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9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2017년 10월 09일 22시 48분  조회:1960  추천:0  작성자: 죽림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작가세계」로 등단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 
동화『상상력 학교』 
'제14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 

2009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 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 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 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 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 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의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 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 꼭대기로 날려보낸다.

 

 

 마지막 해변/함기석-


하늘에서 누군가 물조리개로 빛을 뿌린다
해변은 땀에 젖은 흑인의 등처럼 반짝거린다
바다의 잇몸을 뚫고 수면으로 나온 흰 이빨 같은 섬들
물결따라 햇빛알갱이들 아름답게 너울거리고
바다는 한 꺼풀 한 꺼풀 하얀 속살을 벗겨 뭍으로 보낸다

해변에 한 노인이 서 있다
바다의 주름진 이마를 만지며
해저에 사는 눈 없는 물고기들의 일생을 생각한다
피었다 진 꽃자리처럼 노인의 눈은 쓸쓸하고 그늘이 깊다
바다의 유치원에서 어린 물고기들 뛰놀고
소녀가 나비 다라 방파제 꽃길을 뛰어간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모래밭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맨발을 바라본다
고독과 고통 속에서 보낸 수십 년의 시간과
진흙 길들이 스민 아픈 발을 바라본다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이 마지막 해변까지 데려다 준
상처투성이 착한 발을 미안하게 바라본다
보드랍게 발등을 어루만져 주는 바다의 하얀 손가락들

노인은 모래밭에 바다가 쓰는 참회의 시를 가슴으로 듣는다
부서지며 사라지는 물로 된 말들
말들이 만드는 무수한 모래구멍과 생의 아픈 물거품들
울분과 분노의 나날들, 증오 때문에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여인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뼈아픈 기억들
시린 하늘에서 내려온 전깃줄 같은 빛줄기가 노인의 목을 옥죈다
노인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본다

작은 배가 한 척 해안으로 밀려온다
삐거삐걱 노를 저으며 누군가 저음의 노래를 부른다
노인은 젖은 눈을 여미고 노 젖는 자의 얼굴을 본다
어부차림을 한 죽음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만 이 배를 타고 가시지요?
배는 노인을 태우고 소리 없이 나아간다
천천히 자궁을 빠져나가듯 수평선 너머 내생으로 나아간다
배가 그리는 물결 파문들, 바다 저편 침묵으로 퍼져
방파제 끝에서 소녀가 손을 흔든다



첫 키스/함기석-


너의 입술에서
장미꽃이 피어난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새들이 날아가는 호수가 보인다
눈이 예쁜 물뱀 하나 뭍으로 올라온다
꽃밭을 지난다
앵두밭을 지난다
탱자나무 울타리 지나 내게로 온다
흰 벽돌담 넘어 내게로 온다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어린 뱀은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너의 혀
두근두근 내 입술에 살을 비빈다
나의 입술에서
빠알간 금붕어들이 쏟아진다
빠알간 코스모스 꽃잎들이 쏟아진다
아 가을이다
나는 손을 쭈욱 뻗어 
구름을 따 네 눈에 넣어준다
해와 달을 따 네 입에 넣어준다
하늘 가득 아름다운 피아노소리 울려 퍼진다 



실내악/함기석- 


고양이 체셔가 웃으며 건반 위를 걷는다 
연주가 시작되고 
오르간 양쪽에 불이 켜진다 
양초 대신 손이 꽂혀 타는 두 개의 촛대 

오르간 앞엔 팔 없는 소년 
( )가 앉아 있다 
괄호의 눈에서 
푸른 쇠구슬이 반음 차로 떨어질 때마다 
체셔는 체셔체로 걸음을 옮긴다 

원 스텝 투 스텝, 반음 쉬고 
흰건반 검은건반, 다시 반음 쉬고 
점프해 발을 바꾸는데 
음에 맞춰 혀를 날름거리는 사색가가 나타난다 

꿈틀거리는 이 침묵은 붉은 줄무늬가 또렷한 뱀이다 

고양이가 앞발로 톡톡 건드리자 뱀은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체셔의 웃음과 
( )의 사라진 팔을 번갈아 쳐다본다 

