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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3)ㅡ극본《혈해지창》,《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과 작자문제
2006년 02월 15일 00시 00분  조회:4127  추천:93  작성자: 리함
론문(3)

극본 《혈해지창》,《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과 작자문제

리 함

1. 서론

20세기 30년대후반기 동북항일무장투쟁의 가렬처절한 싸움터에서 창작, 공연된 극본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은 광복전 중국조선족문학사, 더우기 조선족연극사에서 획기적인 대표작으로 되는 두 장막극이다. 두 극본《필사본》은 광복후 1959년에 발굴되여 선후로 1959년 9월호 《연변문학》(혈해지창)과 1986년 제2호 《문학과 예술》(싸우는 밀림)에 처음 발표된 이래 우리 민족 연극예술의 아름다운 꽃송이로 피여났다.
하지만 1959년 발굴당시와 그후시기 이에 대한 중시가 따르지 못하고 실제고증을 거치지 않은데서 두 극본의 창작원천으로 된 진실한 배경과 창작경위, 작자 등을 밝히지 못하여 천만 유감을 남기고있다. 한데서 지난 90년대이래 두 극본의 연구성과와 평론글들을 보면 한결같이 두 장막극을 광복전 조선족연극사의 대표작으로 높이 받드나 두 극본에 안받침된 조선족의 항일투쟁력사를 잘 모른데서 시대배경을 근근히 《항일유격구》라고 두루뭉실히 서술하고 지나칠수밖에 없었다. 한데서 두 극본에 조금만 주의를 돌려도 짚어낼수 있는 진실한 배경과 그 배경에 묻힌 허다한 사실들을 장장 40여년이 지나도록 밝히지 못했다는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최근에 필자는 조선족의 해당 항일투쟁자료를 찾다가 우연하게도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의 두 극본을 처음 접하게 되였는데 읽어내려갈수록 흥분을 감출길 없었다. 《혈해지창》의 진실한 배경과 인명, 지명들은 모두 지난시기 30년대초반 화룡현의 삼도구와 평강구를 가리키고 있다면 《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은 당년 장백현의 홍두산밀영을 가리키고있었다. 인물원형이 하나같이 화룡현출신의 항일투사들이란 점은 특히 인상적이다. 두 극본이 당년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에 의해 창작, 공연된것으로 헤아려질 때 제6사는 바로 연변항일유격대시기의 화룡퇀을 토대로 하여 개편된 항일무장부대임을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두 극본의 진실한 작자도 당년 화룡현을 잘아는 화룡현출신의 항일전사라고 함이 옳을듯싶다.
이에 비추어 이글에서는 서술과 리해의 편리를 위하여 광복후 두 극본의 발굴과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두 극본의 진실한 배경과 창작경위, 작자 등을 치중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2. 두 극본의 발굴과 발표과정

다 알다싶이 《혈해지창》이 처음 발표된것은 1959년이고 《싸우는 밀림》이 처음 발표된것은 1986년이다. 조선족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권철교수는 《싸우는 밀림》의 발굴문제를 이렇게 밝히였다.
《근년에 나는 다시 연구사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책장을 정리하다가 뜻밖에 전에 필사해두었던 30년대의 장막극 〈싸우는 밀림〉을 찾아내게 되였다. 이 글의 원본(필사본)은 〈조선족문학자료수집조〉의 동무들이 화룡현에서 수집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그 원본은 없어진지 오래고 퍽 구석진데 박혀 있은탓으로 재액을 면한 이 재 필사본때문에〈싸우는 밀림〉이 오늘 다시 볕을 보게 된것이다. 》① 그뒤 권철선생은 《문학과 예술》에 실은 한편의 글에서 당년의 조문학부 조사조를 돌이켜보았다.
《당시 연변대학 조문학부 고급학년을 조사조에 참가시켜 보다 더 광범하고 전면적으로 되는 조사수집작업을 벌리였다.》②
조선족문학의 권위평론가 조성일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편찬의 시말》에서 발굴과정을 언급할 때 이렇게 말하고있다.
《우리반 학생조사조는 몇달동안의 조사를 거쳐 기꺼운 성과를 달성하였다. 그때 우리 반급에 있었던 박두렬씨가 목단강지역 밀산에 있는 형님집에서 오래동안 남몰래 보관해두었던 30년대의 항일극 〈혈해지창〉대본을 가져오게 되였다. 이 극본은 1936년 까마귀 작으로 된것인데 한지 (韩纸)에 연필로 쓴것이였다. 또 우리반 학생조사조는 30년대의 항일연극 〈싸우는 밀림〉대본을 발굴하였다.》
1990년도 판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는 주해(45)에서 《싸우는 밀림》의 출처를 화룡현으로 보고있다.
