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을 앞둔 지난 1월 21일의 도문시 일광산산행이 1920년 6월 4일 봉오동전투의 전주곡으로 되는 삼툰자전투와 그 전투지점—삼툰자마을(간평)을 답사하기 위한것이라면 일광산 계속인 2월 3일의 도문시 고려령산행은 삼툰자전투의 이음인 후안산전투와 그 주변일대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고려령 산행답사에서 우린 산 메돼지 두마리를 만났으니 정녕 잊을수 없는 산행의 하루인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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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은 이 겨울치고도 가장 추운 날이라 해야겠다. 혹독한 날씨는 얼어죽을 놈 나오라고 으시대는것 같은데 연길에서 대련~도문행 렬차로 도문에 이른 연우산악회 일행은 시안에서 북으로 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후안산을 두고 주춤거리였다. 도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공부를 하였다는 옥저님은 이 추운 날 가깝지도 않은 후안산까지 도보로 간다는건 무리라면서 택시를 제의하였다. 일행은 옥저님, 봇나무님, 뿌리님, 김춘님, 송이님, 두만강님 여섯이였다. 여섯은 두대의 택시에 나누어 앉았는데 필자와 옥저님, 뿌리님이 뒤의 택시에 올랐다. 도문사람들이 북강(옥저님의 귀뜸)이라고도 부른다는 가야하와 그 다리를 건널 때 옥저님은 저 동쪽아래 두만강가 바위벼랑을 가리켰다. 《어릴 때 저산에 자주 올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산에 오르면 도문시 전경이 한눈에 안겨 들고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이 그림같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는 옥저님은 깊은 감회에 젖어든다. 고향이 화룡시 복동진 남양이라지만 어린시절 도문시문화관으로 전근한 아버지따라 삶의 터를 옮긴데서 소학교와 중학교 모두를 제2고향—도문에서 거치였다는 옥저님, 그의 시야에 안겨드는 두만강가 바위벼랑은 철부지 소시적의 추억을 아낌없이 떠올리였다. 추억은 로년세계의 산물만이 아닌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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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어느덧 가야하를 가로지른 다리를 지나고 북쪽산밑의 안산촌을 지나 목도고개에 접어들었다. 목도고개는 안산촌을 전안산과 후안산으로 떼여놓는데 연길~훈춘 도로가 허리를 자른 북쪽산밑의 첫 마을이 전안산이고 북으로 목도고개너머가 후안산 지역, 이곳 후안산이 당년 두만강가 삼툰자전투와 이어진, 1920년 6월 6일 밤의 후안산전투가 벌어진 고장이다.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가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필자가 력사의 고장—후안산에 첫 발을 들여놓은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1990년 11월 하순이였다. 그런데 후배동료인 박경재씨와 둘이서 후안산마을의 로인들을 찾으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후안산전투는 사실 전투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목도고개너머 전안산 김룡손로인을 만나보라고 하였다. 일제측자료에 의하면 조선측의 강양동과 중국측의 삼툰자에서 독립군에게 얻어맞은 일제놈들은 독립군을 일망타진하겠다고 미쳐날뛰며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부대를 편성하여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게 하였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여기 목도고개를 넘어섰다가 5호 동네를 발견하게 된다. 