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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메모에서 완성하기까지 고심에 련마를 걸쳐야...
2017년 06월 09일 00시 51분  조회:2370  추천:0  작성자: 죽림

메모에서 완성까지 / 백태종 



자판을 두드린 뒤로 필적이 영 이상스러워지더니, 초고를 간직하지 못하는 문제도 생긴다. 초고라고는 남아 있지 않으니 이를 어떻게 하나. 내 시 몇 편을 읽어보지만 그것들의 처음 모양이 어떠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 답에 맞는 문제를 구해 봐? 
적당한 시를 선택해 가지고 그것의 초고 상태를 유추해 볼까 생각을 해봤다. 적당히 너스레를 늘이고 산만하게 만들면 초고같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지워버리면 시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 것이고, 분장으로 붙인 수염을 잘 면도한 셈이 된다. 
다행히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의 재료가 될 것을 얻었다. 오래 전에 팽개쳐 둔 노트에서 초고 비슷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몇 해 전, 아마도 아버지의 산소에 가던 길로 기억되는데, 먹골배로 잘 알려진 퇴계원 근처를 지나가다가 배밭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 느낌을 메모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수확이 끝나자 배나무에는 아직도 파란빛을 띤 잎새들만 달려 있었고, 비에 젖어서 떨어진 잎이 과수원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동안 고락을 함께 해왔던 배가 나무와 헤어지고, 잎새도 나무에서 떨어져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고 있다는, 청승맞은 생각을 했던 것같다. 어쨌든, 그 스산스러운 풍경을 바라본 마음의 수은주가 이 시를 썰렁하게 식혔으리라. 

잘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 
아직도 푸른 무성한 잎 한잎 한잎 떨구며 
열매 없는 배나무들 
늦가을 찬비를 맞고 있다 
지난 봄 배꽃 씻던 봄비가 아닌 비 
늦가을 찬비에 젖고 있다 
배밭을 떠나간 배들이 알 수 없는 
늦가을 찬비에 떨고 있다 
배밭 지나 배밭 
배밭 지나 또 배밭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열매를 모두 따 낸 나무는 사람의 노년처럼 쓸쓸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양로원 가는 길’이라는, 사실과는 다소 다른 시행이 나온 것인데, 사실 그때 내가 차창 밖으로 내다본 것이 자식 생각에 쓸쓸해진 나무노인이 아니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배나무는 그동안 여러 종류의 비를 맞았을 것이다. ‘배꽃을 씻’는 비도 왔는가 하면 ‘풋배를 닦’는 비도 내렸을 것이다. 긴 날 오락가락하였던 장마비며 천둥 벼락이며, 하지만 그때는 배와 배나무가 함께 그 비를 맞았음이다. 그래서 천둥 벼락이 두려운 순간은 있었을지언정 외로움이란 것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보이는 모습이 너무 처연하다. 그리고 배나무가 비 맞는다는 것을 대처에 나간 배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적어 놓고서 그동안 내내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 읽어보니 시라고 할 것이 없는 글이다. 상상력의 즐거움같은 것도 안 보인다. 
‘잘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는 장황하다. 배들이 박스에 담겨서 실려 갔을 것이라는 것은 그럴 것으로 짐작한 것이지 눈에 보이는 풍경은 아니다. 아마도 그 짐작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림이 되지 않는 것을 그리느라 ‘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라고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 과감히 지우고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만 겨우 남기자. 
‘아직도 푸른 무성한 잎 한 잎 한 잎 떨구며/ 열매 없는 배나무들/ 늦가을 찬비를 맞고 있다’도 각설하고, ‘떨어진 잎새’는 뒤에 나오니까 여기서는 빼자.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열매 없는 배나무 
빈 배밭에 찬 비 온다 

이렇게 고치니까 일단 간결은 하다. 다음은 비인데, 비 얘기를 하자면 지금 오는 비는 ‘찬비’이고 전에 왔던 비는 투명한 비라는 점을 말 할 수 있다. 또 지금은 배나무가 혼자서 맞는데, 전에는 배꽃과 배나무, 배와 잎새와 배나무가 함께 맞았던 사정도 이야기될 수 있다. 
빗방울의 명증성이 배꽃을 씻고 풋배를 닦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시에 이끌어들일 만하다. 

