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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계 팝아트 제왕 - 앤 디워홀
2017년 01월 28일 23시 08분  조회:5328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928년경
사망일 1987년 02월 22일
국적 미국
대표작 〈캠벨 수프 통조림〉, 〈2달러 지폐들〉, 영화 〈첼시의 소녀들〉 등

매스미디어에서 소재를 찾아 작품을 대량 생산하면서 미술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그저 언제나 내게 아름다워 보이던 것들,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매일같이 쓰고 있던 물건들을 그린 것뿐이다.”

미술계 최초의 팝스타,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된 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 그는 캠벨 수프, 코카콜라,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등 등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들을 모티프로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는 대량 소비 사회의 일상적 오브제들을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며, 실크 스크린, 스텐실, 에피스코프, 데칼코마니 같은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대량 생산하면서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런 시도들에 담긴 함의는 포스트모던 미술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워홀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로 꼽힌다.

워홀은 1928년경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본명을 앤드류 워홀라이다. 아버지는 석탄 광산에서 일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로, 그가 14세 무렵 오염된 물 때문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런 가정환경은 후일 워홀을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으로 만들었으며, 워홀은 여기에 몇 가지 소문을 더하여 인생 내력을 포장해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는 개인적인 내력을 모두 감추거나 부정했는데, 출생증명서가 위조라고 주장할 만큼 객관적인 기록조차 모두 부정했다. 그는 사생활을 지키고자 무척 신경을 썼으나, 이 역시 단순한 사생활 보호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신비화 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워홀은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1949년 뉴욕으로 올라와 잡지 일러스트레이터 및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1950년대 〈보그〉, 〈하퍼스 바자〉 등의 잡지와 광고에 삽화를 그렸으며, 아트 디렉터로 각종 상업 광고물을 제작했다. 그는 아트 디렉터 클럽 어워드, 아트 디렉터 클럽 메달 등을 수상하고, 뉴욕 현대미술관의 〈최근의 드로잉, 미국〉 전에 초청되었다. 또한 〈라이프〉 지도 그의 삽화들을 출판하는 등 젊은 나이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워홀은 늘 ‘위대한 예술가’로 성공하기를 꿈꿨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때도 그는 미래의 예술적 행보를 꿈꾸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령 그는 자신의 진지한 성격과 취향을 백치미가 넘치는 백금발의 가녀린 외모 뒤에 숨겼으며(이는 그가 숭배했던 마릴린 먼로가 스타가 된 행보와 유사하다), 옷차림과 장신구에 무척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50년대 말, 워홀은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광고와 뉴스 표제 기사, 연재 만화 등 매스미디어에서 소재를 찾았다. 그리고 1960년대 초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만화 속 인물에 대한 연작을 제작하면서 팝아트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대중 만화와 광고에서 소재를 찾은 아티스트들은 여럿 있었다. 또한 워홀의 작품 제작 방식 역시 당대의 다른 팝아트 작가들을 모방하여 대량 생산된 이미지에 물감을 뭉개거나 흘린 것으로 신선하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때만 해도 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제재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 로이 릭턴스타인의 작품을 보고 대중 만화를 모티프로 삼기를 포기했다. 곧 그는 일상적인 소비재, 달러 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제재로 삼았으며, 기법도 실크 스크린으로 바꾸었다.

1962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 〈2달러 지폐들〉을 실크 스크린 기법을 사용해 제작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비 사회의 물품들에서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스틸 사진을 잘라 다양한 크기에 다양한 색깔을 입혀 대량으로 복제했다. 워홀은 인물의 내면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초상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산물, 그 자체로 보였다.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마릴린 먼로〉가 담긴 우표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마릴린 먼로〉가 담긴 우표

또한 이 시기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비행기 추락사고)〉, 〈피로 물든 인종 폭동〉과 같이 신문의 보도사진을 활용한 실크 스크린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사진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사건’이 지닌 비극성과 진실을 보여 주는 대신 회화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로만 기능했다. 그럼으로써 워홀은 실제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에 존재하는 취약성을 그대로 폭로했다.