마침 길안내자가 수요되고 불빛이 새는 집이 보이지 않는가. 적 척후병이 정주문을 여니 2명의 조선녀인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없다는 품이 수상쩍어보여 방문을 열어제끼니 독립군 여럿이 이리저리 누워있는 장면이다. 찰나 한 독립군 전사가 제꺽 총을 들어 적척후병을 쏘아눕혔으나 뒤이어 몰려드는 적을 두고 독립군들은 뒤문을 차고 뒤산으로 내달을수밖에 없었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자기편1명이 부상당하고 독립군 1명과 지방인 1명이 즉사했으며 6명을 포로했다고 하였다. 지방인 즉사란 최진삼의 안해 김씨를 가리킨다. 그날밤 김씨는 시동생인 최진포(일명 최진국)의 집에서 동서와 함께 10여명 모연대의 새벽밥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던것이다. 전안산의 김룡손로인(1990년 78살, 당지 태생)을 찾으니 그번 전투에서 김씨녀인이 확실히 적탄에 맞아 사망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5호동네는 후안산이 아니라 전안산뒤 목도고개너머의 강건너편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또, 전안산과 후안산일대는 독립군 신민단부대의 주요한 활동지라고 동을 달았다. 지난 80년대 후반, 원 연변력사연구소의 고 강룡권선생이 도문시 서쪽가의 오공촌에서 김씨녀인의 아들 최상준로인을 찾아 확인한데 의하면 김씨의 이름은 김숙정이다. 1920년 6월 6일 밤에 김숙정녀인은 동서와 같이 밥을 짓다가 적들과 맞띄우게 되였다. 총싸움이 벌어진후 신민단의 13명전사들은 뒤문으로 빠지고 동서인 최진포의 안해는 어느결에 김숙정의 집으로 피하고없었다. 홀로 남게 된 김숙정은 무서워 자기도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두집사이에서 적탄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고 한다. 했으나 우리 일행이 탄 택시가 아스팔트로 된 길을 따라 순식간에 그제날 5호동네를 지나친데서 흘러간 이야기를 떠올릴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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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산마을 남쪽 도문시수용소를 앞두고 일행 6명은 택시에서 내리였다. 골안 동쪽가로 치달은 높은 산이 고려령이였다. 마침 고려령으로 오르는 산길이 우리가 내린 지점이여서 안성맞춤이라 할가.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산기슭 숲속에 들어서니 따스한 봄날 같았다. 그속에서 다리쉼을 할 때 필자가 금방 지나친 목도고개와 5호동네를 언급하며 후안산전투를 떠올리는데 누군가 고려령의 유래를 물었다. 그래서 덧붙인것이 고려령에 깃든 토막토막의 이야기다. 고려령을 알자면 고려툰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봉오동은 북봉오동과 남봉오동으로 나뉘여지는데 당년 일본침략자 100여명을 섬멸한 봉오동전투가 벌어진 곳이 북봉오동이고 후안산 여기가 남봉오동으로 통한다. 남봉오동을 일명 고려툰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흥진촌을 가리킨다. 그 시절에 마을사람들은 남봉오동으로 불렀으나 당지 중국인들은 나름대로 말짱 조선인마을이라고 고려툰이라 하였다. 산기슭의 마을이 고려툰이니 마을 동쪽에 위치한 산도 고려령이란다. 이런 부름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이후의 일로 알려진다. 고려령은 해발고가 602메터로서 산의 직선고도만 보아도 상당히 높은 축이다. 그제날엔 연길, 도문 일대서 훈춘으로 가자면 고려령 북쪽기슭을 넘어야 했는데 여기 산이 높은 령이라 하여 사람들은 고령(高岭)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한자발음으로 당지 조선인들에게는 《까울령》으로 들리였다. 그래서 조선사람들은 까울령으로 부르다가 점차 고려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였다. 서쪽비탈의 한 산중턱에 이르니 벌써부터 후안산골안의 전경이 발목을 잡는다. 