배꽃 씻은 실비 
풋배 닦은 소낙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그림이 맑아졌다. 여기에다 ‘지난 봄’이니 ‘지난 여름이니’ 또 ‘봄비가 아닌 비’니 ‘장마비가 아닌 비’니 하는 아리송한 말을 넣어 혼탁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늦가을 찬비에 젖고 있다/ 배 밭을 떠나간 배들이 알 수 없는/ 늦가을 찬비에 떨고 있다’라는 구절도 지루한 느낌을 추려내고 말을 평이하게 바꾸어서 

열매들 떠나 비오는 줄 모를 때에 
혼자 남아 나무가 맞는 비 
배나무가 젖어 마음이 시린 비 

로 고친다. 다음 할 것은 ‘배밭 지나 배밭/ 배밭 지나 또 배밭’을 지울까말까 결정하는 일이다. 그냥 두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먹골 과수원의 풍경이나 노인의 외로움은 가도가도 자락이 이어지는 풍경이 아니던가. 그러나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로 연결되어 마무리는 되지만 ‘배밭 지나…또 배밭’에는 아쉽게도 지금 내리고 있는 비의 이미지라고는 들어 있지 않다. 

비에 떨어져 쌓인 잎새 미끄럽다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로 마무리를 짓는다면 ‘미끄럽다’로써 먼 것이 되기 쉬운 풍경을 가깝게 이끌어다 발밑의 사정으로 바꾼 효과를 거두면서 또 젖어서 번득이다라는 이미지를 그림에 칠한 것이 된다. 

비에 떨어진 잎새 미끄럽다 
배밭 지나 또 배밭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그런데 이 구절을 버릴까말까 생각하는 동안 내가 먹골 배밭의 풍경에 집착한 것 같다. 봄이면 그 야트막한 야산을 뒤덮은 배꽃이 얼마나 아름답던가. 배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풍경도 볼 만했다. 그 아름다움들을 시에 끌어다 펼쳐 놓으려는 욕심이 생길 만도 하다. 그러나 막상 따져 보아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라면 없어지는 편이 더 간결해진다. 지극한 가난을 택하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또 있다. ‘퇴계원’과 ‘양로원’이 중복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퇴’는 물러난다는 의미로서 노인의 이미지와 유사하니까 살려서 퇴계원을 ‘퇴촌’으로 바꾸어 준다. 퇴촌에는 배밭이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면 퇴계원이라고 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세한도(歲寒圖)를 위해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열매 없는 배나무 
빈 배밭에 찬 비 온다 
배꽃 씻은 실비 
풋배 닦은 소나기 천둥 벼락, 그런 
비가 아닌 비 
열매 떠나 비 오는 줄 모를 때에 
혼자 남아 나무가 맞는 비 
배나무가 젖어 마음이 시린 비 
떨어져 쌓인 잎새 미끄럽다 
퇴촌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이렇게 고치니 노트에서 찾아냈던 글과는 사뭇 달라졌다. 소품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세한도를 위해」라는 좀 거창한 제목을 붙인 것은 ‘찬 비’ 이후 어느 눈이 와 쌓인 날에 내가 그 ‘배밭’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곳에 흰 눈이 지운 만큼 더 단순하고 간결해진, 가난이 지극한 그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에 메모를 하던 그때 내가 봤던 것도 텅 비어지려고 잎마저도 하나둘 버리는 배나무들이었다. (백태종) 


◇88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이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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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1965∼ )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빽빽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저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궁이 앞이 환하다 

 

 

 


화자는 들판이나 산기슭의 아궁이를 때는 집에 살고 있다. 도시의 분답을 피한 이 생활이 형편에 따라서인지, 마음이 이끌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시에 적요감이 배어난다. 봄날의 이른 저녁, 아직 햇빛은 창창하지만 대기에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할 때 ‘찌르라기떼가 왔’단다. 찌르레기 울음소리는 들어본 바 없지만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말이 있듯이 ‘찌르찌르찌르’ 울 것 같다. 떼로 우짖으면 자글자글 끓는 듯할 그 소리가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니 참으로 그럴싸한 참신한 표현이다. 화자는 찌르레기 소리가 소란해서 하늘을 올려다봤을까, 아니면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릴 때부터 지켜봤을까. 찌르레기 떼 우짖는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점점 작아졌을 테다. 새 떼가 드리우는 한 폭의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와서 화자를 덮치고는 빠르게 지나갔을 테다. 빛과 그림자, 소란과 정적의 역동적 대비가 현기증 날 만큼 생생하다. 정적(靜的)인 묘사의 세밀함으로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장석남의 힘!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찌르라기떼 속에/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찌르레기는 어디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돼야 우리나라에 날아드는 새다. 멀어지는 찌르레기 대열의 휜 데가 햇빛으로 환하게 둥근 것에서 ‘봉분’을 연상하다니, 화자는 아무래도 이생의 쓸쓸한 봄을 지나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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