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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詩人 김억 / 인도 詩人 타고르
2016년 04월 04일 23시 23분  조회:7032  추천:0  작성자: 죽림

세계적인 시성이라 일컬어지는 타고르...
여러분은 타고르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안서 김억?
만해 한용운?

 

김억은 1923~1924년에 무려 세 권의 타고르 시집을 번역해 내놓은 최고의 타고르 전문 번역가입니다. 김억은 1923년 4월에 《기탄잘리》를 처음 번역했고, 일 년 뒤인 1924년 4월에는 《신월》을, 1924년 12월에는 《원정》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사상과 시 세계를 이어받은 것으로도 이름이 높죠. 덧붙이면 잔소리.......

 

그럼 타고르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요?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교과서에서 배운 <동방의 등불>?

 

타고르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191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인에게 첫 노벨상을 안겨 준 작품이 바로 《기탄잘리》입니다. (두 번째 노벨상은 55년 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돌아갔죠.)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의 《기탄잘리》는 1910년에 벵골어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1912년에 타고르가 직접 영어로 번역한 시집입니다. 타고르가 바로 그다음 해에 노벨상을 받은 것도 실은 영어 번역 덕분입니다.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동방의 등불>....... 이게 실은 엄청난 오역과 의도적인 왜곡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2009년에 <동아일보> 측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계와 언론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데요...... 심지어 타고르의 시를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 소파 방정환이라는 얘기도 나오더군요. 최근에 정지용이 학창 시절에 번역한 타고르 시가 발굴되면서 일부 신문에서 잘못 흘린 얘기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타고르 번역과 관련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글은 동아일보 블로그뿐입니다.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우리가 아는 <동방의 등불>은 없다.......는 얘기......

 

그럼 얘기가 도대체 어찌 되는 것이냐 하면......

 

■ 이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것에 어지간히 익숙해지셨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상하(像下)의 문자는 벵골문으로 선생이 성명을 자서(自署)한 것

이 사진은 아마 영인본에는 빠져 있을 겁니다. 

 

1916년 7월 11일 정오...... 요코하마에 있는 유명한 일본식 별장 산케이엔(삼계원)에 스물세 명의 방문객이 도쿄에서 도착했습니다. 일본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교사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명의 한국인 청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진학문과 또 다른 유학생 C군입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타고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타고르는 1916년 5월부터 약 석 달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타고르는 이듬해인 1917년 1월에도 한 달가량 일본에 체류했으며, 1929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일본을 찾았습니다. 문제의 시 <동방의 등불>은 한참 뒤인 1929년 6월에 마지막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한국을 방문하려는 계획이 신병 문제로 무산된 후에 주요한의 번역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타고르와 한국의 진짜 진한 인연은 그보다 13년 전인 1916년에 처음 맺어진 셈입니다. 타고르를 방문한 두 명의 한국인 진학문과 C군......

 

타고르와 진학문의 대면은 이듬해인 1917년 11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발행된 <청춘> 11호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번 길에 조선과 지나에를 꼭 들르려 하였더니 시일이 없어 여의치 못하게 된 것을 대단 유감으로 아오.

 

선생님, 바쁘신데 어렵습니다마는 새 생활을 갈구하는 조선 청년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조금 써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선생께서 써 주신다 하면 감사한 말씀은 다 할 수 없으려니와 그 반향은 서구 철인이나 문인이 우리를 위하여 써 준 이에 몇 배 이상의 느낌이 있을 줄 압니다.

 

예, 그것은 무슨 잡지에 낼 것이오?

 

예, 조선 전체에 단 하나라 할 <청춘>이란 잡지에 게재하려 합니다.

 

그것은 물론 조선문 잡지이겠구려?

 

예, 그렇습니다.

 

내가 미국 가서 할 강연의 초안을 이곳에서 쓰느라고 대단히 바쁘오. 한즉 길게 쓸 수는 없고 짧은 것이라도 무방하다면 써 드리오리다.

 

예, 길고 짧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시 다른 대화가 이어지고 기념 촬영......)

 

(......) 옥상 노대(露臺)에 올라가 기념 촬영을 한 후에 선생이 나를 돌아다보고
아까 약속한 글은 수일 내로 보내리다.