그런 한편 사형 제도를 고찰하게 하는 전기의자 연작들과 케네디 대통령 저격 사건 직후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를 복제하면서 시대 상황 및 그에 대한 함의를 담은 작품도 제작했다. 워홀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영부인에서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들은 그 어떤 보도사진보다 대중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1962년, 워홀은 후일 ‘팩토리’라고 불리는 다락방을 임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듯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미지화하여 작업실에 팩토리라는 이름을 붙였고 실제로 그는 ‘아트 워커’를 고용해 작품을 대량 복제했다. 이곳에서 그해부터 2년간 약 2천 점이 넘는 작품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팩토리는 단순히 작업실이 아니라 사교의 장소이자 워홀의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워홀은 믹 재거, 트루먼 카포티, 에디 세즈윅 등과 함께 머물렀고,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 당대의 유명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이곳은 당대 예술 현장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작업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워홀은 1963년 팩토리에서 전위 영화 〈잠〉과 〈엠파이어〉를 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75편의 영화를 만드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관심만큼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린 나머지 1965년에는 영화 제작에 몰두하기 위해 회화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그러나 실제로 그가 회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가 만든 영화는 총 250여 편에 달하며, 그중에는 〈첼시의 소녀들〉과 같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도 있다. 또한 1965년에는 전위 음악을 하는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프로듀싱과 재킷 디자인을 했다.

앤디 워홀과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앤디 워홀과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1968년, 워홀은 팩토리에서 작업하던 중 직원이었던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저격당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솔라나스는 “그가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저격 이유를 밝혔다. 워홀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 〈해골〉을 만들었으며, 이 사건으로 팩토리는 더욱 유명세를 탔다.

1970년, 〈라이프〉 지는 워홀을 비틀스와 함께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1970년대에 워홀은 미술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다. 또한 유명인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했으며, 닉슨의 중국 방문에 맞춰 〈마오〉 연작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는 카무플라주 패턴을 활용한 〈요셉 보이스〉, 심리학자 헤르만 로르샤흐가 개발한 심리 테스트용 형상에서 모티프를 얻어 얼룩을 활용한 추상 작품 〈로르샤흐〉를 제작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또한 1972년부터 시작한 〈마오〉 연작에서는 실크 스크린으로 작업한 뒤 수작업으로 표현한 부분을 강조했는데, 이런 경향은 1980년대에 더욱 심화되어 〈르네상스 회화의 부분〉 연작처럼 캔버스에 아크릴이라는 정통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워홀은 도발적인 멋쟁이, 팝아트의 제왕, 최초의 예술가 스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도발적인 삶을 살았다. 총격 사건 때도 두 달간의 투쟁 끝에 살아난 그였으나, 죽음은 생각보다 어이없이 찾아왔다. 1987년 2월 21일, 워홀은 뉴욕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워홀은 다음 날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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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928년
사망일 1987년
 
앤디 워홀
앤디 워홀

미국 팝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 산업 디자이너로 미술계에 발을 들인 후 예술가로 큰 명성을 쌓았다. 도발적인 주제와 혁신적인 제작 기법, 파격적인 언행으로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으며 예술을 지나치게 상업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회화뿐만 아니라 출판, 영화, 사진,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며, 미국 문화 특히, 물질 만능주의와 관련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1928년 미국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창의적인 기질을 보였으나 몸이 약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주로 라디오를 듣거나 대중문화 잡지의 사진을 모으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교육을 받을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으나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남긴 돈으로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 입학하여 산업 미술을 공부했다. 1949년 뉴욕으로 건너와 1950년대에는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 제작 일을 했고 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업 미술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준비에도 착수했다.

1952년 드로잉 작품 15점으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몇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을 때 접한 재스퍼 존스나 라우션버그 등 떠오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만화나 광고에서 이미지를 차용하여 붓 터치를 노출하는 등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점차 작가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1961년 캠벨 수프 이미지를 사용한 작품을 처음 만들었고 1962년에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작품 제작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전시한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매릴린 두 폭〉, 〈100개의 수프캔〉, 〈100개의 코카콜라 병〉, 〈1달러 지폐 200장〉 등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을 선보이며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대량 생산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을 넘어서 작품 자체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코카콜라, 캠벨 수프와 같은 기성품 외에도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작하면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로 대표되는 미국 자본주의를 보여 주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수록된 〈1달러 지폐 200장〉과 같은 그림을 그려서 과열된 미술 시장을 조롱하기도 했다.

