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겨레의 이주사를 펼치면 우리 멋이 진한 돌봉, 아들골, 애끼골, 외돌배기, 두텁골, 쇠골, 늪골 등 지명들에 접하게 된다. 아쉬운것은 그후 지명조사때 이런 마을이름들이 그 뜻과 발음에 따라 석봉(石峰), 자동(子洞), 제동(弟洞),고석동(孤石洞), 후동(厚洞), 금곡(金谷), 로과(芦菓) 등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허나 오랑캐령 북쪽너머 명동일대의 선바위는 그제나이제나 끄떡없이 그 이름 그대로 우뚝 솟아 길손들을 반긴다. 선바위, 우리 겨레로 말할 때 정녕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하기에 허다한 문인들은 명동을 외울 때 자연스레 선바위를 먼저 떠올리군 했다. 내 고향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한 학급동창생이며 외사촌인 한국시인 김정우선생은 자기의 글 “윤동주의 소년시절”에서 명동의 자연환경을 묘사하면서 선바위를 잘 그려냈다.
—명동촌의 자연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북으로 완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주고있다. 그 바위돌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싸움터로 여겨지는 산성이 있고 화살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되군 하였다.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갔다.
어린시절의 회상이여서 어딘가 방향이나 산세에서 빗나간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선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명동의 주위환경을 보는듯이 그려냈다고 할수 있다. 이를 두고 불후의 걸작—“윤동주평전”을 펴낸 한국의 녀류소설가이고 력사학자이기도 한 송우혜녀사는 “김정우시인의 글은 윤동주의 명동시절의 자연환경을 정말 한폭의 그림그리듯이 서술하고있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적절히 평가를 내리였다. 이에 앞서 송우혜선생은 자기 저서 “윤동주평전”에서 선바위를 주축으로 하는 명동의 외형을 윤동주집안과의 관계속에서 살펴보았다.
—명동은 그곳에 명동서숙이 생기면서부터 명동마을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이민이 들어가기 이전 청국인 대지주 동한이 소유하고 있을 때엔 “동가지팡”, “부걸라재(凫鸽砬子: 비둘기바위란 뜻)” 등의 청국식 지병으로 불렸다. “부걸라재”는 명동에서 용정쪽의 골짜기입구에 커다란 바위 셋이 우뚝 서있었는데 (한인들은 이 바위들을 “선바위”라고 불렀다.) 거기 비둘기들이 많았던데서 연유했다는것이다.
선바위의 유래를 밝히는 실사구시한 서술이라 하겠다. 유감스러운것은 명동의 해당자료를 그 이상 더 접촉하지 못하여 명동이기에 앞서 지명이 룡암동이였다는것을 몰랐다는것이다. 이런 연유로 송우혜선생은 명동촌을 학교촌이라고도 했는데 학교촌, 룡암촌을 명동촌과 갈라본것 같다. 김정우시인과 송우혜소설가의 선바위글이 상기 인용이라면 필자의 친구이고 중년소설가인 류연산은 장편기행문—“혈연의 강들”에서 륙도하를 거스른 지신향 신동골어구에 예전엔 세개의 큰 바위산이 우중충 솟아있었다면서 그중 두개의 산(실제는 하나의 바위산이 없어졌음)이 없어진 비감을 이렇게 토로하고있다.
—나는 룡정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에 숭엄한 심정으로 선바위를 바라보았다. 그제날엔 세개의 바위산이 가지런히 솟아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의 산이 외홀로 하늘을 떠받든 기둥마냥 힘겹게 치솟아있었다. 돌을 까서 길을 닦느라고 남포질에 두개의 산이 거덜이 난것이다. 바위산이 있었던 흔적인 돌너덜은 마치도 전쟁의 창상마냥 참혹하게 안겨왔다. 그랬으면서도 거대한 탑마냥 하늘공중에 우뚝 솟은 외로운 선바위는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변하여 나의 시야로 달려왔다. 그것은 다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뒤바뀌기도 했다.