 

그래 놓고는 타고르는 어느 흐린 날 저녁 요코하마에서 캐나다호를 타고 미국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진학문은 부슬비가 가느다랗게 내리기 시작하는 요코하마 항구에서 타고르를 배웅했습니다. 캐나다호 갑판 위에서는 타고르가 한국인 청년 진학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진학문은 훗날 타고르를 만날 때의 일을 <타 선생 송영기>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최남선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진학문은 <인도의 세계적 대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라는 글도 함께 보냈습니다. 최남선은 <청춘> 1917년 11월호의 앞머리에 타고르의 사진을 내걸고 진학문이 보내온 두 편의 글을 함께 실었습니다.

 

아참, 타고르와 진학문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잠깐 이야기가 끊기고 기념사진을 박았더랬죠? 타고르가 스물세 명의 방문객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청춘>이 빼놓았을 리가 있나요?

 

 

가운데에 앉은 노인이 바로 타고르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한 청년이 바로 진학문이올시다. 원본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죠?

 

하지만 실망하지 마시라......  (^*^)

 

아차차...... 타고르가 <청춘>의 독자에게, 한국의 청년에게 써 주마고 약속한 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ㄴ^

 

● ● ●

 

진학문이 <청춘>에 보낸 <타 선생 송영기>는 한참 뒤인 1938년 8월에 <삼천리>에 전문이 다시 실렸습니다. 

 

제목만 살짝 바꿔서 <시성 타고르 선생 송영기>......그런데 1938년에 다시 실리면서 다이쇼 6년 7월 11일, 즉 1917년 7월 11일의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건 원문에서 서기 1916년으로 되어 있던 것을 일본식 연호로 바꾸면서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타고르는 1917년 1월에 일본을 두 번째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한 달가량만 머물렀기 때문에 한여름에 산케이엔(삼계원)에서 벌어진 일과 어긋나거든요.

 

진학문 <시성 타고르 선생 송영기>

진학문 <동양 내방의 평화의 시성>

 

다만 1916년 7월에 벌어진 역사적인 장면이 왜 한참 뒤인 1917년 11월에야 소개되었는지 의문입니다. 또 진학문과 동행한 C군의 정체도 몹시 궁금합니다. C군은 대체 누구일까요? 왜 하필 이니셜로 처리했을까요? 언젠가는 꼭 밝혀내고 싶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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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지상(1929년 4월 2일자)을 통해 전해진 타고르의 시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잘못 알려진 것들이 꽤 있습니다.
 

 


 

먼저 동아일보에 실린 넉 줄의 ‘동방(東方)의 등불’이 긴 시로 둔갑해 버린 것입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펴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중앙교육진흥연구소가 2002년 교육과학기술부 검정을 거쳐 펴낸 고등학교 문학(하) 교과서 293쪽 ‘동방(東方)의 등불’입니다.


 

 


 

다른 교과서들과 일반 책들에서도 ‘동방의 등불’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형설출판사의 ‘고등학교 문학(하)’(2002년 검정, 131쪽)이나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지리’(2002년 검정, 9쪽)도 이 같은 시를 ‘동방의 등불’이라며 싣고 있습니다.


 

 


 

시집 ‘세계명시선 – 그 이해와 감상’(김희보 편, 대광문화사, 1977년, 302쪽)과 ‘대학교양국어’(대학국어편찬위원회 편, 백산출판사, 1986년, 254쪽), ‘세계의 명시’(안도섭 편, 혜원출판사, 1998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시의 원문은 요즘 ‘동방의 등불’로 알려진 시의 3분의 1에 불과한 분량입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그렇다면 3분의 2나 되는 뒷부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 시의 뒷부분은 타고르의 대표 시집 ‘기탄잘리’ 35번입니다.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Where knowledge is free;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그곳은 마음에 공포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려 있는 곳,


 

그곳은 인식이 자유로운 곳,


 

그곳은 세계가 좁은 가정의 담벼락으로 조각나지 않은 곳,


 

그곳은 말이 진리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곳,


 

그곳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그 팔을 활짝 펴는 곳,


 

그곳은 이성의 맑은 냇물이 죽은 습관의 쓸쓸한 사막으로 잦아들진 않는 곳,


 

그곳은 마음이 님에 인도되어 늘 열려 가는 사상과 행동으로 나아가는 곳-


 

저 자유의 천계(天界)에로, 주여, 이 나라를 깨우쳐 주옵소서.”


