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든 산비탈을 톺아야 했다. 봇나무님이 정상가를 눈앞에 두었을 때 나머지 일행은 왼쪽으로 가로 빠지며 쉽사리 비탈릉선에 오를수 있었다. 가슴이 활 열리는 시각이 그리도 좋을수가, 일광산 최정상은 아니여도 최정상쪽으로 뻗어오른 산릉선이여서 삼라만상이 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순간이였다. 동으로 흐르던 두만강물은 바로 일광산 남쪽 산기슭에서 남으로 구비를 탈며 저만치 흐르다가 크게 원을 지으며 다시 동북방으로 흐르고 있었다. 도도한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일시 흐름을 멈춘듯 수줍은 색시를 방불케 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일광산을 두고 말하는듯 싶었다. 일행은 다시 바위로 이루어진 산릉선을 따라 서북으로 향했다. 릉선 남북은 가파른 산비탈이여서 까닭하면 천야만야한 산아래로 굴러떨어질 판국이였다. 그래서 한높이 또 한 높이를 조심스레 톺아오르는데 저 앞이 “정상”이다. 아니 정상이 아니였다. 아찔해보이는 최정상은 “정상”북쪽가에 우뚝 솟아있었다. 우리가 선 “정상”은 최정상보다 10여메터 쯤은 낮아보이는 일광산의 두 봉우리 중 한봉우리였다. 마음을 울렁이던 삼툰자마을이 서남방 정면으로 저 발치에 펼쳐져 그림같은 화폭을 펼쳐냈다. 찰나 김태국박사와 두만강님은 서로 굳게 포옹하며 희열에 젖어들었다. 김박사의 말이 가슴을 치며 울리였다. 《20여년간 삼툰자를 수없이 다니여도 일광산 봉우리에 올라 삼툰자를 굽어보기는 처음입니다. 정말, 정말 기쁩니다. 가슴이 막 후련해집니다!》 그러는 필자도 가슴이 뜨거워났다.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박경재씨와 더불어 삼툰자를 처음 답사하고 동북으로 범진령을 넘어 일광산 서쪽 산등성이를 넘은것은 1990년 11월 20일, 그때도 우린 이곳 산정에서 삼툰자마을을 굽어보며 감개에 젖었었다. 필자는 15년 전 그때를 떠올리며 일행에게 삼툰자유래와 전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문시 월청진 일대에서 첫 개척마을은 삼툰자로서 근 150년 력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이주민이 두만강을 건너 이땅에 첫 곽지를 박은것은 1861년 경, 말하자면 이땅에 농막을 짓고 개척을 시작한것은 조선 종성군 삼봉일대에서 이주한 김씨, 박씨, 최씨 세 일가이고 이들 세 일가를 중심으로 세개의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세마을 동네”라 부르다가 중국인들이 삼툰자(三屯子)라고 불렀지요. 일명 간평(间坪)이라고 불리는것은 이 고장이 두만강가의 두 산 사이에 끼운 벌판이라는데서였습니다. 처음에는 사이벌로 부르다가 새볼로 입에 오르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니 간평으로 되였답니다. 벌판이라야 보다시피 동남으로 길이 약 1500메터, 너비 약 300-400메터에 불과하지요. 그러던 산간마을이 조선국내로 모금이나 련락을 다니던 독립군들의 거점으로 되고 1920년 6월에 대번에 이름이 나게 되였습니다. 6월 4일 새벽, 즉 오전 5시에 독립군 신민단 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두만강을 건너 저기 산아래에 보이는 조선측 강양동에 진출하여 일제헌병순찰소대를 본때스레 기습하고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 섰지요. 강양동은 삼툰자에서 두만강따라 동으로 몇리 떨어진 마을입니다. 바로 산아래 저 마을이지요. 다른 한갈래 독립군부대와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을 사이두고 교전했다고는 하나 쌍방군대의 사망은 없는줄로 압니다. 헌데 삼툰자전투가 번지여 홍범도 장군이 한개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일본놈 한개 중대를 몰살시켰다는 전설을 낳았지요. 