과정이다. 이성은 감성적인 세계에서 소외되어 부정에 부정의 운동을 연속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의 과정은 역사를 단선적 진화과정으로 바라볼 위험에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역사는 우연적인 간섭이 배제된 동일자의 현실운동인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적대와 분리에 있는 원리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근저에서 이 마력의 협조자가 다름 아닌 포이에르바하의 휴머니즘이라는 알뛰세르의 폭로는 타당한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대상의 소외과정으로서의 물신성의 원리를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의 보편적인 억압과 수탈이라는 원리로 차용한다. 이러한 원리는 감성적 존재와 절대적 이성이라는 시민/국가의 부르조아적 설정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다가올 정치세력은 이성의 보편적인 소외자이면서 이를 전도할 역사적 사명을 띤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에 전근대로부터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를 폐절하는 혁명적 운동과 보편적 권력의 획득과 새로운 모순을 일으킨다. 맑스는 이러한 잠정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의 전체계화라는 동일성의 요구를 억누르는데 이것은 빠리꼬뮌의 역사적 실천이르러 구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자본론]의 서술시기에 맑스는 자본의 물신성현상을 단지 각주로 서술하면서 소외라는 철학적 논쟁의 실물적 영향력을 확대해석하지 않는다. 즉, 자본에 대하여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을 사고하지 않는다.41) 자본론은 물신화된 대상세계에서 감성적 인간의 원리를 배제하였다는데서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노년 맑스는 헤겔철학이라는 근원과 목적에서 벗어나 대상적인 인식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론]의 기획의 문제점은 가치-화폐-자본으로의 이행과정이 개념자체의 자기원리에 의하여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은 [요강]의 개념의 적확성을 겨냥한 주해서인 것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여기에 있다.42) 역사적으로 ‘화폐에서 자본으로 전화’는 비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 예컨대 자본의 시초적 축척은 진화적 과정이 아니라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은 비경제적인 정치권력의 강제에 의해서, 자본의 위기와 모순은 스스로 조정되기 보다는 전쟁과 공황과 분규 등의 결절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요구한다는 점을 맑스는 간과하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자본론]은 ‘역사적 자본주의’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전제들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구체 자본주의의 분석을 위한 전제들을 서술한 것이다. 맑스가 서술한 이론의 평균공간에는 틈이 없다. 변증법적이고 균등하며, 간섭의 요인이 없다. 예컨대 가치론의 전제, 노동의 이중성은 전형화 되고 완결된 체계이다. 이러한 난점들에 대한 지적들은 수정주의 논쟁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바이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를 신칸트주의적인 형태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맑스의 개념적 확실성을 위한 이론적 공간과 실물적 현실세계에 대한 간극은 비변증법적인 운동의 실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적 통일’의 철학적 원리를 보편화시켜 직접적으로 적용하면 이론적 한계들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은 유물론의 우위성속에 변증법/비변증법은 함께 포섭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변증법적 통일의 원리는 노동계급의 권력으로의 진군의 미래를 그리고 노동자조직의 꼬뮤니즘적 활동을 소묘적이고,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마치 형이상학적 배타성과 동일성을 승인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데, 역으로 변증법적 통일의 원리가 부정의 형이상학을 내포하고 있다. 헤겔의 인정투쟁은 단일한 존재의 운동이므로 때문에 존재자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헤겔의 모순은 반성작용이며, 소외로서 법테두리내에서의 인정투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부정의 사법적/가치론적 의미는 이렇게 묘사될 수 있다.

 

 

 

너는 사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선하다.  - 노예의 추론법

나는 선하다. 그러므로 너는 사악하다.  - 주인의 추론법

 

 

 

 주인의 가치판단은 자신의 가치의식을 통하여 대타(對他)적인 규정과 평가의 형식에서 이루어지지만, 노예의 부정의 형이상학은 주인이 결정한 선이라는 가치의식 내에서만 부정적 운동을 수행한다. 때문에 노예의 논리는 주인에 대하여 독립적이지 않다. 인정투쟁의 가치론적 의미는 국가이성의 핵심을 이룬다. 노동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반성되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날 뿐 주체로 나타나지 않으며, 주인의 가치의식 내에서의 노예의 부정은 일시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인의 논리로 수렴되고 만다.43) 노동자운동의 적극적 의미는 주인의 논리에 포섭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생산 즉, 제헌적 권능을 스스로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마치 자본이라는 주인의 논리가 영구적이고, 이를 통해서만 주체화양식이라는 상승적인 질서를 기약할 수 있다는 포스트알뛰세르주의 주인-노예의 변증법과 제 삼의 길에 대한 환상은 주인의 법테두리내에서의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우위로만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다.44) 후기알뛰세리안이 본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인 노예에 비교될 수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은 반성과정 = 즉자대자적 소외 = 이성을 더욱 긍정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며,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에 포섭되거나 단지 형이상적인 부정의 질서인 시민이라는 단자로 해체된다. 헤겔의 부정은 철저히 계급적 가치론을 내포하고 있는데 원한과 극단적 부정이 차별적인 질서이며, 동시에 적대적인 계급이 자신을 긍정하고 새로운 자기가치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장벽이라는 의미에서 이다. 후기자본주의라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단계]에서 자본의 전사회적 공장화의 노력의 결과로 형성된 ‘대중의 노예화현상’은 필연적으로 ‘개혁/개량주의’의 융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자본 스스로가 탈중심화된 형태로 나타나 자본주의에 실존하는 또하나의 계급 노동으로 하여금 자기보존의 투쟁으로서 가치생산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끔 가로막고 헤체하고, 미분화시킨다. 그러므로 후기자본주의의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에 진정한 문화적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국민을 위한~’ 이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만성불황과 지속적인 경제위기라는 형태로 자신의 독점적인 제헌의 역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끈다.45) 자본주의생산내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노동생산성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수단의 발전이다. 알뛰세르와 발리바르가 생산력의 발전은 착취의 강화를 의미하므로 생산양식론의 일반설정은 불가능하다라고 본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후기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하여 노동의 양적 착취만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변화 또한 수반한다. 즉, 자본에 외재적인 요인으로 독립변수로 느껴졌던 노동이 자본의 사회 - 생산협동주의를 통한 사회적 공장화를 통해 종속변수로 전화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헤겔적 변증법과 부정의 형이상학이 동원되는데, 즉 산노동의 일부를 축출하고 자동기계를 대체시키며, 사회화되고 유연화된 노동의 일부를 매개하는 방식을 통하여 자본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철저한 배제와 헤체의 메카니즘을 작동하는 것이다.46)

