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선족문단에는 광복전 조선족문학을 두고 《조선인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것 같다. 일개인이 주장만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다. 이는 반벽거사님이 2005년 4월 4일과 《도라지》 문학지사이트 《문학살롱》에 처음 올린 론문ㅡ《조선족문학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잘 보여지고있다. 이 론문의 주요쟁점은 윤윤진선생의 론문—《중국조선인문학연구에 나서는 몇가지 문제》①를 에워싸고있는데 《건국이전의 우리 문학의 개념을 <조선족문학>이 아닌 <조선인문학>으로 정립하여야 한다.》 견해에서 비롯되고있다. 확실히 윤윤진선생은 자기의 론문에서 《중국조선족문학사》라는 이 정립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광복전문학을 조선족문학이라고 호칭하기 보다 조선인문학이라고 하는것이 더 적절할뿐만아니라 사실에 접근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이는 10여년전인 1993년의 주장이여서 현재의 시점에서 원 주장(이 논문은 《문학과 예술》 2005년 제 1호에 다시 실리였음》이 어떠한지는 알수 없으나 우리 문단에서 이런 주장이 가끔 나타나고 영향을 끼치는것으로 보여진다. 전성호선생의 론문도 그러하다. 지난 90년대 말에 전성호선생은 한국서 쓴 대학원 졸업론문 《일제하 중국조선인 소설연구》를 한국 다나출판사에서 출판②하면서 광복전 조선족문학을 조선인문학이라고 지적하였다. 론문제목부터가 이점을 시사하고있는데 우리 조선족문학사를 광복전후에 따라 조선족문학과 조선인문학으로 동강내고있다. 또, 조선인문학으로 일컿는 이른바 재만조선인작가들의 문학이 중국 조선족문학사의 한부분을 이룬다고 서술하였다. 조선인문학주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있다. 지성인들이나 문단의 작가님들 가운데는 광복전의 조선민족은 조선족이 아닌 조선인인데 어찌 조선족이라 할수 있느냐며 그 근거를 내놓는분들도 가끔 보이는 현실이다. 이는 필자를 크게 놀래웠다. 우리 조선족과 조선족의 흐름을 몰라도 너무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서였다. 이에 필자는 광복전을 포함한 우리의 력사는 모두 조선족력사이고 이 력사속의 겨레작가들이 엮은 문학은 모두 외국인을 상징하는 조선인문학이 아닌 조선족문학이라는데 력점을 두고 해당자료들을 힘자라는대로 모아보았다. 아래 조선족의 이주초기 수차 입적과 중국공산당계렬을 통한 관내와 동북, 광복전후로 나누어 력사적으로, 체계적으로 광복전을 포함한 우리 력사, 우리 문학이 조선족력사, 조선족문학임을 보기로 하자.
2. 이주초기 중국적에 입적한 사람들
력사를 돌이키면 1644년에 청나라 주력군이 파죽지세로 관내에 쳐들어갔다. 이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늘의 북경에 도읍을 정한 청조통치자들은 장백산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룡흥지지》(龙兴之地)로 간주하고 강희년간(1669~1681)에 흥경(오늘의 료녕성 신빈)이동,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하고 타민족이 봉금지내에서 사는것을 엄금하였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를 세운후 봉금정책은 보다 강화되였다. 한데서 이 지구는 가고가도 인적이 드문 황량한 고장으로 되고말았다. 18세기 중엽부터 산동, 하북 등지의 관내한족들의 봉금정책에 눌리지 않고 료동, 길림지방을 거쳐 연변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도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었고 1869년과 1870년엔 련속 대한재가 덮치였다. 1861년8월의 대수재는 북부 부령 등 10개 읍의 1225세대 민가를 밀어가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무산, 경성 등 군과 읍의 수천명 백성이 한지에 나앉게 하였다. 살기 위한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1885년에 청정부에서는 정식으로 봉금령을 페지하고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되는 지역을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거주와 토지경작도 허락하자 생활고에 허덕이던 조선사람들이 물밀듯이 두만강을 건너섰다.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였다.