후안산골안은 말이 골안이지 목도고개 어구를 지나서는 꽤나 넓은 평지가 쭈욱 펼쳐진다. 도문시수용소 구간위로 아담한 시골마을이 펼쳐진다. 보매 30세대쯤은 돼보이는데 틀림없는 그제날 남봉오골—고려툰이였다. 다시 말하면 고려툰이후 흥진으로 통한 시골마을이다. 골안따라 그 북쪽으로는 다시 마을이 보이지 않았으니 고려툰—흥진촌은 후안산의 유일한 마을 같았다. 필자의 토막설명에다 때맞게 신기루같이 발아래 펼쳐진 고려툰은 일행의 흥취를 자아냈다. 김춘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상공님 주선으로 몇해전에 고려령 산행에 나섰댔으나 고려툰은 고사하고 고려령이란 부름은 몰랐다고 한다. 귀가후 부득이한 일로 동행하지 못한 상공님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춘씨의 말은 사실이였다. 그런 김춘님은 송이님을 따라 일행의 선두에서 나아간다. 산중턱 펑퍼짐한 곳에 이르니 수십년의 년륜을 가진 참나무들이 참 많았다. 고목세계라 해도 과언은 아니였다. 필자가 그중 한 참나무를 가리키며 수령이 얼마일가고 물음을 던지니 송이님은 적어도 30~40년은 잘 될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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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다시 정상을 바라고 나아가는데 경사를 이룬 바위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때의 선두는 필자와 봇나무님 그리고 송이님, 뒤따르는 3명이 바위산아래 평지에서 휴식을 취할 때 봇나무님과 필자는 뿌리에서부터 네가닥으로 갈라져 자란 희한한 나무가지에 걸터앉았다. 송이님이 남쪽가를 거닐어보는데 필자의 시선에 갓 지난 발자국이 비껴왔다. 사람발자국이라면 아닌것 같고 짐승발자국이라 하면 또렷또렷 찍히지 않은 질질 끈 발자국이다. 필자는 송이님과 큰 짐승 발자국같다고 여쭈니 그도 전적인 동감이였다. 그래도 긴장하거나 두려운감은 전혀 없었다. 심산이나 깊은 야산이 아닌 산아래 마을 가까운 비탈지대인데다가 일행 또한 여럿이여서 두려울리가 만무했다. 바위가를 톺아오르니 그 웃쪽 구간부터는 정상에로 이어진 남쪽릉선인데 나무 한그루 없는 번대머리산이여서 서쪽에서 불어오는 갈바람이 사정없이 일신을 강타했다. 진짜 살을 에일듯한 칼바람이다. 어쩔수없이 동남쪽비탈로 방향을 잡으니 갈바람, 칼바람은 언제드냐싶게 잦아들고말았다. 그럴 때 정상으로 통한 동남쪽 산비탈에는 또 무리바위가 나타났다. 무리바위세계가 발목을 잡아 너럭바위우에서 또 휴식을 취하는데 갈바람을 피한 양지바른 곳이라 겨울날의 따뜻한 해볕이 서로의 일신을 따스하게 쪼여준다. 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따뜻한 구간이다. 옥저님이 장난기가 발동했다. 《와, 연길 청차관이 보인다!》 일행이 와그르르 웃어주는데 친구인 송이님이 걸맞게 분위기를 잡는다. 《흥, 백두산은 안 보여?!》 그 친구에 그 장난이 어울려 돌아간다. 그런 재밌는 속에서 주위세계를 일별하면서 서남쪽 연길쪽을 바라보니 시야에는 연길시 동북쪽의 마반산이 안겨든다. 파도치듯 대지를 주름잡은 뭇산, 뭇봉우리들을 지나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마반산 서쪽가로는 뭇산들 사이로 청차관 정상이 보이고 서쪽 더 멀리 평봉산까지 어렴풋이 비껴든다 .필자가 이 발견을 터뜨리자 일행은 반신반의하다가 환성을 지른다. 마반산이 보이고 청차관이 보이고 평봉산이 보인다. 옥저님의 장난이 현실화되는 시점이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고려령이 높은 산이여서 처음 고령, 까울령으로 불리였다더니 고려령은 정말 해발고도 못지 않게 높이 솟아 있었다. 그때다. 김춘님과 뿌리님이 화들짝 소리지른다. 《저게 뭐야?》 뜻밖의 소리에 너럭바위아래 남쪽으로 뻗어간 산릉선쪽을 보니 송아지같은 메돼지 두마리가 서쪽에서 릉선에 접어든다. 《메돼지다!》 일행이 벌떡벌떡 일어나 산릉선에 시선을 박는다. 놀란 메돼지가 엉기엉기 달음박질로 비탈릉선을 넘어 동쪽으로 사라진다. 옥저님은 그 순간을 디지털사진기에 잡느라고 어성인다. 한동안은 메돼지가 화제, 산에서 산메돼지를 보는것은 처음이란다. 