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004년에 나는 문화산맥사이트—koreancc.com에 올리려고 《천리 두만강을 따라》 10여편을 써낸바 있다. 두만강련속기행인데 그 여섯번째 기행이 바로 《사이섬 사이섬》이였다. 인터넷에 뜬후 반영도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제딴에 두만강사이섬을 안다고 자부했었다. 헌데 이번에 조선땅에서 두만강 종성구간을 답사하면서 나는 사이섬을 잘 몰랐다는것을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난 10월 18일~24일 사~사 려행으로 조선행 답사길에 올랐다. 답사의 목적은 우리 조선족시인이고 민족시인이고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한편 사이섬 종성구간을 옳바로 돌아보는것이였다. 하지만 지척이 천리라는 말도 있듯이 강 하나를 사이둔 국경을 넘나들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였다. 형식이 사~사 려행이다보니 중조변경지구 출입경통행증을 내야 하고 조선측에서 국경통행검사수속과 일련의 체류등록 수속을 거쳐야 하는가 하면 려비외에도 빈손으로 갈수는 없는것이였다. 한마디로 돈인데 국내에선 20~30원으로 잠간이면 다녀올수 있는 길을 그 곱절이 아니라 수십배에 달하는 돈을 팔면서 적어도 수일내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래도 가야 하는 답사길이였다. 윤동주를 쓰면서, 사이섬을 쓰면서 이주사를 다루면서 종성을 모른다는것은 말도 안되였다. 10월 18일, 나는 우리측 개산툰 해관과 조선측 삼봉세관을 순조로이 통과하고 함북 온성군 삼봉땅에 들어섰다. 두만강 남양의 삼봉과 종성사이는 고작 10킬로메터 거리라지만 필요한 체류수속을 밟느라고 2~3일후에야 종성답사길에 오를수 있었다. 종성에 이르러 선참 찾은곳은 종성거리 중심가에 위치한 수항루였다. 수항루는 1610년에 세워져 근 400년의 력사를 가진 3층루각으로서 종성의 상징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10여년전에 전용차로 종성땅을 거치면서 잠간 내리기도 하였지만 중시가 따르지 못하여 인상이 그닥 깊지 못하였다. 이번에 다시 답사하니 인상이 전혀 달랐다. 종성군 동풍면에서 살아온 윤동주 할아버지세대가 거치여온 수항루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조선족 100여년 이주사의 산 견증물이여서 더욱 그러한가부다. 수항루에 오르니 깨끗한 종성 거리거리가 한눈에 안겨왔다. 그에 따라 나의 마음은 세차게 들먹이였다. 조선족이주사를 볼 때 종성땅은 정녕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기 때문이였다. 100여년 조선족이주사의 눈물어린 사이섬이 바로 종성이란 이땅에 걸터앉기도 하여 들먹이는 마음을 인차 진정할수가 없었다. 인상적인것은 지붕네각이 들린 고루한 팔간집 모양의 집이 허다하다는 것이였다. 전통적인 우리 식의 검은기와집들인데 우리측 두만강 연안과 연변시골들에서 아직도 가끔 찾아볼수 있는데다가 종성사람들의 말씨 또한 연변말씨와 똑같아 조선땅이라 하기보다 연변의 어느고장이라는 편이 더 나을것 같았다. 수항루와 종성거리거리를 인상깊게 일별한후 나는 발길을 두만강가 신흥촌 사적지쪽으로 돌리였다. 사적지는 수항루에서 곧추 북으로 통한 길 연장선에 위치했는데 수항루를 지나 종성~온성 구간 철길을 넘으니 사적지, 즉 원 사이섬구역이였다. 이 구역은 또한 일찍 김일성장군께서 력사적인 금산봉회의와 지하혁명조직의 사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1931년 5월과 1933년 5월에 선후 두차례나 두만강을 건너오신곳이여서 혁명사적지로 이름높은 구역이기도 했다. 철길을 넘고 논밭구간을 지나니 푸른 나무들속에 펼쳐진 널다란 운동장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정면으로 통한 운동장 저쪽가에는 그닥 크지 않은 흰색의 화강암 돌비석이 서고있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비문에는 1933년 5월 28일 김일성장군께서 한 부대성원들과 함께 이 운동장에서 단오명절을 즐기는 이곳 인민들의 운동회를 보아주시였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운동장 동쪽가는 수풀이 우거진 혁명사적지의 중심부분이였다. 