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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과 시인]-"20세기후반 영어권에서 추앙"되는 시인
2017년 11월 13일 22시 23분  조회:2902  추천:0  작성자: 죽림

요약 토머스 트란스트뢰메르.
뛰어난 은유기법과 간결하지만 공명이 있는 언어로 유명한 스웨덴의 서정시인으로 20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그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은유는 다른 대상을 빌려서 표현하는 것이 아닌,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를 언어적으로 변형한 것에 가깝다.

문학계의 초현실주의 작풍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시는 일견 이해할 것 같으면서 동시에 불가사의한 면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 청년 시절 당시 스웨덴의 병역의무에 따라 군대를 다녀왔다. 최초의 시 모음집 〈17편의 시 17 dikter〉(1954)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절제된 언어와 놀라운 형상화를 보여주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956년 스톡홀름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심리학자이자 사회복지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어진 그의 시집들, 곧 〈여정의 비밀 Hemligheter påv이미지gen〉(1958), 〈미완의 천국 Den halvfärdiga himlen〉(1962), 〈반향과 흔적 Klanger och spår〉(1966)들은 화법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작가적 시각도 뚜렸해졌다. 이러한 시집들과 후기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시적 관찰은 극도의 간결함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의미적으로도 풍부함을 더했다.

한 비평가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은 음향적으로 완벽한 실내악이다.

그 안에서 모든 모순된 떨림들을 긴장감 없이 들을 수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신세대 시인들과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에 정치적 메시지가 결여되어 있다며 그를 비난했다.

1960년대 그는 미국 시인 로버트 블라이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고, 이후 블라이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블라이가 처음으로 전권을 번역한 시집 〈어둠 속에서 보기 Mörkerseende〉(1970, 영문판 제목은 Night Vision)는 , 트란스트뢰메르가 스웨덴의 시인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보낼 당시에 쓰여진 시들이었다.

그가 1973년에 펴낸 〈작은 길 Stigar〉에는 블라이의 작품 몇 개가 스웨덴 어로 번역되어 함께 실렸다.

소년 시절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발트 해안은 〈발틱스 Östersjöar〉(1974)라는 시집의 배경이 되고 있다. 후기 작품으로 〈진실의 장벽 Sanningsbarriären〉(1978), 〈와일드 마켓플레이스 Det vilda torget〉(1983),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För levande och döda〉(1989) 등이 있다.

1990년 트란스트뢰메르는 노이스타드 국제문학상을 수상했으나 같은 해 뇌졸중에 걸려서 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건강 상태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회고록 〈기억이 나를 본다 Minnena ser mig〉(1993), 2권의 시집 〈슬픔의 곤돌라 Sorgegondolen〉(1996)와 〈거대한 수수께끼 Den stora gåtan〉(2004, 모음집)를 출판했다. 〈곤돌라의 슬픔〉은 프란츠 리스트의 〈슬픔의 곤돌라 La lugubre gondola〉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2011년에는 〈시와 산문 1954~2004 Dikter och prosa 1954~2004〉을 발간했다.

직접적인 언어와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그의 시작품은 그를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번역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시인으로 만들었다.

블라이가 번역하여 세상에 나온 트란스트뢰메르의 모음집들에는 〈친구여, 어둠을 마셨는가 : 3인의 스웨덴 시인들, 하리 마르틴손, 군나르 에켈뢰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Friends, You Drank Some Darkness: Three Swedish Poets, Harry Martinson, Gunnar Ekelöf, and Tomas Tranströmer〉(1975),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1954~86년의 시선집 Tomas Tranströmer: Selected Poems 1954~86〉(1987, 다른 번역자들과 공동번역), 〈미완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명시 The Half-Finished Heaven: The Best Poems of Tomas Tranströmer〉(2001)가 포함되어 있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다른 많은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그의 시와 에세이를 모은 〈기억이 나를 본다〉(2004)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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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1년 4월 15일
사망 2015년 3월 26일
국적 스웨덴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수상 2011년 노벨문학상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賞),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출신의 시인이다.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psychologist)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한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집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은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처녀작에서는 잠 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 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초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연 스웨덴의 국민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는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냈다.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이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2015년 3월 26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0년대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다 끝내 2011년 수상의 영예를 안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96년 폴란드의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에 탄생한 시인 수상자였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시작 활동과 더불어 심리학자로서 약물 중독자들을 상대로 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보는 이 세상은 ‘미완의 천국’이다. 낙원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과 독자들, 자연과 문명, 그리고 모든 이분법적 대립구조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벨상 수상후보이자 스웨덴을 대표하는 트란스트뢰메르 시집의 국내 출간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이 세상의 끝, 등 푸른 물고기들이 뛰노는 베링 해협이 산출한 시를 통해 한국 독자들은 미지의 세계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꿈꾸는 방랑자들이기에. -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춘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하였으며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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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린데그렌과 194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현대의 초현실주의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의 고전적인 형식 및 시와의 대비 및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사용하는 시적 이미지는 자연에 대한 관찰력을 담고 있는 동시에 문체를 지극히 단순화시키면서도 그 의미를 풍부하게 전달하고 있다.

첫 시집인 〈17편의 시 17 dikter〉(1954)에서 그는 스톡홀름 앞바다의 다도해를 보고 받은 인상을 우주적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고 〈길 위의 비밀 Hemligheter påvägen〉(1958)은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철저한 심상주의적 문체에도 불구하고 트란스트뢰메르는 여전히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66년까지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록스투나 소년원에서 임상심리 의사로 근무했고, 헝가리와 미국의 시를 번역했으며, 1966년에 벨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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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곡(後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움켜잡는 갈고리처럼 세상의 바닥을 질질 끌며 걷는다.
내게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이 걸린다.
피로한 분개, 타오르는 체념.
사형집행관들이 돌을 준비하고, 신이 모래 속에 글을 쓴다.

조용한 방.
달빛 속에 가구들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천천히 나 자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텅 빈 갑옷의 숲을 통하여.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서곡(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정오의 해빙/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집들이 가벼웠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그램 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왔고, 수세기 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이 대답했다. '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 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未完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 이경수 번역 







에필로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십이월. 스웨덴은 해변에 정박한
삭구(索具)를 뗀 배.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돛대가 날카롭다. 황혼이 낮보다
오래 지속되고, 이곳의 길은 돌투성이.
정오가 지나야 빛이 도착하고,
겨울의 콜로세움이 비현실적인 구름의
빛을 받아 솟아오른다. 즉각
흰 연기가 마을에서 구불구불
치솟는다. 구름이 높고 또 높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 귀 기울이는 듯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늘나무의 뿌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영혼의 어두운 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들어, 잠든 자들을
울음으로 깨운다. 굴절 만원경이
몸을 돌려, 다른 시간을 불러들인다.
때는 여름이다. 산들이 빛으로 부풀어
포효하고, 시냇물이 투명한 손으로
태양의 광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영사기의 필름이 다 돌아갔을 때처럼.)

저녁별이 구름 사이로 불탄다.
집들, 나무들, 울타리들이
어둠의 소리없는 눈사태 속에 확대된다.
별 아래 또 다른 숨겨진 풍경이
자꾸자꾸 모습을 드러낸다. 밤의 엑스선에 비친
등고선의 삶을 사는 비밀의 풍경들,
그림자 하나가 집들 사이로 썰매를 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바람이
일단의 기병대처럼 어둠 속 마음의 길거리를 따라
천둥처럼 질주한다. 검은 소동이 어찌나
반향하고 메아리치는지! 집들이 꿈속의 소동처럼
부동(不動)의 춤을 추며 덫에 걸려 있다. 강풍 위에
강풍이 만(灣) 위를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난바다 쪽으로 빠져나간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필사적인 신호를 보낸다.
별들은 영혼 속을 배회하는
과거의 구름들처럼, 자신이 빛을 가릴 때에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곤두박이
구름들에 의해 명멸한다. 마구간 벽을
지나면서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병든 말이 안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폭풍이 자리를 뜬다. 부서진 대문이
쾅쾅 소리를 내고, 램프가 손에서
대롱거리고, 산 위의 짐승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다.폭풍이 퇴각하면서
외양간 지붕 위에 천둥이 구르고,
전화선들이 포효하고, 지붕 위의
타일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나무들이 속절없이 머리를 까딱거린다.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파이프 소리가 길을 걷는다! 해방자들의
행렬! 숲의 행진!
활 같은 파도가 들끓고, 어둠이 꿈틀대고,
수륙(水陸)이 움직인다. 갑판 밑으로 사라져
죽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항해는, 야성의 돌진이 아니고
고요한 안전을 가져다주는 여행.

세계가 끊임없이 텐트를 새롭게
친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상수리 나무 장비를
움켜잡고, 지구를 앞으로 민다.
백합이 연못의 포옹 속에서, 날아가는 연못의 포옹 속에서
감추어진 물갈퀴로 헤엄친다.
표석(漂石)이 우주의 홀에서 굴러내린다.

여름날 황혼에 섬들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옛 마을들이 길을 간다.
까치소리 내는 계절의 바퀴를 타고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퇴각한다.
한 해가 자기 부츠를 벗어던지고
태양이 높이 솟아오를 때, 나무들은 잎사귀로
피어나 바람을 받고 자유의 항해를 떠난다.
산 아래 솔숲 파도가 부서지지만,
여름의 깊고 따뜻한 큰 파도가 오고,
큰 파도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흐르고, 일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남는 건 잎사귀 없는 해안뿐. 결국,
성령(聖靈)은 나일강 같은 것, 여러 시대의
텍스트들이 궁리한 리듬에 따라
넘치고 가라앉는다.

하지만 신(神)은 또한 불변의 존재이고,
따라서 이곳에선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신은
옆구리로부터 행렬의 진로를 가로지른다.

기선(氣船)이 안개 속을 통과할 때
안개가 알아채지 못하듯. 정적.
등불의 희미한 깜빡거림이 그 신호.






답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책상 맨 밑바닥 서랍에서 26년 전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만난다.
겁에 질린 편지, 편지는 두 번째 도착한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

집에 다섯 개의 창이 있다 창을 통하여 낮이 청명하고 고요하게 빛
난다. 다섯 번째 창은 검은 하늘, 천둥 그리고 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다섯번 째 창에 선다. 편지.

때로는 화요일 수요일 사이에 심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26년은 한순
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더 미로 같은 것이어서,
만일 적절한 곳에서 벽에 바짝 붙어선다면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저 반대편에서 자기 자신이 걸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편지에 답장을 보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일이었다. 헤
아릴 수 없는 바다의 문지방들이 이동을 계속했다. 팔월 젖은 풀 속의 두
꺼비처럼 심장이 순간순간 고동치기를 계속했다.

답장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나쁜 날씨를 약속하는 솜털 구름처럼 쌓여
간다. 편지들이 햇빛의 광택을 잃게 한다. 어느 날 답장을 보내리라.
어느 날 내가 죽어 마침내 집중할 수 있을 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을 다
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도시의 125번
가에 갓 도착하여, 바람 속에 춤추는 쓰레기들의 거리를 내가 다시 걸
을 때, 가던 길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를 사랑하는 나, 끝없는
텍스트 대중 속의 하나의 대문자 T.






사물의 맥락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럽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동요받은 명상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밤의 어둠 속, 아무것도 갈지 않으면서
폭풍이 풍차의 날개를 사납게 돌린다.
동일한 법칙에 따라 그대는 잠깨어 있다.
회색의 상어 배가 그대의 가냘픈 램프.

형체없는 기억들이 바다 바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낯선 조상으로 굳어진다.
해조가 들러붙어 그대의 노걸이는 녹색.
바다로 가는 자가 돌이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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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은 <기억이 나를 본다>가 유일하다.
<기억이 나를 본다>는 2004년 출간된 시선집으로 ‘오늘의 세계 시인’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사과나무, 벚나무, 호수, 잔디밭, 햇볕, 얼음, 눈, 붉은 벽돌집 등 시에 등장하는 소재만으로도 북유럽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스웨덴의 차갑고 투명하며 깨끗한 자연 속에서 그는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 냈다. 
고은 시인이 책임∙편집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소곡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어딘가엔 미결
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
늘은 다른 숲, 밝은 숲을 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기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학을 졸업하였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 손이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1979 삼월에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말로, 언어는 없고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지겨워
눈 덮인 섬을 향한다.
야성은 말이 없다.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이 사방팔방 펼쳐져 있다!
눈 속에 순록馴鹿의 발자국을 만난다.
언어, 말 없는 언어.
 
