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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 윤동주도 축구선수였다...
2017년 03월 03일 19시 33분  조회:5515  추천:0  작성자: 죽림
케이프타운 해변에서 10㎞ 떨어진 바위섬 로벤은 경관이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한 흑인들을 수감한 세상에서 가장 악명높고 야만적인 감옥이 있었다. 

1960년대 구타와 힘겨운 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가던 수감자들은 간수 몰래 셔츠를 둥글게 뭉쳐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정치노선에 따라 갈라져 있던 수감자들은 축구를 위해 뭉쳐 한목소리로 교도소 당국자에게 축구리그를 요구했다. 4년간의 투쟁 끝에 축구리그 마카나축구협회가 결성됐다. 수감자 1천400여 명은 선수, 매니저, 심판, 코치를 구성, 3개 리그를 꾸렸다. 회색빛의 잔인한 수용소는 축구 이야기로 활기를 되찾았다. 수감자들에게 축구는 고된 생활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일탈이었고, 사분오열 정치집단을 결속시켜 주는 끈이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축구 없이는 수감생활의 절망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감생활을 했던 자들의 증언이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알제리대학 시절 축구팀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던 실존문학의 거봉 알베르 까뮈의 축구에 대한 찬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도 학창시절 축구선수였다.

세계적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도 골키퍼 출신의 축구선수였다. 이처럼 유명 예술가 중 축구선수가 적지 않은 것은 축구 자체에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음을 말해준다. 


“인생의 어느 영역에서도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간단한 도구로, 그렇게 기초적이면서도 극히 다채로운 사건들을 빚어내는 제도는 지구 상에서 축구가 유일하다” 독일 예술사학자 호로스트브레데캄프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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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북간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그라미가 윤동주, 세모가 송몽규. 당시 윤동주가 다니던 일본의 릿쿄 대학은 군국주의 바람이 거셌는데, 학교 차원에서 단발령이 내려져 윤동주는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던 것으로 보임. 이 사진을 찍었던 당시가 생전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고 3년 후에는 둘 다 유골로 고향에 돌아옴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원래 다른 아가씨와 선을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집에 다니러 갔던 윤동주의 어머니가 우연히 송창희 선생을 보고는 사람이 너무 괜찮아 자기 큰시누 남편 삼으면 딱 좋겠다 싶어서 바로 집에 가서 시아버지한테 보고함 ㅋㅋㅋㅋㅋ가로채기 ㅋㅋㅋ결국 윤동주 큰고모와 결혼.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북간도 지역에서 학교 선생과 촌장직을 지내면서도 일본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꼬장꼬장의 상징 같은 사람이었음. 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은 송호랑이...송몽규가 일본에 유학가겠다고 했을 때도 "왜 원수의 땅에 가려느냐?"면서 반대했다고 함. 하지만 엄하다고 해도 무조건 엄한 것이 아니라 엄하면서도 이해심이 많았다고. 애처가였다고 함

 

북간도 조선인 기독교 마을인 명동촌의 부잣집이던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 집에서 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곳에서 같은 때 태어나 같은 곳에서 같은 때 죽은 형제이자 친구, 동지이며 라이벌이었음.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이 좋았다고 함. 깡도 세서, 열두 살 때 사회주의 이론을 동네 어른들 앞에서 연설할 정도였다고. 다시 말하지만 이 동네는 기독교 마을이었음. 일요일이면 동네 사람들 다 교회에 모이는 동네...다만 이 때 사회주의자들의 행태에 아주 질렸고 이후 다시는 사회주의 사상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음. 임정 중에서도 가장 우파인 김구 계열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다니는 학교마다 문집 발간에 앞장서는 등 문학적 재능과 활동력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 다만 운동신경은 별로였던 듯. 활발한 송몽규는 운동을 안 좋아했는데 얌전한 윤동주는 축구나 농구 선수를 하는 등 운동을 좋아하고 잘했다고 함

 

