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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운용에 대한 몇 가지 요점/이은봉
1. 시의 언어도 문장의 언어다. 안정되고, 세련되고, 격조 있는 문장을 구사해야 좋은 시가 된다. 문장 혹은 문체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좋은 시인, 좋은 작가가 되지 못한다.
2. 안정되고, 세련되고, 격조 있는 문장을 이루려면 길이가 알맞아야 한다. 그래야 문장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진다. 덧붙여 말하면 시의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 그래야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안정되고 세련되고 격조 있는 문장은 안정되고, 세련되고, 격조 있는 리듬에 의해 확보된다.
3. 문장은 형식이다. 문장이 형식이라는 말에는 문장이 문법이라는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문법이라는 질서는 언제나 당대의 지배질서를, 통치질서를 반영한다. 이 말은 동시에 문장에 그 시대의 윤리와 도덕이, 윤리와 도덕이라는 틀이, 리듬이 들어 있다는 뜻이 된다.
4. 현대시의 문장이 짧고 경쾌한 것은 오늘의 이 시대, 즉 현대가 속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5. 시에서 리듬의 기본 단위는 행이다. 행 단위로 리듬이 발화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음보, 4음보라고 할 때의 음보도 행을 단위로 발화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행의 리듬은 행의 끝에서 좀 더 생생하게 현현된다. 따라서 시의 행 처리, 특히 행의 끝처리에 유의해야 한다. 한글로 쓰여지는 시행은 기본적으로 그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시행에 수용되는 글자 수가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행의 길이를 잘 안배하면 시의 효과를 다 높일 수 있다.
7. 시에서 리듬의 확장 단위는 문장이다. 문장은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데, 시의 리듬은 문장의 끝에서, 즉 종결어미에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현현된다. 따라서 항상 문장의 종결어미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8. 종결어미만이 아니라 연결어미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한다. 어미는 허사이지만 허사인 이 어미에 의해 리듬과 의미의 방향이 지시된다. 조사의 사용도 연결어미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깊이 유의해야 한다.
9. 조사도 허사이지만 리듬과 의미의 방향이 이 허사인 조사에 의해 지시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시인들이 조사나 어미를 생략하는 일을 통해 리듬을 만드는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10. 리듬이 시의 결(질감)을 만든다. 결(질감)의 편차가 정서의 편차를 만든다. 따라서 시의 개성과 품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리듬이다. 시의 아우라도 여기서 구체화된다.
11. 리듬은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음운만이 아니라 음보의 반복, 소리의 질과 결 등까지 가리킨다. 리듬, 즉 정서의 세련된 품격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어의 기표(소리)를 갈고 닦아야 한다. 갈고 닦는 일은 끊임없이 소리 내어 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그 과정에 태어나는 것이 시의 아우라이다.
12. 새로운 내용, 절실한 내용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면 내용이 형식을 구축할 수도 있다. 시인의 의도와 함께 하는 내적 긴장이 엄청난 에너지로 시의 형식을 완성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것이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것이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생태환경의 현실, 그리고 우주와의 연대
―졸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실천문학사, 2013)을 말한다.
이은봉
1. 생태환경의식의 두 차원
생명을 얻는 일과 생명을 잃는 일만큼, 즉 생사(生死)의 일만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생명을 얻는 일은 태어나는 일이고, 생명을 잃는 일은 사라지는 일이다. 그렇다. 생명을 얻는 일은 신생이고, 생명을 잃는 일은 사망이다. 모든 유기체의 일생이 생명을 얻고 잃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인 것이 모든 유기체의 존재과정인 것이다.
유기체로서의 생명이 갖는 이러한 과정, 곧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과정을 바로 깨달으려는 일은 석가모니 이래 수많은 부처님들이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탐구해온 화두이다. 최근에는 생태환경의 관점에서 흔히 연기의 과정이라고 부르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과정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어 주목이 된다.