1964년 작업실이 있던 건물이 철거되면서 새로 작업실을 구했다. 그는 이 작업실에 ‘공장(The Factory)’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업을 도와줄 사람들을 고용하여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업실은 당대 지식인들, 극작가, 할리우드 스타, 후원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는 사교장이기도 했다. 그는 회화 작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영화 작업에 애착이 컸다. 1965년에는 회화를 그만두고 영화 작업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선언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1963년부터 1976년까지 약 60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중에는 상영시간이 24시간 되는 것도 있었다.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게 유명하다 보니 여러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1968년에는 작업실에서 어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쏜 총에 맞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던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가 나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워홀은 폐, 위, 식도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총상 후유증에 시달렸다.

1970년대 이후 뉴욕 상류층과도 밀접하게 교류했던 그는 부유한 고객들의 의뢰를 받고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했다. 고객 명단에는 이란 팔레비 왕가를 비롯해 존 레논, 다이애나 로스, 브리지트 바르도 등이 있었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1970년 비틀즈와 함께 〈라이프〉가 선정한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다시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특히 장-미쉘 바스키아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워홀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누구나 알만한 상업적 이미지를 예술 작품으로 바꾼 그의 작품들은 예술의 정의를 바꿔 버릴 만큼 파격적이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조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컴퓨터를 이용한 예술을 시도하기도 했고, 《앤디 워홀의 철학》, 《팝피즘 : 앤디 워홀의 60년대》라는 책을 쓰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특히 성소수자의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팝아트의 교황’, ‘팝의 디바’라고 불리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축을 형성했고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늘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한편으로 예술을 지나치게 상업화하는 ‘비즈니스 아티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1987년 2월 22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뒤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당시 쉰여덟 살이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피츠버그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설립되었는데,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는 미국 최대로 알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10위. 〈실버 카 크래시(이중 참사)〉
• 13위. 〈여덟 개의 엘비스〉
• 23위. 〈청록색 매릴린〉
• 30위. 〈그린 카 크래시(녹색의 불타는 자동차 I)〉
• 42위. 〈그녀의 남자들〉
• 43위. 〈인종 폭동〉
• 50위. 〈코카콜라(3)〉
• 80위. 〈1달러 지폐 200장〉
• 82위. 〈자유의 여신상〉
• 93위. 〈흰색 매릴린〉
• 순위 외. 〈자화상〉
• 순위 외. 〈더블 엘비스〉


 

앤디 워홀의 무덤
앤디 워홀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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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특집 세 번째 시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9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오늘 소개하는 대표작 외에도 대표작의 범주에 포함해야할 작품들도 있겠지만, 가급적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앤디 워홀 라이브'를 관람한다면, 이 작품들만큼은 보고 넘어가자는 기준에서 선정했다. 이번 글에서는 작품에 대한 얘기인만큼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에 충실하여 소개한다.
 
 
 캠벨 수프 캔
Campbell's Soup Cans, 1968

캠벨 수프 캔(Campbell's Soup I), 1968 @ 앤디 워홀 라이브
 
먼저 위의 사진을 통해 작품을 감상해보기 바란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에게~ 이게 뭐야? 이게 예술이야? 그럴 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지점이다. 캠벨 수프는 미국에서만 한 해에 100억 개 이상이 팔리는 대량 생산품이다. 국내로 치자면 참치 캔이나 꽁치 통조림만큼 대중에게 친숙한 제품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연작을 보면 상품과 예술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것이 이 캠펠 수프 캔 연작이 가지는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앤디 워홀은 본인 스스로가 상업 미술가에서 비즈니스 미술가가 되고저 했던 이였다.(이에 대해서는 앤디 워홀 특집 마지막편인 명언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가 왜 캠벨 수프 캔을 대상으로 했을까? 만약 당신이 즐겨 먹는 식품 혹은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들이 예술 작품에 나왔다고 하면 적어도 예술을 모르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작품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고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처럼 앤디 워홀은 대중의 심리를 잘 간파하여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능했다.
 