송몽규를 눈여겨보던 선생님한테 스카웃되어 낙양에 있는 임시정부의 군관학교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적이 있음. 나이 겨우 열아홉살에...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가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게 됨. 이 직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제출한 단편이 당선되어 지면에 실림. 나이 겨우 열여덟살에...이 때의 송몽규의 작은 문학적 성취가 윤동주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고 함. 이 직후부터 윤동주가 시에 완성한 날짜를 적기 시작했음. 문익환의 증언에 따르면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윤동주가 문익환에게 "야, 대기는 만성이야!" 같은, 송몽규를 다분히 의식한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ㅋㅋ여담이지만 이 시기 윤동주는 문집에 넣게 시를 써 내라고 재촉해서 겨우 시를 써 준 문익환에게 "이게 어디 시야" 하면서 돌려줬다고 함 ㅋㅋㅋㅋㅋㅋ자기가 쓰라고 해놓곸ㅋㅋㅋㅋㅋ

 

같은 해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둘 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지원함. 자식들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지원해 준 송몽규의 집과는 달리 윤동주의 아버지는 "의과를 가야 사람노릇을 하지, 문과 가봤자 신문기자밖에 더되냐?" 같은, 요즘 어른들이나 하실 말씀을 하시며 크게 화를 내셨다고 함.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비슷한 듯. 집안에 물그릇이 날아다녔다고...이 모습을 보던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권사는 신문기자가 되게 시덥잖은 직업인 줄 알았다고 함 ㅋㅋ 보다못한 할아버지의 중재 덕에 윤동주는 겨우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함

 

윤동주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기숙사에 살았는데, 성격이 너무 달라서 친구들도 재미있어했다고 함. 윤동주는 말이 적고 얌전한데, 송몽규는 말이 거칠고 행동반경이 컸다고. 4학년 때 문집을 만들었는데, 송몽규가 실무를 맡아서 했고 편집후기도 송몽규가 썼음. 시대가 시대인지라 편집후기는 일본어로 썼지만, 우리말 시나 영시를 싣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한 흔적이 있고 송몽규도 우리말로 쓴 시를 실었음. 해방 후 북한에서 살던 송몽규의 가족이 송몽규가 남긴 글을 모조리 태워 버린지라 송몽규의 글은 이 시와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등 극히 적은 수만이 남아 있음

 

연희전문을 차석으로 졸업하여 우등상을 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상품이라고 준 것을 뜯어 보니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는 책이었음. 당시 연희전문 교장이 윤치호였는데, 송몽규는 내용을 보고는 그 책을 집어던지며 "에이 그 영감 이따위 것을 상품이라고" 했다고 함 ㅋㅋㅋ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웃을 일은 아니지만..시원시원한 성격이었는듯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해 윤동주와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음. 윤동주는 42년 1월 29일 平沼東柱, 송몽규는 2월 12일에 宋村夢奎로 창씨개명을 함. 둘 다 일본에 유학가려면 늦든 빠르든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왕 할 거면 언제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한 윤동주와는 다르게 송몽규는 하루라도 늦춰 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느껴짐...일본은 대학 입학이 4월이니 일본으로 건너가서 입학시험을 칠 시간을 역산해 보면 2월 12일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미룬 것으로 보인다고. 참고로 '참회록'은 1월 24일,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신고하기 닷새 전에 쓴 시

 

둘 다 교토제대를 목표로 입시를 치렀지만, 송몽규는 합격했고 윤동주는 불합격하여 도쿄의 릿쿄대로 가게 됨.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전문학교 출신의 대학 입학은 상당히 어려웠는데, 고등학교를 나온 일본인도 입학하기 어려운 교토제대를 전문학교를 나와 입학한 송몽규는 확실히 머리가 좋았던 듯. 그것도 일본어로 된 시험으로...문익환도 "머리가 좋은 놈이지"라고 회상한 적이 있음. 어느 날 북간도 집에 갑자기 나타나 아버지에게 일본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원수의 땅에 뭐하러 가냐는 아버지에게 내가 수양을 하고 민족이 수양을 해 나라 독립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다고 함...유학을 시켜 줄 여유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답하고 실제로 집안의 지원 없이 일본 유학을 함