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삼켜버린후 두만강을 건너는 조선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930년말 일본외무성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중국 동북의 조선사람은 45만 9400여명이였는데 1930년엔 63만 982명으로 격증되였다. 당시 연변의 화룡, 연길, 왕청과 훈춘 4개현만 해도 조선사람수가 40만 9402명에 달했다. 조선이주민들이 이주에 따라 시기시기에 따른 토지소유권문제와 입적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조선이주민에 의한 두만강이북의 개간은 청정부의 중시를 자아냈다. 조정에서 1882년부터 “이민실변”(移民实边)정책을 실시했으나 “치발역복”(剃发易服), “귀화입적”한 사람만이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은데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894년에 길림장군이 연변에다 4개보, 39개사를 설치할 때 10분의 3에 달하는 조선이주민들이 치발역복을 거부하고 귀국길에 올랐다.③ 1909년 말에 청정부에서는 최초의 국적법—《대청국적조례》를 제정하고 반포한후 사정이 달라졌다. 이해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삼켜버린후 청정부를 대체한 민국정부가 중국적에 가입하지 않은 조선이주민에 대해 백방으로 압력을 가한데서 입적고조가 재빨리 형성되였다. 그러나 지방관청에서 《국적법이 나오지 않았기에 국제상에서 효력을 발생할수 없다》는 리유로 입적수속을 잘해주지 않았다. 이에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리동춘은 김립과 함께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 국무원에 《만호 청원귀화입적서》를 제기하였다.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고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수있게 되였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그후로 중국적에 가입하는 조선이주민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중공만주성위의 해당문건에 따르면 1927년~1928년경에 《만주 한인 약 30만명이 함께 대표를 추천하여 중국관청에 입적을 청원하였다.》고④ 하는데 이는 1930년의 동북의 조선사람 60여만이라고 할 때 절반에 대등한 수자다. 수차에 걸쳐 먼저 입적한 조선이주민들까지면 대다수란 말이 된다. 그럼 이들 입적인들을 무어라고 하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때의 조선이주민들은 중국내 조선인이 아닌 당당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된것이다. 일례로, 1899년에 항일운동가 김약연 등 4대가문 22세대의 141명이 조선 회령과 종성에서 이곳 화룡현 명동에 집단이주한후 모두 중국적에 가입했고 1900년에 개산툰 자동에서 명동으로 재이주한 윤동주의 가문 역시 중국적에 가입하여 중국의 조선족으로 되였다. 우리가 1985년 5월부터 이 땅에 알려진 윤동주시인을 조선족시인이라고 하는 주되는 원인은 이때문이다. 관내에서 활동한 저명한 조선족시인들인 신정, 김택영도 이주후 인차 중국적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엮은 문학은 조선인문학이 아닌 우리 조선족문학이다.
3. 중국공산당이 보는 조선민족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전에 중국공산당이 조선사람들을 부르는 칭호는 여러가지로 알려진다. —1922년 5월 5일, 광주에서 열린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제1차 대표대회에는 조선 공산주의 청년단 대표도 참가하였는데 대회에서는 조선사람을 《조선인》, 《조선동지》라고 불렀다. —《시국에 대한 중공중앙 제2차 주장》 (1923년 7월)에서는 《어떤 조선민당》이라는 부름을 썼다. —《시국에 대한 중국공산당 제5차 주장》(1926년 7월 21일)에서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선언》 (1927년 7월)에서는 조선사람들을 《고려인민》, 《고려농민》, 《고려 등 피압박민족》이라고 불렀다.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 쏘베트대표대회의 보도(1934년 1월 22일)에서는 《조선대표》라기도 하고 《고려》대표라기도 하였다. 