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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시인 - 윤동주와 불멸의 문사 - 송몽규의 판결문
2017년 09월 30일 23시 32분  조회:2820  추천:0  작성자: 죽림





사면 도장 찍힌 윤동주 판결문
사면 도장 찍힌 윤동주 판결문(도쿄=연합뉴스)
일본 교토지검이 보관 중인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판결문.
판결문에는 윤동주 시인의 성이 '윤'이 아닌 '히라누마'(平沼)로 표기돼 있으며
성명 표기 바로 위에 "쇼와(昭和) 21년(1946년) 칙령 제511호 대사령에 의해 사면됐다"는
문구의 도장이 찍혀 있다. (곤타니 노부코 씨 제공)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군 포경마을 76번지 
주거 교토시 사쿄꾸 다나까다카하라쪼(京都市 左京區 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타 아파트내 
사립 도지샤(同志社) 대학 문학부 선과학생 히라누마 도쵸(平沼東柱)[윤동주] 대정 7년(1918년) 12월 30일생 
 
위 사람에 대해서 치안, 유지, 법위반 피고사건에 있어서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다카도(江島孝)가 관여하는 상부심리를 거치는 판결을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에 있는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소화 17년(1942년)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동경 릿꾜(立敎)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며, 같은 해 10월 이후 교토 도지샤(同志社)대학 문학부 선과에 전과를 해서 현재에 이르는 사람으로, 유년 시절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며 교우에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소위 차별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원망의 생각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시키며,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 한다 라고해서, 그 결과 이에 따라서 조선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써 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의 현시점에 있어서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 독립운동 실패의 발자취를 살피며, 조선인의 능력과 민족성을 향상시키며 독립운동의 소질을 배양해야만 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를 하기에 이르러,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해있는 과학력이 열세인일본의 패배를 몽상(夢想)하고 그 때가 조선의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고 얻을 수 있으며, 일본이 망한다고 하는 신념을 갖추었으며 신념을 굳게 하고자 목적달성을 위하여 도지샤(同志社) 대학의 전교한 후에 이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거주하고 있는 교토 제국 대학 문학부 학생인 송촌(宋村),몽규(夢奎)등과 자주 회합을 해서 상호의 독립의식의 양양을 고취시키는 것 외에 조선인 학생 마쯔바라 데루타다(松原輝忠),시라노키요히고(白野聖彦) 등에 대해서 그 민족의식유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있는 중 
 
 
제1. 송촌(宋村) 몽규(夢奎)[송몽규]
 
(가) 소화 18년(1943년) 4월 중순경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쪼 60번지(京都市 左京區 北白川 東平井町) 시미즈 에이찌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으로부터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상호 교환을 하며 논난공격(論難攻擊-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함)을 하면서 함께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고 비판을 가하며 또 제도는 영구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하여 일대 위력을 가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논단(論斷)했다. 
 
(나)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 시외(京都市外) 야세(八瀨) 유원지에서 같은 사람과 같은 민족의식을 포회(抱懷) 하고 있는 릿꾜(立敎) 대학 학생 시로야마(白山仁俊)와 회합을 하였으며 조선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의 무기를 모르면서도 징병제도의 실시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는 것에 이르러서 장래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배에 봉착(逢着)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해 독립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라는 뜻의 민족적 입장으로부터 갖춘 제도를 구가(謳歌)하고 혹은 조선 독립 후에 통치방식에 있어서 조선인의 당파 힘 및 의심하는 마음, 시기심을 강하므로 독립하는 날에 군인 출신자에 강력한 독재주의에 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런 통치는 곤란하다라고 하는 논정(論定) 끝에 독립실현에 공헌해야만 하는 각자 실력에 양성에 전념하는 것이 요지로서 강조를 했다. 
 
(다) 같은 해 6월 하순경에 피고인의 거주지의 같은 시 같은 구 다나까 다카하라쪼(田中高原町)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위 사람과 찬도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있어서 논의를 하고 조선은 일본에 정복을 당해 시간이 많이 지나가지 않았으나 일본은 세력을 강대해졌기 때문에 현재 바로 찬도라보스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는 것으로서 쉽게 접촉하는 상태에서도 한편 민족의식은 왕성하며 다른 일본의 전력 피폐해서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위대한 인물의 출현은 불가피하고 각자 그 좋은 기회를 잡아 독립달성을 위하여 궐기를 해야만 한다고 서로 격려했다. 상호독립의식에 격발(激發)에 힘써야 한다. 
 