 

(박희진 옮김, ‘기탄잘리’, 현암사, 2002년,55쪽)


 

 


 

 


 

일제강점기엔 시인 김억이 타고르를 조선에 소개하기 위해 ‘기탄잘리’를 완역했고 해방 후에는 박희진 시인(78)이 ‘기탄잘리’의 대표적인 번역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1959년 처음 ‘기탄잘리’를 번역한 박 시인은 1961년 5월 4일자 한국일보에 타고르 탄생 백주년 기념 글을 기고했고 자신이 번역한 시집 ‘기탄잘리’의 역자 후기에 이 글을 인용했습니다.


 

 


 

“(전략)…‘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운운의 시로 이미 우리와는 인연이 옅지 않은 이 시성의 백년제를 맞이하여 이제 우리는 또다시 그의 노래를 들어 보자.


 

 


 

그 곳은 마음에 공포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려 있는 곳,


 

그곳은 인식이 자유로운 곳,


 

그곳은 세계가 좁은 가정의 담벼락으로 조각나지 않은 곳…(후략)”


 

(박희진 옮김, ‘기탄잘리’, 홍성사, 1982년, 131쪽)


 

 


 

 


 

홍성사의 ‘기탄잘리’는 평판이 좋아 스테디셀러로서 22쇄의 발행을 기록했습니다. ‘기탄잘리’ 35번과 ‘동방의 등불’이 관련이 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는데 두 개의 시가 어느새 짜깁기돼 버렸습니다. 박 씨는 “전혀 별개의 시가 합쳐져 하나의 시로 읽히는 것을 볼 때마다 분노마저 느낀다. 이것은 타고르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타고르가 동아일보에 ‘동방(東方)의 등불’을 기고하기 전 조선인에게 준 또 하나의 시가 있다는 얘기도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그가 조선 민중에 보낸 시로서는 ‘쫓겨 간 자의 노래(패자의 노래)’가 있고 이번 동아일보를 통한 ‘조선의 등촉’이 있다.”(‘출판경찰개황 – 불허가 차압 및 삭제출판물 – 삼천리 창간호’, ‘조선출판경찰월보’ 제9호, 1929년 5월 7일 발송)


 

 


 

“타고르가 ‘청춘’지를 통해 첫째 번으로 써 준 글은 ‘The Song of the Defeated’이다.”


 

(김윤식, ‘근대한국문학연구’, 일지사, 1973년, 202쪽)


 

 


 

“강화(講話)가 끝난 다음, 진학문과 단독 회견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잡지 ‘청춘’을 위하여 글을 써 줄 것을 부탁했더니 타고르가 쾌히 승낙하고, 얼마 뒤에 시 한편을 보내왔더라고 한다. 제목은 ‘패자(敗者)의 노래(Song of the Defeated)’로 되어있는데 그 때 일본 총독부의 검열 관계로 제목을 ‘쫓긴 이의 노래’라고 고쳐서 ‘청춘’지 11월호에 게재하였다.”(조용만 역·해설, ‘신에의 송가 – 타고르 시선’, 삼성미술문화재단, 1982년, 224쪽)


 

 


 

사실 타고르가 일본을 처음 방문한 1916년 육당 최남선의 요청으로 직접 타고르와 면담한 진학문은 타고르가 조선인을 위해 시를 써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진학문은 다음해인 1917년 육당이 발간하던 ‘청춘’지 11월호에 ‘쫓긴 이의 노래’를 번역해 실으면서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청춘’을 위하야 지어 보내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타고르 자신이 번역해 미국에서 발간한 시집 ‘채과집(Fruit-Gathering)’에 실린 것입니다. 국문학자인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학문은 이 시를 타고르의 특별선물이라고 믿은 것 같다.”며 “여기서 진학문의 타고르 소개가 지니는 과도기성(過渡期性)이 드러난다.”고 평했습니다.