2000년대 들어 대한민국 사회에는 생태환경의 모순에 대한 논의가 매우 집중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생태환경의 모순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적 근대의 대두와 더불어 보편화된 모순, 곧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 중의 하나이다. 이는 당연히 생태환경의 모순이 산업사회의 대두에 따라 일반화된 민족모순(제국주의 모순) 및 계급모순과 서로 뒤얽혀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3대 모순을 계급모순, 민족모순, 생태환경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2013년 6월에 간행된 내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실천문학사)은 자연, 생명, 생태, 서정, 환경, 상처, 나, 욕망, 죽음 등의 키워드를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집은 2002년 3월에 간행된 내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창비, 2002년 3월)의 문제의식을 좀 더 많이 계승하고 있다.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를 간행한 2002년 2월과 『걸레옷을 입은 구름』를 간행한 2013년 6월 사이에 나는 모두 세 권의 시집을 발간한 바 있는데, 『길은 당나귀를 타고』(실천문학사, 2005년 2월),『책바위』(천년의 시작, 2008년 2월), 『첫눈 아침』(푸른사상)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2002년 2월에 간행한 내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의 문제의식은 지금 이곳의 생태환경에 대한 나 나름의 근심과 걱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이후 10여년을 두고 계속되어온 지금 이곳의 생태환경의 문제에 관한 이런저런 내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라는 것이다.
생태환경의 문제에 관한 이런저런 내 고민은 지금의 시대, 곧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무관하지 않다. 생태환경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적 근대의 대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면 생태환경에 관련한 이런저런 내 고민은 지금의 이 시대, 곧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고 좀 더 진전된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물론 이때의 생태환경에 대한 이런저런 내 고민은 이번 시집의 시들에 발견이나 깨달음의 형태로 들어 있다. 지금의 현실이 안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내가 발견하고 깨달아온 이런저런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시들이라는 것이다.이 시집의 시들에 『시경』에서 운위(云謂)되고 있는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자연물의 이름, 사물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이 시대, 곧 자본주의적 근대가 직면해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찍이 「시와 생태적 상상력」(『시와 생태적 상상력』, 소명, 2000)라는 글에서 그 대강의 윤곽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이번 시집의 시들이 이 글 「시와 생태적 상상력」에 담겨 있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좀 더 앞으로 나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의 시들이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밖에 외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백낙청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글 「시와 생태적 상상력」에 의하면 생태환경에 관한 이 시대의 문제의식은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의 공해나 오염에 관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의 자연 혹은 우주와의 조화에 관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오늘의 생태환경에 대한 이러한 장단기적인 문제의식은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의 경우에도 별로 다를 바 없다. 다음의 시는 겉으로는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의 생태환경 의식을 담으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생태환경 의식을 담으려고 한 예이다.
돌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후 너무 오랫동안 돌을 잊고 살았다
쭈글쭈글 속이 빈 돌의 껍데기가 어머니의 뱃가죽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세상의 시간이 이미 허옇게 늙어 있었다
돌도 벌써 불그죽죽 녹슬어 있었다 수은 납 카드늄 따위가 스며들어 늦가을 두엄더미 위로 나뒹구는 썩은 밤송이만큼이나 몰골이 지저분했다
저 돌이 언젠가는 내가 되돌아가야 할 집이라니……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을 걷어차 온 아랫도리가 싫었다 미웠다 역겨웠다
시간의 회초리에 종아리를 맞다 보면 늦었어, 늦었어 혀를 차는 소리나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처 악수를 청하기 전이지만 이 모든 일이 내 거친 아랫도리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쭈글쭈글 껍데기뿐인 돌은 그래도 반갑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돌의 손은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따뜻해 찔끔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모래알로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는 저 돌의 껍데기이라니
더는 돌 속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아예 온몸을 바람에게 맡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돌 속의 집」 전문
