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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은 별의 언어를 옮겨쓰는 세계의 隱者(은자)
2016년 06월 15일 19시 50분  조회:3650  추천:0  작성자: 죽림

[5강] 시인은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가? 


강사/ 나 호열 

성큼 겨울이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코 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앞에 흩어진 정신을 추스려 보는 것도 겨울나기의 한 방법이겠지요? 

지난 주에 <집에서 해보기> 한번씩 해 보셨는지요? 
< 예문 3>은 김성춘 시인의 시 : 『노래. 1』입니다 
<예문 4>는 홍영철 시인의 시 : 『그의 이름은 슬픔』입니다 
<예문 5>는 강윤후 시인의 시 : 『깊은 숲』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읽고 붙인 제목과 의미상에서 큰 차이가 납니까? 별 상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붙인 시제목은 여러분이 시를 읽고 느낀 바를 요약한 것이니까 정답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를 쓰고 읽는데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한 작품을 통해서 다양하고 넓은 해석이 요구되는 작품이야말로 좋은 작품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시 제목을 붙일까요? 어떤 시인은 처음부터 타이틀을 달아놓고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시를 한 편 완성해 놓고 제목을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든 제목은 시인이 전달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집약하거나 상징화 해 놓은 것입니다. 『노래. 1』, 『그의 이름은 슬픔』, 『깊은 숲』이 의미하는 바를 하나 하나 점검해 봅시다. 

노래는 무엇입니까?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지요? 노래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 노래방 많이 가지요? 왜 일까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합일되고자 하는 몰입의 상태, 감정의 순화 작용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글을 쓴 시인은 노래 부르고 싶어합니다. 무엇 때문에? 

『노래. 1』은 저번 주에 잠깐 해석을 한 바 있지만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지요.폭우와 홍수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버리는 삶, 절망스러운 모습이 먼 기억이 아니지요? 황량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풍경 속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허옇게 드러난 뿌리가 다시 활착하기 위하여 흙을 찾아 내리는 정경 하나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인은 그것이 다름아닌 생명의 본질,서로 몸 부비며, 상극이 아니라 상생하는 아름다움으로 전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 한 구절을 통하여 폭우와 홍수에 휩싸이는 우리 삶의 신산함과 무력감을 상쇄시키는 희망을 소생시키는 것 입니다.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과 힘을 얻어내는 성찰을 느낄 수 있지요. 

『노래. 1』은 정태적인 상황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이름은 슬픔』은 몇 컷의 이동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행의 끝 부분에 구두점이 찍혀져 있는 것은 컷의 구분된 동작을 숨 삼키며 읽어 달라는 것이겠지요. 
길거리에 두 사람이 마주쳐 오고 있지요. 커다란 짐을 지고 9월의 햇살을 이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여자와 내가 마주치고 난 후 나는 뒤를 돌아보지요. 그 여자는 걸어가고 있지요. 그 다음 나는 다시 뒤를 돌아 봅니다. 그 때 그 여자의 머리에서 짐이 내려오고 그 여자가 없어집니다. 자,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어디가 이 시를 읽는데 어려움을 줄까요? 

나는 왜 뒤돌아 볼까요? 돌아본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시다. 그 여자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것 일까요? 어디서 만난 적이 있어서?.... 두 번 째 뒤돌아 보았을 때 그 여자의 머리 위에서 짐이 내려오고 그 여자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짐은 곧 그 여자가 되는 셈이지요. 현실과 환상(각)의 교차, 정말 어려운 것은 그 다음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그의 등장입니다. 그는 또 누구입니까? 슬픔은 또 무엇입니까? 그는 나와 그 여자, 느낌을 갖는 중량을 가진 그 모든 것이며 사라져야 하는 숙명을 가진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 조차 슬픔이라는 인식이 이 시의 주조가 될 것 같군요. 분명한 것이 없지요? 정보, 즉 메시지의 전달이 애매하지요? 

『깊은 숲』은 숲 속을 헤매는 화자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화자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슬픔』도 마찬가지로 화자의 감정은 극도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노래. 1』에서도 마지막 결구 그 이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객관화의 수법을 통하여 공감의 폭과 사실적 질감을 높이려는 것이지요. 『깊은 숲』의 메시지는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구절에 있습니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숲에서 길을 잃듯이 우리의 삶은 깊은 숲을 헤매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은 영원히 찾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중에 상징에 대해서 이야기가 논의 되겠지만 바다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바는 개인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숲을 지나는 행위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숲은 살아있는 동안 빠져나올 수 없는 울창한 생각들을 가진 나무로 형상되는 인간 군락인 것 입니다. 

위의 시들을 보면 결코 큰 스케일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질문이지요? 결코 시인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시원한 해답이 없지요? 이와 같이 존재와 존재간의, 삶의 전반에 대한 각성은 1주차 강의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나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 시인이 지향하는 첫 번 째 세계입니다. 

