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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매(袁枚, 1716년~1797년)는 청(淸) 중기의 문인이다.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
저장 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으로, 24세로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 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으나 만주어 성적이 나빠 지방관으로 율수·장닝(江寧) 등의 지현(知縣)을 역임하였고, 37세에 사직하여 장닝현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영위하여 매문(賣文)에 의해서 취미의 세계에 사는 문인생활로 들어갔다.
시는 고인(古人)의 모방을 배제하고 자연의 성정(性情)을 노래하는 성령설을 제창하였고, 또한 부인에게 시작(詩作)을 권장하여 제자의 작품집 <수원여제자시선(隨園女弟子詩選)>을 편집했다. 문은 변문을 특기로 했으며 고문·변문 공히 뛰어나서 기윤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라고 병칭되었다. 미식(美食)과 승경(勝景)을 찾아 각지를 유람하였고, 음식에 관해 쓴 <수원식단(隨園食單)>과 <유황산기(遊黃山記)> 등이 있다. 또한 귀신의 세계에 흥미를 나타내서 괴담집인 <자불어(子不語)>이 있으며 청년시대부터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론으로서는 <수원시화(隨園詩話)>가 있다.
원매는 조용히 은신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펼치고 살았던 이채로움을 가진 인물이었다. 일본의 중국 문학 연구자인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파주(坡州), 한길사, 2002]에서 그에 대해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 평생 이 양극단을 오간 원매는 중국의 수많은 은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크고 일종의 요기를 발산하는 괴물 은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평을 통해서 우리는 원매라는 인간이 가진 이채로움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축으로 원매의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우선 깊이 병든 데카당스는 원매가 호화로운 원림, 곧 수원(隨園)에서 거듭 만찬을 열어 강남 명사들과 교류하고 수많은 첩을 거느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서른 명이 넘는 여제자를 두었던 것과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 또한 즐기며 화려한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나미 리쓰코는 양극단의 또 다른 축으로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거론하지만, 깊이 병든 데카당스에는 어느 때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매의 당시 전통에 대한 부정, 사회적 금기에 대한 거부의 정서는 그런 점에서 그의 과감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데카당스로 간주될 수 있는, 역시 원매를 구성하는 질료들이다. 18세기 중국 사회에서 원매는 어느 쪽으로건 쉽게 계열화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평소 사람들과 교류하길 즐겼던 그는 초대받은 집의 음식이 맛있으면 반드시 요리사를 보내 배워 오게 했다. 40여년간 지속한 그의 음식 사랑이 360가지가 넘는 조리법을 담은 명저를 탄생시켰다. 그의 음식 철학은 투철했다. ‘요리사가 해서는 안 될 14계명’에는 ‘요리 이름만 번듯하게 지어서는 안 된다’ ‘요리를 미리 만들어 두면 안 된다’ 등이 꼼꼼히 적혀 있다. 무릇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이는 생각이 반듯해야 한다. 맛은 그다음이다.
백지에 담긴 사연 곽휘원의 아내
벽사창에 기대서서 봉투를 뜯어보니 碧紗窓下啓緘封(벽사창하계함봉)
조그만 종이 한 장 텅텅 비어 있습디다 尺紙終頭徹尾空(척지종두철미공)
옳거니, 낭군님이 이별 한을 품으시고 應是仙郞懷別恨(응시선랑회별한)
날 그리는 온갖 사연 침묵 속에 담았네요 憶人全在不言中(억인전재불언중)
사오 년 전이다. 참 어여쁜 여학생 하나가 겨울 방학 때 제법 두툼한 편지를 보내왔다. 화들짝 뜯어보다가, 그만 어안이 벙벙해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기나긴 편지에 뜨겁고도 진진한 사랑이 구석구석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마 그녀의 연인도 그날쯤 난데없는 편지를 받고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연인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였을 테니까. 얼마 후에 그 여학생이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연인으로부터 돌려받은 편지를 꺼내면서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나도 잘못 받은 편지를 돌려주며, 그냥 슬며시 웃어주었다. 서로 말 없이 마주 앉아서 아주 오래도록 차를 마시다가 헤어졌다.
이 일화가 생각날 때마다 청(淸)나라의 시인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곽휘원(郭暉遠)이라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그리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다 써서 봉투에 넣을 때, 실수로 그만 사연 많은 편지 대신에 백지를 넣어 보내고 말았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에 화들짝 뜯어보니, 어이없게도 백지 한 장이 전부였다. 이에 아내는 답장 대신에 위의 시를 써서 남편에게 보냈다. 눈 내린 들판 같이 하얀 편지, 바로 그 순도 100%의 무언(無言) 가운데 오롯이 담겨 있는 온갖 사연들을 잘 읽었다는 뜻이 되겠다. 재치가 넘치는 시이기도 하나, 꿈보다 해몽이 더 기가 막히는 견강부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심전심의 교감이 오고가는 부부 사이에, 말이 없다 해서 모를 게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사오년 전 학기말 시험 때다. 시험지를 나눠주자 말자, 조용하던 교실에 한동안 다각다각 말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불과 얼마 후에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우르르 답안지를 내고 나간다. 죄다 나갔는데, 텅 빈 교실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몸부림을 치며 사투를 벌이는 여학생이 있다. 무슨 경천동지할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나 보다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완전 백지를 내고 나간다. 나는 이 눈 내린 들판같이 하얀 종이를 눈에 안 보이는 글씨로 충만한 엄청 사연 많은 백비(白碑: 글씨를 새기지 않은 비석)로 읽는다. 그러나 사연이 아무리 많아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에프를 주노니, 용서하시라 백비를 쓴 이여! 하지만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이종문: 시인, 계명대한문교육과 교수
제화題畫 그림에 부쳐 / 원매袁枚(청淸1716~1797) 촌락만청천村落晩晴天 시골 저녁 쾌청한 날씨에 도화영수선桃花映水鮮 복사꽃 물에 비쳐 곱다. 목동하처거牧童何處去 목동은 어디로 갔는고 우배일구면牛背一鷗眠 소등에 갈매기 한 마리 졸고 있다.
