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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1)ㅡ리욱 김창걸 우리 문학 시조인가?
2006년 01월 26일 00시 00분  조회:2973  추천:76  작성자: 리함
리욱 김창걸 우리 문학 시조인가?

리 함

1. 머리말

지난 몇달사이 우리 글로 된 연변의 한 신문에 저명한 향토작가 리욱선생을 조선족문학의 시조로 평가하여 쓴 글이 실린바 있다. 평론가도, 연구가도 아닌 분이 쓴 글이여서 일시 착각이겠다고 보면서 의견을 나눠보았는데 그후 여러 글들에는 리욱, 김창걸 등 향토작가를 조선족문학의 시원으로, 시조로 보는 견해가 가끔 보이였다. 이때에야 필자는 이는 우연한 사실, 우연한 실수가 아닌, 우리 학계의 한부류 견해임을 접히고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리욱, 김창걸 선생을 어찌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시조로 볼수 있을가, 이는 우리 조선족문학사의 갈피갈피를 펼치면 쉽사리 알수있는 문제이다.

2. 리욱, 김창걸의 첫 작품

지난시기 우리 문단의 실수로 1936년에 창작되였다는 김창걸선생의 이른바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보면서 선생의 창작생애를 1936년으로 잡고 기념활동을 벌리는 희극성적 오류가 있었다. 사실 알고보면 “무빈골전설”은 1936년 발표작이 아니다. 1936년 그해부터 김창걸선생은 약 3년간 노트에 “무빈골전설” 등 습작품을 적어 보았는데 그나마 이 노트가 썩후에 분실되여 그때 습작품을 찾을바 없었다. 1981년에 김창걸선생은 료녕인민출판사에 의해 “김창걸단편소설선집” (해방전 편) 을 무을 때 할수없이 1936년에 노트에 써보았다는 “무빈골전설”을 회상에 의해 재창작할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창작과정을 김창걸선생은 대학재학시절 필자의 취재시에 상세히 들려주었는데 그래서 처음 지상에 발표한것이 1982년이다. 헌데 문단의 일부 평론가, 학자들은 이를 “김창걸단편소설선집”에 1936년으로 적었다 하여 1936년으로 시인하면서 처녀작으로 보고 기념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단한 실수가 아닐수 없다. 이로부터 보면 저명한 향토작가 김창걸선생을 조선족소설문학사의 시원을 열어놓은 시조로 볼수 없음을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하다면 리욱선생의 첫 작품—서정시 “생명의 례물”은 어떤가? 이는 1924년에 당시 지방신문 “간도일보”에 발표된 시라고 할때 우리 문학사 시원문제에서 역시 문제점을 안고있다.
시인이고 조선족문학평론가인 전국권선생은 1989년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조선족문학연구”의 “리욱론”에서 리욱은 “독특한 시풍격을 가진 시인”이고 “조선족의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의 정초자의 한사람”이며 “민족문단의 ‘시혼’”이라고 평가①한바 있다. 필자는, 이는 리욱선생에 대한 타당한 평가로서 응당 이러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전국권선생은 “리욱론”에서 리욱선생을 “조선족의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의 정초자의 한 사람”이라고 했지 시조라고는 하지 않았다. 왜서? 리욱선생의 첫 작품—“생명의 례물”은 1924년 발표작이기 때문이다. 광복후 중국조선족으로 남은 향토작가만을 론할 때 이 서정시는 광복후 현존작가로 말해 시원을 열어놓은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전반 조선족문학사를 들여다보면 1924년은 가장 이른 시기로 될수가 없다. 1928년 신춘호 “별나라”에 발표된 채택룡선생의 동요 “어린 동생”②도 조선족아동문학사의 시원으로 될수는 있어도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될수없은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3. 김택영, 신정, 신채호 등의 작품

