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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산된 꿈과 환멸의 수식 사이에 흐르는 죽음의 광시곡 김석준 문학평론가
뜬금없이 광주와 아우슈비츠를 노래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를 수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요원하다. 늘 말할 수 없는 잔여가 공리 앞에 매개되어 진리의 수식을 혼돈으로 이끈다. “말해질 수 없는 말들의 저 흰 거품”(「수직선 = 수평선」중)들이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한, 혹은 모든 수식이 “저승 시(市)”(「유령 슈뢰딩거」중)에서 소거되어 인간학을 불능으로 표기하는 한, 말―세계는 늘 분열의 표상만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게 된다. 따라서 꿈이 사산되고, 환상의 공식에 죽음이 대입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들은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꿈이 완벽하게 절멸한 곳에 언어를 위치시키게 된다. 특히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꿈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글픈 악령”(「광주에서」중)에 사로잡힌 환멸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죽음의 광시곡이 시말 내부에 산종된 채, 불길하게 언어의 횡단면을 종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수식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는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죽음을 수식의 연산작용으로 표현하고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는가?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죽은 빛”, 즉 “빛의 사체”(「화가 난다」중) 어디쯤에서 발화되는 불길한 노래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본질과 상면하는 인간학적 운명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표현이 사산되고, 시간의 증명은 완벽하게 유산된다. 왜냐하면 너―나를 포획하는 시간의 정체가 “생의 늑골”을 지나 “0시의 바깥 세계”(「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중)로 탈주하는 주검의 노래만이 시의 진실을 정확하게 지시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으로 굴절되고, 공간은 시간의 표현법을 완수하지만, 인간학은 “무의 미궁”(「화가 난다」중)으로 침몰하여 “침묵”(「밤의 실내악」중)의 공간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산된 아기”의 “환청”(「종이비행기」중)이 “허공의 길”(「즉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중) 위에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죽음의 광시곡으로 탄주하기에 이른다. 주검들이 널브러진 “고통의 땅”(「괴델 플라워」중) 위에 레퀴엠이 울려 퍼진다. 물론 시간의 흔적 전체가 “주검의 연속체”(「괴델 플라워」중)로 자신의 수식을 증명하겠지만, 함기석이 바라본 언어의 운명은 그리 밝은 것이 되지 못한다. “서로의 아픈 꿈”(「백령도」중)이 시말에 침전되고, 치유될 수 없는 존재의 “깊은 상처”(「미스 모닝과의 아침 식사」중)가 언어로 발화된다. 어쩌면 시인이라는 숙명과 마주선 시살이는 “죽음이 다니는 전용 도로”(「얼굴」중)에서 만난 미지의 기호들을 수식으로 환원시키는 숭고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죽음을 포획하고, 죽음은 “몸속 더 깊은 우주”(「훌라후프 돌리는 여자」중)의 신비와 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노래하는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저녁의 비행운(飛行雲」중)은 어떤 운명의 시간인가? 물론 함기석의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단 한 사람”(「단 한 사람」중)의 환멸의 세계상을 시말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언어의 심연에 “고통에 살다 백골”(「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로 탄화된 원혼들의 노래가 저며져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늘의 문체”(「허공의 장례」중)가 직조한 인간학적인 현실에 다름 아니다. 환상이 사라지고, 인간학적인 실재가 선명하게 부조된다.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물론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가 “언어와 죽음”(「코흐 해안」중)이 서로 맞물려 있는 존재의 주름을 미지의 기호로 응결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로 “태고의 시간”(「조약돌」중)으로 재귀하는 존재의 운명을 반복의 형식으로 술회한 것이라 하겠다. 흑조가 저 하늘을 난다. “아내의 아픈 속살”에 기입된 “울분”(「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중)이 매만져지고, 또 “생의 가파른 칼바위 능선”(「튜브」중)에 기입된 “차갑고 아픈 시”(「이타사(利他寺) 입구」중)의 운명선이 감지된다. 역시 흑조가 시간을 타고 온 세상을 배회한다. 말하자면 함기석이 형상화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모래가 쏟아지는 하늘」중)을 언어의 수식으로 코드화한 진리의 전언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저편으로 흑조가 사라진다. 불길하고 흉흉하다.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 소리 「부음(訃音)」일부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π」일부
