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4월 20일은 지난세기 30년대를 빛낸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 탄신 100돐 기념일이다. 강경애 탄생 100돐에 즈음하여 지난 2005년 11월호 연변문학에 실린 론문 한편을 올리면서 일대 위인의 탄신 100돐을 기념하는 바이다. —2006년 4월 20일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
리 함
1. 들어가는 말
지난세기 30년대 중반에 우리 연변 룡정에는 겨레 문학도들로 이루어진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활동하고있었다. 이 문학도인단체의 출현은 조선족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권철선생의 지적과 같이 《<북향회>는 문학동인들의 피타는 노력에 의하여 많은 유능한 작가와 청년문예인들을 묶어세워 문학창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크나큰 성과를 이룩》①하면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마멸할수 없는 빛나는 한페지를 수놓았다. 허나 1931년 봄에 룡정에 왔다가 1942년에 병으로 환고향한 녀류작가 강경애는 룡정시절에 북향회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북향회와 그 동인들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과시하였다가 하나 그 활약상이 일일히 알려지지 않는다. 이에 비추어 본고에서는 북향회의 창립시간과 그 전후 시기에 따라 강경애의 활약상을 가능한 범위에서 추적해보면서 북향회에서 일으킨 강경애의 역할을 재검토해 보자고한다.
2. 북향회의 창립시간을 두고
《북향회》는 말 그대로 당년 《룡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인 리주복 등의 주선과 당시 룡정에 있던 작가들의 지지하에 정식으로 발족》된 문학동인단체로서 처음 《룡정 남녀중등학교의 교사들과 재학동인 문예청년들을 위주로 하여 조직》②되고 《일부 영향력있는 작가들도 가담》③ 하였다. 이같이 북향회는 지난세기 30년대 중반의 룡정산물이라고 하지만 그 준확한 창립시간을 지적하자면 쉽지가 않은것으로 알려진다. 북향회 해당연구자료들을 두루 점검하면 창립시간을 두고 한국 학계에서는 거의가 1935년 10월로 인정하면서 그 연구기점을 안수길의 회억에 두고있다. 안수길, 리주복, 모윤숙이 룡정에서 1935년 10월에 세웠다는것이 한국학계의 견해이다. 이를두고 연변대 교수 권철선생은 《<북향회>의 전말》④이란 한편의 론문에서 북향회의 창립시간을 1933년 11월이라고 찍어 말하였다. 이는 권철선생이 《<북향회>의 성립과정, 실제사업, 나아가 문학사적 차원에서의 공적을 체계적으로 평가》⑤하고 내린 결론인데 그 근거를 《<북향> 제2호에 실린 문학안테나》⑥에 두었다. 《북향》 인쇄본 제2호는 1936년 1월 10일의 산물로서 제 2호 문학안테나에는 《본사에선 2주년 기념사업으로 운전교우회지육부와 협력하여 지난 11월 16일 밤에 명신녀교 대강당에서 문예강연회를 개최》하였다고 씌여있다. 이는 1935년전에 《북향》 동인지가 이미 발간되였음을 알려준다.
연변대 문학박사이고 교수인 리광일선생의 견해는 권철선생의 1933년 11월설과 완전히 다르다. 리광일선생은 제1회 《북향회》의 창립시간을 1932년 6월이라고 결론⑦짓는다. 이 결론을 두고 리광일선생은 깊이있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론문 《<북향회>의 창립시간에 대한 재고》를 발표⑧하였는데 강경애와 모윤숙이 룡정에 다녀간 행적에 주요근거를 두었다. 지난 2005년 1워로가 2월의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밝혀진바이지만 강경애가 연변 룡정에 첫발을 들여놓은것은 1931년 봄이다. 강경애는 《신동아》 1934년 7월호에 실은 수필 《두만강례찬》에서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이라고 자기의 첫 연변행을 일목료연하게 밝히였던것이다. 그러던 강경애가 사유로 하여 1932년 6월 3일 아침에 잠시 룡정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이는 강경애의 수필 《간도를 등지면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제1회 《북향회》 동인인 모윤숙이 료정에 온 시간은 1932년 4월로 알려진다. 이에 토대하여 리광일선생은 강경애와 모윤숙이 《룡정에 왔다가 간 행적을 통하여 제1회 <북향회>는 1932년 6월부터 1933년 4월사이에 창립되였다》고 견해를 모았다.
하나 1932년 6월~1933년 4월 사임설은 어찌 보아도 시간상 모호한 개념이 아닐수 없다. 이에 리광일선생은 시간의 범위를 좁히는 작업을 룡정시절의 모윤숙의 수필 《해란강의 물》에 돌리다가 수필에 순서적으노 나타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1회 《북향회》의 창립사간을 《해라낭의 물이 붉은 흙탕물로 흐르던 시기와 여름방학사이라고 인정》했고 나중에 강경애의 귀국일—1932년 6월 3일에 모를 박다가 1932년 6월로 결론을 내리였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깊이있는 분석과 자료에 의한 신빙성있는 결론이라고 보아진다.
