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변이 낳은 천재적인 우리 조선족시인 윤동주서거 60주기가 되는 해이고 윤동주시인이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에 따라 윤동주시인은 낯선 사람처럼 서먹서먹하던데로부터 친근한 존재로 알려져왔고 시인과 시인에 대한 시연구도 한걸음 한걸음 깊이있게, 심층에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시인이고 우리 조선민족(한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시인의 시인정의(定義)평가에서는 게걸음을 치면서 남을 따라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는데 머물러있다. 여기에서 저항시인이라는데는 이의가 없지만 민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평가를 놓고볼 때 한국이나 조선이 아닌 중국이라는 시점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을수 없다.
다 알다싶이 한국이나 조선은 단일민족국가로서 민족시인이라 하면 모두가 통하게 되여있다. 다시 말해서 민족시인이면 곧 조선민족(한민족)을 가리키니 타당한 시인정의평가라 하겠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다르다. 중국은 56개 형제민족이 단란히 모여사는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시인이라면 곧 조선족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다. 시인부름에서 여러개 형제민족을 통털어 민족시인이라 일컿고 있으니 민족시인이라는 정의는 우리 조선족사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헌데 무엇때문에 우리 조선족사회의 작가나 평론가들은 깊은 연구와 따짐이 없이 민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평가를 그대로 답습하기를 즐기는 걸가, 문제의 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동주시인은 연변에서 태여나 연변에서 자랐고 연변에서 소학교와 중학교공부를 하고 죽어서 연변땅에 묻힌 시인이다. 허나 력사적인 제원인으로 하여 시인의 모든 현존시고는 광복후 시인의 아버지분부와 시인의 녀동생 윤혜원녀사에 의해 한국땅에 머물게 되고 한국에서 첫시집이 출간되면서 시인에 대한 연구가 세월의 흐름속에서 깊이있게 전개되였다. 리념과 주의의 대립, 장기적인 봉쇄정책으로 우리는 이런 실정을 알수가 없었다.
또, 윤동주시인이 우리 조선족사회에 알려진후에도 시인은 《마치도 우리와는 시간상 거리가 먼 그런 력사인물처럼 생각되였으며》① 《마치도 우리 중국조선족과는 큰 인연이 없는 그런 시인으로 여겨》②지면서 한국이나 조선의 시인으로 착각되였기에 민족시인이라는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중국조선족 시인이라고 지적하지 못하였다. 지적하였다 해도 글이나 평론, 론문중에 스치고 지났을 뿐이지 시인정의평가에서는 의연히 민족시인이라는 이 평가를 따랐다.
다같은 조선민족(한민족)이라고 해도 소속나라가 다름에 따라 시인에 대한 시인정의평가는 다를수가 있는것이다. 이면에서 윤동주시인은 우리 민족이 공인(公認)하는 우리 조선민족(한민족)의 시인이기도 하고 세계적인 시인이기도 하지만 중국이라는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서는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다.
하다면 이땅의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민족시인이라는 부름으로부터 조선족시인의 부름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의 흐름과 과정을 거치였는가? 아래 윤동주시인의 부름의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2. 윤동주시인 부름의 변화과정
윤동주시인이 1985년 5월이후 일본의 저명한 학자 오오무라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알려진후 《문학과 예술》지에 의해 윤동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지면에 나타났다. 그 첫글이 박동철선생의 《고귀한 령혼을 부르며》③인데 그후 지면에 실린 글들과 더불어 윤동주시인을 모두 《저항시인》, 《민족시인》이라고 불렀다. 《비명에 쓰러진 저항시인—윤동주》④,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지켜》⑤, 《윤동주를 추억하여》⑥ 등 모든 글들이 그러했다. 윤동주시인이 서먹서먹하던 시절이라 그럴수밖에 없었지만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별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있다.
권위적인 연구집《조선족문학연구》 윤동주론에서는 윤동주시인을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고결한 민족의 지조를 간직하고 일제식민통치에 끝까지 저항해 나선 민족의 시인이다.》⑦라고 시인평가정의를 내리였다. 조선족시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감히 조선족시인이라는 평가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다.