사람의 속말은 자신조차 볼 수 없는 자기 생의 해구로 쓸쓸히 침몰하는 배다 관 뚜껑을 열어 마지막으로 흰 옷을 입고 잠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물과 빛으로 쓰는 모래의 백색유서를 읽고 있다 「코흐 해안」일부
누가 또 이유도 모른 채 참살된다. 「낯선 실내악」일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말의 여백과 공포 사이에서 나의 육체는 파동이 되어 가고 「장지(葬地)에서」
생은 무엇이고, 또 죽음은 어떤 사태인가? 우리는 왜 언어의 순수한 도정을 생이 아닌 것으로 응결시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근원을 탐문하는가?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비문”과 “법문” 사이를 배회하는 “우울한 짐승”을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론”과학(혹은 수학)과 종교 사이에서 생성된 죽음의 소리이다. 여기저기서 “부음(訃音)”이 들려온다. 이 세계는 타나토스로 향하는 비가역적인 공간이다. 말은 “성기”의 에로틱한 반복적인 운동이고, 진리는 미필적 고의로 가득 찬 “사고의 살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직조하는 저 반복의 운동만이 인간학을 증명하는 진실의 수식이자, 나―너를 포획하는 존재의 “파동”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세계의 표현법은 힐베르트나 슈뢰딩거 그리고 괴델이 만든 수학적 수식이 아니라, “발발이 π”에 응고된 확정 불가능한 잔여의 운동임에 틀림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 채 “참살”되어 죽음에 포획된다. 까닭은 시간의 운동 전체가 “침몰하는 배”처럼 “백색유서”만을 남겨놓은 채, 생 전체를 “공중의 묘역”으로 가볍게 소거시켜 무(無)만이 진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난폭한 운동이 죽음의 “빈 배”를 끌고 와 레테의 강 언덕 어디쯤에 생 전체를 부려놓게 된다. 마치 “지름이 0보다 작은 마이너스 원”으로 생을 증명하는 미궁의 방식처럼, 인간학은 그저 아스라한 “빛의 환각”으로 소진되는 소멸의 운동일 따름이다. “마지막 숨”소리가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검은 새”가 “빛과 어둠” 사이를 가르며 날아다닌다. 불길하다. 음험하다. 생은 이미 선험적으로 불길한 징후들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함기석이 도달한 언어의 실재이다. “떠도는 꽃, 말, 눈동자”에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회한의 “눈물”이 서린다. 그렇다면 대저 어떤 생을 살아낼 때, 나라는 “( )”를 풍요롭게 채울 수 있는가? 생의 과정 전체가 무로 수렴한다고 할 때, 인간은 채우는 자가 아니라, 적멸에 순응하는 무위의 산책자가 아닌가? 오늘도 인간은 미지의 죽음에 포획된 채, 다만 “왜 과학도 종교도 시도 인간의 뿌리를 구원하진 못할까”(「살모사 방정식」중)라는 존재론적 회의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차고 흰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모골이 송연해진다. 시는 불길하고 말은 차갑다. 불연 듯 죽음이 온 세계를 포획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뇌리를 스친다.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마침내 “피를 연주”하는 죽음의 광시곡이 탄주된다. 점점 “육체”는 하나의 “파동”으로 변해 물질과 생명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만약 생의 변주곡이 그와 같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함기석의 시적 도정을 살펴볼 때, 죽음에의 탐구는 아주 낯선 것이거나 의외의 결과물인데, 그것은 어떤 의도를 함의하고 있는가? 분명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의 주조음이 힐베르트나 고양이가 아닌 제로에 있다 할 때, 제로가 도달하는 의미의 체계는 무엇인가?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이 들려온다. 왜냐하면 생의 곡면에 위에 기입된 그 모든 변주곡들은 측량이 “불가해한 도형의 넓이”처럼 삶 전체를 아포리아에 구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사이에서 파생되는 미묘한 의미의 체계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포획되지 않은 제로와 영원히 해명이 불가능한 발발이π 사이에서 생성되는 미완의 기획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에의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아니 역으로 모든 진실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알레고리에 침전된 그 무엇이 아니라, 제로와 발발이π에 들러붙어 생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는 불온한 기획이다. 물론 여전히 생에의 운동이 “폐곡선” 위에서 표현되어 인간학 전체를 불모의 지대로 이끌어가겠지만, 따라서 생의 표현법이 고통과 비문 사이에서 자신의 수식을 완성해 가겠지만, 그것은 “먼지와 거품”처럼 허망한 것이거나 혹은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조야한 구성물에 다름 아니다. 생은 침몰의 운동이다. 생은 상승이 아닌 몰락의 운명이다.