 법의 테두리에서 노동(의 권리)은 부정적이고 반성적인 지위를 가질 뿐이다. 그러나 노동의 제헌적 잠재력이라는 긍정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투쟁과 더불어 노동자조직의 지체의 시간을 극복해 나가는 자기가치증식47)의 실천이 요구된다. 노동을 탈구성적 요소로 바라보는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력은 생산의 일부 요소일 따름이다.48) 한계된 부정은 한계외부의 긍정에 의해서만 새로운 지평을 연다. 긍정의 장을 여는 존재에서의 유보없는 절단은 봉합되어 있는 적대와 분리를 실물화한다. 이것만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힘의 공간을 연다. 자본과 차별화되고 분리된 노동에 대한 긍정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활동적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구성적 주체인 진정한 노동의 적극적 운동인 것이다.49)

 또한 알뛰세르는 헤겔의 존재/무/생성의 존재론적 운동은 단일한 존재의 양적 증가를 의미하는 단일한 본질의 표현적 총체성을 의미할 뿐이라는 비판을 수행한다. 이러한 비판은 스탈린주의에 내재된 헤겔주의의 유제로서 경제결정론과 생산력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알뛰세르는 이러한 문제를 구조결정론적 인식으로 극복한다. 앞서 알뛰세르의 이론주의가 어떻게 실천을 왜곡하였는지 살펴 보았다. 존재는 중층화된 자율구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성을 갖는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개의 자기운동이 결합된다. 알뛰세르는 양에서 질로의 전화의 법칙이 양이 동일한 질적 규정 내에서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질적 수준이 양과 결합된다고 말한다.

 


“ 자아는 단일자이며(정립),  또한 그것의 다수자(반정립)이며,

그런 다음 그것의 다수자의 통일(종합)이다.”50) 

 


 그런데 알뛰세르의 생산력주의 비판은 사회적 생산관계가 계급투쟁에 의하여 결정된 계급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구조적 중층결정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알뛰세르는 존재의 다수성 즉, 두개의 계급이 서로 상이한 목적과 수단을 가지고 자기운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즉, 그는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구성된 사회구성체가 자율적인 구조들의 접합에 의해 이행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알뛰세르가 숙명론적 파국이나 진화/우연적인 자유의지라는 이원론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 理論的 反人間主義/人間主義에 대하여

 


 알뛰세르의 이론적 반인간주의테제는 근대의 주체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철학/과학의 인식론적 단절을 위하여 근대적인 휴머니즘적 주체이론(과소인간)을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철학과 과학은 상호보충적인 작용을 하므로 추출되는 경우에 자신의 지반을 극한적으로 변형한다. 알뛰세르 말마따라 맑스가 감성적 과소인간으로서의 포이에르바하/국가이성이라는 헤겔주의적 상보적 지반 속에서 있었다면, 알뛰세르는 과소인간 극한점/과잉오성으로 지평을 낮추어 조정했다. 근대철학의 대상으로서 데카르트 이후로 인식론적 논쟁의 대상인 주체는 투명하게 다루어 졌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철학이 주체를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실천적 인간을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맑스의 지적은 여전히 타당하다. 근대 주체이론의 출발점은 주체의 인식과 대상이 거울과 같이 동일할 것이라는 설정이었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 실천적 ‘주체’는 신비화되고 추상화되었다. 주체의 주/객관적 동일성이라는 자기동일성의 신화는 그 자체의 보편성에 의거하여 노동의 구성적 주체의 눈과 언어를 지하에 묻는 몰주체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근대자본주의의 사회(시민)과 정치(국가)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이 노동자로 하여금 절대적인 소외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비인간적 노동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되며, 노동의 자기보존의 끊임없는 투쟁과 노동에 대한 구성적 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알뛰세르의 반휴머니즘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실존하는 노동의 목소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구체적인 노동의 주체성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초기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외부에서 외재적이고 비변증법적인 힘에 의해서 창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은 비인간적인 소외된 인간의 욕구로 소묘되었다. 그런데 대공업적 생산방식인 포디즘체제로 돌입하면서 노동은 조직적이면서 집단적인 대중노동자로서의 인간형을 창출하였으며, 소외집단으로서의 의미는 실천적으로 탈각되었다. 포스트 포디즘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인간형을 변형하기 위해 산 노동을 생산에서 축출하는 방식으로 공장을 사막지대로, 사회를 공장지대로 만드려 한다. 후기자본주의의 자본은 생산에서 더욱 추상화되고 노동의 구체성과 전면성은 전사회화된다. 사회적 노동자는 자동기계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더욱 강력한 반인/반기계의 사이보그적 인간형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 전 영역이 노동의 중심성하에 구성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노동의 비인간화로서의 인간주의라는 인식론적 문제제기는 노동의 중심성의 회의로 역전되고 있으며, 이와 비대칭적으로 실지 존재하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과잉인간’은 공장에서 사회로 재조직화되어 유출되고 있다. 사회 전 영역에 노동이 중심성을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사이보그적 인간들의 구성적 권력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다. 구성적 주체의 제헌적 권능을 발산할 노동거부의 강력한 위력이 바로 새로운 과잉인간들에 의해서 창출될 것이다. 진정 해체와 노/노간의 경쟁이라는 탈구성을 바라는 자 누구인가?51) 

알뛰세르는 이론적으로 반인간주의를 설정하였을 뿐, 현실에서 존재하는 주체를 간과했다. 알뛰세르는 주체가 없는 상태라는 이상적 평균상태를 설정함으로서 노동을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한 요소로 동일하게 취급하는 오류를 범했다. 후기 알뛰세르는 자기비판을 통해 계급투쟁과정에 있는 계급주체로 존재의 문제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 계급의식의 이원론적 설정이라는 인식의 문제로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포스트 알뛰세리안들은 ‘사회적 노동자’를 또 하나의 대상적 사회로 보는 시민사회론으로의 회귀로 나아가며, 동시에 이것은 우연적인 해후라는 모호한 방식으로 대중이라는 개념을 부활시키게 된다.      