과시 소설가다운 마음의 토로이다. 전설속의 선바위, 이주의 옛말을 담은 선바위는 이 중년소설가에게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 필자한테는 선바위가 또 윤동주소년시인의 거룩한 모습으로도 떠올랐다. 어떻게 보아도 소년 윤동주와 떼여놓을수 없었다. 선바위,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이는 상기 인용문에 밝히다싶이 윤동주의 소학교동창생 김정우선생의 글에 묘사된 한 단락이다. 사실 선바위부근의 장재촌이나 명동촌 등지의 사람들은 어른, 아이나를 막론하고 해마다 봄이 오면 삼형제바위를 찾아 들놀이를 즐기군 하였다. 지난 80년대로부터 이어진 명동일대답사시 장재촌, 명동촌의 로인들이 말이다. 그속에는 부자집장손으로서 “마음 여리고 공부 잘하던 어진 소년”윤동주도 들어있었다. 한창 나이의 소년— 윤동주 또래들에게 있어서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는 마을부근 야산이나 선바위는 그야말로 들놀이의 무릉도원이였다. 선바위가 주는 멋은 또 탁 트인 시야가 아닌가싶다. 선바위쪽에서 골따라 남쪽을 바라보면 명동지구라 일컿는 수십리골안과 골안저쪽의 오봉산이 한눈에 안겨든다. 그 골안 복판으로 내물을 방불케 하는 륙도하가 졸졸 흘러내린다. 륙도하는 백리륙도하라고도 일컿는데 룡정시 지신진 동남쪽의 오봉산기슭에서 발원하여 지신, 명동, 장재, 선바위구간, 원 광신향 구간을 거쳐 룡문교 웃쪽에서 해란강에 흘러든다. 말하자면 해란강의 하나의 지류인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김성호선생은 “백리륙도하”라는 한편의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요람은 해란강이라고 말하고싶어졌다.”면서 해란강의 “하나의 줄기인 륙도하도 역시 우리 문화의 발전에서 씨앗을 발하시킨 젖줄기라고 여기지 않을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실 그러했다. 백리나 면면히 이어졌다는 륙도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내물을 방불케 한다지만 100여년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는 큰 강이였다고 한다. 이 강 량안에는 조선서 살길을 찾아온 조선이주민들이 여기저기 마을을 지어 모여살았다. 그래서 륙도하는 우리 겨레를 키운, 우리 문화를 이어준 생명의 젖줄기이기도 했다. 19세기 90년대이전만 해도 이 지구는 수림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한 한적한 고장이였다. 1885년을 계기로 청정부에서 200여년간이나 지속된 봉금령을 정식으로 페지하자 기아에서 허덕이던 조선 북부지대의 농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었다. 1899년에 이르러 장재촌에 30세대, 하중영촌에 10세대, 중영촌에 8세대, 성교촌에 20세대, 소룡동에 15세대, 대룡동에 20세대, 풍락동에 80세대를 이루었는데 이 7개 촌의 세대수는 무려 근 200세대에 달했다. 이해 1899년 2월 18일에 두만강남안의 조선 회령, 종성 등지에서 김약연 등 네 학자가문의 남녀로소 141명이 명동일대에 이주해오자 이 일대에는 서재들이 일어서며 새로운 부흥을 맞이했다. 이런 고로 오늘 륙도하를 거슬러 답사하노라면 그제날의 명동지구에서만 해도 김약연선생의 공덕비와 묘소, 윤동주시인의 생가, 청년문사 송몽규의 생가, 김창걸선생문학비, 그제날 명동학교자리와 복원된 교회당, 광복전 화룡현성자리—지신촌을 볼수가 있는걸가. 선바위 북쪽은 또 어떤가,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가 룡정 동산묘지에 있다면, 3.13반일의사릉, 15만원 탈취거사 옛터, 1930년 5.30폭동지휘부 옛터, 주덕해생가 옛터기념비 등이 관광명소로 줄줄이 이어져 관광객들을 부른다. 선바위와 백리륙도하—이 고장들은 정녕 마음이 가 닿는, 또 마음이 끌려가는 력사의 고장이요, 문화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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