1990년 7월에 펴낸, 조성일, 권철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사》 제5장 《김창걸, 윤동주》에서도 상기와 같이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자기의 시와 삶을 바친 재능있는 저항시인이며 인도주의시인》⑧이라고 못박았다.
《천지》 1987년 제12호는 윤동주 시묶음을 펼쳐내면서 윤동주시인을 《조선저항시인》이라고 했고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결전에서는 《민족의 저항시인》⑨이라고 규정했다. 그뒤 《문학과 예술》 1993년 제2호에서는 시인 탄생 75돐맞이 윤동주연구토론회 해당기사를 다루면서 《룡정이 낳아 기른 겨레의 저항시인 윤동주》로, 《문학과 예술》 1995년 제5호에 실린 윤동주서거 50주기 기념활동기사에서는 《세계적인 시인이며 중국조선족문화의 가장 걸출한 대표자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번 《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론문집》에서도 책제목부터가 《민족시인》이라고 점찍었다. 그때까지도 사상이 개방되지 못한 뭔가 두려움의 발로라 하겠다.
지난 90년 중반이후에는 민족시인과 조선족시인이라는 부름이 서로 교차되면서 큰 변화를 나타내고있다. 례컨대, 일철의 서명으로 되고 1998년 제1호 《연변문학》에 실린 《시인 윤동주의 생애》에서는 윤동주시인을 《해방전 조선족시문학의 최후를 빛나게 장식한 민족시인》 그대로라면 연변대《조문학부연구생론문집》(1) 《윤동주향토애의 심성과 그의 시세계》에서는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⑩라고 지적하면서 지난 시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1995년 제12호 《천지》에 실린 리상각선생의 평론 《윤동주의 시세계》는 《윤동주시인은 바로 이곳 연변에서 태여났고 연변에서 자랐으며 연변에서 공부하고 연변에서 시를 쓴 우리의 시인이다. 그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조선족이라고 할수 있다.》고 못박았다. 《우리의 시인》이면 조선족시인을 가리키는데 그때까지도 두려움이 아직 철저히 가셔지지 않아 《중국조선족이라고 할수 있다》면서 피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일찍 윤동주시인을 우리 조선족사회에 소개한 일본의 오오무라마스오 교수는 그의 한편의 글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에서 이땅의 우리 조선족들을 아래와 같이 깨우쳤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죽었지만 연변에서 태여났으며, 연변이 낳은 시인으로서 조선족문학속에서 장래에도 다루어질것은 틀림이 없다.》⑪
이 글에서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를 《조선족시인》이라고 굳이 찍지는 않았으나 연변이 낳은 조선족시인임을 환기시켜 주고있다. 이와 비슷한 평가는 1991년 8월 22일부 《길림신문》3면에 실린 림연선생의 종합글 《고향이 낳은 시인—윤동주》이다. 지난 80년대 중기에 조선족사회에서 지면에 윤동주를 처음 소개한 공로자인 림연선생은 윤동주를 《고향이 낳은 시인》이라고 대담히 대서특서했다. 조선족시인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시인이라고 명분을 주지못한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지난 90년대 초여서 그럴수밖에 없는 현실을 념두에 두면서 말이다.
이상 실례들에서 보면 윤동주시인정의평가에서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으로의 변화과정과 그 태동을 력력히 가늠할수 있다.
3. 2005년도의 획기적인 변화
올해 2005년이 윤동주시인 서거 60주기,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라는것은 윤동주시인에 관심을 둔 사람이면 다 알수있는 사실이다. 윤동주시인이 우리 사회에 알려져 20년을 맞이하면서 윤동주시인 시인정의평가는 예전의 불투명한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으로 고착되고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시인 윤동주 조선족시인평가문제는 1995년에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께서 예리하게 지적했고 연변대 최문식, 김동훈의 편으로 되고 연변대학출판사에서 1996년 12월에 펴낸 《윤동주유고집》에서도 시인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학계와 글쓴이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
최근 이태간 윤동주시인과 시연구, 소개글에서 조선족시인평가로 처음 떠오른 글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린 글—룡정향토순례(7)이다. 룡정향토순례(7)의 제목은 《명동이 낳은 내고향시인》인데 이글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을 《명동이 낳은 내고향 저항시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⑫라고 평가하였다.