중화쏘베트공화국 주석 모택동은 이 대표대회의 보고에서 《고려》동지, 《고려대표》라고 부르면서 제1차대회와 제2차대회에 모두 고려대표가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소수민족문제에 관해《중공중앙에서 만주성위에 보내는 지시편지》(1928년 6월 11일)에서는 《조선민족》이라고 불렀다. —《중공중앙에서 만주성위에 주는 지시편지》(1930년 6월 29일)에서는 《한국농민》, 《한국동지》라고 칭하였다. —1941년 8월 21일부 연안 《해방일보》는 《조선인민》으로, 1941년 11월, 섬감녕변구에서는 조선동지들을《조선혁명인사》로 불렀다. —1940년대 초, 중공중앙 북방국 및 18집단군 야전정치부에서는 조선동지들을 《국제혁명전우》, 《중한민족》, 《중한인민》으로 불러주었다. 이상 례문들에서 보면 중국공산당켠에서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칭호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고려》, 《조선인》, 《조선동지》, 《한국동지》, 《중한민족》이라는 칭호가 두루 섞이였다. 했으나 40년대초 이후부터는 부름이 조선, 조선동지, 조선민족으로 통일체를 이루고있다. 공산당이 지도하는 국제벗, 국제혁명전우가 조선의용군, 조선독립동맹으로 불리우며 활동하니 모두가 고려, 한국 아닌 조선으로 통한다. 1942년의 중공진기로예변구위원회나 진기로예변구정부, 중공북방국, 《진찰기일보》, 연안의 《해방일보》만 보아도 하나같이 조선, 조선인, 조선민족, 조선인민, 조선전우, 중조인민으로 친절히 부른다. 1942년 5월 반 《소탕》에서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10명동지가 희생되였을 때 주덕총사령은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니 그 생명 영원하리》라는 글에서 그들을 《조선혁명동지》, 《조선인민》으로 존대⑤하였고 엽검영동지도 《조선의용군의 전사한 동지들을 추모하여》라는 글을 발표⑥하면서 조선의용군을 《중국에 온 조선의 혁명동지》,《조선동지》라고 존대하여주었다. 항일전쟁의 승리를 앞둔 1945년에는 더욱 그러하다. 공산당측에서는 언녕 김구선생을 《조선혁명수령》, 무정사령원을 《조선혁명의 선배》로 불러주었다면 주덕총사령은 또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개학식에서 《조선동지》라고 부르며 《민족통일전선의 경험을 따라배우라고 면려》⑦하였다. 모택동동지는 1945년 5월의 연안 당7차대표대회 정치보고 《련합정부를 론함》 제4부분 《중국공산당의 정책》중《우리의 구체강령》 제10 《외교문제》에서 《중국인민은 조선인민이 해방을 받도록 지원하여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말씀⑧을 하시였다. 중국공산당측의 이런 부름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동지들은 자기들을 조선민족의 아들딸로 자랑스레 불렀다. —1941년 7월 8일, 조선청년련합회분회가 연안에서 창립되였을 때 총회 회장 무정동지는 자기들을 《조선민족》이라고 찍어 말하였다.⑨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백연도 자기들을 《조선인민》이라고 지적하였다.⑩ —중공7차대표대회에 보낸 조선독립동맹의 축하편지는 《중국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국제주의로서 조선민족의 혁명운동을 시종 고무격려하고 부추켜주었다.》면서 《조선민족》, 《조선인민》으로 나타났다.⑪ —중국공산당 7차대표대회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왕위동지의 연설⑫에서도 《조선》, 《조선인민》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런고로 주덕총사령은 1945년 8월 11일의 《연안총부명령 제6호》에서 조선의용군은 즉시 동북으로 출병하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고 지시하였다. 왜냐하면 태항산, 연안 등지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중국적에 가입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국제벗이며 국제부대였기때문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후의 사정은 달랐다. 이해 가을에 심양에 이른 조선의용군은 무정을 비롯한 소수의 지도자들이 조선 국내에 진출했을뿐 거의 대부분 조선의용군 장병들은 동북에 남아 여러개 지대로 나뉘여 동만, 북만, 남만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리잡았다.
4. 만주성위, 항일련군에서 보는 조선민족
상기 3이 중국 관내의 시각에서 보는 중국공산당측의 견해라면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중공만주성위, 항일련군부대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있다.