정오다 까마득한 지평에서 탄환이 날아온다
정오다 바람은 없다 구름도 태양도 없다
정오다 도시는 없다 인간도 언어도 없다
정오다 정오는 정오에 정오로 영원히 사살된다
정오다 까마득한 허공에 흑조가 떨어진다 「흑조」전문
“비린 꿈 비린 울음”(「여름밤의 푸가」중)이 삶의 정오에 매개된다. “담배 <혁명>”을 피고 있는 “죽은 마야코프스키”(「리치빌라 404호」중)의 초상도 정오의 하늘 위를 우러르고 있다. 정오에 레퀴엠이 울린다. 정오는 죽음의 공간이다. 정오는 반어이자 역설의 시간이다. 말하자면 함기석에게 정오는 생의 역동성과 공명하는 초인의 시간이 아니다. 니체에게 정오가 진리를 교설하는 대망의 시간이라면, 함기석의 그것은 죽음을 욕망하는 소멸의 시간이다. 네크로필리아가 선호되고, “지옥 놀이”(「이륙」중)가 전개된다. 마치 “미친 시계”와 “죽은 시계”(「장기 놀이」중) 사이에 파시즘이 있고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역사의 시간처럼, 시인에게 정오의 시간은 “생의 마지막 곡선”(「살모사 방정식」중) 위를 질주하는 “증발”(「無」중)의 시간이다. “인간도 언어도” 사라진다. 아울러 “태양”도 비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흑조조차 추락하여 더 이상 날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정오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이거나 모든 에너지가 완벽하게 소진 고갈된 무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아니 역으로 정오는 생성의 과정인 동시에 소멸의 순간이거나, 인간학적 진실이 응고된 가장 강렬한 죽음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흑조의 추락은 불길한 동시에 상서롭고, 한 세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신세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까닭은 인간에게 “내생”(「마지막 해변」중)이라는 마물이 시간의 곡면 위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생의 시간은 늘 이중성 위에 매개된 모순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네 시에 네가 없고 네 시에 사라진 빈 하늘 가득 아름답고 슬픈 노을이 번진다 「첫 데이트」일부
약지를 만지며 창가에서 캄캄한 밤하늘 통장을 바라본다 먹구름 뒤에서 천천히 이마를 내미는 달 잔고 제로를 가리키며 웃는 저 둥근 얼굴 「찡찡공주가 잠든 봄밤」일부
꽃은 피가 낭자한 식물의 광대뼈야 화인(火印)이야 유서야 죽고 나서야 난 알았어 하지만 넌 이 땅속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하겠지 디디, 미안해 이번 생일엔 갈 수가 없어 「할머니의 안부」일부
불안하게 반대편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검은 눈이 내리는 들판이 보인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도 보인다 들판 위 공중으로 수많은 레일들이 깔려 있고 열차가 달린다 나를 태운 무수한 열차들이 달린다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일부
“육체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영혼의 모든 상처”(「약속」중)가 아물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죽음의 손가락”이 “배후의 배후”(「오래오래 레스토랑」중)를 지시할 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수식이나 정리는 삶을 증명하고, 죽음을 증거하는 최적의 장소인가? “관측 가능한 대상”(「함박눈 함수」중)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학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함기석은 스스로를 괄호로 간주하면서, 진실과 “거짓말”(「뱀장어」중) 사이의 관계를 심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참된 과제인가? 