           

 사> 스피노자/프로이드 맑스주의에 대하여

 


 초기알뛰세르는 [프로이드와 라깡]에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대한 라깡적 해석 “존재하는 곳에 욕망은 없고, 욕망이 있는 곳에 존재가 없다.” 부재와 결핍의 욕망을 서술하는데, 이것은 분열된 주체(주체들)가 무의식이라는 근원적인 대주체(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는 이데올로기론으로 발전한다.52)

헤겔주의에서 시민사회내의 개인은 소유권에 대한 사법적 제약을 받는데, 이것은 개인은 ‘욕구적 존재’이며, 이것을 종합할 진정할 주체는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알뛰세르가 무의식이라는 대주체를 승인하였을 때, 그것은 욕망하는 구체적인 주체의 개념으로부터 탈각하여 물신화된 원리로 발전한다. 즉, 헤겔에게 있어 국가의 의미는 알뛰세르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또는 무의식의 개념이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엄격한 분리는 살아 있는 욕망하는 생산의 상위에 선결정성을 갖는 국가기구라는 대주체의 자율성을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체가 구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구조가 되는 끔직한 분열과 전도가 일어난다. 알뛰세르에게 있어 가족/국가/제도이데올로기는 자율성을 갖고 미리 주어진 채로 끊임없이 구체적인 존재를 괴롭히는 것이다. (알뛰세르의 광기!)

 자본주의는 생산수단과 노동과정에서 최종생산물에서 자유로운 욕망하는 생산을 전근대적인 억압수단을 통하여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욕망하는 생산에 경쟁이라는 정신분열증세를 요구한다. (극단적인 형태로 다단계판매의 집단히스테리를 보라!) 이러한 주체는 분열된 채로 남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로 회귀함으로서 재생산된다. 물론 혁명적 정신분열과 혁명적 편집증을 나타내는 경우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즉, 기존의 제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분절결합’의 메카니즘은 일탈의 여지를 주지 않는데 후기자본주의의 시대적 특징인 투쟁하지 않는 대중을 강력하게 형성하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메카니즘을 횡단하며 탈주를 시도하는 유목민적 주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주체(새로운 노동자조직)는 생산과 재생산의 메카니즘을 넘나드는데 이것이 일탈된 개인을 의미하는 것(자본은 선진노동자를 해고시킴으로서 진정으로 일탈과 무력화를 바라지만)이 아니라, 선 결정성을 거부하는 구성적 주체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 ‘욕망하는 생산’들은 그러한 욕망을 해결할 기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관없는 연접적 신체들’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53)

 1919년을 전후로 한 독일에서는 로자의 대중의 무의식적 행동에 대한 주목들이 방기된 채, 결국 제1야당인 독일공산당은 나찌정당에 참패하고 만다. 독일공산당은 지성적 당이라는 설정 속에서 대중의 이해와 요구의 외부에서 존재할 뿐 이를 조직화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독일공산당은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과 대중의 행동을 융합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선험적으로 대립설정하거나 방관했다. 그런데 대중의 이해와 요구는 실지로 사법적 질서를 기준으로 그 외부에 존재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역능 - 이것을 나찌당은 철저히 반대로 이용한다 -을 내포하고 있다. 기존의 제도와 법테두리내에서 결정된 권리 - 선결정된 무의식 - 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생산적인 요구는 노동의 제헌적 권능의 잠재력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운동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자본은 탈영토화된 노동을 재영토화로 제한하고 기율화시키지만 노동의 탈영토화는 구성적 주체의 제헌적 권능의 적극적 발현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의미한다. 사이보그의 반란은 정치라는 또 하나의 예술을 탈영토속에서 구성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54)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스피노자 맑스주의의 전통 중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주목한다. 스피노자는 존재의 역능에 기반한 정치를 사고하는데 이것이 존재의 유일한 자연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어떠한 질서도 미리 규정되어 있지 않고 ‘스피노자적 사회는 가까이에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구성적 주체들(그들이 무식하던 배웠던)에 의해 현존하는 촉발들에 기초하여 내부적으로 구성해야 한다.’55) 그런데 포스트 알뛰세리안은 이러한 존재의 역능과 구성적 주체를 무차별적인 논리로 적용한다. 즉, 존재의 다수성을 배제한 채, 일반민주주의 설정 속에서 역능의 문제로 다룬다. 때문에 노동의 권리는 노동의 제헌적 잠재력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사법적 제도에 종속된 채로 노동권으로 다루어진다. 포스트 알뛰세리안은 헤겔이 스피노자를 곡해 했던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곡해한다. 즉, 포스트 알뛰세리안은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로부터 ‘시민의 권리’인 인권의 제 범주의 재구성하고, 이를 통하여 생산양식과 함께 주체화양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권의 정치는 천부적인 자연권인 노동권, 소환권, 저항권과 여성권의 옹호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인권과 민주주의 개념의 재구성은 구성적 주체의 문제를 권리의 문제로 대체하는 전도된 세계상을 의미하며, 존재의 분리와 적대를 은폐한다. 즉, 노동의 존재론적 문제를 생산양식에 하나의 요소로 보고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구성적 주체의 적극적인 운동을 인권의 사법적 위계하에 상보적인 영역으로 있는 것으로 치부한다.56) 이러한 헤겔적 세계관을 통하여 노동의 권리는 그 자체가 바로 노동의 비권리임을 은폐한다. 유물론자라면 노동의 존재론적 노동의 제헌적인 권능을 승인하고, 구성하는 실천으로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까? 


3. 生産樣式論의 問題들에 대한

批判的 接近

 

사회구성체론에 접근하기 위하여 먼저 사회구성체의 위상과 문제틀을 정확하게 위치지워야 할 것이다. 기간의 사회구성체론의 논의는 ‘제국주의세계질서와 경제사회구성체론’을 중심으로 형성하여 왔다.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장 추상적인 위계를 형성함으로서 이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틀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사회구성체론은 이러한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요소가 역사/사회적 특수성을 형성하고 이러한 특수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노동의 관점에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산 노동 구성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해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적 위계하에 세계질서와 사회구성체에는 변화가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간의 역사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행로로 나아가지 않고 역사의 긴 우회로의 후퇴와 전진, 본질적이면서 그 예측의 범위에서 일탈적인 이론내의 상상의 지평을 언제나 초과하고 넘어서는 역사의 상상력을 현실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하여 다시 한번 ‘축척구조의 변화’와 ‘생산과정의 변화’, ‘노동의 유기적 구성도 변화’‘사회적 지배양식과 착취질서의 변화’, ‘수탈구조에서 불균등교환구조로의 변화’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양상에 대한 진단’은 1> 자본주의 조절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자본주의의 내적모순과 한계를 도리어 은폐하게 되는 자본파적 편향과 2> 자본의 병형의 양태를 간과하고 착취와 수탈구조가 초역사적이고 변화에 무관한 불변의 본질의 동일지반에 머물고 있다는 전통파적 편향으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

