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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서 저 섬으로 가고 싶다"...
2017년 12월 14일 23시 19분  조회:2588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 정현종 시 모음

 

 

 

 

 

 

사물(事物)의 꿈 1 -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슬픔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갈데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그림자의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를

따온다

영원히

푸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따온다

마르지 않는

향기 

 


  


마른 나뭇잎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물방울의 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물방울도 처음이다

 

 

 

 

부질없는 시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歌客(가객)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상처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습니다 

 

 

 

 

얼굴에게                                                 

내 얼굴이 억제하고 있는 동안

궁둥이는 모름지기 폭발하고 있다

하하 

나는 내 얼굴이 때때로

궁둥이여서

불안할 때가 있다

 

 

 

 

빨간 담쟁이덩굴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나무에 깃들여                                         

 

나무들은

난 그대로 그냥 집 한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 鄭玄宗, (1939.12.17~  )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였고,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다.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었으며,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시집에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갈증이며 샘물인》(1999)을 비롯하여 시론집 《숨과 꿈》(1982) 등이 있으며,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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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야기  
 
자아와 사물이 이루는 교감, 그 충만한 기쁨
정현종은 사물과의 합일을 꿈꾸는 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시세계에서는 자아와 사물과의 교감이 충만한 기쁨 속에 재현된다. 사물과의 에로스적 합주(合奏)를 통해 빚어내는 축제의 교향곡이 정현종 시의 주조음을 이루는 것이다. "한가함과 한몸/천둥과 한몸/비와 한몸/뻐꾸기 소리와 한몸으로/나도 우주에 넘치이느니."('여름날')에서 보여지듯 세상의 모든 것과 한 몸을 이루려는 시인의 욕망은 결코 대상을 가리는 법이 없다. 또한 억압적인 사물의 질서에 숨통을 열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의 시혼은 "부서진 내 살결과 바람결이 같아지고/살결과 물결이 和答하"(죽음과 살의 和姦)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 그대로 그의 시는 사물과 '화간(和姦)'함으로써 사물의 속살 속으로 시적 상상력의 촉수를 내뻗고 애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육감'을 가진 시인이다. 인간의 오관(五官)을 초월하는 '식스 센스'의 소유자인 셈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교접하여 질퍽하게 몸을 섞는 정현종 특유의 사랑법이 바로 그의 시적 육감의 실체이다. 바로 이 시적 '육감(六感/肉感)'을 통해 그는 삶의 무거움을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사물과 쩌릿한 합일을 이룬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의 '생의 희열'을 예찬한다.

 

일찍이 김현이 '바람의 현상학'이란 글에서 포착한 것처럼, 시인은 시적 자아를 무한 확장 ·팽창시켜 '바람'처럼 세상의 구석구석에 두루 번지기를, 퍼지기를 갈망한다. "퍼지고 퍼져/무한 허공과 솔기 없이 이어"('달맞이꽃')지기를, "생명의 저 맹목성을 적시며/한없이 퍼져나"('무슨 슬픔이')가기를 강렬하게 희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사물, 나와 세계 사이의 모든 경계가 가뭇없이 사라진 곳에는 "바깥은 가이없고/안도 가이없다/안팎이 같이 움직이며/넓어지고 깊어"('몸이 움직인다')지는 신묘한 시공간이 탄생한다.

 

가두리가 없는 번짐의 미학,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는 황홀한 친화력, 이 가공할 언어의 전염성! 그래서 그의 시의 언어들은 정해진 의미의 감옥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나 요동치고 들썩거린다. 다채로운 사물들과 한바탕 신명나게 몸을 비비며 도취의 '카니발'을 만끽한다. 아마도 시인은 삶과 죽음,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이라는 극명한 대립의 칸막이조차 사뿐히 뛰어 넘는 '번짐의 시학'을 온몸으로 체현함으로써 구획과 분별, 질서와 나눔의 근대적 기획이 얼마나 커다란 무명(無明)의 산물인가를 보여주려 했던 모양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대표작 
 
   『고통의 축제』 | 민음사  
   『견딜 수 없네』 | 중앙일보사  
   『한 꽃송이』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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