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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발자취】(10) 광주봉기렬사릉원 다시 찾아서
2008년 05월 11일 06시 38분  조회:5085  추천:89  작성자: 리함
【겨레발자취】(10)  

               광주봉기렬사릉원 다시 찾아서


       세월은 살같이 흐른다더니 과연 그러한가부다. 지난해 5월 중순 광주에 가서 다시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더니 벌써 한해가 지나 또 5월이 돌아왔다. 5월이면 왜 광주봉기렬사릉원이 이 마음을 잡을까? 아마도 첫번째도, 두번째도 개자귀꽃 피는 5월에 광주를 찾으며 광주의 5월에 묻혀서일테지.

절강월수외국어대에 온후 로신과 조선문학연구과제가 내 마음을 끌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흥미로운 연구과제라 소흥의 로신선생 고향집, 로신기념관, 상해의 로신기념관을 두루 다녀 왔지만 광주의 로신기념관을 찾지 못함이 맘에 걸린다. 나는 시간을 내서 종내 소흥~광주행 쾌속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소흥에서 18시간 달려가니 남녘땅 광주의 아침직후, 쾌속버스운전사와 물어보니 소흥~광주는 1500킬로미터란다. 3000리를 달려 쾌속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주숙처를 잡기에 앞서 광주봉기렬사릉원부터 찾았다. 광주봉기렬사릉원 붉은 정문은 여느때처럼 두팔벌려 나를 얼싸안아 준다.

내가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처음 찾은것은20여년전인 1983 5월이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이고, 대학재학시절에 조선족문학사를 가르치는 리정문선생한테서 위대한 광주봉기에서 우리 겨레 200여명이 희생되였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나선 걸음이지. 그때는 30대의 인생문턱을 바라보는 한창 나이인데 20여년후 50대중반의 중년에 이르러 다시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으니 감회가 별스레 새로왔다.

붉은 철대문안에 들어서니 릉원의 모습은 예나 다름없건만 정문 저쪽 맞은켠에 보총을 높이 추켜든 모습의 돌조형상이 새로 보인다. 첫걸음 그 세월에 보지 못해 새 모습이지 총조형상 밑으로 다가가니 세워진 년대가 내가 광주를 찾았던 1983년의 몇년후 1987 11월이다. 20년전에 일어선 산물돌조형상이 그리도 새기분일수가 없다. 우리 당의 지도하에서 1927년의 8.1남창봉기에 이어 광주봉기를 단행한 그날의 무장모습이 아니겠는가.

광주봉기렬사릉원의 새변화는 총조형상만이 아니다. 정문에 들어가다가 오른쪽가에 크나큰 옹근 돌 앞면을 쪼아 조각한 엽검영원수 돌조각상이 전에없던 산물이였다. 그래, 엽검영원수의 빛나는 모습을 릉원내에 모실만도 하지, 엽검영원수는 1927 1211일 광주봉기를 직접 진두지휘한 분이고 우리겨레 전사들을 지극히 사랑한 위인이였으니깐. 중국 남부와 말레이시아가 산지라는 룡선화, 일명 선단화가 붉게 붉게 피여 원수님을 옹위하는듯한 모습이 좋았다.

릉원의 정문 넓은 광장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그지없이 웅장한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주덕원수의 친필제사로 된 이 광주공사렬사지묘에는 이름도 모를 우리 조선족전사들도 묻혀 있다고 하니 이 마음은 세차게 들먹인다. 포화가 흐르던 봉기의 나날 봉기의 최전선에서 싸워가던 우리 전사들, 적탄이 비발치는 사하전투에서 불행히도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여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히 희생된 우리 전사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광주봉기렬사묘를 내리고 호수로 이루어진 유원구를 지나면 오른쪽켠이 중조인민혈의정이다. 2층 정자로 된 중조인민혈의정은 우리겨레의 상징이기도 한 진달래도안이 박히여 감격적인데 엽검영원수의 친필로 된 혈의정 제사 또한번 가슴을 울린다. 혈의정안 넓은 콩크리트바닥우에서 서로 손에 손잡은 중로년남녀들이 사교무배우기에 한창인데, 평화로운 그네들은 80년전 광주 이땅에서 우리 조선족전사들이 피흘려 싸웠다는것을 알고나 있는지?!