체셔는 웃으며 다시 체셔체로 걷는다 
건반 사이에서 
날개 가득 ( )색 피를 묻힌 새가 날아올라 
밤의 동공 속으로 날아간다


 

글자들이 타고 다니는 기차 / 함기석     

                                   

 

밤은 두 눈이 파도치고 있었다 
밤의 노란 링 귀고리가 살랑 흔들렸다 
글자들이 힐끔힐끔 나를 읽고 있었다 
글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봐 이 기차에 처음으로 사람이 탔어 
도대체 어딜 가는 길일까?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예쁜 글자 하나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는 모두 조약돌로 되어 있었다 
조약돌 구름과자 
조약돌 기린과자 
조약돌 토란과자 
조약돌 포도를 꺼내 입에 넣자 입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슬픈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꼭 다문 입술 뒤의 어두운 울림통을 생각했다 
포도 속에 뿌리 내린 빛과 음의 실뿌리들을 생각했다


취한 달이 지나갔다 
얼굴에 깊고 쓰린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창 밖 세상으로 빈 술병을 휙 집어던졌다 
낮에 먹은 상한 빛을 밤에 토하고 있었다 
 

말했다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 기차에 탈옥한 글자들이 탔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사람을 보면 죽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거 참 잘 됐네요 
내 뒷자리에서 홀쭉한 침묵이 말했다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허공으로 부드럽고 착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 함기석

 

 

어항이 있었어요
어항은 아기의 발처럼 아주 아주 작았는데
잘 울고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젖을 물리고
햇빛을 듬뿍듬뿍 뿌려 주었더니
나팔꽃처럼 쑥쑥 자랐어요


어항은 조금 커져 어항 속에
연못을 하나 갖게 되었어요
어항은 점점 더 커져
포파 아저씨가 사는 마을과 숲
꽃밭과 초원과 과수원도 갖게 되었어요
포파 아저씨가 집에서 시를 쓰고
새들이 호수에서 낚시놀이를 하는 동안
어항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온세상을 갖게 되었어요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어요
어항은 늙어 어느새 수염이 하얗게 달렸어요
어항은 어항 속의 세상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어항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올빼미들의 멋진 기타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시절이 너무도 너무도 그리워
탁구공처럼 다시 작아졌어요
 

이제 아주 아주 작아진 어항 속에는
아주 아주 작아진 온세상이 들어있어요
온갖 동물 식물 별과 구름들이 모두모두 들어있어요
밤마다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래가 나와
바다 속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네가 기린을 상상하면 어항에선
기린이 목을 내밀고 웃고
비행기를 상상하면 비행기가 날아올라요
 

혼자 밤길을 가기가 무서울 땐
숟가락으로 어항을 탁탁 두드리며 상상해 보세요
그럼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착한 호랑이가 나와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 줄 거예요
그러나 조심해야 해요
어항은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이 몰래 훔쳐 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눈썹 밑의 그 반짝거리는 마술 어항

 

 

 

뷰티샵 낱말과일들 / 함기석


 

토마토

유기산과 비타민 A, C가 풍부해 여드름 많은 문장과 지성피부를 가진 문장에 좋다.

 

수박

이뇨작용을 하여 과잉된 자의식의 부기를 확실히 빼준다. 속껍질 간 것을 냉장심장에 넣었다가 팩으로 사용하면 문장에 윤기가 생긴다. 냉찜질이 필요한 시에 좋다. 
 
레몬

산도가 높으므로 물 빛 소리를 10대 3대 1의 비율로 섞어 사용하면 좋다. 문장들은 잠자는 동안에도 피지를 분비한다. 피지를 없애려면 문장의 피부온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레몬즙이 효과만점이다.