 
제2. 마쯔바라 데루타다(松原輝忠)에 대하여 
 
(가) 동년 2월 초순경 앞에서 서술한 같은 타케다 아파트에 있어서 조선내(朝鮮內) 학교에 조선어과목의 폐지 당했음을 논난(論難) 해서 조선의 연구를 권장하고 소위 일본과 조선일체(一體) 정책을 비방하며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독립달성의 필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 동년 2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의 교육기관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과제를 착수하고 더욱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 차별 압박이 있다고 지적을 하며 조선 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무가 된다고 역설했다. 
 
(다) 동년 5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대동아 전쟁에 따라 이 전쟁은 항상 조선독립달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고찰하는 것을 요지로 하며 이것을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가까운 장래에 있어서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결국 조선민족은 일본의 동화시켜야 하며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자는 그 번영을 서기(庶幾) 하기 위하여 일본패전을 기회로 해서 자기의 견해를 계속 해서 피력했다. 
 
(라) 동년 7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에 행복추구의 견지에 입각하여 상기의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에 같은 사람이 민족의식을 유발시킬 것을 부심했다. 
 
 
제3. 시라노 키요히고(白野聖彦)[장성언] 에 대하여 
 
(가) 소화 17년(1942년) 11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 있어서 조선총독부 조선어학회 대하여 검거를 논난(論難) 하고 나서 문화의 열망에 필경 민족의 궤멸(潰滅)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을 역설하며 예의(銳意) 조선문화의 앙양에 노력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지시했다. 
 
(나) 동년 12월 초순경 교토시 사쿄쿠 긴카쿠시(京都市 左京區 銀閣寺) 부근 거리에 있어서 개인주의의 사상을 배격지탄(排擊指彈)하고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형벌피해를 피해서 민족전체의 번영을 초래해야만 한다는 명심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다) 소화 18년(1943년) 5월 초순경앞에서 상술한 같은 장소에 있어서 조선은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하고 문화적인 침대(沈擡)에 있어서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의 문화를 발양(發揚)하기 위하여 조선독립을 실현시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역설했다. 
 
(라) 동년 6월 하순경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은 민족의 의식강화에 자력으로 자기의 소장하고 있는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을 대여하고 조선사 연구에 종어(慫漁)했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의 앙양(昻揚)에 힘쓰며 국채를 경혁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하며 증거를 보고 고려되는 것을 판단하고 보이는 사실은 피고인을 당 공정(公廷-공개 재판)에 있어서 판단하고 보여지는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인정되며 법률에 있어서의 피고인의 판시소위(判示所爲)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소정의 형기 범위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형법 제21조 2항에 의거하여 미결 구류 일 수 중 120일을 본 형에 포함시킬 것. 
 
 
위와 같은 주문에 의하여 판결함. 
 
쇼와 19년(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2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石井)
판사 와타나베 쓰네조
판사 기와라타니 스에오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 전문 - 일본 교토 재판소
   

판결

본적 : 조선 함경북도 청진 부포항정 76번지

(일제 강점기 때 조부 윤하현을 호주로 한, 윤동주 일가의 호적상의 본적은 청진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증조부 때인 1886년에 함북 종성군에서 북간도로 이주하여 계속 살았으니 청진과는 사실상 연고가 없다.) 


주소 :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다카하라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 내


사립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

(일제 대 일본의 대학 학부에서는 당시의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를 거치지 않은, 전문학교 출신자는 동등한 입시를 거쳐 같은 강의를 받아도 선과로 구별했었다. 그러나 행정상의 구별일 뿐 실질적인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동주는 문학부 영문학과 학생이었다.) 


윤동주, 12월 30일생

(1918년 다이쇼 7년 일제 강점기 때 호적에 윤동주는 1918년(다이쇼 7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1917년생이다. 입적 신고가 늦었었다.)

