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눈, 멀리 보는 눈 -문태준의 시들을 중심으로
1.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전문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따스하게 읽히는 것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들의 <파랑 같은> 삶을 긍정하고 포용하고 있기에 점점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 안쪽에 두 눈이 달려 있는 <가재미>의 눈은 작지만 멀리까지 내다본다는 휴머니즘의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의 한 특성은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과거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고 현재에 보다 관심을 둔다. 자본주의는 과거에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도 각종 사건에 대해서도 전염병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미래에 일어날 환경오염에 대해서도 인구문제에 대해서도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대신 오늘, 어떻게, 최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만약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회사의 사장이 미래를 내다본다고 단기간 내에 이익을 남기지 않는 경영을 했다면 그 사장은 주주들로부터 당연히 해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장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투자보다도 현재의 이익에 지식과 정보와 전략을 투자하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근시안과는 대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의 시간은 현재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연결되어 있어 멀기만 한 것이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시인은 <그녀>의 오솔길과 뻐꾸기 소리를, 가는 국수를 삼던 저녁을,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까지 생각하고 있다. 현재는 그 과거의 토대 위에 성립되어 있어,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는 상황이나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라는 인식이 그러하다. 이러한 시인의 눈길은 미래의 상황까지, 즉 <그녀>의 <죽음> 상황까지 내다본다. 그리하여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라는 상황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숙연함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이 시인의 원시안에는 자본주의의 속도가 들어 있지 않다. 앞으로 앞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달려가는 자동차와 같은 자본주의의 속도는 없고 가난하지만 삶의 무게를 지니고 한발씩 걸어간 한 인간의 발자국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재미」에는 인간의 유대감이 들어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대신하는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는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라는 시인의 행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의 상황에서는 한층 더 결속력과 친밀감이 느껴져 강한 휴머니즘을 갖는다.
자본주의의 근시안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최대한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탐욕을 드러내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고 대출이자율을 높인다.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이익을 내려고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제1원칙이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의 분배에 대한 불균형은 문제 삼지 않고 적자생존의 원칙만 내세우고 적용한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그와 같은 자본주의의 상황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원시안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2.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뛰어난 점은 시 형식의 면에도 있는데, 우선 좋은 비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 같다는 비유가 그 단적인 모습인데,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에 이르러서는 좋은 비유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이 구사하는 좋은 비유는 2003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시인 및 평론가들이 가장 좋은 작품으로 선정한 「맨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전문
어물전에 있는 <개조개>가 바깥으로 몸을 내보인 모습을 <맨발>로 비유하고 있는 작품인데, 그 세계인식은 깊고도 넓다. 시인은 부처와 그의 제자 迦葉과의 깨달음을 담은 槨示雙趺를 인유한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을 비롯하여 <내가 조문하듯>,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등의 비유를 통해 힘든 삶이지만 품고 나아가야 하는 우주 만물의 운명을 잘 그리고 있다.
비유는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구별된다고 여기는 대상들로부터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인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편리나 편견에 의해 이 세계의 대상들은 배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서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비유는 조화의 추구이고 대립적인 대상들을 포용함이다. 따라서 비유에는 자본주의의 속도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3.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형식적인 면에서 뛰어난 또 다른 점은 작품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고 있는 詩行의 사용에 있다. 시인의 리듬인 시행이 독자의 리듬인 律行보다 길기 때문에 시는 장중하고 사색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체 인식과 멀리 내다보는 눈길은 느리지만 길기만 하다. 만약 「가재미」의 시행이 지금보다 짧았다면 인간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그 힘든 노정에 대한 사유의 깊이는 훨씬 감소되었을 것이다.
파운드(E.Pound)가 정의했듯이 현대시는 논리시(logopoeia)의 성격을 갖는다. 논리시는 음악성을 통하여 직접 호소력을 지니는 음악시(melopoeia)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회화시(phanopoeia)보다 언어의 이지적인 면을 중시한다. 고도로 전문화되고 다양하고 급변하는 이 자본주의 시대를 음악이나 시각의 차원으로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자세로 시의 대상들을 담아내야 하는데 작품의 주제를 살리는 시행의 사용도 그 일환이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좋은 비유와 아울러 적절한 시행의 구사로 인해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을 무게 있게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자본주의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4.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전문
문태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은 시적 자아가 이 세계와 동화(同化)되어 있다는 면에서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자아가 이 세계의 대상들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 이어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그와 같은 인식의 표상이 "그늘"이며 "그림자"라는 점이 주목된다. 세속적인 삶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나 정신주의 시와는 다르게 이 세계를 내적 체험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늘"이며 "그림자"는 "촌로"와 같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이발사며, 그들의 "주름"과 "쓸쓸함"(슬픔, 서글픔, 서러움), 그리고 "저녁(밤)"과 동일체를 이루고 있다. 선택의 거리가 발견되지 않을 만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늘과 그림자는 촌로며 주름살이며 쓸쓸함이며 저녁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유기관계의 존재로서 서로는 서로를 낳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작품들은 이 세계의 대상들을 포용해서 단순한 총합 이상의 의미를 낳는다.