사회구성체론은 최종심으로서의 생산 내에서 산 노동의 일부 축출과 자동기계와 컴퓨터의 도입을 통하여 핵심노동자이외에 사회(구성체)를 노동의 가치창출의 유연한 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사회구성체의 자율성의 논의는 바로 산노동의 노동자운동의 자율운동과 연동될 수 밖는 것이다. 노동자조직의 구성적 실천의 대상은 사회적 노동자와 생산에서 안정성을 잃은 핵심노동자 전반을 의미한다. 자본의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의 산노동의 위치가 종말에 이른 것이 아니라 바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종말에 이르렀으며, 노동의 관점이 사회의 관점과 떨어질 수 없는 즉, 산노동=사회=사회적 노동자=사회구성체=계급구성체로 동일화되고 있다. 사회구성체론의 역동성은 사회와 정치의 분리, 계급역학관계와 두개의 계급간의 정치적 헤게모니로 간주되는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회화된 자본과 사회적 노동자가 비대칭적으로 실존하는 이 시점에서 사회를 핵심노동자의 정치력의 대상으로 스스로 분리시키는 실천은 노동의 제헌적 역능을 가로막는 ‘부정’으로서의 실천이다. 문제는 산노동의 사회적 역능의 총합과정으로서의 구성적 실천은 노동에 대한 ‘긍정’이며, 구성적 실천을 통해 창조의 신지평을 여는 것이다.          

 

가> 社會構成體論에 대한 一般的 槪括

 


1> ‘자본주의 생산양식론’은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의 골간을 형성하는 역사적 유물론 즉, 역사과학의 핵심적인 분석의 틀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론은 ‘임노동과 자본’의 착취관계는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형성하는데 경제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은 토대를, 국가/정당/교육기관등은 이를 반영하는, 혹은 조응하는 상부구조이다. 생산양식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 토대인데 이에 대한 규정은 ‘물질적인 생산’이다. ‘물적 생산’은 사회적 노동이 자연에 대한 합목적적인 활동과정을 통해 형성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통일체’를 의미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상호연관되고 상호전화될 수 있지만 ‘사회적 생산’의 위계를 결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 인간사회간’의 일차적인 모순과 투쟁을 형성하며 발전하는 생산력 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제요소로 하는 생산력이다.57) 그렇기 때문에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두가지의 요소로 이루어 지는데, 이는 1>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2>계급간의 상호적대적 모순이다.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관계는 생산양식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형성하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요소는 생산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물적인 요소가 아니다. 즉, 생산력은 현존하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58) 생산양식론에서의 생산력은 ‘사회가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생산력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수단과 그것을 작동시켜 재화를 생  산하는 인간이다. 생산력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역으로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의 역사적 폐절은 임박한 것이며, 하나의 필연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다른 전제하에서 볼때 완전히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생산의 특정한 확정단계에서 장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필요가 충족되는 지점이 아니라 이윤의 생산과 실현이 결정되는 지점에서 정지하게 된다.59)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내적 법칙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평균이윤률 경향적 저하의 법칙’60)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론은 자본/자본주의간의 내적모순을 해명했다는데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평균이윤률의 경향적 저하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자동붕괴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붕괴론은 ‘이윤률 경향적 저하와 상쇄요인들’의 분절결합을 단순화시켜 자본의 자기정화능력 즉, 전쟁과 공황과 사회불평등에 의한 위기국면 또한 역사적 자본주의의 일 국면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붕괴론의 오류는 자본주의와 자본간의 내적 모순을 자본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원죄적 차원에서의 사회/역사적인 문제로 직접적으로 적용하려 했다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생산력의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적 노동과 산노동의 노동거부의 조직화된 힘이다. 포디즘에서 포스트 포디즘으로의 이행은 진정으로 자본에게 위협적인 대중노동자라는 산노동의 힘을 분쇄하기 위한 자본의 재조직화일 뿐이다. 자본의 자기변형을 통하여 자신의 위기를 상쇄해냈고, 그럼으로서 붕괴냐 조절이냐를 일반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산노동의 힘을 분쇄하려는 자본의 운동을 객관화시키는 바라보는 분명 역사적 오류다. 즉, 자본과 비대칭적인 산 노동의 위기가 아니다.61) 

 ‘자본주의 생산양식론’은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으로 이어졌다. 생산양식의 분석은 근본적으로 생산이 사회적 재생산과 구분되며 동시에 사회적 잉여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자성을 가질 때, 착취양식에 대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즉, 맑스의 ‘자본주의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의 틀은 자본제적 착취양식에 대한 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탈린이 생산양식론을 사회주의로 확장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사회구성체라는 점을 억압한다. 생산은 더이상 인간의 창조적인 사회활동과 괴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맑스의 전망62)은 스탈린의 생산양식론에 의하여 왜곡되고 만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를 독자적 생산양식의 단계로 봄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사회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폭발적인 대중투쟁이 아니라 순전 경제적인 이유로 보려 했다. 스탈린 사후에도 이러한 편향은 스탈린주의적 경향으로 소련지배관료와 경제학파들에게 이어져 소련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일국내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적 진보를 가져옴으로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흐류시초프의 국제정치적인 데탕트와 제국주의와의 경제경쟁 승리라는 구호앞에 잠시 소련민중을 흥분케 한 ‘타락한 노동자의 국가’에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주지해야 할 것은 역사적 생산양식론이 지배적인 위계를 차지하는 논리는 산노동의 논리가 아니라 ‘착취양식’이라는 분석지점이다.63) 결론적으로 소련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사회주의생산양식론’은 산노동의 제헌적 역능이 바로 사회구성체의 근본적인 역동성을 형성한다는 산노동의 관점을 잃었으며 노동을 부정적인 요소로 압박했다는데 문제가 있다.64) ‘생산양식론’의 이론의 시간은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이며, 역사적으로 사멸하는 범주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와 경제의 분립’의 극복이 계속될 수록 -마치 기독교의 신학의 존재가 근대이후 사회구성체내에서 지배적인 요소를 차지하지 않듯이- ‘생산’의 의미는 ‘사회적 생산’이며 사회적 필요의 의미와 일치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양식에 대한 경제적 분석은 가능하지 않으며, 산노동의 긍정적 역능과 구성적 실천에 입장에서 사회구성체론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2> 생산양식 접합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경제적 진화와 이행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최고 발전단계로서의 제국주의시대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주의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전야’라고 하는 레닌의 표지분해론을 계승하여 규정한다. 즉 국가의 시장 개입과 통제,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공공복지/서비스)에 대한 국가참여 등을 그 맹아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쟈골로프 계열의 경제학자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는데 자본주의 내에서 근본적인 변혁을 통하지 않고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이행기의 전략에 의해 형성된 이론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이론가들에 의해 알뛰세르의 한국적 수용으로 이루어지는데 사회주의적 이행의 제 요소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양식 접합이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의 오류는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생산양식간의 접합과 이행으로 봄으로서 탈 역사적이고 몰 주체적인 성격을 드러냈다는데 있다. 자율적인 구조들의 역사는 바로 산 노동의 조직적 힘을 분쇄하려는 선구조결정론이라는 자본의 역사와 준별되지 않는다. 생산양식의 접합이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은 산노동의 제헌적 권능을 승인하지 않고, 미리 주어진 구조의 자율성이라고 봄으로서 노동의 제헌적 권능을 사상(捨象)하였던 것이다. 이는 역사발전의 동력이 되는 사회구성체내의 다양한 모순과 역동적 계기를 포함한 계급투쟁이라는 사실을 구조주의적인 이행과 접합의 문제로 치환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또다른 자동붕괴론적인 경제환원론을 양산할 뿐이다.

