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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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장편전기 설한 (8) 댓글:  조회:3373  추천:1  2014-03-05
  8.    반일의병운동은 어느덧 전국을 휩쓸었다.  시, 군의 소재지 등 도시들이 위치한 벌방지대에서는 물론 고산재대의 두메산골로부터 바다우의 작은 섬지대에 이르기까지도 의병들의 투쟁장소로 되었다. 의병총수는 7만여명! 일본측의 에 집계된 1908상반년도 각지 의병장수가 연해주와 간도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6명까지 포함해서 모두 442명! 농민출신, 시위대출신, 군인출신, 유생출신, 머슴출신, 포수출신의 의병장들이 이름을 들날렸다. 귀에 쟁쟁한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아주 많았다. 얼핏들어도 믿기 어렵겠지만 친일파인 일진회원이 의병장으로 된것이 있는가 하면 술장사,점쟁이가 의병장으로 된것도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애국심이란 그 하나의 공통한 마음이 있어서 그들은 생사판가리혈전의 한길에 떨쳐나선것이다. 력사가 시작된 이래 이때처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이 열렬하게 벌어진적은 없었다. 좌진은 들려오는 소식들을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시골에만 이대로 눌려있는건 무능한 존재로밖에 되지 않는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촉에 못이겨 서둘러 동생을 장가까지 보내고나니 한시름 놓이면서 그는 부쩍 마음뜨기 시작했다. 남편의 이러한 심기를 알아채고 지켜보던 안해는 남편이 어디로가면 자기도 따라가겠노라고 고집부리며 나섰다. 좌진이는 들어주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되 한가지 약속이 있었으니 무슨일  있든 참아야 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돌아와야한다는 것이였다. 좌진은 갈산을 떠나기로 결정지은 후 학교를 경영할 비용을 얼마가량 장만하여 김석범에게 주면서 그더러 학교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생 동진에게 맡기였다. 그런데 백설총이도 비룡도 다 죽고 지금 집에는 부림말밖에 없어서 좌진은 말 한필을 새로 사서 자기가 타고 안해는 가마에 태워 데리고 서울길에 올랐으니 때는 바로 1908년 4월이였다. 류달리 좋은 봄날씨였다. 이른아침에 가족과 학생들의 전송을 받은 그의 일행이 서산(瑞山)땅에 발을 들여놓으니 어느덧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좌진은 가다가 마침 길가에 술집이 있는지라 한잔 제꺽 할념으로 교군들더러 먼저가라해놓고 잠간 말에서 내렸다. 그가 술마시는 사이 가마는 그냥가서 어느덧 대호지(大湖池)라는 커다란 못가에 이르렀다. 룡봉산(龍鳳山)의 산맥사이에 놓여있는 이 못은 으슥히 외진곳이였다. 주막에서 나와 청처짐 뒤따르고있던 좌진은 문득 고개를 쳐들면서 앞에 가던 가마가 가지 못하고 웬 무장한 자들에게 포위된것을 발견했다. 가마가 불의 변고를 당하고있음을 깨달은 좌진은 말을 세차게 몰았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자기 처를 가마에서 뿌득뿌득 끌어내리우고있는 놈부터 잡아 머리우 공중에 번쩍 올렸다가 활 던져버렸다. 머리우에서 버둥질치던 그자는 저쯤 날아가 딴딴한 땅에 곤두박혔다. 순식간에 당하는 일이라 괴한들은 모두 어마지두에 악연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는 꼴을 보면서 좌진이는 대성질호했다. 괴한들은 찍소리 못하고 그냥 떨기만했다. 좌진의 음성은 조금 누그러졌다. 하고다니는것을 봐서는 당장 모두 때려죽이고싶다만 갈길이 바빠 그러지 못하니 썩 물러들가라했다. 그리곤 녀석 하나를 분김에 죽여버렸으니 유감이지만 어디 따뜻한 자리나 골라서 묻어주라면서 허리에 찬 전대를 끌어 은전 몇잎을 꺼내여 그자들에게 던져주었다. 좌진은 말을 마치고나서 가마를 메라고 교군들에게 이르곤 자기도 말잔등에 오르려 했다. 이때였다.  숲속으로부터 한자가 달려나오며 부르더니 앞에 와서 엎드리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20여명이 우르르 달려나와 역시 그본새로 땅에 엎드리였다. 먼저나온자가 머리들며 빌었다. 두령임에 분명한 그자는 이러면서 자기는 좌진이가 벌서 어린나일 때 수십명의 종들을 놓아주고 밭까지 나누어주었다는 소식을 판술이한테 들어서 알았노라고, 그때로부터 속으로 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했노라고 실토했다. 판술이란 좌진의 집에 있었던 어린 종이였는데 그한테는 외척의 아우라는거다. 판술이는 가노에서 해방받은 일을 늘 고마워하면서 주인이였던 좌진을 외우군하다가 지난해 봄에 죽었다 한다. 이러면서 그는 아까 물으니 교군이 학교 교장선생님댁이라 하기에 웬 칠일파량반녀석의 녀편네가 아닌가고 의심했노라했다. 아버지가 론산골 사또손에 억울하게 매맞아죽은 후 이길로 나선지도 어언 20년, 노리는건 언제나 썩은 량반이거나 못된 벼슬아치였지 백성은 아니였다면서 그는 자기가 오늘은 환장을 했던지 이 좌진의 앞에 큰죄를 지었으니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곰팡이 끼고 썩은 인간은 아니였다. 그래서 좌진이는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일으켰다. 그날 밤을 대호리(大湖里)에 묵은 김좌진은 객주집에서 그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밤깊도록 한담을 나누었다. 저쪽의 맹세였다. 좌진은 이렇게 되어 현실의 국난을 외면하고 떠돌아다니면서 로략질이나 해먹고있던 한 도적무리의 도장수(都將帥) 채기두(菜基斗ㅡ 채기중이라고도 함)를 알게 되었다. 이틑날 서울에 당도한 좌진은 가회동 일가친척집에서 멀지 않은 취운정(翠雲亭)밑의 솔밭에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 한 채를 얻어 들고는 곧 활동을 시작했다. 좌진이 다른데로 가지 않고 서울에 오게된것은 바로 자기가 해야할바의 일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보기드믄 장골인 그는 기마와 무예를 열심히 익힐 혈기방장한 젊은이가 아닌가. 그러한즉 의병대같은데 들면야 무엇이 모자라 남한테 뒤지랴. 허지만 그는 싸움판에 나가는것을 급해하지 않았다. 가정재산을 다 털어서 학교를 세웠고 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으로까지 된 그는 그만큼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격있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하기에 교육자로서의 자기는 이제라도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자각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있는 인재를 빨리 묶어세우고 훈련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통감부에 의하여 가 해산되자 한해전이던 1907년에 권동진(權東鎭), 남궁억(南宮檍 ), 장지연, 오세창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있었다. 이는 국력증강을 위한 교육, 산업의 발달을 내세우는 계몽단체였다. 그 중견을 보면 권동진은 정부의 륙군참령을 지낸후 1884년 갑신정변을 당하자 손병희, 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던 사람이고 남궁억은 1898년에 이 발간되자 사장에 취임했던 사람이며 장지연은 후에 그 신문의 사장을 지내다가 이 있게되니 유명한 론설 을 썻고 1906년 윤효정(尹孝定)과 를 조직, 씨베리아와 중국을 방황하다가 귀국한 사람이고 오세창은 고종 23년(1886년) 박문국주사(博文局主事)가 되어 기자를 겸하고 그뒤 농상공부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전국통신국장(郵電局通信局長)을 력임한 사람이다. 이같이 그들은 다가 위망과 선망이 있는 출중한 무관, 교육가, 언론가들이였다. 그들의 지도하에 움직이고있는 는 이때 의병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고무되여 의병들과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저지 파탄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며 친일주구단체인 를 분쇄할것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적으로 내세웠다. 좌진은 기껍게 이 조직에다 자기의 몸을 잠그었다. 는 그가 서울로 올라오기 한달전이던 3월에 함경북도 경성에다 지회를 내온바있다. 그 회원수는 200여명, 협회지회에서는 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함일학교 등을 세우고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때 애국적인 지식인 서울사람 리남기가 있었는데 그는 1905년 부령, 회령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두만강을 건너가 국내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의 한 지휘성원이였다. 그는 안중근한테서 국내의 반일의병투쟁정황을 들었고 겸해 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고있다는것을 들어 알고는 이를 반일의병투쟁준비에 리용할 마음을 먹었다. 좌진은 그를 적극 협력해주었다. 그들은 학생모집을 한다는 광고를 낸 후 운동회를 한다는 명목을 빌어 경성의 여러지방에서 온 애국청년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여놓고는 의병에 가입시켰으며 체육을 한다면서 그들에게 총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의병대에서는 또한 학교설비, 경비를 거둔다면서 1만 7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아 그것을 갖고 연해주에 가 무기와 기타의 군수품을 사왔다. 그리고 또 인민들에게 호소해 경성지방에 산재해있는 화승총들을 걷어들이기도했다. 한편는 자신의 조직을 급속히 확대하였는바 1908년 7월에는 자기 산하에 30여개의 지회와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애국단체로 성장했다. 좌진은 안창호(安昌浩), 리갑(李甲) 등 몇사람과 손잡고 본래있던 와 를 병합하여 를 설립했다. 는 애국계몽단체로서 자체로 월간을 간행하고 순회공연 등으로 매일 애국사상을 선전하였다. 이 기간 좌진은 의 창립자중 한사람이며 명망있는 로백린(盧伯麟)과의 우의도 깊어지면서 비록 나이차이는 14살이나되였어도 허심탄회할 수 있는 극친한 사이로까지 되었다. 그렇게 됨에는 로백린이 무관출신이라는데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독립사상이 투철하고 견정하며 따라서 재능이 있는 활동가로 좌진에게 안겨왔기 때문이다. 로백린은 일찍이 일본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서는 관립무관학교(官立武官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그러한 그는 나라의 국권수호는 군대가 하는 것인데 군대를 해산시켜버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느냐고 통탄해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자면 오직 무장투쟁만이 가능하다는것을 주장하고있었다. 이 점은 좌진의 생각과 꼭 같았다. 일제도 역시 이점을 알고있길래 조선의 무장력인 군대를 갑자기 해산시킨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자들은 조선의 군대를 가장 큰 위험물로 보았던 것이다. 박성환의 자결은 적개심에 끓고있던 군인들을 반일무장폭동에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8월 1일, 서울에 있던 조선군인 5,277명중 강제해산시키려는 인원이 3,640명이였는데 그들가운데 50%에 해당되는 1,838명이 군대강제해산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이 치렬한 반일폭동을 벌렸다가 결국은 탄알이 떨어지고 희생이 많게되니 퇴각하여 의병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싸우는지?) 여기 서울의 8.1폭동! 그것은 어느덧 군민일심이 되어 겪어야만했던 가렬처절한 싸움이였다. 서소문보루돌파에 성동했던 병사들, 남성문을 점령코저 적탄의 불비속을 헤치다 쓰러진 군인들, 치렬한 총격전 끝에 벌어진 육박전, 련지동 녀중학생들의 헌신적인 지원.... 폭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싸움의 영상이 눈앞에 겹치면서 조선인민이 나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류혈과 희생이 약속되는 이 길뿐이라고 좌진에게 가르쳐주고있었다. (동진이는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어머님은 무사한지? 참, 손녀를 보았다고 알리기도하고... ) 좌진이는 꽤 오래간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물론 어머니를 보려는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박성태가 서울로 돌아와서 그쪽 학교형편이 어떤지 근심되였기 때문이다. 시국이 자못 복잡한 때라서 학생들이 안착하고 공부할수 없었다. 그래서 좌진이는 석범의 의견대로 한동안 방학하기로했다. 좌진은 돌아올 때 대호리에서 뜻밖에 채기두를 만났다. 헌데 그의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였다. 두볼은 꺼지고 눈은 충혈되였으며 게다가 수염도 깎지 않아 험상해보였다. 채기두는 방가운 끝에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뽑았다. 얼마전 그는 일본 의 습격에 들어 부하들을 거의다잃고 겨우살아난 것이다. 좌진이한테 힐란을 들은 채기두는 인제와서야 단독으로 나다닌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하나뿐이 아니라 다른 의병대들도 그모양인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그러했다. 그 많은 의병대들이 한데 뭉치지 않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었다. 그러니 쓰거운 고배를 마실수밖에. 각지에서 진위대가 해산된 후 군인들이 자기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조성된 정세로 보아 반일투쟁을 벌리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선것이다. 이같이 어떤 군인들은 군대해산을 반대하면서도 폭동은 일으키지 못했으니 맹랑한 일이였다. 그런 때에 조직자가 있었다면 얼마나좋았겠는가. 북청진위대의 부교 조희명은 부대를 해산시키려하자 고 하면서 군대해산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 조희명 한사람의 마음이였으랴! 군대는 해산선고를 받았지만 애국심있는 군인들은 총부리를 침략자에게 돌려 군인된직책을 다하려하고있다. 경기도지평,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제천, 등 여러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해산당한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 권 12. 륭희 원년 8월 19일.) 이것은 조선중부일대에 가장 많이 모였던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넘어갔다는것을 보여준다. 헌데 그들마저도 통일적인 장악이 없이 지방별로 장수별로 제마끔 제멋대로 싸우고있었다. 좌진은 한동안 채기두와 함께 동분서주하면서 의병규합에 힘써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쉽게도 별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런일이 있은 후 그는 로백린과 손잡고 경성고아원을 도와나섯다. 라춘수(李春水)라는 사람   개인이 경영하는 이 고아원은 온 조선치고 하나뿐인 고아원이였는데 자금난과 기타일로 곤경에 처해있었다. 좌진은 자진하여 총무(總務)직을 맡고 경제해결을 위해 뛰였다. 그래서 경성고아원은 마침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때 모진 혼란에 빠졌던 서울은 차츰 안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울밖에서는 반일의병투쟁이 의연히 줄기차게 전개되고있었다. 에는 그해의 3월에 강원도지방의병들이 다진 의병결의와 어느 한 의병대가 통감부에 보낸 글 를 기록해놓았는데 4개조항으로 꾸면진 그 의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1. 고종을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치를 하게 하자. 2. 통감부를 없애치우자. 3. 일본관리를 전부 파면시키자. 4. 일본이 1905년에 빼앗은 외교권을 도로 찾아내자.   이것은 비단 의병들의 념원이였을뿐만아니라 전조선백성의 념원이기도했다. 그런데 이해의 9월부터는 일본 의 발광적인 탄압으로하여 의병투쟁은 더 어렵고도 참혹한 시련을 겪게되였다. 8월하순, 일본의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전라남북도에 림시의 를 무어보내는 한편 여기에 제6사단 공병소대, 헌병, 경찰관을 더 증가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경비부대와 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들을 지키게하였고는 포위선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야수적인 수사와 검거 및 학살만행을 감행하게하였다. 또한 전라남북의 연해에는 해군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하였다. 그자들은 9월 1일부터 작전에 착수하여 9월 20일경까지 20여일에 걸쳐 제1기 구역에 대한 을 끝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이 끝난지역에서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동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자 약이 오른 와다나베소장은 예전계획을 변경하여 제3기 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소수의 력량으로 지키게하고는 제1기, 제2기 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를 다시했다. 는 무리를 지어 매개마을의 주변을 포위하고 경계를 이중삼중으로 한 다음 수색에 달라붙었다. 수색은 먼저 동리의 동장을 불러내여 미리 만들게 한 남자명단과 자기들이 가지고다니는 민적등본을 대조한다음 남자들은 한사람 한사람 골라내여 취조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의병들은 물론 의병투쟁에 참가했을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 의병을 도와준 사람들, 의병참가자 또는 의병참가혐의자들의 부락민들을 남며로소 할것없이 마구끌어내여 총살, 교살, 타살, 생매장, 사지찢기, 가슴도려내기, 눈도려내기 등 가지가지의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으며 니 니 하면서 의병장들의 시체나 의병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니 그야말로 귀축같은 만행이였다! 이리하여 온 강토는 일본침략자의 야주적살인만행이 감행되는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피바다로 변하게되였다. 영국기자 맥컨지는 조선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침략군이 도시와 마을을 소각파괴한 정경을 목격하고 고 하면서 충청북도의 고 하였다.
