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자의 말: 지난해 7월에 쓴 기행을 이번 력사문화기행에 올리는 바이다. 옛 산정늪과 더불어 천년고도 성자산성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천년고도—성자산성을 찾아서
리 함
2004년7월 21일은 연변백두산문인산악회로 말하면 뜻깊은 하루였다. 이날 백두산문인산악회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연길시 동쪽에 위치한 천년고도—성자산성에서 특이한 산악회창립 8돐 및 문집출간기념회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오전 9시가 되자 백두산문인산악회 김학송 등 여러 회원들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 일행 그리고 여러 문인단체들과 주내 보도매체들에서 찾아든 30여명이 어김없이 시안의 뻐스부 로잔(老站)—15선 뻐스시발점에 모이였다. 서로 만남의 기쁨을 주고받는 사이 15선 공공뻐스는 어느덧 15선종점역—성자산 서남쪽산밑에 자리잡은 연길시기름창고 부근에 이르렀다. 이어 등산행이 시작되였다. 북쪽언덕으로 올리뻗은 길을 따라 조금 나아가니 인차 숲속오솔길이 맞아주었다. 흐리터분한 날씨라지만 한여름이라 찌는듯이 무더운데서 등산객일행은 모두가 땀동이를 쏟아야 했다. 산중턱에 이르니 벌써 숨이차서 헐떡이는데 50대의 연변어머니수필회 최기자회장은 젊은이인양 생기로 넘쳐있었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이였다. 60대 후반에 이른 조회장은 감개무량해서 최근년간에 문화발전추진회 일에 좇기다보니 산에 한번 오르지 못하였는데 오늘 산행길에 나서니 마음이 더없이 상쾌하다고 속셈을 터놓아 중심화제를 모았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가 가끔 유머를 터뜨려 등산일행은 웃음속에서 시간가는줄 몰랐다. 두어번 휴식끝에 가파른 서쪽비탈길이 자리를 내고 남북으로 뻗은 숲속 산정오솔길이 펼쳐졌다. 무너져 내린 옛 성벽돌들이 수두룩하여 일행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있었다. 백두산문인산악회 부회장 류광철씨가 지금 우리 모두가 옛날 성벽우를 걷고있다고 하여 들뜬 마음들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정말이세요?!》 연길시 중앙소학교 교도주임 김영옥과 건공소학교 교도주임 허화월씨가 살짝 튕겨주자 산정은 또 한번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산정으로 뻗은 성벽소로길은 이윽토록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내 나무그늘속이였다. 이때 백두산문인산악회 김학송회장이 뒤켠에서 앞으로 튀여나오며 이제 조금 더 나아가면 옛 돌성벽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얼마 나아가지 않아 산정소로길 오른쪽아래가에 돌성벽이 나타났다. 장바 한마장 정도의 돌성벽은 천년세월이 지난 오늘도 옛모습이 여전하였다. 이때에야 등산일행은 실감이나서 옛성벽우로 걸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등산객들은 성벽가에 모여 너도나도 성자산성 지식을 쏟기 시작하였다. 알고보면 성자산성은 옛날 동하국의 남경옛터였다. 력사를 펼치면 오늘의 연변땅을 포함한 동북땅에는 료금시기가 있었다. 료나라는 북방의 소수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정권으로서 219년이나 존속하면서 북송과 대치하여왔다. 료나라말기에 이르러 거란족이 녀진족에 대한 압박이 가심화되자 녀진인들은 그 수령 아골타의 지도하에 반기를 들었다. 드디여 기원 1115년에 녀진족은 아골타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불렀으며 10년이 지난 1125년에는 료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금나라는 선후 120년간 존재하면서 나라안에 6경 19로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부, 주, 현들을 두었다. 그때 연변지구를 포함한 두만강 남북에는 해란로가 설치되여 상경로(上京路)에 예속되였다. 동하국의 력사배경으로 보는 북방소수민족정권인 료와 금의 간단한 소개이다. 금나라 말기에 몽고가 흥기하면서 금나라는 쇠잔의 일로를 걸었다. 이럴 때 금나라 통치계급내부에서 분화가 일면서 금나라 료동선무사(宣抚使)—포선만노(蒲鲜万奴)가 기원 1215년에 동경으로 불리운 오늘의 료양에서 천왕으로 자처하면서 대진(大眞)국을 세웠다. 후에 포선만노는 녀진인들의 지구로 자리를 옮기면서 국호를 동하(東夏)라고 불렀다. 동하국시기에 연변지구는 동하국에 망라되였는데 동하국 왕 포선만노는 한때 연길시 동쪽 20리가의 성자산성을 행도남경(行都南京)으로 삼았다. 오늘 성자산성 산정을 주름잡아 걷노라면 옛 돌성벽이 산정을 면면히 이어갔다는것을 볼수 있다. 해당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성자산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그후의 발해시기, 료금시기, 동하국시기에 계속 수건하면서 사용되였다고 한다. 전반 성자산산성을 살펴보면 말그대로 말발굽형으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중간이 움푹 패워들어갔음을 어렵사리 보아낼수 있다. 