기본적으로 이 시는 돌이 부서져 모래가 되고, 모래가 부서져 흙이 되는 자연현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돌과 모래와 흙은 하나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의 시들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흙을‘생명의 집’으로 발상하고 있다. 다른 시 「생명의 집」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부서져 흙이 되는 돌”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다시 말해 흙에서 태어나는 것이 생명이다. 이 시 「생명의 집」의 표현을 빌리면 “마늘과 양파를 키우는” 것이, “벼와 보리를 키우는” 것이, “암탉과 칠면조를 키우는” 것이, “소와 돼지를 키우는” 것이 다름 아닌 돌이고 모래이고 흙이다. 이를테면 흙(돌, 모래)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인데, 또 다른 시 「강아지 풀」에서 “밭두둑의 흙”이 “강아지풀의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때의 ‘돌’이 앞의 시 「돌 속의 집」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불그죽죽 녹슬어 있”다는 점이다. “수은 납 카드늄 따위가 스며들어 늦가을 두엄더미 위로 나뒹구는 썩은 밤송이만큼이나 몰골이 지저분”해진 것이 지금 이 시대의 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이 시에서 이러한 “돌이 언젠가는 내가 되돌아가야 할 집이라니”라고 하며 크게 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겉으로는 토양오염의 현실을 문제로 삼으면서도 속으로는 오늘 이 시대가 처해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 일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 시집에는 공해나 오염의 실태를 증언하고 있는 시들, 즉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시들”도 당연히 실려 있다. 물론 “생태환경의 문제 일반에 관한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시들”(『시와 생태적 상상력』, 62면)이 좀 더 많은 비중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이 시집에는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시들보다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접근을 꾀하는 시들, 자연 혹은 우주와의 연대를 시도하는 시들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시집에서 내가 지구의 생태환경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해, 곧 자연 혹은 우주가 처해 있는 문제들과 관련해 앞에서 말한 미시적인 차원과 거시적인 차원을 동시에 밀고 나가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내 의도에는 지금의 이 시대, 곧 자본주의적 근대가 자신의 안에 감추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를 바르게 지양,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사회,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근대 밖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 의지와 열정이 담겨 있다.
2. 자연의 시공(時空)과 인간의 시공(時空)
인간과 자연은 항상 주체와 객체로 존재하며 상호 대립하고 조화한다. 이는 자아와 세계가 늘 주체와 객체로 존재하면서 상호 대립하고 조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객체로부터, 곧 어머니 대지, 다시 말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인간은 자신의 퍼스넬러티(personality)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항상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할 때의 ‘아(我)’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할 때의 ‘나’는 다르다. 석가모니의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그’이니만큼 석가모니에게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의 관계가 다소 비의적일 만큼 상호 착종되어 있다고 해야 옳다. 석가모니의 ‘나’는 물심일여의 ‘나’, 주객일체의 ‘나’인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나’는 세계를 대상으로 객관화시키면서 존재하는 ‘나’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나’일 수밖에 없다. 물론 데카르트의 ‘나’가 자본주의적 근대를 성립시킨 역사적인 ‘나’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나’가 석가모니가 말하는 무자기(無自己) 혹은 무자성(無自性)을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한 ‘나’인 것은 사실이다. 무자기(無自己) 혹은 무자성(無自性)을 깨닫고 있지 못한 ‘나’는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근원적인 상호관계를 바로 알기가 어렵다. 무자기(無自己) 혹은 무자성(無自性)을 깨닫고 있지 못한 ‘나’는 언제나 세계, 곧 자연이나 우주와 분리된 채로, 고립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 곧 자연이나 우주와 분리된 채로 존재하는 ‘나’가 이른바 근대적 주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눈으로는 세계라고 하는 자연이나 우주라는 객체를 바로 깨닫기가 어렵다. 인간과 자연, 곧 주체와 객체가 불이(不二)의 관계, 이이일(二而一)의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알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바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가 구체적으로 서술되다 보면 주체이든 객체이든, 자아이든 세계이든 어느 하나를 좀 더 중점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시가 주체의 ‘진술’을 중심으로 서술되느냐, 객체의 ‘묘사’를 중심으로 서술되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주체의 ‘진술’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시는 아무래도 ‘나’, 즉 주체를 드러내는 일이 중심이 되기 쉽고, 객체의 묘사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시는 아무래도 ‘그’, 즉 객체를 드러내는 일이 중심이 되기 쉽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들 각각의 태도가 뒤섞인 채로 서술되지만 말이다.
물론 본인의 이번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에 실려 있는 시들은 좀 더 ‘그’에, 다시 말해 객체에 중심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이는 이 시집에서 내가 자연의 사물들 자체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권의 가치 자체를 좀 더 널리 선양하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기본의도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에는 ‘주객일치(主客一致)’의 차원보다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차원에 이르려는 정신이 담겨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나’를 좀 더 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객일치(主客一致)’의 차원이고, ‘그’를 좀 더 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차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그러나 ‘주객일치(主客一致)’의 차원과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차원이 이루는 차이를 어찌 이처럼 쉽게 변별할 수 있겠는가.
