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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여행(11)-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
2005년 12월 18일 00시 00분  조회:3488  추천:74  작성자: 리함
내 고향 여행(11)
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


리 함

연길시 서쪽교외에는 남북으로 쭈욱 뻗은 와룡동이라는 골안이 있다. 이곳 와룡동은 지난세기 10년대 연변 최초 4대중학의 하나인 창동학원이 자리잡았던 곳이고 중외를 들썽한 15만원탈취거사가 처음 획책된 곳이여서 벌써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청차관산행에 이어 연우산악회가 잡은 코스가 와룡동이다.
12월 17일 토요일. 이날도 바깥 날씨는 혹독하리만치 추웠다. 하루 이틀간은 찬 날씨가 누그러지는 기세같더니만 그게 아니였다. 청차관 산행일에 못지 않은 차디찬 날씨다. 했으나 연우산악회의 기본성원들은 아침 8시에 시안의 공원뻐스정류소에 어김없이 모여 다가오는 37선 중형뻐스를 잡아 탔고 서쪽으로 10리쯤 가다가 원 시 건축재료공장 정류소에서 내리였다.
이제부터는 와룡동으로 향한 북행도보길이다. 골안 첫 어구는 연길시 원 소영향 민흥촌 본부가 자리잡았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상 소영진 민주촌에 통합되여 민주촌으로 불리였다 지난 5월 20일에 작가 김혁씨와 함께 와룡동을 찾을 떄는 여기저기 노오란 민들레꽃이 피여나고 배나무꽃 만발한 화창한 계절이더니 계절이 바뀐 지금에는 골안에서 불어나오는 매서운 하늬바람이 아삭아삭 옷속까지 파고든다.
골안어구를 지나 몇리 길 조여 원 민흥촌 3대구역 (민주촌 9대)에 들어서니 앞에서 걷고있던 김수영씨가 길 오른쪽 언덕으로 발길을 돌린다. 뒤미처야 우리는 마을가 언덕 사과배나무들에 숱한 배들이 그대로 주렁주렁 달리여 있다는것을 보아냈다. 흔치않은 겨울날의 사과배 풍경이였다. 김수영씨와 뒤따른 리용남씨가 한창내기 어린애들인양 나무가지를 주어들고 겨울배를 떨어뜨린다. 그러는 그들이 우스워 일행은 때아닌 웃음판을 벌리였다. 그 웃음속에서 혹독한 추위가 다 잊혀진다. 김삼씨는 마을어구 길가에 세워진 와룡동 지명표시패를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3대구역을 벗어나니 본격적인 와룡동마을이다. 약 40세대를 웃도는 아담한 시골마을이 겨울날의 또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선다. 민흥촌 4대구역인데 지금은 소영진 민주촌 10대로 통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을어구에서 오른쪽으로 굽어들며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최봉설의 옛집을 향했다. 최봉설이라면 당년 1920년 1월, 룡정 재박골 15만원탈취거사 6명중의 일원으로서 간도국민회소속 철혈광복단 성원이였는데 바로 이 옛집에서 15만원 탈취거사를 짜고들었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덧 거의 허물어져가는 찌든 옛집가에 서 있었다. 집터의 엉성한 마른 풀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김삼씨와 리경호씨는 디지털사진기 샤타를 부지런히 눌러댔다. 세월속에 곧 사라질 옛집을 사진속에라도 남기겠다는 고마운 소행이였다.
바로 그 시각 필자는 일행 6명한테 와룡동에 깃든 유서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와룡동이 살길을 찾아온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되기 시작한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990년에 필자가 민흥 4대 출신인 윤희섭씨를 만났을 때 윤씨는 자기 선조들은 와룡동 개척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할아버지 윤형보 때부터 따져도 100년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와룡동의 개척은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다. 어림짐작해도 19세기 70~80년대로 거스러 오른다.