우리 력사의 외통길을 고집하다보니 이 마음도 그렇게 응켜 버렸나, 신성한 혈의정내에서 흥이나 서로 춤추며 돌아가는 대조적인 남녀들을 보니 아니꼬아 그렇게 묻고만 싶었을까. 오늘이 어느 시대인데~~평화로운 그네들을 나 사고방식에 꿰여보나, 허허~나는 어이없이 웃고말았다.

나는 이윽토록, 이윽토록 중조인민혈의정을 떠나지 못하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땅에서 싸우다가 쓰러진 우리 전사들을 내내 지켜주고만 싶다. 이제 가면 또 언제 다시 이땅을 찾아 볼가, 언제 다시 우리 전사들의 충혼을 위로해 드릴까, 그러노라니 마음은 서글퍼만 진다.

쉽지 않은 광주행에 그젯날 광주봉기의 싸움터를 내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1983년 그 세월엔 뭔가 잘 몰라서였지만  20여년후 오늘엔 그저 지나칠수야 없지, 광주봉기의 우리 전사들 싸움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2008년 5월 11일)   



   

【부록】  



남녘땅 광주봉기렬사 릉원에서

                       

                        

                                      1

 

 

1981 연변대 재학시절에 조선족문학사 강사 리정문선생한테서 1927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1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종내 기회가 오고야말았다. 대학을 마친 이듬해 5월말, 개자귀나무꽃이 붉게 피는 계절에 나는 남녘땅 광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였는데 처음 광주에 가는 사람들치고 양성(羊城)이라 이름높은 광주시 전경을 눈아래 굽어볼수 있는 월수(越秀) 공원을 돌아보지 않으면 유감이라 한다지만 나는 선참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다.

그날은 해맑은 6 1일이였다. 중국출국상품교역회를 벗어난 광주시내 1호전차는 동으로, 동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는 사시절 봄과 같은 아열대풍취가 안겨들고 남녘땅에 특유한 오동나무가로수들이 줄달음쳐왔다가는 소리없이 뒤로 물러섰다.

1호전차는 어느덧 중산기념당, 광주농민운동강습소를 지나 광주봉기렬사릉원 앞에 멈춰섰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3년 여름이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은 당년에 봉기전사들이 피흘리며 싸웠던 시안의 홍화강(红花岗)에 자리잡고있었다. 1954년에 벌써 수건된 이 렬사릉원은 릉원과 원림 두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전체 릉원면적은 26헥타르에 달했다.

렬사릉원밖은 그 세월 연변에서는 흔치않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고 릉원정문 량쪽은 짙은 민족풍격을 띤 정자지붕형 대형기둥벽으로서 대형기둥벽에는 주은래의 친필로 된 《광주봉기렬사릉원》이란 금빛글발이 새겨졌다. 대문에 들어서면 휘넓은 광장이다.

광장량켠에는 뭇꽃들이 다투어피는 20개의 큰 화단들이 펼쳐지고 측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중충하여 한결 장중하고 숙연한 감을 안겨준다.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푸른 송백속에 모셔진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렬사묘는 옛 황릉들처럼 거대한 하나의 웅위한 묘인데 렬사묘를 둘러싼 콩크리트담장정면에는 《광주봉기렬사지묘》라고 쓴 주덕동지의 친필제사(题词)가 숙연히 안겨든다. 렬사릉원 안내자의 소개에 따르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용사들이 많고 한데 쌓여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어 무덤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렬사묘에는 조선족렬사들도 적지 않게 묻히였다고 동을 달았다.

《…》

나는 일순 할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에서 머리 숙여 묵도하고는 숙연한 기분으로 렬사묘둘레를 천천히 거닐었다. 높은 콩크리트담장에 둘러싸인 기둥체 꼭대기마다에는 앞발을 척 뻗친 40마리 돌사자가 올려져있었는데 렬사묘를 옹위한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름 모를 조선족 전사들은 누구누구일가?)

나의 머리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면서 두어깨에 지워진 조선족역사탐구자의 책임이 자못 무겁다는것을 새삼스레 깊이 느끼였다.