위의 작품에서 시인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인 "산수유나무가" 틔운 "노란 꽃"이 아니라 "산수유나무"의 "그늘"에 있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그 "그늘"의 이미지와 색감과 정감의 세계로 기울지 않고 있다. 시인은 밝음과 어둠, 하늘과 땅, 높음과 낮음, 육체와 마음, 좁음과 넓음 같은 이분법으로 산수유나무의 본령을 구분 지어 파악하지 않고 결합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라거나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라고 의인화한 것이 그 모습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산수유나무를 "그늘"과 "노란 꽃(좁쌀)"이 동일화되어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와 같은 모습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암내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이제서는 수령이 꽤나 되어서 깊은 그늘을 데리고 사는 감나무 터가 말하자면/아버지가 찾던 우물 자리였는데(「우물이 있던 자리」)
깊게 파인 눈두덩 같은/살구나무 그늘이며 깊은 못가를 지나갑니다/당신을 위해 상여를 멈추었다 갑니다/죽음은 달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젖을 듯 말 듯 산그림자 속으로 당신은 잠기어갑니다(「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
갈참나무의 그림자들이 비탈로 쏟아지고 있다(「그림자와 나무」)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따오기」)
빛보다 그림자로 더 오래 살아온 것들이 내 눈 속에 붐벼(「반딧불이에게」)
저 멀리서 밀려오는 산그림자를 마중 나가본 지도.(「봄날 지나쳐간 산집」)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나무다리 위에서」)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밑줄은 필자가 친 것임)
들고양이가 우는 아가의 소리를 업고 집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살구나무의 그늘이 눈두덩 같다,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다, 갈참나무의 그림자가 비탈에 쏟아지고 있다, 물고기들이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간다 등은 시인이 이 세계의 대상들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맨발』에는 촌로와 그들의 주름살이며 슬픔이며 그리움이며 그리고 어두워지는 저녁이 깊은 우물처럼 짙지만 결코 암울하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희망적이거나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이 세계의 대상들과 함께하기에 따스하고 넉넉한 것이다.
5.
『맨발』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은 시적 대상들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서정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세계의 대상들을 서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간의 결정체(結晶體)로 품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비가 오려 할 때」 전문
위의 작품에서 서사적인 모습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서사를 이루기 위한 플롯도 등장인물도 드러나지 않고 "비가 오려 할 때"의 상황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순간의 정경, 순간의 인물, 순간의 행동, 순간의 정서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시인은 그 순간으로 영원함을 추구하고 있다. 시간의 가치를 연속적인 차원에 두지 않고 또한 영원이란 현재로부터 먼 거리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찰나의 지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려 할 때"의 순간들은 무게를 지닌다.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의 상황은 분량보다 무거운 것이다. 이는 이 세계 전체를 간파할 수 없으므로 한 순간을 최대한 품겠다는 시인의 솔직하면서도 적극적인 세계인식의 모습이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한 호흡이라 부르"(「한 호흡」)는 것이다.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역전 이발」 전문
"역전 이발"이라는 한 공간에 시인의 많은 체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현재라는 시인의 의식 속에 수많은 과거의 체험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상황이 줄거리로써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는 이미지로써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의 "역전 이발"에 대한 추억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리움의 촉수를 그곳에 뻗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인연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곳의 역전 이발소와 곱사등이 이발사를 현재 의식에 담고 있어,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나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한 순간이 따스한 추억으로 빛난다. 손님과 곱사등이 이발사, 마른 모래와 한 송이 꽃, 흐린 물빛과 공중의 향기 등이 합일되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살내를 풍기는 것이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맨발」), "매미의 뱃가죽보다 많이 주름진 그 소리들을 사랑하였다"(「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작은 다리 아래서 뱀의 차가운 허물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동천(東天」),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같이 아플 때/머위잎처럼 품어주던,/몸에서는 가뭄 끝 개울 물비린내 나던 고모"(「화령 고모」)와 같은 비유와 의인화되어 있는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성숙한 인간 정신으로 이 세계의 그늘이며 그림자를 가족처럼 고우처럼 그리고 동지처럼 품고 있는 것이다.
* 맹문재 (시인/평론가/안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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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1950∼ )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 어둠 속에 있어 보아야 한다. 둘, 추위를 알아야 한다. 셋, 우러러 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아주 추운 어둠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런 온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가난했고, 죽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고, 절망할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별’이 있었다.
이 발견은 시인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하늘에서 어떤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하고 찬란한 눈빛이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시인은 어둠과 추위를 극복하게 된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시인은 외로움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정호승은 따뜻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추운 날,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핫팩과도 같다. 핫팩은 작지만 우리 손을 녹여 줄 수 있다. 손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놓인다. 추운 시간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오늘은 이 따뜻한 시를 꺼내, 당신의 찬 손에 쥐여 주고 싶다. 지금은 별이 없는 시대, 별이 가능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대. 별을 진짜 보았다는, 시인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손을 녹여 보자. 주머니 속의 온기가 하늘의 별이 되는 기적을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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