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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의 바위그림은 선사유적으로 제의와 주술의 공간으로 인식해 왔다. 그 문양들은 선사인의 신앙과 정신세계와 관련지어 전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천전리에서 동남쪽을 향해서 그린 지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사인의 지도라고 보기에는 그 영역이 방대한데, 현재 그려진 부분은 한반도 동남쪽이지만, 한반도 전체를 그려보려는 야심적 기획이 있었을 것이다.
천전리 각석 입체 스캔 이미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인간은 지리를 이해하면서 삶과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지는 인간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재의 ‘이곳’이면서 동시에 외부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흥미롭게 본 책 가운데 하나는 지도책임을 기억한다. 볼거리가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지도만큼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을 불러오는 것도 없었다. 지도책을 펼치는 순간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고, 온갖 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고대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이 광활한 땅의 끝은 어디인지, 저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함께 저 너머 세계를 동경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길을 나섰을 것이고,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그것을 읽고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사고를 시작했을 것이다.
선사인의 지리 감각은 현대인들보다 훨씬 뛰어났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특히 먼 곳까지 조망할 수 있는 평원도 아닌 산악이 많고 복잡한 지형인 한반도의 선사인은 지리에 관한 지식과 감각이 남달랐을 것이다. 자칫하면 길을 잃거나 포식자들과 마주칠 위험 때문에 지도는 일찍 발달했을 수 있다.
고대의 바위그림에 지도로 보이는 암각화가 세계 여러 나라에 적지 않다고 한다. 거의가 주변지형에 한정된 것이지만, 별자리를 표기하고 나름의 세계를 그려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지도처럼 보일지라도 실용성이 없다는 이유로 눈여겨보지 않거나 선사인 유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의적 목적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해버린다. 또한 바위에 그려졌다해서 토테미즘과 연결시켜 신비한 정신세계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선사인은 현대인과 인식체계가 다르겠지만, 지리에서 만큼은 비슷한 사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주기가 동일하고 자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리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행동 능력과 직접 대응하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더 통합적인 사고를 해왔다는 것은 수많은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단정하기 전에 먼저 그림 전체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문양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적 배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적 특징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바위면의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문양이 밀집해 있고 세밀하게 그려진 반면 좌우로 멀어지면서 문양이 희박하고 표현이 세밀하지 못하다.
둘째, 문양의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배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약속된 기호로 보기는 어렵다.
셋째, 문양이 매우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고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어 의미를 내포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넷째, 하단 절반이 비어 있고 배치가 불규칙한 것으로 보아 미완성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그림의 분포와 공간 배치로 볼 때 전체적 기획에 따라 부분을 그려갔을 것이다.
여섯째, 가운데를 먼저 그리고 좌우로 넓혀갔을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언어적 기호라고 보기에는 그 규칙성이 없다.
이러한 형태를 두고 주술이나 태양신앙 또는 우주의 표상물이라고 하기에는 상징적 내포가 매우 빈약하다. 오히려 형태의 다양한 변형의 나열로 보아 일정치 않은 대상물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운데 그림의 부분을 떼어서 보자. 어느 부분을 떼어서 보든 문양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독립적이다. 선으로 연결된 집합과 집합 사이에 연관성을 발견할 수도 없다. 이 그림은 불규칙하고 흩어진 사물을 그린 그림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이 그림을 지도라고 의식하고 바라보면 그 형상이 꽤 익숙하게 다가온다.
문양의 형태는 마름모꼴과 선과 파형무늬가 대부분인데, 산과 물을 표현한다. 산의 경우 삼각형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삼각형은 산의 한쪽면만 표현된다. 반대쪽 면을 표현하려면 역삼각형을 마주보고 그려 넣으면 훨씬 입체적이다. 나름의 입체적 표기법을 고안해 내었다.