43    장편전기 설한 (7) 댓글:  조회:2712  추천:1  2014-03-04
  7.    며칠후 좌진은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동생동진이를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그는 권리앞에서는 언제나 비굴하게 굽실거릴줄밖에 모르면서 먹고 사는것으로만 능사로 삼고 제집과 제가족의 영화라면 하늘이라도 팔아먹자고 드는 벼슬아치들은 구데기같다면서 그런자들을 믿고있다가는 큰일나겠다고했다. 그리곤 지금은 정말로 제 나라를 받들줄알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줄을 아는 참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을 키울 학교를 세울 생각이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여겨보았다. 어머니는 어느덧 아들의 격앙된 목소리에 정신이 빨려들어갔다. 좌진이는 이때를 놓지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나중에는 내가 아느냐 네가 료량해서 하려므나 하고 응낙을 표시했다. 좌진은 기뻐했다. 마음을 맞춰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그는 어머님은 물론 안해도 알라면서 학교운영에 드는 비용은 금년에 우선 자기네 몫으로 추수한 낟알 100석에서 얼마가량 팔아 쓰리라는것과 모자라는 부분은 석범이도 담당하게 되리란걸 말했다. 물론 선생질도 먼저 석범이와 자기가 하기로 했다.   1907년 3월. 따스한 햇볕아래 해토되여 동한(冬寒)에 묻혀 잠자던 모든 생명들이 꿈을 깨고 재생하는 고마운 때에 검은 먹글씨로 활달하게 라고 쓴 간판을 내건 갈산 325번지 좌진의 집에서는 학생들이 글읽는 랑랑한 목소리가 담장너머에까지 울려퍼졌다. 김병학(金炳學)의 후원을 얻어 석범이와 함께 손잡고 낡은집을 개조하여 학교로 하고는 학생을 모아 개학한지 어느새 두달이 된것이다. 학생수는 이제 42명. 그나마 반수이상이 좌진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집의 자녀들과 석범이네 친척아이들이였다. 어머니는 15살먹은 동생 동진이를 장가보내려했지만 좌진은 그게 뭐 그리 급한가, 먼저 눈부터 틔여놓고봐야지 하면서 동생을 자기가 꾸리는 학교에 넣어 공부시켰다. 그리고 석범의 아들 영호와 전날 스승 김광호역시 막내아들을 일부러 광천에서 데려다 좌진의 집에 류숙시키면서 이 학교에서 신식공부를 하게했다. 비록 학생수는 적지만 개화(開化)를 목적해 꾸려진 신형의 학교였던만큼 여느 서당도 비할수없이 그 전망이 환히 내다보이면서 자못 생기가 끓어나고 있었다. 좌진은 자기 머리를 진작 석범이모양으로 고쳐버렸다. 좌진은 가위를 들고 먼저 이전의 머슴아이들의 머리부터 잘라버리였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있는 학부형들은 이러면서 호명학교의 취지를 의심했다. 그래서 학생수는 단번에 반수나 훌쩍 줄어들었다. 좌진은 속이 꼴리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리해는 될 일이였다. 수천년 내려온 봉건적 낡은 습관이 일조에 고쳐지긴 어려운것이다. 좌진은 하는수없이 석범이와 같이 집집을 방문하여 머리깎는 일은 학부형들 자신에게 맡길테니 자식들의 공부는 그냥 시키는게 옳지 않겠느냐 동원해서 다시모인것이 지금의 학생수다. 그래서 학생들중 태반이 아직도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늘인 아이거나 상투를 동그랗게 올린 청년들이였다.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애로가 있는건 사실이였다. 좌진은 학부형과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 한문과(漢文課)도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호명학교의 학과목은 한문, 언문, 산술, 력사, 지리, 체조 6가지로 설정되였다. 자기 나라의 력사도 모르고야 제 선조를 어떻게 알며 제 선조도 모르고야 어떻게 민족심이 생기며 조국애가 생기랴. 좌진은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조선력사를 잘 배울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일과 반봉건적인 새 도덕과 수양을 각별히 중시했는데 이에 대한 교육은 수신과(修身課)에 배치했다. (이것은 확과목으로는 밝혀놓지 않았다.) 구체적인 학과분담을 보면 력사와 지리와 언문과 한문은 석범이, 수신과와 산술과 체조는 좌진이 맡았다. 석범이는 대단한 열성가였다. 그런데 학교일에 전력하다보니 약국일은 부업같이 돼버렸다. 그통에 가정살림이 지장을 받아 어렵게 되어갔다. 이런 사정을 알고 좌진은 처음은 쌀섬이나 장작을 보내여 도와주다가 그것으로 부족함을 느낀 후로는 아예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다싶히 했다. 그랫지만 석범이네는 내놓고는 마을에 약방도 의원도 없으니 석범이는 교사노릇하면서 의연히 약방의생노릇도해야했다. 이같이 일신량역을 하다보니 석범이는 견디기어려운때가 많았다. 했지만 그는 좌진이가 자기집재산을 싹 털어내여 후대양성에 바치는 거룩한 행위에 감복되여 어렵다는 말을 입밖에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기력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다. 석범이가 축가는 것을 보아낸 좌진은 학교용품도 살겸 서울로 올라가 선생 한분을 더 구했다. 배재학당출신으로서 석범보다 몇해 후배인 박성태(朴性泰)라는 청년이였다. 좌진이 서울로 선생을 구하허 갔을 때 대종교(大倧敎)창시자 라철(羅哲ㅡ라인영)이 몇사람과 공모하여 을사5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금시 서울판에 쫙 퍼지고 있었다. 때는 1907년 3월이다. 좌진은 은연중 그만 감정을 발로해서 당석에 있던 사람들을 아연케했다. 넌 도대체 어디서 난 괴짠데 겁도 없이 이러느냐 하는 눈치였다. 콩밥먹을까봐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고가 고맙긴해도 뒤공론이나하면서 숨도 크게 못쉬는 사람들이 가증스럽고 민망해서 좌진은 허구푸게 웃고는 그만 돌아섯다. 그날 좌진은 서울서 내려오면서 감나무묘목 300여주를 사서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부쳤다. 삼불산밑의 황무지를 개간해 학교실습지로 만들어 거기다 심을 계획이였다. 그는 학생들이 일하며 배우는 근공검학의 길을 모색했는데 그때의 형편에 이런것은 실로 새로운 창조였다. 좌진이 꾸리는 이 신형의 호명학교가 지난날의 서당과는 판다르게 생기였고 운영도 잘되여가는것을 보자 학생수가 날로 늘어나 그 전망은 락관적이였다. 호명학교는 홍성땅을 벗어나 차츰 널리 이름내게되였다. 이와 더불어 교장인 좌진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洪城支部長)의 직책까지 맡게되였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6월의 어느 하루 광천에서 이제는 칠순이 넘는 김광호로인이 갈산으로 찾아왔다. 좌진은 정깊은 옛스승을 반겨맞았다. 광호로인은 류학하는 막내아들을 보러 왔노라면서 호명학교가 잘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하니 자기도 기쁘다면서 좌진이를 비롯한 세 선생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건 기실은 현대의식으로 개명했다고 인정되는 이네들과 한번 속심을 나누어 자기의 울적한 기분이나 풀어보자는데서였다. 석범이가 로인의 말을 받았다. 성태도 한마디했다. 좌진은 이러면서 2천만백의동포앞에서 바닷물을 다 쓴다해도 씻지 못할 대죄를 지은 을사5적무리 의 주모자 리완용은 점점 철저히 왜놈의 상등개로 되어가노라했다. 광호로인은 가슴꺼지도록 한숨을 쉬곤 배일거두 최익현의 죽음을 애탄했다. 최익현은 본래 서울에 올라가 궁궐앞에서 상소투쟁을 벌리려고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되지 않자 전해의 2월달에 전라북도 태인지방에 가 자기 제자인 림병찬과 함께 반일의병투쟁을 벌리였다. 이 반일의병대는 일본침략자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도시점령을 위한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사이 의병수도 급격히 늘어나 900여명에 달했다. 일본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은 이 의병대를 속한 시일내에 없애려고 무력적인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국왕의 이름을 빌어 회유문을 보내는 기만적인 수단을 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동요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 할 기세로 나왔다. 반일의병대의 공격에 의하여 일시 수세에 빠졌던 일본침략군은 태인, 순창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다시강점하려고 남원과 전주, 광주 등지에 있던 와 친일주구들이 거느리는 진위대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공격하였다. 6월 11일 치렬한 접전 끝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의병대는 전패, 의병장 최익현은 부하 림병찬과 함께 체포되였다. 6월 18일 서울에 압송, 온갖 회유책으로 굴복시키려다가 성공못하니 적들은 그를 재판에 넘겼다. 그리하여 최익현은 감금 3년, 림병찬에게는 감금 2년형이 내려 대마도로 류배갔다. 1906년 12월 31일, 71살인 최익현은 단식사(斷食死)를 하면서 이런 시구를 세상에 남기였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 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탐할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좌진이는 이 시를 무척 마음들어했다. 그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애탄을 표시하면서 책가울이 보풀이 인 병서(兵書)밑에서 접혀있는 신문 한 장 끄집어내여 보라고 건늬였다. 그것은 이해의 정월에 나온 였다. 거기에는 고종황제가 새해잡아 지 기자 더클러스 스토리를 통하여 미국, 로씨야, 독일, 프랑스 4개국 수반들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친서에서 박제순이 조인한 은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은 가짜문서일뿐만아니라 일본이 그것을 제멋대로 공포하는것도 반대하였다는것을 밝히고 자기는 독립국황제권을 타국에 추호도 양보한 일이 없고 외국인이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한 일도 없으며 애당초 통감이 조선에 오는것조차 불허하였다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광호로인은 뒤말을 채 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좌진의 말에 광호로인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날 그는 젊은이들과 해지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서도 더 지내고싶어 좌진의 집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갔다.   삼불산밑 황무지에 마련된 10여두락의 학교밭에서는 감나무와 곡식들이 푸르싱싱 잘 자랐다. 호명학교는 실력과 평판이 상당해진터로 린근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와서 공부하는 학생수는 어느덧 몇백을 훨씬 넘겼다. 그래서 좌진은 학급증설을 위해 상촌(上村)에다 초가집을 한 채 짓고는 식솔들을 그리로 이사시켰다. 그런데 호명학교의 발전과는 반대로 국가의 운명은 나날이 더 험악해져 인제는 거의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에 빠지고있었다. 리완용의 승진이 말밥에 올라 씹히더니 7월잡아서는 월초부터 밤자고나면 범상찮은 사건들이 련달아꼬리물어서 온 나라가 비감과 분노와 절망과 흥분이 한데반죽되여 끓어번지는 소란스런 도가니로 되어갔다.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다.    일본대신 하야시가왔다.    황태자대리의 조서가 내렸다.    시위대군이 일본군과 충돌이 생겼다.    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였다.    리완용의 집에 불이 났다.    전 황제에게 태황제의 칭호를 줬다.    그러더니 24일에는 도 무슨 이라는것이 체결되였다. 그래서 며칠안되여 서울시민들은 반일폭동을 일으켰고 그뒤를 이어서 서울과 강화에서 군인폭동이 일어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강원도 원주에서도 군인들이 치렬한 반일투쟁이 벌어졌다. 중부조선일대는 어느덧 인민들의 반일투쟁기세가 고도로 앙양되였다.    그 다음달도 국론(國論)은 비등(沸騰)했다.    조선의 군대가 해산됐고    참령(參領) 막성환이 자결했고    시위련대와 일본군대가 충돌했고    영친왕 은이 황태자에 책복봉됐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42    장편전기 설한 (6) 댓글:  조회:3007  추천:1  2014-03-03
   6.         이틑날 한낮때. 이 집에 매여 지내오던 50여명의 남녀가노와 그의 권속들은 창문을 활 열어젓힌 바깥사랑방에 모여 무릅꿇고 앉았다. 모든 시선이 한사람ㅡ 문서더미앞에 묵묵히 앉아있는, 오늘따라 더 유표하게 새로 다린 도포에 통영갓을 말쑥이 갖춰 쓴 젊은 주인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 량반이 오늘따라 거인가와보이면서 또한 생소할 지경으로 괴이해보이기도했다. 노예를 해방시켜주다니! 세상에 그렇게 고마운 사람도있단말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과연 있는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주인 김좌진이 아닌가! 이같이 운을 뗀 좌진은 자기가 가노를 해방시키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리고는 그네들에게 지금은 나라가 풍전등화같이 위태로우니 각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배움에 힘써서 눈을 뜨고 나라일을 관심하는 국민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종들은 모두 젊은 주인의 장부다운 기개에 감동하면서 고마움이 무극했다. 좌진은 이러면서 여러대 묵어온 종문서를 나눠줄테니 받아서 불을 사르든지 아니면 찢어없애든지 마음대로 하라했다. 그리곤 팔만이, 춘봉이, 삼월이....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불러 옛문서와 함께 그들 매개의 가정에 나눠주는 새논문서를 주니 그걸 받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라곤 없었다. 이날따라 국화냄새 풍기는 마가을의 날씨는 류달리 청쾌했다. 좌진은 허리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날 밤 춘봉이네 늙은 할미는 랭수를 떠놓고 젊은 주인 좌진의 장수와 오복을 오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이틑날 광천에 간 좌진은 며칠후 비룡(飛龍)이라 이름지은 호마(胡馬)한필을 사갖고 돌아왔다. 옛병서만 읽어왔던 그는 현대적인 군사기술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거다. 하여 그는 집에 며칠 있지 않고 어머님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좌진은 련건동(蓮建洞) 278번지에 있는 친척집에 류숙을 정하고 매일 말을 타고 통학하면서 열심히 현대군사기술을 배웠다. 워낙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없고 무예도 익힌지라 좌진은 출중한 학생으로 인정받아 17살을 잡는해에 졸업했다. 그런데 1905년 그해는 조선에 비운이 내리는 해였던 것이다. 1월에 경성(京城)의 경찰치안군을 일본헌병대에서 장악했고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은 고종에게 일본침략의 위험성을 상소했다. 허지만 랭혹이 덮치는 이 위험을 무엇으로 어떻게 막아낸단말인가? 2월에는 일본인 마루야마가 경복궁고문에 임명되였다. 그리고 4월에는 나라의 신경계통을 장악하고있던 통신원(通信院)마저 일본의 손에 들어가버렸다. 8월부터 연해와 하천에 일본상선들이 제멋대로 싸다니였다. 항행무역권도 그자들에게 허용되였던 거다. 백성들의 원성은 높이 터졌다. 그렇다, 틀리지 않았다. 9월 5일, 로씨야전권대표 윗떼와 일본 전권대표 고무라 류다로는 미국 포스마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전쟁에 패한 로씨야로부터 려순과 대련을 포함한 료동반도에 대한 조차권, 관성자ㅡ려순간의 철도(소위 남만철도)와 북위 50도이남의 싸할린(화태), 오호쯔끄해와 베링그해에서의 어업권 등을 양도받앗을뿐만아니라 조선에 대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권을 승인받았다. 하여 일본은 이 조약에서 사실상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전환시켯던 것이다. 11월,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다시나타났다. 로일전쟁대 왔다간적이 있는 그를 사람들은 자기의 음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무수한 재난을 들씌운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알고있듯이 그를 기억하고있었다. 좌진이는 말했다. 아니나다를가 일이 났다. 바로 그달의 보름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볼일있어 홍성에 갔던 좌진은 려관에 들렸다가 거기서 서울서왔다는 웬 이목구비 번듯한 사나이가 일본과 조선사이에 이 체결되였고 민영환(閔泳煥 )이 자결했다는 말을 하는걸 들었다. 향년 44세인 민영환은 일찍이 좌진이 9살나던 해의 3월에 로시야 황제의 대관식에 특파된적이 있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오스트랄리아의 특명공사(特命公使)를 력임했던 나라의 문신이다. 그는 이 체결될 때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해주관찰사 홍만식(洪萬植) 등 13유생과 더불어 조약페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주민과 각국공사에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던거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리 없는 좌진이는 그 말한 사나이를 되꾸짖었다.  서울사나이는 호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뵈였다. 신문에는 분명 큰 활자로 이라 또렷이 찍혀져있는지라 좌진은 맏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수 없었다. 좌진은 송에 들고보던 신문지장을 발기발기 찢어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와 말을 풀어타곤 힘것 배를 걷어찼다. 초풍할지경 화닥닥놀랜 말은 앙칼진 소리를 내지르곤 냅다뛰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울분이 활화산같이 터진 좌진은 어디다 당장 분풀이할데도 없어서 그저 말만 미친듯 몰아댔다. 말은 어느새 갈산이 보이는 수리재골을 내려가고있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거기 오른족 골짜기에 선친의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달려가던 말이 무덤에 채 이르지 못하고 마치 무엇에 걸채이기라도 한것처럼 폭 고구라졌다. 좐진은 동작이 하도 잽싸 상한데 없는데 말은 고꾸라진채 다시일어나지 못했다. 말은 코투레질 뿐 네발로 하늘을 향하고 버둥거렸다. 그러는 말을 좌진이는 일어나라고 주먹으로 대갈통을 몇 대 갈겼다. 말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커다란 눈알을 까뒤집었다. 좌진은 죽어가는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살려낸단말인가. 좌진은 말을 팽가치고 달려가 선친의 무덤앞에 턱 무릎꿇곤 머리를 당에다 깊숙이 박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온 나라가 울적한 기분에 잠겨버렸다. 5개조항으로 된 에서 일본은 도꾜에 있는 저들의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조선에 대한 외교관계 및 사무를 관계하며 조선은 일본의 중게가 없이는 국제적성격을 띈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할수 없으며 일본은 조선에 을 두어 외교사무를 관리케하는 외에 다로 각 지방에 리사관을 배치하고 이 이를 지휘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은 문제있었다. 11월 20일자 은 11월 15일 일본천황의 특사 이또와 면담시 고종의 언론을 공개했다.     한즉 을사년의 이 이란 황제 고종의 수표와 국새날인을 받지 못한것만은 사실, 비법무효의 위조문서였던 것이다. 하건만 일본천황은 뻔뻔스레도 을 공포한 닷새후인 11월 22일에 이른바 을 만들어 반포했다. 분노할 일이였다! 고종은 11월 26일 미국인 헐버트와 프랑스주재 공사 민영찬에게 비밀전보를 보내여 자기의 태도를 아래와같이 똑똑히 표명했다.   의 주필 장지연(張志淵)이 이라는 논설을 써서 자기 신문에 발표했다. 좌진은 그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고 주먹이 떨리였다. 그랬다.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고 주먹을 떨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11월 20일신문의 그 글은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고 영달과 리익에 눈이 어두워 일본의 위협에 그저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된 저 개 돼지만도 못한 대신(大臣)이라는 자들은 이제 무슨 면목으로 황제와 국민들을 대할것이냐고 크게 꾸짖었다. 이 론설과 함께 은 또한 이라는 제목으로 이 조약이 강제적으로 맺어지기까지의 경위를 폭로했다. 장지연이 이 사실과 기사를 실은 신문을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고 배포한 것으로 하여 은 무기정간처분을 당하고 사장인 그와 공무원을 포함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였다. 일제의 이같은 무자비한 탄압에 그래 조선의 신문들은 한마디의 말도 못한단말인가? 그런것이 아니였다. 영욱인 배설(T.E.BCTHELL)이 경영하는 ,>는 11월 21일지에 장지연의 구속과 이 정간되였음을 제꺽보도하고 23일에는 도 경무청의 일본인 경찰고문이 장지연에게 고 묻자 장지연이 도리를 따지면서 반문하고 항변하여 일본인 고문으로 하여금 대답못하게 만들어놓은 사실을 보도했다. 