버려진 폐타이어는 검다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이다
반쯤 땅 속에 묻힌 채
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장보살은 둥글다
둥근 마음으로 그는 시방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
피고름 죄 삭이고 있다
지장보살이 아프니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 그는 다시
거름을 만들고 있다 사루비아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꾸고 있다.
―「폐타이어」 전문
이 시는 토양오염을 일으키기 쉬운 ‘폐타이어’를 소재로 하고 있다. “반쯤 땅 속에 묻힌 채/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폐타이어이다. “둥근 마음으로”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피고름 죄 삭이고 있”는 것이 폐타이어인 것이다. 이처럼‘나’는 여기서 무생물인 폐타이어에게 뜨거운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폐타이어를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로 은유해 “아픈 몸으로” 그가 “거름을 만들고 있다”고 노래한다. 버려진 폐타이어에게 인격을 부여해 그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공무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시에서 ‘나’는 버려진 폐타이어의 물권을 십분 긍정할 뿐만 아니라 십분 선양하고 있다. 물론 폐타이어의 “사루비아 몇 송이/빨갛게 꽃피울 꿈”에는 창작자인 내 바람이 들어 있다. 시에서의 ‘풍경의 선택’은‘세계관의 선택’이라고 하거니와, 나로서는 이들 풍경의 선택을 통해 나 나름의 의지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에서 폐타이어가 그러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단지 폐타이어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버려지는 것이 폐타이어만은 아니다. 일상의 삶에서 폐타이어처럼 버려졌지만 버려지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역할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나로서는 폐타이어의 의미망 안에 그러한 현실도 담으려고 했다. 따라서 자연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가 좀 더 객관적인 존재, 곧 사물 자체를 중심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꾀하는 시는 그것이 이루는 질서나 시공(時空)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자연 혹은 우주가 갖는 질서나 시공(時空)은 얼핏 변하지 않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의 자연 혹은 우주의 질서가 인간이 만들어가는 나날의 현실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인간이 자연 혹은 우주에 대하는 태도와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질서나 시공을 바꾸는 것이 자연 혹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의 산물이겠지만 오늘의 인간에게 자연 혹은 우주는 한갓 이용후생의 대상일 따름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도시는 개발과 건설의 미덕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개발과 건설이 정말 미덕일까. 개발과 건설은 파괴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수많은 도시는 지구를 파괴하고 건설한 디스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개발과 건설이라는 미명으로 지금도 이 땅에는 굉장한 신도시가 세워지고 있고, 그에 따라 엄청난 자연 혹은 우주가 파괴되고 있다.
자연 혹은 우주를 파괴하는 것은 수많은 신도시의 개발과 건설만이 아니다. 끝없이 세워지는 산업단지도 자연 혹은 우주를 파괴하기는 다를 것이 없다. 이들 산업단지가 내놓는 엄청난 폐기물, 곧 공해물질의 폐해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구성하는 수많은 산업현장이 모두 공해물질을 배출해 자연 혹은 우주를 망가뜨리는 기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연 혹은 우주를 형편없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 개발과 건설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발과 건설이 모두 좋은 것이 아닌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발과 건설은 자본주적 근대를 사는 오늘의 인간이 갖는 시공의 겉모습이다. 이는 개발과 건설을 가리켜 문화나 문명이라고 불러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 인간의 시공은 자연 혹은 우주의 시공과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의 인간의 시공은 언제나 자연 혹은 우주의 시공에 대립, 갈등하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 자연 혹은 우주의 시공은 언제나 과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자연 혹은 우주의 시공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인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본래 대상을 객관화하는 과정의,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는 과정의 정신작용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는 과정에 언어를 매개로 해 획득하는 인간의 인식이 과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학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 혹은 우주 그 자체의 시공은 본래 치유와 복원의 미덕을 갖고 있다. 자연 혹은 우주는 항상 순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치유와 복원의 미덕을 바탕으로 운동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운동하는 가운데 언제나 개발과 건설의 욕망에 취해 있는 인간들에게 항거하고 저항하는 것이 자연 혹은 우주의 시공이다.