 

 


 

타고르를 ‘청춘’지에 소개한 진학문의 착각으로 ‘쫓긴 이의 노래’가 타고르가 조선인에게 준 최초의 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동방의 등불’이 타고르가 조선인에게 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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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1년 2월 26일자 석간 4면

 


 
 
 
 
판매가격
 
 

 

 
기탄자리
/타고르
/김억 역
/이문관
/1923년(초판)/113쪽

 

 
고려대 최동호 교수, 이 책을출간한 까닭은

그동안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의 작품을 한국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잔물’이라는 필명의 방정환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故) 김병철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근대번역문학사 연구’(1975)에 따르면 방정환은 1920년 6월 ‘개벽’ 1호에 ‘어머님’과 ‘신생의 선물’ 등 두 편의 타고르 시를 번역 소개했고 이후 타고르 열풍이 불어 1925년까지 오천석, 김억 등 여러 번역가에 의해 모두 22번이나 타고르 시가 번역됐다.

하지만 최동호(사진) 고려대 교수는 최근 낸 ‘정지용 시와 비평의 고고학’(서정시학)에서 김병철이 누락한 또 다른 번역자로 정지용 시인을 소개하고 있다. “1923년 1월 휘문고보 문우회 학예부에서 발간한 ‘휘문’ 창간호에 정지용은 타고르 시집 ‘기탄잘리’ 중에서 9편을 번역하여 수록했으며 그리스 신화 ‘파스포니아와 수선화’와 ‘여명의 신 오로라’ 등 2편의 신화도 함께 번역 소개했다.”

최 교수는 “이 자료가 누락된 것은 당시 정지용이 학생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게재지 역시 고등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였기 때문일 것”이라며 “그런 이유로 문단이나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는 타고르 시집이 번역 출간된 적이 없어 정지용이 선택한 원문이 일역판인지 영어판인지 알 길은 없다.

최 교수는 “정지용의 번역시는 김억이 1923년 3월 평양 이문관에서 발간한 시집 ‘기탄잘리’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언어의 절제나 시어의 선택 그리고 행간의 조정에 있어서 오히려 오천석이나 김억을 앞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휘문고보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지용의 번역 능력은 선배 문인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학지망생이었던 정지용은 타고르 시를 탐닉하면서 시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는 서양문학을 수용하는데 있어 김억 등의 직역 형태 번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수용 단계로의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0년 동안 정지용 시 연구에 몰두해온 최 교수는 이밖에도 ‘박용철과 정지용의 만남’ ‘김기림과 정지용의 문학적 상관성’ 등을 분석함으로써 정지용 시의 문학사적 의미를 결산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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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시인 김억(1896~?)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23년 발간한 '해파리의 노래'는 국내 최초의 근대 창작시집이고, 1921년 펴낸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서구시 번역시집이다. 특히 그는 외국 시 번역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번역한 타고르 시는 전문가급의 높은 번역 수준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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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시문학사에서 특이한 위상을 갖는 시인 김소월과 한용운은 인도 시인인 타고르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오문석 조선대 교수는 지난 28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린 민족문학사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3차 심포지엄에서 이와 같이 주장했다.

오 교수는 “김억은 타고르의 시집 ‘원정’을 김소월에게 원서를 빌어 번역한다. 김소월이 영향을 받은 것은 타고르 자체라기보다는 타고르와 나이두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김억이 만들어낸 독특한 여성적 문체”라며 “김억이 채택한 극존칭의 종결어미는 이후 김소월이 시적 화자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기준점으로 사용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용운 역시 시집 ‘님의 침묵’에서 ‘타골의 시(GARDENISTO)를 읽고’라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때 거론된 타골의 시집이 바로 ‘원정’이다. 김소월은 김억을 도와 ‘원정’의 번역에 참여하고 한용운은 그 시집으로 타고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던 것”이라며 “한용운의 ‘님’은 시인 타고르와 정치인 간디를 융합함으로서 조선의 근대시로서는 드물게 종교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연애시의 형식이면서도 투쟁적인 독자적 시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오 교수는 또한 “2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인도는 식민지 백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 조선인으로 하여금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모색케 하는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며 “김억은 타고르의 대표 시집 3권을 한꺼번에 번역하면서 타고르 열풍을 이끌어낸 장본인으로 김억에 의한 타고르 번역은 영어를 통해 이뤄졌다. 영어로 번역된 타고르의 ‘Thou’,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그의 ‘God’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근대시에서 유행했던 ‘임’의 진원지 중의 히나라고 봐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문학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을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국치 100년의 역사가 문학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고 민족 내면의 정신사를 조망하기 위해 마련됐다.