(1) 만주성위에서: —1927년 12월 1일에 통과한 중국 동북 제1차당원대표대회문건 — 《만주농민운동결의안》에서는 조선이주민을 《조선에서 온 난민》이라고 했다. —《연길당의 사업형편》에 대한 만주림시성위의 《만주래신》에서는 조선사람, 조선공산당을 《한민》,《한국당》이라고 불렀다. —1928년 4월 15일에 중공만주림시성위에서 만주조선농민들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중한》이라고 하였다. —《만주통신》(1928년 제7기)에 실린 《만주의 조선농민문제》에서는 조선농민, 조선인민, 조선민족, 조선인, 한인이라고 섞어불렀다. —중공만주림시성위에서 중앙에 드리는 보고(1928년 7월 24일)에서는 《조선혁명동지》라고 강조하였다. —중공만주성위원회 회의기록에서는 《조선인민》,《중조》,《조선인》이라고 하였다.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운동위원회의 재만한국로농군중운동결의안초안(1930년 5월 24일)에서는 《재만 한국군중》, 《한국동지》라고 하였다. 이해 7월 1일의 당, 단 성위공개편지에서도 《재만 한국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만주고려인문제에 관한 중공만주성위의 제안(1930년 6월)은 《재만 고려인》이라고 하였다. —당, 단 만주성위에서 군중들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1931년 3월 20일)할 때 《전만(全滿)조선로동자, 농민, 학생》이라고 하였다. —중공길동성위에서 요하중심현위 및 4군 4퇀에 띄운 편지(1936년 3월 12일)에서는 《동북 한국민족》,《중한민족》이라고 불렀다.
(2)항일련군에서: —1936년 음력 5월 5일, 무송현 동강에서 항일련군 제2군에 의해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가 조직되였는데 항일련군의 수장들인 A와 K는 윤성, 국충 동지에게 보낸 편지(1936년 11월 28일)에서 《재만조선인》이라고 찍어 말하였다. —항일련군 5군 군장 주보중이 동활에게 보낸 편지(1937년 1월 1일)에는 《만주 소수민족고려인》이라고 강조하였다. —《항일련군 제1로군 건립형편에 관하여》(1937년 2월 13일)에서는 《제2군은…고려인이 과반수》라고 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특파원이 7군 동지들에게 드린 서면보고(1937년 12월 20일)에서는 조선민족을 《고려민족》, 《고려인》이라고 하였다. —《항일련군 제2군의 형편》(1937년)에서는 《2군의 생장구역이 동만이기에 민족성분에서 한인이 비교적 많다.》고 하였다. —중공길동성 하강특별위원회 확대회의결의안—《항일련군 2군개황》(1937년 12, 30—1938.1.5)에서는 《2군의 반수이상은 고려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상은 동북의 중공만주성위와 항일련군부대들에서 동북의 조선민족을 지칭한 같지 않은 부름으로서 관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조선》, 《한국》 등이 모두 통하고있다. 사실은 이러해도 연변의 조선민족은 거개가 조선의 함경도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기에 자기들을 조선사람, 조선인으로 부르기가 일쑤였다. 강덕 8년(1941년) 신경 (오늘의 장춘)에서 출판된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에서도 《재만조선인》이라고 했고 소화 7년 (1932년)에 출판된 《만주와 조선인》에서도 《조선인》이라고 했다. 광복전 연변의 현실이 그러한 실정이다. 하지만 동북이나 연변의 실정은 관내와 판이하게 다르다. 관내의 화중이나 화북 등지에서 생활한 조선사람들은 일본군을 따라 진출했거나 상업, 장사 등에 종사한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의연히 중국내 소수민족이 아닌 조선인이였다면 조선의용군이나 광복군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 국제전우들이였다. 이와 반대로 동북의 조선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진 농민들이 대부분이고 일제의 강행에 의한 집단이민외 많은 사람들이 중국적에 가입하여 광복전에 이미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였다. 항일무장투쟁에 뛰여든 동지들도 흔히는 그들의 후대로서 거개가 중공당원이 아니면 공청단원들이였다. 이로부터 보면 동북의 많은 조선사람들은 사실상 외국인으로서의 조선인이 아닌 중국의 조선민족임을 헤아릴수 있다. 다만 광복전은, 아니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전에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조선민족이나 조선사람으로 통했을뿐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면 광복전의 관내나 동북에서 우리 겨레를 흔히 조선민족이나 조선인으로 불렀으니 광복전 우리 문학을 《조선인문학》으로 규정해도 무방할것 같다. 헌데 그런것이 아니다. 아래 광복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의 우리 민족의 실정을 보면 보다 명백해진다.