바람이 제 작은 부리로 물어다 놓은 깃털들이다
바람의 부푼 자궁이 오밀조밀 낳은 자식들이다
산비탈 절개지, 붉게 상처 난 사타구니 한 구석
오조조, 씨앗털들 모여 구름묘지 만들고 있다
반짝이는 햇살들, 은쟁반 두드리며 짤랑대는 시간들
밤꽃향기 밀려와 그것들의 가슴 후끈 달아오른다
바람이 제 작은 부리로 쪼아 쌓은 깃털들이다
바람의 잘 익은 젖을 먹고 자란 솜사탕 어린 아기들이다.
―「구름 묘지」 전문
이 시는 개발과 건설의 이름으로 파괴된 “산비탈 절개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붉게 상처 난 사타구니”라고 명명된 “산비탈 절개지”는 지금 “바람이 제 작은 부리로 물어다 놓은 깃털들”, 곧 씨앗털들로 덮여 있다. 이들 오밀조밀 몰려 있는 “씨앗털들”은 이 시에서 “구름묘지”로 인식되어 있다. 이들 씨앗털은 동시에 여기서 “바람의 잘 익은 젖을 먹고 자란 솜사탕 어린 아기들”로 인식되고 있다. 죽음의 실재로 보이는가 하면 생명의 실재로 보이는 것이 이들 “붉게 상처 난” “산비탈 절개지”를 덮고 있는 씨앗털들인 것이다. “붉게 상처 난” “산비탈 절개지”에 대한 씨앗털들의 사랑은 어머니 대지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모성과 다르지 않다.
어머니 대지의 근원적인 모성이 갖고 있는 시간과, 함부로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우발적 욕망이 갖고 있는 시간은 본래 다르다.자연의 시간은 굳건하고 건강하게 자신의 질서를 운용하며 순환하고 전진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저 자신과 자연을 파괴해 상처를 만들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제자리걸음? 어쩌면 뒷걸음질을 하는 것이 오늘의 인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로서는 인간의 시간이 만드는 이러한 반동의 현실에 대해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시간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온 자본주의적 근대의 너절하고 추악한 모습을 보면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진다.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손을 맞잡고 동일한 궤적을 만드는 일은 이제 원천적으로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의 시간은 급기야 지구라는 이름의 대지 자연의 시간은 물론 우주, 곧 달이며 별의 시간까지 멋대로 파괴하고 있을 정도이다. 달과의 관계는 더욱 일그러져 있어 지구 생태계의 운명을 아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는 이번의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에 ‘달’의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3. ‘나’와 달의 호흡
지구 생태계의 모든 생명은 달과의 호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생산해나간다. 자신의 짝인 달과 주고받는 특별한 호흡 및 운기(運氣) 속에서 탄생, 성장,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지구 생태계의 생명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과 주고받아온 호흡 및 운기(運氣)에 이상이 생겨 지구 생태계 전체가 심한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 생태계를 보호하고, 지구 생태계와 지구 생태계 밖의 우주 생태계를 잇는 것이 구름이고 오존층이거니와, 이제는 그것들조차 오염되고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의 구름은 납과 수은, 카드뮴 등 중금속으로 뒤범벅이 된 걸레옷을 입고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물론 이는 다 지구 공동체 안의 인간이 저지른 죄악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지구 생태계의 생명들이 제대로 된 생식의 과정을 밟을 리 만무하다. 지구 생태계의 적잖은 생명들이 지금 온전한 몸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지구 생태계의 생명들이 재생산되는 데에 오직 달과의 호흡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태양계 안팎의 무수한 행성들과도 호흡을 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를 재생산해나가는 것이 지구 생태계의 생명들이다. 이처럼 지구 생태계를 이루는 존재들은 우주 생태계를 이루는 존재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태양 생태계의 별들과는 겹으로 뒤얽혀 있는 것이 지구 생태계의 존재들이다. 태양 생태계의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태양 자체와 이런저런 인력과 기운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운용해가는 것이 지구 생태계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내가 달을 비롯한 우주 생태계와의 조화를 꾀하고 있는 시들을 싣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生의 알」 「꾀꼬리 달」 「안마사」 「기상대」 「날이 흐려서」 「달의 가출」 「걸레옷을 입은 구름」 등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달은 너무 멀리 있다 아득히 구름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달은
내 몸을 잘 알고 있다 몸의 구석구석
긴 손가락을 뻗어 어루만진다
달은 안마사다 구름이 낮아져
기압이라도 오르면 저도 힘들어
심장의 박동, 가로막는다
흐르는 피의 속도, 무너뜨린다
그러면 너무 어지러워
마음 갈피를 잃는다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다가올 때보다는 멀어질 때
몸이 훨씬 가벼워진다는 것도
떠오를 때보다는 질 때
발걸음 더욱 힘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달은 지금도
몸속 주춤주춤 흐르고 있다
괜한 욕심에 쫓겨 과식을 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잠시 황당해 흐르기를 늦춘다
그러면 그만 어지러워져
아무데나 주저앉아야 한다
그녀는 아득히 멀리 있다 구름 뒤에 숨어
내 몸의 구석구석 잘도 밟고 다닌다.
