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 남쪽 구릉지대에는 연길시민들이 즐겨찾는 모아산이 우뚝 솟아있다. 지난 12월 24일 이날 연우산악회회원들은 평봉산의 고구려 옛 장성과 청차관, 대돈대 답사에 이어 모아산답사길에 올랐다. 몸도 단련하면서 모아산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도 헤아릴 겸 모아산산정에서 자발적등산단체—연우산악회의 정식결성을 선포하자는데서였다. 이날 따라 날씨는 축복이라도 하듯 유달리 좋아 연우산악회 회원들의 모습은 저저마다 밝기만 했다. 아침 8시, 시안의 로잔(老站) 뻐스부 부근에서 43선 시내뻐스를 잡아탄 산악회일행은 모아산겨울종착역 민속촌갈림길에서 내린 뒤 모아산 북쪽비탈길을 택했다. 몇년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진 모아산북쪽비탈에는 길이 없었다. 이 구간 한번 지나자 해도 수풀속을 헤치기가 여간 쉽지 않았는데 《내가 가면 길이 된다.》더니 새로 생겨난 산행길은 근 5킬로메터나 쭈욱 뻗어나갔다. 겨울날 숲속은 한결 아늑한 포근함이 감돌았다. 뭇새들이 지저귀는 노래가 좋았다면 가끔 노오란색 다람쥐, 검스레한 꼬리긴 다람쥐가 뛰여다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 속을 헤쳐가는 일행은 생기가 넘쳐났다. 첫구간 내리막길을 동강내고 낮다란 골짜기를 넘으니 이깔나무, 소나무 하늘을 찌르는 울울창창한 모아산 북쪽비탈지대다. 일행은 뒤늦게야 지난세기 60년대초이전까지만 해도 모아산과 이 일대는 황량한 민둥산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감회가 새로왔다. 력사속의 위만주국 간도성 때 국자가(연길)에 사방공사(沙防公司)가 나오고 1942년에 모아산 명신골에 10헥타르의 이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헌데 붉으스레한 척박한 땅이라 사름률이 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고 하니 말이 나가지 않는다. 해방후인 1953년과 1958년에도 또 10여헥타르에 이깔나무를 심었지만 역시 효과가 그닥잖았다는 현실이다. 그러던 1962년 6월, 연변시찰길의 주은래총리가 헐벗은 모아산을 보게 되였다. 총리는 못내 가슴아파하며 동행한 자치주당위서기이고 주장인 주덕해를 보고 꼭 모아산을 록화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주총리께서 연변을 떠나신후 주덕해주장은 살손을 댔다. 그해 가을로 모아산림산작업소가 세워지고 이듬해 봄에 연길시 기관간부와 학생들이 봄철나무심기에 떨쳐나섰다. 사름률이 30%미만, 1964년에 350헥타르 면적에 심은 이깔나무와 흑송, 적송 등의 사름률은 일약 85%이상. 1965년의 식수면적은 또 300헥타르다. 그후도 나무심기가 계속되는속에 80년대에 심은 면적만 해도 수백헥타르나 된다. 9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모아산림구의 총면적은 3300여헥타르로 늘어나고 대면적의 수림이 우거졌으며 1992년 11월초에는 국가림업부에 의해 모아산국가삼림공원으로 떴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모아산수림속을 오르내리며 산행, 삼림욕에 열을 올리였는데 연우산악회도 그 행렬속에 끼이여 대자연의 혜택을 맘껏 즐기는것이 아닌가. 어느덧 산아래 숲속길을 조이니 장엄한 모아산이 눈앞이다. 언제 찾아도 반겨주는 모아산이지만 여기저기 파헤친 흔적이 눈길을 흐리운다. 이런 흔적투성이들이 세월의 흐름속에서 수풀에 가리여진것이 다행이라 할가. 그에 따라 구간구간 일행의 발목을 잡은것은 파헤쳐진 동강난 부분의 로출부이다. 드러난 부분은 겉면이 조금 흙에 가리여져있을뿐 엷은 토층아래는 전부가 부서진 돌들이여서 기이하기만 했다. 그것도 납작납작한 돌들로 엉키여 신비함을 더해 주었다. 유심히 살필수록 자연적소산이 아닌, 인류활동의 흔적임을 시사하고있었다. (하다면 옛 인류가 쌓은 흔적일가?) 