글을 좀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모두 신문을 보았고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즉 혹은 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대미문의 엉터리조약으로 일어난 파문이 쉽게 가라앉기는 만무한 일이였다. 민영환의 뒤를 이어 며칠사이에 조병세와 홍만식도 자결하고말았다. 비보가 전해지더니 해가 바뀌여 1906년의 벽두에는 리용익이 로씨야에서 암살되였다는 소식이 건너왔다. 그는 본래 륙군부장(陸軍部長)이 되어서 일본세력의 구축을 위해서 프랑스, 로씨야 세력과의 제휴룰 꾀하라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려다가 풍랑으로 좌절되곤 로씨야에 망명했던 사람이다. 이해의 2월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였고 림시통감대리에 하세가와가 취임했다. 에 빙자하여 설치된 통감부는 닐본이 조선에 군림한 통치기관이였으며 그 우두머리인 통감은 조선의 외교권과 내정 등 모든 실권을 장악한 실제적인 식민지총독이였다. 통감부(統監府)의 설치로 리조봉건정부는 아무런 실권도 가지지 못한 친일매국노의 허수아비기관으로 전락되였다.     이것은 3월 9일, 가 조선이 당하고있는 현실의 처지를 개탄해서 실은 글이였다. 이달에 민종식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초대통감에 이또 히로부미가 부임되였다. 이또가 통감에 부임되면서 조선에서는 그 전해의 말에 각국주재공사를 소환했던 탓으로 조선에 주재했던 각국 공사관들도 재빨리 철수되였다. 5월에 전참찬 최익현이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해의 11월에 고종은 그에게 비밀지령을 보내여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7개도에서 반일의병투쟁을 벌리도록 한바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행동에 옮겨진것이다. 온 삼천리강토에서 반일정서가 점점 고조되고있었다. 그러더니 10월에 잡아서는 마침내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일제는 서울에다 통감부까지 설치하고나서 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및 대구 등 20개소에 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침략군을 끌어들이기시작했다. 1906년 3월에 들어온 군인수가 61,900여명이던것이 반년이 지나 9월에는 80,700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은 각지방의 주요도시를 강점한다음 와 경찰대를 배치하고 경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온갖난관을 무릅쓰면서 용감한 투쟁을 벌리였다. 이 투쟁의 앞장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지방의 의병들이 서있었다. 의병대조직자들가운데는 최익현, 민종식과 같이 이름난 유생들과 퇴직관리들이 있는 반면에 이미 오래전부터 농민폭동에 참가한 신돌석과 같은 폭동지휘자들도 있었다. 그네들은 구국항쟁을 벌릴데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글이 여러사람이 돌려보는 이였다. 반일의병투쟁을 세차게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13도유생을 대표하여 26명이 련명으로 낸 의병통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였다.     에는 또한 비록 요긴하게 소용되더라도 일본물건은 사지 말고 기차와 기선을 타지 말고 전신과 우편은 이미 빼앗겼으니 절대 리용하지 말라고 했다. 외에 과 기타의 글도 많이 나왔다. 어떤 은 백성들이 옷을 찢어 기발을 만들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서며 특히 땅파고 막일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설것을 강조했다. 좌진은 물론 도 보고 도 보았다. (어떻게 할가?.... ) 그는 속이 움찔거렸다. 가슴속에서 피가 설설 끓어번지였다. 허나 그는 감정에 충동되지 않고 랭정히 사고하면서 지그시 참았다. 가노를 해방시킨 후 한가지 거룩한 구상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41    장편전기 설한 (5) 댓글:  조회:3235  추천:1  2014-03-02
  5. 좌진이 9살나던 해인 1897년도는 나라가 천재에 신음하면서도 탈태환골을 해보려고 개명을 한 난망의 한해였다. 하늘마저 어쩌면 그리도 불공평하고 무정할가, 량반관리들의 탐학과 련속부절히 일어나는 란에 민심은 전혀 안정할새 없이 황황한데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해의 6월에 이르러서는 전국 각지에 우박이 퍼부어 농장물과 가축들이 형편없이 해를 입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빈궁에 빠져 헤매고있던 수천만의 백성들은 전보다 더 혹독한 아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기의 팔자를 한탄하기도 하고 천지신명을 우러러 구원을 절절히 빌기도 했다. 한데도 애원성을 들어주는 구세주는 세상에 없었다. 7월에 나라정부를 전복하려고 꾀했던 종진영과 홍현철을 비롯한 몇사람이 잡혀서 처형되였다. 그리고 10월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황제등극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쳐버렸다. 온나라적으로 입은 박재에 좌진이네라고 무사할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이네 집 쌀창고에는 먹을 쌀이 있었다. 예비없이야 그많은 입이 어떻게 살아간단말인가. 이해 겨울의 어느날이였다. 계집아이종이 비럭질을 온 거지할머니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곱게 보지 않았다. 거지할머니는 쌀 한되박 받아 자루에 넣으면서 두덜댔다. 달라는 쌀을 줬으면 감사히 받고 물러가련만 웬 불만인가? 필유곡절이라 좌진의 어머니는 리씨가 이상쩍어 알아보니 쌀에 돌이 섞였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좌진의 어머니는 종년이 모르고 한짓일테니 노여워말라고 사과의 말을 하곤 손수 쌀 한되박 더 주었다. 리씨는 아들에게 짜증섞인 말로 곡진히 부탁했다.   이때에 한마을에서 사는 석범이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약방을 맡아보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갔다가 개화되여 돌아온 이 청년은 자기보다 나이 열 살이나 손아래인 좌진이와 어느덧 극친한 사이로 되었다. 안그럴수있는가. 좌진이야말로 그의 구명은인인데야. 그로놓고보면 백골난망이요 결초보은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한편 또 좌진이는 좌진이대로 그한테 감사한일이 있었다. 시골뜨기인 자기가 깜깜 모르는것을 그는 알고있어서 상종이 잦을수록  귀동냥이라도 할 멋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의 8월, 홍성대원군의 장례가 지난지 석달만에 일본의 전임총리대신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방문왔다. 그러더니 조선정부는 마치 어린아이가 마술사의 홀림에 들기라도한것 처럼 경부선철도의 부설권을 일본에 특허했다. (여우는 잠자면서도 닭잡아먹을 꿈을 꾼다더라. 왜놈이 어쨌다구 제 땅 아닌 남의 나라에 철길을 놓을가?) 일본을 곱게보지 않은 좌진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의문이 컷다. 일찌기 고종17년(1880년) 11월 16일에 조선주재 일본 초대공사로서 하나부사란자가 부임되여 온적이 있다. 해군의장대에 호위되여 위엄스레 돈화문에 들어선 그는 창덕궁 중의당에서 임금을 배견하고 신임장을 봉정하였는데 고종왕이 근대적례식으로 외국사신을 접견한것은 그것이 처음이였다. 그때로부터 일본공사관으로 정해진 서울 천연정 청수관에는 일본국기가 게양되였으니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쇄국양이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는 상징이기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침략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좌진이 10살나던 1898년의 마가을 어느날, 석범이는 서울 가서 여러날 지내다 돌아오더니 서재필이 고문이 되어 움직이고있는 독립협회가 주체로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노라고 기분좋게 알려주곤 자기 생각하건대는 장차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나라의 개혁이 실시될듯하다고 했다. 좌진이는 그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기쁨이나 석범의 기쁨이나 다 가랑잎이 바람에 날리듯 인차 날아가버렸다. 10월에 관민합동의 개혁안 6조를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정부는 그를 선선히 받아들이지 않은건 물론 김옥균을 살해하여 그 으로 교리(校理)까지 된 홍종우가 리기동 등과 함께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것을 따로조직해 맛서면서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자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해산을 지시했던 것이다. 홍종우가 좌진이네 가문에서는 철천지원쑤로 되고있다는건 세상이 다아는 일이다. 어머니는 서울소식을 아들 좌진이한테서 들어 알게되자 원쑤를 저주하면서 보부상까지 싸잡아 망종이라 욕했다. 이런일에 보부상들이 다 나서서 갈개군질한다는건 아닌게 아니라 우수운 일이였다.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겨룸이 치렬하게 계속되였어도 국외로는 열강들사이 조선에 대한 쟁탈전이 기복을 이루면서 고조되여가고 있었다. 김좌진은 소년시절을 이같이 피할래야 피할수 없고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국보간난(國步艱難)의 와중에서 보내야했다. 그는 비록 시골훈장이긴 했지만 다문박식한 광호선생한테서 한문(漢文)을 착실하게 배웠다. 그것은 그를 정립시킴에 재산이였다. 한해 두해 나이들수록 키골이 유별나게 장대해진 그는 기호 역시 남과 판판 달랐다. 8살때에 첫권을 독파한 후로부터 나 같은 무협소설을 읽기좋아했고 은 물론 과 와 과 같은 병서들을 구해서는 그것을 독파하기에 노력하면서 검술(劍術)도 애써 련마했다. 그런데 좌진이는 그냥 아이로서 갈산을 독천장으로 삼고 뛰놀기만할수는 없었다. 그한테는 그가 7살 때에 벌써 부모들끼리 짝을 정해준 미혼처 오씨가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좌진이보다 두 살 더 많고 이름은 숙근(오숙은이라도 함)이고 역시 꼭같은 량반집의 딸이였다. 남자나이 7, 8살만되여도 족두리쓰고 장가갈 수 있었던 그때 세월에 여자몸으로 나이 15살먹도록 두문불출하고 규방에 갇혀있었으니 무던히도 오래 참아온 셈이다. 좌진은 봉건유제의 속박에서 벗어 못나고 수절하면서 오로지 자기만을 믿고 살아가시는 어머님의 심려와 친척들의 권념에 못이겨 나이 13살나던 1901년 봄에 례를 올리고 오씨를 안해로 맞아왔다. 헌데 그는 결혼한 그해의 8월에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그한테는 형 경진이가 있었지만 그는 어머니곁을 떠나 서울에 있는 일가집에 양자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해 형 경진의 나이 18살이였는데 이듬해는 아버지모양으로 근조말기(近朝末期)의 참봉으로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같은 벼슬을 겨우 한해밖에 못하고 20살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 일찍이 타계의 사람이 되고말았다. 이 안동김씨네 집에 이같이 또 한번 슬픔을 던져준 1904년! 바로 저주로운 그해의 2월 8일에 병든 조선을 삼키려고 오래전부터 혈안이 되었던 두렬강ㅡ 일본과 로씨야간에 끝내 전쟁이 일어나고말았다.   조선정부는 급급히 국외에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일본은 자기들의 륙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겁을 집어먹은 조선정부는 일본과 이라는것을 체결하고 경의철도를 일본에 빌려주었고 로씨야와의 조약을 페기해버렸다. 일본의 요구는 점점 사나와갔다. 충청, 황해, 평안도의 어로권을 가졌거니와 황무지개간까지 요구해나섰다. 그러다가 8월에 이 성립되고 10월에는 일본인 메까다가 탁지부(度支部)고문에 임명됨과 동시에 일본사령관 하세가와가 입경하기에 이르렀다. 중립을 선포하면 안전하리라여겼던 어리석은 조선, 자주적인 독립을 갈망해온 조선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여 내각의 중요한 자리마다에 왜놈의 고문이 지키고 섰다. 아아, 이것이 그래 통탄할 일 아니고 뭔가? 바로 이러한 시국이였건만도 좌진은 남들이 보면 거기서 밥나오냐 떡나오냐고 웃을 지경 오기(吳起)의 병서에만 파묻혀있었다. 어느핸가 마을에 의병대가 왔을 때 그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가 너털웃음 끝에 던지던 말이 늘 잊혀지지를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좌진이는 찌들어가는 나라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의병으로라도 나가고싶은 생각이 치밀때가 많았다. 허지만 그는 그 검정풍안경낀 사람처럼 독립협회가 뭔지도 모를 지경 무식하면서 열혈이 식으면 로략질이나해먹는 악한이나 무뢰한으로 되고싶진 않았다. 좌진의 집에는 팔만이라 부르는 30대의 젊은 남자종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무척셋다. 어느하루 좌진은 그가 장작무지를 옮기는 것을 보고 그리로 갔다. 팔만이는 작대기로 받쳐놓은 커다란 지게에다 지게뿔이 넘어날지경 장작토막을 실었다. 좌진은 그를 도와줄 겸 힘도 겨뤄보려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팔만이는 절대 그러게 못하게했다. 좌진은 팥죽땀을 흘려가면서도 자기를 량반이고 주인이라 시키지 않고 그 일을 혼자해내는 그가 측은했거니와 이전부터 생겼던 의문이 짙어가면서 반성이 생기게 되었다. (명분! 명분! 썩어빠진 명분! 그놈의 명분이 대체 뭐냐? 저인간은 무슨 죄졌다고 땀흘리고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 난 또 뭐가 잘나서 놀고먹는단말이냐? 저 사람은 상놈이고 난 량반이란 그 하나의 리유때문에? 량반과 상놈이란 대체 어쩌자는 차별이냐? 행실로 보나 재주로 보나 량반보다 나은 상놈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고루하고 완고한 유자(儒者)나 말공부질이나하면서 당쟁에만 눈이 빨개진 벼슬아치들과 비하면야 그네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가. 그런데도 량반이라해서 그네들의 머리우에 올라앉고 종으로 만들어 천대하고 착취하는건 얼마나 뻔뻔스럽고 죄악적인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이젠 이니 이니 하는 소리까지도 듣기 거북해난다. 사람지간에 응당 평등해야 한다. 이놈의 비틀어진 량반의 집에서부터 그렇게 혁명을 해버릴수는 없을가?) 좌진은 속으로 이러면서 아직 살아있는 종할미의 처지를 생각했다. 선량한 종할미! 남의 집 종살이가 고달퍼 자기네도 논마지기만 있었으면 신세고치련만 하고 한탄했던 종할미! 좌진이는 업어자래우는 보상으로 크거들랑 논 백석지기 주마고해서 그를 무척 기쁘게해주지 않았던가. 비록 철부지아이때의 일이긴해도 지금 일가주장이 되고보니 새삼스러워지는 추억이였다. (이제는 다 컷다. 내가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오늘은 지켜줄수 없을가? 그네들을 진정 기쁘게 해줄수는 없을가?) 좌진이는 사람이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불평등한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자기의 그 생각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하나의 주장이 뚜렸해지면서 결심은 점점 굳어갔다. 가노를 해방하자! 헌데 자신은 결심을 아무리 내렸어도 혼자의 의사대로 제꺽해치울일은 아니였다. 제아무리 일가주장이긴해도 집안대사를 어머니를 기이고야 어이 되랴. 좌진은 어느날 밤 조용한 틈을 타서 어머니에게 자기의 뜻을 내비치였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두말없이 반대하였다. 종을 놓아주다니 그게 무슨말이냐고, 나라에서도 아직 아무말이 없는 일을 네가 하자니 방자한 짓이라고. 더구나 집안어른들이 아직도 살아계시는데 네 맘대로 그게 어디 될 법이냐고 딱 잡아뗐다. 그래서 좌진은 여러밤이나 잠못이루면서 날을 밝히였고 석범을 찾아가 함께 대책을 상의하기도했다. 좌진이 이번에는 오촌숙부와 의논해보려고 찾아갔다. 오촌숙부 창규와 숙모가 마침 집에 있었다. 좌진은 오랜주저 끝에 무겁게 입을 열어 우선 사회라는건 앞으로 발전하고있으니 이에 발맟추어 우리 자신들도 의식을 고쳐야할게 아니냐고 운을 떼놓고는 지금 가뜩이나 적은 민족을 상놈과 량반으로 갈라놓아서는 안될때이고 또한 인성(人性)은 똑같은데 그네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것은 죄라고 했다. 그제야 조카의 의도를 명백히 알게 된 오촌숙부는 정신차리였다. 좌진이는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어 량반들이 종이다 상놈이다 하면서 그네들을 짓밟아 산송장처럼 만들고 있지만 기실은 량반들이 다 썩고있다는 것, 종도 상놈도 다 놓아주어 그네들도 힘을 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는 이제 상놈과 량반이 합친다해도 까딱하면 나라운명을 건지기 어렵게 되리라고 부언했다. 잠자코있던 오촌숙부는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화강암같이 굳은 태도였다. 그의 론리인즉 종들은 무식해서 국사에 참견할 자격이 근본 없거니와 만약 너의 말대로 풀어놓는다면 되려 버릇만 잘못 궂힐수 있으니까 가노해방을 궁리하는것부터가 얼빠진짓이라는 것이였다. 좌진이는 오촌숙부가 아무리 격노하여 삿대질해도 지그시참았다가 그가 제풀에 지친 다음에야 입을 다시열어 자기가 찾아온것은 한번 상의해보자함이요 숙부댁에서까지 그리 하라는건 아니니 너무 노여워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기 집 일은 이미 작정한바여서 그대로 집행하겠으니 그리 알라 했다. 조카의 이같이 단호한 태도를 본 오촌숙부는 하면서 의연히 분기충천하여 다시는 자기 눈앞에 얼씬거리지도말라했다. 좌진은 태연히 참고있다가 두 량주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왔다. 오촌숙부의 집에서 나온 좌진이는 그길로 석범이네집에 들렸다. 그는 거기서 그들 내외간을 독촉해 찰밥을 큰 밥통에다 하나 그득해선 그것을 창호지에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그것을 자기 혼자있을 방에다 감추었다. 좌진이 석범이네 집에 들린사이 오촌숙부가 왔다가서 어머니는 벌써 그곳에 가 되어진 일을 다 알고게셨다. 어머니는 어른들이 안된다고 말하면 그런줄알고 들을것이지 너는 대체 무슨 고집이 그리도 세냐면서 여러대를 내려오며 무사했던 종들을 이제 놓아준다해서 그네들이 더 호강살이 할것 같으냐며 이 일만은 절대안된다고 한번다시 엄포를 놓았다. 자기방에 들어간 좌진은 문을 꼭 닫아걸고 혹간 랭수나 한사발청해서 마실뿐 때가 되어도 나와 식솔들과 함께 밥먹을 념은 않으면서 벽을 마주하고 앉아 기도드리는지 요지부동이였다. 이러기를 여러날, 어머니는 드디여 아들이 단식하고 죽을것만같아 겁나서 그만 울음을 내고야말았다. 그제야 좌진이는 달려나와 우시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였다.
40    장편전기 설한 (4) 댓글:  조회:2666  추천:1  2014-03-01
