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를 쓸 때는 시어나 내용이 시적 참에 어긋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한다. 시에서는 시인이 주관적으로 시어를 마음대로 만들어 쓸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 독자가 포함된 동시에서는 시어나 내용이 가능하면 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한다. 시를 읽은 어린이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똥을 누면
엄마한테 했던 거짓말이 없어질까?
똥을 누면
엄마 몰래 가지고 간 500원이 다시
엄마의 호주머니 속으로 돌아갈까?
똥을 누면
학원 안 가고 오락실에서 놀았던 일들이
없어질까?
똥
을
누
면
.
.
.
똥을 누면
내가 잘못했던 일들이 모두 없어졌음 좋겠다
더러운 똥이랑 같이...
내가 했던 나쁜 일들도 없어졌음 좋겠다
김한림 동시 -『똥을 누면』전문
이 시를 보면 마지막 두 연은 화자의 바람이기 때문에 시적 참에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1, 2 3,연은 비약이 너무 심하여 시적 참에 어긋난다. 똥은 뱃속에 있다. 그러나 1, 2, 3연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전부 몸 바깥의 일들이다.
‘똥을 눈다고 엄마 몰래 가지고 간 500원이 다시 엄마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시적 참에 어긋난다. 시적 참을 의식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쓰다보면 이런 오류가 생긴다.
2) 치밀하게 쓴다
어머니는 그륵이라고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시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은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은 한 그릇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시 -『어머니의 그륵』전문
이 시는 치밀함이 부족하여 오류를 범한 시다.
1연 1행에서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라고 존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3연 2행에서는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라고 존칭을 생략했다. ‘그륵이라 배웠다.’ 가 아니라 ‘그륵이라 배우셨다.’ 라고 해야 맞고, 3행 역시 ‘어머니가 담은’ 이 아니라 ‘어머니가 담으신’ 이라고 해야 맞다. 어떻게 보면 1연 1행의 ‘읽으신다.’ 가 오류처럼 보인다. 하지만 4연 3행에 보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라는 존칭이 또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존칭이 생략된 부분의 오류가 맞다.
시에서의 오류들은 작가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치밀함이 떨어지기 때문에 생긴다.
예전에 내 시집을 읽은 어떤 독자가 내 시에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십여 년이 지나 확실치는 않지만 앵두의 수확 시기에 관한 오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편지를 받고 나서 내 얼굴이 활활 달아오른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분이 지적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나는 앵두의 수확시기를 잘 못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를 빚을 때 치밀함에 대해 이렇게 예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독자에게 고맙다는 화답으로 긴 편지를 보낸 것은 물론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시를 쓰면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관을 길렀다. 시에서의 오류는 치밀하지 않은데서 온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일이다.
3) 존칭을 쓰지 않는다
시에서 존칭어 사용은 옳지 않다.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등은 하나의 대상물이다. 다만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주관적인 글)이라면 당연히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그 대상이 누구라도 존칭을 쓰면 안 된다. 시는 객관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정일근 시『어머니의 그륵』도 쓰지 말아야 할 존칭어 때문에 오류가 생겼다.
어머니는 그륵이라고 쓰고 (읽는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은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은 한 그릇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들었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시 -『어머니의 그륵』전문
존칭어를 빼고 나니 한결 깔끔하고 무리가 없다.
존칭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긴장미가 떨어진 시를 한 편 더 보자.
장작을 패시던 손으로
무밭에 두엄을 내시던
손으로
아버지는
외양간 기둥에
등불을 거시고
무릎을 꿇어
송아지를 받으셨다.
뿌우연 등불 아래
땀을 훔치며 나오시는
아버지의 험한 손이
예쁘고
귀여운 송아지를 받으셨다.
권영상 시 -『아버지의 손』전문
이 시에서는 우선 3연에 문장의 오류가 있다. ‘무릎을 꿇어 송아지를 받으셨다.’ 는 ‘무릎을 꿇고 송아지를 받으셨다.’ 라고 해야 맞다.
