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http://www.zoglo.net/blog/liguangren 블로그홈 | 로그인
<< 1월 2025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기행

강경애 연변 룡정에서의 11년
2006년 04월 14일 00시 00분  조회:3375  추천:78  작성자: 리함

강경애 연변 룡정에서의 11년

리 함


지난 30년대 연변용정에는 여류작가 강경애가 활동하고 있었다. 강경애는 1931년 봄에 용정에 첫발을 들여 놓아서부터 신병으로 1942년에 고향땅으로 환고향하기까지 장장 11년을 용정에서 생활하며 눈부신 창작활동을 펼친 겨레 저명한 현대작가요, 여류작가이다.

여류소설가 강경애는 황해도 송화출신이다. 생졸년월일도 1907년∼1943년 설과 1906년∼1944년 설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털면 먼지뿐인 살림에 아버지가 강경애 4살 때 사망한데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이듬해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선다. 어린 경애도 다섯살 때 장연으로 이주하게 된다.

1913년 8살 되던 해 강경애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쳐 고대소설을 읽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에 벌써 동네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어 《도토리 소설장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장래 여류소설가의 싹수가 보인 것 같다. 어디를 가나 가난신세라 열 살이 되는 1915년에야 청년학교를 거쳐 장연소학교에 입학, 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 공부하다가 중퇴, 서울의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약 1년 간 수학. 그 무렵이던 1923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조혼에 의한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양주동이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이고 문학적 재질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라 문학도 강경애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드디어 강경애는 양주동과 1년간 동거하게 되고 여성에게 봉건적인 생활태도와 종교생활을 강요하는 학교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로 가담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퇴학한 것이 바로 동맹휴학 때문이었다. 또 양주동과의 동거생활에서 획기적인 것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는 양주동이다. 1년이 지나 강경애는 양주동과 헤어졌다고 하나 작가로서의 생애가 펼쳐지니 행운이라 해야겠다.

강경애는 서울 동덕여학교 3학년에 들어가 1년 간 수학하다가 1924년 9월 후에 귀향하여 야학운동, 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1931년 봄, 두만강을 건너서기까지의 생활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기록도 없고 타인의 회고도 없으니 지금까진 수수께끼로 밖에 남을 수 없다.

강경애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연변 용정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31년 봄이다. 학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여지껏 1929년설이 주도적지위를 차지했는데 그 자료적 근거는 모두 조선의 김헌순학자가 1961년에 출판한 《강경애론》에 기인되었다.

—1929년 겨울에 강경애는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중국 간도로 건너갔다. 강경애는 용정일대에서 근 2년 가까운 동안 때로는 교육기관의 임시교원으로 일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끼니를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어보기도 했다.


이 단락은 《현대작가론》에 실린 강경애론에 나오는 글이다. 이것이 시원으로 되어 중국의 강경애연구 관련자들이 모두 이 1929년설을 따랐다. 조선도 그러하고 한국도 그러했다.

어찌보면 한국과 조선, 중국학계의 견해대로 1929년 설을 따라도 무방할 것 같다. 실수는 여기에 있었다. 학계가 강경애연구자료가 따르지 못한데서 조선 김헌순학자의 주장을 따른 결과 큰 실수를 빚어냈다. 왜냐하면 강경애가 자기의 첫 연변행에 대해서 여러 글들에서 똑똑히 밝히였기 때문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간도》 서두에서 쓰고 있다. 《나는 간도를 안지 불과 이태에 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간도를 자랑하고 싶다.》

이글은 1934년 5월 8일부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고향의 창공》 서두에서 또 쓰고 있다.

《내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이 글은 1935년 5월 《신가정》에 실린 글이다.

강경애는 《신동아》 1934년 7월호에 실은 수필 《두만강예찬》에서는 자기의 첫 연변행을 일목료연하게 밝히였다.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무르익은 버들숲을 끼고 흐르고 흐르는 저 강수(江水)!》

이 격정이 넘치는 한편의 수필에서 강경애는 《누구든지 간도를 알아보려면 이 두만강부터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면서 자기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한 시간을 1931년 봄으로 적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는 수필이여서 믿기 어렵다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상기 수필과 《두만강예찬》은 모두 작가의 실생활 그대로 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여류작가 강경애의 첫 연변행은 1931년 봄이 틀림없다.

《연변문학》 2003년 4월호에 실린 조선족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의 글 《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에 따르면 강경애는 1931년에 황해도 장연에서 수원농업전과를 졸업하고 장연군 군청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고 그해에 용정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강경애는 용정에 다시 들어선 후 가정주부로 문학창작에 정진하면서 용정을 떠나지 않았다.

강경애는 1931년에 단편 《파금》과 중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면서 1938년까지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긴것으로 알려진다. 그중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120회로 연재되었는데 당시 사회의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꼭 밝히고 넘을 것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다. 장하일은 장연에서 강경애와 결혼하고 용정에 이주한 후 줄곧 동흥중학교 수학교원, 교도주임으로 근무했는데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었던 임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었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 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용정 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1942년 여름 이후 학교운영은 말이 아니었다. 완전한 노예화교육이 실시. 이에 교도주임 장하일은 교장 임계학 등과 더불어 련속 사직으로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하였는데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하루동안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장하일은 사직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사》총편집을 맡았다고 하는데 광복후에는 북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었다.

반일정신이 강한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용정에 이주한 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3년 11월에 용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 리주복 등에 의해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조직 되었는데 당시 용정 남여중등학교의 교원들과 재학중인 문예청년들이 기본동인들이였다. 강경애나 안수길 등처럼 일부 영향력있는 작가들도 가담, 강경애는 이 북향회의 동인이면서 고문이였다.