하정일 원광대 교수(민족문학사연구소 집행위원장)의 기조강연 ‘한일병합 100년의 한국문학’에 이어 김승환 충북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오 교수, 박수연 충남대 강사, 류보선 군산대 교수 등이 발표했다.

하 교수는 “한일병합 100년, 해방 65년이 되었음에도 식민주의 극복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것은 탈식민 없이는 근대 극복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준다”며 “근대의 해방적 잠재력을 극대화함으로서 근대를 내파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중과제론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소중한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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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의 ‘님’은 어떻게 한용운의 ‘님’이 되었나.

...인제 만해마을에서 열린 ‘권영민의 문학콘서트-한용운과 타고르’에서 최라영 교수(부산대)는 “한용운의 ‘님의 시학’은 그 근본이 타고르에서 오지만 ‘습니다’체는 김억이 처음으로 시도한 새로운 시문체인만큼 김억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주장했다.

최라영 교수는 한용운이 타고르의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전제 하에 김억에 주목했다. 김억은 타고르 시 전집 세권을 모두 완역해 발표하는 등 타고르를 한국에 전면적으로 소개한 장본인이다. 특히 일본 번역본에 의존했던 당시 상황과 달리 영시를 직접 읽고 전혀 다른 문화권인 우리언어로서 창안해 근대시형을 만들어낸 인물이어서 더 주목받는다.

최라영 교수는 “김억이 타고르 번역시편을 시작하고 맺는 감탄사와 술어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장의 운용방식까지 한용운의 시와 흡사하다”며 “김억이 보여주는 ‘님의 시학’은 형식과 내용상으로 영향관계에 있는 한용운의 실천적 ‘님의 시학’으로 이어져 우리 근대시의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강조했다.

한용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님’은 기존의 우리 시에서 결여됐던 ‘신’ ‘형이상학’ ‘이념’ 등을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범주가 실체적인 대상에까지 걸쳐져 있다는 점 또한 최 교수는 빼놓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비교해보면 그 영향력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타고르의 《기탄자리》 59를 직역하면 ‘네,, 나는 안다, 이것은 단지 당신의 사랑, 오,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여’이다. 이를 김억은 ‘그렇습니다, 아 제 맘의 사랑하는 이여, 이것은 님의 사랑 받게 될 것이 없음을 저는 압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는 타고르의 시보다 오히려 김억의 번역시체를 닮아있다.

최라영 교수는 “김억은 타고르 번역시에서 중심 문장의 일부로서 발어사를 시작하고 감탄사를 동반하며 중심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이어질 문장의 술어를 앞 문장에서 미리 끌어오는 산문시 구성방식을 보여준다”며 “이러한 문장구성과 운용방식은 한용운의 시편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김억의 창작적 번역은 원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핵심 주제부를 번역할 때 실감나는 우리말 표현이나 원시의 주제부가 담은 의미의 가닥들을 한결 풀어놓아서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한용운은 타고르의 ‘님의 시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독창적인 ‘님의 시학’을 전개하지만, 그의 ‘님의 시학’은 문체적 내용적 측면에서 김억의 타고르 창작적 번역시와의 연속적 국면을 보여준다”고 최라영 교수는 주장한다.

다만 한용운의 시편에 나타난 ‘님’은 김억의 ‘님’과 대비할 때 현실적인 ‘실체성’ 내지 ‘인격화’를 보여주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이것은 한용운의 ‘님’과의 합일에 대한 지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력을 동반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억은 타고르의 원시에 나타난 ‘님’의 형상을 좀 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고양시키고 ‘나’와 ‘님’의 관계에 관해서 ‘나’ 혹은 ‘나의 영혼’ 안에서 ‘님’과 합일하는 창작적 모델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 최라영 교수는 “한용운의 ‘님’은 이와 같은 김억의 형이상학적 ‘님’과 합일을 이루는 ‘실천적 방식’을 모색한다”며 차이점을 대비시켰다.