   4.    지난 을미년에 있은 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립시켯으며 조선을 남만주침략을 위한 경제적 군사적 근거지로 되게 하였다. 비록 그후 로씨야, 프랑스, 독일 3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료동반도가 다시 중국에 반환은 되었으나 대련과 려순항구는 결국 일본의 소유로 되었으니 이것은 일본이 앞으로 만주와 몽골을 침략하기 위한 문호를 열어준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대만과 팽호렬도의 강점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 남방에서 근거지를 건립할수 있게 하였다. 약소국가는 렬강들의 앞에 놓인 하나의 먹음직한 고기덩이였다. 원동문제에서는 영국은 많은 리익을 이미 얻었으나 로씨야와 독일은 중국에서 방금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중이였고 프랑스도 이미 자기가 얻은 리익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 조인되자 제정로씨야는 매우 놀랐다. 그리하여 로씨야는 프랑스, 독일과 련합해서 일본정부에 대하여 동시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즉 일본은 료동반도를 즉시 반환할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로씨야, 프랑스, 독일이 무력으로 이에 간섭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당황하여 이미 20여년의 개화로 실력을 뽐내면서 입에 거의 삼켰던 료동반도를 게워놓았다. 이같이 싸움에서 진 청나라는 말할것도 없으려니와 제법 쎈줄알았던 일본이 싸움에는 이기고도 3국의 간섭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민씨일파와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로씨야의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전승국의 야심이 있은 일본은 아직도 조선같은건 주무를수 있어서 저 미우라(三甫)란자가 재류일본인과 더불어 대원군을 받들고 경복궁에 들어가 민비를 살해하고는 개화를 한답시고 을 내렸던 것이다. 너무나도 무능한 정부를 반대하여, 왜적을 반대하여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자 무능한 정부는 다시 일본의 병력과 함께 참혹한 도살로써 의병을 탄압했다. 허나 일본은 3국간섭에는 어쩌지 못하고 잠시 물러갔다. 그다음은 로씨야의 천지였다. 내각은 순식간에 친로세력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은 물론, 심지어는 정부에서 돈쓰는 일까지 로씨야가 참견하게 되었다. 고종은 자기 집에서 살 권리도 없이 로씨야의 공관에서 셋방살이를 해야했고 내렸던 단발령도 취소하였다. 그리고 인제는 그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린 의병의 어떤 찌꺼기들은 산골로 돌아다니면서 로략질이나 해먹었다. 바로 민비가 죽은 이듬해의 이러한 세월에 좌진이는 삼불산에서 벌떼에 쏘이였던 것이다. 이해, 건양(建陽)원년 동지달 그믐께. 좌진의 딱친구 갑룡이가 한권을 마치였다. 갑룡의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아들의 책갈이턱을 내려했다. 그런데 술은 있어도 안주감이 문제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좌진이는 제또래의 애들을 데리고 새를 잡았다. 서당집주인 선달이네는 애들이 잡아온 새고기로 맛나는 술안주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훈장 김광호와 갑룡의 아버지 그리고 주인 김선달령감은 즐거운 술상을 방금 벌려놓았는데 여러해나 서울에 가있던 갈산의 청년 김석범(金錫範)이 머리를 깎고 문득 나타났다. 석범은 광호선생의 외척생질로서 개성이 시골의 여느 청년들과는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약국을 차려놓고있으면서 아들이 그것을 이어받아 경영하기를 바랐다. 허지만 석범이는 그런일에는 맘이 없었던지 4년전에 표연히 집을 나가 별로 하는일없이 서울일판을 방황하다가 돌아온 것이다. 왼쪽으로부터 가리마를 곱게 갈라붙인 하이칼라머리, 짙은 콧수염.... 이 세상의 사람같지 않게 변모한 그의 출현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경아와 호기심을 자아냈다. 좌진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기이한 사나이를 향해 눈총을 놓는 사람도 있었다. 허지만 이 신식의 청년은 그쯤한건 벌써 각오했던바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오자바람으로 광호로인앞에 엎드려 인사부터 올리였다. 석범청년은 지난해의 11월에 을 내리니 깎았노라했다. 이에 늙은 시골훈장은 생질 보고 남이 하지 않는 짓을 구태여 너만할건뭐냐, 량친과 선조신령들 앞에는 무슨 낯으로 대하겠느냐며 조카를 나무랐다. 석범이는 머리태를 없애버린게 무슨 죄될일인가, 다른사람이야 리해하건말건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왜놈들의 참견으로 깎다만것이 비록 창피스럽긴하지만 조선사람도 오래잖아 머리를 다 깎게 되리라 했다. 그제야 광호선생은 더 나무리는 말이 없이 서울의 근황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석범이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새로 독립협회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독립협회의 발기로 영은문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웠다는 것을 말하면서 일본에도 로씨야에도 청나라에도 그 어느 나라에도 기탁하지 말고 내 힘으로 내 나라의 독립과 개화를 해보자는 것이 그분들의 생각인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광호선생은 생질의 말을 곰곰이 듣고나서 의례그래야지 하면서도 신심은 나지 않아서 뇌이였다. 이러면서 석범이는 게속해 지금 조선땅에 와서 행세군으로 나선 로씨야가 해군기지로 쓸 항구를 얻으려고 별의별수단을 다 쓰고있는 중이라 하곤 픽 웃더니 독립협회가 존재해있는 날까지는 로씨야가 그 어떤 묘한 수단을 쓴다해도 그대로놔두진 않을거라했다. 김선달로인이 짚이는데가 있는지 그더러 네가 바로 독립협회의 사람이여서 선동하러 온게 아니냐 했다. 석범이는 묵묵부답이더니 서울사람들은 벌써 개화가 되어가고있노라고 화제를 돌리였다. 김선달로인이 다시 입을 열고 아까말한 서재필이라면 갑신년에 김옥균과 같이 개화정변을 일으켰다가 해외로 망명간 사람이 아닌가고 물었다. 석범이는 바로 그렇다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황후를 잃은 상감께서 내 궁전은 버젓이 두고서도 남의 공관에 가서 셋방살이하면서 지금 매일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있노라했다. 그리곤 정신차려야지 넋없이 앉아있다간 반드시 남한테 집어삼키우고말리라고, 그러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목숨바쳐 싸워야한다고 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런데 김선달이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더러 말을 좀 삼가하라고 타일렀다, 젊은놈이 세월이 어지러운 때 까딱잘못했다가는 무슨액을 당할지 모른다면서. 석범이는 입가에 랭소를 머금은채 더 말이 없다가 늙은이 두분한테 인사말을 하곤 서당을 나갔다.   좌진이는 뭐든 좀 더 알고팟다. 그래서 이 자리로 그를 훌쩍보내는게 아쉬워 슬며시 따라나섰다. 쌀쌀한 밤추위도 잊고 따라가다가 그가 돌다리를 건너 모습이 언덕에 가리워질때까지 눈으로 바래였다. 물론 석범이는 자기를 이같이 바래주고있는 고마운 아이가 곧바로 몇해전에 작고한 참봉 김형규의 둘째아들이란것을 알고는 몰라보게 자란데에 깜짝 놀랐다. 갈산마을에 개화청년 석범이가 돌아와서 며칠후, 광호선생이 일이 있어 서당을 잠시 비우게되였다. 그가 집에 간 며칠간 좌진은 날마다 30여명의 제또래의 아이들을 적군과 아군으로 갈라 마을밖에 있는 솔밭이며 병풍바위를 돌아다니면서 진치기와 접전놀음으로 날을 보내였다. 아군은 10명으로 한국군(韓國軍)이라 이름달아 좌진이 자기가 거느리고 나머지의 20여명은 각각 청군(靑軍), 일본군(日本軍), 아라사군(로씨야군)이라 이름달아 꺽지손이 센 다른 아이들이 선발되여 거느리였다. 그네들은 각기 자그마한 헝겊쪼각으로 자기편을 나타내는 깃발을 만들어들었다. 일본군은 빨간기, 청나라군은 노란기, 아라사군은 새파란기, 조선군만은 그네들것보다 조금 큰 새하얀기였는데 거기에다는 한자(漢字)로 이라 써놓았다. 그리고 이라 쓴 기발이 하나 더 있었다. 겨울날치고는 유달리 따스한 어느날, 아이들이 열이 올라 한창 떠들썩하게 전쟁놀음을 하고있는 판인데 그네들의 앞에 장총, 단총, 활과 검으로 무장된 수십명의 의병대오가 불쑥 나타났다. 커다란 통영갓쓰고 두건치고 도포입고 행전치고 미투리를 신은 행색이 각각인 사람들, 선문도 없이 귀신같이 묵묵히 나타난 그네들은 짜장 오합지졸이라는 감을 주거니와 굶주림에 찌든 몰골들이 사나와보이였다. 그중에 그래도 검정풍안경쓰고 의포단장이 사치스러운 사나이가 풍채좋은 말을 타고있었는데 그가 필시 두령이였다. 아이들은 놀던 놀음을 그만두고 호기심이 끓는 눈으로 그네들을 바라보았다. 좌진이는 풍채좋은 말에 눈길이 갔다. 검정풍안경을 쓴 사나이는 가까이로 오더니 말을 잠깐 멈춰세우고 아이들손에 쥐여있는 놀음흉기를 보면서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전쟁놀음을 했노라고 벌떼같이 왕왕거렸다. 검정풍안경낀 사나이는 피식웃고나서 그렇다면 너희들의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알려주면서 뒤에 못박힌듯 서서 좀처럼 나서지 않고 있는 덩치큰 좌진이를 가리켰다. 사나이는 활을 멘 좌진이를 한참이나 쏘아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식 웃었다. 좌진은 말없이 손에 쥐고있던 기폭을 펼쳐보이였다. 사나이는 앙천대소하더니 좌진이보고 그래 그 글은 제절로 쓴거냐고 물었다. 좌진은 그를 노려볼뿐 대답이 없다가 기폭을 꾸겨서 주머니조끼에 넣어버렸다.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는 다시 말을 몰았다. 아이들도 그네들의 꽁무니에 묻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들어간 의병들이 객주집을 찾고있을 때 공교롭게도 석범청년이 그네들과 딱 마주쳤다. 이 호령소리에 놀란건 좌진이였다. 왜놈과 단발령을 반대해 일어난 의병일것이니 석범이가 머리깍은 까닥같은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죽여버릴 것이다. 그래서 좌진은 급히 달려가 그를 에워싸는 의병들의 앞을 막으며 웼쳤다.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는 두사람을 번갈아보더니만 독립협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형이라니 살려준다고했다. 이날밤 좌진이는 어머니한테 졸라댔다.      큰아들 경진이는 종래로 이러지 않았다. 덩치는 커도 나이는 어린놈인데 말을 타겠다니 원. 하지만 요구가 하도 곡진하니 어머니는 이윽토록 미간을 모으고있다가 입을 열었다. 타협이였다. 좌진이는 어머니한테 이제 좀 더 크거들랑 멋들어진 가라말이나 부루말을 사기로 약속받고 우선 집에 있는 말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이틑날. 구유에 여물을 담고있던 마구종 세채가 의아쩍어했다. 좌진은 지금 막 빈 구유에다 코를 비벼대고있는, 주둥이만 검고 온 몸뚱이는 새하얀 백설총이를 가르켰다. 좌진이가 말을 풀어 내가자 세채는 여물주던 삼태기를 놓고 달려나왔다. 고집세고 철닥서니없는 이 어린 도련님이 생마한테 채우기라도할까봐 걱정됐던거다. 담장밖까지 끌려나간 백설총이는 좌진의 손이 제 잔등이에 닿이자 대바람 요동쳤다. 좌진이는 들었는 둥 말았는 둥 고삐잡힌채 빙빙 돌아치면서 몸을 주지 않는 말을 욕도하고 살살 달래기도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잔등에 올라탔다. 백설총이는 기겁초풍하듯 놀래면서 앙칼지게 소리를 내지르기도하고 뒷발로 하늘을 차기도했다. 좌진이는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그렇지만 그놈이 하도 지랄스레 궁둥이뜀질을 해대는통에 끝내 허궁나가 떨어지고말았다. 그러면서도 고삐만은 단단히 잡은채 놓지 않았다. 세채는 황겁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좌진이는 온 얼굴이 땀벌창이 되어 씨근거리면서도 고삐를 놓지 않고 말과 싸웠다. 마구종 세채는 말릴방법이 없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39    장편전기 설한 (3) 댓글:  조회:3131  추천:1  2014-02-27
  3.  갈산마을의 서당을 맡을만한 선생이 아직 나서지를 않아서 좌진이는 마을애들의 대장이 되어 한동안 마음것 놀 수 있었다. 어느날, 놀음놀다 점심때 되어 집에 돌아온 좌진이는 문득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면 한동안 멍해졌다. 이따위말에 어머니는 펄쩍 놀라면서 낯색까지 변했다. 어머니는 말을 더 못하게 어성을 높이였다. 좌진이는 입을 다물고 벌씬 웃었다. 속으로 아무튼 친일주구와 악질관리놈을 잡아치우고 하니 의병은 나쁘지 않고 좋은거라고 되뇌이면서 초립동이 대장이 아니라 어느덧 다커서 수천의 의병대군을 거느리는 장수로 된 자신을 눈앞에 감미롭게 그리는 모양이다. 그이틑날. 늘 같이노는 서당학도 복돌이와 갑룡이가 먼저 데려와서 따라나섯던 좌진이는 자기네 집 담장대문가에서 서성거리고있는 웬 초면의 아이와 마주쳤다. 람루한 옷차림, 초췌한 몰골.... 첫눈에도 거지아이임이 분명했다. 거지아이는 옷잘입은 좌진이를 보자 그만 고개를 떨구면서 외면했다. (비라리를 온것 같은데....) 늘 맞다들이는 일인지라 좌진이는 얼핏 짐작하면서도 자기또래의 나이일텐데 신세 비참하게 된 그 아이가 각별히 측은하게 보여져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두말없이 좌진이는 그의 손을 글어 자기 방에다 넣고는 젊은녀종 삼월이를 불러 밥을 가져오게 했다. 거지아이는 도대체 며칠이나 굶어다녔는지 밥 한그릇과 농어지지미 한접시를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거지아이는 이름이 춘선인데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대답대신 울음을 터치였다. 춘선의 집은 본래 고부(古阜)에 있었다. 전라도 고부군은 동학당폭동이 발기된 곳이다. 춘선의 아버지역시 동학도였는데 손에 병기들고 폭동대오에 들어 전봉준을 따라다니다가 지난해의 5월에 전주에서 청나라의 군함과 운수선을 빌어 군대를 싣고 인천에서 장산포를 거쳐 쳐들어오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勛)의 손에 죽고말았다. 그래서 이제 9살밖에 안되는 춘선이는 과부로 된 어머니와 그냥 함게 있었는데 그 어머니마저 올여름부랑자의 손에 걸려들어 갑작스레 잃어졌다가 3일만에 시체로 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고아로 돼버린 춘선이는 지금의 이런 꼴로 변해버렸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의 외삼촌이 여기 충청도 어디에 잇다고 한다. 그런데 성명도 주소도 딱히 모르니 그가 이제 곧 외가를 찾아내리라는것도 막연했다. (정처없이 류리걸식하는 이 불쌍한 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가?.... ) 좌진이는 잠깐동안 생각을 굴려보고나서 우선 그를 자기 집에다 눌러놓고보기로 작심했다. 그새서 아사지경에 이르러 헤매이던 이 사고무친한 거지아이는 꿈에도 생각못했던 생면부지의 부자집에서 먹고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날이 며칠 못갔다. 좌진이 낮이면 그를 데리고 나가 함게 전쟁놀음을 놀다가 밤이 되면 남몰래 자기 방에다 재우군했는데 닷새가 지나서는 그만 어머니한테 발각되였던거다. 어머니는 이렇게 꾸짖었다. 그랫지만 어머니는 본래 성품이 순후한분인지라 거지아이의 가긍한 정상을 알고는 아들의 처사를 그르다고 더 나무리지 않았다. 좌진이는 어머니와 사정해 자기가 서당갈 때까지 거지아이를 집에 두고 동무할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그사이 거지아이 춘선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좌진이가 꾸지람듣는것 같아 그만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갈산마을 서당에 새 선생이 왔다. 이름이 김광호(金光浩)였는데 광천이였고 나이는 이미 환갑이 지난 늙은이였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거니와 학식도 퍼그나있었는데 특히는 력사를 잘알고있는 사람이였다. 어머니는 좌진이더러 새로오신 선생한테서 한문(漢文)을 잘배워 소양을 닦으라했다. 좌진은 어머니앞에서 꼭 그러리라 대답하고는 새로 온 광호선생을 찾아가 인사드리였다. 광호선생은 곱게드리는 좌진의 인사를 받고나서 김옥균이 너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좌진이는 그한테 김옥균은 바로 자기의 십일촌숙부로 된다고 대답을 올리였다. 광호선생은 침통한 기색을 지으면서 갑오년의 일을 회상하고는 고루한 수구파의 죄악을 저주했다. 어머니와 오촌숙부한테서 많이 들어서 김옥균이 어떠한 사람이란것을 너무나도 잘알고있었던 좌진은 이전의 선생 송로암과는 판판다르게 인식이 바르고 도량도 넓은 광호선생을 맘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우러르면서 이번에는 절대로 애를 먹이지 않고 착실히 배우리라했다. 이같이 맘먹으니 공부는 자연히 더 잘되여 이해의 겨울 석달동안 초권을 배워냈다. 광호선생은 송로암처럼 조폭하게 회초리로 학동을 길들이면서 우격다짐으로 암기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광호선생은 학동들보고 지금은 비록 나이 어리지만 장래는 나라의 동량지재로 될 사람들이니 엎드려 책만 읽지 말고 국가의 대사도 제대로 알아두라했다. 좌진이는 그래서 좋았다. 이전에야 어디. 광호선생은 갈산시골의 서당들에게 민비(閔妃)가 살해되였다면서 방금발생한 은 오래전부터 침략야심을 품어온 일본이 한짓이라 알려주었다. 민비는 원래 일본에 투항하여 1876년부터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후에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도록 매국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근 20년동안이나 일본에 아부굴종하여오던 민비는 1894년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침공으로 자기의 지배권이 실제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번에는 로씨야를 등에 업었다. 이로하여 일본은 그를 없새버릴 마음을 먹었다. 일본은 1895년, 이해의 여름에 저들의 주구 박영효를 시켜 민비를 살해하도록하였다. 그런데 박영효의 모략은 7월 6일에 그만 탄로되여 그자신이 체포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모략사건이 드러나면 불리하길래 그를 감쪽같이 일본에 빼돌렸다. 그리곤 자기들이 직접 손쓰기로 작정했다.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4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밑에 일본불량배 60여명, 일본군대 50여명, 일본경찰대 30여명,훈련대 1000여명으로 무어진 강도단이 왕궁을 습격, 민비는 일본살인악당의 칼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들은 그의 시체마저 없애치울목적으로 왕궁부근의 수림속에 날라다가 장작더미우에 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 아예 재가루로 만들어버리였다. 민비를 학살한 후 미우라는 공포속에 떨고있는 국왕앞에 나타나 리조봉건정부의 내각에서 친로파를 축출하고 일본이 제기하는 친일파들을 관리로 임명하며 또한 각국공사가 면담을 요구하더라도 그에 절대 응하지 말아야한다고 국왕을 강박하였다. 그 목적은 내외의 여론을 봉쇄하고 조선에 대한 저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키위한 것이였다. 허지만 죄행은 백일하에 드러나 조선인민들의 강렬한 항의와 국제여론의 규탄을 야기시켰다. 이에 일본은 하는수 없이 11월 15일(음력 9월 29일), 민비학살에 돌격대로 나선 미우라를 공사직에서 해임시킴과 동시에 그 관계자들을 한다는 명의로 일본에 소환, 히로시마감옥에 하는 연극을 꾸미곤 민비학살시 현장에 있었던 군부협판 리주희와 일본공사관에 있으면서 흉게를 알고있던 박선 등에 애매한 죄를 뒤집어씌워 12월 28일에 학살했다. 좌진이와 그의 학동들이 선생께 들은 의 진짜내막은 이러했다. 이듬해의 1월에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래서 민심이란 조금도 가라앉을 사이없이 그냥 황황했다. 허지만 갈산마을 서당의 학동들은 광호선생의 유도하에 들뜨지 않고 자기가 할 공부를 착실하게 해나갔다. 봄이 돌아왔다. 갈산마을뒤 삼불산에는 아름다운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해토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있는 어느날 광호선생은 낯수업을 끝내면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에 대답하는 학동이라곤 없었다. 선생은 알려주었다. 다른아이들은 속으로만 그저 반가와할 뿐 감히 응대를 못하는데 좌진이가 이렇게 우쭐 나섰다. 늙은 훈장은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좌진이가 어디한번 앞장서보라했다. 그리고는 가는 날자와 갖고갈 음식준비 등에 대해서 말했다. 좌진은 선생님이 잡수실 술은 자기가 준비하겠노라 자진해서 선생님의 귀여움을 다시한번 받았다. 약속한 삼월 보름날이돌아왔다. 서당학도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즐거웁게 산록이 한창 물들고있는 삼불산을 올랐다. 서당집주인 김선달이도 선생을 동반해 삼불산의 경치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운운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정오가 가까웠고 일행은 소요암이라는 암자에 이르렀다. 경치좋은 곳이였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서 그네들은 주지화상의 안내로 먼저 법당과 칠성각을 구경하고나서 절뒤에 있는 펑퍼짐한 바위우에다 정심상을 차리였다. 여기가 삼불산 여러봉우리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멀리 아물거리는 서해바다를 능히 볼수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나서 활동이 시작되였다. 선생은 이상 배우는 상급생들과 몽학짜리의 하급생 이렇게 두패로 나누어 첫패 상급생들에게는 전춘시의 운자를 내주어 각기 시 한수씩 지어바치게 하고 둘째패하급생들은 근처로 돌아다니면서 놀다오라했다. 아직 《사서》를 배우지 않은 좌진이는 갑룡이와 영철이를 불러서 데리고 슬그머니 법당뒤의 칠성각으로 향했다. 거기에 아까부터 속이 쑤셔나도록 다시보고싶던 500라한이 있었다. 그래서 칠성각에 오른 그는 파랗게 칠한 쌍창문을 와락열어 젖히고 성큼 뒤여들었다. 라한들은 참으로 우습고도 재미있는 모양들이였다. 몸뚱이 새노란 부처님이 점잖게 앉아있는 옆에 머리를 빡빡 깎은 조그마한 놈들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어떤 놈은 상을 찡그리기도하고 어떤 놈은 히죽이죽 웃기도하고 어떤놈은 옆의놈을 손가락질하며 너털웃음을 웃기도하고 어떤놈은 또 무엇엔가 성내기도하고.... 오도방정을 떨고있는 그 꼴들이야말로 각각이였다.  이쪽 두 아이는 찔끔 놀라면서 그러다가 중이 알면 어쩌겠느냐했다. 했건만 좌진이는 알게뭐냐, 보고서 도로 갖다놓으면 그만인걸 하면서 엉금엉금 기어가 그 라한을 닁큼쥐여 두루마기밑에 숨겨가지고 나와버렸다. 그들은 절의 왼편에 있는 우물가로 갔다. 좌진은 중얼거리면서 라한의 따귀를 갈겼다. 따귀를 맞은 라한님은 그만 깨여지고말았다. 그것은 속이 텅빈 석고상이였다. 좌진은 네놈이 이렇게 속없는 놈이니까 그모양이지 하며 한매 더 갈기였다. 그 서슬에 이미 깨여진 라한님은 쪼각이 더났다. 갑룡이와 영철이는 일을 저질렀다고, 이제 중한테 붇들리면 혼구멍나리라고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달아나버렸다. 혼자남은 좌진이는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깨여진 쪼각들을 주어서 슬그머니 우물에 처넣어버렸다. 그리고나서 보니 우물가에 활짝 핀 영산홍에 커다란 호랑나비가 있는게 눈에 띄였다. 좌진이는 그놈을 잡으려다가 그만 꽃에 앉아 굴을 빨고있던 벌을 건드려놓아서 단단히 쏘이고말았다. 쏘인자리는 몹시 동통이 나면서 단통 부어나기시작했다. 분통이 터진 좌진이는 그놈을 잡아치우려했다. 그런데 벌은 잡히우지 않고 붕붕 다른데로 날아갔다. 그놈을 뒤쫓던 좌진이는 절가까이 낭떠러지에 흙둥구미같은 벌통 하나가 붙어있는것을 발견했다. 좌진은 다시 이를 악물고 벌통을 떠받아 깨뜨려버리면서 마구문질러놓았다. 졸지에 험한 재앙을 당한 벌들은 혼비백산하여 좌충우돌했다. 그럴수록 좌진이는 결사적으로 해내서 끝내 수백마리의 벌들을 죽여치웠다. 그러노라니 머리에는 온통 죽어 뭉개진 벌이 게발리였고 몸도 기진맥진했다.   한편 이켠에서는 놀이가 끝나 이젠 산을 내려갈 때가 되었건만 좌진이가 그냥 보이지 않는지라 마침내는 이거 일나지 않았나고 찾기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드디여 벼랑밑에서 낯이 온통 부어서 불성모양이 된채 쓰러져있는 좌진이를 찾아냈다. 과연 넋담덜어질 일이였다. 혹시 죽지나 않았나고 보니 숨은 붙어있었고 맥도 여전했다. 광호선생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나서 중더러 랭수를 가져오라해서 얼굴에 쳐놓았다. 좌진은 그제야 정신차리며 눈을 떳다. 선생은 소생한 제자를 보자 기뻐했고 중은 울상이 돼갖고 라한님 하나를 어쨌느냐했다. 좌진이는 태연해져 그놈이 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히죽거리는게 꼴보기싫어 부셔버렸노라고, 값을 드릴테니 그걸 받으러 오라고 했다. 중은 이 기이한 소년에 대한 까닭모를 무서움이 솟구치면서 노여움이 사라져 훗날 네가 잘되거든 라한님을 한분 만들어달라 하곤 나무아미타불을 뇌이였다. 이날 광호선생이 업어주마하는것도 마다하고 집에 돌아온 좌진이는 꼬박 열흘간이나 누워 끙끙 앓았다.