 

                                                     2

 

렬사묘를 내려 고색이 짙은 울창한 푸른 송백속을 지나면 넓은 호수속에 2층의 정자지붕으로 된 호수 정자가 나타난다. 호수에서는 천진란만한 아이들과 어린이들이 마침 6.1절이라 명절배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니 저 아이들은 얼마나 복 많은 세대들인가 하는 생각이 북받쳤다. 그 시각 저 아이들이 저 렬사묘에 잠든 용사들중에 우리 조선족의 전사들도 섞이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갈마들어 나 스스로도 피씩 웃고말았다.

유람지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꽃밭속에 잠겨있는 《중조인민혈의정》이 시선을 잡는다. 중조인민혈의정은 장방형모양의 2층 정자형으로 되였는데 혈의정 복판에는 거대한 대리석비석이 모셔지고 비석정문에는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업검영동지의 금빛 제사가 새겨져있다.

대리석 비석뒤면의 비문은 이런 글로 엮어졌다.

 

1927 12 11, 광주 로동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기세드높은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들 가운데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는데 그들은 중국전우들과 더불어 의기(义旗)를 높이들고 어깨겯고 싸우며 나중에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 영용히 희생되면서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표현하였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나는 정말이지 숙연한 기분속에서 인차 헤여나오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여나 20대 후반을 잡으며 그떄 그 시각처럼 조선족의 자부심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남녘땅 광주봉기와 그에 앞선 위대한 북벌전쟁에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했고 광주봉기에서만 150여명 아닌 200여명이 희생되였다는것은 대단하고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나는 중조인민혈의정을 천천히 거닐다가도 가까이 《중쏘인민혈의정》에도 가보고 민족풍격이 짙은 혈의정뒤 정자군체의 유람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당기는것은 중조인민혈의정 정자도안으로 된 진달래도안이다. 진달래도안은 중조 두나라인민의 친선을 상징하고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못 깊었다.

오늘날 진달래는 우리 연변에서 자치주 주화(州花)로 높이 받들리고있다. 20년도 넘는 80년대초반에 남녘땅 광주에서 진달래도안을 흔상하였다는것은 그저 스치고지날 일이 아니다. 진달래는 조선민족을 상징하고 선렬들의 붉은 피를 상징한다고 할 때, 또 저명한 하경지시인이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 라고 읊조렸을 때 50년대 그 세월 진달래도안 설계자와 결책자들에게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수 없었다.

 

                                                    3

 

중조인민혈의정에로 다시 돌아오면 혈의정 중심정자 량켠엔 각기 《L》자형 길다란 랑하와 정자가 있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다. 혈의정앞 작은 인공못에는 갓 피여난 소담한 연분홍 련꽃송이가 물에 동동 떠있고 분수는 반공중에 새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인공못에 이채를 더해준다.

정녕 잊지 못할 광주봉기렬사 릉원이였다. 허나 대학을 마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서는 위대한 광주봉기와 조선족전사들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자료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렬사묘아래에 자리잡은 광동성혁명렬사박물관을 찾아 해당 연구일군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박물관의 일군들은 내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왔고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당신들 조선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중년을 잡은 한 녀성연구일군은 중조인민혈의정 대리석비석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중 거의가 희생되였다고 씌여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면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녀성은 나를 박물관내 한 진렬대로 안내하였다. 진렬대 유리안에는 한 조선족전사가 사용했다는 막심기관총이 진렬되여있었는데 이름도 모를 그 전사는 광주쏘베트정부와 총지휘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이 막심기관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쓰러눕히였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의 나젊은 생명을 바쳤단다.

이야기 도중 중년녀성이 특히 마지막까지 사하를 지켜서고 철거를 엄호한것은 조선사람들로서 광주봉기연구에서 조선족은 주요한 연구대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눈굽이 찡 젖어들었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연구의 한 주요과제는 북벌전쟁과 광부봉기로서 관련론문이나 소개글들을 해당 학보나 조선문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에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널리 알려왔다.

더우기 광주봉기 61돐기념일을 맞으며 나는 1988 12 10일부 《길림신문》 제3면에 《광주봉기에서의 조선사람들》 장편글을 실었는데 편집부를 대신하여 쓴 《편집자의 말》에서 필자는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이렇게 개괄하였다.

 

12 11일은 광주 봉기 61돐 기념일이다.