《이 극본(필사본)은 1959년 가을 연변대학 조문학부 4학년학생들로 무어진 〈조선족문학자료채집조〉성원들이 길림성 화룡현청산리일대의 농촌에서 채집한것이다.》③ 이《문학사》는 계속하여 후기에서 학생채집조의 파견을 밝히였다.
《1958년 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3학년학생들이 조선족문학사료채집조를 무어가지고 동북 세개성의 조선족집거구에 다니면서 조선족문학 특히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대한 한차례의 전면적인 조사와 채집활동을 하였다.》
1994년 판본《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3)》은《예술사》편으로 되였는데 두 극본의 출처를 이렇게 적고있다.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도 연변대학 조문학부 1960년도 졸업생들이 졸업론문을 준비하려고 사회조사를 하는가운데서 1959년에 찾아낸것인데 그것도 연필로 쓴 필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글들에서 보면 두 극본의 출처가 일목료연하게 펼쳐지고있으나 조금 혼란한 점도 없지 않다. 발굴시간과 발굴지점, 학생수집조의 학년이나 졸업시간이 각자의 견해대로 서로 뒤섞이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이에 대비해 당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원이고 학생조사조 직접 파견자인 권철교수는 필자와 극본의 출처는 모두 밀산현이고 박두렬학생의 형님한테서 발굴되였다고 긍적적으로 밝히였다.⑤ 당년 학생조사조의 성원이고 조선족연극사에 조예가 깊은 김운일교수도 권철선생의 견해가 옳다고 긍정하였다.
《두 극본은 모두 밀산현에서 수집된것이 틀림없다. 바로 박두렬의 형님한테서이다. 그의 형님은 워낙 화룡현 서성구사람인데 밀산현에 이사하였다. 극본은 백지에 연필로 씌여졌다. 해방후 화룡현서성일대서 공연되였다고도 한다. 그때 우리반은 1956년 7월에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는데 1960년에 졸업이다. 4학년 금방 올라가서 졸업론문으로 취재에 나섰다.》⑥
필자는 또 김운일교수의 제시에 따라 박두렬의 6촌형인 연변대학 중문학부의 교수 박춘범선생을 취재하였는데 박선생은 두 극본의 출처는 박두렬의 형님한테가 옳다고 긍정하였다. 박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박두렬과는 6촌간인데 발굴지점이 서성구 북대촌인지 밀산현에 이주한 다음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⑦
알고보면 두 극본의 발굴지점이 당년의 화룡현이나 밀산현으로 나타난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박춘범교수에 의하면 박선생은 1936년생이고 박두렬은 1938생이다. 당년 박선생은 연길시 흥안촌에 거주했고 박두렬은 화룡현 서성구 북대촌에 거주했다. 이들 둘은 1953년에 연변고중에 입학하고 1956년에 졸업한 뒤 그해 7월에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시절에 박선생은 중문학부에 다니고 박두렬은 조문학부에 다니였다고 하는데 박두렬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님과 함께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연변고중시절에 박두렬의 집이 밀산현으로 이주했으니 두 극본을 밀산현에서 가져온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였다.

3. 두 극본의 진실한 배경

지난 시기 30년대에 창작, 공연된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 두 극본이 필사본으로 되여 광복후 화룡현 서성구 북대촌출신의 박두렬의 형님한테서 나진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박두렬형님의 이름은 박두원이다. 두 극본의 필사본이 어떻게 되여 박두원에게서 나타났는가는 아직 알수가 없다. 그러나 두 극본을 보면 두 극본의 창작경위와 진실한 배경이 그대로 펼쳐지는데 당년 장백현과 무송현, 몽강현 일대에서 활동했던 항일련군 제2군 제6사가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되여 1939년 5월 이후 활동무대를 두만강상류의 화룡현, 안도현 일대로 옮기게 된다. 그때로부터 1940년이후 원동지구의 쏘련경내로 전이하기까지 제2방면군은 이 지대에서 맹렬한 정치, 군사 활동을 벌리였는데 두 극본은 이 시기에 화룡현출신의 항일투사들에 의해 민간에 류전된것 같다.