필자는 지난해 2005년 8월초에 한패의 한국인들과 더불어 백두산을 거쳐 집안을 다녀오다가 백두산 서쪽비탈로 통한 길가에서 여나문마리 새끼를 거느린 어미메돼지를 보았으니 처음은 아니였다. 그것도 야산도 아닌 인가와 가까운 고려령 기슭에서 메돼지를 만났으니 모두들 돼지 꿈꾸면 돈 생긴다며 올해는 메돼지덕에 돈이 생길부다고 흥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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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령 남쪽비탈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고려령은 과연 뭇산들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서쪽으로는 뭇산들 너머 마반산, 청차관, 평봉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석현 동쪽의 초모정자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이 원형으로 에돈 조선의 이름모를 산과 함께 조선의 온성벌, 중국의 량수벌이 보인다. 서남쪽에는 도문시 정경이, 그 너머로 일광산이 모두가 바라보인다. 일행은 너나없이 고려령에서 발아래 세계를 굽어보는 기분이 신선세계 같다며 고려령산행이 인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산행기분에 젖어보고 후안산, 고려령 지식까지 익히는 그 재미가 별재미라는 그네들. 하산은 고려령 남쪽 산릉선으로 택해졌다. 이 산릉선은 남으로 곧추 두만강가까지 뻗어갔는데 걸어볼만한 구간이였다. 잠간새에 메돼지가 산릉선을 너머 동쪽 골짜기로 사라진 구간에 이르렀다. 자세히 보니 메돼지 둘이 지난 눈속 발자국은 다리를 지리리 끌며간 사람발자국을 련상시켰다. 네다리 가진 산 짐승이니 발자국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까 서쪽비탈로 정상에 오를 때 바위산 부근에서 본 금방 발자국은 메돼지발자국이였다. 그러니 우리가 본 두마리 메돼지는 우리가 바위산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 바위산가를 지났고, 우리가 동남쪽 무리바위에 이르렀을 때 이 구간 산릉선을 지났었다. 필자는 바위산가 메돼지발자국을 두고 송이님과 의미있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참으로 다행이였다. 만약 산비탈에서 정면으로 메돼지와 맞다들었더면 어떠했을가, 상상하기조차 어지러워 났다. 일전에 한국의 한 로인이 메돼지에 당했다더니 그래도 항상 메돼지를 조심하는것이 좋을것이였다. 남쪽 산릉선 산행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였다. 산 정상이다보니 바람에 날린 눈들이 두텁게 쌓이며 색다른 풍경을 연출했는데 그런 구간을 헤쳐가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힘이 곱절 들어도 어려움은 여반장이였다. 봇나무님은 아예 산모양을 이룬 눈 릉선우를 걸었다. 옥저님도 그를 따르다가 발목이 눈속에 잡히며 허망 나가 자빠져 일대 폭소가 터져 올랐다. 뿌리님은 재밌다고 박수까지 쳐댄다. 가까스로 고려령과 대칭되는 남쪽의 정상봉우리에 이르니 일행 전체가 기진맥진. 쉬면서 더운 우유, 콩물을 마시다가 송이님이 소지한 송이술까지 마이니 신선세계가 따로 없었다. 연우산악회 6명 구성원이 바로 신선세계의 주인들이였다. 이 신선세계의 주인들이 남쪽 산비탈로 산을 내릴 때 옥저님과 필자는 뒤에 떨어졌다. 산 정상의 서남쪽아래에 목도고개가 펼쳐지고 목도고개 북쪽너머의 그제날 강건너편 5호동네터전이 시야에 비껴들었기때문이였다. 둘은 이윽토록 산아래를 굽어보다가 흘러간 피어린 그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 숭엄한 기분속에 빠져드는 산행답사의 시각이였다. 산행의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고려령 산행은 정녕 높은 산 기분도 느껴보고 력사지식도 터득하고 두마리 메돼지도 만나 떼돈도 꿈꾸어본 겨울날 즐거움의 련속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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