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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터키군의 선전으로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 약 20만5000명, 프랑스군 약 4만7000명 등 연합군의 사상자는 무려 25만2000명에 이르렀으며, 터키군 사상자도 25만여 명에 달했다.
그 수많은 사상자 중에는 영국의 젊은 물리학자 헨리 모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던 그는 특성X선을 연구해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스승인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더 발전시켜, 현대 원소주기율표를 완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7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해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그는 다음해인 1916년 노벨 물리학상의 유력한 수상자였다. 실제로 모즐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주기율표를 최종 완성한 스웨덴의 물리학자 칼 시그반은 192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무려 다섯 차례나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1948년에는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는데, 후보를 선정하기 불과 이틀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상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노벨위원회는 결국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을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다는 노벨상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칼펠트가 바로 그 주인공.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자연을 시로 그려낸 그는 1918년 사실상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내정됐다. 그런데 수상자가 발표되기도 전에 거부했다.
오랫동안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자신의 수상자 선정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1년 4월 에리크가 사망하자 노벨위원회는 그해 11월 노벨 문학상을 그에게 추서했다.
이는 사후 노벨 수상의 최초 사례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1년에는 유엔의 2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셀드가 사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에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약소국을 보호하는 노력이 유엔의 임무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유엔의 대의와 원칙을 밀어붙이는 모델을 만든 주인공이다.
1974년부터 생존자만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 개정
유엔평화유지군 창설을 주도한 그는 특히 냉전체제로 재편되는 격동기에 유엔이 독립된 권위를 갖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존경받는 국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1961년 9월 아프리카 콩고의 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단 2명이 모두 노벨상 주최국인 스웨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벨위원회는 1974년부터 생존자만이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을 바꾸었다. 다만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서 2개월 후에 열리는 시상식 사이의 기간에 사망할 경우에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아주 묘한 일이 벌어졌다. 노벨위원회는 그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미국 랠프 스타인먼 록펠러대학 교수를 비롯해 브루스 A 보이틀러, 율레스 A 호프만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상자 발표 후 록펠러대학 측은 성명을 통해 랠프 스타인먼 교수가 3일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캐나다의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스타인먼 교수는 1973년 쥐의 비장에서 떼어낸 물질에서 이전의 면역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세포를 발견했다. 나뭇가지 모양으로 생겨 ‘수지상세포’라고 명명된 이 물질은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항원을 잡는 파수꾼임이 밝혀졌다.
의학계에서는 수지상세포의 발견으로 면역작용을 규명하게 됨으로써 암과 감염질환, 염증질환의 예방과 치료제 개발에 새장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이후 수지상세포의 다양한 기능을 이용한 신약들이 개발되었는데, 전립선암 치료제로 사용되는 시푸류셀-T 성분의 약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이 개발한 치료법 덕분에 사후 노벨상 수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보이틀러와 호프만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체를 인식하는 수용체를 발견하고, 이 수용체에 의해 시작되는 선천성 면역반응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됨으로써 면역학 분야는 15년 만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스타인먼 교수가 이미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벨위원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해야 했다. 그의 수상자 자격 유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스타인먼 교수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에 대해 노벨위원회 측은 스타인먼의 사망 사실을 수상자 발표 후에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의 사망 사실 인지는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로써 1974년 규정 개정 이후 유지되어온 노벨상의 사후 수상 금지 원칙이 또 다시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실 스타인먼의 노벨상 수상은 그 자신이 발견한 수지상세포 덕분에 가능했다. 그가 췌장암에 걸린 것은 사망 4년 전이었다. 스타인먼 정도의 진행성 췌장암 환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수개월이다.
그러나 그는 수지상세포 백신을 치료제로 사용해 그보다 훨씬 더 수명을 연장했다. 그에게 시도된 여러 가지 치료법 중 어느 것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수지상세포 백신과 전통적 화학요법의 병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직접 입증해 보이는 등 사후 노벨상 수상 논란을 잠재우기 충분할 만큼 과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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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 발표를 앞둔 1964년 10월.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수여해도 받지 않겠다며 사전 통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투표가 진행됐고 사르트르는 결국 그 해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르트르는 이번에는 수상을 거부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노벨위원회의 평가를 인정할 수 없으며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습성”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11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벨상은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수상 자체를 거부하거나 시상식에 불참하는가 하면 자격 여부를 놓고 공정성 시비에 휘말린 적도 적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실패했지만 수상을 모면(?)한 사례도 있다. 스웨덴의 에리크 악셀 칼펠트는 심사위원을 설득해 문학상 수여를 사전에 포기하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1925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알프레드 노벨을 악마에 비유하며 한때 수상을 거부하는 소동을 벌였다.
1958년에는 ‘닥터 지바고’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파장을 빚었다. 그는 ‘신성한 러시아 혁명을 비방했다’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고 국외 추방 압력에 시달렸다. 조국을 등지지 않겠다며 구명운동까지 벌인 끝에 결국 노벨상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끝냈던 레둑토 베트남 전 총리는 “아직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1973년 평화상을 마다했던 적도 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이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어 노벨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급기야 스웨덴 한림원도 딜런과의 연락을 포기했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그는 무대에서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광대였어요. 왜 지금 저를 바꾸려고 하나요”라고 노래했다. 노벨상의 파격이 또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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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이 54년 만에 순직 경위를 재조사하기로 한 고(故)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사후(死後)에 노벨상을 받은 경우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수상자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함마르셸드처럼 매우 이례적으로 세상을 뜬 뒤에 상을 받은 사람이 두 명 더 있다.