―「안마사」전문
이 시 「안마사」는 구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나’와 달의 상호 관계를 그리고 있다. 달은 “아득히 멀리” “구름 뒤에 숨어” 있으면서도 내 “몸의 구석구석 잘도 밟고 다”니는 등 상호 소통한다. 하지만 구름이 낮게 내려와 기압이 오르기라도 하면 ‘나’는 달과의 관계가 헝클어져 고통을 겪게 된다. “구름이 낮아져/기압이라도 오르면” 달 “저도 힘들어/심장의 박동,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너무 어지러워/마음 갈피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 시집의 표제시인 「걸레옷을 입은 구름」에서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교신이 끊기면 나는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부르지 못한다 옛날 구름은 그냥 수증기, (…중략…) 오늘 구름은 고름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다/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내게로 오지 못한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나’의 몸은 달을 비롯한 태양계 내외의 행성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태양의 흑점활동이 강화되면 X선, 고에너지 입자,코로라 등이 과도하게 방출되어 지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단파방송이나 통신이 일시적으로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장애를 일으키는 것은 단파방송이나 통신만이 아니라 내 몸이기도 하다. 달을 비롯한 우주의 여러 행성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내 몸, 그리고 그곳에서 잉태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제5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에 실려 있는 시 「휘파람 부는 저녁」에서 내가 “몇 억 광년을 두고 날아왔으면서도, 타는 제 가슴 미처 식히지 못하는” 별을 노래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4. 불이의 생(生)과 사(死)
앞에서 나는 이 시집의 시들이 좀 더 많은 부분에서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의 생태환경에 대한 문재의식을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시집의 시들에 실려 있는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생태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내가 우주와 맺는 관계에만 그쳐 있는 것은 아니다. 생태환경의 실재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지니고 있는 내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바른 연기(緣起)의 과정을 깨달아가면서 얻는 일련의 질문이나 소식(小識) 등도 들어 있는 것이 이 시집의 시들이다. 그렇다. 이 시집의 시들은 생명 자체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질문과 소식 등도 중요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과 서로 대척되면서도 서로 보완되는 죽음의 문제도 이 시집의 시들에는 깊이 천착되어 있다.
생명의 문제에 대한 자각과, 그에 따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자각을 담지 않고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연기(緣起) 과정을 형상화하기가 어렵다. 생로병사의 연기 과정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생(生)과 사(死)가 얼마나, 어떻게 상호 혼재되어 있고, 상호 착종되어 있는가를 깨닫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시집의 시들은 생(生)과 사(死)가 이루는 불이(不二)의 모습 또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시집의 시들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생과 사의 상호 혼재와 상호 착종을 구체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 형상화하는 일이다. 생과 사의 상호 침투와 상호 혼종을 실제로 영위되는 나날의 삶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생생한 시의 언어로 드러내는 일 또한 중요하게 다루려고 했다는 것이다. 졸시 「生의 알」 「생명의 집」「살아 있는 것들의 집」「시체창고」 「살아 있는 죽음」「죽음들」「오늘치의 죽음」등이 다름 아닌 그러한 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일상의 나날에 생과 사가 어떻게 혼재되어 있고 착종되어 있는가를 실감 있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다음의 시 「오늘치의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손톱을 깎는다 내 안에서
자라는 죽음을 깎는다
수염을 깎는다 내 속에서
자라는 어제를 깎는다
뾰쪽뾰쪽 밀어올리는
오늘치의 죽음
오늘도 나는 오늘치의
어제를 키운다 내일도 나는
내일치의 죽음을 키운다
덥수룩이 자라오르는
내일치의 머리카락
내 안에는 뭇 죽음을 먹고
뭇 생명이 크고 있다
내 속에는 뭇 생명을 먹고
뭇 죽음이 자라고 있다.