 3> 우클라드론은 생산양식 접합론과 위계적 차원을 달리한 경제사회구성체간의 헤게모니적 결정이론이다. 우클라드론은 지배적인 생산방식의 변동과 사회구성체내에 계급구성의 변동등을 통해 이행의 과정에서 다양한 우클라드가 실존하며, 역사는 다양한 우클라드내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우클라드가 사회의 지배적인 우클라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 주로 비롯되는 것인데 전 자본주의적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봉건제 우클라드에 대해 자본제 우클라드가 상대적인 우위를 형성하며, 결정적으로는 정치/사회적 우위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배적인 우클라드가 그 시대의 경제사회구성체를 형성한다. 그런데 우클라드론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에 있어 착취양식으로서 또한 상호전화와 타협의 가능성이 실존했던 이행에 대해서는 상당히 타당성을 가진 사회구성체론이다. 즉, 봉건적 잔재인 군주제를 공화제와 타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봉건귀족이 상인/산업자본으로 전화하거나 산업자본가가 봉건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맑스주의 관점에서나 노동의 관점에서 크게 빗나간 것이다. 산 노동의 구성적 실천은 지배질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 없으며, 자본주의에서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자기운동으로서의 제헌적 역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클라드론은 경제사회구성체의 헤게모니의 문제만을 다루면서 실지로 근본적인 변혁의 문제와 이행의 역동적 가능성을 현재적으로 가두려하였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진정한 변혁의 역동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이행의 문제를 화석화시키려는 것과 현실계급간의 헤게모니적 차원에서만 조명하는 것은 비대칭적인 노동의 논리를 자본의 논리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예컨데 국제적/일국적 자본의 권력은 가장 근본적으로 테러에 의해 유지된다. 죽음을 초과하는 핵권력의 시대에 산노동의 제헌적 권능은 테러와 전쟁의 논리가 아니라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65)  

 4> 후기알뛰세리안의 이론은 프랑스 조절학파로 계승되는데, 이들은 자본주의의 축적체계와 조절양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내 경제적 변동과 재생산구조에 있어 사회체제의 조절양식이 어떻게 재편되는가를 분석하려 했다. 조절학파는 자본주의의 내적 역동성과 조정능력에 주목하면서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방식 그리고 조절양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고찰한다.66) 그런데 조절학파의 조절양식의 대상과 주체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국가다. 그러므로 이것은 국가라는 주체와 비대칭적인 산노동을 객관화시키는 자본파적 편향을 내포하고 있다. 즉, 생산양식론의 토대결정론에서 조절양식의 국가론으로 붕괴론에서 조절론으로 한계지움으로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또하나의 긍정적인 존재의 실존 즉, 노동의 구성적 실천을 간과했다. 국가적 전일화된 조절적 공간은 산노동의 긍정적인 역능을 강제와 억압의 지배논리로 분쇄하는 자본의 공간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자체의 신선도가 보증될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이 ‘탈취된 부불노동’에 불과하고, 이것이 사회구성체를 통하지 않고 형성될 수 없으며, 사회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이들을 노예화시키고 은폐시키는 억압과 폭력을 수반해 왔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조절이론은 자본의 조절양식이 근본적으로 노동의 구성적 권력의 분쇄라는 의미를 간과하고 루비콘강 건너에서 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의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외치만 그런데 경제학자의 분석에서 정반대의 결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주의붕괴가 자본주의의 제계체제의 파국적 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67)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스스로 위기를 창출하고 극복하면서, 현실에서 모순에 대한 조절능력을 세련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본주의의 조절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는 것은 개혁/개량주의의 발호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일시적이나마 산노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구성적 힘을 분쇄하려는 것일 뿐이다.

 ‘내포적 축척체계로의 전환’은 대중노동자라는 산 노동의 조직된 힘을 분쇄하고 자본의 근본적 입장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보다 유연한 노동의 창출을 위해 사회적 재생산과 사적 영역으로 마구 침투하여 조직하므로 사회를 공장으로 전화시키고, 착취밀도의 강화하려는 것이다. 조절학파의 분석은 축척양식에서의 포스트 포디즘과 조절양식으로서 신보수주의 즉, 작고 강력한 정부로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이것의 실체는 포스트포디즘은 생산수단의 효율적 사용 역으로 조밀한 노동력의 투여, 노동실질임금 수준에 못 미치는 파견직이라는 주변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정규노동자를 일당 백의 소수정예로 만들고 광범위한 노동과정을 형성하려는 자본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자본의 목적과 논리와 준별점을 갖지만 마치 탈중심화된 사회의 돌입으로 느껴지는데, 이것은 사회적 노동자라는 강력한 노동의 주체의 등장을 의미할 뿐이다.  

 신보수주의는 자본에 대하여 기존 국가에 비해 허약/축소적으로 개입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위기/조절의 형태로 개념화한 조절학파는 ‘국제적/일국적 자본의 전일화’를 산 노동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본의 입장에서 봄으로서 탈중심적, 몰주체적으로 국가 = 사회(국가의 사회의 실질적 포섭)라는 현실을 객관화시킴으로서 국가물신의 논리로 함몰되고 만다.     