캠벨 수프 캔은 내용물에 따라 32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는 이 모두를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이 제작한다.(원래 1962년 처음에는 손으로 그렸지만 1968년 연작에서는 종이에 스크린 프린트를 하여 제작한다. 위의 사진 속 전시된 연작은 이렇게 제작된 1968년 연작이다.) 게다가 전시를 할 때도 연작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함께 전시함으로써 마치 마트에 상품이 진열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릴린
Marilyn, 1967

마릴린 연작(Marilyn), 1967 @ 앤디 워홀 라이브
 
'마릴린'은 앤디 워홀의 작품 중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사진을 활용한 실크 스크린 작품 중에 가장 첫 번째 작품이다. 캠벨 수프 캔 연작에서 보았듯, 앤디 워홀은 대중의 심리를 잘 간파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런 면을 잘 엿볼 수 있다. 그가 실크 스크린 기법을 시험하던 1962년 마릴린 먼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길로 마릴린 먼로가 <나이아가라>란 영화를 찍기 위해 촬영한 사진을 폭스 스튜디오에서 구매해와서 그 사진 속의 마릴린 먼로를 토대로 작품을 제작한 것. 비즈니스 미술가답다.
 
알록달록한 색상들의 부조화가 돋보이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은 앤디 워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거 어디서 봤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앤디 워홀은 화려한 것들 그러니까 유명인사나 아름다움이란 주제에 집착했었는데,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이는 1960년대 말 '죽음과 재앙' 연작을 통해서 선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합일이 되는 게 바로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었던 것. 그의 수많은 연작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바로 '마릴린'이다.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 이외에도 많은 영화배우의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그 중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있다. 이 중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경우, <클레오파트라>에 캐스팅되면서 당시로는 최고의 금액인 1백만 달러 개런티 기사를 접하고 제작했다. 역시 비즈니스 미술가 앤디 워홀다운 면이 아닐 수 없다.
 
 
마오
Mao, 1973

마오(Mao), 1973 앤디 워홀 라이브
 
'마릴린' 연작이 영화배우 초상화 중에 대표작이라면, '마오' 연작은 정치인 초상화 중에 눈에 띄는 작품이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소식을 접하고, 중국인들 모두가 갖고 있다는 '마오쩌둥 어록'의 표지 사진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앤디 워홀 라이브'에는 2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스티코 매거진 편집장의 말을 빌면 전시되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편집장이 귀뜸해준 얘기. 이 작품이 4점인가 있는데, 이 중 1점이 경매로 나올 경우, 5,000억 정도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할 듯하다고. 정말 헐~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케첩 박스
Brillo Box & Heinz ketchup Box, 1964

브릴로 박스(Brillo Soap Pads Box), 1964 @ 앤디 워홀 라이브
 
현재 동대문디지털플라자에서 진행 중인 '앤디 워홀 라이브'에 가면 전시장 중간에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케첩 박스'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웬 박스인가 하며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알고 보면 이 박스들 역시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는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판지로 제작된 박스가 아니라 나무로 제작된 조각품이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 앤디 워홀의 작품은 상품과 예술품의 경계선 상에 있다. 하인즈나 델몬트는 친숙해도 브릴로란 브랜드는 친숙하지 않을텐데, 브릴로는 비누 제품이다.
 
'캠벨 수프 캔'이 상품을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면,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박스'는 상품 박스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똑같은 모양와 크기로 조각했는데 원래는 판지로 제작했었다 한다. 그러나 모양 유지가 어려워서 목수에게 나무로 제작하게 했던 것. 실제로 앤디 워홀의 손이 간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걸 예술품이라고? 직접 그리고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콘셉트가 중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 작품들 수백 개를 채워 전시를 여는데,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 작품들이 전시를 위해 캐나다로 보내졌을 때인데, 원래 캐나다는 예술 작품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앤디 워홀의 작품은 예술품이 아니라 잡화 상자로 여겨 관세를 매겼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나나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앤디 워홀의 바나나가 그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의 음반 커버, 1967 @ 앤디 워홀 라이브
 
앤디 워홀은 두 개의 음반 커버를 남겼는데 음반 커버마저도 정말 앤디 워홀다운 면이 돋보인다. 본인이 프로듀서로 나섰던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의 첫 음반 커버를 직접 제작하는데, 바나나 사진을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했는데 먹음직스럽다기보다는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게다가 이 바나나는 섹시한데, 노란 껍질을 벗길 수 있기 때문. 위의 사진은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된 음반 커버인데 오른쪽이 벗기기 전, 왼쪽이 벗긴 후다. 바나나 꼭지 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PEEL SLOWLY AND SEE"(천천히 벗겨 보세요.)
 