아니,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산중턱에서부터 하나의 옹근 산을 돌쪼각으로 쌓아올렸다는것은 무리였다. 긍정할수 있는것은 모아산전체가 돌산이였다는것이다. 토층에 가리운 그 아래 돌쪼각들은 오랜 옛날에 벌써 인류활동으로 부서져 내려쌓인 뒤 다시 식물류가 뿌리를 내리면서 토층이 형성되여갔다고 보는것이 옳은것 같았다. 북쪽비탈 중간쯤 되는 곳에 펑퍼짐한 곳이 나타났다. 이곳에 이르러 일행은 휴식을 취하면서 각자가 새해의 소망과 산악회의 소망을 빌기도 하였다. 연길의 상징이기도 한 모아산에 바라는 소망이였다. 인기로운것은 연우산악회의 정식발족, 새해를 앞둔 모아산에서의 발족이니 그 의미가 깊을수밖에 없다. 몇달간의 산행에서 지성인들을 축으로 하는 10여명의 회원들이 똘똘 뭉치였으니 이날 모아산발족식에 참가한 회원만도 옥저님, 상공님, 송이님, 바람님, 산신님, 봇나무님, 뿌리님, 백수정님, 두만강님 9명이였다. 산악인다운 소박한 발족식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데 정상을 가까이 둔 곳에 커다랗게 파헤친 공간이 나타났다. 온통 겉면에 흩어진 돌쪼각들이다. 지리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니여서 현대의 산물인지, 고대의 산물인지는 가려볼수 없으나 고대의 산물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연길시문물지》에 따르면 모아산 정상 북쪽 150메터 되는곳에 크게 패운 원시유적지가 있는데 동서길이 15메터, 남북길이 20메터쯤이라고 했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다시 크게 패운 부분이 나타나질 않았다. 정상의 남쪽 50메터, 100메터 되는 비탈릉선 패운 부분에서도 소량(少量)의 윈시문물이 발견되였다는것으로 보아 북쪽비탈릉선의 패운 부분은 틀림없는 원시유적지였다. 이 사실을 옥저님과 얘기했더니 옥저님은 인차 이곳 모습을 디지털사진기에 담았다. 드디여 정상에 올랐다. 연길분지의 가까이 변두리에서 제일 높은산—모아산정상이다. 해발이 517메터라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산이여서 사방 30킬로메터쯤의 산맥이나 하류, 마을들이 한눈에 보인다. 그속에 부르하통하 유유히 흐르는 북쪽의 연길분지, 해란강 굽이치는 남쪽의 세전이벌, 서남쪽가의 룡정, 서북쪽 저멀리의 조양천, 산아래 서쪽릉선을 탄 만무과원 등이 반기며 안기여든다. 모아산정상에는 평평한 공간이 생겨났다. 그 중심에는 철로 된 삼각대가 높이 세워져있었다. 항로표시대인 모양이다. 일행이 “야호”삼창을 웨치는사이 필자는 정상 네면 기슭의 우묵진 곳들을 주의깊게 관찰해보았는데 모아산정상돈대는 부서진 돌쪼각들로 축조되였다더니만 과연 틀림이 없었다. 돈대높이가 3메터, 정수리직경이 6~8메터라는데 비해 돈대밑면의 길이가 15메터쯤 된다고 연길시문물지는 알리는데 손대중, 눈대중해 보아도 돈대 동서길이는 15메터는 쉬이 되여보였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수 없는 흔적들이다. 모아산돈대가 옳았다. 필자가 이 정상이 고구려시기의 돈대, 즉 옛 봉화대자리라고 하자 일행은 무척 흥미를 가지였다. 상공님이, 우린 2000여년의 력사를 기록한 봉화대우에 서고있다고 하여 그 흥미는 보다 감미로왔다. 1985년 11월에 출판된 《연길시문물지》는 정상주위에서 발해시기로 보는 기와쪼각이 발견되였다 하여 모아산돈대를 발해시기 돈대로 본다지만 필자나 부분적 연구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연길분지의 외곽으로 되는 서북쪽릉선과 북쪽구릉릉선을 따라 고구려 옛 장성이 뻗어갔고 그 장성안쪽에 성자산봉화대, 청차관, 대돈대, 소돈대 등 고구려시기 봉화대가 축조되였는데 이와 일치를 보이는 모아산에 봉화대가 서지 않았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에 연변땅엔 북옥저사람들이 살고있은것으로 알려진다. 