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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베를린 장벽"?...
2018년 04월 21일 00시 35분  조회:5637  추천:0  작성자: 죽림

요약 동베를린 및 동독의 기타 지역과 서베를린을 격리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장벽(1961~89).

 

1949~61년 25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의 기술자·전문직업인·지식인들이 서독행을 택함으로써 동독의 경제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결과 동독 인민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8월 12일 밤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벽이 설치되었다.

철조망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기관총 초소와 지뢰지역이 설치된 5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고압선과 방어진지들이 45㎞에 걸쳐 구축되어 베를린 시를 양분하고 서베를린 주위로도 120㎞의 장벽이 축조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오랜 기간 동안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약 5,000명의 동독인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장벽을 가로지르는 데 성공했으나 다른 5,000여 명은 당국에 체포되고 말았으며, 191명의 동독인들이 장벽을 넘다가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1989년 10월 동유럽의 민주화로 동독의 강경보수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11월 9일 서독과의 국경선이 개방되었고 장벽의 굳게 잠겨 있던 문도 활짝 열려 자유로운 상호방문이 가능해졌다.

28년간 독일을 동·서로 분단했던 정치장벽의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덤으로 더...
 

 
시대 1989년

1983년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되고, 폴란드에서 군정이 철수했다.
1989년 폴란드에서 자유노조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소련에서 부분적으로 선거가 시작되었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나뉘었다.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에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 광장을 가득 메운 수십 만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광장의 국기 게양대에 하나의 깃발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통일 독일의 국기인 삼색기였다. 동과 서로 나뉘어 있던 독일이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날 저녁 9시 동독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는 동독 정부의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연합군의 진주와 함께 분단된 지 45년 만의 일이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다. 수도 베를린도 네 토막이 나고 말았다. 194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국 회담에서 ‘통일 독일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통일된 강력한 독일이 또다시 침략해 올 것을 두려워한 이웃나라 프랑스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1949년 5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독일의 서쪽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되었다. 같은 해 10월 소련 치하의 동쪽 지역에는 공산주의 국가 이념을 채택한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닻을 올렸다. 옛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자유 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 진영의 동베를린으로 나뉘었다. 분단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양쪽 사이의 접촉이 철저히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통행도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분단국이었지만 전쟁을 벌였던 남북한의 관계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동·서독 간 생활수준의 격차가 벌어지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무려 300만 명을 넘어섰다. 동독 정부로서는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민의 낙원’을 자처하던 ..주의 사회의 체면도 체면이었지만 산업 발전의 주춧돌이 될 노동력과 고급 기술인력 유출이 더 큰 문제였다. 결국 동독 측은 1961년 8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해 주민들의 왕래를 완전히 막았다. 이어 동·서 베를린 사이의 45.1킬로미터에 이르는 경계선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였다. ‘분단과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의 등장이었다.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

분단 이후 서독은 아데나워 총리의 리더십과 ‘마셜 플랜’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눈부신 경제 부흥을 일구었다. 서독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전쟁의 상처를 씻어 내고 빠른 시간 내에 선진국의 반열에 합류했다. 반면 동독은 계획경제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사회 변화에 대한 갈망은 갈수록 높아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동유럽 ..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변화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유럽에 있어 1989년은 그야말로 자유와 변혁의 해였다. 페레스트로이카 바람이 한창이던 소련이 먼저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내놓았다. 동독을 비롯한 소련의 위성국가들에 대한 고삐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폴란드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되어 자유노조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동유럽 일당독재 체제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을 개방했고,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했다.

공산주의의 몰락

루마니아 ..주의를 상징하는 깃발 중앙이 뜯겨 있다. 1989년의 민주화 혁명 당시 사용된 것으로 부쿠레슈티 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독에서도 연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호네커 ...서기장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11월 4일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동독 정부는 서독과의 국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소련이 “동독에 비공산 정권이 수립되어도 용인하겠다.”라는 방침을 밝힌 상황이었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망치를 들고 달려 나와 베를린 장벽을 부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지 28년 만이었다.

통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불과 326일 만에 초고속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 3월 동독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서독의 콜 총리가 지원하는 진영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새 정부와 서독은 본격적인 통일 논의에 착수했다. 7월에는 경제 통합이 이루어졌고, 8월에 양국 내무장관이 통일 조약에 서명했으며, 그다음 달 양국 의회가 조약을 승인했다. 그리고 10월 3일 마침내 동독의 다섯 개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분단 45년 만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이변’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동서독이 대립을 청산하고 대화와 교류를 위해 애쓴 지난한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통일이다. 앞서 1969년 서독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힘의 논리로 동독을 흡수하겠다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소련 및 동구권 공산국가들과 새로운 화해 협력 관계를 맺어 긴장을 완화한다는 새로운 노선을 발표했다. ‘동방 정책’ 아래 서독은 1970년 소련과 무력 불사용 협정을 체결했고, 1972년 동독과 ‘동·서독 기본 조약’에 서명해 평화 공존의 길을 열었다. 서로를 국가로서 승인하고, 무력 행위를 하지 않으며, 상호 연락 대표기관을 파견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때까지 서독은 국제 사회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국가임을 주장해 왔으나 이를 포기하고 동독을 동등한 국가로서, 대화의 파트너로서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완화 정책은 동독 간첩의 서독 총리실 위장취업 사건 같은 안보 이슈가 터진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브란트 총리의 후임인 슈미트 총리뿐 아니라 정권 교체로 집권한 보수 정당 출신 콜 총리의 임기 중에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변화의 시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룬 자양분은 이런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지나치게 통일을 서두른 대가는 컸다. 서로 다른 길을 걷던 사회와 경제를 무리하게 통합시킨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구 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에 동독지역의 생활수준을 안정시키고 부족한 교통과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느라 정부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독인들은 가난한 동독인들을 부양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 했다. 터져 나온 불만은 서독인과 동독인의 차별 근거가 되었다. 그럼에도 지역 간의 격차는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낙후된 구 동독 지역의 인구는 통일 전보다 10퍼센트 가량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도 적지 않았다. 반세기 동안의 단절은 동족 간에도 이질감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2등 국민’으로 전락한 구 동독인들의 심리적 박탈감, 서독인들과의 불화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통일 이후 지금까지 독일이 지출한 유무형의 통일 비용은 무려 2조 유로(약 3,000조 원)로 추산된다. 독일의 선구적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의 후유증은 분단 문제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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