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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여행(33)ㅡ우린 백석라즈에서 서로 만났다
2006년 04월 17일 00시 00분  조회:3435  추천:79  작성자: 리함
내 고향 여행(33)

우린 백석라즈에서 서로 만났다

리 함

이제 다닥칠 4월 22일 지구일 등산활동을 앞두고 두어주일전부터 사계절산악회와의 합동등산을 추진했지만 눈이 내린 제 원인으로 4월 15일 주말에야 서로 만남의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첫 합동등산지는 기기괴괴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룡정시 로투구진 보원일대의 백석라즈이다.

1

백석라즈(白石砬子)는 아아한 련봉들이 남북으로 줄달음치고 아스라한 산줄기—바위줄기들이 처녀의 치마폭처럼 연줄연줄 뻗어내린 연변의 둘도 없는 등산코스로 알려진다. 이런 명산이요, 등산코스가 연길~안도행 아스팔트길 서남쪽지대에 위치했기에 렬차편을 리용해야만 했다.

연길역에서 도문-길림행 렬차에 올라 로투구역 다음의 보원역에 내리니 오전 9시직후, 백석라즈 북쪽가 무명야산지대에 옛도시시설물 자리와 옛 성터자리가 있다기에 등산코스를 가까이 동쪽가가 아닌 에돌아 북쪽가로 잡았는데 서쪽방으로 철길 따라 10리쯤은 걸어야 이를수 있는 곳, 몇리길 조이니 철길 서쪽지대, 부르하통하 강반에 하늘을 찌를듯이 창검처럼 들쑹날쑹한 봉우리, 바위줄기들을 거느린 웅장한 산체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저 바위로 된 산이 백석라즈입니다.》
벌써 수차나 백석라즈에 오른 사계절산악회 김철호회장이 비디오촬영기를 들다말고 소개를 떠올린다.
《야——》
연우산악회 일행은 탄성을 련발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계절산악회 김광영작가와 연우산악회 목장장군님은 백석라즈 전체 모습을 디지털사진기에 담느라 정성을 쏟고 김철호씨는 비디오촬영에 들어선다. 멀리서 볼 때 희부옇게 보인다 하여 흰바위—백석라즈라 불리우는 산체, 그 전체를 한눈에 굽어보는 그 시각이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부르하통하를 가로지른 이 구간 첫 철교를 지나 북으로 굽이를 도니 강량안 모두가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이다. 하늘을 떠받들듯 줄느런히 일어선 삼형제바위가 또 하나의 철교아래 강 동안에 인기적이였다면 강 동북쪽 전체를 누빈 소소리 높은산과 산릉선을 따라 부채살처럼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찬탄을 자아내기엔 족하다. 해란강의 석정 구룡아래 협곡지대인양 두산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이 구간 부르하통하는 백석라즈 북쪽가로 크게 삐여진 무명야산에 의해 멀리멀리 굽이굽이를 돌며 대형 조선어자모 《ㄹ》자형을 이루어 그야말로 장관이다.

두번째 철교를 지나 무명야산기슭을 에돌아 나아가면 세번째 철교에 이르는데 백석라즈에 오르는 북쪽 등산코스는 세번째 철교 동쪽가에서 무명야산으로 이어진다. 보원역에서 보원과 유수천사이 경계로 되는 무명야산기슭까지는 약 10리길이라 잠시 다리쉼을 하고 수십메터 높이를 이룬 무명야산 첫 높이에 이르니 강안 산발 따라 서남~동북주향으로 뻗은 옛성터가 나타났다. 사계절산악회 회장이고 연변일보사 기자인 김철호씨가 언젠가 터놓던 옛성터였지만 백석라즈산행에서 옛 유적지를 답사하리라곤 생각도 못한 터였다. 연변의 사학계도 모르는 미지의 옛성터라 필자는 뜻밖의 기쁨에 동료인 김철호씨와 더불어 기념사진을 남기고 성터우에 올라서며 말을 건늬였다.