(1) 30년대 장막극 《혈해지창》
혈해지창은 첫시작으로 된 서시에서 장막극의 배경을 《피바다 북간도》라고 밝히면서 이것이 《혈해지창의 연극》이라고 쓰고있다.⑨ 따라서 무대가 펼쳐지는데 우리는 이 무대배경이 당년의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가리키고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극에서 유격대정찰원 뻐꾹새가 한족청년 왕핑에게 군사정보를 부탁할 때 《샘물골》을 지나 《어랑천 앞마을》로 가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이 점을 실증하고있다. 당년 어랑촌과 그 일대 샘물골은 1932년 겨울부터 1934년 겨울까지 화룡현의 이름난 항일유격근거지였다. 이밖에 극에는 또 《피바다 북간도》 화룡현을 나타내는 인명, 지명들이 여러곳에서 보이는데 극의 전개와 더불어 나오는 《삼화탄광》, 《새별》, 《학강대장》, 《유통사》, 《왕지평》, 《대소회싸움》 등이 그러하다. 이런 인명, 지명들을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
▲ 삼화탄광
삼화탄광은 지금의 화룡시 토산진에 있는 오명탄광을 가리킨다. 광복전에 삼화탄광은 남쪽의 산너머 지금의 연변탄광과 더불어 연변의 이름난 석탄산지였다. 당년 일본침략자들은 오늘의 토산진소재지 북쪽에 간도《삼화회사》를 세우고 석탄을 마구 캐내였는데 극에서 유격대정찰원 뻐꾹새는 바로 이 삼화탄광의 쿨리(苦隶)로 농민들앞에 나타난다. 삼화탄광에서 북으로 두산을 넘어가면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이다.
▲ 새별
극에서 한족청년 왕핑이 군사정보를 갖고떠나다가 적들에게 잡혔을 때 그는 일본놈을 조롱하면서 유격대정찰원의 《서글서글한 눈은 새별같이 반짝이였》다고 말한다. 이 《새별》도 원형이 있는데 당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화룡퇀의 제1임 정위 차룡덕이 하루종일 자지 않아도 두눈에 정신이 나고 서글서글하다 하여 동지들로부터 새별로 불리웠다. 그후 그는 《민생단》혐의로 전사로 강직되였다가 1934년에 불행히 전사하였다.
▲ 학강대장
학강이란 일본어로 쯔루오까이다. 이놈은 1933년 우복동전투당시 적지휘관인데 그해 음력 5월 《토벌대》를 이끌고 화룡현 우복동으로 갔다가 화룡현유격대 9명의 영용한 반격에 의해 황천객이 되였다. 이 전투가 바로 이름난 《우복동전투》인데 이 전투의 지휘자가 다름아닌 새별로 불리운 차룡덕이다.
▲ 유통사
유통사는 사실상 성이 류씨인데 우복동에서 동으로 산너머에 자리잡은 우심산의 대지주였다. 그의 본명은 류의현이다. 조선말을 류창하게 하고 한족과 조선사람들사이에서 늘 통역으로 나섰기에 류통사라 불리웠다. 1933년 여름 류통사의 자위단이 우복동에 진출한 우리 유격대의 낌새를 채고 삼도구일본수비대에 알린데서 유명한 《우복동전투》가 벌어졌다.
▲ 왕지평
왕지평은 어랑촌근거지에서 동으로 몇리 떨어진 산아래에 위치한 고장이다. 성이 왕씨라는 사람이 선참 이곳에 자리를 잡은데다가 장거리인데서 왕지평(王集坪)으로 불리웠다. 당년 화룡현유격대는 늘 이곳에 전초병을 파견하여 근거지를 지키였다.
▲ 대소회싸움
대소회싸움은 응당《대도회》(大刀会)로 되여야 한다. 극에는 유격대정찰원이 왕핑의 아버지가 우리 혁명군, 즉 유격대를 숨겨주었다는 죄로 황가에게 타살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장면이 나오는데 대도회는 당년 화룡현일대의 항일구국군을 가리킨다. 1931년 《9.18》사변후 중국륙군대 왕덕림의 부대에서 중대장으로 있던 공광의가 항일구국의 기발을 든데서 재빨리 항일구국군 1개퇀이 무어지고 1932년 음력 3월 3일에 이도구일제경찰분서를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이른바 대도회싸움이란 이 습격전투를 가리킨다.⑧ 그외 대도회는 또 남평 등지에서 수차 습격전을 벌려 적들을 혼살냈다.