서북에 위치한 산성의 주봉은 해발고가 390메터이고 동쪽과 북쪽에 골짜기가 있어 실개천이 각기 골짜기를 따라 흐른다. 이 두갈래 실개천은 또 중간이 패운 산성의 복판지대를 3개의 평지로 갈라놓았는데 산성의 동남쪽가에서 해란강물을 받아들인 부르하통하가 산성의 남쪽, 동쪽, 북쪽 삼면기슭을 에돌아 흐른다. 등산일행중 누군가 옛날성벽의 높이는 6메터가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 알고보면 돌성벽의 높이는 1메터내지 3메터였다고 한다. 성벽기초의 너비는 5—7메터로서 성벽 전체 둘레의 길이는 4454메터로 나타난다. 산성의 동쪽과 북쪽, 서쪽 그리고 동남쪽에 각기 성문유적이 있는데 유심히 답사하면 옛날 성문흔적을 보아낼수 있어 콜롬보가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성자산성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이 자리매김했다. 필자가 해당자료에 따라 1223년에 흥기한 몽고군이 서쪽기슭을 따라 물밀듯이 밀려드는데서 동하국이 더 이상 견디여 내지 못하고 선후 19년간 존재하다가 력사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피력하자 일행중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고작 19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는가하는 눈치가 력연했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1223년 몽고군이 대거 진공할 때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가 성자산산성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보면 동하국의 남경이였던 성자산성은 당년 동하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성벽가를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곤경에 빠진것은 중앙소학교와 건공소학교의 교원과 생활안내신문의 처녀기자였다. 등산임을 모르고 달려오며 뒤굽높은 산다루를 신었으니 그 신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래도 그들은 옆사람의 걱정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용케도 산행을 이어갔다. 수림속내리막길을 내리니 산아래 평지로 향한 홈채기 오솔길이다. 이곳 오솔길은 참나무 등으로 꽉 덮힌 산정과는 달리 어깨를 치는 억새풀이 기분을 한결 돋구어주었다. 연변방속국의 김기자가 억새풀밭을 지나는 기분이 어떠한가고 물음을 터뜨린데서 일행은 재다시 웃음꽃을 피우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산아래 평지의 수림속공간에는 벌써 《백두산문인산악회창립 8돐 및 문집출간기념회》 프랑카드와 산악회회기가 나무사이에 걸리고 좌석이 깔끔하게 정리되여 있었다. 누군가 이 자리가 옛날 동하국 궁녀들이 춤추던 자리라고 웃기여 기분이 한결 맑아졌다. 기념모임은 정오를 앞두고 열을 올리였다. (소식기사는 뉴스글을 참조!) 점심식사 안팎에 여러 회원들과 일부 기자들이 동쪽 아래쪽 묶은밭에 가서 산책하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곡식밭이였던 공지는 풀밭을 이루었는데 기와쪼각들이 흔해빠졌다. 처음 보는 이들은 신기한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성안의 사면비탈과 복판3개평지는 어디라없이 기와쪼각과 도자기그릇 쪼각들이다. 이런 쪼각들은 고구려, 발해, 료금시기의 쪼각편으로 헤아려지는데 중부지대의 궁전터는 료금시기의 유적들이라고 한다. 바로 우리가 선 자리였다. 궁전동남쪽 200메터쯤 되는 평지에 널린 기와쪼각, 도자기쪼각은 흔히 고구려시기것이라고 하니 고구려, 발해, 료금시기의 궁전들이 신기루마냥 시야에 안겨드는것만 같았다. 어느덧 오후 오락판도 막을 내리고 하루길을 달리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떠날 시각이 되였다. 기념모임 참가일행은 아쉬운대로 자리를 떠야 했는데 북쪽 골짜기 성문옛터에 박힌 성자산성 표시패말이 또 등산객들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80년대에 세운것으로 알려지는 세멘트패말은 글씨가 전부 지워져 알아볼수가 없었다. 큰돌에 새겨 넣었드면 얼마나 좋으랴싶었지만 눈앞의 현실은 아쉽기만 했다. 이태전에 볼라니까 동쪽골짜기의 성문옛터에도 세멘트 패말표시가 있었는데 그곳의 글씨는 그런대로 알아볼수가 있어 다행이였다. 또 하나의 불행중 다행은 연길시 모아산삼림공원 전망계획에 강건너 하룡쪽과 더불어 성자산산성도 개발계획에 넣었다고 하는데 그날이 언제일가, 무척 기대된다. 이 개발소식에 림해서인지 산성리라 불리우는 산아래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7대인가 하는 농촌마을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이한 휴식터가 가끔 보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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