5. 조선족의 정식부름은 1952년
1945년 광복이후 동북의 해방구들에서 토지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땅의 우리 겨레들은 중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여받았다. 법적으로 중국사람이 되였다는 말이 되겠다. 뿐아니라 정치권리도 향수하면서 입당도 하고 입단도 했으며 입대도 하고 각급 당일군, 정부관원으로 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광복후의 우리 민족은 의연히 조선사람, 조선민족으로 통하였다. 그때까지도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확국의 창건은 획기적인 사변이였다. 공화국의 창건과 더불어 동북의 조선민족은 명실공히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당당한 중국의 공민으로 자리를 잡았다. 했으나 조선민족으로서의 부름은 변함이 없었다. 하다면 중국조선족의 명칭은 언제부터일가, 혹자는 광복되면서부터라고 하고 혹자는 공화국이 창건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사실은 광복도 아니고 공화국의 창건도 아니다. 우리 조선민족을 정식 조선족으로 부른것은 1952년이다. 1952년 이해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그때는 자치구였음.)가 세워지면서 조선민족은 형제민족과 더불어 자치권리를 행사하게 되였다. 따라서 중화민족안에 조선민족이라고 부르자니 어울릴수가 없었다. 하여 중국내의 조선민족은 조선족으로 력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였다. 적절히 말해서 자치주의 창립과 더불어 조선족으로 통하게 된것이다. (중화대가정내의 56개 민족도 모두 《족》자 하나만을 붙여 장족, 회족, 위글족…등으로 통함. 그전은 흔히 장인, 회인, 위글인으로 불리였음.) 조선족이라는 부름은 또 조선족의 실정과도 어울리는 부름이였다. 조선반도(한반도)의 남북한에서 한인, 조선인이라고 통하는 실정에서 중국의 조선민족은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나라에 따라 구별되는 점이 있어야 했다. 이로부터 보면 조선족이라는 부름은 중국의 실정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름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6.조선족의 기점은 언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립을 계기로 중국내 조선민족은 조선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이땅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생활하는 조선사람(남북한의 교민들은 제외)들은 모두 중국의 조선족으로 되였고 이땅에서 생활했거나 활동하다가 광복전후에 귀국한 조선사람들은 조선인으로 불리게 되였다. 이는 하나의 지칭으로 굳어졌다. 여기에서 꼭 지적하고 지나야 할것은 중국조선민족은 광복전을 거슬러 이주에 이르는 전반 력사를 포함해 모두 조선족으로 통하지 더는 조선인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기에 연변대학 력사박사 김춘선교수는 2001년 3월 길림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한 《연변지구 조선족사회의 형성연구》에서 조선족의 이주시기나 입적시기까지도 모두 《연변조선족》이라고 지적하면서 전반을 조선족으로 관통시키였다. 이는 김춘선선생만의 지적이나 견해가 아니라 력사적인 결론임을 밝히는바이다. 아래 이에 따른 조선족력사연구관련책들을 보면 이 원칙의 실시를 알수 있다. —《장백의 투사들》(1-4)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정국 편—연변항일렬사전,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1982년 8월) 이 계렬 항일렬사전중 중국에서 태여난 조선족투사들은 모두 조선족가정에서 태여난 조선족항일렬사로 규정하였다. —《조선족혁명렬사전》(1-3)(박창욱주필, 료녕인민출판사, 1983년 11월)이 렬사전은 광복전후 구분이 없이 모두 조선족으로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조직사》(중공연변주위 조직부 등 편,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6월)와 《연변인민항일투쟁사》(최성춘 주필,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12월), 《중국조선족교육사》(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년 5월), 《근대중국조선족녀걸》(민족출판사, 1995년 1월, 이 책은 《당대 중국조선족녀걸》의 자매편으로서 20세기 10년대로부터 1949년까지의 조선족녀걸 60여명의 빛나는 업적을 소개했다.)