 5> 월러스타인에 의해 제기된 세계체제론은 자본이 일국적 차원을 뛰어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조직되고 있음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자본의 국제화는 국경을 뛰어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의 축척구조를 형성함으로서 일국에서의 계급이 만나는 자본은 더욱 추상화되므로 일국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은 종식되었다고 결과론적으로 돌출한다.68) 자본은 국경의 범위를 뛰어넘어 초국적 성격을 부여받으므로 일국의 노동자가 자본의 소유주와 최종노동생산물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추상적 성격이 더욱 고도화되었다는 문제로부터 난점에 봉착한다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자본의 추상화는 자본의 안정성과 평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금융독과점에 의한 금융압박과 불평등한 교환관계의 심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월러스타인은 자본의 추상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일국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은 불가능해 졌으므로 반체제운동을 제안한다. 국제분업구조의 고도화와 국제무역에서의 불평등구조의 고도화는 가시적인 일국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세계체제론의 문제제기는 ‘전일화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승인으로부터 출발함으로서 국제적인 자본의 운동을 산 노동의 운동으로 치환하는 오류를 갖는다. 즉, 자본의 국제화와 일국에서의 가치창출이라는 내재적 모순은 국제자본을 위협하는 요인인 것이다. 산 노동의 입장에서 자본의 국제화가 탈영토화를 형성하지만 국가라는 형태로 재영토화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중국동포들에 대해 새로운 제국주의적 불평등한 관계를 느끼게 하는 인종주의적이며, 차별주의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이며, 노동의 구성적 실천과 무관하며, 사회적 노동자는 혼성이며, 다국적이고 반기계, 반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자본의 새로운 불평등한 세계질서와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영토를 가로지르는 산 노동은 국제적 연대로 나아가는 구성적 실천의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6> 해체주의는 사회구성체의 내적 필연적 연관과 인과성을 부정한다. 헤체주의는 각 부문의 역사적 계보를 통해 부문의 상대적 독립성을 이론주의적으로 검증하고 사회구성체적인 역사적인 자율성과 상재적으로 자율적인 부문운동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헤체주의는 사회구성체의 내적 연관성을 헤체함으로써 인종//성/환경 등의 모순에서 자율성을 획득하려 한다. 헤체주의는 전체론적 접근방식에 대한 이론적 과도한 비판을 통하여 사회의 총체적 내적 연관성을 부정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노동자의 제헌적 권능과 자기가치생산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북경의 나비가 미국의 허리케인을 몰고 올수 없듯이 내적인 연관이 두절된 주관주의적 주체에게 있어 사회적 관계는 각 주체간의 의사소통이라는 상호간주간성의 형식주의를 의미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사회에 편입된 사적 영역의 특징에 대한 자생적인 표현이다. 후기자본주의국가권력은 사적 영역의 확장을 위해 한정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형식적 다양화를 추구하는데 이러한 흐름이 교육재편, 지방분권화등이다. 이것은 자본의 국가권력이 의사개량화되고, 세련화된 것으로 바라볼수 밖에 없다. 시민사회를 행정기구로 전락시키고 사회를 산노동의 유연한 토대로 만드려는 자본은 탈중심적으로 각기 부문에 침투함으로서 권력의 통제적 기능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공적 영역에 대한 대표성을 유지할 수 있다. 만일 노동에 대한 부정의 관점에서 사적 영역의 외재적 교류라는 한계에 머문다면 국가라는 억압기구의 사법적 시민으로 영구히 남아야 하는 운명에 있다. 포스트 시민사회론은 사회 즉 사회적 노동자는 사적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이성의 합리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달리 ‘이성의 현실적인 간지’인 법적 차원으로 사적인 영역을 보증할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사회(사회적 노동자)의 내적 총체성을 부정하고 우연적이고 파편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포스트시민사회는 자본의 포스트 시민사회적 질서와 조응하는 것으로 자본과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산노동의 구성권력과 노동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 階級構成體와 社會構成體


  산 노동의 입장에서 ‘생산양식’의 분석은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이며 동시에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에 대한 분석은 착취의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산노동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노동’의 분석은 정치적 분석이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 두개의 계급이 실존하기 때문에 노동과정론은 객관적인 것일 수 없다. 기간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은 가치론의 창출공간은 비생산적/생산적 노동과 복합/단순노동, 육체/정신노동에 생산의 영역에서 이상적/이론적으로 적용되는 전형에 대한 문제로 다루어 졌다.69) 그런데 이러한 가치창출의 일반설정은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공장을 가로질러 사회구성체인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된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은 기존의 필요노동임금에 대한 규정마저 무시한다.70)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노동과정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산노동의 사회적 확장은 적대를 확대재생산하므로 대중이 더이상 노동과정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노동과정내에 구성적 권력으로 나아가는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초기자본주의생산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전유와 자주관리라는 대중노동자의 실천적 힘은 이제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실천을 통한 자기가치생산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구성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토대와 상부구조의 구조적 결정론 주체를 명확히 하게 된다. 즉, 사회적 노동자의 노동과정론과 정치적 구성, 소비양식과 규제양식의 분석으로 전화된다. 생산의 영역에 존재하는 대중노동자와 시민사회라는 분리적 설정과 포스트시민사회론은 더이상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의 단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기간 계급역관계는 자율성을 가진 시민사회영역에 대한 계급의 헤게모니관철로서 계급의 역학관계와 대중에 통합력으로 사고되었다. 자본의 의도는 생산의 현장에서 산 노동을 일부 배제하고 노동조직을 무력화시키려며, 적확하게 산노동의 힘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합리화의 과정에 따른 노동의 유연화는 자본의 의도와 수단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변형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과정이 산노동의 새로운 차원의 노동과정의 등장이며, 동시에 사회적 노동자의 등장이다.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실천은 구성권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사회적 노동자는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을 가로지는 제헌적 권능을 이미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산노동은 사회적 구성체가 계급구성체와 일치로 나아가게 했던 자본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비대칭적으로 사회의 전영역에서 실존한다. 오늘날 모순의 혁명지점은 사회적 노동의 구성권력과 지배통치권력간의 적대에 있다. 이러한 적대는 추상적 수준에서 노동기술의 사회적 합리성과 지배기술의 합리성간의 상대적 적대로 드러난다.71)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의 논의는 기존에 공적 영역은 미리 구조화된 법제하에서 사적 영역은 시민사회의 영역내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정식의 사멸을 의미한다. 초기 자본주의사회 이후에 자본의 포섭의 욕구는 국가권력으로 하여금 국가외부에 시민사회를 광범위하게 간섭하고 개입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기종의 시민사회의 소멸과 국가의 내부에 명명된 포스트시민사회의 등장하였다. 이는 산노동이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통해 활용가능한 영역을 사용한다는 기존의 인식에 종말이기도 하다. 산노동은 자본의 논리와 자본주의기계들과 기구들을

