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시조(諷詩調)의 지향점
靑岩 鄭日相
요즘 풍시조가 유행하고 있다. 시(詩)에는 여러 형식이 있지만 여기 풍시조(諷詩調)가 지향하는 점과 그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풍시조는 시로써 감행하는 시(詩)의 복수다.
풍시조는 시대적 부조리, 사회적 부정이나 부패 그리고 악행에 감행하는 복수로서의 통징(痛懲)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이 풍시조(諷詩調)의 지향점은 관념유희, 정서유희를 극복, 시적 징벌로서의 통징(痛懲)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이 시대의 답답한 정신적 체증을 해소해주는 복수의 시(詩)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단(詩壇)에 풍시조(諷詩調)를 보급한 원로시인 박진환(문학평론가)씨에 따르면 “풍시조는 풍자쪼나 투로 쓴 시를 일컫는 새로운 명명이다. 그 때문에 풍시조의 바탕은 풍자시와 무관하지 않는 동질적 맥락 내지는 혈통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 지적했듯이 우리 고유 해학(諧謔)의 문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고 많은 옛 시인들이 사회의 비판시를 쓴 맥락과 또한 그 궤(軌)를 같이 한다 하겠다. 그는 이어서 “인간생활, 특히 주어진 시대나 살아가는 현실 및 사회에서 자행되고 경험하게 되는 악행이나 우행, 악덕이나 비리, 부조리에 대해 비꼬고, 조소하며 깎아내리고 부정하며 고발·비판하는 통징의 감행이 풍시조의 시적 역할이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에 통징을 감행하는 시의 복수 이면에는 악을 교정하여 선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개선의 의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시대의 사회상을 봤을 때 이를 바로 교정해 주어야 하고, 따라서 이 교정을 통해서 이 사회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야 하므로 그 염원은 시인이 시를 쓰거나 평론가가 시평(時評)을 쓰거나 할 때 이 고발하고 비판하는 통징의 역할을 외면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바로 이 풍시조(諷詩調)의 정신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시조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가령 요즘의 사회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어지고 있는 정치적 부조리나, 공직자 비리, 의문부호가 따르는 종교적인 미개안과 회의, 민족과 국체를 잃어버린 이념갈등의 유발, 세계문명과 사조로부터의 일탈과 길 잃은 방향으로의 이끌음, 인간의 악행을 일삼아 통분을 일으키는 사안 등과 도덕적 정신적으로는 비리, 부조리의 온상으로서의 현실이며 그 악폐· 우행· 악행으로서의 현실일수도 있고, 문명적으로는 자연의 파괴와 생명의 위기의 초래, 패권주의와 약소국가간의 갈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가·사회·인종·경제·정치·종교·기업·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무수한 부정적 축면들 모두가 이 풍시조(諷詩調)의 대상으로 삼고 제시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풍시조(諷詩調)의 생명은 시(詩)의 복수라고 할 수 있는 통징에 있다. 악과 비리와 부조리에 감행하는 시의 복수로서의 통징은 풍시조의 생명이자 존재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통징(痛懲)의 감행 없이 풍시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 어느 시인의 풍시조 한 두수를 소개 하여 보면,
(1) 해용백천(海容百川)이라, 바다는 더러운 물, 깨끗한 물 다 수용
세상은 악인(惡人), 선인(善人) 함께 공존, 이게 다 하늘의 질서
여기 오직 분별(分別)과 선택의 삶, 자기 몫이니
(2) 관홍뇌락(寬弘磊落)마음 너그럽고 크며 사소한일 신경 안 쓴단 뜻
2011년 키워드, 관용(寬容), 화해(和解), 정의(正義), 책임, 정직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 나 먼저 준법정신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여기서 생각해 보면 (1)에서 본봐와 같이 그 시어(詩語)에서, 비록 더러움과 악과 몸 섞어 살면서도 ‘분별과 선택의 삶’은 자기 몫이라 하였듯이 이는 더러움과 악에 물들지 않고 몸 섞지 않음을 의미하고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2)의 풍시조에서 지적했듯이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법(法)을 지키고 솔선수범하는 곳에 어찌 불법과 비리와 탈선이 존재 할 수 있겠는가라고 전제하면서 곧 스스로의 허물을 볼 줄 모르고서야 어찌 남을 탓하겠느냐는 뜻도 담겨있으니 ‘자기의 눈썹은 보지 못한다(目能見而步之外而不能他見其睫)’는 한비자(韓非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또한 자정(自淨)과 정화(淨化)에 값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와 같이 풍시조(諷詩調)를 통해 통징(痛懲)하는 미학(美學)은 시조의 글속에 잠겨져 있는 통징(痛懲)은 곧 일종의 순수한 통징으로서 형이상시의 시법과 궤를 같이 하며, 여기서 ‘순수한 통징’이란 육체적 제약이나 물리적, 법적 제재에 의한 징벌이 아니라 문화적 징벌 곧 시적 엄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시적(詩的) 감동이나 감화에 의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하여 정신적 감화, 곧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하여 잘못을 개선하게 하는 문화적 수단의 징벌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지난날의 풍자시가 떠오른다. 곧 박노해의 오적(五賊) 시이다. 그는 이 오적시 하나로 시인이 되었고 일약 민주 투사가 되었다. 시인들 중에는 스스로 시인이기 보다는 투사로 불리기를 더 갈망하는 김남주나, 그리고 노동 시인 박노해. 백무산. 등도 투사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남주를 위한 시와 사회상의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이라는 핏빛 책자에 사실상 해설과 평론이 필요 없는 그의 완벽한 시에 평론가 시인들이 하나같이 부연했듯이 찬사의 글줄을 써댄 것을 보면 쓰지 않으면 적으로 몰릴지 몰라서 인지 몰라도 한결같이 적색 일색이다. 반사회적이었다. 이런 시들은 의도적으로 징벌의 대상을 공격하고 헐뜯고, 비아냥대고, 깎아 내리고, 비판과 고발하는 등의 공격성을 뛰지만 이 풍시조에서는 악의 교정이라는 따뜻한 휴머니티가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뛴다 하겠다. 즉 이 풍시조에서의 형이상시의 시법이기도 한 ‘순수한 통징’은 일체의 공격성을 지양하고 정신적 깨달음이나 깨달음을 통한 시정이나, 시정을 통한 스스로의 정화를 체험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 법적이거나 물리적 육체적 통징을 지양(止揚)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와 학문의 영역 내에 시문학(詩文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었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8세기 이래 심지어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서양의 침략과 내부적 혼란이라는 현실아래 위기의식과 구국의지는 이 시기 문학의 기본인 주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해학문학과 더불어 사회상을 풍자하고 비판과 통징의 성격을 뛴 시문학 또한 상당히 발달하였었고 그 정신이 이 시대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하겠다.