등 책들도 조선인이 아닌 조선족으로 밝히였다. —《중국조선족인물》(연변력사연구소 편,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5월) 이 인물전에는 조선족의 근 40명 대표적인물이 소개되는데 중국 신해혁명시기 활동했던 시인이나 교육자, 항일활동가인 신정까지도 모두 조선족으로 취급하였다. 신정은 1922년 8월 5일에 상해에서 세상 뜬 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제 5종총서중의 하나, 중국 소수민족자치지방 개황총서, 연변력사연구소 편, 연변인민출판사, 1984년 11월)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국가의 해당정책체현이 너무도 잘 알린다. —《중국조선족문학사》(조성일, 권철 주필,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이 책을 출판할 때까지만 해도 좌적사상의 영향이 가시지 않을 때라 시비가 잦아서 김택영, 신정, 신채호, 김창걸, 윤동주외 광복전인물들을 널리 취급하지 못하였다.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김종국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년 4월 출판) 다년래 민족리론연구에 힘써왔고 자치주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연변사회과학원 원장직을 력임했던 김종국선생은 이 책에서 《100년래 중국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의 떳떳한 성원으로 부상》하였다고 밝히였다. 조선인이 아닌 조선족이라는 얘기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김진길은 조선족의 력사를 《중국조선족의 피어린 백년사》라고 지적하였다.
7. 조선족의 형성은 력사적인 과정
상기 사례를 든 조선족력사관련 대표적인 저서들에서는 무엇때문에 광복전후를 막론하고 일률로 조선족으로 취급하였겠는가? 여기에서 민족이란 의미를 잠간이나마 리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변대 민족연구소 교수 박창욱선생은 민족은 사회범주이지 정치범주는 아니며 한개 민족이라 해도 국적이 다름에 따라 그 부름이 다를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조선인이나 조선족이란 부름은 력사적환경에 의해 개변될수 있고 고정불변이 아니라는것이다. 나라가 다르고 력사시기가 다름에 따라 그 부름이 다를수 있다는것, 보다 명백한것은 력사상의 어느 민족이거나를 막론하고 민족은 일조일석에 의해서 형성된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력사환경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형성된다는것이 박창욱교수의 일가견이다. 확실히 우리 겨레는 19세기중엽이후 중국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를 시작해서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기까지 상당히 오랜기간 장기적이고 복잡하고 곡절적인 력사과정을 거치였다. 중국에서 조선민족이 조선인으로 불리우기 시작한것은 1909년 9월에 중일 량국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조약 《중한도문강변무조약》(즉《간도협약》)부터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 간도협약에서는 이 땅의 우리 조선민족을 법적으로 한민 또는 한인, 즉 조선인으로 규정했다. 10년대에 이르러 그 시기 동북에서의 겨레반일투쟁을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부른것은 중국내 소수민족이 아닌 교민(한민, 한인)이고 《일본신민》으로 통했기때문이다. 하기에 중국에서의 조선민족은 근본 공민권이 없었다. 또 동북의 봉계군벌통치가 조선인들의 반일운동을 진압하니 하등의 정치권리도 없는 조선민족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군벌통치와도 싸워야 했다. 그래서 나라가 없는 여기 조선민족은 조선의 반일지사들이 반일의 기치를 들고 싸우니 호응하여 일어났다. 이때의 겨레 반일독립운동은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1913년 5월에 국자가에서 선보인 《간민회》에서 입적운동을 발기하고 이끈것은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화민국(공화제를 실시)의 관할하에 반일민족운동을 벌려 민족권리와 평등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20년대후반이후의 력사환경은 다르다. 