 

자두

각종 과일산이 풍부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행간의 모공수축으로 인한 긴장유발 및 문장의 각질제거효과도 있다. 여백은 낱말들을 통해 문장의 피부수분밀도를 조절한다. 날씬한 시를 원하는 뚱뚱녀에게 좋다.

 

키위

피부미백효과에 좋은 비타민 C가 다량으로 들어 있어 시 안면부에 퍼진 기미나 주근깨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탱탱한 볼 매끈한 코를 원한다면 스팀타월 냉타월 번갈아 3분씩. 
 
오렌지

레몬보다 산도가 약해 몸 전체에 사용할 수 있다. 시의 엉덩이 가슴 성기 주변 등 어느 곳에나 사용 가능하다. 면역력이 약한 문장, 폐활량이 적은 문장의 코와 입 등 호흡기를 보호하는 데도 효과만점이다.

 

딸기

비타민 C와 젖산이 풍부해 문맥에 발랄한 봄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시 전체에 퍼진 악취제거 및 낱말들의 사유세포활성화효과도 있다. 씨는 버리지 말고 마침표로 사용하면 된다.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무더운 여름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한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들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본다
수학선생도 사회선생도 국사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

 

                             함기석

 

 

 

갑자기 형사가 찾아오면 
갑자기 나는 혐의자가 되고 용의자가 된다 
갑자기 킁킁거리며 개가 다가오면 
갑자기 나는 냄새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갑자기 탄환이 날아오면 갑자기 목표물이 된다 
곤충채집자가 나를 채집하면 난 이상한 곤충이 되고 
벌레연구가가 나를 연구하면 난 이상한 벌레가 된다

 

내가 수염을 기르면 초승달이 수염을 기른다 
내가 나팔을 불면 당나귀가 나팔을 분다 
내가 수영을 하면 비행기가 수영을 한다 
내가 속옷을 벗으면 가을 숲이 속옷을 벗고 
내가 섹스를 하면 호텔이 수평선과 토마토 섹스를 한다 
내가 세수를 하면 구름은 랄랄랄 면도를 하고 
내가 외투를 걸치면 고양이는 호호호 화장을 한다 
내가 외출을 하면 나무들은 하하하 담배를 피며 지나가고 
가로등은 내 머리에 노란 우유를 쏟는다

 

내가 창공의 무지개를 둘둘 말아 허리에 두르고 
눈썹 붙은 얌체 고양이 지지처럼 
벤치에 앉아 시계를 보고 또 보며 

시계 속으로 보이는 백만 년의 눈보라 
백만 년의 바람소리 백만 년의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다릴 때 
갑자기 골목에서 방글방글 나타난다 
갑자기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나타난 죽음이 
퍽! 나의 생을 핸드백처럼 낚아채 빙글빙글 달아난다

 

그리하여 내가 죽으면 노랑머리 콩나물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붕어빵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고등어유령이 죽는다 
어린 달걀들은 하늘을 맴돌고 
당신을 위해 아침마다 모닝콜을 불러주던 나의 노래는 
차디찬 물 속을 맴돌고 
나의 피 나의 눈물 나의 숨결은 허공을 맴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무가 죽고 새가 죽고 도시가 죽고 문명이 죽고 
천둥과 함께 백만 년이 흐르고 
번개와 함께 다시 백만 년이 흘러도 
빙글빙글 지구는 계속 돌고 
뱅글뱅글 슬픔도 고독도 우리들 눈깔처럼 계속 돌고 
뺑글뺑글 존재도 농담도 우리들 불알처럼 계속 돌고 
돌다가 돌다가 완전히 돌 때까지 
우주는 랄랄랄 계속 돌고 
시간도 히히히 계속 돌고 
죽음도 헤헤헤 계속 돌고  
말들도 깔깔깔 계속 돌고

 

 

뽈랑공원  / 함기석

 

