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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천재 화가 반 고흐의 귀는 왜 누가 잘랐을까?...
2017년 01월 02일 02시 05분  조회:7684  추천:0  작성자: 죽림

천재 화가 반 고흐의 귀는 왜 누가 잘랐을까?

/이미지봉합수술흉터


 

고갱과 고흐는 아를에서 그림생활을 같이 했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견해가든가 성격면에서 종종 충돌했다고 합니다. 둘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고갱이 아를에 온지 두 달정도가 되었을 때 고흐는 밀레처럼 자연 속에서 그림이 나온다고 보았지만, 고갱은 그건 창의성 없는 그림이라며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고갱이나 고흐 둘 다 자존심이 굉장한 사람들이었기에 부딪혔다. 어느날, 고흐가 해바라기 그리는 모습을 고갱이 그렸고 그 그림을 본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한다는 생각에 크게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집에서 고갱에게 술잔을 집어 던졌고, 크리스마스 즈음 기분 상한 고갱은 그길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고흐와 싸우던 고갱이 고흐 귀를 잘랐을 것이라고도 말 합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고흐가 고갱에게 보낸 서신 중 일부에서 그런 암시가 담긴 내용이 있다. ('너는 침묵하고 있구나. 나도 그럴 것이다.')


사건 전말을 보면 고갱은 저녁식사 후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고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들려고 했는데, 그래서 고갱은 고흐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고흐는 달아나 버렸다고 고갱이 남긴 기록이 있다. 그 일 직후 고흐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귀를 자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갱과의 충돌로 인해서 그가 아를을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반발, 혹은 고갱이 떠남으로써 자신이 아를에서 실현 하고자 했던 화가 공동체의 꿈이 깨지는 것에 대한 실망으로 보통 추측한다.


요양원 담당의의 기록에서는 반 고흐는 눈과 귀의 갑작스러운 환각으로 심한 정신 착란의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였고 발작 동안에 왼쪽 귀를 절단했다고 기술 되어있다. 보통 정신장애자가 자해를 하는 경우는 환각에 의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고흐가 그 환청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제거해 버리기 위해 귀를 자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있기 몇일전에는 "아를 투우장의 관중"이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헌데 투우경기에서는 투우사가 소를 쓰러뜨리면 그 승리의 댓가로 쓰러진 소의 귀를 잘라 준다고 하는 군요. 투우사는 그것을 관중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친다. 투우장의 관습을 고려함과 동시에 고흐가 귀를 자른 후에 그것을 알고 지내던 창녀에게 준 기록으로 추측해보면 고흐가 투우장의 쓰러진 소와 승리의 투우사 두 가지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대 해석 하자면 고갱과의 충돌에서 승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정신적 착란과 함께하여 일어난 결과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고흐의 잘린 귀는 자화상에서도 그려지는데 본인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여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KBS의 명작스캔들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바람에 무섭게 흔들리는 밀밭,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 같은 검푸른 하늘,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불길한 까마귀가 있는<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그림이 그의 유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한다. 밀밭은 곧 추수를 앞두고 있어서 추수란 곡식으로 말하면 수확당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추수란 낫으로 자신의 몸이 베어지는 과정을 담는 것이란 학설이 제기되었다.


요즘에는 워낙 미세접합수술이 발달해서 잘라져도 곧 얼음등에 보존해서 가져오면 붙이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수술후에 수쳐라 불리는 봉합수술자국등의 흉터는 남게 된다. 이미지한의원에서 만약 고호가 지금 살아서 접합수술을 마쳤다면 ST침으로 흉터 제거수술을 받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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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전 오베르 쉬르 와즈

 

124년 전인 1890년 7월27일 파리 북쪽 전원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sur-Oise). 긴 여름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빈센트 반 고흐가 허리를 숙인 채 숙소인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신경쇠약에 걸린 반 고흐는 그해 5월20일 조용히 요양할 곳을 찾아 이 시골 2층짜리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하루 한 점씩 그릴 정도로 왕성하게 캔버스를 채워 나갔다.
 
 

“괜찮으냐”는 주인 라부씨의 물음에 반 고흐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걱정이 된 라부씨가 뒤따랐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반 고흐는 그제야 팔을 들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총탄이 박힌 그의 복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죽으려고 했어요.” 반 고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고 라부씨에게 담배 파이프를 청했다.

 

총알은 심장 아래를 지나 척추에 박혀 있었다. 이튿날 외과의사가 왔지만, 총알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동생 테오도 달려왔다. 반 고흐는 상태가 잠시 호전되는 듯했지만, 또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29일 새벽 서른일곱의 불꽃 같은 삶을 마감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누가 반 고흐를 죽였는가?