이밖에 길림대학 외국어학원 교수 윤윤진 성생도 연변대학시절에 《<북향> 문학평론일별》⑨ 론문을 발표하면서 문학동인지 《북향》에 실린 작품들을 깊이있게 진맥해보나 자체가 문학평론일별이다보니 북향회의 창립시간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찌하든 북향회의 창립시간을 두고 1935년 10월설, 1933년 11월설, 1932년 6월설이 병존하고 있는 실정인데 아직 학계의 공식적인 일치한 결론은 나오지 못하고있다. 또, 본고의 핵심도 북향회의 창립시간이 아닌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이기에 창립시간시비를 이쯤 밝혀두고 지나치려 한다.
3. 강경애 고문초빙 전후관계
녀류작가 강경애의 고문초빙을 두고 한국의 학계나 중국조선족 학계에서는 일치하게 이의가 없다. 이의가 있다면 누가 어떤 식으로 초빙에 나섰느냐 하는 문제이다. 먼저 북향회시기 학생출신이고 주요동인이였던 원 연변대학 부교장이고 심리학교수였던 김유훈선생의 견해를 보기로 하자.
연변대학 력사학부 출신의 최형순선생은 자기의 한펴의 실화 《<북향>과 강경애》⑩에서 김유훈교수 방문기르 기록하였다. 이 실화에 의하면 룡정 학창시절의 어느날, 리주복선생이 상론할 일이 있다면서 광명중학 재학중이고 문학써클 골간들인 학생 김유훈과 상급반 학생 천청송을 부르게 되고 문학써클문제를 주고받다가 써클의 이름을 지시보자고 한다. 이래서 이들 셋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북향회(北向會)》를 제기했고 그대로 통과되였다. 김유훈교수 해석에 의하면 《북향》이간 북간도가 조선사람이 사는 북쪽고향이라는 의미인데 모임은 문학써클을 《북향회》란 문학단체로 발전시키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한결같이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녀류작가 강경애를 고문으로 초빙하기로 마음을 합치였다. 강경애에 대해 너무나도 익숙한 천청송학생의 제의와 리주복선생, 김유복학생의 찬성이였다.
그로부터 며칠수 김유훈과 천청송은 《리주복선생의 중한 부탁을 맡고》 강경애의 《헐망한 초가집》을 찾았고 《북향회》학생문학단체 뜻과 고문초빙의사를 밝히였다. 이에 강경애는 무슨 고문이라고 할것이 있느냐며 《북향회》회원이라는 편이 낫겠다, 가입시켜 감사하다고 인상적으로 말했다. 강경애 고문초빙이 뜻대로 풀리였던것이다.
허나 안수길의 견해는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안수길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안수길과 리주복의 해란강변산책에서 문학동인회 문제가 틔여나왔고 《북향회》란 이름도 이야기된것으로 나타난다. 해란강변산책과정은 안수길의 회고록 《룡정과 신경시대》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아버지의 병환위독이라는 급전을 받고(1931년 봄—인용자 주) 동경에서 집(룡정)에 돌아온지 한 두어달 되여서일가 광명중학교 영어교사로 리주복씨가 부임해왔고 가족을 데려오기전까지 우리 집에 기숙하게 됐다… 자연히 한집에 살게 된 리씨와 내가 친해질수밖에 없었고, 둘은 아침 산보로 일찍 해란강변을 거닐면서 당시 만주사변직후의 일본의 침략에 얽힌 가지가지 시국담을 비롯해 인생, 세태, 문학에 관한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장래 대문호(?)가 될 꿈을 하늘만하게 키우고있었다… 리씨와의 이런 유서깊은 해란강변산책에서 이야기끝에 구상한것이 문학동인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였다.
이름을 <북향회>라고 하는게 좋겠다고 대강 이야기된것은, 글자그대로 간도는 한국사람의 제2의 고향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학을 이룩해보자는 뜻에서였다.》
물론 이들의 해란강변산책끝에 북햐오히가 인차 조직된것은 아니고 그후 안수길이 천주교마을—팔도구소학교 교사시절 룡정의 리씨에 의해 발족되였다하지만 문학동인회, 북향회 이름 제기가 리주복, 김유훈, 천청송 셋이 모인자리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이를 두고 학계의 정론은 없지만 권철선생을 비롯한 이곳 학계나 한국 학계에서는 안수길의 견해를 따르는것 같다.