원매袁枚(1716~1797) 청淸 중기의 문인.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
저장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으로, 24세로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으나 만주어 성적이 나빠 지방관으로 율수·장닝江寧 등의 지현知縣을 역임하였고, 37세에 사직하여 장닝현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영위하며 매문賣文에 의해서 취미의 세계에 사는 문인생활로 들어갔다.
시는 고인古人의 모방을 배제하고 자연의 성정性情을 노래하는 성령설을 제창하였고, 또한 부인에게 시작詩作을 권장하여 제자의 작품집 <수원여제자시선隨園女弟子詩選>을 편집했다. 문은 변문을 특기로 했으며 고문·변문 공히 뛰어나서 기윤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라고 병칭되었다. 미식美食과 승경勝景을 찾아 각지를 유람하였고, 음식에 관해 쓴 <수원식단隨園食單>과 <유황산기遊黃山記> 등이 있다. 또한 귀신의 세계에 흥미를 나타내서 괴담집인 <자불어子不語>가 있으며 청년시대부터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론으로서는 <수원시화隨園詩話>가 있다.
원매는 조용히 은신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펼치고 살았던 이채로움을 가진 인물이었다.일본의 중국 문학 연구자인 이나미리쓰코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파주坡州, 한길사, 2002]에서 그에 대해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 평생 이 양극단을 오간 원매는 중국의 수많은 은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크고 일종의 요기를 발산하는 괴물 은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평을 통해서 우리는 원매라는 인간이 가진 이채로움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축으로 원매의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우선 깊이 병든 데카당스는 원매가 호화로운 원림, 곧 수원隨園에서 거듭 만찬을 열어 강남 명사들과 교류하고 수많은 첩을 거느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서른 명이 넘는 여제자를 두었던 것과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 또한 즐기며 화려한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나미리쓰코는 양극단의 또 다른 축으로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거론하지만, 깊이 병든 데카당스에는 어느 때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원매의 당시 전통에 대한 부정, 사회적 금기에 대한 거부의 정서는 그런 점에서 그의 과감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데카당스로 간주될 수 있는, 역시 원매를 구성하는 질료들이다. 18세기 중국 사회에서 원매는 어느 쪽으로건 쉽게 계열화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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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모르는 아이~ |
連宵風雨惡(연소풍우악)
매일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蓬戶不輕開(봉호불경개)
쑥대로 엮은 문조차 마음대로 열지 못하네
山似相思久(산사상사구)
산은 오랫동안 나를 보고 싶었는 지
推窗撲面來(추창박면래)
창문을 밀자 세차게 밀고 들어오네
[출처] 추창(推窓) / 청나라 원매|작성자 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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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宵風雨惡(연소풍우악)
蓬戶不輕開(봉호불경개)
山似相思久(산사상사구)
推窓撲面來(퇴창박면래)
매일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쑥대로 엮은 문조차 마음대로 열지 못했네
산은 오랫동안 나를 생각한 듯
창문을 열자마자 세차게 밀고 들어오네
청 (淸)의 시인 원매(袁枚)의 시 '推窓(퇴창)' 입니다. 에코님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문득 이 시를 생각했지요. 원매는 항저우 출신으로 잠깐 관직에 나가기도 했으나 평생
산 속에 파묻혀 야인 생활을 하면서 시를 짓고 산문을 썼던 사람입니다.
시작을 하는데 있어서도 형식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눈 앞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시 '퇴창'은 산 속의 오두막에서 산을 벗삼아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주보던 산인데 오랜 장마비로 며칠을 문조차 못 열다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더니 산 또한 그를 그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시야 안으로 왈칵 들어온다는 겁니다.참으로 절묘한 표현이지요?
고라니골에서 늘 앞 뒤의 산을 바라보며 살다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의 제게 그리움을 상기시켜 주는 절창이군요. 상사병처럼 산이 그리워집니다.
자연과의 일체감이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한 절묘한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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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花吹落杳難尋 도화취락묘난심
복숭아꽃 떨어져 찾기 어려우니
人爲來遲惜不禁 인위래지석불금
늦게 온 사람들 애석해하네
我道此來遲更好 아도차래지갱호
나는 늦게 오는 게 낫다고 말하네
想花心此見花深 상화심차견화심
꽃 그리는 마음이 꽃보는 마음보다 깊다고
[출처] 한 시 / 청나라 원매|작성자 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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