―「오늘치의 죽음」 전문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손톱이나 수염, 머리카락 등은 ‘나’의 ‘살아 있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자질들이다. 하지만 심장이나 취장 등과는 달리 이것들은 살아 있는 것들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이것들이 이미 ‘나’의 ‘살아 있는’ 몸이 뱉어내는 주검들이기 때문이다. 손톱이나 수염, 머리카락이나 살비듬 등이야말로 내 속에서 “뭇 생명을 먹고” 자라고 있는 “뭇 죽음”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뜻이다. ‘나’의 몸이 매일 이러한 생사의 소통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에서 ‘나’는 지금 “내 안에는 뭇 죽음을 먹고/뭇 생명이 크고 있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뭇 생명”이 내 몸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내가 나 자신의 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생과 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토대로 하고 있는 생과 사는 본래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생과 사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불이성(不二性)은 인간과 사물(자연) 사이에도 다름없이 존재한다. 인간과 사물(자연)의 사이에도 얼마든지 불이(不二)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시집의 시들에서 나는 이들 가치에 대해서도 다소 적극적인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민들레꽃과 낯빛 뽀얀 계집애(「민들레꽃」), 봄꽃들과 책(「봄꽃들」), 사람들과 봄꽃들(「나바위성당」) 등이 바로 그러한 뜻에서 추구해온 불이의 관계, 즉 양가적 관계를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가치가 지니고 있는 불이성(不二性)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의적 가치는 오늘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5. 볕과 빛의 촉기
개성이 있는 시인은 누구나 저 나름의 정서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동안 내가 써온 시도 나 나름의 정서적 특징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이때의 정서적 특징을 가리켜 의미 있는 심미적 아우라 혹은 예술적 분위기라고 해도 좋다. 이번의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의 시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특징, 곧 심미적 아우라는 내 마음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 정서를 반영한다. 물론 이때의 심미적 정서는 내가 만든 ‘시’라는 언어조직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시라는 언어조직에는 나 나름의 심미적 언어의식이 들어 있다. 나 나름의 심미적 언어의식은 나도 모르게 드러내는 ㄴ, ㄹ, ㅁ, ㅇ 등의 유성자음 및 모음 지향성을 가리킨다. 말소리의 울림에 대한 자각이 없이 심미적 언어의식을 갖기는 어렵다.
이번의 시집의 시들에 드러나 있는 심미적 언어의식에는 당연히 나 나름의 심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나 나름의 심미적 정서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에는 내가 경험해온 공간의 특징, 곧 자연의 특징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 내 시의 배경이 되는 공간, 곧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광주 전남의 산천이 지니고 있는 볕과 빛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번 시집의 시들이 갖고 있는 정서적 특징이다. 지금까지의 삶의 과정에 내가 경험한 산천의 볕과 빛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시들에 함유되어 있는 정서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 막은골이다. 지금의 행정지명으로는 세종시 다정동이다. 공주, 대전,서울 등지로 떠돌며 살다가 요즈음은 광주 전남을 중심으로 대전과 서울 등을 오가며 살고 있다. 흔히 빛고을이라고 불리는 광주 전남을 중심으로 떠돌며 살기 시작한지도 벌써 20여년이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에는 대전 충남의 산천이 지니고 있는 볕과 빛만이 아니라 광주 전남의 산천이 지니고 볕과 빛도 한껏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내가 쓰는 시에도 십분 반영되고 있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은 많은 경우 광주 전남의 볕과 빛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광주 전남 주변의 자연과 풍경을 중심 자양분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시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서적 특징은 각기 다르다. 개중에는 볕과 빛의 밝기와 온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러한 편에 속한다.서울에서 고속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광주나 여수, 목포를 향해 가다보면 전주 부근의 비산비야를 지나면서 볕과 빛의 촉기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달라지는 볕과 빛의 촉기가 이른바 남도의 정서를 만드는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남도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밝고 환하다. 이때의 밝고 환한 남도의 정서가 오직 빛고을이라고도 불리는 광주가 갖는 심미적 분위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는 빛고을 광주만이 아니라 특별히 볕과 빛을 강조하는 광산, 담양, 춘양, 이양, 광양, 화양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 곳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오월에는 고인돌도 꽃을 피우지
고인돌이 제 가슴에
남몰래 피워올리는
연보랏빛 제비꽃 따라
춘양 가는 길
봄볕 너무 밝아
오월에는 꾀꼬리도 꽃을 피우지
꾀꼬리가 산골짜기에
은근히 감춰 피우는
병아리빛 붓꽃 따라
춘양 가는 길
길 위에 서면
꽃들의 보조개 너무 어지러워
가슴 활짝 열고
숨 고르고 다듬어야 하지
문득 이 세상
텅, 비어 올지라도
초록 잎새들 아주 환해
이 봄에는 당신의 마음
자꾸만 들떠오르지
걸음걸음 고인돌 밟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춘양 가는 길.