38    장편전기 설한 (2) 댓글:  조회:2979  추천:1  2014-02-26
  2. 조선은 거듭되는 외교적실패와 내정의 부패로 말미암아 재난이 그칠새없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좌진이 태여나던 그해만도 전주란에 뒤이어 정선군민이 란을 일으켰고 이듬해는 함창에서도 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 이듬해에는 제주도에서와 고성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평안도지방에서는 10여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굶주림을 못이겨 만주로 도망가버렸으며 평산민들은 향리(鄕吏)의 포학을 진정(陳情)했다. 한즉 안토중천(安土重遷)이니 안거락업(安居樂業)이니 하는 미사(美辭)는 아득한 옛말에서나 바랄수 있는 꿈처럼 되어버렸는데 불난집에 도적이라 게다가 청나라의 도적들마저 국경을 넘어와 함경도 갑산, 단천 등지에서 로략질을 거듭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러고도 국내에서의 란은 그냥 꼬리를 물어 함흥, 덕원에서도 란이요 황간, 청풍, 개성, 중화에서도 란이였는데 인천부(仁川府)의 아전과 백성 수백명은 작당하여 관청을 들입다치기까지 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조선땅이 그야말로 란장판이 되어가고있었다. 이러한 때이던 1893년 봄, 이제 겨우 5살밖에 안되는 좌진이는 글을 배우려고 서당에 입학하였다. 아직 학교가 서지 못한 개화전의 시골서당은 꼴불견이였다. 뉘집의 사랑채를 빌려서 뿌관이나 탕건을 쓴 선생이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으면 아이들은 그앞에 무릎꿇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것이 고작이였다. 갈산의 서당은 마을에서 감나무집이라 불리워지는 김선달이네 커다란 두칸의 사랑방이였는데 좌진이는 바로 그 서당에 공부하러 다녔다. 그 서당의 선생은 이름이 송로암(宋老岩)이요 아직은 나이 50전의 사나이였다. 하건만 이상스레도 자기 호를 그렇게 지어 부르면서 자기를 송시렬(宋時烈)의 자손이라 했다. 송시렬인즉 자가 영보(英甫)고 호는 우암(尤庵)인데 서인(西人)의 거두로 남인(南人)과 론쟁하고 후에는 로논(老論)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숙종 15년에 세자 책봉(冊封)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賜死)된 조선왕조때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다. 200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인걸의 넋은 살아있어서 우암 송시렬이라하면 지금도 모르는이가 별반없지만 자기를 그의 후손이라 스스로 자랑하고 뽐내는 서당선생은 명인의 후손답지 못하게 너무나 견식이 좁고 고루한 선비였다. 어느날 좌진이는 술마시고 거나히 취해 학생들앞에서 혀꼬부랑소리 하는 선생을 아니꼽게 보고와서 불만스러워했다. 다심한 어머니는 아들의 고발을 듣고나서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쉬였다. 이제 배움의 길에 들어선지 한해되는 자식이 선생과 쉬틀려 맘을 달리먹고 학업을 중도이페(中途而廢)할가봐서였다. 더구나 좌진이네 집안에는 어쩌지 못할 비운까지 덮치였다. 이해의 2월에 일본에 망명했던 그의 십일촌숙부 김옥균이 상해로 갔다가 거기서 자객의 손에 살해되였다. 3월에는 그의 시체마저 양화진(楊花津)에 갖다가 걸어놓았다. 육시처참까지 당하다니 실로 구곡간장이 끊어질 절통한 일이였다. 지금 살아있는 그의 일가친척은 모두 비분에 잠겨 하수인과 흉모를 획책한 폭군을 그지없이 증오하고 저주하고있었다. 6살밖에 안되는 좌진이 역시. 오촌숙부는 엄한 눈길로 그를 단속했다. 나어린 좌진이까지 벼르는,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洪鍾宇)는 수구파(守舊派)의 앞잡이로서 프랑스류학을 하고 돌아와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거기서 그런 잔인한 짓을 했던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겨우 6살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좌진이가 덩치는 벌서 그 나이를 곱먹은 아이들만큼 크거니와 용력역시 남달리 비범해가고있음에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또 그가 일시적인 감정충동을 못이겨 어른 몰래 어떤 우둔한짓을 할지도몰라 마음조이기도했다. 이때는 참으로 아이들의 마음까지도 황황케하는 소란스런 세월이였다. 이해의 2월 15일, 동학당접주(接主)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貪虐)에 항거하여 란을 일으키니 그 진동이 여느때보다 퍽 컷다. (동학당은 동학도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861년에 생겨난 조선의 고유한 종교로서 통치계급을 반대하고 유교를 반대하며 외래의 침략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비밀결사였다.) 폭동군은 전주감영에서와 리조정부에서 보낸 관군을 련속격파하고 백성들을 압박착취하던 통치기관인 관청들을 모조리 파괴소각하였고 악질관리와 량반들을 처단하였으며 감옥을 마스고 죄없이 감금당했던 백성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면서 백성탄압과 억압에 써먹었던 문건들을 불태워버리였고 전라도의 전부지역과 도소재지인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압박받고 천대받던 굶주린 백성들은 동학란에 갈채를 보내면서 지지해나섰다. 3월에는 좌진의 고향이 있는 충청도에서도 백성들이 전라도에서처럼 이 동학당의 폭동에 호응하여 는 구호를 웨치면서 떨쳐나섰다. 폭동군의 기세가 높아지니 대대로 내려온 량반집이요 문벌이 높았던 좌진이네가 자연히 겁을 집어먹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폭동군은 의 기치를 든 것이고 겸해 노린것은 탐학을 일삼아온 악질관리와 그따위량반이였지 좌진이네 같은 집은 아니였다. 정부군에 의해 눌리운것 같으던 동학당란이 4월에 이르러 재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안핵사 리용태의 포학에 항거한것이였다. 그런데 무능한 조정의 비겁불의한 처사로 인하여 그것이 마침내는 중, 일량국간의 전쟁을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교활한 일본은 기회만 엿보아오던 참이라 조선에 출병할 음모를 가지고 불량패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소위 이란것을 조직해 동학당을 협력하면서 공공연히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개입했다. 동학당의 진공에 의해 서울이 위급하게 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증원병을 청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군이 조선에 출병했는데 에 의하면 중, 일 량국이 만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에는 사전에 반드시 상대방에 조회하기로 되었다. 하니까 일본은 구실이 좋아 더 많은 군대를 증파했던 것이다. 좌진이는 서당에만 가면 책속에 파묻혀 세상이 돌아가는걸 알수없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소식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종들까지 수근대를 소리를 늘 듣군했다. 그것은 청나라군대가 아산에 왔다느니 일본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느니 동학당란이 평정됐다느니 청나라해군과 일본해군이 아산항부근에서 싸웠다느니 대동구바다에서 싸웠다느니 륙군들이 환성에서  맞붙어 싸웠다느니 평양에서 맞붙어 싸웠다느니 하는 등등이였다.   6월에 일본공사 오도리 게이스께(大烏圭介)는 군대를 인솔하고 조선왕궁에 돌입하여 근위병의 무기를 해제한 후 조선왕 리희(李熙)를 체포하고 대원군(大院君)으로 하여금 잠시 국정을 맡아 보게 하고는 집정 민영준(閔泳駿)을 임자도(荏子島)에 추방하고 중국에 접근하여 일본을 반대했던 관리들을 학살했다. 그뒤를 이어 일본군대는 풍도(豊島)에서 중국군함을 격침시켰다. 이로인하여 중일전쟁은 드디여 터졌다. 좌진은 이러한 정황을 후에 오촌숙부한테서 들어 알게 되었다. 오촌숙부 창규는 캐묻기를 좋아하는 조카를 앞에 놓고 이렇게 일, 청 두나라를 몰잡아 증오하기도하고 저주하기도 했다. 그는 또 어린 조카보고 가슴깊이 새겨두라면서 선조 25년의 임진란때 일본이 조선반도를 유린하여 이루 혜아릴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일과 이번에 를 왔다는 청나라군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산에서의 전투가 일어나기 며칠전에 청나라의 리홍장은 광서황제의 지시를 받고 위여귀(衛汝貴), 마옥권(馬玉昆), 좌보귀(左寶貴), 풍승아(豊升阿) 이 네사람에게 명령하여 각각 자기 부대를 인솔하여 조선의 옛서울인 평양성에 주둔하게하였다. 이때 조선인민들은 대다수가 청나라에 호감을 가지고 일본을 배척하는 때이라 대부대의 중국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주식(酒食)을 준비하여 그들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민들은 만청정부의 군대가 규률이 문란하리라고는 생각지도못했다. 청나라군대는 국경을 넘어서자 백성의 가구(家具)를 파괴하고 주택에 불을 지르며 재산을 략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며 인민을 학살하고 장정(壯丁)을 강제로 랍치하는 등 온갖만행을 다 하였으므로 조선인민들은 매우 실망하였다. 그 정황을 리홍장은 에 아래와같이 밝히였다.     집에 돌아온 좌진이 어머니앞에서 주먹을 쥐고 오촌숙부한테서 들은 소리를 외웠더니 어머니 역시 몹시 격분해하면서 한숨짓는것이였다. 이에 좌진은 발끈 어성을 높혔다. 어찌 6살먹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 하겠는가. 어머니는 자못 경탄의 눈으로 아들을 다시보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해의 가을, 조선 각지에서 동학도들이 다시 봉기를 했다. 그러나 얼마못가서 관군에 의해 탄압되고 두령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였다가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판결받아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리고 1월에 이르러서는 청일전쟁도 끝났으며 이 체결되고 청나라가 일본에 굴복하고말았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그로하여 큰 장애란없이 좌진이는 좌진이대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는 놀음에 팔려 가끔 무단결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유언과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당공부를 견지해서 놀랄만치 첫 두해동안에 벌써 와 을 배웠다. 그래서 남한테 형 경진이보다 더 총명하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그런데 바로 1895년 이해의 가을에 7살나는 좌진이는 끝내 서당선생을 닦엽혀서 갈산마을은 물론 온 홍성고을까지 들성케하는 야단이 한바탕 일어나고말았다. 갈산마을의 윤생원로인이 초상난 날이다. 본래 술망태나답지 않은 송로암선생은 술썰썰이나던차 장사집에서 모시는지라 강의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리로 가면서 학동들보고 어데 가지 말고 복습을 잘하라고 단단히 을러놓았다. 그런데 선생의 회초리에 겁을 먹고 지내오던 아이들이 선생이 없어지자말자 풀어놓은 망아지같이 얼싸좋다고 란장판을 벌렸다. 그네들이 뜀뛰기도하고 씨름도하면서 한창 제멋대로 복새판을 피우는데 담장밖에서 상여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치던 장난을 뚝 그쳤다. 한애가 선줄을 끌었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따라서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다. 상여는 마을밖을 나갔고 마을밖을 나간 상여는 그냥 구슬픈 상여소리에 실리여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거기에 유혹되여 어린 학동들은 그만 시간가는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후, 아이들은 비로서 제정신이 들었다. 땋아늘인 머리채를 철렁거리며 달려와보니 그새 선생은 먼저돌아와 거기 얌전하게 남앗던 아이들을 시켜 물푸레나무회초리를 한다발이나해놓고는 낯에 독살을 피우면서 기다리고있는게 아닌가. 아뿔싸, 큰일났다! 규률위반자에겐 엄벌이 첩경인지라 매사태가 터져 애들은 종아리에 피멍이 드는 변을 당하고야말았다. 그러나 좌진이만은 그따위변을 면했다. 선생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슬그머니 뺑소니를 쳤던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길로 그냥 집으로 갈수는 없었던 좌진이는 매질이 끝나고 서당에서 글읽는 소리 한창 날 때에야 슬그머니 들어갔다.  선생은 도끼눈으로 찍어박듯 쏘아보면서 을러멧다. 좌진이는 입을 꾹 다문채 제자리에 앉아 책만 펼쳤다. 좌진의 숨소리도 낮지는 않았다. 선생이 회초리를 들면 그도 가만있지 않을 잡도리였다. 요전날 아침 숙제한 글을 읽어바치다 욕먹고 매맞은 분이 되다시 치달아올랐던거다. 그날 오래 꿇어앉아서 저려나는 발을 개였더니 선생은 이라면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한매 갈겼다. 제 부모한테서도 그렇게는 맞아못본 매였다. 선생은 분이 났지만 웬 일인지 성깔을 더 부리지 않고 래일 매맞을 준비나 단단히 하라 했다. (흥. 매를 맞아? 이제 또?) 좌진은 속으로 코방귀뀌였다. 송로암선생은 방안에다 초상집에서 얻어먹고 온 역한 술낸새를 물씬 풍기였다. 게트림한 끝에 선하품을 하더니 아랫목에 풍침을 베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는 인츰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하더니 잠에 골아떨어졌다. 한데도 회초리맛을 본 애들은 지독스런 선생이 혹시 능구렝이같이 딴청을 쓰지나 않나해서 감히 떠들지 못하고 글소리를 높이였다. 이틑날아침에 세수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머리에 탕건을 쓴 송로암선생은 늘 보던 을 읽자고 펼쳤다가 거기에 난데없는 이라 쓴 조그만 종이쪽지가 들어있는걸 발견했다. 기구멍이 딱 막힐 일이였다. 송로암선생은 자기눈을 의심하고 다시보았지만 그것은 분명 자기 송로암을 죽으라는 글이였다. 이제 일곱 살먹은 어린학동 김좌진의 필적임에도 틀림없고. 어찌된 연고인지를 명백히 깨달은 송로암은 자리에서 벌컥 일어났다가 털썩 주저앉고말았다. 학동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서당에 왔다. 그런데 기다리는 좌진이만은 오지 않고있었다. 느즈막해서 그의 집 종 춘봉의 막내아들이 전날 좌진이 선생한테서 빌려갔던 을 갖고 선생앞에 나타났다. 자기는 오지 않고 종아이에게 쥐여 돌려주는 판이였다. 헌데 그 책속에도 이라고 쓴 종이장이 끼여있을줄이야. 과연 울화통이 터질 일이였다. 얼굴이 단통 지지벌개진 송로암은 씩씩 황소숨을 톱다가 홰대에서 도포를 내려입으면서 호통뺏다. 그래서 학부형들이 서당방에 많이 모였는데 송로암은 이 일을 말하고는 위인이 불출이다보니 제자한테서 이따위 봉변을 당하는 모양이라느니 나이 50을 먹도록 훈장노릇해왔지만 이렇게 해괴한 일은 난생처음본다느니 하면서 자기는 있을멋이 더 없어서 당장 가겠노라했다. 사태가 이쯤되고보니 썩 미안하게 된것은 기별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한 좌진의 오촌숙부 창규였다. 그는 고약한 조카를 단단히 가르쳐 다시는 그따위짓을 못하게 할테니 노여움을 참아달라고 선생을 달래는 한편 큰조카 경진이를 시켜 냉큼 좌진이를 불러오라했다. 그런데 심부름을 갔던 경진이는 돌아와 좌진이는 집에 없다고, 자기보다 아침에 일찍이 나왔는데 어데 갔는지 모르겠노라 했다. 송로암은 이따위 가시돋힌 말을 내뱉어놓고 갈산의 서당을 떠나고말았다. 저기 동네앞 솔무더기가의 병풍바위에서 옥색저고리에 밤빛바지 입은 좌진이는 10여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군대놀음을 놀다가 왁짝떠들면서 노새타고 가는 선생을 싱긋이 눈바램했다. 저녁때 어머니가 집에 들어온 좌진이를 꾸짖으니 맞받아 뱉는 아들의 대답역시 당당했다.             
37    장편전기 설한(1) 댓글:  조회:2944  추천:2  2014-02-23
  1.    충청도 홍성땅. 북으로는 삼불산(三佛山), 남으로는 청계천 맑은 물을 끼고있는 마을ㅡ 갈산(葛山). 월선정(月仙亭)의 련못에 살얼음지던 동지달 스므나흔날, 태고연한 이 마을에서 고고성을 터뜨리면서 김좌진은 인간세상에 태여났다. 그때 김좌진의 아버지 형구씨는 나이 26살이였고 어머니 리씨는 27살이였으며 좌진의 손우로는 9살나는 누님 옥출(玉出)이와 5살된 형 경진(敬鎭)이가 있었다. 좌진의 아버지는 그때 고종조의 참봉으로 지내면서 80여칸의 널다란 기와집에 남녀종만도 50여명을 부리면서 살고있었으니 갈산뿐아니라 온 홍성고을안에서도 뜨르르한 세력가였다. 그의 가문을 보면 실로 오랜 량반가문이요 명문거족이였다. 저 멀리로는 조선왕조 인조(仁祖) 11년(1637년) 12월, 청나라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것을 요구함에 척화론(斥和論)의 주장에 따라 이를 배격하자 청태종(淸太宗)이 직접 20만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 해서 일어났던 때에 태자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가 그 섬이 적군에게 점령되니 담뱃불로 화약고에 불을 달아 어린 손자와 함께 폭사한 력사인물 선원 김상용(仙源金尙容)이 좌진의 11대조요, 가까이로는 5년전이던 고종 21년(1884년) 음력 10월에 개화당(開化黨)사람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과 손잡고 사대당(事大黨)인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정부를 세우고저 을 주모했던 김옥균(金玉均)이 바로 좌진의 십일촌숙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좌진이야말로 애국자의 피를 이어받고 태여난 그 김씨가문의 후예라 하겠다.   갓난애가 어찌나 컷던지 보는사람마다 놀래면서 이 집에서 장수가 났다고 축복했다. 그바람에 부모들은 퍽 기뻐했다. 비록 막연하긴 했지만도 그네들의 기대는 진실로 이러했다, 너무나도 약세하여 이제는 남의 침탈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라를 구원할만한 영웅이 자기 가문에서 꼭 나와줫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세월이야 어떻든 아이는 무사히 잘 자랐다. 좌진은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천성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4대째 내려오는 종이 있었는데 이름은 춘봉이라 불렀다. 춘봉이는 손재간있어 통이며 칼같은것을 잘 고쳤거니와 멍석도 잘 틀었다. 말하자면 이 집에서는 둘도없는 기술자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어머니를 김씨네는 종할미라했는데 맘씨 좋고 어리무던한 그녀가 좌진이를 끔찍이 귀여워하면서 거의 업어자래우다싶이 했다. 한데 유년의 좌진이는 곱게 업혀있을 념은 안하고 가끔 엉덩뜀질을 하면서 종할미더러 망아지 우는 소리를 내라고 닦달을 놓군 했다. 그러면 종할미는 과연 망아지우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뛰는 양 흉내라도 내군 했다. 좌진이가 하도그래 그의 아버지는 이 둘째아들이 말을 번지기 시작할 때 벌써 크거들랑 좋은 말을 사주마고 약속한바 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되였다. 이러구러 유년 김좌진이는 무병하게 잘 자라건만 아버지 김참봉은 시름시름 앓기시작한 것이 병이 고황에 들어 셋째아들 동진(東鎭)이까지 보고나서 자리에 누운후로는 다시 잃어나지를 못했던거다. 그때 좌진이는 4살이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그를 자기 머리맡에 불러 앉혀놓고 물었다. 이것이 본래 어린애였던 그한테는 어려운 질문이였다. 그런데 좌진이는 아버지의 충혈된 눈을 말끄러미 보다가 대답하는것이였다. 너무도 뜻밖인지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눈이 둥그래졌다. 이제 4살먹은 애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올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러나 좌진이가 아무렇게나 허튼소리를 줴친것 같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아버지가 어머니보고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더러운 민씨일족이 정승, 판서질을 도맡아하니 기막힐 일이라며 욕하는 소리를 그가 들은것이다. 그래서 정승, 판서가 어떤것인지는 몰라도 그걸 자기가 빼앗아 가지리라 맘을 먹은거고 그렇게 말하면 앓고계시는 아버지를 위로할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되려 낯색을 흐리우고 꼭마치 다 자라 의식이 튼 아이에게 하듯이 간곡히 부탁했다. 좌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다. 좌진이는 의연히 빙그레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이로부터 이틀후에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은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좌진에게 동생 동진이가 생겨 백날만에.  아버지는 돌아갔다. 그까짓 참봉벼슬쯤이 탐탁할리 없지만 임금이 하사한 은총이요 내 나라의 벼슬이니 굳이 사양하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살아오시던 아버지, 가끔 서울갔다가는 눈꼴사나운 민씨의 세도와 그자들의 타락함을 보고서는 이를 갈며 돌아오시군 하셨던 아버지, 버젓한 문벌에 떳떳한 혈통을 가졌건만 자신에게는 힘도 능력도 없어 속수무책이 되었던 아버지, 벼락출세하여 판을 치면서 선조가 물려준 내 나라를 말아먹는 망나니같은 녀석들을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과 억울함에 지쳐서 나중에는 병까지 얻었던 아버지는 망명간 옥균형을 그리다가 풀지 못한 한을 한가슴에 안은채 저 세상으로 가고말았다. 눈물겨울 지경으로 막연한 희망을 제 자식에게나마 걸어놓고 조용히 저승으로 가버렸다. 속담에 큰집은 기울어져도 삼년 간다 했다. 그래선지 50여명의 가노가 모여있는 좌진이네 집은 의연히 북적거렸고 마을안의 번성한 일가친척들도 변함이 없었다. 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현상이였지 주인을 잃은 집안은 허전하고 쓸쓸해짐을 어쩔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지겹게된것은 이제 30살인 미망인 리씨였다. 그녀도 량반집 딸이라 부모들께서 인생수양을 쌓았어도 너무나 일찍이 받아들인 불행이라 기구한 제 신세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북받치는 서러움을 누를수 없어 거의 매일이다싶히 혼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나어린 좌진이는 그러는 어머니가 민망스러웠던지 어머니가 젖먹이 동생을 안고 침묵에 잡겨 한숨짓거나 소리없이 눈물떨굴 때면 하고 묻거나 그저 기분없이 옆에서 우두커니 지켜보다가는 발길로 문을 걷어차고는 밖으로 뛰여나가군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지꿎게 캐물었다. 어머니는 이러곤 다시 흐르는 눈물을 훔치였다. 어린 좌진이로서는 종시 모를 일이라 눈만 더 크게 떠가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저승이라는것이 어디냐, 서울이 아니냐고. 서울도 아니고 이 땅도 아니면 그래 룡이 올라가려다가 못 올라가고 떨어졌다는 저 하늘이냐고. 자식이 너무나도 천진함에 어머니는 더 응대를 못하고 웃음만 지었다. 그랬더니 좌진이도 따라웃고는 애기의 이름을 복동이라지으면 어떨가, 아버지 안오셔도 엄마 있으니 우리 애긴 복동이로 되잖느냐고 얼뚱한 말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자기도 이름을 판서라 고치자했는데 아버지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 그만두련다 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이였다. 귀여운 이 아들을 어찌 불쌍하게 키우랴. 어머니 리씨녀인은 맘먹고 잘키우리라 했다. 저것이 사람이 되는것을 보기까지는 천지가 뒤집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그런데 웬 일일가. 이날 놀러나간 좌진이가 날이 저물었지만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잃어졌다고 온 집안이 찾으러 나섰더니 어린 좌진이는 월선지(月仙池)련못가 바위돌우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것이였다. 달밝은 밤 어린아이는 고요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다가는 고개를 꺾고 련못을 들여다보고 련못을 들여다보다가는 다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군 했다. 그러는 그를 삼월이라는 녀종이 둘쳐업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카가 잃어졌다는 소리에 놀래여 달려왔던 오촌숙부 창규는 그를 보자마자 너 이놈 어디가서 집안어른들을 걱정케 만드느뇨 하고 노해서 꾸짖었다. 했건만도 어린 좌진이는 입을 꼭 다문채 아무 대꾸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의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민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물어보았다. 아이는 마침내 입을 열곤 고개를 떨어뜨렸다. 젊은 과부 리씨는 그만 아이를 끌어안고 오렬을 터뜨리고말았다.   좌진이는 자라면서 점점 장난이 심해져 날만 밝으면 놀음이였다. 마을의 애들을 휘몰고다니면서 온 동네가 들썽하게 놀아댔다. 군대놀음, 씨름하기, 싸움질.... 돌팔매질해서 나무에 앉은 새를 잡았고, 그러다가 남의 집 장독을 깨기도하고. 제집의 종아이들과 말타기놀음도놀았고 방금해입은 하얀 옷을 흙투성이되게 하거나 찢을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종아리를 맞아가며 꾸중을 들었다. 그럴 때면 되려 어머니보고 때리면 누가 아파할줄 아는가 엄마 손바닥만아프지 하고 말했다. 자기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꼭 장수가되리라고 늘 외우군하는 좌진이였다.   월선지. 이 고요한 련못이 생겨서 허구한 세월. 흰옷입은 이곳 갈산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비껴담은건 얼마며 새겨담은 추억은 또한 그 얼마랴. 헌데 룡이 하늘로 오르다 못오르고 떨어졌다는 전설을 갖고있으니 섭섭한 일이였다. 좌진이는 가끔 이러군 해서 어른들의 찬탄을 받았다.                    