통하여 권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노동의 제헌적 권능과 사회적 노동자의 역능의 총합에 의해 구성적 권력으로 나아갈 것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의 변형된 운동은 자본이 노동의 논리를 스스로 배우고 있음을 의미한다.72) 자본주의하에서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은 객관화된 자본의 영토밖에 있다. 즉,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여전히 전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재영토화해야 한다고 강제와 환각의 공세를 펼친다. 산 노동,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의 존재는 더이상 활용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자기운동의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잠재력의 심급에서 존재한다. 자본의 노력은 탈중심화된 형태로 사회적 노동자의 자기인식과 자기가치생산과 적대라는 구성적 실천의 외부에서만 위기를 창출하면서 조절하는 형태로 개입하려고 하지만, 살아 있는 사회적 인간에 실천의 욕구, 커뮤니케이션속에서 이미 외부로부터 개입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자본은 끊임없이 사적인 영역을 침투하여 국가수호와 경쟁의 이데올로기의 포탄을 쏟아부으며, 동시적으로 비밀스런 노동자와 은밀한 대중의 구성적 실천에 대항하는 스파이면서 포획으로서의 권력의 의미를 되살리고 강화하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론의 의미는 자본과 노동의 두개의 자기운동이 적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스스로 적대와 배타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노동자이면서 사회구성체이면서 노동계급구성체’에 대한 적나라한 국가권력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구성적인 실천의 권능은 폭발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동시에 위계제적인 실천방식이라는 기간의 정치에 대한 우회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산 노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구체화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권력은 천개의 눈이라는 이론적 권위가 아니라 천개의 마루에서의 정치의 아상블라주를 형성할 것이다.73)

 기간 사회구성체론은 사회와 정치라는 부문이 구별되는 것으로, 정치해방이 사회해방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회에는 다양한 계급질서가 존재하므로 이들은 시민사회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므로, 노동의 정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정치의 대상인 사회는 사회적 노동자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상과 주체, 목적과 수단이 다른 마키아벨리즘의 군주를 되살리는 것은 정치의 종언을 위한 꼬뮌의 전통에서 위배되고, 동시에 스탈린주의의 과오를 답습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구성적 실천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축척체제의 전화와 동시에 창출된 사회적 노동자는 계급간의 동맹이나 헤게모니전략의 파산을 의미하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전통적인 기간의 도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던지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말하면서 레닌의 초기 대중노동자의 시대와 현대 사회적 노동자의 시대의 차별성을 간과하고 동일한 지평에 있는 교조주의자들에게 사회적 노동자의 실존을 인정할 수 있는가? 또한 실재를 인정할 수 없다면 산 노동의 제헌적 권능을 부정하고, 신뢰하지 않지도, 융합과 구성을 실천하지도 않은채 철저히 외부로 향하는 것은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계급구성체는 생산의 현장과 재생산의 현상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실천의 자기운동의 영토를 의미하며, 이를 구성하는 권력은 거시적(몰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적(분절적)인 영역을 통합하는 구성(노마드)권력의 실천을 요구한다.74) 이것은 레닌의 정치와 경제의 분리와 정치로의 상승발전의 모델 즉,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정식과 달리 노동의 자기운동이다. 실천의 외재적 한계는 내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구성체의 중심개념은 비대칭성에 있으며, 동시에 산 노동의 통일과 구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다> 組織論의 諸問題

 


 터  미  널 : 레닌이 주장했듯이,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의 집중된 형태이고, 권력은 가치의 집중된 형태인가?

 토니 네그리 : 정확하게 그 반대가 사실이다.75)

 


 단도직입적으로 볼세비즘은 러시아지배계급과 자본주의의 후진적 상황에서 가능하였던 전략이었다. 이러한 볼세비즘의 원리를 구체적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그대로 적용한다면 실천의 구체성을 상실하게 될 이었다. 계급의 일부이면서 의지의 대표체로서의 볼세비키정당의 형태로의 정치는 실지로 정치와 경제를 미리 가정하고 정치를 상위에 놓는 실천이다. 레닌은 그러나 당과 대중과의 관계 계급동맹의 전략이 중요함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당을 레닌은 하나의 도구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레닌은 ‘당없는 공산주의자’를 자임하였다는 것이다. [일보전진 이보후퇴]의 주된 논쟁은 당원을 규약을 승인하는 사람으로 할 것인가? 강령을 승인하는 인자를 당원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레닌/마르토프에 당구성에 관한 논쟁인데, 여기서 레닌은 볼세비키당을 투사로서의 당, 계급의 이론적 위계로서가 아닌 강고한 철의 규율을 가진 실천적 도구로 사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당은 ‘철의 규율’이라는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노동의 제헌적 권능을 억누르고, 스탈린에 의해 지배계급으로 변질된다. 레닌이 후진적인 상황에서 혁명을 연속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들 - 브레스트 리토프스끼 조약, 신경제정책 -이 수행되었다고는 하지만 바로 그 도구들과 기계들인 정치의 영역에서 테르미도르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구성적이고 긍정적인 권능과 반동적 힘을 가치론적으로 더욱 구체화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76) 

 


1)능동적인 힘, 활동하는 또는 지배하는 권력 2) 반동적인 힘, 복종하는 또는 어떤 활동의 영향을 받는 권력 3) 발전된 반동적인 힘, 분열시키는, 나누는, 그리고 분리하는 권력 4)반동적이 된 능동적인 힘, 분리된 스스로에게 돌아선 권력77)

 