김억의 ‘님과의 정신적 합일’은 한용운을 거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님의 시학’으로 전개된다. 김억에 의해 타고르의 ‘님’이 형이상학적이고 더욱 숭고한 ‘님’이 된 것이다.

최라영 교수는 “김억의 ‘님의 시학’은 김소월에 의해서는 당시 우리민족의 고통과 정한을 호소하는 정서적 안식처가 되었고, 한용운에 의해서는 ‘님’의 형상이 ‘실체화’ 내지 ‘인격화’됨으로써 ‘님을 품는 일’ 나아가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 일’이라는 실천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문학 콘서트에서는 이외에도 △장경렬 교수(서울대)의 ‘다름과 같음’의 철학을 향해 △서준섭 교수(강원도)의 한용운의 《십현담 주해》와 《님의 침묵》의 거리 △임곤택 강사(고려대)의 축제의 의미로 읽은 한용운의 시가 발표됐다.

-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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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1일에 한국인 청년 진학문과 C군을 만난 타고르...... 그러고는 곧바로 요코하마에서 캐나다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 타고르...... 타고르는 과연 진학문과 맺은 약속을 지켰을까요? <청춘>의 독자, 한국의 청년에게 시를 보내 왔을까요?

 

결과적으로 <청춘> 1917년 11월호에 실린 진학문의 <타 선생 송영기>에는 타고르에게서 글을 받았노라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타고르가 정말 진학문에게든 최남선에게든 시를 보냈다면 그 우편물을 대서특필할 만도 한데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보낸 것도 아닙니다.

 

자자...,... 진학문은 <청춘> 1917년 11월호에 분명히 두 편의 글을 보냈고, 최남선은 권두 화보에 타고르의 사진을 실으면서 진학문의 글을 짜자잔~ 공개했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청춘> 11호를 뒤져 보니 글이 두 꼭지가 아니라 세 꼭지...... 엄밀하게 따지자면 목차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무려 네 꼭지가 실려 있습니다. 타고르의 시도 한 편이 아니라 무려 네 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아...... 이건 또 뭔 소리인가요??

 

일단 진학문의 <타 선생 송영기>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포스트에서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타고르와 방문객 23명 일행의 단체 기념사진이 실린 것도 <타 선생 송영기>의 맨 끝 부분입니다. 그런데 진학문은 또 하나의 글 <인도의 세계적 대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보내왔다고 했잖아요? 요 글은 제목 그대로 타고르를 소개하는 네 페이지짜리 짤막한 글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세계적 대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후반부에는 타고르의 시 세 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요......

 

 

위에서 보시다시피 《기탄잘리》의 일절, 《원정》의 일절, 《신월》의 일절...... 이렇게 세 토막입니다. 이 세 편의 시가 바로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타고르 시입니다.

 

문제는 이 세 토막의 시를 번역한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겁니다. 분명히 진학문의 글 안에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막상 진학문이 이 세 편의 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진학문의 솜씨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세 편의 시는 앞의 본문과 매끄럽게 이어지거나 주석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문호 소개를 앞세우고 대표작을 늘어놓은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 편의 시를 번역한 것은 <청춘>의 편집자 최남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거나 이 세 편의 시는 타고르가 보내기로 약속한 시가 아니겠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냥 타고르의 대표적인 시집 세 권에서 한 토막씩 뽑은 것이니까요.

 

진짜 문제는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있습니다.

 

■ 원래는 왼쪽의 영문시가 99쪽이고 오른쪽이 100쪽입니다만 편의상 좌우를 바꿔 놓았습니다.
앞의 사진은 오른쪽이 먼저고 이 사진에서는 왼쪽이 먼저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가서 보기 불편하므로  바꿔 편집한 것 뿐. ■

 

바로 이 두 페이지는 <청춘> 11호의 목차에서도 각각 별도의 꼭지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순서로 보자면 <인도의 세계적 대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95~98쪽) → (99쪽) → <쫓긴 이의 노래>(100쪽) → <타 선생 송영기>(101~107쪽)...... 이렇게 되는 겁니다.