북옥저시기의 유적이 100여곳 되는중에 연길시 구역내에만 해도10여곳 된다고 하는데 이런 원시유적은 흔히 벌판의 강언덕이거나 강과 가까운 나지막한 산언덕에서 많이 드러난다. 북옥저사람들이 이런 고장들에 원시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들 사회조직형태는 이미 모계씨족공동체로부터 부계씨족공동체로 들어섰고 철제도구를 쓰기 시작한 초기단계—원시사회말기에 처해있었다. 이는 그 시기 철기는 극히 적고 생산도구의 대부분이 의연히 석기였다는것을 말하는데 지난 70년대 모아산에서 발견되였다는 돌도끼나 돌보습 등이 그러하고 1985년에 수집되였다는 적잖은 생활기구들이 그러하다. 그러던 기원전 28년에 북옥저는 고구려에 통합되는데 이같은 력사사실을 보면, 고구려시기를 거친 수백년후의 발해시기에 모아산봉화대가 일어섰다면 믿기가 어렵다. 북옥저사람들에 의해 모아산정상에 돈대—봉화대가 이미 축조된것은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고구려시기에 모아산봉화대가 연길분지와 그 일대를 지켜서는데서 주요한 역할을 놀았음은 의심할나위도 없다. 12월 24일, 이날 날씨는 유난히 좋았다. 이에 힘입어 우리 일행은 모아산 남쪽비탈릉선 따라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움푹 패인 지대가 여러 곳 되여 어느 곳이 남쪽비탈릉선 원시유적지인지 가려볼수가 없었다. 북쪽비탈이 무너져내린 돌쪼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남쪽비탈은 들쑹날쑹바위들이 머리를 내민 세계였다. 인상적인것은 정상아래 남쪽비탈릉선의 펑퍼짐한 곳에 더운 기운이 서린다는것이였다. 주위세계는 온통 눈으로 덮혔는데 이 구간 오솔길 오른쪽가에 한메터가량 사이두고 두곳의 눈이 녹아있었다. 다가가보니 돌쪼각들이 널린 틈새로 김이 서려 오르고있었다. 돌쪼각밑부분에 동굴이나 무엇이 있는것 같았다. 저 아래에서 송이님이 부르는데서 더 관찰할 사이가 없었다. 처음 대하는 자연모습이였다. 남쪽비탈구간 아래쪽은 채석장이여서 심히 파괴되여있었다. 모아산유람구로 오래전에 채석이 중지된 상태지만 그 파괴는 엄청 컸다. 그 서슬에 1982년 식수구덩이를 팔 때 발견되였다는 원시무덤자리는 찾을바이 없었다. 한데서 필자는 산아래 남쪽언덕구간이 그제날 북옥저인들의 원시마을이였음을 환기시킬수밖에 없었다. 력사를 알면 그 산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고 모아산산행성과가 대단했다. 모아산정상 고구려돈대—봉화대를 처음으로 보아냈고 북쪽비탈과 남쪽비탈의 옛 유적지에 눈길을 돌리였으니깐. 그속에서 2000여년을 기록하는 북옥저시기 이후의 력사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감도 잡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던, 살아 숨쉬는 력사의 현장이였다. 남쪽비탈을 내리자 오솔길은 모아산을 에돌아 고느적한 북쪽숲으로 향했다. 귀로라 서로간 묵묵히 길을 재우치는데 송이님이 소리질렀다. 《벌써 맥이 다 진했습니까?!》 그 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말소리, 웃음소리 다시 터져올랐다. 옥저님, 바람님이 선두를 긋자 짜장 눈싸움이 벌어졌다. 서로간에 눈을 쥐여뿌리고 받는 그 모습은 철부지아이들을 련상시키였다. 누가 아이들에게 눈이란 항상 즐거운것이라 했던가 30대후반에서 40대초반을 이루는 이들이 진짜 동심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풋풋한 인정이 감돌며 서로간에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겨울날의 귀가길 색다른 풍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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