지난 5월 20일 필자는 김혁씨와 더불어 와룡동을 찾았을 때 길가의 한켠에 자리잡은 새 벽돌가옥의 주인—윤희섭로인을 찾았었다. 1990년에 만났을 때는 50대의 중년이더니 15년후에 다시 만난 윤씨는 68살의 로인으로 필자한테 나타났다. 안로인 차순옥씨도 같은 나이 68살, 그때도 윤희섭씨는 조상들이 조선서 와룡동골안에 이주한후 그자리에서 나무를 베여 귀틀집을 짓고 살았다고 터놓았다. 후에 한세대, 두세대로 모여들면서 100여세대로 늘어나고 1908년에 창동소학교까지 일어서게 되였다는것, 중학부까지 설치되여 《창동학원》으로 불리운것은 1912년.
최봉설투사의 옛집, 바로 100여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는 이 옛초가팔간집에서 최봉설은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바로 이 집에서 피로써 독립항쟁의 기치를 든 철혈광복단(1914년)에 참가했다. 15만원탈취거사의 6명중의 하나인 림국정도 조선함흥출신으로서 이 집에 류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었다.
일행은 필자의 개략적은 소개에 귀를 기울리다가 유서깊은 최봉설의 옛집을 친히 보았다는것만도 행운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는 일행을 보노라니 마음이 한없이 후더워났다. 유감이라면 지난해 연변일보 김철호기자가 허물어져가는 이 옛집을 기사화하여 사진까지 곁들며 호소하였는데도 아무런 보호대책이 없다는 것이라 할가.
그런 마음에 휩싸이며 일행은 마을 동쪽가 골안바위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터를 찾았다. 샘물가는 잘 정리되여 비닐관을 통해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날 마을사람들이 마시던 샘물이고 어린시절 최봉설 또래들이 뛰놀았던 샘물터이고 보니 마음은 력사의 언덕을 넘어 그 세월에로 뛰였다. 김수영씨가 고뿌에 물을 담아 일행 모두에게 건네고 김삼씨가 이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
일행은 발길을 다시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로 돌리였다. 사은기념비는 이곳 마을뒤 북쪽언덕가에 세워졌는데 비석의 높이는 1.8메터이고 너비는 0.5메터며 꼭대기에는 조선 8각 기와집모양의 운각이 씌여있었다. 비석정면에는 《사은기념비》라는 한자글발이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사립창동중학이라고 가로쓴 글과 그 글아래 력대원장들과 교원들의 이름, 학원창립경과와 시간이 새겨졌다. 비석좌우면에 새겨진 글을 보니 이 비석은 12명의 유지들이 1935년 9월 12일에 세운 것이였다. 이 사은기념비는 2003년 6월 연길시 민주소학교, 민주촌 촌민위원회, 문물관리소의 주선으로 수건되여 정히 보존되여 있었다.
골안의 막바지 가까이에 선 우리 일행의 시야에는 와룡동의 전경이 물결처럼 안겨들었다. 와룡동은 동, 북, 서 삼면이 구릉언덕에 둘러막히고 남쪽이 조금 열렸는데 그 길이는 어구부터 막바지까지 거의 5킬로메터는 실히 될것 같았다. 골안지형은 룡이 서리고 누워있는것 같다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 불리였다고 한다.
사은기념비 서쪽건너편 언덕 과수밭 평평한 곳이 창동학원 옛터자리로 알려졌다. 그제날 학원은 2층교사였다지만 지금은 그 옛모습 찾아볼수 없고 사은기념비만이 외로이 남아 이땅이 창원학원이 자리잡았던 력사의 고장이였음을 알리고있었다.
연변문학 주필 김삼씨는 오늘 산행이 진짜배기 력사현장답사라고 하면서 연우산악회의 남다른 추구가 틀리지 않는다며 감개에 젖어들었다. 그자리에 있던 리용남씨, 리경호씨, 김수영씨, 리화씨, 송문자씨도 뜻깊은 산행이라고 주고받았다. 한겨울의 추위속을 헤치며 와룡동을 찾은 그네들이 돋보이기만 했다. 그러니 몇달전 작가 김혁씨와 함께 사은기념비에서 와룡동을 일별하며 감회에 젖던 때가 재다시 상기되였다.
