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에서 서북쪽으로 20여킬로메터 떨어진 룡정시 원 팔도진 경내에는 그 옛날 고구려장성이 길게길게 뻗어갔는데 그중 한 구간이 쌍봉촌 북쪽언덕으로부터 시작되여 동북쪽 주가골을 지나 동쪽 높은 산 지대로 치달아오른 장성이다. 이 산 구간을 답사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평소 인적이 닿지 못하는, 야산으로 이어진 높은 산 숲속지대여서 홀로 나서기 저어되기도 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미지의 산, 미지의 옛장성구간, 옛장성은 10여리를 내처 뻗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2월 11일 토요일 날, 연우산악회 일행은 미지의 산, 미지의 옛장성 산행답사에 나섰다. 오전 8시 지나 연길서시장을 출발한 팔도행뻐스는 한시간도 안되여 팔도촌 구간을 지나 쌍봉촌에 이르렀는데 일행을 점검하니 옥저님, 상공님, 산신님, 송이님, 뿌리님, 봄빛님, 수정님, 기자님, 서씨님, 신벗님, 샤론님, 두만강님 도합 12명이였다. 쌍봉촌 어구에서 연변 고구려옛장성에 대한 필자의 간단한 소개와 서남쪽 두루봉 북쪽가로 뻗어간 옛장성 소개가 있은 뒤 일행은 쌍봉촌 3~4대 마을을 지나 북쪽 산너머 부암행 골안길에 들어섰다. 수백메터 나아가다가 말라버린 물홈을 지나니 고구려옛장성이 나타나는 마을뒤 동북쪽 산비탈밭이다. 이곳에서 옛장성은 짙은 흔적을 남기며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밭지경에 우둑하게 도드라진 부분이 바로 그 옛날 고구려장성자리였다. 처음 일행은 의아한 눈길들이였으나 산비탈로 뻗어오른 흔적자욱을 보고는 수긍하는 눈치다. 밭지경에서 조금 나아가니 말무덤이 나타났다. 민간에서 일컿는 부름인데 이런 말무덤은 옛장성 남쪽가에 솟아올랐다. 문화대혁명 때던가 무리한 인간들이 저지른 파헤치기 소행에 의해 철제활촉이랑, 말뼈랑 발견된 모양인데 실상 그제날 봉화대 아니면 장성을 지켜선 군사시설물이였을것이다. 말무덤을 지나 이깔나무 밭속으로 뻗은 옛장성은 주가골 북쪽비탈에서 자취를 감춘다. 아마도 이 구간 옛장성을 3~4리는 지나친것 같은데 방향을 동남쪽으로 바꾸어 주가골로 떨어지니 자취를 감춘것으로 나타났다. 일전에 필자가 팔도구간 첫 답사에 나섰을 때 여기에 이르러 돌아서야만 했었다. 《골안너머 저기 동남쪽 산으로 치달아오른 흔적이 보입니까? 저 흔적이 바로 옛장성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필자가 동남쪽 산을 가리키며 말하자 일행은 환성을 질렀다. 그네들의 시야에 옛장성이 고스란히 안겨들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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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단나무ㅡ잡목이 꽈악 들어선 내리막 비탈길이 문제로 나섰다. 일행이 주춤할 때 산신님과 송이님이 선두를 그으며 단나무숲을 헤치더니 비탈을 내린 옛장성흔적이 알린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너도나도 뒤를 이었는데 30~40메터 되여보이는 비탈 옛장성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동쪽가를 파서 토성을 쌓으니 파낸자리는 그대로 홈을 이루고 있었다. 그 홈을 따라 내리는 일행은 비탈이 강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상공님과 기자님, 필자가 뒤에 섰는데 기자님은 좋은 사진화면이라며 상공님과 필자를 련속 사진찍어주었다. 그러는 모습을 필자도 사진렌즈에 담았다. 일행은 주가골에서 동남쪽 산을 바라고 계속 걸음을 재우쳤다. 주가골(朱家沟)이란 쌍봉촌에서 북으로 치우친 동쪽골을 가리킨다. 그제날 주씨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하여 주가골로 불리우는 골이다. 