그뒤 필자는 또 지난해 11월에 있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창립세미나에서 론문— 《윤동주시의 별세계》를 발표하면서 윤동주시인을 《내고향시인이요, 조선족시인》⑬이라고 재차 평가를 내리였다. 이 론문은 올해 《도라지》 제4호에 《윤동주연구특집》으로 실리였다.
올해 윤동주서거 60주기를 기리며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내리는 룡정 동산의 윤동주시인묘소에서 60주기 기념행사를 가지였다. 이 기사가 필자의 서명으로, 《연변서 윤동주서거 60주기 추모모임이》으로 문화산맥사이트 www.koreancc.com ⑭에 올랐다. 이 기사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을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이라고 지적하였다. 2005년 2월 19일부 《흑룡강신문》 7면에서도 이와 달리 쓴 필자의 추모모임기사 《연변서 윤동주서거 60주년 추모모임을》을 실으면서 《2월 16일은 연변이 낳은 조선족시인 윤동주서거 60주년기념일》이라고 밝히였다.
상기 흑룡강신문 7면에서는 또 7면톱에 필자가 쓴 글 《연변이 낳은 천재시인 윤동주》을 같이 실으면서 윤동주시인을 두고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라고 극찬하면서 편집자의 말에서 《연변명동이 낳은 조선족시인》이라고 평가를 내려주었다. 지난 이태사이 조선족신문의 기사로서는 조선족시인평가가 처음인것 같다.
우리 글 신문의 선두주자—《연변일보》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연변일보는 2005년 2월 18일 4면에서 16일 윤동주묘소에서의 기념행사를 크게 다루면서 사진을 눈에 띄이게 실음과 함께 김인선기자의 기사 《윤동주시인타계 60주기 기념모임거행》을 실었다. 이 기사에서 연변일보는 《여기는 연변이 낳은 우리 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묘소》,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이라고 시인정의평가를 옳바로 지적하였다.
흑룡강신문과 연변일보의 적시적인 시인정의평가라 하겠다. 이에따라 2005년 2월 21일부 《생활안내》신문 5면에서는 필자의 글 《명동이 낳은 내고향시인 윤동주》를 실어주면서 편집자의 말에서 윤동주시인을 《명동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이라고 정의를 내리였다.
이에 따라 연변일보는 윤동주시인 시인정의평가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드팀없는 평가를 주었다. 2005년 7월 8일부 연변일보 3면에는 김철호기자가 쓴, 꽤나 큰 편폭의 글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가 실리였는데 이 글은 결말부에서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족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 앞에 나섰다.》고 옳바르고 타당한 평가를 하기에 이르렀다.
글을 발표하기전에는 글쓴이의 개인견해라 하겠지만 글이 지면에 발표될 때는 개인견해만이 아닌 그 신문, 그 잡지의 견해로도 된다. 편집자의 말은 더욱 그러하다.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생활안내 등 신문들의 솔선수범으로 하여 윤동주시인은 이곳 조선족사회에 알려져 20년만에 모호한 민족시인이 아닌 우리 민족의 시인으로, 조선족시인으로, 조선족의 아들로 이 세상에 장엄히 나타났다.
조선족시인 이 문제는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님께서 일찍 룡정시 1995년 윤동주 서거50주기기념세미나에서 첨예하게 지적하였다. 교수님은 연변대 조선한국연구중심, 연변작가협회,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 조선언어문학부, 연변대 조선언어학연구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에서 공동주최한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기념학술연구회》(2월 14~15일)에서 기조발언을 하시면서 윤동주시인은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라고 대성질호하였다. 교수님의 옳바른 시인평가와 정채롭고 심각하고 설복력있는 분석은 학술기념회 참가자들의 공명을 일으켜 그번 기념회를 《시인 윤동주의 호구를 붙여주고 신분증을 내여주는 회의》라고 뜻깊게 불렀다. 그러나 그번 학술토론회 론문집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조선족시인이라고 책제목을 달지 못하고 민족시인이라고만 평가하였다.
윤동주시인 리해와 시인연구의 부진을 그대로 말하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그후 10년간도 우리 문단의 학계나 글쓴이들은 많이는 의연히 민족시인을 받아들였고 일부는 우리 민족시인, 조선족문학사의 뭐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족시인이라고 떳떳이 평가를 내리지 못하여 유감을 남기고있다.