검은 엽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달력이 꽉 채워지고, 미래를 알 수 없다.
케이블이 국적 없는 포크송을 흥얼댄다.
납빛 고요의 바다에 강설降雪, 그림자들이
 부두에서 씨름하고 있다.
 
 
2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이 찾아와
몸의 치수를 잰다. 방문은
잊혀지고 삶이 계속된다. 하지만 침묵 속에
 옷이 재봉되고 있다.
 
불꽃 메모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숲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자신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들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서곡(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수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상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린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번역 이경수
               
         
             
 
동요받은 명상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밤의 어둠 속, 아무것도 갈지 않으면서
폭풍이 풍차의 날개를 사납게 돌린다.
동일한 법칙에 따라 그대는 잠깨어 있다.
회색의 상어 배(服)가 그대의 가냘픈 램프.
 
형체 없는 기억들이 바다 바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낯선 조상(彫像)으로 굳어진다.
해조가 들러붙어 그대의 노걸이는 녹색.
바다로 가는 자가 돌이 되어 돌아온다.
 
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럼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邊境) 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사물의 맥락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아침의 입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태양 선장, 검은 등갈매기가 항로를 잡는다.
갈매기 아래로는 넓은 물,
물 속의 다채색(多彩色) 돌처럼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해독되지 않은 하루, 하루들.
아즈텍 상형문자 같은!
 
나는 음악의 고블랭 비단
덫에 걸려, 팔을 치켜들고
서 있다. 원시 예술에 나오는
인물처럼.
 
자정의 전환점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소리없이 움직임 없이 숲 속의 개미가
공(空)을 들여다본다. 들리는 것은 오직
어두운 나뭇잎 똑딱이는 소리, 여름 협곡 깊은 곳
밤의 웅얼거림뿐.
 
가문비나무가 긴 시계바늘처럼 뾰족
가리킨다. 산그늘 속에서 개미가 반짝 빛난다.
새 한 마리의 외침! 이윽고, 구름 마차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한다.
 
에필로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십이월. 스웨덴은 해변에 정박한
삭구(索具)를 뗀 배.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돛대가 날카롭다. 황혼이 낮보다
오래 지속되고, 이곳의 길은 돌투성이.
정오가 지나야 빛이 도착하고,
겨울의 콜로세움이 비현실적인 구름의
빛을 받아 솟아오른다. 즉각
흰 연기가 마을에서 구불구불
치솟는다. 구름이 높고 또 높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 귀 기울이는 듯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늘나무의 뿌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영혼의 어두운 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들어, 잠든 자들을
울음으로 깨운다. 굴절 만원경이
몸을 돌려, 다른 시간을 불러들인다.
때는 여름이다. 산들이 빛으로 부풀어
포효하고, 시냇물이 투명한 손으로
태양의 광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영사기의 필름이 다 돌아갔을 때처럼.)
 
저녁별이 구름 사이로 불탄다.
집들, 나무들, 울타리들이
어둠의 소리없는 눈사태 속에 확대된다.
별 아래 또 다른 숨겨진 풍경이
자꾸자꾸 모습을 드러낸다. 밤의 엑스선에 비친
등고선의 삶을 사는 비밀의 풍경들,
그림자 하나가 집들 사이로 썰매를 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바람이
일단의 기병대처럼 어둠 속 마음의 길거리를 따라
천둥처럼 질주한다. 검은 소동이 어찌나
반향하고 메아리치는지! 집들이 꿈속의 소동처럼
부동(不動)의 춤을 추며 덫에 걸려 있다. 강풍 위에
강풍이 만(灣) 위를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난바다 쪽으로 빠져나간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필사적인 신호를 보낸다.
별들은 영혼 속을 배회하는
과거의 구름들처럼, 자신이 빛을 가릴 때에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곤두박이
구름들에 의해 명멸한다. 마구간 벽을
지나면서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병든 말이 안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폭풍이 자리를 뜬다. 부서진 대문이
쾅쾅 소리를 내고, 램프가 손에서
대롱거리고, 산 위의 짐승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다.폭풍이 퇴각하면서
외양간 지붕 위에 천둥이 구르고,
전화선들이 포효하고, 지붕 위의
타일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나무들이 속절없이 머리를 까딱거린다.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파이프 소리가 길을 걷는다! 해방자들의
행렬! 숲의 행진!
활 같은 파도가 들끓고, 어둠이 꿈틀대고,
수륙(水陸)이 움직인다. 갑판 밑으로 사라져
죽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항해는, 야성의 돌진이 아니고
고요한 안전을 가져다주는 여행.
 
세계가 끊임없이 텐트를 새롭게
친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상수리 나무 장비를
움켜잡고, 지구를 앞으로 민다.
백합이 연못의 포옹 속에서, 날아가는 연못의 포옹 속에서
감추어진 물갈퀴로 헤엄친다.
표석(漂石)이 우주의 홀에서 굴러내린다.
 
여름날 황혼에 섬들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옛 마을들이 길을 간다.
까치소리 내는 계절의 바퀴를 타고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퇴각한다.
한 해가 자기 부츠를 벗어던지고
태양이 높이 솟아오를 때, 나무들은 잎사귀로
피어나 바람을 받고 자유의 항해를 떠난다.
산 아래 솔숲 파도가 부서지지만,
여름의 깊고 따뜻한 큰 파도가 오고,
큰 파도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흐르고, 일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남는 건 잎사귀 없는 해안뿐. 결국,
성령(聖靈)은 나일강 같은 것, 여러 시대의
텍스트들이 궁리한 리듬에 따라
넘치고 가라앉는다.
 
하지만 신(神)은 또한 불변의 존재이고,
따라서 이곳에선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신은
옆구리로부터 행렬의 진로를 가로지른다.
 
기선(氣船)이 안개 속을 통과할 때
안개가 알아채지 못하듯. 정적.
등불의 희미한 깜빡거림이 그 신호.
 
고독한 스웨덴의 집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뒤엉킨 검은 가문비나무와
연기 뿜는 달빛.
이곳에 나지막이 엎드린 작은 집이 있고
한 점 삶의 기미도 없다.
 
이윽고 아침 이슬이 웅얼거리고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올빼미를 내보낼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 건물이
김을 내뿜으며 서 있고,
세탁소의 나비가
모퉁이에서 퍼드덕거린다.
 
죽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퍼덕이는 나비, 그곳에서 썩어가는 것이
수액(樹液)의 안경을 통해
나무껍질 뚫는 기계의 작업을 읽는다.
 
짖어대는 개 위로
삼단 같은 머리결의 비 또는
한 점 고독한 천둥구름을 동반한 여름이 있고,
씨앗이 땅 속에서 발길질하고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들, 얼굴들이
황야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발육부진의 잽싼 날갯짓으로
전화선 속을 날아간다.
 
강 속에 있는 섬 위의 집이
자신의 초석(礎石)을 골똘히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연기, 누군가가
숲의 비밀문서를 태우고 있다.
 
비가 하늘을 선회하고
불빛이 강 속에서 사리를 튼다.
비탈 위의 집들이
폭포의 흰색 황소들을 감독한다.
 
일단의 찌르레기 무리를 거느린 가을이
새벽을 저지하고,
사람들이 불 켜진 극장에서
굳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경보(警報)없이
위장한 날개들을 느끼고,
어둠 속에 사리를 튼
신(神)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지붕 위의 노랫소리에 잠깬 사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오월의 비. 도시는 산 속의 작은 마을처럼
아직도 조용하다. 길거리들도 조용하다.
하늘에는 청록색 비행기 엔진 소리.
 창문이 열려 있다.
 
엎드려 누워 잠자던 사람의 꿈이
순간 투명해진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관심의 악기들을 찾아 더듬기 시작한다.
거의 공중에서.
 
기상도(氣象圖)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 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스푸레한 호박(琥珀) 빛이 마을 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 위의
대기 중에 그려진 상형문자.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낮잠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돌들의 성령강림절, 불꽃 튀기는 혀들---
한낮의 시간 동안, 무중력의 도시.
부글거리는 빛 속의 매장,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를 익사시키는 북소리.
 
독수리가 잠든 자들 위로 솟구치고 또 솟구친다.
물레방아 바퀴가 천둥처럼 돌아가는 곳에서의 잠.
두 눈 가린 말들의 유린.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
 
잠든 자들이 폭군의 시계 속 시계추마냥 매달려 있다.
독수리가 태양의 백색 물결 흐름 속을 죽어서 떠내려간다.
라자로의 관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들의 메아리.
 
길 위의 비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한낮의 빛이 잠자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그의 꿈이 더욱 생생해졌지만
그는 잠깨지 않았다.
 
어둠이 태양의 강렬한
참을성 없는 광선 속을 남들과 더불어
걷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갑자기 억수처럼 어둠이 내렸다.
나는 모든 순간을 담고 있는 방,
나비 박물관 속에 서 있었다.
 
태양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렬하였다.
태양의 참을성 없는 붓들이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선로(線路)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새벽 두시. 달빛. 열차가 평원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멀리 시가지의 불빛들이
지평선 위에 차갑게 깜빡인다.
 
마치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그 꿈속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듯.
 
아니면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병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생애 모두가 몇 개의 깜빡이는 점들, 지평선 위
작고 차가운 불씨 때가 되듯.
 
열차는 완전 부동(不動)으로 서 있다.
새벽 두시, 환한 달빛 속, 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키리이*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때때로 내 삶은 어둠 속에 눈을 떴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처럼 서 있는 동안
군중들이 어떤 기적을 향하여 맹목과 불안 속에
길거리를 밀고 나가는 듯한 느낌.
 
어린아이가 제 심장의 무거운 박동소리에
귀 기울리며 두려움 속에 잠이 들듯.
천천히 천천히, 이윽고 아침이 광선을 자물쇠 속으로 집어넣어
어둠의 문이 열릴 때 까지.
 
*키리리(Kyrie); Kyrie Eleison의 줄임말. 
카톨릭에서 미사의 첫머리에 외는 지비송으로, 
그리스어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의 뜻.
 
발병(發病) 이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병이 난 소년,
뿔처럼 딱딱한 혀를 가지고
비전 속에 감금되어 있다.
 
소년은 밀밭 그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턱을 둘러싼 붕대가 방부 처리를 짐작케 한다.
안경은 잠수부 안경처럼 두툼하다. 어둠 속에 울리는 전화벨처럼
만사가 대답 없이 요란하다.
 
하지만 소년 뒤의 그림,
그림은 밀밭이 황금 폭풍일지라도 보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한 폭의 풍경화.
청색 해초 같은 하늘과 떠다니느 구름들.
아래쪽 황색 파도 속에는
백색 셔츠가 몇몇 항해하고 있다.
추수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
 
밀밭 건너 멀리 한 남자가 서 있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
챙 넓은 모자가 남자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도움이라도 주려는 양, 남자는 이곳 방 속의 어두운 형체를 관찰하는 모습이다.
자기 몰두의 병약한 소년 뒤에서,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차츰 확대되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불꽃을 튀기면서 탁탁 소리를 낸다.
소년을 깨우려는 듯, 밀알 하나하나 불타오른다!
밀밭 속의 남자가 사인을 보낸다.
 
그가 가까이 와 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여행의 공식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955년 발칸 반도에서
 
1
쟁기꾼 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쟁기꾼은 둘러보지 않는다. 빈 들판을.
쟁기꾼 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하나씩 하나씩 그림자들이 풀려
여름 하늘의 심연 속으로 돌진한다.
 
2
하늘 아래 네 마리 황소들이 온다.
황소들에겐 자랑스런 기색이 조금도 없다. 양모처럼
두터운 흙, 곤충들의 펜이 긁어댄다.
 
역병의 회색 알레고리 속에서처럼 야윈,
한 떼의 말들의 소용돌이.
말들에겐 부드러운 구석이 전혀 없다. 태양의 광란.
 