벗긴 바나나를 보면 당신은 무엇이 상상되는가? 필자의 상상과 아마 같으리라. :) 이후 1971년에는 롤링 스톤즈의 '스티키 핑거스' 앨범 커버도 제작하는데, 여기서는 바나나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청바지를 입은 남성의 벨트 아래 부분을 앨범 커버로 제작하면서 바지 지퍼를 실제 지퍼로 달았다는 점. 앨범을 산 이들은 지퍼를 내리면서 무슨 상상을 했을 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다. 바나나 음반 커버는 음악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면서 섹시한 표지가 되었고, 지퍼를 단 커버 이미지는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한다.
 
 
 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 1978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78
 
이번엔 영화배우, 정치인에 이어 운동선수다. 운동선수도 1977년 연작하는데, 종목별로 대표되는 선수들 10명을 초상화로 제작한다. 골프는 잭 니클라우스, 축구는 펠레, 농구는 카림 압둘 자바(이소룡의 <사망유희>에 나왔던 키 큰 농구 선수)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권투의 무하마드 알리를 소개한다. 무하마드 알리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데, 앤디 워홀 특집 2편인 창작 기법편에서 소개했듯 앤디 워홀이 맘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다양한 포즈로 찍었다. 그 중 주먹을 턱에 가져다 둔 사진을 선정하여 제작한다.
 
 
20세기의 유태인 열 명의 초상
Ten Portraits of Jews of the Twentieth Century, 1980

20세기 유태인 10명의 초상(Ten Portraits of Jews of the Twentieth Century), 1980 @ 앤디 워홀 라이브
 
앞서 소개한 '운동선수들' 연작은 친구의 의뢰로 시작한 반면, 지금 소개할 '20세기의 유태인 열 명의 초상'은 변호사 출신의 화상 로널드 펠드먼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래도 앤디 워홀이 비즈니스 미술가다 보니 그림을 파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종종 묻곤 했는데, 원래는 미국 대통령 10인을 제안했지만 그닥 맘에 들지 않았던 앤디 워홀. 이를 계기로 유태인 명사 10인으로 아이디어가 발전되었는데 이를 앤디 워홀이 수용하여 제작하기에 이른다.
 
유태인 10명은,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배우 막스 브라더스, 작곡가 조지 거슈윈,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 미국 최초의 유태인 출신 연방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다. 애초에는 밥 딜런이나 우디 앨런 등도 포함하려고 했지만 제외되었다. 원래 미국 대통령 10인에서 유태인 명사 10인으로 발전하게 된 접점이 된 인물이 바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총리가 된 골다 메이어 때문.
 
 
달러 사인
Dollar Sign

달러 사인 (9), 1982
 
상업 미술가로 돈 잘 버는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던 앤디 워홀은 자신이 좋아했던 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데 이게 '달러 사인'이다. 달러 사인은 붉은 계열의 바탕에 4개의 달러 사인이 그려져 있는 '달러 사인 4'와 9개가 그려져 있는 '달러 사인 9'이 있다. 둘 다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되어 있다. 이미 다른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었듯 상품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상품이 된다는 앤디 워홀의 지론을 담고 있는 듯 보이는 '달러 사인'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돈, 싫어하는 사람 있냐?"는 앤디 워홀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자화상
Self-Portrait

여장을 한 워홀(Self-Portrait in Drag),1986
 
어릴 때 연필로 스케치한 자화상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자화상을 남긴 앤디 워홀. 그는 때로는 실크 스크린으로, 때로는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 중 '여장을 한 워홀' 같은 작품도 있다. 물론 이런 작품 외에 무난한(?) 자화상도 있지만 대체로 가발을 쓰거나 화장을 하는 등의 연출이 들어간 자화상이 주를 이룬다. 마치 대중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마 이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자화상으로는 은색 가발 프라이트 위그를 쓴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또한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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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1963년
가격 $100,000,000(1049억 2000만 원)1)
작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앤디 워홀, 〈여덟 개의 엘비스〉, 캔버스에 실크 스크린, 실버 스프레이 / 200×370cm
앤디 워홀, 〈여덟 개의 엘비스〉, 캔버스에 실크 스크린, 실버 스프레이 / 200×370cm
“엘비스 작품 쉰 개를 하루에 만들었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시〉를 제작할 무렵인 1963년에 앤디 워홀은 ‘죽음과 재난’ 외에도 ‘대중 스타’라는 주제를 즐겨 택했다. 〈여덟 개의 엘비스〉는 이 무렵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안니발레 베를린지에리라는 유명한 컬렉터가 40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09년 11월에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이 작품이 개인 거래로 1억 달러(1049억 2000만 원)에 팔렸다고 보도하면서 거래 가격이 알려졌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매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워홀의 단골 소재였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이미 유명한 미술관들에 전시돼 있어서 이 작품의 이미지가 사람들 눈에 익숙하다. 게다가 가로 길이가 무려 3.7미터에 이르는 대작이어서 1억 달러(1049억 2000만 원)에 팔렸다는 것은 믿을 만한 보도였다.