―「춘양 가는 길」 전문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밝고 환한 남도의 정서, 곧 밝고 환한 광주 전남의 빛과 볕은 늘 그늘을 거느리고 있다. 이때의 그늘은 서럽고 슬프면서도 밝고 환하다. 이때의 그늘은 밝고 환하면서도 서럽고 슬프다. 밝고 환한 볕과 빛이 감추고 있는 그윽한 어둠, 그윽한 어둠을 감추고 있는 밝고 환한 볕과 빛이야말로 남도의 정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판소리의 미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흔히 ‘흰그늘’이라고 한다. 흰그늘의 정서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송강과 고산의 시가이고, 영랑의 시이다. 내 시에는 이들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양가적 정서, 이른바 남도의 정서도 스미어 있는 듯싶다. 광주 전남에서 오래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곳의 불이(不二)의 정서가 몸에 스미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남 공주(세종)이다. 따라서 내 시의 정서적인 기저에는 충남 공주(세종)의 지리적 특징과 함께 하는 심미적 정서가 배어 있으리라. 그렇다. 내 시에는 얼마간 고향의 선배들, 곧 정지용, 신동엽, 박용래 등의 시가 지니고 있는 정서적 특징이 들어 있는 듯싶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광주, 전남의 정서적 특징, 특히 영랑의 시의 정서적 특징이 덧씌워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학부 때의 스승이었던 김현승의 시, 학부와 석사 때에 골몰했던 김수영의 시, 박사 때에 골몰했던 백석, 이용악, 오장환의 시의 정서적 특징도 십분 받아들였으리라.
이러한 영향관계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내 시의 정서적 특징에 밝고 환한 것들이 숨기고 있는 서럽고 슬픈 것들, 서럽고 슬픈 것들이 숨기고 있는 밝고 환한 것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가리켜 슬픔과 기쁨, 서러움과 즐거움이 상호 착종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이들 양가적 정서가 가능한 것은 내가 서러움과 슬픔에 처해 있더라도 늘 밝은 순수와 환한 무구를 잃지 않으려고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의(義)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긍휼히 여기려는 마음, 곧 측은지심, 다시 말해 인(仁)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정서, 이들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이 시집의 시들이 이루는 풍경들, 곧 이미지, 이야기, 정서가 내가 경험해온 형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개의 풍경은 이런저런 언어를 매개로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 이야기, 정서를 매개로 내가 만들어낸, 내가 꾸며낸 것들이다. 이는 언어 자체가 허구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들 풍경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꾸며내는 과정에 수많은 허구를 응용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번 시집의 시들이 펼쳐내는 풍경을 꾸며낸, 만들어낸 ‘나’(주체, 자아, 화자)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내가 꾸며낸, 곧 만들어낸 ‘나’이다. 좀 더 면밀히 따져보면 시쓰기의 과정에 “있는 그대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렇다. 나는 없다. 본래의 ‘나’라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나는’ 시를 쓸 때마다 그때그때의 시어 속에서 잠시 허구적으로 꾸며지고, 만들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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