3
깡마른 개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장터 광장의 당(黨) 간부.
백색 가옥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당 간부의 천국이 그를 수행한다. 천국은
첨탑 내부처럼 높고 협소하다.
산허리의 날개 끄는 마을.
 
4
한 고가(古家)가 이마를 불쑥 내밀었다.
두 소년이 황혼 속에 공차기를 한다.
한 무리의 신속한 메아리들. 갑작스런, 별빛.
 
5
긴 어둠 속의 길 위, 내 손목시계가
시간의 감금된 곤충과 더불어 완고히 빛을 발한다.
 
붐비는 차칸 속의 정적이 조밀하다.
어둠 속에 초원들이 흘러 지나간다.
 
하지만 작가는 반쯤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동시에 독수리 겸 두더지 되어 길을 간다.
 
커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들이 불을 끄자 불빛의 흰 그림자가
어둠의 유리잔 속 알약처럼
잠시 깜빡거리다 용해된다. 다음은 상승.
호텔 벽들이 하늘의 어둠 속으로 치솟는다.
 
사랑의 동작이 잦아들고, 그들은 잠이 든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은 만난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그림 그릴 때 젖은 종이 위에서
두 색채가 만나 서로서로의 속으로 흘러들 때처럼.
 
어둠고 조용하다. 그러나 불 꺼진 창들과 더불어
도시가 오늘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집들이 다가왔다.
집들이 무리지어 가까이 서서 기다린다.
표정 없는 얼굴의 군중들.
 
나무와 하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비속의 나무 한 그루가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
우리를 지나 쏟아지는 잿빛 속으로 질주한다.
나무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과수원의 지빠귀처럼
나무는 빗속에서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비가 멈추자 나무도 멈춘다.
나무는 맑은 밤 조용히 서서
천지사방 눈송이 꽃피어나는 그 순간을
꼭 우리들처럼 기다린다.
 
얼굴을 맞대고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이월엔 삶이 정지했다.
새들은 마지못해 날갯짓하였고,
보트가 제 묶어 있는 부두에 몸 비비듯
영혼은 풍경에다 몸을 비벼댔다.
 
나무들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깊이 싸인 눈은 죽은 밀집으로 측정되었고,
발자국들은 바깥 언 땅 위에서 늙어갔다.
방수모(防水帽) 밑에서 언어가 시들어갔다.
 
어느 날 무언가가 창으로 다가왔다.
잎이 떨어졌고, 나는 쳐다보았다.
색채들이 화르르 타오르고, 만물이 회전했다.
땅과 나는 서로서로를 향하여 튀어올랐다.
 
종소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종소리가 울리고 개똥지빠귀가
사자(死者)들의 뼈 위에서 노래를 날렸다.
우리는 나무아래 서서
시간이 가라앉고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두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듯,
교회 묘지와 학교 운동장이 서로 만나
상대방 속으로 확대되어 들어갔다.
 
교회의 종소리는 부드러운 활공기 지레장치에 실려
사방팔방으로 솟아올랐다.
종소리가 떠나고 뒤에 남는 것은
더욱 거대해진 땅 위의 정적,
그리고 한 그루 나무의 소리없는 발걸음,
소리없는 발걸음.
 
정오의 해빙(解氷)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짐들이 가벼워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 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나왔고, 수세기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章)에 자리하고 있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 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은 대답했다.'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헤엄치는 검은 형체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하라 사막 바위 위
선사시대의한 그림에 대하여.
검은 형체 하나가 젊은
옛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무기도 전략도 없이,
휴식도 질주도 없이,
제 그림자에 잘려 나가
강의 바닥을 미끄러진다.
 
검은 형체는 잠자는 녹색 그림을
벗어나, 마침내
강기슭에 닿아
제 그림자와 하나 되려 애썼다.
 
비가(悲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가 펜을 치웠다.
펜이 탁자 위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펜이 텅 빈 방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그가 펜을 치웠다.
 
쓸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이토록 많다니!
멋진 여행 가방이 심장처럼 고동치지만,
그의 몸은 먼 곳에서 일어나는 무슨 일로 뻣뻣해진다.
 
밖은 초여름.
초목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소리, 사람인가,새인가?
꽃핀 벚나무가 집에 돌아온 짐차를 껴안는다.
 
몇 주가 지나간다.
밤이 서서히 다가온다.
나방들이 창유리에 자리잡는다.
세상이 보내온 조그만 창백한 전보들
 
알레그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검은 하루가 끝나고, 하이든을 연주한다.
손 안에 얼마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건반들이 흔쾌한 태도이고, 부드러운 망치들이 친다.
울리는 소리는 초록색, 생생하고 차분하다.
 
자유는 존재한다고, 황제에게 세금 내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고 음악은 말한다.
 
하이든 포켓에 손을 쑤셔넣고
세상을 차분히 바라보는 사람을 모방한다.
 
하이든 기(旗)를 내건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평화를 원한다'고 깃발은 말한다.
 
음악은, 돌이 날고 돌이 구르는
비탈 위의 유리 집.
 
돌이 곧바로 집으로 굴러들지만
창유리 하나하나 모두 건재하다.
 
미완의 천국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킨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야상곡(夜想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밤중에 차를 몰고 마을을 지난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집들이 일어선다. 집들이 잠 깨어 마실 것을 찾는다.
집들, 곳간들, 표지판들, 버려진 차들, 지금이 바로
이들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때이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의 잠을 자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을 위한 고된 훈련 중인 듯 얼글을 찡그린다.
이들은 깊은 잠 속에서도 놓여나지 못하고,
신비가 지나갈 때 아래로 내려진 건널목 차단기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 바깥으로는 멀리 숲 속으로 길이 뻗어 있다.
나무들,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는 나무들.
이들의 색깔은 불붙은 나무들처럼, 연극색!
잎사귀 하나하나가 어찌나 또렷한지! 나무들은 바로 집까지 따라온다.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눈꺼풀 너머로 어둠의 벽 위에
알 수 없는 그림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휘갈겨진다.
깨어 있음과 꿈 간의 작은 틈새로
커다란 편지가 밀고 들어오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겨울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폭풍이 집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나는 불편한 잠을 자다 돌아누워, 감은 눈으로
 폭풍의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아이의 두 눈은 어둠 속에 동그랗다.
 아이에게는 폭풍이 울부짖는다.
아이와 폭풍은 둘 다 흔들리는 램프를 좋아한다.
 둘 다 말이 어눌하다.
 
폭풍은 아이 같은 손과 날개를 가졌다.
 카라반 호(號)가 라플란드 쪽으로 치닫고,
가지 손톱의 별무리기가 벽을
  꼭 움켜잡는 것을 집은 느낀다.
 
우리 층에서는 밤이 고요하다.
 이곳은 기한 끝난 발자국들이 모두
연못 속에 가라앉은 잎사귀처럼 쉬고 있지만.
 바깥에서는 밤이 야성적이다.
 
세계 위로는 더한 폭풍이 지나간다.
 우리 영혼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폭풍이
 우리를 텅 비게 불어 버릴까 두렵다.
 
아프리카 일기 중에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963년)
 
콩고의 장터 예술가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곤충처럼 조그맣게 움직인다. 인간의 에너지를 빼앗긴 듯.
두 가지 생활양식 간의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한 아프리카 청년이 오두막 사이에서 길 잃은 외국인을 발견했다.
청년은 친구로 여겨야 할지 협박 대상으로 여겨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청년을 당혹케 했다. 둘은 혼란 속에 헤어졌다.
 
유럽 사람들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차 둘레에 주렁주렁 매달린다.
매미는 전기면도기만큼 강하다. 차들이 돌아간다.
머잖아 아름다운 어둠이 오고, 불결한 빨랫감을 떠맡는다.
잠.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어쩌면 철새 무리 같은 악수가 도움될지 모른다.
어쩌면 진리를 책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도움될지 모른다.
우리는 더 멀리 가야만 한다.
 
학생이 밤중에 책을 읽는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읽고 또 읽는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은 다음 사람을 위한 계단이 된다.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겨울의 공식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침대 속에서 잠들었고
용골(龍骨) 아래서 잠깨었다.
 
새벽 네시.
살을 깨끗이 발라낸 삶의 뼈들이
차갑게 상호 교제한다.
 
제비들 속에서 잠들었고
독수리들 속에서 잠깨었다.
 
2
램프불빛 아래 길 위의 얼음이
돼지기름처럼 빛난다.
 
이곳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곳은 유럽이 아니다.
이곳은 '이곳'이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그리고 '나'였던 것은
십이월 어둠의 입 속에서
한 마디 말에 불과할 뿐.
 
3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병원 가건물이
텔레비전 화면처럼 빛난다.
 
큰 추위 속에
감추어진 소리굽쇠가
음(音)을 내보낸다.
 
나는 별이 총총한
아늘 아래 서서
세계가 내 코트 안팎을
개미집처럼 들락거리는 것을 느낀다.
 
4
눈(雪) 밖으로 튀어나온 검은 상수리나무 세 그루.
투박한 거구지만, 민첩한 손가락을 가졌다.
넉넉한 나무 병(甁)들로부터 봄이면
초록 거품 터지리라.
 
5
버스가 겨울 저녁을 뚫고 기어간다.
좁고 깊은 죽은 운하 같은 가문비나무 숲길에서
버스가 배처럼 깜빡거린다.
 
몇 안 되는 승객, 몇 안 되는 노인, 몇은 아주 젊은이.
만일 버스가 멈추어 불을 끈다면
세계가 삭제되리라.
 
아침 새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차를 깨운다.
꽃가루가 바람막이 유리를 뒤덮는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다.
새의 노래가 어두워진다.
 
그 동안 누군가 열차역에서
신문을 산다.
멀지 않은 곳에 큰 화물차가
온통 붉은 녹을 뒤집어쓰고
햇빛 속에 빛난다.
 
어디에도 빈 데는 없다.
 
몸의 온기 속으로 서늘한 복도가 뚫려 있다.
한 남자가 서둘러 달려와
위층 상사의 사무실에서
모함받은 이야기를 한다.
 
풍경의 뒷문에서
까치가 날아든다
검은색 흰색의 까치, 헬*의 새.
검은지빠귀가 이리저리 날아다녀
빨랫줄 위의 흰 빨래만 빼고
마침내 풍경 전체가 한 폭 목탄화가 된다.
이것은 팔레스트리나**합창단.
 
어디에도 빈 데는 없다.
 
내 자신이 작아지는 동안
시가 커지는 환상적인 느낌.
시가 자라고,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나를 밀어낸다.
나를 둥지 밖으로 팽개친다.
시가 완성되었다.
 
*헬(Hel): 북유럽 신회에서 죽음의 여신.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6세기 이탈리아의 교회음악 작곡가. 
 
역사에 대하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삼월 어느 날 바다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얼음이 하늘처럼 푸르다. 태양 아래 부서지고 있다.
태양이 얼음 밑의 마이크에 대고 속삭인다.
거품이 일고 부글부글 들끓는다. 멀리서 시트를 잡아채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이 '역사'와 같다 우리들의 '지금'. 우리들은 그 속으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2
회담들은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섬들.
나중엔, 타협의 기나긴 흔들리는 다리.
모든 차량이 그 다리 위를 지나간다. 별들 아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들 아래,
쌀알처럼 이름 없이 텅빈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얼굴들 아래.
 
3
1926년, 괴테는 지드로 변장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떤 얼굴들은 사후에 본 것으로 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알제리 소식이 나날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큰 저택 한 채가 보이고, 저택의 창들은 하나만 빼고
모두 검었다. 그 창에서 우리는 그레퓌스의 얼굴을 보았다.
 
4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그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5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신문지 한 장이 몇 달째 누워 있다. 사건을 가득 담고
빗속 햇빛 속에 밤이나 낮이나 신문은 그곳에서 늙어간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배추가 머리가 되어가는 중이고, 땅과 하나 되어가는 중이다.
옛 기억이 서서히 당신 자신이 되듯.
 
어떤 죽음 이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한때 충격이 있었다.
뒤에는 긴 창백한 깜빡이는 혜성 꼬리.
그것은 우리를 집안에 묶어둔다. 그것은 TV 화면을 흐리게 한다,
그것은 전화선 위에 차가운 물방울로 내려 앉는다.
 