더 나아가 이 세계를 표상하는 다양한 수식들은 그것의 합당한 근거를 완벽하게 제시하여 이 세계가 진리의 구현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미망에 포획된다. 사라진다. 죽음이 “아름답고 슬픈/노을”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세 시와 네 시 사이에서 설레던 “첫 테이트”의 안온한 몽상도, 혹은 향기로운 “라일락의 농담”에 화기애애했던 추억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포획되어 소스라치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사라져 소멸하는 운명의 자리에 기입된 인간학적인 음영을 죽음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괴델이고 힐베르트이자, 존재가 형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식이다. “찡찡공주”라고 명명되는 딸아이의 잠든 모습을 무량하게 바라다본다. 도대체 이 세계의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죽음의 정체는 무엇이고, 통장 “잔고 제로”에 침전된 “아내의 눈물”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지시하는가? 대저 죽음과 “지폐”와 환한 “봄밤” 사이에 매개된 저 존재의 알 수 없는 “깊이”는 오렌지 기하학 너머로 비약하여 우주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는가? 이 세계의 진실은 밝고 투명한 “아이의 웃음”에 투사된 희망의 체계인 동시에 “얼굴 잃은 해바라기”의 절망인데, 그것이 바로 시간에 기입된 시의 얼굴이다. 이 세계는 이중적이다. 이 세계는 역설의 표상이다. 힐베르트의 얼굴도, 모든 존재를 비문으로 이끄는 발바리π의 역동적인 운동도 미지의 제로에 접근하는 죽음의 통로이다. 마치 “할머니의 안부”가 생이 아닌 저승의 세계에서 발화되는 환상의 언어인 것처럼,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어둠”의 “집”으로 명명되는 “태반”에 응고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비릿한 숙명의 노래라 하겠다. “폭풍”이 몰아치고, 마침내 죽음의 길에 승선하게 된다. 까닭은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이 소진되어 완벽하게 제로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길은 외길이고 질주는 필연이다. 마치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미궁으로 소거되는 시간의 운동을 의미하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일곱의 아이”와 “아흔 살의 나” 사이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문양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나인가? 대저 나는 어떤 운명을 살아낸 시간의 타자인가? 도대체 나는 어떤 시간의 단면도를 통과하는 숙명의 열차인가? 무량하고, 쓸쓸하였으며, 너와 나 사이의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간의 함몰과 함께 나는 나인 동시에 나 아닌 것으로 물화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로와 발바리π에 응고된 존재의 비문이다. 우리는 그저 시간의 선상을 질주하다가 미망의 덫에 포획된 채 침몰하는 것으로 한 생을 증명하게 된다.