이 풍시조(諷詩調)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목탁으로서의 역할과 사회의 올바른 길로의 진행과 정화를 위한 통징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풍시조는 시로써 감행하는 시(詩)의 복수라는 새로운 영역을 차지해가고 있으며, 시대적 부조리나 사회적 부정이나 부패와 해악, 그리고 악행 감행을 향한 교정과 복수로서 비판적 의도를 분명히 한 신랄미와 심각미를 시법으로 한 시(詩)요 덕목을 지니며 통징(痛懲)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이 시의 영역은 사회를 정선(正善)한 덕율(德律)로 바로 세우려는 염원을 따 담아,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이어내려 오고 있는 우리 고유 해학(諧謔)의 문학과 맥을 잇고 있고 많은 옛 시인들이 사회의 비판시를 쓴 맥락과 또한 그 궤(軌)를 같이 하는 정신 또한 닮아있고 그 정신들이 살아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덤으로 참고하기...
풍시조는 박진환 시인이 개척한 시의 한 장르다.
풍자투로 쓴 3행시라는 것 외에 자수율 등의 규칙은 없다.
박 시인은 “풍시조는 시대적 비리나 악행, 부조리에
문화적 징벌인 통징(痛懲·엄하게 벌함)을 내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의 소재는 늘 신문에서 찾은 것. 그래서 풍시조는 일견 신문의 만평과도 닮아 있다.
박 시인은 “3행이라는 제한을 받기 때문에 기발한 착상과 함축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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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시조는 ‘풍자의 어투로 쓴 3행시’를 일컫는다.
시조와 유사한 3행이라는 틀을 갖고 있지만
율격에서 자유로운 ‘자유시’라 할 수 있다.
풍시조가 갖는 풍자와 해학, 야유, 조소(비웃음), 비아냥 등은
타락하고 추악한 현실을 거부하는 청량제라 할 수 있다.
풍시조가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면서도
달달한 위트로 웃음을 선사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통쾌한 일이 아닌가! 언론에서는 ‘풍시조로 세상을 콕콕’이라 제목을 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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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권 연세대 명예교수는 박 시인의 풍시조에 대해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 악과 어리석음 등을 헐뜯고 야유하며 질책하는
동시에 그런 풍자를 통해 그 사회악을 교정하고자 하는 시적인 의료행위”라고 평했다.
또 허영자 시인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풍시조의 기본정신이다”고 평했다.
=====================덤으로 또 참고하기...
‘풍시조(諷詩調)’는 ‘풍자조 또는 풍자투로 쓴 시’로, 형식적으로는 3행의 정형시다.
하지만 시인은 "3행을 기본으로 하는 풍시조는 시조와 형태가 유사하나 외형상 3행이라는 것 외에 연관성이 없다. 시조의 자수율이나 율박 그리고 3장 6구라는 제약에서 자유로운 순수자유시가 바로 풍시조다"고 설명한다
박진환 시인은 최근 언론에 "풍시조가 생명으로 하는 것은 '순수한 통징'이라는 시로 감행하는, 악에 대한 복수에 있다"며 "시대나 현실에서 목도되는 부정·부패는 물론 비리·부조리·악행 등을 외면치 않고 비판·고발하는 양심의 육성이다"고 역설했다.
박씨는 박진환 시인은 지난 2008년 계간 문학지 ‘풍시조(諷詩調)’를 창간했다.
박진환 시인은 당시 계간 ‘풍시조’ 창간사에서 “풍시조는 삼행이란 짧은 형식 속에 많은 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점에서 가장 적은 언어를 투자해 가장 많은 감동을 얻고자 하는 언어경영의 시미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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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찬경 시인은 박진환 시인의 풍시조에 대해 “풍시조의 경우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제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풍자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의 본질, 더 나아가 참여적인 시와 순수 자율적인 시가 어떻게 서로 조화되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예라 할 것”이라고 평했다.
김용직 평론가는 “시를 위해 끝없는 변신, 자기 탈각작용을 시도해온 박진환 시인이 3행시와 풍시조를 통해 보여준 지적활동은 또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작업일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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