그것도 산중턱의 바위밑 샘물가에서 물마이느라 몰켜있는것을 몰살했다는 전설이지요. 1990년 삼툰자의 진생봉(1990년 73살) 로인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사실 강양동 기습전과 삼툰자전투는 일본놈들을 봉오동에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전이였습니다. 결과 일본군 월강추격부대 200여명은 독립군 부대를 추적하며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상촌에 기여들었다가 섬멸적 타격을 받았지요. 아군 총지휘는 항일의 명장 홍범도장군이였습니다. 또, 진생봉로인의 말씀에 따르면 삼툰자를 둘러싼 뒤산들은 하나의 옹근산이 아니라 네갈래의 골안을 이루었습니다. 서쪽으로부터 차례로 백산골, 정삼골, 원골, 범진골로 불린답니다 — 필자의 얘기에 이어 상공님이 삼툰자 뒤산을 주시하더니 네갈래 골이 옳다고 수긍하였다. 과연 네갈래가 옳았다. 세번째골 원골로 수레길이 령마루까지 뻗어오른것이 환히 보이였다. 일행은 환성을 질렀다. 그 모습은 고향산에 오른 조무래기들을 련상시키였다. 그 시절에 삼툰자아래 두만강가 드레바위에 길이 없었으니 산을 탈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 4명은 필자의 이야기를 듣더니 15년전, 필자가 범진령으로 오르다가 보았다는 산중턱 바위밑 샘물을 찾아보겠다며 서남쪽 산기슭을 내리기 시작했다. 상공님과 필자가 일광산 최정상에 오를 길을 탐색하던 사이였다. 그러던 그들 4명은 아래쪽이 깎아지른 절벽이라며 뒤걸음을 쳤다. 그사이 상공님과 필자는 우리가 딛고 선 봉우리를 북쪽으로 내릴수 있는 좁은 오솔길을 찾아 냈고 마침내 두 봉우리 사이 협곡을 지나 일광산 최정상에 오를수 있었다. 이어 산릉선을 내리던 패들도 합세하니 사기가 부쩍 올랐다. 일광산 최정상은 해발고가 300메터로서 전부가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정상에 서니 동서남북을 주름잡은 산들이 물결치듯 사방으로 뻗어갔는데 동으로 도문시와 조선 남양구의 전경이, 서남으로 두만강가의 월청벌, 삼툰자벌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잇따라 길게 뽑는 “야호!” 소리가 연해연방 터져올랐다. 최정상이여서 잠풍하던 날씨가 찬바람을 몰아왔다. 그래도 연우산악회 일행은 정상에 머무르면서 뜨거운 우유도 마이고 콩물도 마이며 한때를 즐기였다. 지영철님은 배낭에서 사과배를 꺼내 손칼로 깎아서는 일행에게 한쪼각씩 돌리였다. 뒤미처 북쪽으로 뻗어내린 오솔길을 발견하고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우에 난 오솔길이라 등산객들이 적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있었다. 력사를 알면 그 산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일광산이 바로 그러했다. 도문시의 관광명소이고 옛 산성이 뻗어있는 산인데다가 그 서남쪽 산아래 삼툰자마을 품은데서, 일광산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력사를 만날수 있은데서 일광산에 대한 감수가 전연 새로왔다. 인젠 일광산을 내려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오솔길 따라 정상을 내리니 오솔길은 두갈래로 갈라졌다. 우린 동으로 뻗어간 오른쪽 산릉선을 따라 내리기 시작하였다. 집중 6대로 불리우는 막바지 마을을 지나 집중촌 어구 시내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귀로에 도문역에서 연길행 중형뻐스를 잡아탔을 때는 어언 오후 3시 직후. 잘 있으라 일광산아! 다시 만나자 삼툰자마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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