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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장석주
출판사 고려원에서 두 해 조금 넘게 일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직장생활이 갑갑했고,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니체전집’을 새로 출간하는 것이다. 고려원에서 나올 때 받은 퇴직금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이의 회고록 원고를 윤문하고 받은 돈을 보태 초기 창업자금을 만들었다. 치밀한 계획도 없이 종로 3가의 건물 옥탑방을 사무실로 얻고 출판사를 시작했다. 후배 한 명이 출판사가 자리잡을 때까지 무보수로 돕겠다고 나섰다. 출판사를 시작한지 1년 뒤 펴낸 헤르만 헤세 잠언록 『괴로움을 꿈꾸는 너희들이여』가 뜻밖에도 그해 비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나는 출판사를 열세해 동안 운영했다. 내 30대를 통째로 바쳐 일했고, 운이 좋아 베스트셀러도 몇 권 내놨다. 강남 한복판에 사옥을 짓고, 출판사 직원이 서른 명이 넘어설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책을 6백여 종이나 내놓고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큼 성공했지만 그즈음 슬슬 출판사 경영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있었다. 1992년 당시 연세대학교인 마광수의 장편 『즐거운 사라』를 펴내면서 이 소설이 표현의 자유와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 인해 1992년 문화계가 소란스러웠다. 그해 10월 29일 새벽, 나는 서울 대치동의 집으로 찾아온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서울 지검 특수2부로 연행됐다. 서울 지검 특수2부에 속한 김진태 검사의 방에 마광수 교수도 끌려와 있었다. 당시 이 필화사건을 맡았던 김진태 검사는 승승장구해서 검찰총장을 지내고 검찰을 떠났다. 그날 저녁 8시에 마교수와 나는 검찰 청사를 떠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은 당시 신문과 방송 등 매체에 크게 보도되었다. 문단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공청회를 여는 등 여론전을 펴느라 분주하고, 소설가 하일지와 시인 민용태 씨 등이 나서서 『즐거운 사라』 는 외설이 아니라고 검찰의 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감정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들만으로 우리의 구속 수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즐거운 사라』를 두고 “반인륜적, 반도덕적 소설”로 그 안에 나오는 다양한 “변태와 엽기”적인 내용들에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법원에 『즐거운 사라』를 ‘외설물’이라는 감정서를 제출한 당시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 안경환 씨가 대표적인 예다. 『즐거운 사라』가 상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작가는 온갖 허구적 상상을 다하고 그것을 창작품으로 빚어내는 사람이다. 사회가 금기하는 반인륜적이고 반도덕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그것을 기어코 쓰는 사람이다. 검찰 조사가 끝난 뒤 구속이 결정된 찰나 나는 의외로 담담해졌다. 출판은 사회적 행위이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내놓는 모든 출판물들에 대해 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즐거운 사라』 출판에 따른 사회적 비난과 법적 책임이 생긴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가 감당할 몫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누구나 자기 행위로 인해 항상 유죄선고의 가능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신체 구속’은 나와 사고체계가 다른 사람들이 헌법을 다르게 달리 내릴 수 있는 수많은 유죄선고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내 몸은 의심할 바 없이 내 것이지만 이것이 사회 속에 있을 때 “몸들을 위한 공간, 몸들이 남긴 궤적,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만남과 우발적 사고들, 노동 환경에서 그들이 취하는 자리와 자세, ‘공동 조건’의 교환 및 무한한 변용”의 대상이다. 내 몸이 사회화될 때 이것은 사적 소유의 범주를 훌쩍 벗어난다. 나는 서울구치소의 입감 절차를 거쳐 한 사동에 수감되었다. 내 몸은 갇힌 몸이 되었다. 마교수와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61일을 보냈다. 그동안 법원을 오가며 검찰과 우리 사건의 변론을 맡은 한승헌 변호사 사이에 오가는 법리 논쟁을 지켜봤다. 법원은 검찰 쪽 손을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30일, 마교수와 나는 똑같이 1심 재판부의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진 뒤에서 서울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2017년 9월 5일 오후 2시경, 출판도시 안 한 카페에서 원고를 쓰고 있던 중 문득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한국일보 문화부의 이윤주 기자였다. 몇 해 전 신작시집을 내고 인터뷰를 한 계기로 안면을 트고 지낸 기자였는데, 마광수 교수가 자택인 아파트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아득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하는 느낌. 이제는 아물어 딱지가 앉은 옛 상처 자리가 헤집어지면서 생살이 드러나는 것만큼 날카로운 아픔이 스쳐갔다. 인생이 큰 커브를 그리면서 방향을 트는 변곡점이 되었던 스물다섯 해 전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이다. 이윤주 기자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잇달아 두 신문사 문화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 기자 통화를 끝내자 또 다른 낯선 번호들이 잇달아 떴지만 받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연락이 왔는데, 나는 휴대전화를 아예 꺼버리고 황망한 가운데 복잡해진 감정을 추스르려고 작업을 멈춘 채 출판도시 안을 오래 산책했다. 내 인생의 변곡점의 계기였던 마광수 교수와의 만남과 『즐거운 사라』 출판을 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반추했다. 마광수 교수는 자택에서 목에 스카프를 매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 신준봉 차장의 요청으로 「한 솔직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죽음 앞에 ―고 마광수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추도사를 썼다. 추도사는 오후 2시에 청탁을 받고 집에 들어가 신문사 마감시간인 오후 6시에 맞춰 끝냈다. 추도사를 신문사로 보낸 뒤 저녁 식사를 하고, 밤 10시쯤 택시를 불러 아내 박연준 시인과 서울 한남동의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마광수 교수의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 도착한 것은 11시쯤이었다. 언론 매체에서는 빈소를 찾는 이가 없다고 했는데, 의외로 문상객들이 북적거렸다. 둘러보았지만 아는 문인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정과리 연세대 교수, 권성우,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연세대 출신으로 시인 기형도의 친구인 소설가 김태연 씨가 그나마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맥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면서 권성우 교수와 김태연 씨 등과 얘기를 나누다가 자정 무렵쯤 일어나 택시를 불러 파주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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