극본 《혈해지창》을 통해 본 극중의 인명, 지명 해석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장막극의 진실한 배경이 장백현일대가 아니라 동만, 즉 연변의 화룡현이고 그것도 어랑촌근거지에 집중되였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극본의 작자는 《혈해지창》을 서간도로 불리우는 무송, 장백지대에서 썼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지점을 어랑촌근거지 샘물골로 적어놓았다. 이는 어랑촌근거지에 대한 작자의 깊은 정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2) 30년대 장막극《싸우는 밀림》
《싸우는 밀림》은 1938년 이른 봄 창작으로 알려지는 5장 장막극이다. 극본의 작자는 《혈해지창》과 마찬가지로 《까마귀》라는 필명으로 되고있는데 항일련군의 홍두산밀영과 산골마을 그리고 왜놈중위의 소굴 등이 교차적인 환경으로 펼쳐진다. 이 극본에서도 《혈해지창》과 마찬가지로 북간도의 흔적을 볼수가 있는데 《샘물골》, 《특설부대》 등이 그러하다. 특설부대는 일본침략자들이 항일련군에 대처하기 위하여 30년대 안도현에 전문 설치한 이른바 《토벌》부대이다. 하나 《싸우는 밀림》이 《혈해지창》과 다른것은 이 극본의 진실한 배경이 북간도의 화룡현이 아니라 백두의 헤이샤즈거우(黑瞎子沟)의 홍두산밀영으로 되고있다는 점이다.
진실한 력사를 펼치면 1936년 무송현성전투이후 항일련군 제2군 6사는 조선의 국경지대인 장백현에 진출하였다. 장백진출이후 6사부대는 백두의 홍두산줄기 국경지대에 처음으로 헤이샤즈거우밀영을 창설하였는데 헤이샤즈거우 제1밀영은 장백현 이도강에서 북으로 12킬로메터 가량밖에 안된다.⑩ 홍두산밀영은 헤이샤즈거우밀영지에서 약 24킬로메터가량 상거한 홍두산록 수림속에 있었는데 헤이샤즈거우에 자리잡은 오늘의 장백현 횡산림장 제1차간에서 5킬로메터밖에 안된다.⑪ 이 밀영가까이에 후세에 이름난 백두의 후방밀영- 바위굴병원이 있었는데 극본《싸우는 밀림》의 부제가 바로《홍두산에 매화가 핀다》이고 연극의 인물(유격대원들)들은 모두가 이 바위굴병원에 원형을 두고있다.
극중의 군사부장 박민은 실제인물 박상활에서 왔다. 박상활은 조선족이고 화룡현 약수동 사람이다. 그는 항일련군 제1군 제2사 군수부장인데 공무로 6사로 파견되여 오던 중 2군6사의 력사에서 유명한 홍두산전투(1937년 음력 정월4일)에서 부상당하고 발에 심한 동상까지 입은데서 홍두산의 바위굴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수술도구가 없은데서 그는 버린 통졸임통으로 톱을 만들어 썩어드는 열발가락을 잘라버렸다. 극본에도 통졸임통으로 톱-수술칼을 만들었다는 대화장면이 나온다.
극본에는 또 임신부 계순이 있는데 그는 유격대군수부장 박민의 안해로 등장한다. 진실속의 인물 리계순도 임신부로서 당년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사람이고 항일련군 제2군 제6사의 녀전사였다. 그는 임신한데서 부대를 따라 행동할수 없어 바위굴병원에 남았었는데 1937년 겨울 적들의 돌연습격으로 불행히 체포된후 장백현성에 끌려갔다가 감옥에서 남자애를 낳았고 체포되여 10여일만인 1938년 1월의 어느날 장백현 리수구의 대호에서 적들에게 살해되였다.⑫ 극본에서의 계순의 형상도 리계순이라는 이 실제인물에서 왔다.
이로부터 우리는《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은 당년의 화룡현 어랑촌 근거지와 장백현의 홍두산밀영이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극본의 작자는 이 진실한 배경인 생활원천에다 허구를 가하여 선후로 두 극본을 창작하였다.

