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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여행(18)-천재적시인 윤동주의 고향
2006년 01월 16일 00시 00분  조회:2921  추천:78  작성자: 리함
내 고향 여행(18)

천재적시인 윤동주의 고향

리 함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면 우렷이 떠오른것이 연변 명동이 낳은 내고향 천재적 시인 윤동주이다.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는 1917년에 그 시절의 화룡현 명동촌(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나 1945년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하기까지 인생 28년을 살아오면서 생애의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내였다. 명동이란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정녕 유년기, 소년기 애틋한 모습을 비껴담은 잊을수 없는 고향이였다.
그제날의 애들한테는 명동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인 모양이다. 이 고장을 두고 윤동주의 소학교 동창생이며 외사촌인 시인 김정우선생은 일찍 자기의 글에 이렇게 묘사하였다.

…명동촌…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고, 앞강가 우거진 버들숲 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였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있고 가을은 원근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이 글 묘사에 못지 않게 윤동주시인의 친동생 고 윤일주교수는 자기의 생가를 보는듯이 그려냈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김정우, 윤일주 선생이 묘사한 그림같은 이 고장이 명동촌인데 윤동주시인의 집은 학교촌으로도 불리운 이 동네 입구 첫집이였다. 다시말하면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의 교회당가까이 두채민가중 앞집이 윤동주의 생가였다. 어린 시절의 윤동주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 있는 뽕나무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그만큼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제일 부자로 알려진다. 밭도 많았고 제법 벼농사까지 지었는데 온 마을 치고 벼농사집 몇 세대중 윤동주네가 그중 한세대였다니 그 잘사는 정도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윤동주는 이런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나 최서해, 김창걸 등 작가들과는 달리 부럼없이 명동소학교를 다니였다지만 소학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어질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 따라 잘 울기도 해서 윤동주의 4학년때 담임선생 한준명목사의 회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하하! 본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오.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도는 거예요.

했으나 잘 울기와는 달리 윤동주는 똘똘이로 공부를 잘했고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정평이 났다. 한국 김정우시인의 회상에 따르면 명동소학교 4학년시절에 윤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출판하는 월간잡지 《아이생활》을 주문해서 읽었다. 그의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문학소년으로서 서울잡지 《어린이》를 주문해서 읽었는데 그들이 다 읽은후는 동네아이들 차례였다. 그 시절로 말하면 명동시골의 두 소년이 서울의 월간잡지를 구독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5학년때 윤동주와 송몽규의 발기로 그들은 등사월간잡지 《새 명동》을 몇호 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명실공히 문학소년반이고 앞날이 창창히 밝아오는 미래 시인이였다.
그후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남으로 근 10리 떨어진 화룡현성—한족 소학교 6학년에 통학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시절의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룡정 광명중학교 등을 거치며 22살되던 해 1938년 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그러던 26살되던 해 1942년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동지사대학 영문과에 다니다가 광복을 몇달 앞둔 1945년 봄에 한줌의 재가 되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1945년 3월초순에 룡정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에 의해 룡정 동산마루에서 윤동주시인 장례가 치러졌다. 이해 5월단오를 앞두고는 가족들에 의해 묘소에 《시인 윤동주지묘》비석이 세워졌다. 유고 31편으로 된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시》가 서울에서 출판된것은 1948년 1월이였다. 윤동주사망 10돐때는 또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시인의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다시묶어 같은 표제로 책을 펴냈다. 1968년 11월에는 한국 연세대학교 학생회와 문단친지들에 의해 연희전문시절 기숙사앞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하나 윤동주시인의 고향인 연변에서는 시인의 이름도 몰랐고 시도 몰랐고 묘소도 몰랐다. 1985년 5월, 윤동주시인연구에 조예가 깊은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권철선생의 안내하에 룡정에 나타나서야 룡정중학교 원로 력사교원 한생철선생의 도움으로 룡정 동산의 그리스도공동묘지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윤동주묘소는 국내외손님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떠올랐고 윤동주연구가 전에없이 활기를 띠여왔다. 1992년에 룡정중학교 대성중학 옛터앞에 윤동주시비가 일어선 뒤를 이어 1994년 8월에는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가을비가 잔잔히 내렸던 지난 9월 9일, 필자는 그제날 대성중학옛터—룡정중학교에 달려가 복원된 대성중학건물 2층에 박물관처럼 꾸려진 《룡정중학력사전시관》을 돌아보았다. 전시관에는 저항시인이며 고향시인인 윤동주의 생전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고 옛터 정문 왼쪽가에는 윤동주서시를 새긴 윤동주시비가 필자를 부르고있었다.
벌써 수차되는 걸음이였다. 윤동주묘소도, 윤동주생가도 수차 찾아보았다. 찾을 때마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윤동주고향시인의 유적지들이였다. 9월 9일 답사도 그러했다.
윤동주생가를 찾으면 선참 맞아주는것이 룡정—삼합행 룡북선 도료표식 15킬로메터가에 일어선 “윤동주생가”란 커다란 돌비석이다. 이곳에서 길을 내리면 신작로아래 복원된 명동교회옛터와 교회당남쪽가에 우뚝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소리없이 반겨맞는다. 300여년의 나이(?)를 가졌다는 고목—비술나무를 보노라니 어린시절 교회당과 우람진나무우에 올려진 교회당종각을 보며 뛰놀았다는 윤동주소년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드는것만 같았다.
교회당을 지나면 교회당 서북가에 자리잡은 윤동주생가가 보인다. 이 생가가 1994년에 복원되였다는 생가인데 생가집안에는 조선족의 가마며 물독이며 그릇들이 그대로 진렬되여 옛기분속에 빠져들게 한다.
생가 오른쪽가에는 “윤동주생가옛터”석비가 세워져 손님들을 부른다. 석비비문은 이러했다.

시인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로 된 집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력사적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정부와 룡정시문련은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유물로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신향인민정부
룡정시 문학예술계련합회

그때로부터 옹근 10년세월이 흘렀지만 복원된 윤동주생가와 무너져내린 우물터, 주위환경은 여전했다. 지난 10년간 명동과 생가를 찾은 국내외손님들이 얼마인지는 알아보지 않았지만 가을비도 마다하고 한국손님과 여기 안내자들을 실은 하이야 한대가 선행한 상태였다. 여러명은 잘되였는데 귀로시 또 택시 한대가 옛 교회당과 윤동주생가 옛 터에 들어섰다. 이름난 관광명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시각사진이였다.
생애 28년의 꼭 절반을 명동에서 보낸 윤동주시인, 시인은 정녕 일제치하기, 연변이 낳은 조선족 시인이요 세계적인 시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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