4.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우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평가가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의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그럼 어찌하여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이여야 하는가? 이는 학계나 어느 개인이 윤동주시인의 실제를 떠나서 자기나름대로 지적할수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 알자면, 설복력있게 보여주자면 윤동주가족의 이주와 가족관계, 중국적에로의 가입, 청소년시절의 윤동주시인의 실태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된다.
(1) 이주와 가족관계
이땅의 조선족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것은 19세기 60년대부터라고 해야 할것이다. 18세기 중엽이후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이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이주는 아니였다. 19세기 초엽이후 그 수가 늘어갔다해도 본격적인 이주붐이 일지 않았다.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고 1869년과 1870년엔 또 련속 대한재가 덮치자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생활고를 헤치고저 분분히 두만강을 건너섰다.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시작인데 그후 조선 회령부사 홍남주로 인한 월강해제소식과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페지는 대이주붐을 일으켰다. 윤동주의 선조들도 이같은 이주의 물결을 탔다.
윤동주시인의 윤씨가문은 파평윤씨로 알려진다. 이들 《윤씨가문은 본래 종성사람들이지만 회령에서 살다가 넘어갔기 때문에 그후 회령 윤씨가문으로 통했다.》⑮ 그러니 함경북도 회령서 살다가 종성으로 갔다는 말인데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에 4남 1녀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섰다. 처음 자리잡은 곳이 두만강 중류대안인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이다. 그때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겨우 11살밖에 안되였다.
그후 1899년 2월 18일에 종성과 회령의 우국동지들인 김약연 등 4대가문의 대소가문 스물두집의 식솔 도합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오늘의 명동, 장재에 와서 자리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그 이듬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왔다. 한데서 명동촌에 삶의 터전을 닦은 5대 가족⒃은 곧 김약연의 전주김씨가문, 문병규의 남평문씨가문, 김하규의 김해김씨가문,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남위언씨의 남씨가문 등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아버지 윤영석(1895—1965)과 어머니 김룡(1891—1948)사이 맏아들로 태여났다. 어머니 김룡은 열렬한 민족독립선구자이고 교육가였던 김약연선생의 누이동생이였다.
이런 실정은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도 중국태생이고 윤동주도 중국태생임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보면 윤동주시인은 정판룡교수의 지적처럼 《전형적인 중국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첫째가는 근거라 할수 있다.
(2) 중국적에로의 가입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정식페지와 함께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되는 지역이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되였다.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고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이에 따라 시기시기에 따른 조선이주민들의 토지소유권문제와 입적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1909년 말에 청정부에서 최초의 국적법—《대청국적조례》를 제정하였다. 그뒤 이곳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김약연과 리동춘 등은 서로 토의하고 리동춘과 김립이 함께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간민회의 친중배일(親中排日)의 적시적인 조치였는데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다.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수 있게 되였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만호청원귀화입적 비준과 때를 같이하여 명동촌의 김약연 전주김씨가문과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등 5대가족은 물론 명동일대 조선이주민들이 모두 중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되였다. 이는 간민회책임자들인 김약연과 리동춘의 연구자료와 김약연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의 연구문집, 증언을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선참 중국적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인 윤동주는 1917년에 중국조선족의 가문에서 태여나 조선족으로 자라게 되였다.
이밖에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룡은 이땅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조선족가문을 이어갔다. 모친 김룡이 1948년에 사망하고 부친 윤영석은 1965년에 룡정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앞서 윤동주의 셋째동생 윤광주(1933년생)는 광복후 아버지와 같이 지내며 시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2년에 페결핵으로 타계함을 보인다. 손아래 녀동생 윤혜원과 둘째동생 윤일주는 광복후 한국행에 올랐고 윤혜원녀사는 지금도 연변출신의 남편 오형범선생과 같이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있지만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린 연변사람이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⒄하고 말한다.
이같은 사실은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임을 지적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동주시인이 중국조선족이라는 둘째가는 주요근거라 하겠다.