《높이가 얼마나 될가?》
김철호씨는 키대중을 해보더니 긍정적으로 답한다.
《높이 2메터!》
《그래 높이 2메터!》

우린 서로 수긍하며 옛성터를 유심히 살펴나갔다.
이곳 옛성터는 높이나 밑면너비에서 이 몇달간 현지답사로 이어가고있는 화룡-연길구간 옛 장성에 비해 눈에 확연히 띄우리만치 커보이였다. 그런 옛성터는 서남 산봉우리로 한참 치닫다가 산중턱에서 동강난다. 옛성터 서북쪽은 절벽강산이여서 성을 쌓지 않아도 외적을 막기에 안성맞춤의 지대로 나타났다.

첫 산봉우리의 동북쪽가에 오르면 처음 발목을 잡는것이 옛 군사시설물자리이다. 이 자리는 고구려 옛 장성과는 달리 봉화대가 아니라 한면의 길이가 7~8메터쯤 되여보이는 정방형의 집터자리로 사면은 홈으로 패워있었다. 그런 모습을 김철호씨는 비디오로 세세히 촬영하여둔다. 그 촬영속에 필자도 비끼여드니 기념으로 될만한 답사의 한순간이였다.

옛군사시설물자리에서 조금 더 나아가니 첫 산봉우리가 우릴 맞아준다. 옛 성터자리는 여기에서 다시 동서로 수십메터 뻗으며 서남쪽구간을 막아나섰다. 이때에야 필자는 첫 성터자리나 이곳 성터자리 모두가 무명야산을 철통같이 지켜선 외적막기시설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먼저 본 중간지대의 집터자리는 무명야산의 서북쪽을 지켜선 군사주둔지 집터였다.

했으나 고고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무명야산의 옛성터와 군사시설물에 대해서 속단을 내릴수가 없었다. 무명야산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백석라즈의 첫 바위봉우리에 올라 필자는 어지간히 놀랐다. 무명야산은 온통 소나무숲을 이룬 지대이고 옛성터와 군사시설물 동남쪽지대는 펑퍼짐한 지대인데 울울한 소나무숲속에는 장방형모양의 옛유적지가 유난히도 눈을 자극한다. 그러니 백석라즈 북쪽아래 북으로 삐여져나간 무명야산 전체가 옛 유적지로 안기여든다. 이점을 동행한 김철호기자님께 알리였더니 그도 처음 보는 모습이라며 비디오촬영기를 들이댄다.

무명야산은 유수천쪽과 로투구 보원쪽을 한눈에 볼수 있는 경계지대로서 군사요충지로선 알맞춤한 지대요, 길목이였다. 요충지 남북간은 우중충한 산악지대여서 부르하통하 협곡지대만 막아서면 난공불락의 요새, 이로 볼 때 무명야산의 서북쪽만이 아닌 동남쪽 지대에도 옛성터가 있을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이후 적당한 때에 무명야산 전체를 참빗질하듯 답사해보자고 약속을 다지였다.

하다면 여기 무명야산 옛 유적지는 력사속 어느 시기의 산물일가? 연변박물관의 고고학자 박룡연선생이 무명야산 일대의 유수천 오호산성을 두고 돌로 쌓은 성벽의 규모와 축조방법으로 보아 훈춘의 살기성, 연길시 동쪽의 성자산산성과 류사하기에 고구려시기의 장성외부 요새지로 본것을 미루어보면 무명야산 옛 유적지를 고구려시기 산물로 보는것이 옳을듯싶었다. 이 옛 유적지는 고구려 엣장성이 지나간 로투구 동남쪽 구간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메터 되는 지대여서 더욱 그러했다.

2

무명야산은 어찌 보면 백석라즈 련봉과 동떨어진 지대이기도 했다. 이곳 야산 서남쪽 옛성터 바깥쪽은 그다음의 서남쪽 산봉우리와의 사이에 깊은 곬을 이룬 경사진 산지대였으니 말이다.