뽈랑공원의 아름다운 정문이 열린다
꽃밭에서 햇빛과 나비들 춤춘다
뽈랑색 벤치들이 보인다
뽈랑새 두 마리 자유로이 공원을 날고 있다
물푸레나무 아래 꽁치처럼 예쁜 여자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아기가 젖을 빨다 스르르 잠이 들자
여자는 하늘 한복판을 푸욱 찢어
아기의 어깨까지 살포시 덮어준다
찢어진 하늘에선 푸른 물고기들이 쏟아지고
여자는 유모차에서 책을 꺼낸다
아기를 위한 자장가 뽈랑송을 부르며 책장을 넘긴다
여자가 책을 보는 동안 아기는 꿈꾸고
물고기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헤엄쳐 다니다
책 속으로 사라진다
한 청소부가 후문에 나타난다
이상하게 생긴 뽈랑 빗자루로 공원을 쓴다
그러자 공원이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면서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꽃밭이 사라진다
벤치들이 사라진다
나무들이 사라진다
하늘이 새들이 빛이 시간이 차례로 빨려들어가고
여자가 사라지면서 손에 들려 있던 책이 
청소부 발 아래로 떨어진다

청소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을 주워들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말들이 피운다는 뽈랑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연기를 내뿜으려 책을 펼친다
20페이지에 뽈랑공원이 나타난다
함기석이라는 휴지통이 보인다
여백이 되어버린 하늘이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행간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라진 새들은 사라진 빛을 향해 날아가고
여자가 머물던 물푸레나무 그늘 속에서
투명한 물고기들이 헤엄쳐나온다
샘물이 된 아기울음 흘러나온다

 

 

착란의 돌, 詩 
함 기 석 


빌딩숲에 절이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새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콤했다 활짝 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알몸의 여자가 목욕하고 있었다 황홀했다 정원으로 들어갔다 아카시아 꽃향기로 여자의 머릴 감겨 주었다 햇빛으로 상처 난 가슴과 허리를 씻어 주었다 여자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신선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린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다 알몸으로 뒹굴며 꿈같은 몇 분을 보냈다 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10여 년이 지나 있었다 황급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사원은 거대한 새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린 해바라기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 넌 무당벌레 넌 칠면조 넌 뚜껑 없는 주전자 이 곳은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유형지야 이 바보야! 난 날개를 푸득이며 새장 밖으로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밖으로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안으로 안으로 갇혔다 나는 지쳐 갔다 새장 속에서 내 청춘은 길을 잃고 말라 갔다 참담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다 오랫동안 방황했다 나도 나의 삶도 안으로 안으로 썩어 들어갔다 많은 밤을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대웅전에 불을 질렀다 나는 해바라기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염소가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가슴에 고인 썩은 바다를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금붕어처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나는 활짝 핀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로 간다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 무서운 새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찾는다 없는 길을 찾으며 나는 움직인다 내 주검이 누울 암흑의 그 자리를 맨손으로 파들어 가며 나는 쓰고 쓰고 또 쓴다 이 외롭고 잔인한 말의 사원에 갇혀

 

 

 아픈 방

 

                               함기석

 

 

  난 이 시 아픈 방이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소 어서 들어 오시오

왼쪽 벽에 스위치가 있소 누르지는 마시오 난 이대로 어둠 속에서

쉬고 싶소 불을 켜면 당신은 벽을 타고 흐르는 피, 의자 밑에 떨어진

떨어진 손을 보게 될 거요 난 그런걸 당신께 보이고 싶지 않소

 

  가만히 서서 책상을 바라보시오 책상은 칡넝쿨로 뒤덮여 있소

책상 밑으로 흐르는 계곡이 보이오? 계곡은 당신이 서있는 벽을

타고 천장 밖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흐르고 있소 얼마 전까지

이 방엔 한 여자가 살고 있었소 그녀는 스스로 숨을 끊고 계곡을

따라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떠났소

 

  0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창을 찾아 보시오 창은 말의 동공처럼

어둡게 깨져 있소 거기 서서 0시의 바깥세계를 바라보시오 밤의

잿빛 도시가 보이오? 도시의 강변 저편에 빌딩들이 보이고

아파트단지가 보일 게요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일 게요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일 게요 누군지 아시겠소? 아픈 방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오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픈 방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을 게요 가서 그랑 술이라도 한 잔 하시오 미안하오