지난해의 잎새들이 몇몇 매달려 있는 관목 숲에서
아직도 우리는 겨울 태양 아래 천천히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잎새들은 오래된 전호번호부에서 뜯겨져 나온 책자 같다.
사람들의 이름은 추위가 삼켜버렸다.
 
아직도 심장 고동소리를 듣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대로 그림자가 몸보다 더 실재(實在)일 때가 있다.
검은 용비늘 갑옷 옆에서
사무라이는 조그맣게 보인다.
 
여름 초원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너무 많은 것들을 우리는 보아야만 했다.
현실은 우리를 너무 많이 닮게 했다.
하지만 마침내 여름이다.
 
커다란 비행장, 관계사가 한 짐 한 짐
짐을 부려 놓는다.
얼어붙은 외계인들.
 
풀과 꽃들의 나라, 우리가 착륙하는 곳.
풀 나라엔 초록 감독이 있고,
그에게 나를 신고한다.
 
압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푸른 하늘에서 귀청 찢는 엔진 소리.
모든 것이 떨리는 공사장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돌연 대양의 심연이 열릴 수도 있는 곳.
조가비와 전화기가 뒤엉켜 소리 내는 곳.
 
옆으로 잽싸게 보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빽빽한 곡식 들판의 다채로움이 황색 강으로 흘러간다.
머리 속의 불안한 그림자들이 그곳에 가고 싶어한다.
곡식알 속으로 기어들어 자기도 황금색이 되고 싶다.
 
어둠이 내린다. 한 밤중에 잠자리에 든다.
작은 배가 큰 배에서 떨어져 나온다.
물 위의 홀로움.
사회의 검은 선체가 멀리멀리 흘러간다.
 
열린 공간 닫힌 공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장갑같은 일을 통해 사람은 세상을 느낀다.
한낮에 잠시 장갑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쉰다.
장갑은 선반에서 갑자기 자라고 펼쳐지고,
집 전체를 안으로부터 검게 만든다.
 
검어진 집이 떨어져 나가 봄바람 속에 선다.
'사면(赦免)이야' 속삭임이 풀밭을 달린다. '사면이야.'
한 소년이 하늘로 비껴 올라가는 투명한 줄을 잡고 내닫는다.
소년의 야성적인 미래의 꿈이 하늘에서 교외보다 더 큰 연과 더불어 난다.
 
꼭대기에서 보면 더 북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의 푸른 융단.
구름 그림자가
가만히 서 있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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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음악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오늘은 건물을 열지 않는 날.
태양빛이 차유리로 밀려들어 책상 표면을 덥힌다.
인간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책상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길고 널찍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햇빛 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쳐 여기에 와 있다.
 
몇 분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늪에 웅크린 소나무가 왕관을 떠받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뿌리에 비한다면, 넓게 뻗은, 은밀히 기어가는, 죽지 않는, 혹은 반쯤 죽지 않는
뿌리 조직에 비한다면.
 
나 너 그 그녀 역시 가지를 뻗는다.
의지 바깥으로,
대도시 바깥으로.
 
우유 빛 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나의 다섯 감각들이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한 느낌이 온다.
어둠이 흘러내리는 운동장에서 밝은 옷을 입고 달리는 육상선수처럼
끈질기게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한 느낌.
 
칠월, 숨쉬는 공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키 큰 나무 아래 등을 대고 드러누운 사람은
또한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사람은 수천의 잔가지를 뻗고
앞뒤로 흔들리고,
느린 동작으로 밀려나오는 사출좌석(射出座席)에 앉는다.
 
부둣가에 내려가 앉은 사람은 실눈을 뜨고 물을 바라본다.
부두는 사람보다 빨리 늙는다.
부두의 말뚝들은 은회색, 뱃속에는 둥근 돌이 들어 있다.
눈부신 빛이 곧장 관통한다.
 
갑판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번쩍이는 해협을
온종일 돌아다니는 사람은
마침내 푸른 램프 속에서 잠들리라.
섬들이 램프 유리 너머로 거대한 나방처럼 기어다니는 동안.
 
근교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땅과 동일한 색깔의 작업복을 걸친 사람들이 구덩이에서 올라 온다
막다른 중간 지대, 도시도 시골도 아닌 곳.
지평선의 키 큰 건설 기중기는 대도약을 원하지만 시계는 반대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멘트 관들이 바싹 마른 혓바닥으로 빛을 핥는다.
자동차 정비소가 한때의 곳간 자리를 차지한다.
돌들이 돌연 달 표면의 물체같은 그림자를 던진다.
이런 곳이 점점 늘어난다.
유다의 돈으로 산 땅처럼 '도공(陶工)의 땅, 이방인의 무덤'처럼.
 
교통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트레일러 달린 장거리 화물 자동차가 안개 속을 기어간다.
호수 바닥 진흙탕 속을 기어가는
잠자리 애벌레의 거대한 실루엣.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헤드라이트들이 만난다.
서로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불빛의 홍수가 솔잎 사이로 돌진한다.
 
우리들, 어둠의 차량들은 황혼 속 사방에서
달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둔탁한 굉음 속을 미끄러져 간다.
 
탁 트인 평원 공장들이 둥지 틀고 있다.
해마다 공장 건물들이 2밀리미터씩 가라앉는다.
땅이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다.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이곳에 세워진
가장 화사한 꿈의 산물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씨앗들이 아스팔트에서 살려고 힘겨워한다,
다음엔 밤나무가 먼저 나타나고, 하얀 꽃 송이 대신
강철 장갑 꽃피울 준비를 하는 듯
우울한 밤나무를 지나
 
회사 수위실이 나타난다. 고장 난 형광등 불빛이
깜빡이고 또 깜빡인다. 이곳 어디엔가 비밀의 문이 있다. 열려라!
뒤집어진 잠망경에 눈을 갖다대고
 
아래쪽을 보라. 거대한 구멍들이 있고, 깊이 매설된 거대한 파이프들에는
바다풀들이 죽은 사람의 수염처럼 자라고 있다.
진 흙투성이 잠수복을 입은 '청소부'가 유영하고 있다.
 
맥박이 점점 약해지고, 막 질식할 듯,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사슬이
부서지고 부서지고, 다시 붙고 다시 붙고 한다는 것만, 영원히.
 
야간 근무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밤중에 모래자루들 사이로 내려간다.
나는 배의 전복을 막는
말없는 무게 추들 중의 하나!
흐릿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 돌처럼 움직인다.
그들이 전하는 소리는 다만, '손대지 마.'
 
2
다른 목소리들이 몰려든다. 듣는 자는,
희미한 빛을 발하는 라디오 다이얼 위로
수척한 그림자처럼 미끄러진다.
언어가 사형집행인들과 보조를 맞추어 행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만 한다.
 
3
늑대가 왔다!
창문에 혀를 대고 비비는 우리들의 친구!
골짜기엔 기어다니는 도끼 자루들이 가득하다!
야간 비행기가 철테 달린 휠체어처럼
밤하늘에 느릿한 굉음을 쏟아 붓는다
 
4
사람들이 땅을 파헤치는 중이다. 지금은 조용하다.
텅 빈 교회묘지 느릎나무 아래
빈 굴착기 한 대, 손을 땅에 내려놓고 있다.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식탁에서 잠든
사람의 모습, 교회 종이 울린다.
 
열린 창(窓)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느 날 아침
이층으로 올라가 열린 창가에 서서
면도를 하였다.
면도기에 스위치를 넣었다.
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가르릉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포효소리가 되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되었다.
한 목소리가, 조종사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눈감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보시는 겁니다.'
일어났다.
여름 위로 낮게 비행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조그마한 것들, 그들은 무게가 있을까?
수도 없는 초록의 방언들.
특히나 목재 가옥의 붉은 벽들.
풍뎅이들이 햇빛 속, 거름 속을 번쩍이고 있었다.
뿌리째 뽑힌 지하실들이
공중을 항해하였다.
움직이는 공장들.
인쇄소가 기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만이
동작 없는 유일한 물체였다.
사람들은 침묵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묘지에 잠든 자들이
카메라의 유년 시절에 촬영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공비행!
나는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말(馬)의 시야처럼
시야가 갈라졌다.
 
서곡(序曲)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진눈깨비 속에서 옆으로 질질 발을 끌며 다가오는 그 무엇에 나는 멈칫한다.
다가올 일의 단편.
허물어지는 벽. 눈 없는 그 무엇. 단단한.
이빨의 얼굴!
홀로인 벽. 아니면 집인가,
내가 볼 수 없어도?
미래. 일군(一群)의 빈집들.
눈을 맞으며 앞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2
두 가지 진실이 서로 접근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하나는 외부에서.
두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기회를 갖는다.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이 격렬하게 외친다. '멈춰!
내 자신을 알 필요만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물가에 정박하고 싶은 배가 있다. 바로 여기서 정박을 시도한다.
앞으로도 수천 번 시도하리라.
 
숲의 어둠으로부터 길다란 갈고리 장대가 나타난다. 열린 창을 밀고 들어와,
춤으로 몸 덥히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 섞인다.
 
3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아파트가 철거되려 한다. 벌써 많은 것이 비었다.
닻이 풀렸다. 계속되는 슬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트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밝은 아파트다. 진실은 가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삶은 큰 원을 한
바퀴 그리고, 막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날아가 버린 방. 이곳에서 내가 살 비
비며 살아온 물건들이 이집트 그림들처럼, 묘지 내실(內室)의 장면들처럼, 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하여 그림이 점점 흐릿해진다. 창
들이 훨씬 커졌다. 빈 아파트는 하늘을 향한 커다란 망원경.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 때처럼 사방이 조용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뒤뜰에서 비둘기들이 구구대는
소리뿐.
 
이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차를 모는 동안 졸음이 와서 길옆의 나무 아래로 밀고 들어갔다.
뒷자석으로 굴러들어가 잠들었다. 얼마 동안? 몇 시간 동안 어
둠이 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잠이 깨었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의
식이 충분히 돌아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내가 누구지? 나는 막 뒷좌석에서 잠깨어 마대자루 속의 고양
이처럼 공포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그 무엇! 내가 누구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의 삶이 내게로 돌아온다. 나의 이름이 천
사처럼 돌아온다. 성벽 바깥에는 레오노라 전주곡처럼 트럽펫 소
리가 들리고, 나를 구출해줄 발걸음들이 긴 계단 아래로 신속히 다
가온다. 내가 오고 있어! 내가!
 
하지만 자동차들이 불을 켜고 미끄러져 지나가는 간선 고속도로에
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무(無)의 지옥 속의 15초 전투를 잊을
수 없다.
 
똑바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순간적 집중으로 닭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기묘하게도
닭은 살아 있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뻣뻣하고 메마른 느낌이 흡사
1912년의 진실을 외쳐댄 흰 깃털장식의 낡은 여성모자 같았다. 천둥이 허
공에 걸려 있었고, 울타리 널빤지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사진첩을 열 때처럼.
 
닭을 들고 닭장 속으로 다시 데려가 놓아주었다. 갑자기 닭이 생기를 되찾
았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규칙에 따라 쫓아다녔다. 닭장
은 금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주변은 사랑과 끈기로 가득하다. 온통 초록 잎새들로 뒤덮이다시피 한 나지막한 돌담. 황혼이 내릴 때면 담을 만든 손의 백 년 된 온기로 돌들은희미한 빛을 발한다.
 
겨울은 힘들었지만 이제 여름이 오고, 땅은 우리가 똑바로 걷기를 원한다. 마치 작은 보트 안에 서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프리카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샤리 강변에 수많은 보트들이 있고, 우호적인 분위가 있고, 거의 암청색 피부의 사람들이 있다. 양 뺨에 세 개씩 평행선 상처를 새겨 사라족임을 나타낸다. 나는 환영받으며 보트에 오른다. 숲의 검은 목재로 만든 카누는,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도 못 믿을 정도로흔들린다. 균형 잡기 동작, 만일 심장이 왼쪽에 있다면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여야 하고, 호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어야 하고, 팔 동작도 크지 않아야 하고, 모든 수사(修辭)도 재쳐두어야 한다. 바로 이것, 이곳에선 수사 있을 수 없다. 카누가 물위로 미끄러져 나간다.
 