여기에는 대형화강암 돌비석과 함께 오태희로인의 집, 마을집들 몇채, 박우물이 재현되여 혁명사적지로 잘 꾸려지고있었다. 오태희로인이면 지난세기 30년대초 왕청현 5구로 불리운 석현일대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쓰러진 오중화렬사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오로인네 집안은 말 그대로 《보기 드문 대가정》으로서 워낙 함경북도 온성군 고작골에서 살다가 1914년경에 왕청땅에 이사하였었다. 오중화의 동생들인 오중흡, 오중성 등도 쟁쟁한 항일렬사들인데 이들 생전에 오태희로인은 두만강을 사이둔 왕청과 온성땅에서 활동하는 자식들의 뒤바라지로 한시기 지금의 혁명사적지인 종성 신흥촌 두만강가에 집을 잡고있었다. 당시 왕청현유격대대 정위로 활동하던 김일성장군은 1933년 5월 28일 온성 종성지구 지하혁명조직들의 사업지도차 이곳 신흥촌에 오셨다가 오태희로인네 집에 머무르게 되고 《물이 없어》 고생하는 마을사람들의 정상을 헤아리시고 친히 여기에 박우물을 마련하여주시였던것이다. 두만강가 신흥촌은 이같이 김일성장군의 항일혁명력사가 깃든 유서깊은 고장이였다. 그러던 이 고장이 오늘은 혁명사적지로 훌륭히 꾸려지고 박우물가에는 장군께서 친히 쓰신 모조품 삽이 정히 보관되여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이곳을 지나 나무숲속으로 뻗은 길을 따라 두만강쪽으로 나가면 또 대형화강암 돌비석과 함께 모조품 나루배가 늪가 정한 지붕아래 놓여져있는것을 볼수 있다. 김일성장군은 1931년 5월 14일 새벽 여기 비밀나루에서 배로 두만강을 건너 종성, 온성지구에 진출했고 1933년 5월 28일에는 또다시 종성지구에 진출하였다가 5월 29일 이곳나루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갔던것이다. 두만강가 원 사이섬 답사로 나를 흥분시킨것은 바로 이 구간에서였다. 김일성장군께서 지난 세기 30년대초반에 선후 두번이나 이곳 나루를 거치였다는것은 여기가 두만강사이섬 나루터라는것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가 신흥촌사적지를 소개하는것도 이곳이 두만강사이섬의 연장부분이고 사이섬 나루터의 옛터였기때문이다. 나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나는 지금 조선측 그제날 사이섬나루터에 서고 있었다. 그때에야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신흥촌 혁명사적지 동쪽과 북쪽구간은 온통 늪세계였다. 늪들은 어디나 《부등매》식물이 무성히 자라고있었는데 어린 시절 부등매를 따서는 꺽어서 호호 불던 때가 금시런듯 했다. 그 시절 민간에서 부등매로 불렀기에 그대로 적어보는데 이 식물의 고유이름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사이섬 늪에 대한 시야는 넓어만 갔다. 뒤미처 지금의 혁명사적지가 자리잡은 곳도 많이는 늪자리였다고 하니 나는 더욱 놀랐다. 지난 80년대초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늪이 대단히 많은 모양이였다. 그러던것을 혁명사적지로 꾸리면서 온성군의 젊은이들을 위수로 하는 청년돌격대 8~9개 중대가 조직되여 옹근 2년만에 걸쳐 사적지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다. 사적지 수요로 적잖은 늪을 메우고 구뎅이를 메우고 높은데를 깎아내렸으니 그 토방량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적지에 일어선 여러 화강암비석들에는 시간이 모두 1983년 5월 28일이라고 새겨졌는데 이는 사적지의 대외개방시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다면 두만강가 이곳의 늪들은 천연적인 소산물일가, 다가 그런것이 아니였다. 우리측 사이섬과 그 일대만 보아도 그러하다.