우에서 필자는 리욱, 김창걸 선생의 첫 작품들은 조선족문학사의 시원을 열어놓은 시조로 될수없다고 지적하였다. 원인은 간단하다. 이는 리욱, 김창걸 선생에 앞선 선배님들이 이미 조선족문학사의 시원을 열어놓은데 기원된다.
중국조선족문학사를 돌이켜보면 학계에서는 19세기로 거스르는 이주초기에 이미 문학창작활동이 있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작품들을 거의 찾을 길이 없”③기에 20세기에 들어선후의 조선족문학창작에서는 시가문학을 언급하고있다. 시가문학에서도 가장 활약스러운것은 창가창작이다. 불행은 이런 창가창작품들도 오랜 력사의 흐름속에서 전해지지 못하고 실전되여 “근근히 근간에 수집된 자료에 의거하여 당시 창가창작의 일단을 보는수밖에 없다.”④ 이 시기에 창작된 “학도가”, “권학가”. “수업가” 등이 그러한데 그나마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거의 알수가 없는 실정이다. 알리는것은 김택영, 신정, 신채호 등 저명한 문학가거나 반일지사들의 한문시, 시조나 자유시를 례로 들수가 있다.
(1) 김택영(1850~1927)
창강으로 불려지는 김택영은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20년대까지 줄기찬 활동을 펼친 항일독립운동가이고 계몽사상가이며 탁월한 조선족문호이다. 그는 1850년 경기도 개성부 출신이고 서울 성균시 초시 합격자로서 어려서부터 시적재능을 보여준 위인이다. 그러다가 1905년에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중국적에 가입했는데 그의 시문은 당대 중국사람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학문과 시재는 청말의 계몽사상가들인 강유위, 량계초에 비했다고 하니 과시 김택영의 위인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학계연구에 따르면 창강 김택영은 일생에 시, 산문, 력사, 철학, 미학 저작 등 30여종, 100여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량의 저서를 남겨놓았다고 한다. 한문시로 창작된 시만도 1100여수에 달했다⑤고 하니 그의 대부분 시는 중국에 이주한후 창작한 작품들이다. 그중 1909년에 창작한 시—“의병장 안중근이 나라 원쑤를 갚았다는 말을 듣고”를 보기로 하자.

평안도 장사 한사람
두눈 부릅뜨고 뛰여나왔다
마치도 양새끼를 찔러죽이듯
나라의 원쑤놈 통쾌하게 죽였다

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이 좋은 소식을 듣게 되였구나
한창 만발한 국화꽃곁에서
미친듯 노래하고 기뻐 춤추노라

보는바와 같이 김택영은 이 시에서 1909년 10월 할빈역두에서 일제침략자의 원흉 이등박문을 쏘아죽인 안중근의사를 격조높이 찬양하고있다. 뿐아니라 창작년대가 1909년이라는것은 우리의 시선을 끌기에 족하다. 이 작품만 보아도 리욱의 1924년 첫 창작품에 비하면 김택영은 너무도 이른 선배님이고 작품은 너무도 이른 시기의 창작품이다.
(2) 신정(1879~1922)
신정은 원명이 신규식이고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항일독립운동가이고 자산계급민주혁명의 선행자이며 저명한 조선족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1879년 충청북도 문의군 출신이지만 1911년 봄에 진리를 찾아 중국으로 왔고 중국자산계급혁명단체 동맹회에 가입, 그해 10월에 손중산선생을 따라 천지를 진감한 무창봉기에 참가했다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신정은 또 중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자산계급문학단체 “남사”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상해림시정부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한 위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정의 문학작품은 장평정론 “통언”과 시집 “아목루”⑥인데 신정탄생 60주기에 기하여 중경에서 출판된 이 시집에는 1910년부터 1922년까지 창작한 140여수의 률시와 산문들이 한문시로 수록되여있다. 그중 두수를 보면 아래와 같다.

서울 떠나 어언간 삼천리
해질무렵 연경에서 옛친구 만났구나
중화의 희소식 정말인지
눈물겨워 오래동안 말못하였네
—“연경에 이르러” (신해혁명 전야에 쓴 시 한절)

공화의 새 일월에
천지가 개벽했네
사해의 만백성 행복을 누리며
천대만대 모셔가세 중산선생을
—“손중산대통령을 축하하여”

이 두수의 시에서 신정은 신해혁명전야의 “희소식”, 무너져가는 청조봉건통치를 “해질무렵 연경”에 비유했다면 신해혁명후 중화민국림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손중산선생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여기에서도 시선을 모으는것은 이 두수의 시는 1911년, 1912년에 창작된 시라는 점이다. 이를 1924년 리욱의 시에 비하면 역시 너무도 이른 시기의 시창작품이다. 특기할것은 신정 역시 중국에 온후 중국적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민족은 조선민족이지만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였다.
(3) 신채호(1880~1936)
다 알다싶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족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탁월한 력사학가이며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문학만을 론해도 신채호는 9살에 벌써 한시를 곧잘 지은 신동으로서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훈도아래 10여살 때 행시(行詩)까지 척척 지어낸 천재시인이였다.
일찍 신채호는 “황성신문”의 론설위원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울라지보스또크 “권업신문”의 주필, 상해 주간신문 “신대한”의 주필로, 시초 상해림시정부 림시의정원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2월, 려순감옥에서 옥사했는데 전 생애에 걸쳐 숱한 문화유산을 남기였다. 그중 문학창작만해도 발표되지 않은 유고까지 하여 정론, 수필, 평론, 소설, 사화, 시가 등 무려 100여만자가 된다.
시가창작중 1910년 압록강을 건느면서 지은시 “한나라 생각”은 이러하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사랑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피덩어리가
줄줄 흘러내려오리라
한주먹 텁석 그 피를 쥐여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여서
봄 맞이 하리!