이제 남은것은 1920년 10월의 일제놈들의 경신년대토벌에서 쓰러진 정기선투사의 추모비였다. 이 추모비는 골안 남쪽어구에서 올라오다가 원 3대구역 오른쪽 언덕에 위치했기에 일행은 이곳 언덕을 가로 지르기로 했다.
와룡동 마을 동쪽가 샘물터를 질러 남쪽언덕에 오르니 리씨라고 부르는 한 조선족녀인이 길다란 온실에 씌운 이불덮개들을 벗기고 있엇다. 알고보니 땅을 파고 만든 온실은 느타리버섯온실이였다. 호기심이 동해 녀인따라 온실안에 들어가보니 두어메터 너비를 가진 길다란 땅속 온실안 량켠은 느타리균종덩어리들이 차례로 쌓이였는데 그 균종덩어리에서 느타리버섯이 자라났다. 겨울이여서 생장이 더디다지만 넘길때에는 한 킬로그람당 인민페 3원이라고 보니 집주위의 온실까지 합치면 일년수입은 인민페 몇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해볼만한 치부항목이였다. 부유에로 달리는 와룡동의 래일이 느타리온실에서도 느껴지는 시각이였다.
느타리버섯온실을 벗어나니 너비 10여메터가 훨씬넘는 골짜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골짜기너머는 언덕받이 이깔나무와 소나무밭이다. 마침 무슨 선로인가 늘이느라고 나무를 찍어만든 오솔길이 곧추 남으로 수림속을 꿰질러있었다. 그통에 우리는 바람없는 아늑한 공간속으로 곧추 원 민흥3대 동쪽언덕에 세워진 정기선투사 추모비에 이를수 있었다.
묘소가 없는 흰 화강암 돌비석 정면에는 《석천거사 정기선추모비(石泉居士郑基善追慕碑)》 한자글이 새겨지고 비석 뒤면에는 비석을 세운 친속들의 이름과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비석 왼켠의 글로 보아 이 추모비는 1940년 4월 5일에 세운것으로 나타났다.
해당력사자료에 따르면 1920년 10월, 연변조선족집거구늘에서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한 일제침략자들은 간도국민회의 주축을 이루는 룡정 남쪽 15킬로메터의 명동, 개산툰 자동의 정동, 소영자 광성, 와룡동 창동 등 4대 중학과 그 고장 반일운동기지들에 대해 보다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1920년 12월 6일, 일제침략군 보병 74련대 이와바시대대는 국자가 서쪽의 와룡동 창동학교에 불을 지르고 반일지사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창동중학교원이고 간도국민회 총부 통신원이며 철혈광복단 단원인 정기선은 권총과 등사기를 파묻고 서쪽 언덕너머 구수하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잔인한 놈들은 끝내 그를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고 두 눈알까지 뽑아내고는 집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그런 투사가 오늘은 추모비속에 남아 경신년대토벌 때 일제놈들 죄행을 단죄하고 있었다. 필자한테서 정기선투사의 최후를 들은 일행은 격분에 치를 떨며 이윽토록 정기선 추모비를 떠날줄 몰랐다.
와룡동, 력사가 그대로 살아숨쉬는 와룡동이었다. 이곳의 최봉설 옛집이며 사은기념비며 샘물터며 정기선추모비는 그제날 항쟁의 력사를 생생히 기록하는 력사의 견증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귀로에서 우리 일행은 정기선추모비 뒤언덕길을 택하였다. 언덕길은 연길시 서쪽 구릉릉선으로서 동서로 곧추 연길공원의 서쪽가 인민경기장까지 뻗어있었다. 5킬로메터는 쉬이 될 구릉릉선 량측은 일매진 원예농장의 대면적 과수밭인데 연길시동서남북 외곽의 중심지대로서 남쪽 저멀리 모아산이며 삼봉산, 마안산 그리고 장성마냥 동쪽을 가로 지른 웅장한 산무리, 북쪽의 평봉산과 청차관, 그 아래 대돈대 연길공원의 소돈대 등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참으로 잊지 못할 산행과 답사의 하루였다. 한겨울 추위도 마다하고 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일행은 앞으로도 등산과 력사의 어우름을 이어가겠다며 눈속길을 헤치고 또 헤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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