 

<쫓긴 이의 노래>는 [상역(上譯)]이라고 해서 앞 페이지의 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그리고 총 23행의 시 <쫓긴 이의 노래> 바로 뒤에 여남은 줄의 설명이 붙어 있지요? 그게 바로 편집자의 주석입니다. 우선 궁금하니까 주석부터 먼저 볼까요?

 

이 글은 작년 시인이 동영(東瀛─동쪽 바다라는 뜻)에 내유하였을 적에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청춘>을 위하여 지어 보내신 것이니 써 인도와 우리와의 이천 년 이래 옛 정을 도타이 하고 겸하여 그네 우리네 사이에 새로 정신적 교호를 맺자는 심의에서 나온 것이라. 대개 동유(東留) 수개월 사이에 각 방면으로 극진한 환영과 후대를 받고 신문 잡지에게서도 기고의 간촉(懇)이 빗발치듯 하였건마는 적정(寂靜)을 좋아하고 충담(冲淡)을 힘쓰는 선생이 이로써 세속적 번쇄(煩)라 하여 일절 사각(謝却)하시고 오직 금옥가집(金玉佳什)을 즐겨 우리에게 부치심은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 일 편 문자가 이렇듯 깊은 의사 있음을 알아 읽고 읽고 씹고 씹어 속속들이 참맛을 얻어야 비로소 선생의 바라심을 저버리지 아니할지니라.

 

아, 맞네요. 타고르가 보낸 시...... 지금 우리에게 흔히 <패자의 노래>라고 알려진 그 시가 바로 ...... 즉 <쫓긴 이의 노래>로군요.

 

타고르 원작의 <쫓긴 이의 노래>는 찬찬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시입니다. 그렇지만 감상은 제 몫이 아니므로 원문과 새 번역까지 함께 소개한 좋은 글 하나를 링크해 두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타고르의 한국 관련 두 편의 시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미국의 대학에 타고르의 원시가 남아 있고 그 원시에 타고르가 최남선에게 준 시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다고 하는데...... 과연...? 바쁘신 타고르가 미국에서 손수 시를 지어 한국에 보냈다...?? 그런데 최남선은 단지 한 구절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청춘>을 위하여 지어 보내신 것이니]라는 한마디 말로 간단하게 넘겼다...??? 권두 화보에 타고르의 육필 편지를 소개한다든가 대대적인 특집을 편성하지 않고...???? 훗날 진학문도 최남선도 더 이상 타고르의 육필 시에 대해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그렇게 보아도 좋을까요? 이상하잖아요?? 최남선이 쓴 저 한마디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나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청춘>을 위해 타고르가 시를 지어 보냈다는 말은 의례적인 진술에 가깝습니다. 역시 진학문 또는 최남선...... 아마도 최남선이 임의로 뽑아 번역했을 터입니다. 타고르의 뜻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다만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앞의 시 세 편과는 격을 달리해야 할 가치와 필요가 분명했을 뿐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추리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타고르가 따로 지은 시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슬쩍 언급한 동아일보사 블로그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 시 또한 타고르의 또 다른 시집 Fruit-Gathering에 실려 있으니까요. 1916년에 출판된 이 시집은 [채과집], [과일 따기], [열매 모으기]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이 시집이 이미 출판되었거든요...!!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오마이뉴스>의 글을 쓴 분은 <청춘>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동아일보사 블로그의 글은 미처 참조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타고르는 한국인에게 시를 지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뭔가를 보냈더라도 그것은 이미 출판된 시집 Fruit-Gathering의 한 대목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고르는 진학문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하고 안 지킨 것이기도 하며, <청춘>에 시를 보낸 것이기도 하고 안 보낸 것이도 합니다. (뭐, 쉽게 말해 시를 안 보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

 

이런이런...... 그럼 1917년 <청춘>의 타고르 번역시 역시 1929년 <동아일보>의 상황과 매한가지였던 셈이군요.

 

다만 차이도 분명히 있습니다. 1929년 주요한의 번역은 훨씬 더 노골적인 오역을 겨냥했고 그 효과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쭉 지속되고 있습니다. 동방의 등불 코리아...... 그러나 진학문의 번역(사실상 최남선의 번역)은 은근하면서도 한국의 현실을 강렬하게 환기시켰으나 곧바로 잊히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타고르 시의 제목이 <쫓긴 이의 노래>가 아니라 <패자의 노래>라는 것도 그러한 현상의 일부일 터입니다.