36    장편전기 설한(雪恨) 댓글:  조회:2359  추천:1  2014-02-23
  여지껏 순옥이라는 가명으로 불리워온 그녀의 본명은 김강석(金剛石), 애명은 산조(山鳥). 한얼님이 보살펴주는 명이였던지 여지껏 세파의 와중에 부대끼면서도 스러지지 않고 지겹게 살아왔다. 너무도 기구한 운명이다. 아직도 제 생일조차 모르는 그녀는 자기가 바로 김좌진의 딸이라는 것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60여성상이나 숨어살아왔으니 가슴에 맺힌 설음이 얼마며 말못할 한인들 또 얼마랴.   김좌진(金佐鎭)ㅡ 한때는 일본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광활한 만주땅을 종횡무진으로 줄음잡았던 그, 드높았던 성망과 더불어 떨친 위훈도 혁혁했건만 어이하여 세월이 바뀌더니 이 땅에서는 이름조차 망각되였더냐? 애석타, 거룩한 인걸의 넋이 침묵속에 묻혀있으니. 력사는 바르건만 그것이 불손한자의 손에 잡혀 롱락되면 귀신도 웃고 울리는 희비극이 생기거니 이제는 바로잡을 때가 된것 같다.   김좌진은 어떤 사람인가? 호는 백야(白冶), 본관은 안동(安東), 형규(衡奎)의 아들. 1889년에 홍성에서 태여난 그는 1930년 한때 부하였다가 후에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박상실(朴尙實)의 손에 암살당했다. 향년 42살.   명문가의 후예로 15살 때 벌써 50여명의 가노를 전부 해방시키고 2,000여석이나 추수하던 전답을 전부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해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섯던 선구자, 체결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코저 조선일판을 누비다가 왜놈경찰에게 체포되여 세 번이나 옥고를 치루어야만했던 우국우민의 애국자, 전해에 만주로 망명해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장령이 되었던 백야 김좌진장군은 조선이 낳은 희유의 장사였고 걸출한 독립운동가여으며 항일영웅이였다!                                                                                               저자   김송죽                                        
35    장편전기 설한 댓글:  조회:3111  추천:4  2014-02-19
     장편전기 설한(雪恨)        머리글   장군의 구광은 영령을 깊숙이 간직하고 타향천리 이름없는 산기슭에서 력사의 공정을 묵묵히 기다리면서 춘하추동 세월의 이끼를 덮으며 어언 60여년을 보냈다. 온 조선이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여 민족수난의 비운속에 질식하고 있을 때 나라를 구하고저 민족독립을 쟁취하고저 반일항쟁의 기치를 추켜들고 혈전의 길로 분연히 떨쳐나선 김좌진장군의 종횡무진의 자욱자욱은 만주의 넓은 광야에 혼불로 타면서 나라를 빼앗긴 백의동포들의 사위여가는 민족의식에 불씨를 더하였다. 하건만 그 처절한 나날에 섬섬하던 혼불은 오래동안의 력사의 침묵과 진실을 외면한 왈가왈부로 중국의 민족사에 인멸되다싶히되였고 후세들의 기억에선 창백한 갈피로 되고있었다. 력사는 필시 진실과 그 가치를 밝고 바르게 내세우기마련이지만 그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진통도 겪는다. 그 진통과 함께 하여 김좌진장군의 딸인 김강석녀사도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을 애오라지 마음속에만 기념비로 소중히 세워놓고 세월과 더불어 력사의 공정을 진작 바라며 60여성상을 보냈다. 장군의 피를 이어받아 그토록 자부와 긍지에 가슴이 부풀었어야 했을 장군의 딸이였건만 길고도 짧은 력사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본명을 숨기고 익명까지 하면서 아버지의 생애를 근끼있게 점철시키고 그 령혼을 지켜온 딸의 갸륵함은 더구나 눈물겨웁다. 장군의 딸의 견증으로써 력사는 오늘 마침내 우국우민의 애국자이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친 독립운동가, 반일의병장인 김좌진장군의 영상을 우리 민족사에 더 밝게 모신다. 중국의 우리 민족사에서 인멸되던 장군의 애국애족의 발자취를 근엄하고 진중하게 다듬기 위해 경제적인 후원을 보낸 중국조선민족사학회와 진심으로 성원을 보낸 해림시정부에 심심한 사의를 표시한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4년 8월     
34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5ㅡ8) 댓글:  조회:3408  추천:3  2013-11-22
                               5     어찌 턱없는 루명을 쓰랴! 탈세를 했다니, 송편으로 목딸 일이였다. 종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골통을 잡고 훑고 뒤집어봐야 자기는 위법행위를 하지 않았다.   종구가 구류소에 갇혀 3일만에야 공식적인 심문이 있었다. 하진개라는 그 반탐국장에다 젊은 검찰관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온 장은생검찰장까지 개입해서 모두 셋이였다. 그들은 걸상에 의젓이 자리를 틀고 앉아 판을 차리고 합세하여 단번에 기를 꺾어놓아 종구를 무릎꿇게 하자고 드는것 같았다.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봤다니?!...   커다란 충격이였다. 눈갓이 푸들푸들 떨리면서 심장에 마비가 오는것 같았다. 종구는 마음을 진정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탈세를 했단말인가, 장부를 검사해서 과연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형벌을 받겠노라했다. 그랬더니 검찰측에서는 네가 이러면 성실한 태도가 못되거니와 완고하다는 리유만으로도 얼마든 오래 가둬둘수 있다면서 네가 수감생활이 싫거든 어서 30만원을 내라고 했다. 종구는 이 순간 귀신의 호곡성을 듣기라도한것 처럼 몸을 흠칠 떨면서 그들을 치떠봤다. 나보고 30만원 내고 나가라구? 총들고 빼앗지 못해 하는 수작이구나!      종구는 맘을 단단히 옹쳐먹고 배짱을 내밀었다.   이리하여 종구는 다시금 어느때야 나갈지 모를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지지리 고달픈 수감생활이였다. 기껏해야 8평방미터나 될가말가하는 방에다 사람 다섯이나 처넣었다. 침대가 아니였다. 한쪽벽에 붙여서 판자를 무어만든 길다란 장판이 통째로 하나있고 철판으로 만든 낮다란 출입문과 마주하고있는 창가곁에 악취를 풍기는 검스레한 양철통이 놓여있었다. 다른 감방들도 이모양일 것이다. 똥통과 함께있는 수인(囚人)들!   창문과 가까운 한쪽 벽구석에 어느땐가 천장을 뚫고 흘러내린 빗물이 패이고 얼룩져 마치도 도료가 게발린 조색판 같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거기는 그늘까지 져 어둡다. 저기에 뭣이 숨어있을가?...   종구는 고개를 꺾고 앉아 오래도록 침묵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구 이런 졸경을 치러야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터진다.   그의 옆에는 연초회사(煙草會社)의 30살 먹은 젊은 경리가 이 감방에 들어와 있었다. 원인인즉은 10년전에 한번 저질담배를 되넘겨 팔아 리득을 본적이 있는데 그걸 꼬리잡고 벌금을 안기니 그에 불복했다가 이같이 된거다.      젊은 경리는 억울하다면서 검찰원에서 백성과 너무한다고 하였다.   종구옆의 다른 한 사람은 거의 환갑줄에 든 상고머리를 한 사나이였다. 그는 제혁공장 공장장이다. 그 역시 벌금을 안기니 태도가 나빠서 들어온건데 벌금을 안기는 리유라는 것이 보통사람으로는 리해가 안될지경 해괴한 것이였다.         종구가 물었다.            그한테 무례한 언사를 던진것은 아들나이나 되는 나젊은 검찰관이란다. 상고머리는 지금도 자기가 받은 모욕과 수치에 가슴떨려 말을 더하지 않고 삼키면서 구슬피 눈을 내리깔았다.   여름계절이 짙어가는지라 사람을 죽여주는 무더위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약보름가량 지나서 제혁공장의 상고머리 공장장이 끝내 벌금을 하고 놓여나갔다. 그새 치질이 도져 심해지는통에 아픔을 이겨낼수없었던 것이다. 그는 검찰원에서 하라는대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반성서까지 써바쳐야 했던것이다.   열흘이 가고 스므날이 가고 한달이 가도 종구를 다시 불러내가지 않았다. 아무렴 자루 쥔 놈 이기지 날 쥔 놈 이기랴, 두고보자 하는게 분명했다. 무죄한 사람을 무작정 가둬놓고 이렇게 시달려죽이는 법도 있느냐, 이 빌어먹을 것들아! 아아, 정도는 어디로 갔느냐? 갇힌 몸이라 이것은 하늘도 들어주지 않는 공소요 피타는 절규였다!   열려진 창문으로 파리 한 놈 날아들어와 앵ㅡ 앵ㅡ 고놈은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좋아 빙빙 돈다. 널판장에 앉아 앞발을 싹싹 비비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나가버리고 나갔다가는 또다시 날아들어오고... 지금 내 신세가 저 파리보다 나은게 뭐냐? 억탈당한 자유! 종구는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가 갑갑함을 못이겨 하픔을 크게 하고나서 입을 열어 침묵속에 깊이 빠져있는 종구를 건드렸다.            젊은이는 무색한 웃음을 웃고나서 다시 덤덤해진다. 피기를 잃어가고있어서 지금은 처음 들어왔을 때의 혈기방장한 젊은이 같잖았다. 안해가 4만원이 아니라 40만원을 벌금하더라도 남편을 빼내오겠다는것을 왜 벌금을 한단 말이야 하면서 이러고있는데 대체 어느때까지 뻗쳐낼지?... 젊은것이 너무 고생하는것 같아 보기가 안되였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거기서는 나가도록 궁리를 돌려보라고 충고를 하려다가 종구는 그만뒀다.   또 한달이 지나갔다.   구류소감방은 그사이 역전의 싸구려 려관마냥 자리가 빌새라 여러 사람을 받고 내보냈다. 집체기업책임자도 있고 개인기업주도있고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는 엉터리경리도 있고 허가없이 침통 들고 다니다가 걸려든 돌팔이의사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검찰들 손에 잡혀들어온건데 원인인즉 다가 그놈의 벌금때문이였다.   개중에 탈세를 엄청 하고서도 교활하게 여우를 떠는 사람이 없는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나라법과 체면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어떤 건으로 벌금을 안길 때 너무 과중하다 그래서 불만스러움을 나타내면 벌금액은 대바람 배로 올라가고만다. 그래서 안내면 가둔다. 까딱하면 끄떡하는판이니 아닌게 아니라 신경이 곤두서게 하는 무서운 벌금대전이 아니고 뭔가고 억울함을 토해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신과(控申科) 검찰손에 잡혔다는 사람, 정공과(政工科) 검찰손에 잡혓다는 사람, 감소과(監所科) 검찰손에 잡혔다는 사람... 그들의 눈에 현검찰원은 땀구멍을 다 열어놓고 피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혈귀로 돼보일뿐 다른 무엇으로는 돼보이지 않았다.                                6     종구가 여기에 감금죈지 어언 다섯달! 무더위가 숙지더니 그뒤를 쫓아서 언제 더워봤더냐싶게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꼬박 사흘째다. 연초회사의 나젊은 경리가 기침을 자주하며 가쁜숨을 들까불더니 간밤에는 열이 오르면서 허드레잡소리를 쳐댔다. 된 감기에 걸린것 같은데 어쩌면 좋다? 저러다가 페염으로나 번지면 큰일인데. 종구는 거의 장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다싶히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밝자마자 수용소책임자를 불러 당신들은 사람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가 안여기는가 질문을 들이대고는 병이 난 젊은이를 책임지라 했다. 했더니 저쪽의 응대란 고작 감기약을 몇알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를 취급해온 검찰관이 종구보고 하는 말이였다. 자식이, 날보고 투항을 설교하라는거냐. 종구는 주먹으로 한 대 후려주고싶은걸 겨우참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가? 그는 돌아와서 다시 생각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젊은이보고 고깟 돈이야 얼마든 벌게 아니냐. 바치고 나가라. 벌금하고 여기를 나간다 해서 그게 백기를 드는 것일가. 달리는 그자들과 맛설 방법이 없겠는가.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 사람은 몸이 중천금(重千金)이니 살고봐야 한다 권고하기도 하고 나도 이제는 대항방법을 고쳐보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는 마침내 달통되였는지 말을 들었다. 그는 이틑날 벌금액 4만원을 현금으로 내고 풀려 집으로 돌아갔다.   운명의 작간인지 희롱질인지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가 나가기 바쁘게 들어와서 그 빈자리를 메운 사람은 공교롭게도 종구앞에서 불쾌한 회억으로나 남을 광대극을 놀아댄적이 있는 새우장사군이였다. 령감쟁이는 이쪽이 누군지를 모르고있지만 종구는 첫눈에 추접스레 생겨먹은 그를 알아보았다.      령감쟁이는 들어오자마자. 삼거풀이 돼가지고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누군가 묻자         종구가 몰박아 입을 다물게했다.   현소재지인 이 자그마한 도시는 갑작스레 길가 난전마저 정돈되면서 질서가 잡혀가는것만 같았다. 허가없이 장사해먹고 사는 사람이 새우장사꾼 하나뿐 아니였다. 요즘 더러는 벌금을 피하느라 장사고 뭐고 집어던지고 소리없이 몸을 빼는 사람도 있었다. 붙잡히우면 자기한테 과한 벌금이 안겨질가봐 겁을 집어먹고, 한편 또 어벌쩡하게 능청떠는 것으로 경찰의 마음을 사려는 꾀얕은 인간도 없지 않았다. 허나 일단 잡히는 날이면 짜드락나는 판이라 그 어떠한 수단이든 무색해서 거의 맥을 잃고있었다.]   바로 이것이였다! 현검찰원의 새로부임한 검찰장 장은생은 수하 검찰관들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수탉만난 오공 도망칠수 있을가,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아나는거야, 좀이라도 걸려드는 놈은 고개를 숙이게 만들라! 사정보지 말고 꼭대기를 쳐, 꼭대기를!   황소를 잡고나서 돼지를 잡고, 돼지를 잡고나서 개를 잡고, 개를 잡고나서 닭을 잡고, 닭을 잡고나서 더 잡을것이 없으면 쥐라도 잡자고 드는 걸신들린 도까비가 청천백일하에 작경을 놀고있었다. 제 나라의 법정기관이니 의례 옳으려니만 믿어주는 순진한 백성들, 훌륭한 제도의 나라에서 살면서 지금의 이 좋은 개혁개방의 황금세월에 욕을 보고 우롱당할줄이야 그네들이 어찌 알았으랴!   수인이 되어 하루가 여삼추같이 지리한 부자유의 나날, 구류소의 음침한 랭기는 종구의 신체를 점점 심하게 해쳐가고있었다. 입맛이 떨어지면서 오른쪽 윗배가 아파나더니 소화장애증상이 반복적으로 생겼다. 간경변증에 걸린것이다. 종구는 차돌같이 굳고 단단하던 몸이 그만 병채로 변해가고있었다.    종구는 말이 적어졌다. 해도 날이 서지 않는 말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말해도 소용없었다. 도리가 무시되고 인권이 짓밟히고있는 여기서는, 그러니 화산같이 터져오르는 분노도 그저 침묵으로 지그시 누르는수밖에.         여기로 갓 들어온 날 벌써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워낙 말이 수다스런 새비장사군은 입이 가려운지 쑤셔나는지 멋모르고 다시 놀렷다가 하마터면 종구의 주먹에 맞아 뼈도 추리지 못할번했다.   구류소감방에서 다른 사람들은 진종일 입에 자물쇠를 놓고있는 종구가 걸핏하면 사납게 성깔을 부리는지라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퍼그나 조심들을 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지리한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바깥 주민구역 어디선가 폭죽텃치는 소리 들려왔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새해의 설명절이건만 종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감방에서 보내야했다.      종구는 처음과 꼭같은 말로 내내 뻗치는 판이다.   벽난로에다 석탄도 제대로 넣어주지 않아 썰렁한 감방, 종구의 시선이 다시금 창가 구석진데로 옮겨져 고착되였다. 예민해진 시력의 도가 점점 높아져서인지 어둡던 구석이 그의 눈에 차츰 밝아졌다. 그러자 여지껏 흘러내린 빗물에 패이고 갈라진 벽의 그 틈서리에다 몸을 감추고있었던 한 마리의 거미가 마침내 발견되였다. 종구는 그놈을 중시했다. 오래도록 관찰했다. 그러노라니 마침내 고놈의 발고리같은 발이 움직이는걸 발견하게되였다. 아니 저 놈이 이 추운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단말이냐?!... 음험한 놈! 숨이 질겨도 이만저만이 아닌걸! 의문이 짙어가면서 기적이라는 경탄이 아니라 그 놈의 완악한 생명이 한없이 미워났다.   그놈은 끝내 몸 전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지껏 숨어있은 틈서리에서 나오느라고. 저 놈이 왜서 나올가?... 거미는 천장을 기여서 거의 중간쯤에 이르러 정형을 파악하느라 그러는지 멈춘다. 바로 종구의 머리꼭대기쪽이다. 그 놈은 한창 꼼짝 않고있더니만 마침내 육안으로는 거의 보아내기 어려운 가느다란 실을 밑구녕으로 뽑으면서 아래로 곧추 떨어졌다. 그래서 바로 종구의 발끝 장판에 내려앉는다. 종구는 발가락으로 고 놈을 꼭 눌렀다. 톡 하고 가벼운 소리난다. 분명 배터지는 소리다. 어 속이 시원하구나! 이렇게 후련할 변이라구야!    난 살아서 여기를 나가고봐야한다. 만 6개월만이다. 이틑날 종구는 검찰측의 요구대로 싼타나를 거기다 저당잡히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7     종구가 집으로 돌아오니 안해의 얼굴을 덮고있던 구름장이 걷히고 아이들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났다.   헌데 생각밖에 일수가 검찰원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해의 말이였다.   종구는 인츰 일수네 집쪽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수정같이 맑은 사람으로 믿어왔는데 경제문제가 있다니 웬 말인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일수의 각시가 억이 막혀 피력하는데 들어보니 과연 한심했다.   일수는 요즘 일거리가 없어서 차를 놀리고있었다. 개체운수업이란건 본래 그런게 아닌가. 새 일거리를 찾아야했다. 어제저녁켠이였다. 