4. 두 극본의 작자문제

30년대 장막극《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이 광복전 중국 조선족연극사의 불후의 대표작이 라는것은 쟁론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두 극본의 작자는 모두《까마귀》로 되여 그 진실한 작자를 헤아리기가 어렵게 되였다. 우에서 필자는 두 극본의 발굴과 발표, 두 극본의 진실한 력사배경을 밝히는가운데서 두 극본은 모두가 항일련군 제2군 제6사에 의해 창작되였음을 제시하였다. 두 극본의 진실한 배경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있다. 이는 모두 6사부대의 활동범위내에서 있은 일이다.
여기에는 또 색다른 근거도 없지 않다. 두 극본의 서두에는 모두 유격대원들이 축지법에 변신술을 쓰면서 《신출귀몰》한다는 장면이 나온다. 유격대원들을 놓고 주고받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지적할것은 그제날 연변이나 장백일대에서 축지법을 쓰고 변신술(둔갑술)을 쓴다는것은 오직 하나, 김일성장군을 두고 한 말이다. 1936년 9월초, 김일성장군이 지휘한 항일련군 2군6사부대(일명 조선인민혁명군)는 장백현 덕수골의 대덕수와 소덕수에서 련속 장백진출후의 첫 총소리를 울려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히였다. 1991년 10월 24일, 필자일행이 장백현 룡강에 갔을 때 당지 로인들은 당년 대덕수전투를 치른 신창동 뒤산더기를 《장군봉》이라고 부른다면서 그때부터 김일성장군이 《축지법》을 쓰고 《변신술》을 쓴다는 소문이 장백의 국경지대에 파다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만큼 민간에 널리 류전된 이런 말은 당년과 그후 김일성장군에게만 통했다.
또 하나는 마을의 왕로인이 밀영을 찾았을 때 극본의 주인공 박민의 입에서《조선광복회》, 《항일련군과 김대장의 부대》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그들이 당년 2군 6사의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극본에 나오는《조선광복회》는 당년의《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를 말한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이 조국광복회는 1936년 음력 5월 5일 력사적인 《동강회의》에서 6사사장 김일성에 의해 고고성을 터치였다. 동강회의지점은 오늘의 무송현 동강진동남쪽 2킬로메터되는 산아래 수림속에 위치하고있다. 그때 김일성은 동지들에게 흔히《김대장》으로 통했다. 당년 김대장이란 호칭도 김일성장군에게만 통하는 말이였다. 상기 여러가지 근거로부터 보면 두 극본이 모두 2군 6사에서 나온것은 력사의 사실이다.
하다면 두 극본의 작자로 통하는《까마귀》는 과연 누구일가, 지금에 와서 준확한 사실적자료가 없는 이상 누구라고 100% 찍어말하기는 어렵지만 까마귀의 적임자는 6사 사장 김일성과 사령부비서 리동백에게 집중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넘어야 할것은 당년의 가혹한 전투환경에서 누구나 필을 들어 창작할수 있은것이 아니라는것이다. 보고를 작성하고 자료를 모으고 창작할수 있은것은 사령부 지정인원들의 책임이였다.
당년의 2군 6사를 보면 6사사령부의 주요성원들로는 사장과 정위를 제외하고 6사후군부관 김주현(화룡현출신, 렬사), 6사 사부 선전과장 권영벽(연길현 출신, 렬사), 6사8퇀 정위 김산호(연길현출신, 렬사), 6사 7퇀 퇀장 오중흡(왕청현 출신,렬사), 6사 경위중대 중대장 리동학(연길현출신, 렬사), 6사 7퇀 정위 리동걸(화룡현출신, 렬사) 등 동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기 자기책임에 충실하여야 하기에 창작은 그들의 과업이 아니였다. 룡정대성중학교 졸업생이고 6사사부 조직과장과 선전과장으로 지냈던 권영벽이 주요적임자로 보이기는 하나 주력부대를 떠나 장백근거지창설에 뛰여들어 중공장백현위 서기책임을 맡았음으로 창작 역시 손을 댈수 없었다. 하기에 유일하게 손을 댈수 있는 사람은 6사 사장과 사령부비서 리동백뿐이다. 그 시절에 종이가 귀한데서 6사부대의 장병들은 손바닥만한 종이가 생겨도 아끼다가 모두 리동백에게 주었다고 한다.
먼저 6사사장 김일성을 보기로 하자.