옛장성은 주가골을 지나 산기슭으로 접어들며 너비 7~8메터, 높이 1~2메터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첫 구간에서 수레길이 지나며 장성을 동강내고있었다. 너나없이 옛장성의 단면을 유심히 살피는 모습들이 가슴뜨거이 안겨들었다. 단면구간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비탈이다. 단나무가 서린 이구간 옛장성의 높이는 두어메터를 넘기여 일행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잠간 쉬는사이 서로 서로 장성토성우에 올라보며 옛사람들의 창조물에 감탄을 금치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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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 옛장성은 비탈웃면 남쪽가를 파서 쌓은것으로 나타났다.그런 홈을 따라 산에 오르노라니 일행은 벌써부터 숨들을 헐떡인다. 실팍한 편인 회원들의 얼굴들에서는 땀이 후줄근하여 산비탈 중턱에서 쉬지 않을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아늑한 산속의 숲공간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서로간에 지닌 귤과 사과배, 사과를 내놓으니 산중에서 맛보는 그 맛이 별맛이다. 새로 산악회에 가담한 신벗님과 샤론님은 사과배가 정신난다며 치하를 아끼지 않는다. 연변출신이 아닌 그들로서는 겨울산에서의 사과배가 그리도 시원할수가 없었다. 와중에 누군가 고구려장성의 축조년대를 묻는다. 필자는 연변의 고고학자들은 기원(서기) 4세기 경으로 잡으니 그 력사가 1700년쯤으로 거스른다고 대답했다. 《1700년?!》 일행은 놀라움에 푹 젖어들면서 근 200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이곳 산중에 고구려자성이 그대로 실재한다는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탄복해마지 않는다. 그러면서 신벗님은 고구려장성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뻗어있는가고 물음을 던져온다. 《연변 고고학자들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고구려장성은 지금의 화룡시 원 토산진 동산으로부터 시작하여 화룡, 룡정, 연길 구간을 거쳐 연길시 동쪽의 하룡촌 계림 일대에까지 이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룡시의 원 토산진, 서성진, 룡문향, 룡정시의 원 세린하향, 동불사향, 팔도진, 연길시의 원 연집향, 청차관, 도문시의 장안진 경내를 거치지요. 그 총길이는 근 150킬로메터라고 합니다.》 필자의 설명에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것은 왜 장성을 쌓아야 했느냐였다. 그래서 필자가 오늘의 연변일대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에 북옥저사람들이 살았고 기원전 28년에 고구려에 예속된후 북방으로부터 오는 크나큰 위협인 읍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북옥저사람들을 동원해 쌓았고 그 목적은 군사적방위였다고 해서야 머리를 끄떡이는 그네들이였다. 이에 필자는 고구려장성의 년대는 1700년으로 치달으며 산속에 누워있지만 무인산중인데서 연변의 사학계에서 누구도 답사해보지 못했다, 고고학자들도 모르는 실정이니 우리 모두가 첫 답사자라고 모를 박자 일행은 쉽사리 흥분속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연변의 고고학계 연구성과를 헤아리면 고구려옛장성에 깊이 손을 댄 연변박물관의 원로연구가들인 박룡연, 엄장록 등 선배님들도 이러루한 제원인으로 대부분 구간 답사에 오르지 못했고 쌍봉촌 동쪽구간에 발길을 돌려보지 못한데서 성벽이 잘 보존된 구간의 길이를 고작 4~5리로 잡았다. 