천전리 각석 중앙 부분 그림(왼쪽)을 90도 회전시킨 그림(오른쪽)
현재 울산 지형도와 천전리 각석 중앙 부분을 90도로 세운 그림 비교
떼어낸 그림을 90도로 세워서 보자. 오른쪽을 동쪽으로 보게 되면 익숙한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맨 아래쪽 끝은 방어진 부근이다. 산줄기를 따라 염포산(203.4m), 무룡산(450.6m), 동대산(446.7m), 그리고 불국사가 있는 조항산(596.2m)의 연결이다. 지형이 곶(串)이기에 돌출되게 표현되었다.
위쪽 여러 겹 동심원이 바위면 전체 그림의 중심이면서 현 위치를 의미한다. 그 옆의 인물상은 동심원의 구체적 표현일 것이다. 그 옆으로 연화산(532.5m), 묵장산(781.2m), 치술령(765.4m) 등이 마름모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산자락을 타고 대곡천이 태화강을 형성하면서 합수 지점(늠내)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래쪽에 세 개의 마름모꼴이 있다. 위치로 추정해보면, 문수산(600.1m), 영취산(352.1m), 그리고 남산과 그 주변이다. 그 아래 물결무늬는 외항강의 위치와 형태가 일치한다.
주목할 점은 태화강의 표현이다. 망성리와 선바위 사이쯤에서 직선으로 곶이 바다로 트여있는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이것은 태화강 흐름의 방향과 일치한다. 청동기 이전의 태화강은 지금과 달리 넓은 유역이 형성돼 있었다. 그 유역들이 공백으로 처리된 점도 지형적 특징을 뒷받침한다. 강이 직선으로 표현된 것은 강의 흐름 또는 항로의 표현일 수도 있다. 지금의 하구에서 태화강과 만나는 동천강의 표기가 없는 것 역시 당시에는 바닷물이 깊이 유입된 지역으로 강의 하구는 훨씬 위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지점 역시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강의 표시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마름모꼴이 이 보이는데, 마치 섬처럼 보이는 곳이다. 바로 그 지점에 바위산인 돋질산(89.2m)이 위치해 있다. 지금은 주변이 간척돼 있어 육지로 보이지만 그 시기에는 섬이었을 것이다. 돋질산은 또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그 봉우리로 짐작되는 표기도 있다. 고헌산, 가지산, 신불산, 영취산 등은 모두 천 미터가 넘는 중요한 지형이지만 표기되지 못했는데, 이는 바위면의 중·하단에 위치하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비어있는 것은 작업이 더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전리 각석 중앙 오른쪽 부분을 90도 회전시킨 그림(왼쪽)과 현재 지형(오른쪽) 비교
위 그림은 울산의 남쪽지역에서 부산까지로 추정된다. 이곳의 중요한 지형은 천성산, 간절곶, 대운산 등인데 각각의 지점에 특정한 표기가 있다. 천성산(922m) 표기가 선명하고, 산줄기가 봉화산(117.5m)으로 이어지면서 간절곶의 해안선을 이루는 용골산(208.6m)의 표기도 확인할 수 있다. 대운산(742.6m)은 지점은 일치해 보이지만 표기 형태가 다른 산과 다른데, 산을 나타내면서 다른 점을 강조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성산과 대운산 사이에 깔때기 모양의 특이한 문양이 보이는데, 지도와 비교해 보면 우시산국 유물이 대거 출토된 중대, 하대 지역과 겹친다. 이곳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검단리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회야강인데,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으나 복잡한 선들을 이어보면 그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회야강 하구의 넓은 지역을 나타내는 특이한 표기가 있다. 두 개의 동심원 가운데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선으로 표시되는 강과는 사뭇 다르지만, 회야강 중·하류는 표고가 매우 낮은 지역으로 최근에도 자주 범람해 해마다 제방공사를 다시 해야 하는 지역이다. 당시에는 광대한 늪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심원 바깥으로 물줄기처럼 표기된 두 개의 선이 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강의 하구로 추정이 가능하다. 간절곶과 회야강 옆을 공백으로 둔 것은 바다이기 때문인데, 현재 지형과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이 지도는 고대 우시산국 영역을 가장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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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 중앙 오른쪽 부분