서남쪽으로 무명야산을 내리니 무명야산과 이어진 바깥쪽 산은 아츠라게 높아만 보이였는데 그런 산봉우리로 오른다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산허리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일행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벌써부터 지친 모습들이다. 그런속에서도 여러 주일만에 산행에 가담한 바람님 등 연우산악회 여러 녀사들이 동을 둔 앞에서 산을 겅정겅정 잘도 오른다.

산마루를 앞두고 그 아래 산모퉁이 남쪽가에 10여메터 높이의 낭떠러지 너럭바위가 유표하게 안기여든다. 언녕 너럭바위우에 오른 김철호씨는 뒤따르는 일행한테 그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휴식터로는 절묘한 산벼랑지대여서 찬탄이 절로 나는데 동쪽 낭떠러지 밖으로 삐여지며 자란 수십년생 소나무 한그루가 려산 낭떠러지의 소나무를 방불케 한다.

너럭바위 휴식터에서 보노라니 남으로 산세를 이룬 백석라즈산 전체가 측면으로 안기여들며 처음의 동쪽가보다 또 다른 기묘한 인상을 준다. 그 모습에 취하여 필자는 물론 김철호씨, 상공님, 신벗님 등이 기념사진을 남길 때 수정님은 동쪽가 소나무 첫머리에 걸터앉는다. 그 아래는 어마어마한 낭떠러지라 산신님 등은 위험하다고 소리지른다. 수정님은 그래도 내릴념을 않더니 이번에는 바람님과 뿌리님, 봇나무님, 봄비님까지 가담하여 다섯 녀사가 영화속의 다섯금화가 되고 너럭바위 소나무기념사진속에 들어선다.

이제 조금 더 오르면 서남쪽 산봉우리고 다음부터는 백석라즈 주봉과 어깨를 겨루는 산릉선이다. 이 릉선에 오르면 백석라즈에 다 오른것이나 진배없는데 산봉우리 남쪽구간을 비껴가던 김철호씨가 어쩌구려 두발이 동시에 메돼지잡이 옹노에 걸려들어 저만치 허궁 넘어진다. 다급한 소리에 사계절산악회의 소설가 권중철 등이 씽하니 달려간다. 용수철 옹노였으니 망정이지 옥죄여드는 쇠옹노면 큰일날번 했다. 모두가 옹노놓은 무모한 인간을 질타할 떄 사계절산악회의 김광영씨와 권중철씨는 옹노를 그대로 두면 뭇짐승들이 걸리여든다면서 련이은 두 옹노를 풀어내느라고 고심한다. 일행 전체가 옹노구간을 지난후에도 김씨, 권씨는 이윽토록 옹노를 풀어내고서야 직성이 풀려한다.

인젠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되였다. 백석라즈 주봉으로 이어진 산발 따라 남진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만 진다. 그속에서 일행은 어느결에 백석라즈의 첫 바위산 봉우리로 치달았다.

첫바위산 봉우리 아래 북쪽가에 동으로 삐여진 산코숭이가 보이였다. 별명이 산곡(山谷)이라고 《들개》로 자칭하는 김철호씨가 어느결에 동쪽가 바위코숭이에 올라 비디오촬영에 열을 올린다. 뒤따르던 김광영씨, 상공님, 목장님, 필자 등이 합세하니 천하의 절경 예 아닌가싶다. 북쪽 최단거리서 창공을 떠이며 일어선 줄느런한 백석라즈련봉과 그 줄기를 측면으로 굽어볼수 있는 최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라, 아아한 련봉아래 여러 갈래의 산줄기들이 바위무리를 이루며 부채살처럼, 처녀의 치마주름처럼 눈뿌리 시도록 아스라게 내려다보이는 산아래로 뻗어내리지 않았는가. 그 주름진 장쾌한 모습은 마치 난바다의 격랑이런듯 세차게 굽이치며 금시 다닥칠듯싶다.