벌써 우리가 걸어온 금방 구간만도 근 10리에 달하니 연변고대사연구의 빈구석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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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답사는 계속되고 정상에 가까와질수록 장성홈에도 싸리나무, 개암나무 등 잡목이 무성하여 걸음이 떠져갔다. 인연이 닿지 못하는 산중지대, 고구려 옛 장성은 그 덕을 단단히 입어 오랜 세월속에서 껴져내렸을 뿐 완전한 성벽—토성을 오늘에까지 이어왔다. 잡목지대를 헤쳐가는 우리 앞에는 장성 남쪽가로 병행한 소발구길이 나타났다. 잡목지대에서 해탈되였다고 기뻐하는데 얼마가지 않아 산정상이였다. 말이 정상이지 진짜 정상은 오른쪽으로 한참은 더 가야 했다. 옛장성은 이곳 산등성이를 넘어 비탈길을 내리게 되고 산속의 개활지대를 지나간다. 산행답사에 나서기 전에는 쌍봉촌 주가골을 넘은 옛장성이 동쪽의 높은 산 지대를 오르면서 쌍봉촌과 장신구간의 북쪽산 릉선을 따라 병풍산에 이르는줄로 알았다. 그게 아니였다. 옛장성은 쌍봉~장신 북쪽산 북쪽너머 개활지대를 거쳐 계속 동쪽으로 움직이고있었다. 가슴이 활 트이는것은 여기 개활지대가 동서로 경사진 산속 높은 지대여서 사방이 시원히 안겨드는 것이라 할가. 북쪽산 너머 서남쪽의 팔도촌 북쪽 넉가래령이 시야에 잡혀온다면 연길시 수원지를 이룬 넉가래령 북쪽가의 오도저수지가 서쪽 저 멀리에서 춤추는듯 싶다. 북쪽은 또 어떤가, 연길시 연집쪽에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석인골이 멀지 않고 석인골 서남단을 이룬 서쪽 부암쪽이 멀지 않다. 헌데 발구길이 뻗어내린 이곳 산속의 개활지대가 아수라장이여서 눈살이 찌프려진다. 남쪽 산아래 나무군들이 참나무, 잡목숲을 결단해 살풍경한 모습이 가슴을 허빈다면 발구길이 지나며 옛장성 한 부분을 뭉텅 동강낸것이 더 가슴 아팠다. 그래도 옛장성은 누가 더 이상 자기를 건드리랴싶게 개활지대 동쪽의 산릉선을 지나간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그 다음부터는 또 인연이 별로 닿지 않은 북쪽산 북쪽너머 산비탈 구간인데 어떤 곳의 옛장성은 장성아래쪽 비탈에서 볼 때 그 높이가 무려 2~3메터에 이르고있었다. 신나는 산비탈 구간을 지나니 또 북쪽산 인가쪽으로 뻗쳐오는 오솔길, 발구길이 옛장성을 가로질러 간다. 인연이 닿는 산속 평지 수풀속이여서 옛장성의 잔존 상대높이는 가긍하리만치 최저치를 기록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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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침은 점심시간을 가리키고있다. 산행답사가 시작된지도 두시간을 넘어섰다는 말이 된다. 계속 동행하여 연길쪽 평봉산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남쪽으로 산릉선을 지나 팔도촌 동남쪽 마을가로 내리느냐 하는 문제가 튕겨진 곳도 이곳 산속 평지지대였다. 중도에서 산행답사를 접을수가 없어 평지 동쪽 산지대가 끊기는 곳까지 가보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답사가 다시 이어지는 속에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소중함의 시간이란것이 어떠한 경지인가를 그 시각에야 비로소 깨달은듯 싶었다. 이제 답사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연길쪽 평봉산 언저리에도 가닿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가는데다가 가보고 볼판이다!) 이같이 스스로 위안하면서 길을 재우치는데 산속 평지지대를 지나고 또 하나의 산릉선구간을 지나도 평봉산을 볼수 있는 산지대가 저앞이다. 