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연길현 개산툰구간 두만강은 광개향 선구촌구간에서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가 꽤나 되는 섬을 이루었다. 이 섬이 조선족이주의 력사, 북간도의 유래를 보여주는 사이섬이다. 력사자료를 보면 선구, 광소와 조선 종성사이로 흐르는 중국측 두만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고 이 복새험은 그제날 광제욕에 잇대여있는 륙지였다. 1881년에 청나라에서 연변지구의 봉금제를 사실상 페지한데서 조선사람들이 월경하여 광제욕 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뺐다고 하는데 그후부터 복새험으로 불리운 이곳땅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변하고말았다. 처음 조선사람들은 날농사를 하면서 이곳 땅을 사이섬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번지여 두만강북안은 조선사람들에 의해 북간도로, 압록강 북안은 서간도로 불리여졌다. 1885년에 봉금제가 정식 페지된후에는 더욱 그러했다고 알려진다. 다시 선구촌으로 돌아오면 선구촌의 원 이름은 사이섬으로서 선구촌의 1~5촌민소조 구역이 머리섬이고 천평벌 말단의 선구촌 6촌민소조구역이 꼬리섬으로 불리운다. 그러던것이 이곳에 나루터가 앉으면서 나루터가 번지여 선구(船口)로 되고 선구가 꼬리섬의 지명으로 되여버렸다. 이에 따라 광복전 강량안에 종성세관과 선구해관이 서고 우리측에 세무소, 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흥기하면서 나루터마을은 제법 흥성흥성한 동네로 알려졌다. 그제날 나루터마을이다. 선구 머리섬에서부터 섬을 이루며 흐르던 두줄기 강이 이곳 꼬리섬나루터에서 합수되면서 강폭이 아주 컸다고 하지만 지난50년대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당지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으며 제방뚝을 쌓기 시작한데서 강뚝이 앞으로 나아가고 나루터는 뚝밖으로 밀려났다. 지금도 선구 6촌민소조 앞구간 논밭머리 쑥대속에 가면 그 시절의 자그마한 콩크리트땜을 볼수 있다. 나루터의 흔적이라 하겠다. 이것이 중국측 상황이라면 조선측에서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두만강가 종성구간에 제방뚝을 높이 쌓으며 강물을 지금의 물곬으로 흐르게 하니 원 강곬에 숱한 늪들이 생겨날수밖에 없었다. 우리측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은것이 50년대부터라고 하니 조선측도 그때부터의 일로 보는것이 옳을것 같다. 광복전에는 강폭도 넓고 서로 나루배가 오갔다고 하니 두말이면 잔소리다. 했으나 조선측 늪들이나 사적지가 바로 길이가 길고 높은 제방뚝 남안에 있어 우리측 두만강 남안이나 선구 6대 뒤산에서도 볼수가 없다. 이런 고로 허다한 이주사연구관련자들은 사이섬건너 조선측 사정에 대해서 밝지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필자는 1991년 8~9월간에 조선땅에서 두만강, 압록강 사적지들과 전적지들을 두루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종성의 수항루나 두만강가 신흥촌 사적지를 돌아보았음에도 그 시절엔 조선측 늪들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던것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그런속에서 답사의 하루가 어떻게 흐른지도 알지 못하였다. 조선측 두만강 뚝우에 오르지 못한것이 다소 유감스럽기도 했지만 1991년에 이어 종내, 뜻대로 종성구간을 답사하고야 말았다는것은 더 없는 마음상 위안으로 되였다. 마음이 거뿐하기도 하고 상쾌하기도 한 두만강남안에서의 나날은 살같이 흘러갔다. 정말이지 두만강 남안으로 답사의 한걸음을 내디딘다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지만 나는 그 한 걸음을 내디디고야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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