그야말로 백석라즈 전체를 굽어보는 최적지다. 후위에서 움직이던 두 산악회의 《남사》님들은 녀사님들 못지않게 기념촬영에 열올린다. 까딱하면 아래로 굴러떨어질 천야만야 기암절벽을 두고도 대수로와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촬영하는 이는 이름난 사진작가 김광영씨라면 우리 목장님도 뒤질세라 디지털사진기 셔터를 부지런히 누른다. 그럴 때 산매 한마리가 축복이라도 하듯 절벽강산의 반공중에서 유유히 날아예며 커다랗게 반원을 짓는다. 절벽강산이 하도나 아칠하여 반공중에서 날아예는 산매는 발치 제아래 감감하게 내려다 보이는걸가.

난감한것은 우리의 목장님, 간밤에 늦도록 쉬지 못하고 아침식사도 설때렸다더니 사맥이 다 풀린 모양이다. 내내 그러한 모습이니 백석라즈 이곳 산행은 그로 말하면 짜장 고역이기만 하다.

첫 바위산 봉우리를 지난후 남진하던 산세는 서남쪽으로 굽이를 탄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깍아지른듯 층암절벽구간이라 남쪽구간이 천야만야한 현애절벽일 때 북쪽구간은 낭떠러지식 바위릉선이다가 급경사비탈을 이루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도 벼랑릉선들이 소나무로 덮히고 백석라즈를 둘러싼 산맥 전부가 울창한 나무숲으로 덮히여 신나기만 하다. 권중철씨는 연길의 뾰족산일대는 물론 백석라즈 서남쪽 수림가에도 메돼지가 출몰한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저그만치 일행이 17명이나 되니 그 기세에 어느 눈먼 멀쩡한 메돼지가 가까이 다가서리라싶다.

소나무 우거진 걸음걸음 층암절벽길은 즐거움과 유쾌함의 연속이였다. 불현듯 또 하나의 올리막 벼랑릉선구간이 나서고 앞에 선 상공님은 가랑잎에 숨은 얼음이 깔렸다며 거듭 주의보를 튕겨준다. 그러는 상공님이 고맙기는 한데 숨은 얼음구간을 지나니 몇메터 잘되는 바위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바위산우에서는 봄비님이 기다리다가 홈이 진 바위구간으로 톱아오를수 있다고 한다. 바위산밑으로 돌아갈수는 있었으나 바위산을 돌파하는 그 기분이 그리도 감미로울수가 없다.

바위산 돌파후 바로 눈앞이 백석라즈의 주봉인가 했더니 아니였다. 바위산을 한단계 더 올라가서야 주봉이 나타났는데 아아한 주봉의 동서남북 구간은 전부가 험준한 메부리구간으로서 남쪽가는 내려다보기에도 다리가 떨려나는 현애절벽을 이루고있었다.

보다 위태로운 산세요, 백석라즈 주봉의 서남쪽 내리막이였다. 남쪽가는 다듬어 세운듯한 현애절벽이요, 서쪽가는 내릴수 없는 울퉁불퉁한 바위너설이라 어쩔수 없이 서남쪽 내리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너비가 한메터도 되나마나한 톱날 같은 바위츠렁은 하늘을 썰려는듯 너덜을 이루어 여기 공간지대를 거치자면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나기가 십상이다. 와들봉이란 이름은 그래서 생겨났는데 지난해 어느때던가 사계절산악회의 한다 하는 남자산악인이 지레 겁을 먹고 퍼더앉아버린데서 지어진 멋진 우리식 이름이였다.

4월 15일 산행도 례외가 아니였다. 연우, 사계절 남자들중 앉은뱅이걸음으로 겨우겨우 내린이가 한둘이 아니였으니 산세의 험준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아직도 뒤에는 7~8명의 남녀산악인들이 있은데서 앞서간 뿌리님, 봇나무님, 봄비님 등은 아슬아슬한 바위너설의 저쪽에서 가슴을 옥죄이고 맞은켠 산릉선에 다가간 바람님, 수정님은 장난기가 동하다가도 응원에 열을 올리느라고 야단법석인다.