워홀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시장에 나올 만한 작품의 수가 많아서 꾸준히 거래된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다. 비슷한 정도의 작품성을 지닌 피카소와 워홀의 작품 두 점을 놓고 같은 값으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 피카소의 작품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대표작은 시장에 그렇게 자주 나올 수가 없다. 그에 비해 워홀의 대표작은 주요 경매 때마다 고가의 대표작이 하나씩 나온다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거래 작품 수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의 수작이 비싼 가격에 팔려 뉴스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이다.

피카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워홀을 피카소와 비교해 보자. 앞서 피카소를 이야기할 때 그의 작품이 비싼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카소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워홀의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는 것도 미술사적인 이유가 제일 크다. 서양 미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가 20세기 초반에 피카소였다면, 20세기 후반에는 워홀이었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 미술의 핵심이던 팝 아트의 대표 주자다. 상업 디자이너 출신의 워홀은 코카콜라, 캠벨 수프 깡통,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이미 널려 있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했고, 제작 방법도 기계처럼 찍어 내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들은 1000억 원 이상에 팔린다. 워홀이 이처럼 유명한 작가가 된 비결은 그가 시대상을 민활하게 반영한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

워홀은 1963년에 미술 평론가 G. R. 스웬슨과 했던 인터뷰에서 “나는 사람들이 모두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후 워홀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매우 유명해졌다.

왜 그는 사람들이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현대인들은 똑같은 대중 스타를 좋아하고, 똑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서로서로 별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 개개인의 생활을 들여다보아도 큰 변화 없이 매일 거의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한다. 이런 기계 같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는 미술은 기계 같은 미술이어야 한다는 게 워홀의 주장이다. 미술 작품은 작가의 손끝과 영혼으로 만들어 내는 창조품이라는 과거의 미술 개념을 뒤집어엎는 희한한 발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인의 특징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것이기도 했다. 워홀은 한마디로 “살기는 그렇게 살면서 왜 예술은 다른 걸 추구하느냐?”라고 주장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은 소비재가 넘쳐 나고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사회였다. 싸구려 이미지를 고급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마구 찍어 내는 제작 방법을 쓴다는 것은 미국이 앞세우는 민주주의와도 들어맞았다. 그러니 워홀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던 시대상을 아주 잘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피카소 이후 작가들이 피카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워홀 이후 현대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워홀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워홀이 반영한 1960년대 미국 문화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감할 수 있는 문화다. 그 때문에 워홀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작가처럼 느껴진다. 워홀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자신이 살던 시대를 대변하면서 이후에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속 살아 있는 신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워홀은 대중문화를 찬양하는 동시에 비판했다. 대중 스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중 스타는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환상에 따라 만들어 낸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여덟 개의 엘비스〉에 사용된 이미지는 1960년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했던 〈불타는 스타(Flaming Star)〉라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당시 이 영화의 홍보용으로 여기저기에 뿌려졌던 이미지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63년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물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세계적 팝 스타로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권총을 들고 서부 카우보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미국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엘비스 프레슬리는 어딘지 약해 보이기도 한다. 과연 이 모습에 미국인들과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숭배할 만한 진정한 파워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이미지다.

슈퍼스타의 이중적 면모라는 주제로 다루기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매릴린 먼로는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다룬 작품은 매릴린 먼로가 나오는 작품과 함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워홀의 대표적인 시리즈가 되었다.

워홀은 엘비스 프레슬리 이미지를 가지고 스물두 점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아홉 점은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 작품 하나를 가지면 세계적인 컬렉션 수준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심리적 보상 때문에 컬렉터들은 이 그림에 아낌없이 거액을 지불하는 것이다.