이제 난 약을 먹고 쉬고 싶소 그만 나가주시오 당신이 이 방을 나설

때 여자의 손이 당신을 따라 갈 것이오 그럼 좋은 밤 보내시오

 

 

 

 

2008 <시인세계> 여름호

 

 

 고유한 방화범

                          함기석 


나의 구두는 우주선 
밤마다 내 두개골을 싣고 밤하늘을 유영한다
나의 구두는 잠수함
밤마다 황산으로 뒤덮힌 바다에 나를 내다버린다

구두는 나의 육체 나의 무덤인 언어
구두는 자신의 전생애를 
구두라는 제 이름의 새장에 갇혀
병든 새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상처받는다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감옥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무서운 질서
무서운 폭력, 나는 밤다다
검은 복면을 쓴 방화범이 되어
그 감옥 지하실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지핀다
내 육체 속에서 번식하는 내 아비의 우상들을 죽이고
발 아래 침묵하는 대지를 살해한다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장미를 계속해서 장미라 불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백 마리 뱀들이 우글거리는 관(棺)인 그것을
나는 간단히 시체라 부른다
이제, 장미는 빠알간 나의 시체
나는 밤마다 나의 시체에 불을 지른다

시인은 모두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썩어가는 세계의 항문과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는
고유한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함기석, <고유한 방화범> 전문
출전: <<국어 선생은 달팽이>>, 세계사, 1999, 67-8쪽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현대시》2008년 10월호

 

 


[감상]

 

가슴 밑의 갈비뼈를 가리키며 지난날 우리는 기타 치는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몸은 기타의 몸통이고 기타 줄(絃)은 갈비뼈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늙은 여자가 기타(몸)를 조율하는 방법으로 현(갈비뼈)을 죄거나 푸는 것이 아니라 핏줄로 조율합니다. 현의 탄력성을 조절하자면 줄감개로 해야 하는데 시인은 핏줄을 줄감개로 생각하나 봅니다.


줄감개였던 핏줄이 2연에서는 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끊는 것으로 현의 탄력을 극한으로 조절합니다. 주인공이 원하는 현의 탄력은 최고의 음을 만들 수 있는 그쯤이겠지요. 줄이 끊어진다는 건 핏줄이 끊어지는 것, 이런 흐름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줄이 끊어질 때 나오는 소리가 핏줄이 끊어지는 고통의 소리로 중첩되어 읽힙니다.


더구나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며] 樂士와 생체적인 모습을 한 번 더 복합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런 분위기를 강화시킨 뒤 3연으로 와서 [기억은 동맥으로 / 망각은 정맥을 타고 / 심장 아래 /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며 기억과 피를 치환시키고 염통을 자궁으로 바꾸어 좋거나 나쁜 기억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연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연속성 때문에 첫 번째 줄을 끊는 것만으로 모든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두 번째 줄을 끊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음의 파장사이로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다 종래엔 많은 기억의 찌꺼기들이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 화자는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이라 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나 둘 끊어 가다 보면 마지막 줄까지 다 끊어질 것이고 여자의 몸은 죽음 쪽으로 기울겠지요. 시인은 그 과정을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라든지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 핏물은 점점 / 소리 없는 음이 되어 /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라는 언술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匠人정신을 가지는 것이 사회의 미덕으로 인식되는 것이고 보면 이 시를 以上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악사는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기겠지요. 그것은 바로 최고의 화음을 뜻하는 부존재의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최고의 삶을 뜻하는 부존재의 理想일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꿈일 수도 있겠네요.


시인은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라든지 [흰 새가 되어 /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라는 언술로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하지만,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 침묵이 흘러나온다 /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라는 등의 언술로 장인정신의 결과를 말합니다.