그래도 산악인들은 산악인들이였다. 평지를 걷듯이 주저없이 내리든, 앉은뱅이걸음으로 내리든 모두가 무사히 울퉁불퉁 바위버럭구간을 통과했으니 시름이 놓이였다. 험악한 바위너설구간을 지난후 주봉의 서남쪽이나 맞은켠 산릉선에서 마주 볼 때 아스라한 현애절벽우를 어떻게 지나왔나싶었으니 너나없이 아래를 먼저 내려다보았더면 지나기 어려웠을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렇듯 백석라즈 주봉과 그 서남쪽 내리막지대는 험요한 바위너설지대였다. 주봉에서 사방을 일별하니 서쪽의 유수천일대와 유수천 동쪽의 남쪽, 북쪽 골짜기, 동쪽과 동북쪽의 보원 그리고 로투구벌, 남도끼봉, 북도끼봉, 남쪽의 천보산행 골짜기 모두가 새뽀얀 운무속에서 거뭇거뭇한 원체를 드러내는데 백석라즈 산아래를 감돌아흐르는 부르하통하는 겨우내 얼음속에서 풀려나 천길만길 나락밑으로 흘러내리듯 철썩처절썩 바위기슭을 갈겨댄다. 산천이 이같이 절묘하고 아름다와 산악인들은 장백산을 제외하고 연변에서 두번 다시 찾아볼수 없는 명산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4

창공을 떠인 백석라즈주봉을 지나면 줄느런한 산발. 기본산세는 동남으로 흐름을 바꾼다. 보통님은 어느결에 주봉의 맞은켠 산릉선 바람 한점 없는 펑퍼짐한 지대에 내려가 자리를 잡고 두 산악회 일행을 부른다. 그리곤 여느때와 같이 배낭에 지닌 소형곤로를 꺼내 따끈따끈한 두부장국을 준비한다.

점심참에 모여앉은 두 산악회 일행은 한가족 같다. 무랍없는 분위기속에서 오찬을 마치니 정오 12시가 금방 지난 시점, 일행은 다시 귀로 산행길에 오르는데 동남쪽 첫구간이 또 부르하통하 수면우로부터 뻗어올라온 절벽강산줄기이다. 그러니 백석라즈 전체로 보아 저아래 강기슭부터 뻗어오른 깊은 골은 4~5개에 달하고 골과 골사이는 들쑹날쑹한 바위줄기로 이루어지고있었다. 수천수만년의 모진 세월속에서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기기괴괴한 자태를 떨치며 거연히 솟아있는 내 고향 연변의 백석라즈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동남쪽 첫 구간을 지나면 산세는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그에 따라 동북면은 절벽강산이여도 서남면은 경사진 숲속 산지대여서 가슴을 옥죄여야 할 구간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채로운것은 산발을 따라 자란 고목류 소나무들인데 수십년 혹은 반세기, 100여년 생이 됨직한 소나무들이 밑둥은 아름드리여도 키가 모두 난쟁이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산발의 여기저기에 죽어넘어간 아름드리 난쟁이들이 가끔 눈에 띄워 대자연속 원시림이 눈앞에 펼쳐지는상싶다.

또 한두개 산봉우리를 지나니 앞서가던 산신님이 한 바위산 소나무아래서 정좌한채 지긋히 눈을 감고있는 모습이 안기여든다. 그 모습이 진짜배기 산신님을 방불케 하여 놀래우기도 저어되는데 이윽토록 산신민은 일어날념을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풍경이라면 또 하나의 풍경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두가닥 소나무새로 얼굴을 내밀고 사진 찍는 수정님의 우습꽝스러운 모습.

이것이 연우산악회의 산행 스케치이다. 번마다의 산행이 자연과의 령거리 만남이라서 번마다의 즐거움과 유쾌함, 거쁜함으로 이어지니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주말산행이 기다려지는걸가, 산악인들마다의 마음의 발로라 하겠다. 연우도 그러하고 사계절도 그러하다.

두 산악회—우린 백석라즈에서 서로 만났으니 다음 만남은 어느때 어디일가. 귀로의 휴식시, 보원역에서, 연길행 달리는 렬차에서, 연길시가지의 고려신선로에서 연우일행과 사계절일행은 먼 후날 추억이 남을 시각시각을 만들려고 내내 하나로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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