하나 안수길이나 권철선생도 김유훈이나 천청송 등 학생들의 역할과 고문초빙과정은 묵과하고있다. 사실 북향회 활약가인 안수길도 북향회발족 때 룡정도 아닌 팔도구에 있었음으로 고문초빙과정 견증자가 아니니 찍어 말할수도 없었다. 하기에 안수길은 자기의 글 《만주에도 일찌기 조선문학이 있었다》, 《간도중심의 조선문학발전과정과 현단계》 등에서 《제1회 북향회 때의 동인중 이주복씨는 천청송군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을 회집(會集)》⑪하여 활동하였다고 말하였다. 권철선생도 론문 《<북향회>의 전말》에서 북향회 조직과정에 대한 김유훈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이 학교(광명중학을 가리킴—필자 주) 영어교원 리주복의 지도밑에서 문예이들의 회를 조직하였다. 처음 이 회의 정회원은 열도채 안되는 문인, 학생들로 구성되였다. 조선 녀류작가로서 이미 저명해졌던 강경애 등과 그밖에 각 중, 소학교 교원중에서 문예창작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담(강경애는 동인이면서 고문 겸함—필자 주)하게 되였다.》⑫
이로부터 보면 당시 광명중학교 재학중이던 김유훈과 천청송이 고문초빙으로 강경애 살림집을 찾은것이 사실인것 같다. 아니라는 자료가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인정해도 무방하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찌해도 북향회 발족 시초부터 녀류작가 강경애가 이 문학동인회에 가담했고 고문으로 활약한것만은 틀림이 없다.
4. 김유훈, 권철의 자료로 보는 강경애활약
북향회에서의 강경애고문의 활약을 두고 한국 학계, 더우기 강경애연구관련 학자들은 강경애가 신병으로 하여 북향회에서 별로 활동하지 못한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1월과 2월의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필자도 이에 동조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후 북향회관련 연구자료들을 깐깐히 더듬는 가운데서 그렇지 않음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도 연구자료상 따르지 못하는 페단이 의연히 존재하기는 하나 지금 들여다 볼수 있는 자료만으로도 강경애는 북향회에서 별로 활약하지 못한것이아니라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였음을 얼마든지 가늠할수 있다.
(1), 연변대 력사학부 출신인 최형순의 실화 《<북향>과 강경애》로 보는 김유훈자료로 통한 강경애활약.
혹자는 이 실화를 두고 무턱대고 비난하기도 하나 필자는 받아들일 점이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실화는 김유훈선생의 생전의 진실한 방문기여서 귀중한 자료로 빛을 뿌리기 때문이다.
다 알다싶이 북향회 창립시초 《이 회의 정회원은 열도 채 안되는 문인, 학생들로 구성되였》고 녀류작가로 이름난 《강경애 등과 그밖에 각 중, 소학교 교원중에서 문예창작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담하게 되였다.》 이는 김유훈선생의 회고로서 연변대 권철교수님도 시인하고 《<북향회>의 전말》에서 그대로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김유훈, 천청송 두 학생은 리주복, 강경애, 김국진, 엄무현, 윤영춘 등과 더불어 북향회 창립초기의 정회원이였다.
김유훈선새의 회고에 따르면 북향회에서의 강경애의 활약상을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가 있다.
첫째는, 개개인 인맥속의 강경애의 활약상이다.
김유훈은 북향회의 고문초빙으로 천청송과 같이 강경애를 방문한후 이 댁의 단골손님으로 되였다. 단골인데서 김유훈도 천청송과 더물어 《부르지도 않고》선생댁에 들어설수있는 사이로 발전, 한번은 김유훈과 천청송이 선생댁에 들어서니 강겨애는 비스듬히 누워있다가 일어나 반기였고 다시 이불에 기대에 누웠다. 그럴 때 남편 장하일이 귀가했고 《손님이 왔는데 왜 누워서 얘기하는가》하며 책망비슷히 말했는데 강경애는 《늘 다니는 손님이여서 구속도 없이》 그런다고 호호 웃었다. 그때 강경애는 마침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집필하고있었는데 자기가 구상하고있는 《인간문제》를 김유훈, 천청송과 구김없이 이야기, 집필을 위하여 《여가만 있으면 공장에도 가보고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도 만나》 본다고 터놓았다.
이같이 김유훈과 천청송이 강경애의 단골손님이라면 겸손한 말씨, 겸손한 태도의 인격소유자인 강경애를 믿고따르는 문학도들이 적지 않았다. 학생들은 강경애를 더없이 존경하면서 《자기들이 쓴 작품을 강경애선생에게 보이기를 좋아했》고 《잘 썼든 못 썼든간에》 언제나 차근차근 지적해주었다. 뿐만아니라 단 김유훈 하나만을 보아도 이 학생이 초기페병으로 귀가치료를 받아야 할 때 강경애는 자기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찾아온 김유훈을 따뜻이 만나주고 귀가후에도 친히 편지까지 띄워 위로하면서 《북향》에 실린 김유훈의 소설—가정문제를 반영한 소설—에 대해 《문제의 포착점이 예리하고 서술이 숙련되》여 《서울같은 잡지에도 발표할수 있다》고 면려했다.