위 사람에 대한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 태어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쇼와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 때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나 동년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 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 간의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이 원차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절멸하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 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현시의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 전쟁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도시샤 대학에 전교한 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 있던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조선인 학생 마쓰바라 데루타다 창씨명인 마쓰바라 데루타다의 본명은 알 길이 없다. 장성언은 윤동주의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2년 선배로서, 교토에 옮긴 후 알게 된 사이로 짐작되며 퍽 가까이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한다.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송몽규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고모의 아들)으로서 서로 동갑이며, 명동 소학교, 용정 은진중학교 하급반(송몽규의 출신 주학은 용정 대성중학교) , 연희전문 등에서 함께 공부했고, 교토 대학 사학과 재학 시절 윤동주와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2년 선고를 받고(공판일 1944년 4월 13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3월 10일 옥사했다. 그는 용정 은진중학 3학년 초(1935년) 에 남경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1년간 다녀와 그의 본적지인 웅기의 경찰서에 반년 가까이 구금된 일이 있다. 

(가) 1943년(쇼와 18년) 중순경 동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히가시히라이정 60번지 시미즈사카에 일택에서 회합하고 동경으로부터 조선, 만주 등의 조선 민족에 대한 선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서로 이를 논란 공수함과 동시에 조선의 징병 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한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한 일대 위력을 더할 것이라고 논단하고, 

(나) 동년 4월 하순경 교토 시외 야세 유원지에서 동인 및 같은 조선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 대학 학생 백인준 백인준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급생이었으나 중도에 도쿄 릿쿄 대학으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일은 알 길이 없다. 위 여러 사람 중 이 사건으로 윤동주와 함께 구속 입건된 사람은 송몽규뿐이지만, 역시 모두 문초의 괴로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 회합하고 서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 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 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같고 군사 지식을 체득함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력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구가하고, 혹은 조선 독립 후 통합 방식에 관하여 조선인은 당파심 및 시기심이 강하므로 독립의 날에는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하지 않으면 이의 통치는 곤란할 것이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다) 동년 6월 하순경 피고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 다카하라 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동인과 찬드라 보즈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조선은 일본에 정복되어 아직 일천하고 또한 일본은 세력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곧바로 동씨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으려 해도 쉽게 이루 수 없는 상태나,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다른 날 일본의 전력 피폐하고 호기 도래의 날에는 동씨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필지하도록 각자 그 호기를 잡아 독립 달성을 위하여 궐기해야 한다는 뜻을 서로 격려하는 등, 상호 도립 의식의 격발에 힘쓰고, 


둘째, 마스바라 데루타다에 대해서는, 

(가) 동년 2월 초순경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 내 학교의 조선어 과목의 폐지됨을 논란하고 조선어의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 문화의 유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소이를 강조하고, 

(나) 동년 10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의 교육 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더욱이 내선 간에 선별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 독립이 급무하다는 뜻을 역설하고, 

(다) 동년 5월 하순 같은 장소에서 대동아 전쟁에 관하여 도오 전쟁은 항상 조선 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함을 요하며, 이의 호기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의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 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할 뜻의 자기의 견해를 누누이 피력하고, 

(라) 동년 7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의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유발에 애쓰고, 


셋째, 장성언에 대하여는, 

(가) 1942년(쇼와 17년) 11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의 궤멸이 틀림없는 소이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 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할 뜻을 지시하고 

(나) 동년 12월 초순경 교토 시 사쿄 구 긴카쿠지 부근 길가에서 개인주의 사상을 배격 지탄한 뒤, 조선 민족인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하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다) 1943년(쇼와 18년) 5월 초순경 앞에 서술한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의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하여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소이를 역설하고, 

(라) 동년 6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동인의 민족의식 강화에 자하기 위하여 자기가 소장한 <조선사 개설> 을 대여하고 조선사의 연구를 종용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쓰고, 그로써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로 살피건대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서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어 보건대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그 소정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고 형법 제21조에 의하여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44년(쇼와 19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2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 
판사 와타나베 쓰네조 
판사 기와라타니 스에오 
 
============================

 
日 검찰청, 윤동주에 이어 송몽규 재판판결문 공개
 
 
2011년 08월 02일 (화) 이수경
 

[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 이수경 교수

지난 7월 22일(2011) 오전 10시, 교토지방검찰청이 시인 윤동주의 고종 사촌형으로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송몽규(북간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거쳐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유학 중 윤동주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당한 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1917년9월28일~1945년3월7일)의 재판 판결문 전문을 전격 공개했다. 