정신이 추구하는 끊임없는 열정이 함께 하고 있다면, 흉부가 기타로 변할 만큼 오랜 또는 격한 삶을 겪은 여자처럼 죽음이 육신을 어찌한다 해도 그 순간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황홀하지 않을까요? 더 좋은 삶에 대한 의지가 함께 하는 순간이라면, 좋은 시에 대한 열망이 함께 하는 순간이라면 말입니다.  --  여 백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70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2017-10-10 0 2322
769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2017-10-09 0 2242
768 시창작에서나 시감상에서나 모두 고정관념 틀을 깨버리는것 2017-10-09 0 2232
767 시인은 시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할줄 알아야... 2017-10-09 0 3096
766 난해함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해지기... 2017-10-09 0 3320
765 대추 한알속에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 2017-10-09 0 3623
764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2017-10-09 0 1960
763 "우리 한글이야말로 시를 위한 최적의 언어입니다"... 2017-10-09 0 2140
762 "글자들이 권총을 쏜다"... 2017-10-09 0 2198
761 문학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인간성을 써라... 2017-10-07 0 2266
760 올해 노벨문학상 주인 나타나다... 2017-10-07 0 2015
759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음악을 낳다... 2017-10-06 0 2030
758 [고향문단소식] - 룡정엔 문사 - 송몽규 고택과 유택이 있다... 2017-10-02 0 2060
757 윤동주 = "병원"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2017-10-01 0 2385
756 불멸의 시인 - 윤동주와 불멸의 문사 - 송몽규의 판결문 2017-09-30 0 2738
755 윤동주네 기숙사에는 "팔도 사투리"가 욱실욱실하였다... 2017-09-30 0 1985
754 불멸의 문사 - 송몽규를 재다시 알아보기... 2017-09-30 0 3100
753 일본 포스트모던 시인 - 테라야마 슈우시 2017-09-27 0 1785
752 [이런저런] -마광수님, 인젠 님과의 인터뷰를 지옥에가 할가ㅠ 2017-09-26 0 2136
751 글을 개성적으로 쉽게 쓰는데 목표를 두고 열심히 습작하기... 2017-09-26 0 2004
750 마광수님의 "윤동주연구" = 한국 최초 "윤동주 시 장편논문" 2017-09-26 0 1882
749 동시를 "하이퍼"로 써도 됨둥... 아니 됨둥(ㄹ)... 2017-09-24 0 1970
748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요"?!... 2017-09-22 0 1974
747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2017-09-22 0 1841
746 러시아 시인 - 네크라소프 2017-09-22 0 3345
745 마광수님, "창조적 불복종"때문에 저세상 길 택했을가... 2017-09-21 0 2084
744 마광수님, 력사앞에서 님의 "문단유사" 알아보기 2017-09-21 0 2183
743 마광수님, 오늘도 이 시지기-죽림은 님땜에 잠을 설칩니다... 2017-09-21 0 1911
742 "시계란 시계는 다 오후 다섯시였다"... 2017-09-20 0 1839
741 동시를 "하이퍼"로 써도 됨둥... 아니 됨둥(ㄷ)... 2017-09-19 0 2184
740 마광수님, 사라는 "사라"땜에 님께서 등천길 가신걸 알가ㅠ... 2017-09-19 0 2355
739 시가 언어이지만 시인은 그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줄 알아야... 2017-09-19 0 2512
738 시는 메마르고 거친 세상을 뛰여넘는 행위예술이다.. 2017-09-19 0 1902
737 음유시인은 그 누구도 길들일수 없는 짐승이며 악마라고?!... 2017-09-17 0 1977
736 프랑스 음유시인 - 조르주 무스타키 2017-09-17 0 1900
735 반전을 노래한 음유시인- '밥 딜런' 대표곡 2017-09-17 0 3031
734 [시문학소사전] - "음유시가"란?... 2017-09-17 0 3155
733 섬과 파도 2017-09-17 0 1957
732 미국 시인, 환경운동가 - 게리 스나이더 2017-09-17 0 2246
731 시를 쓰는데는 음악과 그림이 아주 많이 도움이 된다... 2017-09-16 0 1830
‹처음  이전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