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에 살면서 그 주변과 외곽세계를 모른다는것은 유감이 아닐수 없다. 연길분지의 북부와 서북부를 가로 지른 평봉산과 그 이음산인 병풍산이 그러하다. 이럴 때 연우산악회에서 평봉산, 병풍산을 등산한다고 하니 나는 무척이나 기쁨에 들떴다. 12월 3일, 눈내린 뒤의 바깥세계는 어딜 보나 눈속세계. 아침 8시 연길시 공원다리 서쪽가에서 25번중형뻐스를 잡아타고 종점에서 내리니 원 연집향 대암 8대다. 연길~도문구간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10여리는 잘 되는것 같았는데 대암골에 첫발을 들여놓는 나로서는 모든것이 신나기만 했다. 대암8대 뻐스정류소에서 일행을 점검하니 도합 남녀 10명이다. 그들로는 연우산악회 회원들인 리경호씨, 김수영씨, 박춘실씨, 김삼씨, 리용남씨, 리화씨, 송문자씨에 새로 가담하는 공원소학교의 리희란씨, 지방세무국의 조미선씨 그리고 필자. 금방 마을을 벗어났는데 이 고장에 익숙해보이는 송문자씨가 저기 북쪽 산밑에 불교사원이 있다고 말꼭지를 뗐다. 연길시 북쪽 변두리에 연변최대의 불교사원이 일떠선다더니 대암골 어디인지는 딱히 모르는 일행들이였다. 벌써부터 맘이 들뜬 일행은 마을 서쪽골 등산코스를 대암 마지막 마을 뒤 북쪽골로 바꾸었다. 눈온뒤의 맵짠 추위는 얼굴을 베어갈듯 기승을 부리였다. 그래도 스적스적 걷기만 하는데 처음에는 민둥산을 방불케하는 주변산들과 그 기슭들이 스산하기만 하더니 그게 아니였다. 몇리길을 조여 산밑에 대이니 참나무 등으로 쫘악 덮친 산천은 별유세계였다. 그런 골안어구에 집몇채와 함께 허물어져가는 우리식 가옥한채가 일행의 발목을 잡았다. 보매 광복전의 옛집 같았다. 김삼씨는 그런 모습을 사진렌즈에 담았다. 후날 그 어느때일가, 이 고장 기념이 될만한 사진이였다. 이곳에서 골안은 왼쪽 서쪽골과 오른쪽 북쪽골로 갈라졌다. 오른쪽 북쪽골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골안어구에 림시로 만든 산문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서니 《연변대각사(大覺寺)》라고 쓴 글발과 한자로 된 커다란 불(佛)자가 시선에 잡혀왔다. 이제부터 대각사—불교사당구역이다. 산문 뒤 왼쪽가는 산발따라 이미 굉장한 터전을 잡아놓았는데 그 밑에 기다란 단층집이 보이였다. 집지기는 리씨성을 가진 60대미만의 어른이였는데 몸도 녹일겸 휴식하는사이 대각사의 래력과 그 건설전망얘기를 듣게 되였다. 연변 최대의 불교사찰로 일어설 그 전망이 눈앞이였다. 아직 산밑터전에 단층집하나를 달랑 가진 현실이지만 지난 8월에 이미 정초식을 가진 상태였다. 리씨어른은 우리를 언덕우의 불교사찰터로 안내하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이제 인민페 3억이 투자된다는 이곳 불교사찰은 이미 산기슭을 깎아 터를 닦았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아늑한 산속이라는것을 알수가 있었다. 멀리 하늘가 모아산이 정남쪽에 위치했고 서남쪽 산기슭엔 소나무들이 가득하였다. 소나무는 영원불변과 장생불로의 상징이라더니 곧 일어설 대각사에 정기를 더해줄것은 기정사실이였다. 송문자씨께 감사한 마음이다. 문자씨의 덕분에 불교사찰—대각사터를 돌아보게 된 우리 일행은 리씨어른과 작별하고 숫눈길을 헤치며 석인골이 보인다는 뒤산 산정에 올랐다. 북쪽산아래 석인골은 서남쪽으로 깊이깊이 뻗었는데 이골따라 들어가면 지난 30년대초반 연변의 항일근거지의 하나로 이름난 연길현 팔구항일유격근거지에 이르게 된다. 력사를 알면 그 산에 대한 느낌이 다르게 느껴진다. 대각사에 이어 접하게 된 팔구항일유격근거지를 지척에 두니 모든것이 정답기만 하다. 우리 일행은 자연과 력사문화가 어우러진 산야를 걷고 있었다. 눈덮인 산발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니 정다운 느낌은 한결 짙어만 갔다. 몇리 산등성이를 조이니 저 앞에 자그마한 바위산이 나타났다. 바위산을 넘으니 그 다음 구간부터는 연해연방 바위돌들인데 바위돌은 인위적으로 쌓아놓은 산성이런듯 산발을 쭈욱 주름잡았다. 