조선의 이름난 문학평론가 안함광의 저서로 된 《조선문학사》는 1956년 판본⑬인데 이 조선문학사의 혁명연극부분을 보면 《혈해》의 두개 스토리를 소개하고있으나 우리가 오늘 보는 《혈해지창》과는 다른 이야기이고 작자도 밝혀지지 않고있다. 1960년도 조선 로동당출판사 출판으로 된 《항일무장투쟁전적지를 찾아서》에서는 1936년 가을 6사부대가 장백진출의 길에 무송현의 최남단마을-만강에 들리였을 때 연극 《혈해》를 공연하였다고 밝히고있다. 1959년 5월부터 10월까지 기간에 조선에서는 항일전적지답사단을 중국 동북에 파견하여 그제날 동만(연변)과 남만을 답사하고 1960년에 이를 책으로 묶어 출판하였는데 1959년 8월 이 답사단이 만강에 갔을 때 당지 조선사람들치고 《혈해》공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지난 90년대에 필자는 수차 만강을 답사한적이 있는데 1991년에 갔을 때 만강진에 조선족이 70~80세대가 살고있었다. 그때 73살에 난 리웅섭로인은 자기들은 조선 혜산에서 살다가 1944년에 만강에 이주했다면서 1936년에 서당자리에서 《혈해》공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를 그제날 연극장소-서당자리로 안내하였다. 지금은 만강진공소사울안으로 되여 있었다.⑭ 이에 앞서 우리는 무송현성에서 현당사연구실의 송영춘(1936년생)을 취재했는데 그도 만강의 서당자리에서 연극공연이 있었다고 소개하였다.⑮ 그는 원래 현위생국 부국장으로 사업하다가 1983년부터 현당사연구실에서 당사를 전공한분으로서 무송현 항일투쟁력사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자료나 조사자료에는《혈해》의 작자가 반영되지 않았다. 1981년 판본인 《조선전사》(19)에서도 그때 만강의 마을복판에 가설무대를 꾸미고 《혈해》(피바다)를 공연하고 연예공연이 있었다고 했으나(16) 극본의 작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혈해》의 작자가 밝혀진것은 1994년 출판으로 된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5)에서 이다. 김일성장군은 회고록에서 1936년 《동강회의》가 끝난 다음 사령부비서 리동백이 장군더러 조선녀성혁명가의 운명을 취급하는 연극을 만들어보라고 건의하였다면서 《혈해》창작과정을 상세히 취급하고있다. 둘사이 서로 사양하다가 결국 김일성장군이 극본을 쓰게 되였는데 대본이 완성된후 대본을 처음으로 본 사람도 리동백이고 연출을 맡아 나선것도 리동백이였다.(17) 그래서 1936년 8월 만강에서 무대에 올린것이 《혈해》연극이였다. 그러나 그번 《혈해》공연은 지금 우리가 보는 《혈해지창》대본이 아니다. 하기에 김일성장군은 회고록에서 그후 여기저기에서 여러 판본이 나온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여기까지 밝히고보면 1936년 가을 무송현 만강에서 공연된《혈해》는 김일성장군이 직접 쓴것으로 되여있지만 《혈해지창》에서 나오는 작자《까마귀》는 김일성장군이 아님을 알수 있다. 하여 이제 남은것은 사령부 비서 리동백이다. 긍정적으로 지적하기는 어려우나 여러가지 자료연구에 의한 추측은 모두 리동백에게로 쏠린다.
알고보면 리동백은 범상치 않은 인물로서 조선 함경남도 단천 태생이다. 리조말기의 참령이고 의병지도자이고 공산주의자인 리동휘와 한고향인데서 그의 영향을 심히 받았다. 후에 군비단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로씨야에 들어가 치따에서 리동휘를 만났고 《고려공산당》에도 가입하였으며 1925년 봄에는 서울에 가서 가명으로 조선공산당창립대회에도 참가하였다.(18)
그후 리동백은 북간도 동만에 와서 화룡현 달라자 사립명동중학부에서 교원사업에 나섰다. 그 시기 그는 허성도라고 부르는 이 중학부의 녀학생과 결혼하고 선후로 어린애 둘을 보았다. 1932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중공삼도구구위 제5임서기로 사업할 때 그는 안해(중공당원, 구위비서)와 어린자식 둘과 함께 삼도구 우심의 룡흥동과 우복동에서 가정생활을 하였는데 어랑촌근거지에 소환된후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하산 《귀순》하고 솔가하여 화룡현 사금구란 산골에서 학교교장질을 하였다.(19) 그러다가 1936년 새봄에 40대의 나이에 항일련군 제2군6사에 가입하고 6사사령부 비서와 《조국광복회》주요성원, 《3.1월간》주필로 활약하였다. 더우기 6사 사령부 비서처 책임자로 뛰면서 6사부대의 《대표적인 력사기록자》로 등장하였다. 이런 연유로 하여 그는 1936년에 6사 사장과 함께 《혈해》대본 구상에 직접 참녜하게 되였다.