일제 강점기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상범으로 취급된 사람들의 기록 공개가 이뤄지지 않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작년의 윤동주 재판 판결문 공개에 이어 이번 송몽규 재판 판결문 공개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가 판결문을 몰래 베껴서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이 배경에는 윤동주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평화를 사랑한 정신을 기리며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 인간적 교류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윤동주가 교토에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장소인 우지강 주변에 시비를 건립하려는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대표 安斎育郎)의 공로가 크다. 특히 곤다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은 윤동주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한 가정의 주부지만 침략전쟁을 자행한 일본에 태어난 시민의 양심으로서 결코 전쟁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윤동주 시비 건립 운동을 통하여 널리 알리는데 힘써 왔다. 그리고 윤동주 및 송몽규의 판결문과 자료 공개를 요청하였고, 다른 형태로 판결문 내용이 알려져 있는 터라 일본 검찰청도 공개에 응한 것이다. 
 

   
▲ 판결문 확인을 위해 교토 검찰청 앞에 모인 입회자들

필자는 1학기 수업이 끝난 7월 22일로 날짜를 조정하여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갔다. 오전 10시, 교토 검찰청 로비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입회자인 곤다니 노부코 씨와 미즈노 나오키 교수(水野直樹,교토대학교)와 필자(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그리고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 대표의 바쁜 사정으로 대리 출석을 한 가토 히데노리 (加藤英範)변호사, 하사바 기요시(波佐場清) 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이 판결문 확인을 하였다. 

원래는 판결문과 취조 기록은 별도 보존을 하므로 취조 기록 내용은 먼저 폐기 처분을 하고, 이번 송몽규(지검 기록번호 19번)나 윤동주(지검 기록번호 15번) 등의 재판 판결문이 들어있는 『금고 이상 재판 원본(禁錮以上裁判原本)』 (1944년 1월—6월분)파일은 영구 보존을 하도록 되어있다고 기록과의 담당자인 야마모토 씨가 설명을 한다. 이번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서, 송몽규의 조카이자 역사학자로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였던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판결문을 보면 1944년 4월 13일에 선고를 받고 4월 17일에 확정이 되어있다. 송몽규의 본적은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로 되어 있고, 주거지는 교토 사쿄쿠 키타시라가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방 (京都市左京区北白川東平井町60番地 清水榮一方)이 되어있다.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선과학생인 송몽규를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있어서 교토 지방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고니시 노부하루 판사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알기 쉬운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밤’, ‘하늘과 더불어’ 등의 시가 있다) 문학 보다는 독립 운동에 결여된 이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어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조선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판결문 내용을 보면 우선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이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차별적 대우와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한 현실 및 징병제도를 역으로 활용하여 국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발상,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도록 조선을 이끌 훌륭한 지도자 양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 전개를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송몽규의 행동은 당시 일본인이었다면 영웅적 운동가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조국의 독립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모순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송몽규의 조국 독립에 대한 갈망과 독립 운동의 이론적 학문적 필요성은 냉철한 현실 대처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고, 징병제도를 통해 무기에 대한 지식을 지닌 뒤, 그런 힘으로 일본의 패망의 시기에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 후의 시대를 이끌 지도자 등의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조선이 독립된 뒤의 사회적 운영에 대비한 이론까지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대동아전쟁이란 미명하에 일본은 곧 패망을 하게 되나, 그는 윤동주와 함께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로 옮겨지고, 매일 밤 이름 모를 주사를 맞다가 윤동주를 1945년 2월 16일에 잃은 뒤, 본인도 3월 7일에 절명을 하게 된다. 큐슈제국대학의 생체실험도 당시에 여러 형태로 행해졌기에 그들도 그러한 희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 27세의 청년은 조선 독립만 꿈꾸며 생애를 태웠지만 결국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은 중국 연변의 명동 고향땅 언덕위에 잠들고 있다. 