< 예문 1>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민음사 348쪽부터 350 쪽까지 인용 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비오는 날의 서정을 말할 수 없게된 시대에 눈과 나무, 비와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작품들을 쓰고 읽고 가르친다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아니,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산성비와 산성눈이 내리는 시대의 독자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딸국질 한 번 하지 않고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어』를 읽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의 시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을 멈춘다.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숲은 깊고 어둡고 아름답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하여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이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절성을 거의 <완전히>상실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는 눈 내리는 숲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산성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시인 자신이 눈을 피하기 위해 여름 해수욕장의 파라솔만큼이나 큰 우산을 쓰고 외출해야 하는 시대에 어느 독자가 맨머리로 눈 내리는 숲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조건, <제 정신 아님>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을 감수하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눈 오는 숲은 매혹의 장소가 아니라 그가 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도망쳐야할 대상이다.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배제>한다. 
독자의 현실정서와 시인의 문학적 정서 사이에 발생한 이 곤혹스런 괴리야말로 오늘날 문학이 대면하게 된 심각한 문제의 하나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눈의 서정은 독자가 현실세계에서 눈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현실적 정서(두려움)와는 먼 거리에 있다. 두 정서는 일치하지 않고 양자 사이에는 의지하란한 공감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시인들은 자연대상들에 대한 개인적 정서를 시의 텍스트로 조직해 냄에 있어 이 같은 근본적 괴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개인적 정서와 독자 일반의 정서 사이에는 양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 의지할만한 공통의 정서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정서구조는 시인과 독자가 모두 자연으로부터 항구한 미적 정서의 공급을 보장받고, 양자 모두 자연과의 관계에서 안정된 감성체계를 확보할 수 있어다는 사실 대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정서구조는 오늘날 가능하지 않다. 그 구조의 모태는 자연 자체가 지금 불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정서와 문학적 감성 간의 이 괴리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간극일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정서세계에 발생한 감성분열과 상상력의 파탄을 의미한다. 누가 오늘날 프로스트처럼 눈 오는 밤 숲의 유혹을 노래할 수 있는가? 모더니스트 시대까지도 작가 시인들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별의 언어를 옮겨쓰는 세계의 은자>에게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나무를 닻 삼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는 서정으로 이 행성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행복한 사정을 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가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세상으로 듸어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무들이 질식하고 숲이 죽어가는 지금 이 시대의 시인에게 그런 상상력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를 들어올리기는커녕 제 무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든 풀잎을 시인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풀잎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은 풀밭으로 가지 못한다. 농약 끈적한 꽃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풀밭은 시인을 배제한다. 비의 서정을 풀기 전에 지금의 시인은 비오는 날 비 때문에 죽어가는 숲을 생각하여야 한다.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그 똥물을 보며 똥통 속에서 그가 푸른 강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능력 - 그가 강으로부터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분열의 능력이 필요하다. 

위의 인용문은 오늘날 시인 -넓게는 예술행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 들이 처한 문학적 정서의 파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자신을 들여다 보기라고 했습니다마는 그 자신이란 결국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자연- 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에 가면 갈수록 시인의 입지는 좁아들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인류애와 평화같은 주제를 넘나드는 시인들도 있고 남북통일, 노동문제, 남녀불평등 등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돌리는 시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부분 계몽적 입지를 확보하였던 그 영역에서마저도 시인들은 쫓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회와 대중은 계몽의 차원을 넘어서서 넘쳐나오는 정보의 그물에서 허덕거리는 상태에서 지사적 풍모와 예언자적 시인의 발언은 빛을 얻기가 힘든 것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위의 글은 문학적 정서의 토양이 자연이며 자연의 파괴로 인한 정서의 고갈, 나아가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의 시인들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자, 당신은 무엇을 쓸 것 입니까? 자연으로부터 배제된 상태에서 환각에 빠져 시든 풀잎과 흐려져 버린 별을 노래할 것 입니까? 누구를 위하여 노래 부를 것 입니까? 

< 예문 2>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승호 -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큰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화호에선 시체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 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 달마가 보니 바닷 속에서 대충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 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박아 피흘리게 하든지 

음풍농월의 시대는 갔지만 음풍농월의 유전인자는 아직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 확연하게 나의 문제로 빚어지는 시적 정서가 얼마만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누구나 이 시대가 살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압니다만 그 살기 어려움의 문제를 자기화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 점을 저항하여야 합니다. 시를 쓰고 그 시 속에 자신의 피와 땀을 부벼 넣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문의 최승호 시인의 시는 썩어가는 시화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발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라면 르포 이상의 자격을 얻기란 힘들겠지요. 시인은 고발의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화호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고발 합니다. 자성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시는 예상하지 못한 폭발력으로 삶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인은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의 기록과 몸부림과 고통을 버무려야 합니다. 숲이 사라져 버린 그 땅에 다시 길을 내겠다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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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찔레꽃 / 송찬호

 

     

 

 

 

 

 

 

 

 

  찔레꽃

 

                                                                     송 찬 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데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송찬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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