변경(邊境) 너머 친구들에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편지가 너무 빈약하였네. 하지만 내가 쓸 수 없었던 것들은
부풀고 부풀어올라 마침내 구식 비행선이 되어
밤하늘로 날아가 버렸네
 
2
편지는 지금 검열관에게 있다네. 그가 램프를 켜자
불빛 속에서 나의 말들이 창살 속의 원숭이처럼 튀어오르고,
창살을 흔들고, 멈추어서는, 이빨을 드러낸다네.
 
3
행간을 읽게나. 우리는 이백 년 뒤에 만날 걸세.
그때는 호텔 벽의 마이크로폰이 잊혀지고
마침내 잠들 수 있겠지. 삼엽충 되어.
 
1966년의 눈 녹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곤두박이로 곤두박이로 흘러내리는 물길, 포효소리, 오래된 최면술.
강물이 자동차 공동묘지를 늪으로 만들고,
가면 뒤에서 번쩍인다.
나는 다리 난간을 꽉 움켜잡는다.
다리, 죽음 지나 항해하는 거대한 강철 새.
 
시월의 스케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예인선이 점점이 녹슬어 있다. 이토록 먼 내지(內地)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이것은 추위 속에 소등(消燈)된 육중한 램프.
하지만 나무들은 야성의 색깔을 띠고 있다. 반대편 기슭으로 보내는 신호.
마치 불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
 
집으로 오는 길에 잔디밭을 뚫고 고개 쳐드는 버섯들을 본다.
이것은 누군가의 손가락.
오랫동안 땅 속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느낀 자의 구조 요청.
우리는 땅의 손가락들.
 
더 깊은 곳으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도시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해가 낮게 걸려 있다.
차들이 몰려들어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느릿느릿 꿈틀대는 한 마리 번쩍이는 용.
나는 용비늘 중의 하나,
돌연 붉은 해가
바람막이 창을 불태우며
쏟아져 들어온다.
내가 투명해진다.
내 속의
글이 보인다.
투명 잉크로 쓰여진 말들,
종이를 불태우면
형체가 나타나리라!
멀리 가야겠다.
도시를 곧장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그리고 때가 되면 차를 내려
숲 속 멀리까지 걸으리라.
오소리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둠이 내리고 앞이 보이지 않고,
저 안쪽 이끼 위에는 돌들이 놓여 있고,
그 중에 하나는 보석!
그 돌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어둠을 빛나게 할 수 있다.
그 돌은 나라 전체를 위한 스위치.
모든 것이 그 돌에 달려 있다.
들여다봐, 만져 봐.
 
보초근무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나는 철기시대 고관대작의 송장처럼
바깥의 돌무덤 속 근무를 명(名)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수레바퀴 살처럼 뻗어
텐트 속에 잠들어 있다.
 
텐트 속은 난로가 대장(隊長), 난로는 불의 탄환을
삼키고 쉭쉭거리는 커다란 뱀.
하지만 이곳 바깥, 새벽을 기다리는 차가운 돌들 사이의
봄밤은 조용하다.
 
바깥 추위 속에서 나는 마법사처럼 날기 시작한다.
곧장 하얀 비키니 자국이 있는
그녀의 몸으로 날아간다.
우리는 바깥에서 함께 태양을 받고 있었고, 이끼가 따뜻하였다.
 
나는 따뜻한 순간들 위를 날아다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호각 소리가 나를 공간 이동시킨다.
돌들 속을 기어,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다.
 
임무, 지금 있는 곳에 있기.
이 같은 엄숙한 황당한 역할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창조가 제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공간이다.
 
새벽이 오고, 성긴 나무줄기들이
색깔을 띠기 시작하고, 서리한테 물린
봄꽃들이 어둠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찾아 소리없는 수색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 있기. 그리고 기다리기.
나는 초조하고, 고집에 차 있고, 혼란스럽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이미 여기에!
나는 그들이 바로 바깥에 와 있음을 느낀다.
 
문밖에 중얼거리는 무리들.
그들은 하나씩만 통과할 수 있다.
그들이 들어오기를 원한다. 왜? 하나씩
들어오고 있다. 나는 십자형 회전문.
 
땅을 뚫고 바라보기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흰 태양이 스모그에 젖는다.
햇빛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쪽으로 길을 더듬어
 
깊숙한 내 눈에 닿는다.
도시 아래 깊은 곳에 내려가 위를 쳐다보는,
 
밑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눈. 길거리들, 건물 기초들,
이것은 흡사 전시(戰時)의 도시를 찍은 항공사진,
 
거꾸로 찍은, 말하자면 두더지 사진.
흑백의 말없는 사각형들.
 
그곳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죽은 자의 뼈와
산 자의 뼈를 분간할 수 없다.
 
햇빛의 볼륨이 높여지고,
항공기 선실 속으로, 낚싯배 속으로 범람해 들어간다.
 
1972년 십이월 저녁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여기 내가 왔다. 어쩌면 '대 기억'에게 고용되어
바로 지금을 살게 된 투명인간, 나는 차를 몰고
 
자물쇠 채워진 흰 교회를 지난다.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성자(聖者)가
마치 안경이라도 빼앗긴 듯 속절없이 웃고 있다.
 
성자는 홀로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지금, 지금, 지금이다. 만유인력 법칙이 우리를 압박한다.
낮이면 일의 반대편으로, 밤이면 침대의 반대편으로 전쟁이다.
 
늦은 오월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과나무 벚나무 꽃피어 마을이 날아오른다.
하얀 구명의(求命依) 같은 아름답고 지저분한 오월 밤, 나의 생각들이 바깥을 떠돈다.
고요하고 완강하게 날갯짓하는 풀잎들 잡초들.
편지함이 침착하게 반짝인다. 쓰여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이 셔츠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는다.
사과나무 벚나무, 그들은 말없이 솔로몬을 비웃는다.
그들은 나의 터널 속에서 꽃핀다. 나는 그들이 필요하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엘레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첫 번째 문을 연다.
햇빛 비치는 커다란 방.
육중한 차가 길거리를 지나면서
도자기를 떨게 한다.
 
이호실 문을 연다.
친구들, 어둠을 마셔
눈에 보이는 친구들!
 
삼호실 문. 비좁은 호텔방.
뒷골목이 보인다.
아스팔트 위를 밝히는 가로등 하나.
경험, 그 아름다운 찌꺼기.
 
 
건널목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토록 오래 나를 따라왔던 길거리.
그린란드의 여름에 눈 웅덩이에서 빛나는 길거리를 건널 때,
얼음바람이 내 눈을 치고
두세 개의 태양이 눈물의 만화경(萬華鏡) 속에 춤춘다.
 
내 주변으로 길거리의 온 힘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힘.
차량들 아래 땅 속 깊은 곳,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숲이 조용히 천 년을 기다린다.
 
거리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시력은 너무 빈약하여 태양도
검은 공간의 회색 공일 뿐.
그러나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
 
늦가을 밤의 소설, 그 시작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배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 무언가가 내내 강박관념처럼 덜거덕거린다. 스포트라이트가켜진다. 우리는 선착장에 다가선다. 여기서 내릴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트랩 드릴까요?' 됐습니다. 나는 기우뚱 큰 걸음을 곧장 밤 속으로 내딛는다. 선착장 위에, 섬 위에 올라와있다. 뭔가 축축하고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고치에서 막 기어나온 한 마리나비. 손에 든 플라스틱 옷가방은 아직 덜 생긴 날개. 몸을 돌려 창에 불을 환하게 켜고돌아가는 배를 지켜본다. 어둠 속에 길을 더듬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집을 향한다. 오랫동안 비워둔 집. 이 부근에는 지금 집들이 모두 비어 있다---. 이곳에서 잠자는 일은 아름다운 일. 나는 등을 대고 드러눕는다. 잠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불확실하다. 방금 읽은몇 권의 책이 버뮤다 삼각해역을 향하는 낡은 범선처럼 항해한다. 그곳에 이르면 그들은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어떤 소리가 들린다. 속이 빈, 멍한 북소리, 바람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떤 물체를 땅이 움켜잡고 있는 다른 물체에 갖다 부딪친다. 만일 밤이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면, 만일 밤이 진실로 그 무엇이라면, 바로 이소리이리라. 청진기를 통해 들려오는 느린 심장 고동소리. 고동치고, 일순 멎고, 되돌아 온다. 마치 그 존재가 지그재그를 그리며 경계를 넘어가는 듯. 어쩌면 저기에 누군가가 있는지 모른다. 벽 속에서, 자꾸 두드리는, 딴 세상에 속하는,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남겨진, 벽을 두드려, 돌아가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너무 늦어 여기 내려올 수도, 저기 올라갈 수도, 때맞추어 배를 탈 수도 없었다----. 딴 세상은 또한 이 세상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황금 잎사귀 갈색 잎사귀를 닫고 있는 녹슨 것 같은 나뭇가지가 보인다. 하늘을 향한 일군의 뿌리들. 얼굴 가진 돌들. 숲은 배가 떠날 때에 남겨 두고 간 내가 사랑하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검은 산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다음 모퉁이에서 버스가 차가운 산그늘을 벗어나,
코를 태양에 갖다대고 소리치며 위로 기어올랐다.
우리는 짐 꾸러미 신세였다. 독재자의 흉상도 거기에 있었다.
신문지에 싸여, 병 하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죽음, 출생의 표지인 죽음이 우리 모두들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떤 사람 위에서는 빠르게 어떤 사람 위에서는 느리게.
산턱 높이 푸른 바다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슈베르트 연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저녁 어둠 속 뉴욕을 벗어나 팔백 만이 살아가는 집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한 조망 지점.
 저 거대한 도시는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긴 부유물, 옆구리에
서 바라본 나선형 은하수.
 은하수 속에서는 커피 잔들이 카운터 위를 오가고, 숍 윈도우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흔적 남김 없이 지나가는 구두들에게 구걸한다.
 화재 탈출계단이 솟아오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져 닫히고,
삼겹 자물쇠 채운 문 뒤에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돌진하는 카타콤*, 지하철 전동차 속에서 구부린 몸들이 꾸벅거린다.
 통계가 없어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저쪽 어떤 방에
서는 슈베르트가 연주되고 있음을,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슈베르트 선율
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한 실재(實在)임을.
 
2
 인간 두뇌의 광막한 평원이 접고 또 접혀 주먹 크기만하게 되었다.
 사월이면 제비가 지난해의 둥지로 돌아와 바로 이 교구 바로 이 헛
간의 처마 밑을 찾아든다.
 제비는 트란스트발을 출발하여 적도를 지나고, 육 주간 두 대륙 상공을
날고, 계속 항해하여 거대한 땅덩어리 끝에서 사라져 가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향한다.
 그리고 그 남자, 전 생애의 부호들을 한데 끌어모아 다섯 현악기를 위
한 꽤나 흔한 몇몇 음표로 압축시킨 사람,
 바늘 귀 속으로 강을 흐르게 한 그 사람은
 비엔나 출신의 몸매 풍성한 젊은 양반이었고, 친구들한테 '작은 버섯'이
라 불렸고, 안경 낀 채 잠들었고, 아침이면 정확히 제 시간에 높다란
작업대 앞에 섰다.
 그렇게 했을 때, 경이의 지네들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3
 현악 오중주가 연주되고 있다. 나는 탄력 있는 땅을 딛고 따뜻한
숲을 통해 집으로 걷는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져, 중량없이 미래로 굴러 들어가,
불현듯 식물들도 생각이 있음을 깨닫는다.
 