2011년 7월 4일, 필자가 담당하는 인권 교육 수업에서 송몽규와 윤동주를 비롯한 일본 특별고등경찰의 폭압으로 희생이 된 한일 문학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설명과 강연, 낭송 등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학을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갈구하였던 만큼, 전원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학생들에게 그들과 같은 20대의 삶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던 전쟁 폭압을 두 번 다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 한 셈이다. 

용정의 언덕에는 청년 문사 송몽규의 묘가 윤동주 묘 옆에서 고즈넉이 세월의 풍화 속에 침묵하고 있으나, 진정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지혜를 모색했고 민족의 문화가 말살 당하는 안타까움에 가슴 아파하며 독립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음을 판결문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살고 있다는 감사와 더불어 그들이 못 다한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책임을 느끼며 다시금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풍화된 역사의 흐름이 있어도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의 불행을 대신 짊어지고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려고 하다가 희생된 조상이 있었음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닐까? 

필자의 학교에는 매년 조선족 출신의 응모자도 많이 입시에 응한다. 그들은 모두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그럴싸한 내용의 제목으로 응시를 한다. 그러나 면접을 하면서 참으로 실망할 때가 많다. 용정 출신이라기에 반가워서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등을 물어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이지만 중국 국적이고 어릴 때부터 중국에 대한 교육을 받을 테니 교육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이라면 조선족이 왜 중국에 살게 되었는지, 왜 자신이 조선말을 포함한 다언어 사용자가 되었는지, 내가 해외에 나갔을 때 알릴 수 있는 고향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는지, 적어도 길림 연변 출신의 해외 유학생이라면 문화 교류 차원에서라도 지식을 가져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일본 시민들이 이토록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건만, 정작 그들의 고향에서 온 학생들은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면 그들의 20대의 죽음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을까? 누구를 위한 삶이었던가? 그들의 활동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다 한 많은 삶을 살다가 희생이 된 것이다. 


자신의 고향도 모르는 사람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회 문화 연구를 한다고 와도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 연구 내용에 대해 접근하고 규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변부터 관심을 가지고 파고드는 자세, 그리고 전문적 지식을 배워서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진취적 발상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대학이기도 하기에, 송몽규나 윤동주와 같이 이국땅에서 공부를 하려는 학생이라면 사회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살다가 희생이 된 그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오는 8월 2일에서 7일까지 교토의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에서 열리는 ‘제31회 평화를 위한 교토의 전쟁전’에서 송몽규 판결문과 윤동주 판결문이 자세히 공개되고, 기간 내에 곤다니 사무국장의 설명 안내 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8월 2일 오전에는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윤동주와 전쟁 말기의 치안 유지법—조선 독립운동의 검증’ 강연이 열린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 각종 스펙 만들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듣지만, 교토 등의 해외 지역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서 한국 관련 역사 유적지를 조사도 해보고, 발로 뛰면서 지역 도서관이나 자료실을 방문하여 한일 관계사 자료나 지역 관련 사료 찾기 등을 해 보면서 우리가 걸어 온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번역 이수경) >

피고는 만주 간도성에 거주하는 조선 출신 학교 교사의 집에 태어나서 같은 땅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어릴 때부터 중화민국인의 박해를 받고 민족적 비애를 체험하여 민족적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어, 1935년 4월경 선배의 권유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남경 소재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의 아래에 들어가 운동에 참가하면서 점점 그 의식을 높였고, 나중에 같은 파 내부의 파벌 투쟁 등의 추악한 내부 실정을 알게 되어, 같은 해 11월경 제남(산동성)에 있는 조선 독립운동 단체 이웅 일파 산하에 들어가는 등의 활동에 종사하였기에 1936년 4월경부터 본적지 웅기 경찰서에 있어서 유치 취조를 받고, 같은 해 8월 말경에 석방된 경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 뒤, 간도성 용정 국민고등학교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서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서 입학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나 변함없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특히 조선 국내의 각 학교에 있어서 조선어 교육과목의 폐지와 함께 언문에 의한 신문 잡지의 폐간 등의 사실을 알게 되어 제국 정부(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두고 필경 조선의 모든 특이성을 몰각시키고, 그 고유문화를 절멸시켜서 드디어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도한다고 망단(멋대로 망상하고 판단)하여 깊이 그 시정을 원망한 결과, 여기에 조선 민족의 자유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 통치권으로부터 이탈시켜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실현을 위해서는 당면 조선인 일반 대중의 문화 수준을 앙양시켜서 그 민족적 자각을 유기(유발 상기)시켜서 점차 독립의 기운을 양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첫장