찜찜한 일거리라도 쥐여보려고 진종일 거리에 나가 시간을 보낸 일수가 일감도 없고 시장기도 들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디서 지키고있었는지 생면부지의 검찰관 둘이 귀신같이 나타나 따라들어오는 것이였다.      나이가 일수와 비슷한 중년사나이가 을 내보였다.      일수는 속으로 나는 이 사람한테 굽잡힐 일을 하잖았는데 하면서 물었다.      일수의 귀에 그 말이 어쩐지 별쭝나게 들렸다. 중년의 검찰관은 말을 더하지 않고 일수의 안색을 살핀다.      일수는 악연히 놀랐다. 란장을 맞을 무슨 개소리를 이렇게 치는거냐. 내가 공금을 점했다니, 탈세를 했다구?... 기(氣)구멍이 꽉 막히는 소리였다. 일순간 이름못할 아픔이 일수의 온몸을 줄달음쳤다.   검찰관은 낯색을 엄연히 굳힌채 대방의 내심변화를 진단하는지 눈 한번 가딱하지 않는다. 허나 그따위 서슬에 주눅들고 오가리 들 일수가 아니였다.         검찰관은 눈알을 굴려가면서 딱장을 받자고들었다.      검찰관은 갑자기 벙어리로 됐는지 말을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 노려보기만한다. 그러다가 하고 코방구를 뀌는데 그놈의 소리가 일수의 귀에 미련한 송아지 백정모르는구나 하는 위협같이 들렸다.      일수는 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뇌까렸다.      저쪽은 도끼눈을 해가지고 이쪽을 찍어본다.         이렇게 되어 일수는 잡혀간 것이다. 체포쯩도 없이.   일수가 집을 나간것이 어제라니 나하고 자리바꿈을 한게로구나. 그 사람 고생을 할텐데 어떻게 한다?... 종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지 얼마안되여 일수의 처가 달려왔다.               종구는 자기가 당할 때 처럼 그저 허구푼 웃음만 나갔다. 전갈의 배속에 독만 들어있는거야. 본인도 모르는것이면야 이것 역시 분명 검찰원에서 조작해낸 죄명 아닌가? 그자들이 이 종구한테서 돈을 우려내자고 들듯 일수한테서도 우려내자고 드는거야. 인간성을 잃어버린 그자들의 손에 또 하나의 무고한 백성ㅡ내 친구가 억울하게 당해 고생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절대 강건너 불보듯할수 없었다.            이틑날 종구는 일수의 처와 함께 현검찰원 법기과를 찾아가 미친개한테 물리지 않으려고 떡 줘 얼리는 격으로 거기서 내라는 액수의 돈을 군말없이 내놓고 일수를 꺼내왔다.   한편 일수는 이틀밤을 감방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고보니 마치도 천길심연에 떨어졌다가 부활한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그간 남편 때문에 간에 불아 달려 진정 못한 안해도 안해려니와 발벗고 나서서 자기를 구해준 종구내외의 처사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러면서 아무런 죄도없이, 본인도 전혀 깜깜인 12만 3천원이라는 거액을 눈깜짝새에 허망 떼웠구나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났다.         종구는 그네들이 아무렴 당중앙까지 끼고 그따위 험악한 막짓을 할가, 먼저 성규률검사위원회에다 적발신을 써 올리자, 그래서도 안되면 중앙에까지 써올리자, 아무 때건 이자들을 심판대에 끌어올려 법적제재를 받게 하자,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나뿐아니라 무고한 다른 사람들이 억울함을 더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여 결판이 날 때 까지 끝까지 해보자 했다. 참아내는것도 정도가 있는거야. 사람들이 그저 그냥 권력이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지 않을것이다. 우리가 나서는걸 보면 금속창문공장의 곽공장장이 나설거고 제혁공장의 공장장도 나설거며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도 나설것이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면 아마 모두가 호응해 나서려 할것이다. 반부패의 력량은 묶어지게 될 것이다. 도랑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일수가 곰곰이 듣고나서 맹세했다.                                   8     눈앞에 까마반드르르하던 싼타나가 만신창이 되어가지고 나타났다가 안개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어느날 종구는 한밤중에 이런 꿈을 꾸다 깨고보니 잠을 도무지 다시이를수 없었다... 왜서 이런 꿈이 올가? 내 차가 어떻게 되었길래? 십중팔구는 잘못된것 같았다.   이틑날 종구는 아침숟가락을 놓자마자 집을 나와 현검찰원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검찰원에 이르러 보니 과연 있어야 할 싼타나가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숙직을 섯다는 사람과 물어보니 머리를 가로젖는다. 자기는 모른다는거다. 이것들이 내 차를 대체 어디다 어쨌을가?... 반탐국에 갔다. 판공실문이 꼭 닫겨있지 않았다. 문에 노크를 해놓고는 들어오라는 말이 있건없건 발을 들여놓았다. 안면있는 젊은 검찰관이 테불서랍을 열고 뭔가를 찾고있다가 고개들어 이켠을 본다.         젊은 검찰관은 나무방망이에 뒤통수를 한 대 맞았을 때처럼 얼떨떨해서 눈을 꺼무럭거릴뿐이다. 이때 하진개가 들어왔다.      방안의 평화롭지 못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그는 목청을 돋궈 물었다.         젊은 검찰관이 하려는 말을 종구의 거칠어진 음성이 깔아버렸다.      하진개는 멍하니 쳐다볼뿐 이쪽에서 물어보는 말에 얼른 대꾸 못한다. 낯이 어두워지고있다. 대답거리없어 난처해하는게 분명하다. 복잡해지는 기색이다.      재삼 따져물었다.   하진개는 그제야 마지못해 입을 여는데, 종구의 그 차는 검찰장의 지시에 의해서 이미 처리해버렸다는거다. 차를 값을 쳐 검찰원의 빚을 갚았다나.   세상에! 이럴수가?... 주인의 동의도 없이 남의 물건으로 제 빚을 갚다니! 법을 알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청산인가, 략탈인가? 고금동서에서 이런 뻔뻔스런짓을 하는 검찰관도 그래 있단 말인가? 보다보다 별꼴을 다 본다! 종구는 너무도 격분하여 전신이 벌벌 떨리였다.      복장이 터지는 일이라 종구는 주먹으로 탁상을 탕탕 치면서 목갈린 소리를 내질렀다.            저켠의 대답은 떳떳치 못했다.         하진개는 변명하기 적합한 말이 없는지라 얼떨떨하게 얼버무려 넘기려했다.      종구는 대방을 향해 적의 찬 눈총을 놓았다.      하진개는 눈을 부라렸다.         하진개가 발칵 성을 냈다. 하급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 위신이 여지없이 추락되는것 같았던 모양이다.      종구도 좀처럼 굽어들려하지 않았다.      하진개가 위엄을 뺐다. 허지만 그건 속이 비여진 허통이였다.      종구는 참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놓았다.   사회주의국가의 검찰관을 토비라하다니! 나라의 당당한 집법인원을 모독하다니! 종구는 이런 욕을 함부로 뱉어낸것이 화가 되어 구류소에 다시갇혔다.   그러나 종구는 인젠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회심의 미소까지 떠오르고있었다. 그건 그자들의 휭포와 불의가 조만간에 끝장나리라는 확신이 깊은 내부로부터 꿈틀거리고있었기때문이였다.                          2001. 11                                                 망매(魍魅)=도깨비               
33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1ㅡ4) 댓글:  조회:3437  추천:2  2013-11-22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국제펜클럽 우수상작품)                                1      종구는 시내에 들어서자 차를 천천히 몰았다. 오가는 차량들이 많은데 보배같이 여기는 싼타나가 어데 잘못 부디쳐 외각이 긁히거나 찌그러지면 어쩌는가.... 그런데 이놈의 차를 몰고 유람을 하면 몰라도 이건 불청객마냥 환영받지 못하는 빚받이를 해야하니...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은 기분이다. 린근의 한족향에 꿔준지 10년이 넘는 돈 30만원중 그런대로 절반가량 받아냈으니.   싼타나의 후시경에 뒤를 따르는 트럭 하나가 불쑥 뛰여들었다. 색깔이 연푸른 동풍표트럭이다. 앞창웃귀퉁이에 붙어있는 종이장을 보고 종구는 그것이 일수의 차라는 걸 알아보았다. 일수는 한국 가 벌오온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사서 벌써 다섯해째 운수업을 하고있는데 벌이가 괜찮다.   나도 종구형처럼 꾸준히 벌어 살아가렵니다 하는 일수가 종구는 좋았다. 그가 올해에 43살, 종구보다 네 살 어린편이니 그를 형님이라 부르는건 당연하겠다. 그들은 서로 남남사이지만 한시내에 사는 동포요 종종 만나는터라 퍼그나 가깝게 지내고있다.    종구는 차를 급정거시켰다. 웬 녀석이 자전거를 끌고 앞을 막 꿰지르고있었던거다.      종구는 내려진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꽥 소리쳤다.   그러자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눈앞에서 과연 그가 제일 싫어하는 장면이 벌어지고말았다. 그자는 아예 손에 잡고 있었던 자전거를 활 놓고 길바닥에 쓰러졌던 것이다. 자전거짐받이에 고정해놓은 각목의 량 끝에 걸려있던 커다란 싸리광주리 두 개가 길에 나딍굴었다.      교통경찰이 달려왔다. 그는 책망어린 예리한 눈길을 싼타나에다 꽂았다. 사고의 장본인은 분명 네로구나 하는 기색이였다.   이때까지도 종구는 제 차에 앉은채 까딱하지 않았다. 내릴필요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통경찰이 바투 다가와 차창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경찰은 그런가 하면서 넘어진 사나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사나이는 전혀 운신하지 못할양 앓음소리만 뽑으면서 엄부럭을 떨었다.      경찰은 눈살을 세우면서 뒤덜미를 잡았다.   그제야 사나이는 마지못해 일어나는데 환갑을 넘긴 추접스레 생긴 령감쟁이다. 령감은 새우가 길바닥에 수태 널린걸 보더니만 그만 우거지상이 되어갖고 동구의 싼타나에 매달리며 야료를 부리기 시작했다.      일수가 참다못해 트럭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욕사발을 퍼붓고나서 다시 뛰여올라가 차를 몰고왔다. 과연 당장 깔아버릴듯이.   에크! 혼비백산한 령감쟁이는 번져진 자전거와 길바닥에 나딍구는 싸리광주리들을 황급히 수습해갖고 물러났다. 그러는 꼴이 우수워 한바탕 터지는 웃음소리...      종구는 세웠던 싼타나를 다시 몰며 두덜거렸다.   80년대 나라에서 개혁개방정책을 펼치자 종구는 현소재지와 붙어있는 교구의 어느 한족마을의 우사간을 헐값으로 사 거기다 합성유지공장을 꾸리고는 그걸 만들어 팔아서 돈을 남먼저 괜찮게 벌었다. 그의 사적은 심심찮게 신문에 나고 텔레비에도 옳랐다. 그러다보니 성소재지와는 거리가 먼 이 구석진 지방에서 한때는 개혁의 선줄군으로 인정되여 인기가 있었던 그였다.   종구는 급유소와 금속창문공장이 있는 구역을 지나고 상점거리를 지나 서북쪽에 있는 새 주택구역에 꺾어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소학교 다니는 아들애와 딸애가 제 애비의 팔에 매달려 겨끔내기로 졸랐다.      애비의 입에서 이런 대답을 받아내고는 너무너무 기뻐서 퐁퐁 뛰는 애들. 그러는걸 보고 행복에 도취되여 방실방실 웃는 안해의 밝고 환한 얼굴.   아담진 2층양옥이 반갑게 맞아준다.                                2.     이틑날 종구는 공장에 가서 외현 어느 건축공사장에서 당장 요구한다는 합성유지를 일수의 트럭에다 가득 실어보내고나서 시내로 되들어와 금속창문공장을 찾아갔다. 트럭이 고장나서 이제 합성유지생산에 쓸 원료들을 사오자면 또 거기의 차를 빌려써야 했던것이다.   금속창문공장의 곽성옥공장장은 한족인데 종구가 차를 오후만 빌려쓰자니 그래라고 얼른 대답했다. 그보다 나이가 5살 손우인 이 한족사나이는 촌에서 올라와 6년째 금속창문을 만들어 팔고있는데 마음이 너그럽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다.   5월의 태양은 광활한 대지에다 눈부신 밝은 빛을 한껏 뿌리고 있었다.   종구는 날씨가 따스하고 좋은데 술이나 한잔 같이 나누자며 곽성옥을 끌었다.   곽성옥은 아닌게아니라 자기도 술생각이 난다면서 흔쾌히 나섰다.   종구는 금속창문공장구역을 나오자 곧추 현소재지중심에 있는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해에 구정물을 밖에다 버렸다가 검찰의 눈에 잘못 걸려 을 크게 당하는통에 한때 명성이 나빠졌지만 손님에게 해바치는 개장만은 의연히 맛이 좋아서 이 자그마한 도시의 거리판에서는 내내 손님을 끌고있는 집이였다.   주인(老板) 박씨아낙네는 오늘도 종구앞에서 검찰원에서는 너무한다고 푸닥거리 같은 공소를 했다. 얼마나 속에 내려가지 않으면 지금도 저럴가?   종구네가 개장에 술을 다하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방금왔는지 빨간 샤리승용차 한 대가 그의 싼타나를 피해 머리를 저켠으로 돌리고 있었다. 뒤꼬리에 단 패쪽을 보니 현검찰원의 차다.   (저놈의 차는 왜 왔을가?)   싸리의 뒤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두사람이 내렸다. 한사람이 면목이 있는데 그는 현검찰원의 판공실 주임 주은지였다. 한데 저쪽은 누굴가? 초면이다. 그 사람은 두눈을 간잔지런히 쪼프리고 싼타나를 보다가 낯을 돌려 시선을 이쪽 두사람의 몸에다 떨군다. 보아하니 주은지가 그를 모시고 여기로 먹으러 온것 같다.      곽성옥이 먼저 웃는 얼굴로 주은지를 향해 인사말을 건늬였다.      종구는 혼자소리로 중얼대면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체 누가 조작해낸 법인지 종구가 지금 살고있는 이 놈의 현은 과연 이상했다. 공안도 법원도 아닌 검찰원에서 제 기한에 돌아오면 돌려주고 돌아오지 않으면 몰수한다면서 외국에 벌이를 나가는 사람들한테서 인당 3천원씩 이라는 것을 받아냈다. 토끼꼬리만한 기한내에 어떻게 제꺽 벌어갖고 돌아온단 말인가? 그래서 외국에 가는 사람은 가면 불법체류를 하리라 맘먹고 떠나는거다. 그러니 이란 실상은 억울해도 눈물을 삼키고 빨리우는 피요, 아파도 소리치지 못하고 떼우는 살점이나 다를바 없었다.   종구는 곽성옥공장장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싼타나에 태웠다.   주은지가 모시고 온 간부어른은 그 자리에 못박힌듯 종구의 싼타나가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그냥 지켜보는데 낯에 구름장이 끼여 있었다. 건장하게 생긴 이 중년의 사나이가 바로 이 현의 검찰원에 검찰장으로 방금 부임한 장은생이다. 한데 오늘 개고기를 먹으러 왔다가 백성이 검찰장인 자기보다 더 멋스러운 차를 타고 다니는걸 보니 걸신들린 개가 뼈다귀를 핧는 고양이를 보았을 때처럼 지악스런 욕기가 생기면서 기분잡쳤던거다.   주은지가 자 어서들어갑시다 모시자 장은생은 잠간만 하고 그를 잡아세우고나서 입을 열었다.                                                            두은지는 방금 부임한 이 검찰장이 왜 갑자기 고양이 락태상이  돼가지고 이러는지를 알아맞혔다.      주은지는 손바닥을 마주비비면서 황송해하였다. 눅거리 샤리차에다 제 상급을 태우고 나다니는게 마치도 자기의 불찰이나 죄로 되기나하듯이. 그러나 그래놓고는 부아가 동해 속으로 욕했다. 이 자식아, 현재정이 곤난해서 지금 직원들의 로임도 제때에 내주지 못하는 주젠데 네가 고급차를 타고싶어, 어디 그래만보지. 네 놈들은 현을 이 꼬라지로 만들어놓구서두 향수는 무슨 놈의 향수냐며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는거야.   장은생은 두눈을 감짝거리며 이쪽을 여겨봤다. 주은지의 속대사를 촉기빠르게 읽어낸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이 지도자는 말을 고무줄같이 늘였다 줄였다하는데 담력있고 주대도 있는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람의 눈에 나지 말아야지 하고 주은지는 극력 감정을 발라맞췃다.         장은생은 두눈을 간잔지런히 쪼프리며 다시본다.      장은생은 허허 웃었다. 직원들의 로임도 제때에 못내주는 이따위 따라지현에다 내가 뿌리박아?... 내가 왜왔어, 나도 거렁뱅이 벼슬아치로 되자고 온건가 뭐. 이니야, 아니, 난 단련을 하자고 온거야.   장은생은 개장국집을 나오자 그길로 곧추 현위서기를 찾아갔다.      장은생이 이렇게 말하자 현위서기는 그렇게 하면야 두말할것 없이 좋지만 현재정이 말라있는 형편인데 집지을 자금을 내놓겠는가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머리는 뭘 하자구  달고 다니는거야, 제길할! 장은생은 돌아오면서 혼자소리로 쭝얼거렸다.    그는 검찰원에 발을 들여놓자 주은지부터 찾았다. 점심에 술을 취하도록 마신 주은지는 제 판공실의 테블에 엎드려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장은생은 그만 자고 정신 좀 추라고 흔들었다.      잠을 채 깨지 않은 주은지는 무거운 머리를 겨우들었다.      귀구멍으로 송충이가 기여드는것 같아 주은지는 개가 앞발짓하듯 손으로 제 귀를 털고나서 서랍을 열더니 그속에서 크고 동그란 도장 하나를 꺼내놓았다.   장은생이 집어들고 보니 이란 글자 10개가 또렷이 새겨져있었다. 부정축재를 벌금하고 몰수하는데 시용해온 도장이였다. 이 뜻밖의 발견에 장은생의 두눈은 전구알같이 동그래졌다.            장은생은 돌같이 굳고 억세게 생긴 턱을 치켜올리면서 갑작스레 앙천대소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모양이야?... 잠을 말끔히 깬 주은지는 량미간을 구겨박은채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다시열었다.                  기실 검찰원에서 그 도장을 만들어 출국자의 돈만 우려낸게 아니였다. 같이 구정물을 밖에다 던진것도 눈에 띄기만 하면 가차없이 벌금을 안겼던거다. 헌데 그렇게 하니 위생관리부문에서 들고일어났다. 도리상 자기들이 벌급을 받아낼 일인데 검찰원이 왜서 직권범위를 벗어나 행세를하느냐였다.   새로 부임한 이 검찰장님은 제 손에 쥐인 도장을 보고 또 보는데 마치도 먹이를 발견한 하이네마냥 두눈을 빛내기까지 한다. 그의 그러한 표정이 하고 웨치고있었다.   저녁에 장은생은 현위서기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검찰원에서 경제문제가 있는 사람을 사출해서 벌금을 안길테다, 그래서 그 돈으로 검찰원청사를 하나 새로 짓고 곁들어 공무원들의 사택도 지을 생각인데 그래서 되겠는가 물었다. 현위서기는 곰곰이 듣고나서 머리를 끄덕이면서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발한 착상이니 자신있거든 어디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대답이였다. 이틑날 현장을 찾아가 말해보니 그도 현위서기와 마찬가지의 태도였거니와 새 검찰원청사가 되면 지금의 낡은것은 현정부에서 쓰게 돌려달라는 부대조건까지 곁들어 내놓는 것이였다. 