4
 그토록 많은 것들을 믿어야 한다. 땅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단지
나날의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마을 위쪽 산비탈에 달라붙은 쌓인 눈을 믿어야 한다.
 침묵의 약속들과 이해의 미소를 믿어야 하고, 사고 전보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하고, 안으로부터 돌연한 도끼의 타격이
오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고속도로 위 삼백 배로 확대된 강철 벌떼 속에서 우리를 데리고
달리는 차축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진실로 우리의 믿음에 값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믿을 수 있다고 다섯 현악기들이 말한다. 그
리고 무엇으로 가는 길을 얼마간 우리와 동행한다.
 마치 계단에 불이 나갔을 때. 어둠 속의 길을 찾아나가는 눈먼
난간을 우리의 손이 믿고 따르듯,
 
5
 우리는 피아노로 몰려들어 네 개의 손으로 F 단조를 연주한다. 한
마차 속의 두 마부처럼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손들이 음(音)의 추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행(幸)
불행(不幸)의 무게가 정확히 똑같아서
 무서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큰 저울에 작은 변화를 주려고 우리가 납
의 추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애니가 말했다. '이 음악은 너무나 영웅적이예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행동의 인간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 살인자가
되지 못해 스스로를 경멸하는 사람들.
 또 사람을 사고 파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의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 모든 변주 속에서도 때로는 반짝이며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고 힘찬, 저 긴 멜로디의 선, 달팽이의 흔적과
강철 철사의 모든 변주 속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는 멜로디.
 완고한 멜로디가 바로 이 순간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위로 솟아 오른다.
 심연 속으로.
 
*카타곰(catacomb): 초기 기독교시대의 비밀 지하묘지.
 
집으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전화 호출 소리가 밤중에 달려나갔다. 들판 이곳저곳 도시들의
근교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후 호텔 방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마치 고동치는 심장으로 숲 속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 경기자
가 손에 든 나침반의 바늘 같았다.
 
긴 가뭄이 끝나고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여름 저녁이 회색이다.
하늘에서 비가 살금살금 내려와
소리없이 착륙한다.
잠든 누군가를 놀래키려는 듯.
 
물 반지들이 만(灣)의 수면을 수놓으며 헤엄치고,
만의 수면은 지금 이 순간 유일한 표면.
나머지는 모두 높이와 깊이,
솟아오르고 가라앉는다.
 
두 개의 소나무 둥치가
하늘로 치솟아, 길다란 속이 빈 신호드럼이 된다.
도시들과 태양은 흔적도 없다.
키 큰 풀 속에는 천둥이 들어 있다.
 
신기루 섬에다 전화를 걸 수 있다.
회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천둥에게 철광석은 꿀,
우리는 자신의 암호에 따라 살 수 있다.
 
숲 속의 집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곳으로 가는 길에 놀란 날개들이 두어 번 퍼드덕거렸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혼자 가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키 큰 빌딩은 완
전히 균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빌딩은 언제나 기우뚱거리지
만 붕괴 능력이 전혀 없다. 천 개로 변한 태양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다. 이 햇빛 놀이에서는 전도된 만유인력의 법칙이 지배한
다. 집이 하늘에 닿은 채 떠 있고,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위로
떨어진다. 이곳에선 빙그르르 돌 수 있다. 이곳에선 울 수도 있다.
이곳에선 우리가 보통 보따리 싸서 꽁꽁 묶어두는 오래된 진실들을
볼 수도 있다.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 역할들도 날아
올라, 머나먼 멜라네시아의 작은 섬 어떤 납골당 속의 바싹 마
른 두개골처럼 내걸린다. 어린애 같은 햇빛이 무시무시한 트로피를
감싼다. 숲은, 그렇게 온화하다.
 
오르간 독주회의 짧은 휴지(休止)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오르간 연주가 멈추고 교회 속은 죽음 같은 정적, 그러나 그건 잠시뿐,
덜컹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더 큰 오르간, 바깥쪽 차량들로부터 뚫고 들어온다.
 
우리는 차량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소리는 교회 벽을 따라 흐른다.
바깥세상이 그곳에서 투명한 필름처럼, '매우 약하게'되려 애쓰는 그림자들과 더불어 미끄러진다.
 
거리 소음의 일부인 양, 고요 속에 고동치는 내 맥박소리를 듣는다.
나와 함께 걸어다니는, 내 속에 숨은 작은 폭포, 내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 피만큼 가까이, 네 살 때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트레일러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지나가며 육백 년 된 교회 벽이 떨리게 하는소리를 듣는다.
 
이건 어머니의 무릎보다 못할 게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나는 아이가 되고,
어른들 이야기 소리를 멀리서 듣고, 승자와 패자의 뒤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푸른색 벤취 위엔 드문드문 신자들이 앉아 있고, 교회 기둥들이 이상한 나무들처럼 솟아있다.
뿌리도 없고 꼭대기도 없이, 다만 흔한 바닥과 흔한 지붕뿐.
 
하나의 꿈을 다시 산다. 교회묘지에 내가 홀로 서 있다. 사방엔 시야가 닿는 데까지
히스가 타오르고 있다. 지금 누굴 기다리는 거지? 친구, 왜 오지 않는 거지? 벌써 와 있어.
 
서서히 죽음이 밑으로부터, 땅으로부터 빛을 피워 올린다. 히스가 빛난다. 점점 더 강한자줏빛으로,
아니,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색깔로---- 이윽고 아침의 창백한 빛이 흐느끼며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고
 
나는 깨어난다.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저 흔들림 없는 '어쩌면'의 세계로.
추상적인 세계 그림은 어느 것이든 폭풍의 청사진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집에는 만물박사 '백과사전', 일 야드의 서가(書架)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책 읽기를배웠다.
그러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백과사전은 각자의 영혼에서 자라나오고,
백과사전은 태어날 때부터 쓰여지고, 수천수만 장의 페이지들이 서로를 압박하며 서게된다.
그래도 그 사이엔 공기가! 숲 속의 떨리는 잎새들처럼 모순의 서(書).
 
거기에 있는 것은 매 시간 변하고, 그림들은 자신을 다시 만지고, 말들은 깜빡거린다.
한 파도가 전(全) 텍스트를 덮치고, 다음 파도가 뒤따르고, 또 다음---.
 
답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책상 맨 밑바닥 서랍에서 26년 전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만난다.
겁에 질린 편지, 편지는 두 번째 도착한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
 
 집에 다섯 개의 창이 있다 창을 통하여 낮이 청명하고 고요하게 빛
난다. 다섯 번째 창은 검은 하늘, 천둥 그리고 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다섯번 째 창에 선다. 편지.
 
 때로는 화요일 수요일 사이에 심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26년은 한순
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더 미로 같은 것이어서,
만일 적절한 곳에서 벽에 바짝 붙어선다면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저 반대편에서 자기 자신이 걸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편지에 답장을 보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일이었다. 헤
아릴 수 없는 바다의 문지방들이 이동을 계속했다. 팔월 젖은 풀 속의 두
꺼비처럼 심장이 순간순간 고동치기를 계속했다.
 
 답장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나쁜 날씨를 약속하는 솜털 구름처럼 쌓여
간다. 편지들이 햇빛의 광택을 잃게 한다. 어느 날 답장을 보내리라.
어느 날 내가 죽어 마침내 집중할 수 있을 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을 다
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도시의 125번
가에 갓 도착하여, 바람 속에 춤추는 쓰레기들의 거리를 내가 다시 걸
을 때, 가던 길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를 사랑하는 나, 끝없는
텍스트 대중 속의 하나의 대문자 T.
 
후주곡(後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움켜잡는 갈고리처럼 세상의 바닥을 질질 끌며 걷는다.
내게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이 걸린다.
피로한 분개, 타오르는 체념.
사형집행관들이 돌을 준비하고, 신이 모래 속에 글을 쓴다.
 
조용한 방.
달빛 속에 가구들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천천히 나 자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텅 빈 갑옷의 숲을 통하여.
 
꿈 세미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땅 위의 40억
모두가 잠자고, 모두가 꿈꾼다.
얼굴들이 떼 지어, 몸들이 떼 지어, 꿈속에 나타난다.
꿈속의 사람들은 현실 속의 우리보다 수가 더
많다. 하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극장에서 졸 수가 있고,
극중에 눈거풀이 처질 수 있다.
일순간 이중노출이 오고, 눈앞의 무대는
꿈의 조종을 받아 마침내 제압당하고,
그러면 무대는 더 이상 없고, 오직 우리 자신뿐.
정직한 심연 속의 극장!
과도한 연출가의 신비!
새 연극 끊임없이 기억하기.
 
한 침실, 밤
어두워진 하늘이 방으로 흘러든다.
누군가 읽다 잠든 책이
아직도 열린 채
부상 입은 몸으로 침대 모서리에 큰 대자로 뻗어 있다.
잠자는 눈은 움직이고 있고,
또 다른 책 속의
문자 없는 텍스트를 따라가고 있다.
환히 밝혀진, 구식의 날쌘 텍스트.
눈꺼풀의 수도원 담장 속에서
쓰여지는 현란한 즉흥극.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의, 유일무이 본(本).
아침이면 말소(抹消).
거대한 낭비의 신비!
절멸(絶滅)! 의심 많은 제복들이
관광객을 세워
카메라를 열고, 필름을 풀고,
햇빛이 그림들을 죽게 할 때처럼.
그렇게 꿈들은 낮의 빛으로 검어진다.
절멸인가.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인가?
한 번도 끊어지는 적이 없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꿈꾸기가 있다. 빛은 남의 눈에게나 줘버리는 곳.
기어가는 생각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곳.
얼굴들과 형상들이 재편성되는 곳.
환한 대낮에 우리가 사람들 속에 섞여
어떤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동일한 수의, 어쩌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곳 길거리 양편
어두운 건물들 속 높은 곳에 들어 있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창가로 와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명종곡(鳴鐘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손님이 자신의 누추한 호텔에 묵기를 원하므로, 주인 여자는 손
님을 멸시한다.
 나는 한 층 올라가 구석방에 자리잡는다. 형편없는 침대.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
 수십만 진드기들이 행진하고 있는 무거운 커튼.
 
 바깥은 보행자 전용거리.
 느릿느릿한 관광객들, 서두르는 학교 아이들, 덜거덕거리는 자
전거를 타고 가는 작업복의 사내들.
 자기가 지구를 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구의 손아귀에 사
로잡혀 자기도 속절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들 모두가 걷는 거리, 그것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방의 유일한 창은 다른 무언가에 면해 있다. '야성의 장터,'
 들끓는 땅, 널찍한 떨리는 지표, 때때로 붐비고 때때로 버림받
은 곳.
 
 내가 속에 데리고 다니는 것들이 저곳에서는 물질로 화한다. 온
갖 공포들, 온갖 기대들,
 생각도 할 수 없는 모든 것들, 그럼에도 언젠가 일어날 모든 것들.
 
 나의 해변들은 나지막하다. 만일 죽음이 6인치 올라온다면 나는
범람하리라.
 나는 막시밀리안**이다. 때는 1488년, 적들이 우유부단한 탓에
 나는 이곳 부뤼헤***에 유폐되어 있다.
 적들은 사악한 이상주의자들, 그들이 공포의 뒤뜰에서 행한 일
을 나는 묘사할 수 없다. 나는 피를 잉크로 바꿀 수 없다.
 
 나는 또한 덜거덕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를 내려가는 작업
복의 사내이기도 하다.
 
 나는 또한 아까 본 그 사람, 그 관광객이기도 하다. 가다가 멈추
고 가다가 멈추면서,
 관광객은 시선을 달에 탄 창백한 얼굴들 위로, 옛 그림들의 파도
치는 휘장들 위로 배회하게 한다.
 
 내가 갈 곳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자신은 더더욱
아니다. 매번 발걸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죽었기에 아무도 상처받을 수 없는 화석 전쟁터 속을 돌
아다니기!
 먼지 뒤집어쓴 초목들,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들, 돌처럼 굳은
눈물들이 발꿈치 아래 우지끈 부서지는 정원 통로들----.
 
 뜻밖에, 마치 덫의 철사줄을 밟기라도 한 듯, 종 울림이 익명의
탑에서 시작된다.
 명종곡! 솔기를 따라 지루가 터지고, 종소리가 플랑드르 지방을
가로질러 굴러나간다.
 명종곡! 꽝꽝거리는 쇳소리, 찬송가인 동시에 유행가, 떨면서 공
중에 새겨지는!
 
 떨리는 손의 의사가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처방전을 작성하지
만, 쓰여진 것은 알아볼 수 있으리라----.
 