첫 장을 열면 광활한 설원이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낮달 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어떤 시집」전문
인간에게 의미라고 간주되었던 기호들이 백년 후에 무의미로 소거되어 사라진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의미의 잔여를 도발하는 영원의 기호로 고양될 수 있는 작품집인가? “죽은 자들의 꿈이 얇게 저미어져 쌓인/시집”(「도미노」중)에 “검은 새”가 날 때, 그것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고지하는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의 울음”(「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이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까닭은 “아픈 기억”(「그녀의 뒤뜰」중)이 언어의 심연에 침전되었기 때문이다. 참회의 말들을 사색해야 하고, “참회의 시”(「마지막 해변」중)를 써야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에게 시란 참회의 기록이다. 마치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성찰하며 반추했던 윤동주의 그것처럼, 시인도 시간의 안과 밖에 기입된 비문을 존재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심도 있게 측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기석에게 시란 무엇인가? 꿈이 사산되고, 환멸의 광시곡이 인간학을 주재할 때, 도대체 시가 말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시집”이 백년 후에 사라지는 것들로 명명될 때, 시가 지시하는 말들은 의미의 전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라짐과 정전 사이에 어떤 시집이 위치할 때, 그것은 “우주 저편 본색(本色)의 우주로 귀소(歸巢)”(「흑조가(黑鳥歌)」중)하는 절대 언어인가? 순백으로 표상되었던 “아이의 영혼”(「잃어버린 편지」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어떤 시집의 “첫 장”과 “끝 장” 사이엔 사라지는 것들만이 포획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말의 형상이다. “광활한 설원” 위에 무만이 매개된다. 아니 힐베르트의 수식은 진리를 정확하게 지시하지 못한 진실의 저편으로 소거되는 운명의 전언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수식이 곧 삶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식으로 이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는 개연성은 있겠지만, 그것으로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말―사태는 힐베르트나 괴델의 그것과 달리 반어나 역설로 진실을 지시하는 절대 언어이다. “무더운 눈보라”가 내린다. 말이 어그러진다. 이를테면 “무더운”과 “눈보라” 사이에 전혀 매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끝없는 우주”가 만든 비문, 즉 새로운 시말문법이다. 秘文이 非文이 되고, 飛文이 되어, 마침내 碑文으로 소거된다. 말하자면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행위의 주체인 힐베르트와 고양이에 의해 포획된 의미를 시말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변항을 창조하는 제로에 기입된 흔적을 추적하는 죽음의 비문이다. 죽음이 말하고, 변항에 의해 의미가 유예된다. 파동 친다. 마치 어떤 시집의 구성물들이 수식과 물리력과 인간학의 혼합물이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문자의 운명을 죽음의 구성물로 재현한 슬픈 존재의 언어라 하겠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풀이 노트는 백야의 시다 사막이다 핏덩어리 의문부호고 계단으로 떨어져 나간 죽은 자의 목뼈다
제로의 자취를 찾는다 「제로와 푸리에」일부
시는 불길하고, 나의 존재론적 태도는 음험하다. 나는 “나는 새”인 동시에 제로이고, “죽은 낙타”이다. 나는 가역과 비가역 사이에 위치한 문제의 중심이다. 나는 아포리아다. 나는 “∞”인 동시에 “원형 거울”이다. 나는 “푸리에”, 즉 “곡선 방정식”에 표현된 죽음의 자취이다. 나는 “죽은 자들의 목뼈”이고, “의문부호”이다. 나는 나의 정체를 말할 수 없다. 나는 불완전의 표상이다. 힐베리트, 괴델, 슈뢰딩거의 “수식 기호”와 상관없이, 나는 이 세계의 표현법을 실천하는 “허공”이다. 나는 “제로의 자취”이다. 따라서 나는 늘 미궁에 휩싸인 채 존재의 흔적만을 촉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언어의 진실이다. 따라서 온갖 수식으로 장식된 “풀이 노트”엔 시간의 흔적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인간학적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변환”된다. 모든 것이 비가역적인 “탄젠트곡선”으로 변환되어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망각된 주검”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미지에 사로잡힌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생이 아닌 곳에서 발화되는 존재의 목소리, 즉 죽음의 형식을 부조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 모든 것이 제로의 자취를 추적하는 무위의 덫인 것만은 분명하지만,따라서 “말과 존재, 빛과 어둠” 사이에 “무수한 피살자들”이 남긴 생에의 흔적들이 풀리지 않는 채 남아있지만, 그 풀리지 않는 아포리아만이 시말이 압박하고 포획해야만 하는 숙명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제로에 포획된 채, 시를 쓰며 ( )를 채워간다. 죽음의 수인으로 갇힌다. 시간이 사라진다. “백야의 시”엔 “눈먼 까마귀”만이 날아다니며 죽음의 노래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휘발”된다. 적멸에 이르러 공간이 시간과 함께 공멸하게 된다. 무만이 욕망된다. 무만이 노래된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들의 숙명이다.
김석준 출생 : 충남 아산 약력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기침소리>(시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현대성과 시>,<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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