 

많은 명작 중 반 고흐의 작품이 유난히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면, 비단 작품 속 해바라기의 노란색과 소용돌이 같은 붓 터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귀를 잘라 낸 광기(狂氣), 생전의 가난과 불우함이 그림에 중첩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그렇게 스스로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전시회가 지금 파리에서 열리고 있다. 오르세미술관 1층에 마련된 ‘반 고흐/아르토, 사회적 자살’이라는 제목의 특별전(2014년 7월6일까지)이다.

 

이번 전시엔 반 고흐의 대표작 55점이 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반 고흐의 자화상 4점을 만나게 된다. 오르세 소장품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의 국립미술관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있던 작품도 한자리에 모였다. 이어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가셰 박사의 초상’ ‘아를의 무도회장’…. 관람객들은 숨소리를 죽인 채 작품 앞에서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뒤집힌 게’와 ‘낡은 구두 한 켤레’ 등 평소 잘 볼 수 없었던 작품도 만나는 기회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이 전시의 또 다른 주인공은 프랑스 시인 겸 극작가인 앙토넹 아르토(Artaud·1896~1948년). 시대를 뛰어넘은 반 고흐와 아르토의 인연은 1947년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특별전에서 시작됐다. 이번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에는 1947년 전시에 나왔던 반 고흐의 작품 대부분이 선보이고 있다. 반 고흐의 이렇게 많은 작품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유럽에서도 드문 일이다.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67년 만의 전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당시 전시 기획자였던 피에르 뤠브는 아르토에게 반 고흐에 대한 비평을 부탁했다. 당시 비평을 아르토에게 맡긴 이유가 있다. 아르토는 당시 정신병원에서 약 10년간 치료를 받다가 1년 전 퇴원한 상태였다. 이런 배경의 아르토가 ‘자살한 미친 화가’라는 평가에 묻혀 있던 반 고흐의 진가를 드러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때 아르토가 쓴 책이 ‘반 고흐, 사회적 자살’이었다.

 

이 책에서 아르토는 ‘누가 반 고흐를 죽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반 고흐는 건전하고 따뜻한 정신세계를 가진 천재였지만, 사회가 이런 반 고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자살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8)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8)
 
 
 
네덜란드 태생의 반 고흐는 어릴 적부터 사색적이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화가가 되기 전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촌에 갔다. 광부의 삶을 직접 느끼겠다며 좁은 움막에서 살고 막장까지 들어가 석탄을 캐던 반 고흐를 사람들은 미친 사람처럼 취급했다. 반 고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이런 신념을 정작 주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
 
 

아르토는 “반 고흐의 건전하고 우월한 정신세계를 인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반 고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우리 사회라는 결론이다. 아르토는 특히 반 고흐의 후원자로 알려진 ‘가셰 박사의 초상’ 모델인 가셰 의사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의사로서 반 고흐의 정신병이 악화하는 것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것이다.

 

반 고흐 타살설도 나돌아

 

아르토도 반 고흐가 자살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반 고흐가 타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 작가인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반 고흐의 편지 수천건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해 “반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내용의 책을 2011년 내놓았다.

 

네이페는 “자살했다면 총알의 각도가 비스듬하지 않고 직선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또 반 고흐가 정신병을 앓고 있어 실제 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네이페가 반 고흐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이 당시 오베르 쉬르 와즈에 살던 16살의 렌 세크레탕 형제다. 세크레탕은 1956년 인터뷰에서 “빈센트에게 과일을 집어던지고 물감 통에 뱀을 넣는 등 괴롭힌 적이 있다”고 밝혔다. 물론 세크레탕은 자신들이 반 고흐에 총을 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이페는 “세크레탕 형제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우발적으로 발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당시 어차피 자살을 생각하던 반 고흐는 어린 소년들을 감싸기 위해 이 같은 사실을 숨기고 스스로 총을 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친구 폴 고갱의 자화상
반 고흐의 친구 폴 고갱의 자화상
 
 
 