제1. 1942년12월 초순경에 하숙집인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카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 방에 있어서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제3 고등학교 생도인 고희욱(창씨한 다카시마 성으로 기재)에 대하여 종래의 조선 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므로 확고한 이론을 가지지 못했기에 단순히 충동적인 감정의 폭동으로서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자신들이 독립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과거의 독립 운동을 비판하며 장래의 방책을 지시하며 동인(고희욱)의 독립 의식의 앙양을 기도했고, 

제2. 1943년 4월 중순경 앞에 기록했던 하숙집에서 초등학교(소학교) 시절부터 친구로서 같이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도시샤 대학교 문학부 학생 윤동주(창씨한 히라누마의 성으로 기재) 에 대해서 피고인이 병 요양을 위해 약 4개월간 귀성 중에 견문했던 만주국 조선 등의 객관 정세에 대해서 최근 조선에 있어서는 총독부의 압박에 의해 소학생 중등학생은 거의 국어(일본어)를 사용하고 있고, 조선어 및 조선문은 점차 멸망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 혹은 만주국에 있어서 주요 식량의 배급에 관하여 조선인은 내지인(일본인)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등을 알려서 이러한 것을 교대로 논란 공격한 것 외,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한 민족적 입장으로 상호 비판을 덧붙이고 해당 제도는 되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더해야 하는 것이라고 논단(논하고 단정)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앙양에 노력하였고, 

제3.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시외 하츠세 유원지에서 윤동주 및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대학교 학생 백인준(창씨한 시로야마 성을 기재)와 회합하여 교대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새로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기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틀림없이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서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민족적 입장에서 해당 제도를 구가하였고, 혹은 조선독립 후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조선인은 당파심 및 청의심(정의감)이 강하므로 독립을 하게 되면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통치는 곤란하게 될 거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해야 할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강화를 도모했다. 

제4. 같은 해 6월 하순경 앞의 하숙집에서 고희욱에 대한 대동아 전쟁은 무력에 의한 해결이 곤란하므로 결국 강화조약에 의해 종결될 가능성이 크고, 해당 회의에는 버마(먄마), 필리핀 등은 독립국으로서 참가하려고 할 그 시기에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서 한꺼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민족의식의 유발에 노력하였고, 

제5. 같은 해 6월 하순경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드라 보스( 인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가 주석)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태두(등장)에 대하여 논의한 뒤, 조선은 일본에 정복당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즉시로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 운동 지도자를 얻으려고 해도 쉬이 얻어지지 않는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언젠가(후일) 일본의 전력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반드시 필요하니 각자 그 좋은 때를 잡아서 독립 달성을 위해 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국체를 변혁하려는 목적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를 조사하여 판시(재판에서 제시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 판시 동 취지의 진술에 의해 이것을 인정하였다. 

법률에 의거하여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기로 한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함. 