 

릿쿄대학의 군국주의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교토의 미션스쿨인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 윤동주와 자주 만나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열변을 토하곤 했었는데, 이를 일본 특수고등경찰은 1년 가까이 마크하고 있었고 결국 1943년 7월에 일본 특고에 검거됨. 민족의식의 앙양, 독립의식의 고취를 꾀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됨. 당시 송몽규의 강제징용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송몽규는 강제징용을 "무기를 알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군사경험을 체득하게 되어 장차 일본과의 독립전쟁의 시기에 민족적 무력 봉기를 가능하게 할 기회라고 꽤 전위적으로 생각했음. 임정 군관학교 재학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재판부는 너무나도 불온한 송몽규의 이러한 사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다른 조선인 학생들은 금방 풀려나거나 조사 끝에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 유독 송몽규와 윤동주만 실형을 받은 것은 징용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 검사와 재판부가 위기를 느껴서라는 분석도 있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 두 사람은 광복을 겨우 반 년 앞둔 1945년 초 세상을 떠나게 됨. 윤동주가 몇 주 먼저 죽게 되는데, 이 때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온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해골이 다 된 송몽규를 면회하고 통곡...이 때 송몽규는 동주와 자기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말했는데, 아마 이 당시 큐슈제대 의학부에서 행해지던 인체실험일 가능성이 높음. 후쿠오카 앞바다의 해수가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씨발 그게 말이 되냐? 아무튼 이 때 송몽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보였고, 일주일 후에 사망함. 윤동주는 마치 자는 듯한 고운 얼굴로 관에 누워 있었고, 송몽규는 눈을 번히 뜨고 죽었다고 함. 아버지가 내가 왔다, 이제 눈을 감아라 하며 눈을 감겨 주니 그때야 눈을 감았다고...송몽규의 아버지는 내 아들의 뼛가루 한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길 수 없다며, 화장하고 남은 뼈를 절구에 찧다가 주변에 튄 가루들을 흙과 함께 유골함에 담았다고 함. 송몽규가 아버지 꿈에 나타나 자신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이 땅에 남기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고. 이 때 일본인 간수와의 일화가 있는데,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사망한 죄수가 많아 화장하려면 보름은 기다려야 했는데 송몽규를 잘 알던 간수가 와서 훌륭한 사람이 죽었다며 일본인으로서 죄송하다고 울며 사과했다고 함. 그리고 편의를 보아 주어 빨리 화장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훌륭한 기대주를 한꺼번에 둘이나 잃은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말 그대로 초상집이 됨. 윤동주의 어머니는 초상을 치르는 내내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다가, 밤 늦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윤동주의 여동생이 보았음. 송몽규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면서 너무 가슴을 때려 가슴팍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고. 송몽규의 묘에는 청년 문사 송몽규의 묘라는 묘비가, 그보다 조금 뒤 윤동주의 묘에는 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는데, 묘비명이라는 것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판에 박힌 형식에 따르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묘비명은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면 아주 파격적인 것이라고 함

 

해방 후에 웬 부잣집 딸로 보이는 여성이 대여섯 살 되어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송몽규의 집에 찾아와 송몽규의 거취를 물었다고 함. 죽었다며 묘를 알려 주자 여성은 한참을 슬피 울다 돌아갔다고...후에 송몽규의 아버지는 아마 그 여성이 몽규의 일본 유학 학비를 조달해준 것 같다, 그 아이도 몽규의 아이일지 모르는데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보낸 것은 잘못했다며 후회를 했다고 함. 하긴 저렇게 잘생겼는데 여자가 없었을 리가

 

 

 

둘의 고향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동창인 장준하 선생이 해방 이후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아서 광복을 보았다면 그 많고 뛰어난 재주들을 얼마나 펼쳤을지...너무나도 아쉽고 너무나도 원통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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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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