실크 스크린(Silk Screen)
실크 스크린은 워홀의 작품 제작 방식에서 핵심이 되는 기법이지만, 실은 옷이나 가방 등 생활용품에 이미지를 인쇄할 때 쓰는 아주 흔한 방법이다. 사진 이미지를 원하는 크기로 확대해 망사 위에 놓은 뒤 망사 아래에 천을 놓고 잉크로 찍어 눌러 그 이미지를 천 위에 그대로 찍어 내는 방법이다. 똑같은 이미지를 몇 번이든 찍어 낼 수 있고, 같은 이미지라도 색깔과 농도를 달리해 다른 느낌으로 찍어 낼 수 있다. 워홀은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현대 사회, 대량 소비재로 꽉 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나타내는 데 이 기법이 아주 잘 맞는다고 보았다. 기계적으로 찍어 내면서 판화처럼 작품을 여러 장 만들어 낮은 가격에 보급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와도 맞았다. 그래서 워홀은 실크 스크린 제작 방법을 매우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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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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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Warhol in 1977
원어이름 Andy Worhol
본명 Andrew Warhola Jr.
출생 1928년 8월 6일
미국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사망 1987년 2월 22일 (58세)
미국 미국 뉴욕 주 뉴욕
국적 미국 미국
분야 미술영화
학력 카네기 멜론 대학교
사조 팝 아트
대표작 Chelsea Girls (1966 film)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1966 event)
Campbell's Soup Cans (1962년 회화)

앤디 워홀(영어: Andy Warhol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2일)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영어: Andrew Worhola Jr.)이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거래된 이 사실은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미술 시장의 주도자로서 워홀의 지위를 설명한 것이다.[1] 1억 달러라는 가격은 잭슨 폴록파블로 피카소구스타프 클림트와 윌렘 드 쿠닝만이 기록한 기준 가격이다.

 

 

생애[편집]

1928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20~30대[편집]

 
캠벨 수프 캔

1950년 (22세)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rt Director's Club Award)를 수상하고,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지만 동시에 주문주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림을 수정 하느라, 사생활에서는 대인 관계에서 타격을 받은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단지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곧 선에 잉크를 실어 종이에 전사하는 "브로테드 라인"(Burottedo line)이라는 대량 인쇄에 적합한 기술을 발명한다.

1960년 (32세),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1961년 (33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캔〉이나 지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린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다. 메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팩토리에서 제작 활동:30대후반~40대[편집]

1964년(35세)부터는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고 하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이미징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art worker; 아트 워커)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 한다. 팩토리는 믹 재거(롤링 스톤즈),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이는 장소가 된다.

1965년(36세),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 워홀은 V.U.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신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작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자켓 디자인을 다루었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 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이후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두 번째 앨범을 제작할 무렵에는 워홀과의 관계도 끝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루 리드: 로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그려져 있다. 또 워홀의 사후 멤버인 리드와 케일은 재결성해 《드렐라를 위한 노래》(Songs For Drella1990년)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Drella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조합한 합성어이며, 워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40대와 저격 사건[편집]

1968년 6월 3일 팩토리 스튜디오의 직원 밸러리 솔라나스가 스튜디오에 들어와 워홀을 총으로 세 발 쏘았다.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지라, 위, 식도를 관통했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으나 그는 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솔라나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한다.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1972년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50대와 최후[편집]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창조한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이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22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였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 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이다.

작품 세계[편집]

워홀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화려한 색채 같은 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메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기호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고전 예술과 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그 도안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 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가지는 대량소비가 아닌 인류, 진부, 공허함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을 구한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나 대중이 매일 접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실크 스크린[편집]

초기에는 아크릴 물감 등으로 캔버스에 그렸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판화의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공판 인쇄인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의 원리는 평평한 "프린트 고코"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직접 인쇄에 종사하지 않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기술이다. 그는 기계로 만들어 내듯 실크 스크린 작품을 찍어내는 아틀리에 《팩토리》를 마련하여 많은 젊은이를 고용하여 제작에 종사하게 했다. 한편, 같은 판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프린트를 늦추거나 잉크를 많이 쓰게 했다. 실크 스크린 모티브로 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가 만드는 초상화는 당시 고액을 받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유명인이 자신의 모습을 프린트하기를 원했다.