 

어쩌면...... 최초의 타고르 시 번역가 진학문이 잊힌 탓이 크지 않을까요?

////////////////////////////////////////////////////////////////////

타고르는 동아일보에 1929년 4월 1일에 한국에 대한 시 한편을 보냈습니다.

이 시와, 오늘날 유사역사가들이 이 시를 어떻게 왜곡보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심지어 국정교과서에까지 침투하기까지 했으니... (뭐든지 왜곡하는 유사역사학의 세계 - 타고르 [동방의 등불] )

이때 과연 타고르가 한국을 알기나 했으려나 하는 의문을 제기한 분도 있었는데, 타고르가 무려 12년 전에도 한국에 시를 기고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916년, 타고르는 노벨상 수상 후 세계여행을 하며 일본 요코하마에 들렀습니다. 조선인 유학생으로 와세다 대학생이었던 진학문秦學文은 타고르의 비공식 강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진학문은 타고르를 만나 한국과 인도가 비슷한 처지라는 말을 건넸고, 타고르는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며 한국에도 방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학문은 최남선과 가까운 사이였고, 당시 최남선은 <청춘>이라는 문예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진학문은 타고르에게 그 <청춘>지에 시를 써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고 타고르는 이름과 주소를 메모한 뒤 미국 여행을 끝낼 때까지는 시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청춘>에 타고르의 시가 도착했습니다. 진학문은 이것을 직접 번역하여 1917년 11월호에 게재했습니다. 아래는 그 시의 전문.

 

<패자의 노래>

주主께서 날다려 하시는 말슴
외따른 길가에 홀로 서 있어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라시다.
대개 그는 남 모르게 우리 님께서
짝 삼고자 하는 신부일세니라.
검은 낯가림[面紗]으로 가리었는데
가슴에 찬 구슬이 불빛과 같이
캄캄한 어둔 밤에 빛이 나도다.
낮[晝]이 그를 버리매 하나님께서
밤을 차지하고 기다리시니
등이란 등에는 불이 켜졌고
꽃이란 꽃에는 이슬이 매쳤네.
고개를 숙이고 잠잠할 적에
두고 떠난 정다운 집 가으로서
바람 곁에 통곡하는 소리 들리네.
그러나 별들은 그를 향하여
영원한 사랑의 노래 부르니
괴롭고 부끄러워 낯 붉히도다.
고요한 동방의 문 열리며
오라고 부르는 소리 들리니
만날 일 생각하매 마음이 조려
어둡던 그 가슴이 자조 뛰도다.



...^^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원문입니다.

The Song of Defeated


My Master has asked of me to stand at the roadside of retreat and sing the song of the defeated.

For she is the bride whom he woos in secret.

She has put on the dark veil, hiking her face from the crowd, the fewel glowing in her breast in the dark.

She is forsaken of the day, and God's night is waiting for her with its lamps lighted and flowers wet with dew.

She is silent with her eyes downcast; she has left her home behind her, from where come the waiting in the wind.

But the stars are singing the love song of the eternal to her whose face is sweet with shame and suffering.

The door has been opened in lonely chamber, the call has come;

And the heart of the darkness throbs with the awe of expectant tryst.




* 원문을 보니 lonely chamber를 "고요한 동방의 문"이라고 번역한 이외에는 심한 의역은 없군요. 비밀글로 달아주신 덕분에 의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동방은 東方이 아니라 침실을 가리키는 洞房이었네요. 21세기에는 "고요한 동방의 문"이 "위대한 환국의 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겠지요...

*
[추가]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국문학자인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학문은 이 시를 타고르의 특별선물이라고 믿은 것 같다.”며 “여기서 진학문의 타고르 소개가 지니는 과도기성(過渡期性)이 드러난다.”고 평했습니다. 타고르를 ‘청춘’지에 소개한 진학문의 착각으로 ‘쫓긴 이의 노래’가 타고르가 조선인에게 준 최초의 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동방의 등불’이 타고르가 조선인에게 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시입니다.

...조용만이 주장한 내용인 <패자의 시>가 한국을 위해 써주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착오는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진학문 본인이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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