위대한 광주봉기에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조선본토와 동북, 쏘련 연해주, 모스크바, 일본 등지에서 모여든 20대의 열혈청년들이였다. 거개가 이름있는 정치, 군사, 활동가들인 그들은 1919년 조선 3.1 운동전후 일제의 기반에서 조국을 구하고저 중국에 모여든 당년의 조선혁명의 선구자들이였으며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들의 정화(精华)였다.

애석한것은 철퇴의 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봉기에 참가한 우리 겨레 200여명이 남녘땅에 쓰러졌다. 그후 중앙쏘베트구역에 조선동지들이 희소했고 2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이 10여명밖에 안된것은 그번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선각자들 거개가 희생된데 기인될것이다.

중국의 절반땅을 누빈 위대한 북벌전쟁에 우리 겨레 수백명이 참가하였고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우리 겨레 200여명 혁명자들이 장렬히 붉은피를 뿌렸다. 이는 세인들앞에서 너무나도 떳떳이 납함할 겨레의 긍지와 자랑이다.

 

아마 이런 글이 진동이 꽤나 되는 모양이였다. 연변역사연구소 시절인데 길림신문 편집부를 통하여 문의하거나 감사하다는 전화나 전갈이 가끔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위안을 느끼군 하였다.

역사로 보아도 1927 12 11일 이른 새벽에 폭발한 광주봉기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던 수백명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하였었다. 조선인 김규광이 당책임자로 있던 교도퇀 제2영 제5련은 모두가 조선동지들로 이루어졌다면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200여명 전사들중에도 조선족전사가 150여명이였다.

, 광주봉기 폭발을 앞둔 역사적인 시각에 교도퇀 사령부에서 봉기동원연설과 전투과업포치가 있을 때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리용이 교도퇀의 새 퇀장(엽검영이 홍군 부총지휘로 되였음.) 엽용의 군사정치고문, 즉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광주봉기 주력부대인 교도퇀의 참모장이 우리 조선족이라는 말이다. 이에 앞서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인들이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각 봉기부대의 군사참모, 포병지휘관, 포사격수, 기관총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교도퇀 각 중대와 소대의 당대표들 중 조선인공산당원들이 적지 않았다. 군벌 장발규경위퇀의 조선인공산당원 문손적, 김형평 등은 중국인전우들과 함께 대부분의 관병들을 광주에로 이끌었다.

12 4, 중공광동성위 서기 장태뢰가 광주시내의 황화강(黄花岗)에서 교도퇀내 공산당원 활동분자회의를 열고 무장봉기의 의의와 교도퇀이 짊어져야 할 과업에 대해 피력할 때도 양달부, 김규광, 리용, 박영, 김은혁, 리빈 등 수십명 조선인공산당원들이 참가했으니 조선동지란 존재는 광주봉기에서 특수한 의의를 띠였다.

12 13, 철퇴하는 봉기주력부대의 엄호를 특무영의 조선족전사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사하에서 싸움을 벌리였다. 그러던 이들이 한떄 사하를 점령하였으나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여 끝내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고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봉기사령부에서는 철퇴중에 그들을 잊고 련계하지 못했던것이다. 하여 특무영의 150여명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된 비극이 초래되였다. 결과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족전사는 도합 200여명이나 된다.

당년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족들의 정화가 광주봉기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고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르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도 례외가 아니다. 더우기 광주봉기렬사묘와 중조인민혈의정에서 1년이고 2년이고 서있고만 싶은 심정이였다.

 

                                                    4

 

렬사릉원은 진정 아름다운 유람지로, 행복의 락원으로 꾸려졌다.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치는 6.1절호수가에는 붉은넥타이들이 환락에 들끓고있었고 어린이들을 태운 배들은 잔파도 일으키며 앞으로 미끄럼치고있지 않는가.

그날 6.1아동절 렬사릉원에서 어떻게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발길을 떠였고 어떻게 렬사릉원 정문을 나섰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머리속에 온통 광주봉기 아니면 조선족전사들이였으니 그렇게 된것 같다.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이 렬사릉원을 다녀온지도 어언20여년이 지났다. 허나  마음은 늘 젊음에 넘치던 그시절, 광주봉기렬사릉원 옛터로 달려간다. 그러면 광주봉기 조선족 우리 전사들과 맘속대화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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