했으나 강경애는 건강사정으로 북향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신병으로 앓은 모양인데 지금까지 알려진데 의하면 평양 숭의여학교 중도퇴학과 연애사건으로 학비를 대여주던 형부한테서 그만 뺨을 얻어맞았는데 이로하여 강경애는 뜻하지 않게 귀를 다치면서 귀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932년 6월과 그해 말에 귀국하게 된 것도 중이염때문이었다. 그때의 내심세계를 잘 드러낸것이 수필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이다. 그후도 강경애는 수차 고향행에 올랐다.
연변 용정시절의 강경애는 남들한테 여류작가로가 아니라 《살림살이에 열심인 수수한 아내》로 보이기가 일쑤였다. 문학동인이였고 그녀의 이웃에 살았던 작가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강경애는 《수수한 품이 여느 부인네들과 다를 것이 없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인상, 《살림살이에 열심인 가난한 주부작가》의 모습이였다.

그래도 강경애는 남편 장하일과 더불어 건실한 사상, 반일사상으로 착실하게 살아가며 문학창작에 열중했지만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하여 시달림을 받았다. 이를 두고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자기가 엮은 수정증보 《강경애전집》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1939년에는 안수길의 아내가 길에서 강경애를 만났을 때 《병으로 몸이 비대해지고 머리가 아파서 아무 일도 못하고 고통 중에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1939년에 강경애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하면서도 불우한 환경속에서 작가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러던 이 여류작가는 나빠진 건강을 어찌 할 수가 없어 1942년에 남편 장하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가 1944년 4월 26일에 신병으로 요절했다.

이렇듯 강경애는 신병에 시달리면서도 가정주부로서 문학창작에 정진했으나 일제의 검열과 열악한 출판사정으로 살아 생전에 작품집 한권 출판하지 못하였다. 1949년에 조선 로동신문사에 의해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강경애는 일약 겨레의 한다 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인간문제》를 출판하고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 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제2차 출판을 하였다.

한국서 강경애의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1970년이다. 헌데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연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 것은 1992년이였다.

한편 조선서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된 것은 1961년, 한국서 이화여대 이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 것은 1974년, 서울대 이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논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이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이상경엮음)이 해빛을 보았다. 따라서 1999년 8월 8일에는 연변의 용정시 비암산에 《여성작가강경애문학비》가 세워지고 중국에서의 강경애연구가 보다 열을 올리였다.

이로부터 보면 강경애는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피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것을 어렵사리 알 수 있다. 중국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강경애시시비비 사이버토론과 강한 반론과 호성, 한국의 이상경 등 지성인들에 의해 지난 1월 중순 이후 2월 한달 간 흔들리던 여류작가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었다. 한국에서 강경애는 계속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여류작가 강경애여, 길이 빛나라!


☆2005년 3월 19일 부 흑룡강신문 7면에 게재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2 ]

2   작성자 : 상공
날자:2006-04-17 04:51:39
제가 전문이 아니여서 가타부타 할말을 없지만 강경애여사의 사적과 글은 그렇듯 감동적이군요. 정말로 존경하고 싶습니다.
1   작성자 : 특송
날자:2006-04-17 08:11:51
제가 얻어듣기로는 강경애는 그때 당시로 말하면 신형파로서 아주 활약적이며 전통적인 속세에 과감히 도전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나이에 나이가 한창 많은 남자친구를 친하여 만주국으로 이주한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Total : 39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1 [스케치]옛 장성으로 이어진 지구의 날 산행 2006-04-23 113 3458
70 100돐기념론문ㅡ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 2006-04-21 121 3606
69 내 고향 여행(34)ㅡ폭설—4월의 봄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2006-04-20 98 3941
68 내 고향 여행(33)ㅡ우린 백석라즈에서 서로 만났다 2006-04-17 79 3434
67 론문(6)ㅡ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 2006-04-14 92 3962
66 강경애 연변 룡정에서의 11년 2006-04-14 78 3375
65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2006-04-14 92 3102
64 내 고향 여행(32)ㅡ눈내리는 4월에 대포산 빗나가다 2006-04-08 95 4477
63 내 고향 여행(31) 소녀의 렬사비앞에서 2006-04-03 83 4377
62 내 고향 여행(30)ㅡ북도끼봉 산행이야기 2006-04-02 87 3285
61 내 고향 여행 (29) 칼바위산에 이어 남도끼봉에 올랐다 (2) 2006-03-26 75 2946
60 내 고향 여행 (29) 칼바위산에 이어 남도끼봉에 올랐다 (1) 2006-03-25 67 3234
59 내 고향 려행 (28) 초모정자에 올라 봉오골 굽어보다 2006-03-19 91 3429
58 론문 (5)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 2006-03-13 74 3616
57 론문(4)ㅡ윤동주시의 별세계 2006-03-09 63 3374
56 내 고향 여행(27)ㅡ이른 봄의 뾰족산 산행 2006-02-25 90 3883
55 내 고향 여행(25)ㅡ평봉산에서 최대 돌성벽을 발견하다(1) 2006-02-19 99 3279
54 내 고향 여행(26)ㅡ평봉산에서 최대 돌성벽을 발견하다(2) 2006-02-19 91 2722
53 론문(3)ㅡ극본《혈해지창》,《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과 작자문제 2006-02-15 93 4126
52 내 고향 여행(24)ㅡ산속 옛장성은 10여리를 뻗어갔다 2006-02-12 83 3380
‹처음  이전 12 13 14 15 16 17 18 19 2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