또 반 고흐가 귀를 스스로 잘랐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에 머물던 반 고흐는 친구인 화가 폴 고갱을 초대해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미술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두 사람은 크게 다퉜다. 고갱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반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잘랐다. 그리고 그것을 평소 알던 창녀에게 주며 “이 오브제를 잘 간직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독일 역사학자인 한스 카우프만은 “사실은 다투는 과정에서 고갱이 반 고흐의 귓불을 잘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 고흐가 친구인 고갱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살 장소가 그림(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인 밀밭이 맞는지, 당시 사용된 총은 어디로 갔는지, 왜 유서를 남기지 않았는지 등 대중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오베르 쉬르 와즈의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반 고흐는 말이 없으니, 해답을 찾을 길도 없다. 전시를 보고 나면, 혹시 지금도 우리 사회가 품지 못한 어떤 천재가 몸을 웅크리고 어디선가 괴로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성훈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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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

 

천재와 외로움, 고독, 우울증...자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천재성을 띤 인간의 뇌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어 창작/연구활동을 자극하고, 

이것이 인류 발전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했다면,

그 대신 그 천재는 그 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면. 

 

그래도 인류의 수레바퀴는 굴러가야 했어야 하는 걸까요 .

 

 

 

인상파 화가의 대표주자로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리는 붓터치로

유명한, 그리고 정신분열증으로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알려진 고흐.

고흐의 대표작품으로는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귀를 자른 후에 그린 자화상 속에 반 고흐는

슬프고 외로워 보인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자신의 귀를 왜 잘랐는지는

오랫동안 미술계의 논쟁거리였다.

정신병설(說), 물감에 함유된 납 중독설, 친구 고갱과의 불화설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곤 했다.

 

27일 영국 일간 선데이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고흐 연구자인 마틴 베일리는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한 달 후 완성한 `양파가 있는 정물'을 정밀 분석,

그가 평소 의지하던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에 좌절한 나머지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그려져 있다.

동생 테오가 1888년 12월 자신의 약혼 소식을 전하고자 파리에서 이 편지를 보냈고,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고흐는 편지 내용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게 베일리의 추정이다.

베일리는 작품에 그려진 편지봉투를 현미경으로 살펴본 바로는 봉투 위에 숫자 '67'이 적혀 있었다고 밝혔다.

67은 테오가 살던 파리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아베스 광장 우체국의 공식 표기다.

이 봉투에는 `새해(New Year's Day)'라는 특별한 표시도 찍혀 있다.

 

 

 

 

파리 우편박물관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에는 12월 중순부터 편지봉투에 이런 표시가 찍혔다.

베일리는 작품 속 편지에 테오가 애인 요한나 봉어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12월21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 허락을 구한 테오는 뒤이어 형 빈센트에게도

이 소식을 틀림없이 전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테오는 형 빈센트가 금전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크게 기대던 동생이었다.

고흐에게는 이 편지가 무척이나 큰 의미를 띠었기 때문에

그가 의도적으로 편지봉투를 작품에 끼워넣었다는 것이 베일리의 결론이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 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였던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 램스케이트로 건너갔다.

그는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 활동을 하였으며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였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되었다.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화가,

역사인물 출생-사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 1890년 7월 30일

경력 1890.01 브뤼셀 그림 전시 
1880 브뤼셀 미술학교 입학 
1879 바스메스 부목사 
1877 서점 근무

...

 

 

 

 

 

 

 

빈센트반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자 충실한 지지자에, 재정적 지원자로 알려져있는데요. 이러한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상실감과 소외감 그리고 재정적 지원을 못받게 될 수도 있는 불안감으로 귀를 잘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는, 동료 화가 풀 고갱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비판을 들은 후 분노해 자기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베일리 '남쪽의 화실: 프로방스의 반 고흐'의 저서에 따르면 "태오의 약혼 소식이 귀를 자른 근본적인 이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파괴정인 행동을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베일리는 반고흐 미술관 기록보관서에 있는 고흐 주변의 서신들을 조사했는데, 그결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를 1888년 12월23일에 동생한테 약혼통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냈습니자. 문제의 편지 자체는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그림'양파가 있는 정물'을 보면 동생의 편지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흐에게 동생의 편지가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양파가있는정물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에서는 고흐가 자해를 한 이후에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받았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고흐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귀를 자른 것은 소음을 꺼보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는 다른 가설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올해초에는 고흐의 잘라진 귀를 받은 여성이 창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연구결과 새로확인되기도 했는데요,

동생테오는 이듬해 약혼녀와 결혼했지만, 형 빈센트가 자살한 반년뒤 사망한것으로보아 두 형제는 평생 동반자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손끝뉴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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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빈센트반고흐 귀를 자른 이유?|작성자 아프로티켓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이 ‘방아쇠’였다는 주장 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사진=BBC 동영상 캡처)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678042#csidx1589c437420bde7b1718a92a5bf32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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