1944년4월13일 

교토지방 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판사 고니시 노부하루(小西 宜治) 
판사 후쿠시마 노보루(福島 昇) 
판사 호시 도모타카 (星 智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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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피고인는 만주국 간도성에 거주하는 조선 출신 학교 교사의 집에 태어나서 같은 땅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어릴 때부터 중화민국인의 박해를 받고 민족적 비애를 체험하여 민족적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어, 1935년 4월경 선배의 권유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남경 소재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의 아래에 들어가 운동에 참가하면서 점점 그 의식을 높였고, 나중에 같은 파 내부의 파벌 투쟁 등의 추악한 내부 실정을 알게 되어, 같은 해 11월경 제남(산동성)에 있는 조선 독립운동 단체 이웅 일파 산하에 들어가는 등의 활동에 종사하였기에 1936년 4월경부터 본적지 웅기 경찰서에 있어서 유치 취조를 받고, 같은 해 8월 말경에 석방된 경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 뒤, 간도성 용정 국민고등학교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서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서 입학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나 변함없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특히 조선 국내의 각 학교에 있어서 조선어 교육과목의 폐지와 함께 언문에 의한 신문 잡지의 폐간 등의 사실을 알게 되어 제국 정부(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두고 필경 조선의 모든 특이성을 몰각시키고, 그 고유문화를 절멸시켜서 드디어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도한다고 망단(멋대로 망상하고 판단)하여 깊이 그 시정을 원망한 결과, 여기에 조선 민족의 자유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 통치권으로부터 이탈시켜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실현을 위해서는 당면 조선인 일반 대중의 문화 수준을 앙양시켜서 그 민족적 자각을 유기(유발 상기)시켜서 점차 독립의 기운을 양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첫장





















제1. 1942년12월 초순경에 하숙집인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카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 방에 있어서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제3 고등학교 생도인 고희욱(창씨한 다카시마 성으로 기재)에 대하여 종래의 조선 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므로 확고한 이론을 가지지 못했기에 단순히 충동적인 감정의 폭동으로서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자신들이 독립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과거의 독립 운동을 비판하며 장래의 방책을 지시하며 동인(고희욱)의 독립 의식의 앙양을 기도했고, 

제2. 1943년 4월 중순경 앞에 기록했던 하숙집에서 초등학교(소학교) 시절부터 친구로서 같이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도시샤 대학교 문학부 학생 윤동주(창씨한 히라누마의 성으로 기재) 에 대해서 피고인이 병 요양을 위해 약 4개월간 귀성 중에 견문했던 만주국 조선 등의 객관 정세에 대해서 최근 조선에 있어서는 총독부의 압박에 의해 소학생 중등학생은 거의 국어(일본어)를 사용하고 있고, 조선어 및 조선문은 점차 멸망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 혹은 만주국에 있어서 주요 식량의 배급에 관하여 조선인은 내지인(일본인)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등을 알려서 이러한 것을 교대로 논란 공격한 것 외,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한 민족적 입장으로 상호 비판을 덧붙이고 해당 제도는 되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더해야 하는 것이라고 논단(논하고 단정)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앙양에 노력하였고, 

제3.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시외 하츠세 유원지에서 윤동주 및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대학교 학생 백인준(창씨한 시로야마 성을 기재)와 회합하여 교대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새로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기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틀림없이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서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민족적 입장에서 해당 제도를 구가하였고, 혹은 조선독립 후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조선인은 당파심 및 청의심(정의감)이 강하므로 독립을 하게 되면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통치는 곤란하게 될 거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해야 할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강화를 도모했다. 

제4. 같은 해 6월 하순경 앞의 하숙집에서 고희욱에 대한 대동아 전쟁은 무력에 의한 해결이 곤란하므로 결국 강화조약에 의해 종결될 가능성이 크고, 해당 회의에는 버마(먄마), 필리핀 등은 독립국으로서 참가하려고 할 그 시기에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서 한꺼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민족의식의 유발에 노력하였고, 

제5. 같은 해 6월 하순경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드라 보스( 인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가 주석)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태두(등장)에 대하여 논의한 뒤, 조선은 일본에 정복당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즉시로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 운동 지도자를 얻으려고 해도 쉬이 얻어지지 않는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언젠가(후일) 일본의 전력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반드시 필요하니 각자 그 좋은 때를 잡아서 독립 달성을 위해 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국체를 변혁하려는 목적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를 조사하여 판시(재판에서 제시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 판시 동 취지의 진술에 의해 이것을 인정하였다. 

법률에 의거하여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기로 한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함. 

1944년4월13일 

교토지방 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판사 고니시 노부하루(小西 宜治) 
판사 후쿠시마 노보루(福島 昇) 
판사 호시 도모타카 (星 智孝)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조선사 개설>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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