우에서 지적하다싶이 《혈해지창》의 진실한 배경은 화룡현이고 어랑촌근거지이다. 이렇게 창작될수 있은것은 리동백의 경력과 관계된다. 해방후 수차에 걸쳐 구술한 리동백의 해당 자료들을 보면 일찍 중공삼도구구위 제5임서기로 사업했기에 삼도구와 그 산하 우복동일대를 손금보듯 알고있었다. 어랑촌근거지에 가서는 근거지돌격대 대장으로 뛰면서 1933년 여름의 우복동전투와 토산자집단부락습격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새별로 불리운 차룡덕정위와 함께 수차의 근거지보위전투, 처창즈근거지개척전투에 뛰여들었다. 《혈해지창》의 진실한 배경이 화룡현으로 된것은 이때문이라 하겠다. 문학창작의 원천이 실생활에서 온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이 장백현의 홍두산밀영이라지만 화룡현의 그림자를 여러곳에서 엿볼수 있다. 극본의 주인공들도 화룡현출신의 혁명가들이다. 이런 현상은 일찍 화룡현에서 혁명활동을 한 리동백의 독특한 경력과 관계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한가지 또 밝힐것은 1937년과 1938년의 투쟁정세가 극본의 창작에 좋은 기회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1937년은 장백현 항일투쟁의 전성기였다. 6사부대와 형제부대의 맹활약으로 하여 온 장백현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당의 조직과 조국광복회 기층조직, 반일회조직이 장백현의 골골마다 마을마다 깊이 뿌리를 내리였다. 이해 겨울 2군 6사부대는 몽강현의 밀영에서 군정학습을 하다가 1938년 봄부터 1군2사 등과 협동작전하면서 압록강연안에서 춘기공세를 발동하였는데 1938년은 우리 부대가 압록강연안에서 적들과 무수히 싸워이긴 휘황한 전투의 한해였다. 이런 투쟁정세하에서 극본을 창작하고 공연할수 있은 여가가 생기여 전투환경속의 상대적 평화로운 생활에서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이 세상에 나타났고 광복전 조선족연극사의 불후의 대표작으로 빛을 뿌리게 되였다.
그럼 두 극본의 작자《까마귀》가 리동백이 아니겠는가? 십상팔구는 그러한것 같다. 허나 준확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기에 추측에 맡길수밖에 없는 실정이며 앞으로의 연구에 돌을 던져 옥을 낚는 역할을 할수 있다면 예기의 목적에 이른셈이다.
유감스러운것은 1959년 두 극본 발굴당시와 그후시기 두 극본의 래력에 대한 고증과 확인을 거치지 않았기에 두 극본의 작자는 수수께끼로 남을수밖에 없다. 오늘에 와서 이 수수께끼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막히는것이 아니라 풀수있는 여건도 남기고있다. 발굴당시 두 극본의 필사본에는 《까마귀》라는 필명이 없었다는 설이 있다. 최근에 두 극본의 발굴자인 박두렬의 6촌형님 박춘범교수와 통화한데 의하면 두 극본에는 까마귀라는 서명이 없었다고 한다. 박교수는 그 시절에 박두렬이 자기가 살고있은 연길시 흥안향의 집을 찾더니 두 극본의 필사본을 가져왔다면서 작자서명이 없어 골머리를 앓다가 까마귀라고 써넣었다고 필자에게 알려주었다.(20) 아직 그 진실을 확인할수는 없으나 그때의 전후관계로 보아 무시할 일은 아닌것 같다. 전투의 가렬처절한 년대에 극본창작은 집체적토의를 거치는데다가 비밀문제로 개개인의 이름을 흔히 별명으로 대체한데서 어느 누가 자기것이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것이 통례였다.