둘째는, 북향회 집단활동속의 강경애의 활약상이다.
강경애는 병에 시달리고 창작으로 드바쁜 사람이지만 북향회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늘 <북향회>의 활동에 참가하여 열성을 보이였다.》 김유훈은 집단활동에서의 강경애는 《<창작을 어떻게 하는가>, <문예평론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등 문제에 관하여 창작실천과 문예리론을 결합시켜 알기쉽게 이야기》했다고 감명깊게 회고하였다. 인상깊은것은 《늘 <북향회>활동에 참가》하였다는 김유훈의 회고담이다. 한두번도 아닌 북향회활동의 열성자였다는것은 북향회에서의 강경애활약상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단, 자료가 따르지 못하는데서 강경애의 활약상을 일일히 서술하지 못함이 유감이지만 강경애는 학생들의 존경하는 스승이였고 북향회의 활동이 전에없이 활기를 띠였음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2) 권철선생의 《<북향회>의 전말》에서 보는 강경애 활약.
북향회는 창립이후 강경애를 위시한 이름난 작가들의 합류로 하여 무척 활기를 띠면서 소설, 시가, 회곡, 문학리론 등 분야에서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문단학술모임, 토론회, 문학평론회, 문예강연회 등도 자주 가지였다. 명신녀학교 대강당에서 가진 한차례 문예강연회에는 《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홀이 초만원, 립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안수길의 회고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후 1935년 11월 16일 밤에 명신녀학교 대강당에서 재차 문예강연회가 열리였다. 《북향》의 문단뉴스에 따르면 그번 문예강연회 《입장자는 무려 천여명이였고 당야 장소관계로 돌아간이도 수백명에 달하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강경애, 리주복 등 여럿이 초청되고 강경애가 열띤 연사로 나섰다고 한다.
권철선생의 자료인용으로 보는 강경애의 활동모습니다 이런 활동모습은 상기 김유훈선생의 회고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낟. 예나 지금이나 직장생활이 아닌 사회 동인단체, 한해에 수차이면 족한 활동을 념두에 둔다고 할 때 일제치하의 제한된 가혹한 력사적 현실에서 주저없이 집단활동에 나선 강경애의 사회활동은 높이 평가되여야 할것이다. 매일 반복해야 출근도 아닌, 빈번히 가지지 못하는 대형모임이라 할대 더욱 그러하다.
5. 나오는 말
본고에서 필자는 북향회에서의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을 두고 30년대중반의 북향회창립 전후관계속에서 두루 살펴보았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한 자료결핍으로 강경애의 룡정생활, 북향회시기의 전반 모습을 추적할수는 없으나 김윳훈, 권철 두 선생의 제한된 자료만으로도 북향회에서의 강경애고문의 활동상을 이모저모로 검토해보자고 했다. 지금까지 연구의 시각에서, 북향회와 강경애의 활약상을 다룬 전문연구성과가 거의 없은데서 시도해 본것이라 초라함이 가끔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강경애활약상을 어느정도라도 처음 그려냈다는 점은 위안으로 된다.
강경애는 지난 30년대 일제치하기 험악한 력사현실속에서 가정주부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북향회》에 깊은 관심을 돌리며 동인이자 고문으로서의 활약상을 보인 저명한 녀류작가요, 문단의 위인이였다.
주 해: ①《문학과 예술》, 1988년 제15호, 제64페지 ② 대형문학총서《두만강》 제3호, 료녕민족출판사, 1994년 11월, 제220페지 ③ 권철,《북향회》의 전말, 대형문학총서《두만강》 제3호, 료녕민족출판사, 1994년 11월, 제220페지 ④ ·《문학과 예술》, 1988년 제5호, 64페지 · 대형문학총서《두만강》 제3호 220펴제 료녕민족출판사, 1994.11 ⑤ 《문학과 예술》, 1994년 제2호, 제70페지 ⑥ 《문학과 예술》, 1994년 제2호, 제70페지 ⑦ 《문학과 예술》, 1994년 제2호 ⑧ 《문학과 예술》, 1994년 제2호 ⑨ 《문학과 예술》, 2001년 제4호 ⑩ 《천지》, 1986년 제3호 ⑪ 《만선일보》(영인본), 1940년 2월 2일, 조간 4면 ⑫ 《문학과 예술》, 1988년 제5호, 제65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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