그야말로 고국에 대한 솟구치는 격정을 그대로 드러낸 서정시이다. 주목되는것은 김택영, 신정과 마찬가지로 이 시 역시 1910년 창작품이라는 점, 다른점은 한문시 아닌 우리 글로 된 시라는 것, 신채호는 중국땅에서 적잖은 한문시도 썼다고 하나 지금 찾을수 있는것은 20편도 안된다고 한다. ⑦
이밖에 신채호는 산문, 소설창작에서도 휘황한 성취를 거두었는데 소설창작의 리정표로 되는 대표작은 1916년에 지은 단편소설 “꿈하늘”과 1927년에 지은 “룡과 룡의 대격전”이다.⑧ 20여년전 대학졸업론문준비로 연변대학도서관에서 조선의 해당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뒤지던 중 신채호의 소설 “꿈하늘”과 “룡과 룡의 대격전”을 찾아내고 복사하고 기뻐하던 일이 어제런듯 하다. 권철 등 교수님들이 연변대도서관에 이 작품들이 있은줄 몰랐다던 일도 어제런듯 하다. 이와 같이 중국경내에서의 신채호의 소설창작은 1910년 봄에 중국으로 온후로 거스른다.

4. 리욱, 김창걸은 조선족문학의 시조로 될수 없어

우에서 필자는 작가로 보는 김택영, 신정, 신채호를 실례로 들면서 실례를 든 중국경내의 그들의 문학창작만 해도 1910년~1911년으로 거스러오름을 돌이켜보았다. 비록 이들은 리욱, 김창걸선생과 같이 우리의 향토작가라고 부를수는 없어도 조선족문학사를 빛내는 당당한 작가인것만은 틀림없다. 그 리유는 김택영, 신정이 중국에 온후 중국적에 가입했고 중국에서 사망했으며 신채호 역시 중국서 반일활동, 문필활동을 하다가 려순감옥에서 옥사한데 기인된다.
중국의 조선족을 두고 명문 아닌 “명문”규정이 있다. 한두마디로 말해, 광복전에 중국적에 가입했거나 광복전후에 중국땅에 쓰러졌거나 사망한 분들은 모두 중국의 조선족으로 취급하기로 되여있다. 력사나 문학 학계에서 모두 그러하다.
이로부터 보면 김택영, 신정, 신채호 등은 당당한 우리 조선족이고 조선족작가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문학창작품도 중국의 조선족문학사의 한부분, 그 작품이 우리 글로 되였건, 한문체로 되였건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문학유산으로 길이 남을것이다. 하기에 조선족문학사, 학계에서는 김택영, 신정, 신채호를 우리 작가로 취급하고 우리 문학사에서 대서특서한다. 광복전 우리 민족은 2중성을 갖고 있는 전반 조선민족의 한부분이기에 조선이나 한국에서 자기 작가, 자기 문학사로 취급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면 김택영 등 선배님들의 후배들인 리욱, 김창걸 선생은 저명한 조선족향토작가로 칭송되여도 조선족문학의 시조로 될수 없다는것을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5. 맺음말

본고에서 보여주고자 함은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시원은 지난 30년대 중반 룡정에서 활동한 북향회도 아니고 그 전후시기에 걸쳐 활동한 리욱, 김창걸 선생도 아니라는 견해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지금까지 문학작품으로 보아 작가로 보는 조선족문학사의 시원과 시조는 김택영, 신정, 신채호 등 선구자들을 선참 곱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굳이 리욱, 김창걸 선생을 시조로 한다면 우리 조선족문학사는 10년대도 아닌 20년대에서 동강나고 말것이다.


주해:
①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6, 제247페지.
② 문학과 예술, 1999년 2호, 제29페지.
③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6, 제8페지.
④ 우와 같음.
⑤ 우와 같음, 제189페지.
⑥ 우와 같음, 제 214~215페지.
⑦ 우와 같음, 제339페지.
⑧ 조성일 권철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7, 제160페지.

200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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