이럴 때 남북이 확 트인 산릉선 높은 평지가 발목을 잡았다. 꽤나 넓은 공지고 이미 정오 12시를 넘긴 시점이였다. 드디여 아쉬운대로 산행답사를 접기로 했다. 휴식하는 사이 여지껏 보이지 않던 남쪽의 구수하벌이며 동남쪽의 모아산이며 북쪽의 연집방향 뾰족산이며 서남쪽의 남도끼봉, 북도끼봉이며가 모조리 시야에 안겨들었다. 그때다. 옥저님 등이 눈싸움을 제의하자 일행중 30~40대를 이루는 남녀 8명이 4명씩 두편을 뭇더니 동년을 방불케하는 진짜배기 눈싸움이 벌어졌다. 남자들이 열을 올릴 때 녀자들도 뒤지지 않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서로 간 눈을 쥐여뿌리고 맞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다가 송이님과 더불어 한패가 어울려 넘어지면서 복새판을 이루었다. 몇몇은 벌써 얼굴들이 눈으로 덮히였다. 이 눈싸움의 주인공들은 옥저님, 송이님, 상공님, 뿌리님, 수정님, 기자님, 산신님, 봄빛님 등 8명. 눈싸움을 파한후 일행은 산릉선 높은 평지의 동쪽가 한 낮다란 산봉우리에 올랐다. 그에 앞서 필자는 산릉선 평지의 북쪽가를 지난 옛장성을 따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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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필자의 시야에는 20여메터를 이룬 돌성벽이 성큼 안겨들었다. 돌성벽은 이미 무너져 내렸지만 팔도 쌍봉촌을 지나 10여리 산속 옛장성 구간에서 유일한 돌성벽이였다. 상공님, 신벗님, 샤론님이 합세하여 흥미진진한 장면을 토해냈다. 이 부분 산릉선에 온통 돌들이 널리니 그 돌들이 그대로 돌성벽을 만들어낸것이였다. 대자연과 인류문화 어우름의 걸작품을 두고 발길을 떼기 아쉬웠다. 늦은 걸음으로 무명봉우리에 올라 일행 12명이 과일이며, 콩물이며, 건량류들을 내여놓으니 제법 눈속산놀이가 이루어졌다. 송이님이 송이술을 내여놓으니 술맛 또한 제격이다. 이때라고 산신님이 살짝 빠지여 동서로 산릉선을 이룬 동쪽 정상가에서 언뜰한다. 옥저님과 수정님 그리고 필자가 잠간 시간을 빌며 산신님이 부르는 곳으로 향하는데 일행 전체가 줄레줄레 따라 섰다. 산신님은 어느결에 동쪽릉선 정상가를 한바퀴 돌았는데 정상가 한복판에 봉분처럼 솟아오른 돈대—봉화대가 있다지 않는가. 한달음에 다가선것이 그 시각이라 하겠다. 10여리 산지대에서 처음 대하는 돈대는 여느 돈대들처럼 흙과 돌로 쌓여지고 주위에 둥그렇게 홈을 이룬 상태, 평봉산의 돈대보다 커보였는데 복판이 심하게 도굴 당한것이 몹시 거슬렸다. 여러 돈대를 거치여오면서 가장 심하게 파괴된 돈대다. 글쎄 복판이 심장부깊이 굴을 이루며 도굴당했으니 한심의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산신님은 돈대주위 평지로 보아 돈대일대의 옛 군사시설물이 한둘이 아닌것 같다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였다. 이때 뒤미처 이른 수정님이 언제인가 등산팀을 따라 여기로 왔었고 돈대도 본적이 있다며 관심을 보이였다. 뭐가 뭔지 모르고 왔었다는 어느 해의 이야기가 재미나기만 했다. 일행 모두가 모여왔다. 전체가 이곳 병풍산의 최정상 돈대에서 기념사진을 남길 때 동쪽 몇리밖에서 평봉산이 나 여기 있노라고 손저어 부른다. 이윽고 일행은 팔도 쌍봉촌 동쪽구간 10여리 산속답사를 마치고 팔도쪽으로 산을 내리였다. 상공님과 필자는 나중에 자리를 뜨며 동쪽의 평봉산, 남쪽의 구수하벌, 옛장성이 팔도구간을 지나 동불사, 세린하, 화룡쪽으로 줄달음쳐간 서남쪽을 지켜보며 옛장성의 여운속에 빠져보았다. 병풍산을 내려 팔도촌에 이르러 점심상에 마주 앉을 때는 이미 오후 2시경, 4시간도 넘는 20리 쯤의 산행에서 팔도구간의 북쪽산과 병풍산을 에돌며 산속 10여리를 뻗어간 미지의 산속, 미지의 옛장성을 밝혀냈으니 우린 행복한 세대 선후배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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