지형은 이어지면서 동해에서 남해로 방향이 바뀌지만 바위 면을 따라 그대로 이어서 그렸다. 낙동강을 표현한 듯한 그림도 있는데, 어느 곳에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다. 낙동강은 지금도 을숙도 등 삼각주가 발달돼 있다. 제방과 간척을 하기 이전은 사하와 김해까지 삼각주였다. 이 방대한 삼각주를 소용돌이처럼 표현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물줄기가 유입되는 방향의 표시인데, 오른쪽으로 휘어 있어 낙동강의 지형과 방향이 일치한다. 삼각주의 왼쪽에 섬처럼 그려진 것은 영도처럼 보인다. 위쪽 공백에 독립적으로 그려진 문양은 섬처럼 보이는데, 형태가 거제도를 연상시킨다. 오른쪽으로 우포늪이 있는 지점과 지리산 지점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전리 각석 중앙 왼쪽 부분
여러 겹 동심원의 왼쪽 지점도 중요하게 표기한 듯하다. 전문가들이 특별히 취급하는 우주뱀이라고 부르는 머리 달린 뱀의 형상이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을 지도에 겹쳐보면 영일만으로 흐르는 형산강과 겹친다. 흐름의 방향이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지만, 백운산에서 발원한 활천이 경주 방향으로 흘러 포항으로 향하는 그 형상 그대로다. 그러나 뱀의 머리 부분은 포항제철이 있는 하구가 아니라, 그보다 내륙인 강동면 지역으로 보인다. 이곳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바다로 물이 빠지지 못하면서 자주 범람하던 곳이다. 과거에 삼각주였을 이 점을 거쳐 다시 한 줄기 물길을 표기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안강에서 유입되는 지류도 그 형태가 닮았다.
더 왼쪽으로 팔공산(1192.3m)과 보현산(1126.5m) 그리고 주왕산으로 추정되는 표기도 보인다. 경주 지점도 작게 표시되었지만 의미 있는 표현들이 있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추정할 수 있는 보조적 기호들이 부족해서 추정조차 어렵게 한다.
동심원 배후에 포도알처럼 둥글게 양각된 그림. 이 지역들은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된 지점으로 당시 촌락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전체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운데 여러 겹 동심원이 있는 배후에 포도알처럼 둥글게 양각된 형태가 포도송이처럼 모여 있는 그림이다. 이것들은 천전리와 구량리, 언양과 삼남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 특히 많이 분포돼 있다. 이 지역들은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했던 지점으로 당시의 촌락이 형성돼 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하게 양각으로 표기한 점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전 공간에 조금씩 분포돼 있다.
현대인들도 지도나 약도를 그리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 한다. 기본적인 형태도 그리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로 지도가 아니라 자연지형인 경우는 그리기가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입체공간을 평면에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개념적 판단과 과감한 생략과 도식화, 그리고 상징적 기법을 구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사인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신화 속에 담긴 사고 체계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흔히 선사인을 주술과 토테미즘에 의존하는 비과학적 사고를 하는 미개한 존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주술은 과학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인식체계를 형성해 왔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감각적으로 수용된 지식과 감정을 개념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체계화하려고 고민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주술적 세계로 체계화되는데, 이것은 자연과 공존하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려는 사고 체계로 완성되었다. 레비 스트로스가 “주술은 과학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했듯이 주술은 과학 이전의 미개한 생태가 아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지도가 보인다. 지리는 지금 ‘이곳’인 동시에 ‘외부세계’를 동시에 나타낸다. 선사인이 소홀하게 취급했을 리가 없다. 실용적 목적만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제한된 정보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통합해 왔는지 그 노력이 지도에 담겼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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