영화[편집]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제작 한편 1963년부터 1968년에 걸쳐 60편 이상의 영화도 다루었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적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8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1963년)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것"을 원했다. 끝없이 변화가 없는 영상은 보편적인 것을 테마로 한 워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하였고, 극 영화도 제작하였다.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각 객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임의의 2방만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2개의 화면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계속 비춰주는 (도중 한쪽 스크린은 니코의 모습이 임의로 삽입된다), 《첼시 걸즈》(1966년)는 미국에서 출판에서 대히트를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전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조 달레산드로(Joe Dallesandro)와 우도 기어(Joe Dallesandro)를 주연으로 한 《악마의 죽음》(1974년)와 《처녀의 생피》(1975년) 등 공포 영화 감독도 시도하였다.

[편집]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 Back Again)(1975) (2007) 열린책들 김정신 옮김 9788990641175

앤디 워홀 일기The Andy Warhol's Diaries(1989) (2009) 열린책들 홍예빈 옮김 9788990641380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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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마술적 초현실주의"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통하다... 2016-12-18 0 3638
248 화가, 그림그리기, 그리고 "앉을 자리, 설 자리 없는 세상" 2016-12-18 0 1513
247 미국 천재소녀 화가, 시인 - 아키아나 2016-12-18 0 5556
246 "시간의 상자"를 열어제껴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라... 2016-12-18 0 1948
245 모든 것, 그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2016-12-18 0 2100
244 러시아 초현실주의 화가 - 블라디미르 쿠쉬 2016-12-18 0 3672
243 현실에서 볼수 없는 모습을 실제처럼 나타내게 하라... 2016-12-18 0 2079
242 상상의 결과물은 "독학"에서 나온다... 2016-12-18 0 1885
241 동심을 자극하는 초현실주의 사진들 2016-12-18 0 1973
240 정해진 길 아니라 자신만의 길 만들어 나가라... 2016-12-18 0 3141
239 잘 알려지지 않은 초현실주의 화가들 2016-12-18 0 12019
238 [쉼터] - 물, 빛, 소리 그리고 령혼... 2016-12-14 0 1711
237 독일 화가 - 막스 에른스트 2016-12-06 0 12672
236 괴짜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노라면 <<살바도로로 달리>>고 싶어지다... 2016-12-06 0 4776
235 사진이란 "어느 순간", "시간적 압축"의 드러남이다... 2016-12-05 0 2316
234 시인, 녀인, 화가, 그리고 삶... 2016-12-05 1 3193
233 19세기 러시아 대표 화가 - 일리야 레핀 2016-12-04 0 6150
232 전쟁, 력사, 그리고 평화야,- 놀자... 2016-12-04 0 1775
231 멕시코 최고 녀류 화가 - 프리다 칼로 2016-11-29 0 2620
230 불후의 걸작 건축물 옆에서는 염소떼들이 뛰놀더니... 2016-11-02 0 1693
229 개인적으로 7개의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2016-11-02 0 1677
228 스페인 건축가 ㅡ 안토나 가우디 2016-11-02 0 2093
227 아내의 도움으로 20세기 미술 거장 되다... 2016-10-29 0 5589
226 달리 추상화 작품모음 2016-10-29 0 2604
225 소녀 뒷모습 보는 순간, 그 누군가가 또 그 뒷모습 보기까지... 2016-10-29 0 3497
224 전쟁은 싫다 싫어... 2016-10-28 0 2045
223 ..... 2016-10-26 0 3005
222 "영원한 황금실" 中 뫼비우스의 띠 - 에셔 2016-10-26 0 3276
221 수학과 미술과 그리고 미술가 - 에셔 2016-10-26 0 3595
220 네덜란드 "이상한 고리" 화가 - 에셔 2016-10-26 0 1851
219 .... 2016-10-26 0 7834
218 자신만의 그림세계에 빠지다... 2016-10-26 0 1885
217 폴란드 추상미술가 - 야첵 예르카 작품모음 2016-10-26 0 4604
216 일상품도 작품으로 변용될수 없다?... 있다!... 2016-10-26 0 2057
215 "짝퉁미술"과 "예술의 종말 2016-10-26 0 1989
214 13년간이나 그렸거나 애장해온 자신의 그림 전부 불사르다... 2016-10-26 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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