(3) 윤동주생애 20년 8개월 연변에서
어떤 이들은 윤동주시인은 평양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망한것을 리유로 한국이나 조선의 사람으로 착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민족시인 평가에만 류의하고 조선족시인으로는 평가하려하지 않는다. 윤동주는 확실히 평양, 서울, 일본에서 공부하였지만 이는 학문을 닦기 위해 떠난 공부행이였지 이주살이로 평양이나 서울, 일본 등지로 간것이 아니였다. 물론 공부하고 어디에 떨어지는가 하는것은 다른 문제이다.
본고는 윤동주시인의 생애를 두루 시간적으로 점검해보았는데 윤동주는 만 27년 2개월(해수로는 29년)의 생애를 살다가 떠나간 사람이다. 그중 생의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냈다면 생의 20년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내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윤동주시인은 소학교와 중학교시절을 명동소학교와 달라자 현립1교, 룡정은진중학교에서 보냈다. 평양숭실중학교 시절은 7개월, 서울 연희전문학교시절은 33개월, 일본 도꾜 릿꾜대학 문학부시절과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시절은 36개월—이 세곳 공부시절을 모두 합쳐보아야 6년 4개월밖에 안된다. 과연 생의 20년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냈다는 말이니 시인 윤동주는 명실공히 손색없는 연변의 아들, 중국조선족의 아들이다.
누가 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가, 한국에서는 우리 민족의 시인이라고 민족시인으로만 받들어왔고 이땅에서는 력사적인 분석도 없이 민족시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으니 윤동주는 마치도 중국조선족이 아닌것으로 착각되였다. 또 한국에서 발굴되고 연구되고 연변에 전해졌다하여 중국조선족과는 큰 인연이 없는 시인으로만 알았다.
5. 맺음말
본고는 우리 민족의 일류 시인 윤동주를 두고 머리말, 윤동주시인 부름의 변화과정, 2005년도의 획기적인 변화,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등으로 나누어 윤동주는 당당한 중국조선족시인임을 여러모로 검토하여 보았다. 또 조선족시인이 옳음을 사실로 보여주기에 힘쓰면서 중국으로 볼때 모호한 민족시인개념을 더는 쓰지 말고 조선족시인으로 평가하여 자리매김을 할것을 희망하였다. 이는 1995년 룡정서 가진 윤동주 50주기 기념학술토론회에서 고 정판룡교수님께서 벌써 첨예하게 지적하였다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조선족시인인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옳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차실은 윤동주시인에게 더없이 미안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인 윤동주는 확실히 조선족시인이 옳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시인만으로 평가와 정의를 내릴 의도는 꼬물만치도 없다. 다만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임을 자리매김하려는것뿐이다.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시인이면서도 전체 우리 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각광받고있는 분이다. 본고는 맺음말의 최후부분을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의 말씀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가장 민족적인 시인만이 세계적인 시인으로 될수 있으며 또 모든 세계적인 시인은 우선 먼저 민족적인 시인으로 되여야 하는것처럼 시인 윤동주도 우선 먼저 우리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전 민족의 시인이라는것이다.》⒅
주해:
① 정판룡, 중국조선족과 시인 윤동주, 민족시인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1995) ② 우와 같음. ③ 《문학과 예술》(1985년 제5호) ④ 《종합신문》(1987년 7월 29일, 8월2일부 3면) ⑤ 《천지》 (1987년 제12호) ⑥ 《문학과 예술》(1988년 제3호) ⑦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89.6) ⑧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⑨ 민족출판사, 1991년 7월, 제526페지 ⑩ 2003년급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오광욱의 론문 ⑪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 연변교육출판사, 2002년 8월 ⑫ 문화산맥 사이트 www.koreancc.com 2004년 10월 23일 ⑬ 20세기 코리아문화양상과 전망 (2004년 12월 17일) ⑭ 2005년 2월 17일 기사 ⑮ 서굉일 김재홍 지음,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 고려글방, 1997년 10월, 제96페지 ⒃ 우와 같음, 96페지 ⒄ 2005년 7월 8일부 연변일보 제3면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 (김철호 기자) ⒅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 제8페지
2005년 8월 5일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 (8월 15일)에서 발표 한국 《서시》문학 가을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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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특송
날자:2006-03-16 08:09:31
조리가 정연하고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론문을 통해 윤동주시인에 대하여
더욱 많은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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