최초 사후 수상자는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칼펠트였다. 1907년부터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칼펠트는 1919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자 "위원이 어떻게 상을 받느냐"며 사양했다. 노벨위원회는 그가 사망한 해인 1931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칼펠트에 이어 함마르셸드까지 사후 수상하자 일각에서는 '노벨의 고국 스웨덴 출신이라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따라 1974년 노벨위원회는 생존 인물만 수상자로 정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예외가 발생한다. 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 3명을 발표한 뒤에야 수상자 중 한 명이 사흘 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면역 체계 활성화에 연구 업적을 낸 공로로 브루스 보이틀러(미국), 율레스 호프만(프랑스)과 함께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의 랠프 스타인먼(사망 당시 68세)이었다. 논란이 일자 노벨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서 "그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 우리의 선택은 바꾸지 않겠다"며 예정대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이 세 명을 제외하고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더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세계를 감동시켜 노벨 평화상 수상이 유력했지만 1948년 암살돼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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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委 “몰랐다”… 취소 고민보이틀러-호프만 공동수상
올해(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가 발표됐다. 하지만 수상자 1명은 이미 수상 발표 사흘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겐 상을 주지 않는 게 노벨상의 규정이다. 수상자가 이미 숨진 걸 모른 채 발표한 노벨상 위원회는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면역학자인 뉴욕 록펠러대의 랠프 스타인먼 교수(68)는 4년 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평생을 감염과 암, 염증에 작용하는 면역반응 시스템 연구에 바쳐온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발견하고 설계한 면역제 치료법을 자신의 몸에 적용시켜 생명을 연장해 가며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체내 면역 시스템을 총괄하는 수지상(樹枝狀)세포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2011년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3일 발표됐다. 역시 면역체계 활성화 연구에 기여한 브루스 보이틀러(53·미국), 율레스 호프만(70·룩셈부르크)과 3명이 공동 수상한 것이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위원회는 3일(현지 시간) “스타인먼 교수 등은 면역체계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암과 염증, 감염에 대한 치료와 예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발표했다.
▼ 자신이 개발한 면역치료 받으며 암투병 ▼
세 사람이 받을 상금은 총 1000만 크로나(약 17억 원). 이 중 절반은 1973년 수지상세포의 존재를 처음 규명한 스타인먼 교수에게 돌아간다. 또 이를 바탕으로 선천 면역 활성화 메커니즘을 밝혀낸 공로로 보이틀러와 호프만이 각각 250만 크로나를 받는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 낭보가 전해졌을 때 스타인먼 교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췌장암이 악화돼 이미 지난달 30일 숨을 거둔 것이다. 부인이 대신 노벨상 수상 통보를 받았다.
스타인먼 교수가 재직했던 록펠러대는 3일 성명에서 “스타인먼 교수가 4년간 앓아오던 췌장암으로 지난주 금요일 사망했다”며 “그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수지상세포 면역제 치료법’으로 생명을 연장해 왔다”고 밝혔다.
1943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스타인먼 교수는 캐나다 맥길대에서 과학학사를 받고 1968년 하버드대 의대에서 의학박사를 받았으며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그는 1970년부터 뉴욕의 록펠러대에서 연구원으로도 활동하면서 1973년 후천성 면역 작용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면역세포를 발견해 ‘수지상세포(Dendritic cells)’로 명명했다.
1988년 이래 록펠러대 면역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면역학 및 면역계 질환 센터의 소장도 맡아 왔다.
스타인먼 교수의 딸 알렉시스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수상 사실을 몰랐다”라면서 “아버지의 노력이 노벨상으로 인정받게 된 것에 대해 모두 감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인먼 교수의 사망으로 노벨상 수상 규정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노벨위원회가 사망자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을 1974년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엔 사후 노벨상을 수상한 경우가 딱 2번 있었다. 1961년 콩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다그 함마슐트 유엔 사무총장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함마슐트 총장은 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얼마 앞둔 9월 18일 사망했다. 노벨위원회는 그가 생전에 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사례는 1931년 4월 사망해 그해 문학상을 수상한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시인이다. 카를펠트 시인은 1912년부터 사망한 1931년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권한을 가진 스웨덴 아카데미 종신 상임서기를 지냈다. 함마슐트 사무총장과 카를펠트 시인은 둘 다 스웨덴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0월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12월 정식 상을 수상하기 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상이 예정대로 수여된다. 1996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지 불과 며칠 뒤 사망한 윌리엄 비크리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는 12월에 예정대로 상을 받았다.
하지만 스타인먼 교수처럼 노벨위원회가 당사자가 숨진 사실을 모르고 수상자로 선정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이와 관련해 노벨위원회는 이번 경우 어떻게 처리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74년에 사후 수상을 금지한 조항을 명문화했기 때문에 스타인먼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벨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가 수상자를 발표하기 전 수상자가 사망한 것을 모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3일 말했다.
스타인먼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 그가 이미 사망했음을 발표한 미국 록펠러 대의 마르크 테시어 라비뉴 총장은 “스타인먼 교수의 수상 소식은 ‘기쁘고도 씁쓸하다(bittersweet)’며 대학도 3일에야 가족들로부터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신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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