이 시에서 존칭으로 인한 결정적인 오류는 4연과 5연에 걸친 ‘아버지의 험한 손이/ 예쁘고 귀여운 송아지를 받으셨다.’ 는 곳이다. 이 문장을 보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험한 손에다 존칭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존칭 문장의 오류는 ‘아버지가 험한 손으로 예쁘고 귀여운 송아지를 받으셨다.’ 라고 해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존칭을 빼고 ‘아버지의 험한 손이 예쁘고 귀여운 송아지를 받았다.’ 라고 해야 한다.
시는 아무리 날카로운 비수로 후벼도 살점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 치밀하게 써야 하는 것이다.
장작을 패시던 손으로
무밭에 두엄을 내시던
손으로
아버지는
외양간 기둥에
등불을 걸고
무릎을 꿇고
송아지를 받았다.
뿌우연 등불 아래
땀을 훔치며 나오는
아버지의 험한 손이
예쁘고
귀여운 송아지를 받았다.
권영상 시 -『아버지의 손』전문
이렇게 존칭어를 빼면 시가 무리 없이 읽힌다. 대상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해서 존칭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글을 써서 그 대상에게 바치는 글이 아니라면 객관성을 회복하고 존칭을 생략해야 한다.
4) 문장부호를 쓰지 않는다
시에서 문장부호의 사용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동안 작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나는 문장부호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쓰지 않는다. 문장부호의 남발이 시의 긴축미를 떨어뜨리고 너저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족 나들이 간
나비박물관에서
표본을 찬찬히 보시던
엄마.
“어쩜......여기도 너 있네!”
넌 이름이 그게 뭐니?
창피하게.
엄마가 호호
아빠가 푸하하!
오지연 동시 -『떠들썩 팔랑나비』전문
시에서 되도록 문장부호를 삼가고 어쩔 수 없이 써야한다면 철저하게 써야 한다.
위의 시를 보면, 2연에서 ‘어쩜......여기도 너 있네!’에서 말줄임표를 마침표 온점으로 찍는 오류를 범했다. 2연에는 대화 글에 큰따옴표를 쓰고 3연에는 아예 쓰지 않았다. 그리고 ‘창피하게.’는 온점대신 느낌표를 찍어야 마땅하다. 4연에서도 ‘아빠가 푸하하!’는 느낌표를 찍고 ‘엄마가 호호’에서는 찍지 않았다.
이 시를 보면 문자부호로 인하여 시가 너저분하게 보인다. 시를 빚으면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외형적 형태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특히 문장부호는 웬만하면 쓰지 말고 꼭 써야한다면 완벽하게 써야함을 잊지말아야 한다.
5) 의인화는 끝까지 한다.
시의 소재를 찾는 방법 중에 사물에게 말 걸기를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사물을 의인화하는 것이다.
의인화 작법은 특히 동시에서 많다. 의인화를 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의인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릉숲에 들어서면
푸른 갑옷을 두르고
팔도강산에서 모여든
어기찬 아저씨들을 만난다.
임꺽정의 필뚝 같은 나무
김정호의 다리 같은 나무
활대 잡은 충무공처럼 훤칠한 나무
임진왜란의 의병들이 튀어나오고
동학의 장정들이 걸어 나오고
솔잎수염이 따끔따끔 침을 찌르던
청산리 싸움의 독립군을 만난다.
비바람을 맞으면 더 푸른 나무
눈보라 휘몰아치면 더 곧게 서서
피리 부는 나무.
광릉숲에 들어서면
웃자란 내 몸도
한 그루 옹이 박힌 나무가 된다.
서재환 동시 -『광릉숲에서』전문
이 시를 보면 의인화를 했지만 부분적 의인화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1연은 나무를 사람으로 의인화해서 보았다. 2연은 나무 그 자체로 보았다. 3연은 또 나무를 사람으로 보았다. 4연은 또 나무 그 자체로 보았다.
그래서 이 시는 소재가 나무와 사람 둘이다. 의인화란 일단 나무를 사람으로 보았으면 끝까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무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하는 식으로 둔갑을 부리면 그것은 의인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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