 레닌이 러시아의 혁명의 연속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유럽혁명의 지원이었는데, 당시 유럽의 사회주의세력들은 제 2인터내셔널의 교조주의/수정주의적 오류속에서 지하로 침몰된 상태였다. 혹자는 ‘레닌은 옳고 스탈린은 틀렸다’라고 말하는데, 스탈린의 오류는 레닌의 실천의 괘적을 교조주의적으로 충실히 반복했을 뿐, 창조적으로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78) 예컨데 스탈린은 당을 일괴암적으로 인민과 국가와 동일시하였다. 즉, 존재의 외부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당관료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었다. 스탈린은 반동개념을 사회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였는데, 그의 혁명에 대한 적확한 이해 부족은 반파시즘 인민전선이라는 코민테른 정책에서도 보여진다. 이는 제 2인터네셔널의 당/대중의 분리의 극단적 형태인 계급의 의지의 최고구현체로 당이 영구히 남으며 - 레닌은 당보다 소비에트가 앞설 수도 있고 소비에트보다 당이 앞설 수 있다는 유연한 인식과도 차이가 있다 - ‘노동’의 제헌적 권능대신에 당이 사법적 행정집행적 권력을 집행한다. 당내에서의 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제한의 문제 또한 철의 요새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속적인 위협으로 말미암은 민주집중제가 영구화되고 만다. 실천적 전통은 이론적으로 화석화되고 압살당하고 숙청된다.79)

 레닌이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당과 대중을 철저히 분리구축하고자 했던 것은 러시아 사회구성체의 미발전 즉, 다수의 농민과 대중/숙련노동자라는 현실 속에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80) 그러므로 노동에게 제헌적 권능은 정치적 헤게모니의 관철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인데, 오늘날 사회적 노동자의 창출은 정치와 사회/경제의 분리구축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다시 묻게 하는 부분이다. 동시에 그 당시 대중의 외부에 존재했던 조직의 전통이 정치적 전위를 보증하는 기준이 될 수 없는데, 레닌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융합의 구체적 실현을 통해서 의식의 외부도입이라는 설정의 실물은 노동의 헤게모니 정치라는 것을 밝혀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당-의식이 조직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면서 이론적으로 권위와 전통을 유지하였으며, 투사이데올로기를 몰아냈으며, 당조직은 노동이 사용할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지배도구로 전화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인한 노동자의 유실과 함께 숙련노동자의 경영인으로 전화를 이루어냈고, 농민의 집산화로 자본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

 레닌시대의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미처 자본주의로 완전히 발전하지 못한 저개발국에서 노동자권력은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이들은 ‘이론과 실천의 진정한 통일체’이기도 하였다. 이중혁명은 일국내에서 계획과 경영을 통해 대공업의 도입을 통해 노동자를 창출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중적 과제의 개막이기도 하며, 레닌은 노동자의 역능과 주요적대 속에서 대중의 움직임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발전한 자본주의하에서의 산 노동의 역능을 총합시키기 위해서는 존재의 역능외부에서 의식적으로 농민과의 동맹을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매개항의 설정은 정치와 사회의 분리라는 실재적 상황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개입또한 레닌의 ‘막대구부리기’라는 의식적 유연성속에서 였는데, 이는 노동의 역능이 어느 범위까지 실재적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하였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후기 자본주의사회, 산 노동은 사회적 노동자가 되고 자본은 더욱 추상화되어 존재하고 있다. 산노동의 제헌적 역능은 자신의 목적과 수단이 괴리된 형태로 사회적 노동자의 구성적 실천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이상 계급의 외부에 설정이 아니라 일부기능으로서의 또는 그것의 내부의 자기운동의 표현으로서 노동의 민주주의만이 유효할 것이다. 과연 자본이 자신의 이해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후기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외부에 어떠한 부분이 활용가능한가? 한마디로 없다. 왜냐하면 사회전체가 사회적 노동자로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당이 천개의 눈이었다면 사회적 노동의 구성권력은 천개의 마루에서 생성될 것이다.   


結論 

1995년 해체되어버린 육신과 정념을 안고, 원한과 부정으로 가득한 채 파일공장 선반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경쟁사회에 뒤쳐져 버린 소위 과거 운동권이 이 사회에서 돌아갈 영토는 진보적 사회진출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거의 없다는 사실과 뒤틀려 버린 인간관계들 속에서 민주주의적 대화가 두절된 노예 논리와 거대한 사회라는 공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들뢰즈를 읽으며, 노동과 실천의 새로운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 공장관리와 강제의 논리가 아닌 노동자의 눈으로 다시 현실을 보게 되었다. 작업장의 자동기계속에 끊임없이 진정으로 긍정적이며 기쁨으로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구성적 주체를 생각하며, 강력한 욕구들을 느꼈지만 욕망하는 생산은 현실에서 ‘구성적 실천’을 통하지 않고 구체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공장에서 많은 변화를 보았다. 같은 공장 내에 같은 작업장에서 비슷한 월급을 받는 노동자인데도 어떤 사람은 ##용역회사, 어떤 사람은 %%회사, 유통회사, 프리렌서, 아르바이트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자본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두려워하고 노동자간의 분리와 경쟁을 이간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본은 노동운동에게 기존의 제도, 가족, 국가로 돌아올 것을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막상 돌아온 그 자리에는 경쟁에서 일탈은 죽음뿐이라는 냉혹한 노예논리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조직의 지체는 경쟁이라는 임금 노예논리/자본주의적 정신분열증을 확산시키고 있지만 머지 않아 노동의 역능은 자본의 도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제헌적인 권능을 행사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사회적 노동자의 다양한 욕구가 분출하는 혁명적 행동으로 옮겨지는 잠재적 권능은 노동의 긍정이라는 존재의 적극적인 실천활동에 있다. 노동의 구성적 힘을 해체시키기 위한 자본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사회적 노동자 반인/반기계의 출현은 노동자의 자율성과 잠재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경제위기, 만성불황이라는 자본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위기의 도래는 노동의 권능과 코뮤니테리안의 구성적 실천이기에, 자본은 자꾸 ‘나 떨고 있니’하면서도 포획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의 연일 항의시위는 노동의 제헌적 권능이 아닌 자본의 국가이성의 틀 내에서 여/야당의 협상으로 끝났다. 국가이성의 법테두리의 안에서 개량과 개혁에 의해서 달라진 것이 있는가? 민주노총은 물론 매개와 베제라는 양날의 칼 아래 노동조합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와, 사회적 노동자전체를 대표한다기 보다 ‘국민을 위한’ 이라는 자본의 논리로 머무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구성적 실천이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며,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현재, 사회적 노동자의 창출과 더불어 새로운 구성적 실천을 이룰 노동자조직의 도래는 임박해 있다. 지상에 ‘과잉인간’이라는 조건은 폭발적인 디오니소스의 만물의 구성으로서의 불꽃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보다 발전된 도구, 컴퓨터와 자동기계를 사용하는 인간들에게 바로 꼬뮌의 피가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redshand

[출처] 해체비평入門|작성자 헌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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