 초원과 집들 위로, 수확과 매매(賣買) 위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로 명종곡이 울린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구분이 안 된다!
 종들이 이윽고 우리를 날개에 실어 집으로 데려다 준다.
 
 종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다시 호텔 방에 돌아와 있다. 침대, 불빛, 그리고 커튼, 이상
한 소리가 들린다. 지하실이 몸을 끌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팔을 뻗고 침대에 눕는다.
 나는 하나의 닻, 저 밑으로 내려가 위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안정시켜 주는, 나를 일부로 포괄하면서
 분명 나보다 더 중요한 위대한 미지(未知)를 안정시켜 주는.
 
 바깥은 보도, 길거리, 내 발걸음들이 죽어가는 곳, 또한 쓰여지
는 것이 죽어가는 곳, 침묵에 붙이는 나의 서문과 안팎 뒤집힌 나
의 찬송가가 죽어가는 곳.
 
*명종곡: Carillon. 교회의 탑에 한 벌의 종을 매달아 연주하는 곡.
**막시밀리안(Maximilian 1459~1519):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낸 막시밀리안 1세
***브뤼헤(Brugge): 벨기헤 북서부의 도시.
 
자장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나는 하나의 미라, 숲의 푸르른 관 속에서, 엔진들과 고무와 아
스팔트의 부단한 소음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낮 동안 일어난 일들이 가라앉고, 숙제가 삶보다 무겁다.
 
 외바퀴 손수레는 단일한 바퀴를 타고 앞으로 굴렀고, 나 자신은
회전하는 정신을 타고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 내 생각들은 회전을
멈추었고 손수레는 날개를 달았다.
 
 긴 마침내, 우주공간이 어두울 때 비행기가 오리라. 승객들은 아
래쪽 도시들이 고트족의 황금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리라.
 
유럽 깊은 곳에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나, 두 개의 수문 사이에 떠 있는 어두운 선체는
 주변의 도시가 깨어나는 동안 호텔 침대에서 쉰다.
 침묵의 소란과 회색의 빛이 흘러들고,
 천천히 나를 일으켜 다음 단계를 맞게 한다. 아침이다.
 
 수평선을 엿듣고, 죽은 자들이 뭔가를 말하려 한다.
 죽은 자들은 담배를 피우나 식사를 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나
음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중 하나처럼 나도 서둘러 길을 가고 있으리라.
 달처럼 무거운 검게 변한 대성당이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다.
 
상하이 거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공원의 많은 나비를 사람들이 읽고 있다.
 마치 팔랑이는 진실의 모퉁이라도 되는 듯, 나는 저 배추 흰나비
를 사랑한다.
 
 새벽 군중들이 달리기로써 우리의 조용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공원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모든 상황을 위
하여, 그리고 실수를 피하기 위하여, 옥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은
여덟 개의 얼굴들이 있다.
 
 각자에게는 또한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을 반영하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피곤한 순간에 나타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한 입의 에더 브랜
디처럼 맛이 쓴 그 무엇을 반영하는 얼굴.
 
 연못 속의 잉어들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헤엄치
는 잉어들. 잉어들은 언제나 활동 중이므로, 충실한 신자들의 귀감이다.
 
 
2
 한낮이다. 빨래가 잿빛 해풍 속에 펄럭이고, 아래쪽으로는 자전거
탄 사람들이
 빽빽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좌우로 미로를 조심하시오!
 
 해석할 수 없는 문자 기호들에 둘러싸인다. 나는 완전 문맹이다.
 하지만 나는 지불할 걸 모두 지불했고, 영수증을 모두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토록 수많은 읽을 수 없는 영수증들이 쌓여 있다.
 나는, 매달려 땅에 떨어질 줄 모르는 시든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한 그루의 고목.
 
 한 줄기 바닷바람이 불어 영수증들을 바스락거리게 한다.
 
 
3
 새벽에 군중들이 걷기로써 우리의 고요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모두 이 거리에 승선하고 있다. 거리는 여객선의 갑판처
럼 빽빽하다.
 어디로 가고 있지? 찻잔이 충분할까? 우리는 이 거리에 승선하게
된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지경!
 지금은 폐소 공포증에 태어나기 천 년 전!
 
 이곳을 걷는 사람들 하나하나 뒤에는 십자가 하나씩 맴돌고 있다. 우
리들 뒤에서 우리를 따라잡고, 우리와 결합하고 싶어하는,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 눈을 가리고 '누구게?'라고 속삭이고 싶어 하는.
 
 우리는 바깥 햇빛 속에서 거의 행복해 보인다. 자기도 모르는 상처들로
우리가 치명적인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작은 잎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소리없는 아우성이 벽 위에 안쪽으로 휘갈긴다.
꽃핀 과일나무들과 뻐꾸기 울음소리.
이것은 봄의 마취, 하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은
차고에서 뒤쪽으로 슬로건을 칠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며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의 부끄럼 많은 승객들이 사용하는 잠망경처럼, 곧바로 본다.
이것은 순간들의 전쟁, 불타는 태양이
고통의 주차장, 병원 위에 서 있다.
 
우리는 망치질 당해 사회 속에 박혀 있는 살아 있는 못들.
어느 날 모든 것에서 놓여나리라.
날개 밑에 죽음의 공기를 느끼며,
이곳에서보다 더 온화해지고 더 야성적이 되리라.

====================
 

 
로마네스크 아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거대한 로마네스크 교회의 반(半) 어둠 속에서, 관광객들이 서로를 밀쳤다.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 뒤에 입을 벌리고 있어, 완전히 볼 수 없었다.
 몇 개의 촛불들이 깜빡거렸다.
 얼굴 없는 한 천사가 나를 껴안고,
 나의 온몸을 관통하여 속삭였다.
 '인간 됨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자랑으로 여기시라!
 그대 내부에서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 위에 끝없이 열리나니,
 그대는 한 번도 완전하지 못할 것이나, 그것이 그분의 뜻이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나는 존즈 씨 부부, 다나카 씨 그리고 사바티니 여사와 함께
 태양 들끓는 광장으로 밀려 나왔고,
 그들 모두의 내부에서 둥근 천장이 등근 천장 뒤에 끝없이 열렸다.
 
 
경구(警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자본의 건물, 살인 벌의 꿀벌통, 소수를 위한 꿀.
그는 그곳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어두운 터널에서 날개를 펴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날았다. 그는 삶을 다시 살아야만 했다.
 
9세기 여자의 초상화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녀의 목소리가 옷 속에서 질식당한다. 눈이
검투사를 따라간다. 다음은, 그녀 자신이
경기장에 섰다. 그녀는 자유로운가? 금박 입힌 틀이
그림을 교살한다.
 
중세의 모티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우리들의 마법의 얼굴놀이 아래에는
불가피하게 두개골이, 표정 없는 얼굴이 기다린다. 한편
태양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을 굴러간다.
체스는 계속된다.
 
이발사 가위같이 자르는 소리가 잡목 숲에서 들린다.
태양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을 굴러간다.
체스게임이 무승부로 멈춘다.
무지개의 침묵 속에.
 
황금 장수말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도마뱀 저 말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다만 크기가 다를 뿐.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이런 날이다.
 
오늘 아침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버렸다.
마치 남쪽 어딘가에 있는 어두운 혓간의 문을 우리가 열었을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이 구석으로 돌진하고 벽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사라지듯이, 이때 우리는 바퀴벌레들을 보았고 또한 보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마귀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귀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리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서.
 
7월 5일이다. 루핀*들이 바다가 보고 싶은 듯 위로 뻗고 있다.
우리는 아무 문자도 따르지 않는 침묵 지키기의 교회, 경건의 교회 속에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들의 저 용서없는 얼굴들과
돌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돈을 비축해놓은, 축자적(逐字的)으로 문자에 충실한 TV 설교가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힘이 없었고 경호원의 부축이 필요했다.
경호원은 재갈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
부모가 떠날 때 병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비명.
 
신성(神性)이 인간을 스쳐가며 불꽃을 밝혀놓고,
그러고서는 물러난다.
왜?
불꽃이 그림자들을 끌어당기고, 그림자들이 바스락거리며 날아 들어 불꽃에 합류하고,
불꽃이 치솟으며 검어지고, 검은 질식의 연기가 뻗어나간다.
마침내 검은 연기뿐, 마침내 경건한 사형집행관뿐.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장터와 군중들 위로 몸을 기울리고,
장터와 군중들은 사형집행관이 자신을 볼 수 있는
흐린 거울이 된다.
 
최대의 광신자는 최대의 불신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광신자는, 하나는 백 퍼센트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둘 간의 계약이다.
'백 퍼센트'라는 표현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정면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들
멍한 마음이 결코 될 수 없는 자들
문을 잘못 열어 '정체 물명자'를 얼핏 보게 되는 일이 결코 없는 자들.
이들을 지나가라!
 
7월 5일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말 없는 도마뱀은 관료주의가 없는 듯하다.
황금 장수말벌은 우상숭배가 없는 듯하다.
루핀들은 '백 퍼센트'가 없는 듯하다.
 
페르세포네처럼 우리가 우리가 포로인 동시에 통치자인 그런 심연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자주 그곳 뻣뻣한 풀 속에 누워
땅이 내 위에 아치를,
둥근 천장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것이 내 삶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응시가 나를 떠났다.
나의 눈 멂이 사라졌다.
검은 박쥐가 내 얼굴을 떠나 여름의 밝은 공간을 가위질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루핀(lupin); 콩과 루피너스 속의 식물
 
사월과 침묵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봄이 버림받아 누워 있다.
검보랏빛 도랑이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내 옆에서 기어간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몇 송이 노란 꽃.
 
나는 검은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처럼
내 그림자 속에 담겨 운반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밤에 쓰는 책 한 페이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느 오월 밤, 서늘한 달빛 속
잿빛 풀과 꽃들이
초록 향기 풍기는 기슭에서
배를 내렸다.
 
색맹의 밤,
나는 비탈을 미끄러져 올랐고
하얀 돌들은
달에게 신호를 보냈다.
 
몇 분의 길이와
58년의 폭을 가진
시간의 한 부분.
 
내 뒤로은 납빛 반짝이는 물결 너머
다른 기슭이 있었고,
통치하는 자들이 있었다.
 
얼굴 대신
미래를 가진 자들.
 
1990년 칠월에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장례식이 있었고,
죽은 자가
내 생각들을
나보다 잘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르간이 침묵을 지키고 새들이 노래했다.
무덤이 바깥 햇빛 속에 놓였다.
친구의 음성은
순간들의 먼 저편에 속했다.
 
집으로 차를 몰고 올 때
여름날의 반짝임이,
비와 정적이 뚫어보고 있었다.
달이 뚫어보고 있었다.
 
뻐꾸기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뻐꾸기 한 마리가 집의 정북쪽 자작나무 속에서 뻐꾹뻐꾹 소리내고
있었다. 소리가 너무 힘차서, 처음엔 오페라 가수가 뻐꾸기를 성대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놀라움 속에 새를 보았다. 소릴를 낼 때
마다 우물의 펌프 손잡이처럼 꼬리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두 발로
깡총 뛰더니만, 몸을 돌려 나침반의 모든 눈금을 향해 소리 질렸다.
다음엔 땅을 박차고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집 위로 날아 올라, 멀리
서쪽으로 사라졌다---. 여름이 늙어가고 모든것이 단일한 우수의 한숨
으로 내려앉는다. 뻐꾸기는 열대로 돌아가리라. 스웨덴 시절은 끝난
거야. 뻐꾸기의 스웨덴 시절은 길지 않았어! 사실 뻐꾸기는 자이르의
시민이지---. 나는 이전만큼 여행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즈
음은 여행이 나를 방문하지. 내가 점점 더 먼 구석으로 몰리고, 나이테
가 커지고, 독서 안경이 필요한 요즈음 우리가 운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지. 놀랄 일은 아무것도 없어. 수지와 쿠
바가 아프리카를 온통 통과해 리빙스턴의 미라 시신을 충직하게 운반하
였듯,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운반해 가는 거야.
 