1939년 5월이후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된 2군 6사는 장백현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무산지구에 진출하였다가 두만강 상류에서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일대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두 극본 필사본이 화룡현의 민간에 전해진 모양이다. 여기에는 추측되는 자료도 없지 않다. 화룡현의 해당 자료를 보면 리동백은 확실히 제6사 사부에서 비서공작을 했는데 그의 안해는 1935년 가을 안도현 처창즈근거지가 해산된후 조직의 지시로 안도현 이도백하 방면에서 《귀순》했다.(21) 남편이 6사부대에 참가한후 소식을 모르다가 후에 리동백의 안해는 재혼하고 화룡현 평강의 어느 골안에서 생활했고 그후 밀산현으로 이주했다가 1960년에 위병으로 사망하였다. (22) 두 극본의 필사본이 리동백을 통하여 그의 원가족에 전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화룡현 평강이라든가, 밀산현 등등이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주고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5. 결론

우에서 필자는 새로 발견한 자료와 조사확인자료에 근거하여 30년대장막극 《혈해지창》과 《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과 작자문제를 여러면으로부터 탐구하여보았다. 결론을 내리면 《혈해지창》의 진실한 배경은 화룡현, 더우기 어랑촌근거지이고 《싸우는 밀림》의 진실한 배경은 장백현의 홍두산밀영이다. 작자문제는 리동백으로 짚어지지만 누구라고 100%의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사정이다. 김일성회고록에 의하면 회고록(4)의 《조국광복회》와 회고록(5)의 《〈피바다〉 초연무대》, 《3.1월간》에서 리동백을 대서특서하면서 1936년 가을 만강에서의 《혈해》대본의 창작과정과 공연을 서술하고있지만 《혈해지창》의 출처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이다. 또 해방후 리동백은 연변의학원 총무처 처장까지 했다고 하고 숱한 증실자료를 남기였지만 두 극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여러가지 사정에 기인되는것 같다. 두 극본의 발굴자 박두렬이나 그의 형님 박두원이 건재한다면 두 극본의 허다한 수수께끼가 풀어지겠지만 지금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두 극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수수께끼와 유감을 남기고있다. 이는 우리들에게 두 극본의 창작경위와 작자문제, 민간에로의 류전, 창작시간 등에 대해 진일보의 심층연구가 필요함을 알려주고있다. 보다 많은 연구가들의 참녜가 기대된다.


[주해]

①《문학과 예술》(1986년 제2호)
《〈싸우는 밀림〉이 다시 볕을 보는 때에》(권철)
②《문학과 예술》(2002년 제6호)
《조선민족문학자료연구현황과 나의 편견》(권철)
③《문학과 예술》(2002년 제5호)
《중국조선족문학사편찬의 시말》(조성일)
④《중국조선족문학사》(조선문)
조성일, 권철, 최삼룡, 김동훈 등, 연변인민출판사(1990. 7) 제658페지
⑤ 2003년 12월1일 오전, 필자가 권철교수님을 취재
⑥ 2003년 12월 8일 오전, 필자가 연변대학 김운일교수를 취재
⑦ 2003년 12월 9일 아침, 필자가 연변대학 박춘범교수를 전화로 취재
⑧ 화룡현해당자료: 1~2-2
⑨《중국조선민족문학선집》(희곡문학편)
(북경대학조선문화연구소 편) , 민족출판사 (1991년7월) 제1페지
⑩《항일무장투쟁시기 장백혁명근거지》, 조선《과학원출판사》(1963년)
⑪ 1991년 10월24일 필자일행이 장백현 헤이샤즈거우를 답사
⑫ 원 훈강시 민족사무위원회 자료, 1986년 9월 담덕근, 장평정리
⑬《조선문학사》(안함광 저)
1956년 6월 조선 초판, 1957년 5월 연변교육출판사 번인출판
⑭ 1991년 10월 19일 무송현 만강진에서 필자가 리웅섭로인을 취재
⑮ 1991년 10월 17일 오전 무송현성에서 필자가 취재
(16) 《조선전사》(19)(항일무장투쟁사4) 제154페지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1년)
(17)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5)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년) 제56페지
(18)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4)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년)
(19)(21)(22) 화룡현해당자료: 1-1-27
(20) 2003년 12월 9일 필자가 연변대학 박춘범교수와 통화


《예술세계》 2004년 제3호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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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특송
날자:2006-03-01 03:54:24
우리민족 항일사에도 재미있는이야기가 많군요. 그리고 풀지못한 수수께끼도 많은듯 한데 두만강님께서 하나하나 풀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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