이때의 조선민족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중국의 조선민족으로 일본침략자들과 싸워간다. 하기에 모택동주석은 항일전쟁시기에 집필한 중요한 한편의 글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1939년 12월) 제1장, 제1절 《중화민족》에서 중국에는 4억 5000만의 인구가 있고 전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 4억 5000만인구가운데서 10분의 9이상은 한인(漢人)이다. 그외 또 회인, 장인, 위그르인, 묘인, 쫭인, 이인, 둥인, 중가인, 조선인 등이 있다. 도합 수십종 소수민족이 있는데 비록 문화발전의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이미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다.》⑬ 모택동주석은 이 단락의 글에서 중국내 조선민족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소수민족으로 지적하면서 중국은 다수민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광범한 인구를 가진 국가라고 하였다. 이는 력차의 입적운동과 항일투쟁을 겪으며 동북, 더우기 연변의 조선민족은 점차 중화대가정의 한 소수민족으로 되였음을 알려준다. 중국공산당이 조선민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공민으로 인정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긍정으로 보인다. 이같이 조선민족은 중국에 이주한후 정치제도, 사회제도, 풍속, 지리가 전혀 다른 사회환경에서 새삶을 가꾸어갔다. 이 가운데서 조선민족은 점차적인 생활을 거치면서 중국인들과 서로 어울리게 되고 점차적으로 민족의 고유한 특성, 즉 개성을 가진 중화민족의 공성이 형성되여갔다. 이런 공성은 이주초기부터 이미 시작을 보이였다. 우리가 이주 조선민족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기까지 일조일석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복잡하고 곡절적인 과정을 거치였다고 하는것은 이때문이라 하겠다. 이로부터 보면 중국조선족의 형성은 광복후이나 공화국의 창건, 자치주창립이 아닌, 이주초기에 이미 시작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하기에 우리는 중국조선족은 19세기중엽 력사적인 대이주 전후시기에까지 소급된다고 떳떳이 말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주초기부터 조선족이라 불러도 틀림이 없다는것이다. 이런 연유로 하여 정부차원에서나 학계에서는 오늘의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걸어온 100여년의 력사를 모두 조선족력사로 취급한다. 그만큼 이주이후부터 이땅의 조선민족은 조선족으로 불리운다. 이는 명문으로 규정된 력사사실이다. 이를 잘 모르고 광복전에 조선인으로 불리였다 하여 꼭 조선인이여야 하고 광복전문학을 조선인문학이라고 한다면 조선족의 련속성, 조선족문학의 련속성이 없게 된다. 나라와 력사시기가 다름에 따라 한개 민족에 대한 개념이나 그 부름이 다를수 있다는것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8. 결론
상기에서 우리 조선족의 100년래의 력사는 모두 조선족의 력사임을 여러 모로 밝히여보았다. 결론을 내리라면 하나로 개괄할수가 있다. 즉 중국의 조선민족은 력사적으로 보아 광복전후를 망라하여도 조선인이 아닌 조선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광복전 우리 문학은 조선인문학이 아닌 조선족문학이라는 지적이다. 조선인, 조선인 문학이라는 견해는 더는 발붙일곳이 없고 시비할나위도 없다는것을 잘알아야 할것이다.
주해:
1. 문학과 예술. 1993년 6호 2. 문학과 예술. 1999년 3호. 90페지 3. 김춘선 등. 연변지구조선족사회의 형성연구. 길림인민출판사, 2001.3. 186페지 4. 만주통신. 1928년 7호. 만주의 조선농민문제. 1928년 4월 15일 5. 1942년 9월 20일부 연안 《해방일보》 6. 우와 같음 7. 1945년 2월 10일부 연안 《해방일보》 8. 모택동선집 1권본. 인민출판사, 1969년. 북경. 한문 987페지 9. 1941년 7월 9일부 연안 《해방일보》 10. 1945년 8월 15일부 연안 《해방일보》 11. 1945년 5월 11일부 연안 《해방일보》 12. 1945년 5월 21일부 연안 《해방일보》 13. 모택동선집. 1권본. 인민출판사, 1969년. 북경. 한문 585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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