남쪽과 북쪽은 경사도가 급한 산비탈이라 옛산성 갔다는 느낌이 보다 강하게 안겨들었다. 인위적산성은 아니더라도 자연적산성을 이어놓으면 난공불락의 요새로는 안성맞춤이였다. 또 북쪽이 깎아지른듯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남쪽이 무너져내린 바위돌들이여서 그 사이사이를 누비니 탄성이 절로 났다. 한발만 잘못디뎌도 바위산아래 굴러떨어질수 있는 구간구간들이 연달아 왔다가는 저뒤로 사라지군 했다. 김삼씨는 이 시각을 놓칠세라 디지털사진기에 담고 또 담았다. 그래도 옛산성이 아닐가하는 느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남북 량쪽기슭에 무너져내려 쌓여진 돌덩이들이 이런 느낌에 부채질했다. 생각밖으로 다닥친 바위산, 바위돌들 풍경이라 미처 예비지식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한식경이나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하긴 부질없는 느낌만이 아니였다. 몇리나 뻗어나간 바위산, 바위돌 산등성이구간을 지나니 가파른 산등성이가 사라지면서 아득한 산정벌이 이어선다. 리경호씨는 여기를 평봉산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그말과 같이 사방에 눈주어도 나무숲으로 덮힌 평탄한 산정벌이고 이 산정벌 남쪽은 여러 군데가 등골이 오싹해나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산정벌을 또 몇리 줄이다가 산봉을 이룬 두 낭떠러지 사이홈을 따라 나무숲을 내리헤치는데 가로지르며 무너져 내린 바위돌들이 앞을 막아섰다. 눈에 묻혀버린세계라 별생각이 없이 바위돌우를 걸어지나는데 김삼씨가 소리질렀다. 《리선생, 그저 지나칠 돌무지가 아닌데요?!》 《?》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필자는 와뜰 놀랐다. 정말이지 순간적으로 숨이 척 멈추어서는 기분이였다. 아래쪽을 보니 인위적 축조가 선명히 안겨들었으니 말이다. 《아니, 이거 고구려시기 석성(石城)으로 알려지는 <천리장성>이 아닌가!》 급기야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돌무지는 모두가 무너져내린채 좌우로 수십메터나 뻗었는데 석성의 너비는 2메터를 넘기지 않아 보이였다. 나무숲속에 잔나무가 꽉 서린데서 그 이상 더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북동쪽으로 뻗은 석성은 두산사이 골안 물홈에 이르러 동강났다. 다시 돌아와 그 높이가 한메터도 넘는 석성아래구간에서 제각기 기념사진을 남기는 필자와 김삼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행한 리경호씨도 그 흥분속에 젖어들었다. 력사속에 깊숙히 빠져들며 자연과 하나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우리 일행이 이미 산기슭아래로 사라진데서 더 이상 지체할수가 없었다. 민가의 점심참이 기다리는판이라 산을 내려야 했지만 생각은 저 웃쪽 두 바위산사이 석성에로 가 있었다. 때는 점심 12시와 1시 사이였다. 귀가후 집에 들어서기바쁘게 《연변문물휘편》(한어문)을 펼쳐든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만 싶은 심경이였다. 고대문물편 제5장 고구려시기 제2절 제5부분에는 과연 《옛 <장성>유적》조목이 적혀있었는데 천리장성이라 일컿는 장성은 화룡시 원 토산진 동산촌 동산에서 시작하여 화룡시 서성, 룡문 구간을 거쳐 룡정시 세린하, 로투구, 동불사, 팔도 그리고 연길시의 연집, 도문시의 장안진 계림북산에 이르면서 지금의 연길시 북쪽 산등성이에 수백메터구간의 석성을 남겨놓았다니 그럴만도 했다. 필자는 다시 대학동창인 류연산씨가 쓴 기행문 《연변의 고구려 산성》을 펼쳐들었다. 2003년 《연변문학》5호와 6호에 실린 련속기행인데 천리장성에 관한 해당자료연구와 현지답사를 결부하여 쓴 기행이여서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그중 한단락은 이러했다.