슬픈 곤돌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두 늙은이, 장인과 사위 간인 리스트와 바그너가 대운하에 머물고 있다.
 미다스 왕처럼 손대는 것은 무엇이나 바그너로 변형시켜버리는
 남자와 결혼한 저 신경과민의 여자와 더불어.
 바다의 초록 냉기가 궁전 바닥을 뚫고 밀고 올라온다.
 바그너는 표가 난다, 그 유명한 펀치넬로** 옆모습이 이제 기울고,
 얼굴은 백기(白旗)이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그들의 삶을 싣고 간다,  두 장의 왕복표와 한 장의 편도표.
 
 2
 궁전 창 하나가 덜컹 열리고, 갑작스런 외풍에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바깥 물위에는 쓰레기 곤돌라가 보이고, 두 명의 외팔 도적이 노를 젓고 있다.
 리스트가 몇 개의 악보를 적었다. 너무 무거워서
 파두아에 있는 광물학 연구소로 보내 분석해봐야 할 지경이다.
 운석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물기엔 너무 무거워, 악보들은 가라앉고 가라앉아
 앞으로 다가올 해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나치스당 시절에까지 이른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미래의 웅크리고 앉은 돌들을 싣고 간다.
 
 3
 1990년을 들여다보는 구멍.
 
 3월 25일. 리투아니아에 대한 걱정.
 큰 병원 하나를 방문한 꿈을 꾸었다.
 직원이 없었다. 모두가 혼자였다.
 
 같은 꿈속에서
 한 여자 신생아가 완전한 문장으로 말을 했다.
 
 4
 자기 시대 사람인 사위에 비한다면, 리스트는 케케묵은 귀족이다.
 그것은 하나의 위장.
 이런저런 가면을 써보고 던져버리는 바다가 바로 이 가면을 그에게 골라주었다.
 자기 얼굴을 보여줌 없이 인간사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바다가
 
 5
 리스트 노부(老父)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옷가방 챙겨 들고 다니는 일에 익숙해서,
 그가 죽음에 도착하는 날 역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잘 숙성된 술 한 모금의 미풍이 업무 중의 그를 밀고 나가게 한다.
 그는 일거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없다.
 연간 이천 통의 편지들!
 학교에서 잘못 쓴 단어를 백 번 써야 집에 갈 수 있는 아이처럼.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6
 다시 1990년.
 
 차를 몰고 그냥 백 마일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닭만한
 참새들이 귀 먹을 정도로 크게 울어냈다.
 
 식탁 위에다 피아노 건(鍵)들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그것으로 소리없이 피아노를 쳤다.
 이웃들이 들으러 왔다.
 
 7
 '파르지팔'*** 전곡(全曲) 연주가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반이 마침내 한 마디 할 기회를 허락받는다.
 한숨 지으며--- 아주 슬프게---
 오늘 밤 연주할 때 리스트는 바다 패달을 밟아서,
 바다의 초록 힘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건물의 석재 하나나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좋은 저녁 되시길, 아름다운 바다여!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8
 학교 가려는 꿈을 꾸었는데. 도착해보니 지각이었다.
 교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선생님인지 알 수 없었다.
 
 
*슬픈 곤돌라: 1882년 말부터 1883년 초까지 리스트는 당시 베네치아 대운하의
  벤드라민궁(Palazzo Bandramin)에 머물고 있던 딸과 사위 바그너를 방문하였다.
  바그너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슬픈 곤돌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리스트의 두개의피아노 곡이
  이 방문기간 동안에 작곡되었다.
 **펀치넬로(Punchinello): 이탈리아 인형극에 나오는 땅딸막하고 괴상하게 생긴 사내
 ***파르지팔(Psrsifal): 중세 유럽의 아서(Arthur)왕의 전설에서 성배를 찾아나선 기사 여기서는
   1877년에서 1882년 사이에 작곡된 바그너의 악극.
 
세 개의 연(聯)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시간 밖에서
나는 관 뚜껑 위,
돌이 되어 행복한
기사와 귀부인.
 
 
2
티베리우스*의 옆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예수가 들어 보였다.
사랑 없는 옆얼굴,
순환하는 권력.
 
 
3
물 듣는 검(劍)이
모든 기억들을 지운다.
땅 위에는 나팔과
검대(劍帶)들이 녹슬고 있다.
 
 
*티베리우스(Tiberius. B.C. 42~ A.D. 37) :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의붓아들로 로마 제 2대황제.
 
어린이 됨을 좋아하라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린이 됨을 좋아하라. 순간 갑작스런 모욕이
자루처럼 그대 머리 위로 쏟아진다.
망사 사이로 그대는 태양을 슬쩍 보고
벚나무들이 흥얼대는 소리를 듣는다.
 
어쩔 수 없는 일, 거대한 모욕이
그대 머리를 그대 몸통을 그대 무릎을 덮고,
간혹 움직일 수 있으나
그대는 봄을 기대할 수 없다.
 
희미한 양털 모자를 얼굴 위에 뒤집어쓰라.
바늘 뜸 사이로 세상을 보라.
해협에는 물 반지들이 소리없이 몰려들고,
초록 잎새들이 땅을 어둡게 한다.
 
두 도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물의 양쪽에 하나씩 도시가 서 있다.
하나는 완전 암흑, 적이 점령했다.
다른 도시에는 램프들이 불타고 있다.
불 켜진 기슭이 어두운 기슭에게 최면을 건다.
 
번쩍이는 어두운 물 위를
나는 황홀경 속에 유영한다.
둔중한 튜바 소리가 파고든다.
친구의 음성이다. 그대 무덤을 들고 걸으라.
 
하이쿠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송전선이 뻗어 있다
서리의 왕국,
모든 음악의 북쪽에
 
    *
 
해가 낮게 걸려 있다
그림자가 거인이다
머잖아 모두 그림자
 
    *
 
자줏빛 난초꽃들,
유조선이 미끄러져 지난다
달이 꽉 찼다
 
     *
 
잎새들이 속삭인다
멧돼지 하나 오르간을 연주한다
종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
 
신의 현존.
새소리의 터널 속
자물쇠 채워진 봉인이 열린다
 
      *
 
상수리나무와 달.
빛. 침묵의 성좌들.
그리고 차가운 바다
 
1860년의 섬 생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어느 날 그녀가 방파제에 내려가 빨래를 하였다네
깊은 바다 한기가 팔 속으로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네
 
얼어붙은 눈물은 안경이 되고
섬의 풀들이 섬을 위로 들어올렸다네
저 아래 발트 해 깊은 바다 위에는 청어잡이 깃발이 떠 있었다네
 
2
천연두 벌떼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얼굴 위에 주렁주렁 자리 잡았다네
그는 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본다네
 
침묵의 물결 위로 노젓는 일 가혹도 하지
이 순간의 얼룩이 영원으로 흘러가고
이 순간의 상처가 영원히 피 흘린다네
 
한겨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푸른 광맥이
내 옷에서 뿜어져 나간다.
한겨울.
쨍그랑거리는 얼음 템버린.
눈을 감는다.
소리없는 세계가 있고
갈라진 틈이 있고,
죽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경계 넘어 밀수입된다.
 
십일월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루할 때 교수형 집행관은 위험해진다.
불타는 하늘 위로 굴러간다.
 
두드리는 소리가 감방에서 감방으로 들리고
땅의 서리로부터 공간이 위로 흐른다.
 
몇 개의 돌들이 보름달처럼 빛난다.
 
 
독수리 바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동물원 유리 뒤로
파충류들,
움직임이 없다.
 
한 여자가 정적 속에
빨래를 넌다.
죽음이 조용해진다.
땅의 깊은 곳에서
내 영혼이 미끄러진다
혜성처럼 소리없이
 
 
서명(署名)/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두운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홀이 하나.
하얀 서류가 빛난다.
여러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모두 서명을 원한다.
 
빛이 나를 덮쳐
사간을 접어 올릴 때까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선집 

<기억이 나를 본다> 이경수 번역 전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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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를 본다

 

 

                    토머스 트란스트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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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850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시란 "어린이"라고 해요... 2017-11-13 0 3202
849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시쓰기에 최고가 될수 있어요... 2017-11-13 0 2938
84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요 동시를 자꾸 써봐야해요... 2017-11-13 0 2568
847 [작문써클선생님께] - 동요 동시에 "꼬까옷" 입히기... 2017-11-13 0 2977
846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이야기 시"란?... 2017-11-13 0 3080
845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유아들에게 읽어줘야 할 동시류형... 2017-11-13 0 3305
844 동시야, 동시야, 어디에 숨었니... 머리꼬리 보인다야... 2017-11-13 0 2946
843 [노벨문학상과 시인]-"20세기후반 영어권에서 추앙"되는 시인 2017-11-13 0 2902
842 [노벨문학상과 시인] - "설교하지 않는" "언어봉사" 교수 시인... 2017-11-13 0 2930
841 [노벨문학상과 시인] -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을 넘나든 시인 2017-11-13 0 3263
840 윤동주눈 "나"를 고백한 시, "너머"를 상상한 시를 쓰다... 2017-11-13 0 2371
839 시작할때 형이상학적 이미지들 언어로 시적성채를 빚어야... 2017-11-13 0 2966
838 우리가 전혀 몰랐던 지구 반대편 아메리카의 시단 알아보기... 2017-11-13 0 2044
837 [노벨문학상과 시인] - 라틴아메리카 대표적인 "외교관"시인... 2017-11-13 0 3350
836 시야, 시야, 넌 도대체 무엇이니?!... 2017-11-13 0 2272
835 시는 "경계의 눈"을 가진 비평가를 만나는것이 즐거운 일이다... 2017-11-13 0 2080
834 시작은 하찮은것에서 소중한것을 길어내야... 2017-11-13 0 2232
833 [노벨문학상과 시인] -"서정적 비가"시인, "학교중퇴생" 시인... 2017-11-13 0 2198
832 [노벨문학상과 시인] - 초현실주의적 "외교관" 시인... 2017-11-13 0 2118
831 [노벨문학상과 시인] - "인민시인"으로 추대되였던 시인... 2017-11-13 0 1919
830 시의 령혼이 빛나고 있는 곳은 실재계, 상징계, 영상계에 있다 2017-11-10 0 2091
829 [노벨문학상과 시인] - 력사를 "시적인 론문"으로 쓴 시인... 2017-11-06 0 4377
828 [노벨문학상과 시인]젊은이들속 "음유시인"으로 알려진 시인... 2017-11-06 0 3691
827 [노벨문학상과 시인] - "자유시의 대가"인 시인... 2017-11-05 0 3376
826 [노벨문학상과 시인] - 음악가로부터 문학의 길을 택한 시인 2017-11-05 0 3807
825 [노벨문학상과 시인]소설가인 년상(年上) 녀인과 재혼한 시인 2017-11-05 0 4121
824 문인들 컴퓨터의 노예가 되다... 2017-11-03 0 3395
823 "가짜 詩"와 "진짜 詩"... 2017-11-03 0 4833
822 [노벨문학상과 시인]"유대인 민족의 비극을 대변한" 녀류시인 2017-11-03 0 3352
821 [노벨문학상과 시인] - "촉망되는, 촉망받은" 외교관 시인 2017-11-02 0 3335
820 [노벨문학상과 시인] - 고향을 "서사적인 힘"으로 노래한 시인 2017-11-02 0 3290
819 [그것이 알고싶다] - 일본 녀고생들은 윤동주를 어떻게 볼가?... 2017-11-02 0 2173
818 "배추잎같은 엄마의 발소리 타박타박"... 2017-11-01 0 2640
817 [노벨문학상과 시인] - 중국 상하이, 베이징 주재 외교관 시인 2017-10-31 0 3564
816 [노벨문학상과 시인] - "모더니즘 시인들 운동"의 지도자 시인 2017-10-31 0 3677
815 [노벨문학상과 시인] "벌거벗은 시"로 리행과 리정표가 된 시인 2017-10-31 0 3263
814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메달 출시되다... 2017-10-31 0 2017
813 시성 타고르의 시와 그리고 오해, 진실... 2017-10-30 0 3868
812 천년의 그리움이 만년의 강 따라 흐르고... 2017-10-30 0 3042
811 [노벨문학상과 시인] - 아세아인 최초로 노벨상을 탄 시인 2017-10-30 0 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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