《연집 대암촌에서 북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 장성을 대암옛장성이라고 한다. 지금도 병풍산 동쪽 끝에서부터 동쪽의 돌벼랑사이의 산어구의 남측에는 300메터길이의 석성이있다. 그 넓이는 1.8메터, 남아있는 높이는 0.7~0.8메터이다. 돌벼랑의 동쪽으로부터 동남으로 방향을 꺽어서 소연길하골의 서쪽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은 대개 흙으로 쌓은 것인데 그 길이는 5리나되는데 보이는 곳도 있고 전혀 흔적이 없는곳도 있다.》
그럼 이 장성은 고대 어느시기의 창조물인가, 이를 두고 《연변문물휘편》은 옛장성의 년대문제는 학계의 설법이 서로 다르다면서 고구려시기 설, 발해시기 설, 동하국시기 설, 고려조시기 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편집진은《고구려 통치시기》로 잡는다면서 그 근거들을 내놓았다. 또, 이 책에서는 옛 장성은 화룡시 원 토산진구간부터 도문사 장안진 구간까지 길이 100여킬로메터고 훈춘시 경내의 옛장성과 이어졌는지는 보더 더 깊은 조사와 연구가 있어야겠다고 했다. 1988년까지의 연구결과이다. 했으나 류연산씨는 화룡시, 연길시, 도문시구간의 옛장성이 훈춘시 옛 장성과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옛장성에 관계되는 해당자료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현지답사를 거쳐 내린 주장이였다. 력사학자인 필자는 류연산씨의 주장에 동조되였다. 전공이 고대력사분야는 아니더라도 이면에도 흥취를 갖고 많은 책과 자료들을 보며, 현지답사를 하며 일가견을 가진 필자였다. 연길시 북쪽외곽으로 되는 대암의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걷노라면 사방이 환히 펼쳐진다. 산구인 서북쪽과 북동쪽 구간은 그만두고라도 구릉지대로 되여있는 동서 남쪽구간에 시선을 던지면 옛장성의 좌우량측에 수십자리의 돈대(墩坮)가 세워져 료망대나 봉화대로 쓰이였다는것이 실감나게 안기여든다. 대암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돈대만 해도 연길시 주변의 구릉지대에 우뚝 솟은 동쪽 저 멀리의 청차관(清茶馆) 돈대, 모아산 돈대, 의란진 동흥촌 구간의 대돈대를 들수 있는데 연길시 공원의 서쪽 정자자리 소돈대는 직접 한눈에 볼수 없을 뿐이다. 필자일행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는 이렇듯 고구려 시기 옛 장성과 그에 속한 옛 돈대도 갖고있는 력사와 문화가 유구한 고장이다. 누군가 중국의 명산—태산에서는 살아움직이는 력사를 만날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 연길시 외곽산들인 평봉산은 물론 곳곳에 루루 2000년을 자랑하며 살아숨쉬는 력사를 만날수 있으니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그 시각이 좋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속에 존재해왔다는것을 느끼는 그 시각시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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