웃어른들께서 그쯤 승낙을 받아내자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했어. 장은생은 서둘러 검찰원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제가 쓰고 살 새집을 짓는다는데야 누가 반대할소냐, 검찰장이 계획을 내놓으니 모두가 열광적인 찬동이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숙망이 이루어지게 되였으니!   그런데 문제는 집을 짓자면 돈, 돈이 있어야 한다. 안그런가? 돈, 돈, 돈!... 적어도 7백만원은 있어야 해!...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그 많은 자금을 마련할가?... 방법은 오직 한가지, 벌금! 이것이 결책이란 말이야... 우리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호흡을 같이해야겠다. 우리의 이 결책을 타인이 알고 말성을 일으킬 때 입을 놀린 사람이 그 후과를 전적으로 책임질 것... 내 말뜻을 알겠지 하고 장은생은 력점을 찍어가면서 뒤를 단단히 눌러놓았다. 그리고는 각자 몸을 내맏기고 사업해야한다면서 구체적인 조치로 세가지를 타파한다고 선포했다.   첫째, 과와 실의 계선을 없애고 경쟁을 한다.   둘째, 8시간제를 없앤다.   셋째, 쌍휴일을 없앤다.   그리고 잇따라서 이해의 하반년내에 200만원의 자금을 꼭 모아야 한다는 분투목표를 세워놓고 각 부문에다 구체적인 지표를 떨구었다.                기소과(起訴科): 21만원                비포과(批浦科): 9만원                감소과(監所科): 3만원                판공실(辦公室): 21만원                정공과(政工科): 6만원                반탐국(反貪局): 80만원                법기과(法紀科): 29만원                공신과(控申科): 9만원                기술과(技術科): 9만원     그 어떠한 방법으로든 임무를 꼭 완수할것. 임무를 완수하면 나눠가질것도 있을거요 장려와 처벌이 있음을 알라.   죽은 사람이 들어도 관을 차고 일어날 전대미문의 벌금대전이 K현에서 이렇게 막을 올렸다.                               3     어느날 오후 주은지가 자기 수하인원 하나를 거느리고 합성유지공장을 찾아왔다. 아니 저 자식은 왜 왔나?... 선문도 없이 불쑥 나타난 불청객이라 종구는 의아쩍어했다. 벽에 걸려있는 부엉이괘종마저 반갑지 않은지 동그란 눈을 데룩거렸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니 가부간 맞아놓고보는게 도리에 맞을것같았다.         주인이 권하는 쏘파에 엉덩짝을 붙인 주은지는 돈을 벌었다는 사람치고는 어울리지 않을 지경 간소하게 꾸려놓은 사무실안을 일별하고나서 이같이 운을 떼더니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로동자가 얼마나 되느냐 물어왔다.   종구는 미간을 모으면서 그를 다시쳐다봤다. 보도기관의 기자면 몰라도 검찰관인 네가 왜 찾아와 이런건 묻는거냐? 의문이 갈마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어쩔가 주저하다가 알려주었다.                                    종구는 낯이 돌같이 굳어지고말았다. 이 자식이 개코도모르면서 무슨 망탕소리는 씨벌이는거냐. 실컷 부려먹었다니... 심사가 단통 타래떡같이 탈렸다.         종구가 대노하는것을 보자 주은지는 자기가 불민해서 그만 실수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사과했다. 허나 이미 엎질러놓은 물이였다. 사과한다고 받아줄 종구가 아니였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주은지는 웬 일인지 입을 더 열지 않고 목마른 염소 우물안을 들여다보듯이 종구만 덤덤히 마주보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그만 돌아가버렸다.   과연 멋쩍은 행차였다.   별 싱거운자식 다 보겠다! 종구는 그의 뒤통수에다 눈총을 놓고나서 속으로 그저일아니야, 내가 멍청히 있다가는 당하구말겠어 하면서 서둘렀다.   몇분지나서 그도 시내로 들어왔다. 자기가 내보낸 일군 9명중 집이 외지에 있어서 돌아가버린 2명을 제외하고는 빼놓지 않고 만나보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일자리를 떼웠다 해서 불만을 품은적이라곤 없었거니와 그 무슨 퇴직금이니 양로금이니 하는것도 근본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의 말마따나 그럴 리유나 조건이라곤 도무지 없었으니까. 헌데 그 주은지는 검찰관이랍시고 왜 그 일을 들먹이는 걸가?... 승냥이가 좋은 맘 갖고 문 긁을리야 없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름못할 한기가 온몸에 싸늘하게 퍼졌다.   주은지의 래방이 불상지조(不詳之兆)라 여겨지더니 아니나다를가 불같은 화덩이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주은지가 아니고 초면의 다른 한 중년의 검찰관이 나젊은 수하인원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내집이 여기에있는건 어떻게 알았을가? 제복까지 버젓이 입고 나타난 그들의 행차가 자못의심스러웠다.      종구의 안해 역시 자기 집에 나타난 그네들을 보고 마치 제 치마에 달라붙은 송충이를 보듯 낯을 찡그리며 불쾌해하였다.      종구는 주의주고나서 손님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비루먹은 개같아 가까이하고싶지 않았지만 검찰관복을 입고왔으니 감히 랭대할수 없었다.      중년의 사나이가 손바닥크기만한 증명을 꺼내놓길래 받아보니 파란 비닐뚜껑에 이란 금박글자가 박혀있었다. 발급단위가 중앙도 아니고 성도 아니였다... 왜 이런건 만들어가지고 다니며 성화냐. 종구는 속으로 주절대며 되돌려주었다.      이쪽에서 불공불손(不恭不遜)하다고 여겨졌던지 하진개는 낮색이 굳어지면서 위엄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것들이 과연 나를 잡자고드는구나!... 반탐국의 래의가 불보듯 빤한지라 종구는 가슴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검찰원에서 장부를 검사하겠다니 고스란히 내놓아야지 안그러면 감히 반항한다고 죄를 씌울것이다.      젊은 검찰관이 장부책들을 가방에 다 챙겨넣자 하진개가 입을 열어 종구더러 자기들을 싼타나에 좀 실어다줄수 없겟는가했다.   종구는 그러마 대답했다.      안해가 떨려나는 가슴을 손으로 짚으면서 안절부절이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안해가 말했다. 어쩌면 남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홀림에 묶이여 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것만 같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저기압이 흘러 가슴만 답답해나는 이날은 갈기갈기 찢어진 걸레짝 같은 구름이 모여 해를 가리워 음산했다.      종구는 찌뿌둥한 하늘을 흘겨보곤 고개를 떨구면서 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씨부렁거렸다.   하진개가 이마살을 구겨박으면서 이쪽을 흘겨봤다.      종구가 다시 한번 뇌까리자 하진개의 낯이 그만 언감자 모양으로 푸르뎅뎅해진다.               하진개는 할 말이 없는지라 그만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종구는 쟘바호주머니에서 차열쇠를 손에 쥐고 차고쪽을 향해 걸음을 놓으면서 다시한번 그 자식 별스레 까다롭게 구는구나 하고 알아듣지 못할 제 조선말로 뇌까렸다.   시내안은 여전히 복잡했다. 옛날도로를 진작 넓혀놨어야 했다. 왕조가 여러번이나 바뀌고 세월이 오래흐르지 않았는가. 변강의 이 자그마한 도시에 고적으로 남겨둘만한것으로는 광서(光緖)년간에 만들어져 중들이 불공했다고 전해지는 자그마한 절간 하나외에는 별반 없었다. 헌데도 여직까지 낡은 건물들이 시내복판을 그대로 점한채 근대의 건물은 너무나도 적어 고태의연했다.   내가 공연히 감정을 낸것 같구나. 종구는 방금 하진개와 마찰이 있은걸 생각하고 자신을 뉘우쳤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차를 몰았다. 언젠가 그의 차에 치인것처럼 꾸몄다가 그놈의 잔꾀가 실패하니 네가 내 새우를 쏟았다 새우값을 내라고 야기요단을 하면서 생떼질을 써 사람을 웃긴 령감쟁이가 길가난전에서 새우를 팔고있었다. 오늘은 야질을 들이댈데가 없는 모양이다. 한데 검찰원에서는 어쨌다구 나를 잡고 늘어지는지 참 모르겠구나. 종구의 머리는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내중심에서 곧추 북으로 들어가 큰강에 거진 이르는 곳에 길을 경계로해서 동쪽에 대약진때 지은 커다란 단층벽돌집이 한 채 있다. 지금은 색을 다시 입혀놓아 대체로 누래보이기는 하나 벽에 아직도 광란의 년대에 홍색해양(紅色海洋)을 하느라 올린 본바탕이 희미하게 드러나고있는 이 집이 바로 현검찰원인 것이다. 본래는 공안국에서 쓰던건데 공안국이 근년에 시중심구역에다 새 청사를 짓고 거기로 옮겨지면서 내놓으니 지금은 검찰원에서 받아 청사로 쓰고있는거다. 그리고 길서쪽  입구형자 네모꼴 모양의 단층벽돌집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벽돌담장을 높다랗게 쌓고 그우에다 철망을 친것이 구류소였다. 그것역시 전에 간수소(看守所)로 쓰던것이다.   구류소가 눈에 안겨들자 종구는 심정이 불쾌해났다. 한것은 모두들 여기를 쓰레기통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무릇 거기만 들어가면 사회의 찌꺼기로 취급되기 마련이였다.      현검찰원에 이르러 하진개가 삐뚤어진 말본새로 차를 돌리려는 종구를 내리라했다. 뭐라구?... 종구는 가슴벽이 쿵 하고 울리였다. 금시 무너질것만 같았다. 날 왜서 내리라는건가? 예감이 좋잖더니... 이 종구가 과연 걸려드는거나 아니냐?... 정녕 그렇다면야 근거가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왜서 나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자할가, 내가 잘못한게 대체 뭔데? 헛, 허허허... 허구푼 웃음만 나갔다.   집안 북쪽벽을 따라 동서로 길게 트인 복도가 있었다. 종구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얼마안가서 파란판에 빨간글씨로 이란 세글자를 또렷이 박아쓴 패쪽이 걸려있는것이 보였다. 셋은 그 방으로 들어갔다. 습기를 먹음은 고리탑직한 공기가 페부를 찔렀다. 창문을 걷어닫고 열지 않아서였다.      반탐국장 하진개가 창문을 열고나서 몸을 돌려 종구를 보며 하는 말이였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탈세를 했는가 안했는가는 종구 자신이 잘 아는거다. 네가 생사람잡이를 하는구나! 종구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려나는 두주먹을 어스러지게 부르쥔채 날카롭게 마주 쏘아보면서 한참 무언으로 팽팽히 맞섰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느냐, 어쩌면 이럴수가! 내가 탈세를 했단 말이냐, 그래? 장부를 검사해봐라, 난 여직 돈벌어두 속검게 놀아먹진 않았다. 죄를 만들어 씌워두 분수있지, 난 승인안한다, 승인안해! 너희들 검찰원에서 고작 한다는게 이따위짓이냐? 거둬라, 거둬! 하고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황황 불타고있는 그의 눈이 반탐국장을 향해 이렇게 질호하고잇었다.   워낙은 주은지가 돈을 우려내자고 든건데 급급히 서두르기만 했을 뿐 계획이 주밀하지 못하다보니 실패한거였다. 이렇게 되자 검찰장인 장은생이 직접 나서서 이 일을 틀어쥐엿다. 그는 여러모로 머리를 짠 끝에 마침내 판공실과 반탐국간에 협력하기에 이른것이다. 이제부터는 종구를 하진개가 맡는다. 그 어떤 방법과 수단을 써서든 30만원을 짜낸다. 그래서는 그것을 판공실과 반탐국의 임무에 때려넣는다...   종구는 말없이 머리를 힘있게 가로저어 탈세를 승인하지 않았다.   승인하지 않았단 말이지. 좋아, 어디 맛을 좀 봐야 할가부다. 그들은 종구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구류소에 처넣었다.                               4     종구의 안해는 남편이 다른 어떤 문제나 죄가 있어서 갇힌게 아니고 탈세를 해서 갇혔다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 자기 위안을 할수 있었다. 탈세를 했다면야 두말말고 탈세액과 벌금액을 합쳐서 고스란히 바치면 그만일게 아닌가, 황차 집에 돈이 있겠다 크게 두려울건 없었다. 헌데 남편이 탈세를 했다는 죄명자체가 전혀 맘에 받아지지를 않았다. 검찰원의 전달을 전혀 믿을수 없는 그녀였다. 과연 그럴수가 있는가? 이 일은 남편보다 외려 그녀가 더 잘 알고있었다. 합성유지공장의 장부는 여지껏 그녀가 손수 해온 것이니까.   이틑날, 금속창문공장의 곽공장장이 선문도 없이 종구네 집에 문득 나타났다.      곽성옥은 주인이야 집에 잇건 없건 우선 발부터 들여놓았다. 급한 노루 장대를 뛰여넘는다. 사정이 막부득하니 체면을 잃고 여기를 찾아온 그다. 방금 현검찰원 기소과 과장이라는 검찰이 문득 찾아와 그의 눈앞에다 을 꺼내보이면서 한가지 알아볼 문제가 있다고했던 것이다.         곽성옥은 제 맘 잡고 물었는데 저쪽에서 꺼내는 말이 생각과는 판달랐다.      검찰관은 이제 겨우 30줄에나 오른 아들또래의 나이였지만 신분이 자기와는 같지 않으니 곽성옥은 웃어른을 대하듯 존대했다. 그런데 대방은 그의 이런 순후한 감정을 몰라주는것 같았다.         곽성옥은 사실대로 말했다.                  곽성옥은 몇해간 금속창문을 만들어 팔아 리윤이 나는 족족 묵은빚을 갚고 새 설비도 갖추다보니 대부금을 미처 갚지 못했노라 솔직히 말했다.      나젊은 검찰관은 은근한 위협쪼로 대부금을 당장 물라, 그리고 대부금만큼 벌금 4만원을 바치라 했다. 도합 8만원이다. 이만한 돈을 당장 어디서 구해 바친단 말인가. 똥줄이 당기는 일이라 곽성옥은 종구의 방조를 받자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종구의 안해는 그간 자기네 집에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공소했다.         곽성옥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아까 그는 대부금 4만원을 어김없이 가갚겟노라 했다. 헌데 네가 대상이 안되는 대부금을 돌려썼으니 벌금이라면서 4만원이나 안기니 이건 돌덩이를 등에 지워 물에 처넣는게 아닌가.   누가 말씨를 뿌렸는지 시내에서 경제건이 좀이라도 있는 사람은 변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한다. 곽성옥은 탐오도 아닌 그 돈을 갚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형세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있다.      곽성옥이 입을 다시열었다. 검찰이 여차여차 나쁘다고 불만을 토하려다가 뒤가 겁나 그만 사려버렸다.      종구의 안해가 그가 하지 못한 말을 토했다.      곽성옥은 걱정스러운 소리 한마디를 하고 그만 돌아가버렸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도 그처럼 되지 않을가 하는 위구심이 그를 진정못하게 하고있었던 것이다.   곽성옥은 그 길로 일수를 찾아갔다.   마침 일수는 남의 급유소건축자재구입을 끝마치고 집에서 쉬면서 피로를 풀고있었다.      곽성옥이 일수를 만나서 억이 막혀 내치는 소리였다.      일수는 그를 진정시켰다. 종구와 가깝게 지내다보니 그의 이 한족친구도 사귀게 된건데 제 민족 제 형제 아니지만 감정이 맞아 우의를 돈독히 키워가고있는 처지였다. 곽성옥은 그한테 현검찰이 자기의 꼬리를 들춘다면서 여차여차해 종구집에 돈꾸러갔다가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되돌아선 일을 말했다.      말해놓고 일수는 생각했다. 종구형님이 있다면 두말없이 제 돈주머니를 풀었을 것이다. 막부득해서 찾아온 사람인데 외면할 수야 없잖은가, 도와줘야지, 이럴 때 도와주지 않으면야 의리가 없는거지. 그는 급한 불부터 끄고보는게 옳으리라 생각하고 제 저금통장을 털었다. 6만원이다. 운수업해서 벌어 모은 돈이였다.      곽성옥은 감지덕지해서 이제 벌면 어김없이 먼저 갚아주겠노라했다.   
32    우숩고도 잔인한 시합 댓글:  조회:3000  추천:1  2013-10-19
  우숩고도 잔인한 시합     요즘 기와가마마스러나갓던  한패의 유자들이 돌아왔다. 그래서 백두옹 량태의 지휘하에 산채의 후근에서는 소 한마니와 돼지 두 마리를 잡았다. 환락에 잠긴 산채는 또다시 명절기분에 휩싸였다. 류자들이 자작한 노래가 온 산채에 높이울려퍼졌다.               류자되면 즐거웁네             말타고 가마 마스면               술도 계집도 생기네             선인악인 따로 있냐             희비애환 마찬가질세             말 가는데 소도 가듯             인생길은 다 한가질세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술상이 벌어졌다. 술이 좀 얼근해지자 벌서부터 여기저기서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권주령(勸酒令)을 불러댔다. 대방을 곤죽이 되게 만드는 것이 승리였고 즐거움이였다. 민호가 있는 동남쪽 산채도 못지않게 떠들썩했다. 류자노릇을 제대로하려면 첫째 배짱이 두둑해야하고 둘째 형제간에 좀스럽지 말아야 하고 셋째 마음이 독해야 하고 넷째 색에 미치지 말아야 하며 다섯째는 술을 마실줄 알아야 한다. 민호는 아직 마음이 독하지 못할뿐 그 외의 네가지 조건은 기본상 합격한셈이였다. 온 산채가 악마구리 끓듯했다. 민호가 자기는 음주왕이라고 허풍치는 왕견과 마주앉았다. 민호가 왕견과 한창 술 먹이기내기를 하고있는데 황보재가 느닷없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상판이 지지벌개진걸 보니 술이 웬간히 잘된꼴이였다. 그의 손가락에는 금가락지 하나가 더 끼여있었다. 바다는 메울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못메운다고 속담그른데 없다. 보재(寶財)는 이름 하나만 봐도 남과는 각별한데가 있었다. 적빈여세(赤貧如洗)할 사람은 아니였다. 어려서부터 부모한테서 장차 크거들랑 꼭 부자가 되라는 교육만을 받아온 보재로서는 욕심을 부릴만도 했다. 그러한 그가 이번출전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부호가택을 들이치고 수색했자만 손에 넣을만한것이 없어서 바로 자기가 나서서 직접 손을 폈다는 자랑했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집안을 수색해도 근사한 재물이 나타나지 않으니 주인의 애첩을 붙잡아 발가벗겨놓고서는 칼을 음도에 대고 찌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렇게 위협술을 써 애첩이 말해서야 그들은 집 뒤울안에 깊숙이 감춰둔 보물들을 찾아낼수 있었다. 황보재가 이번에 염왕산의 악사(惡事)를 또하나 만들어낸 것이다. 황보재의 독기어린 눈길과 마주치자 민호는 속이 섬찍해났다. 민호는 직감적으로 황보재가 자기를 걸고들려구 왔다는 것을 감지했다. 뒤에서 진사해놈이 추긴것이 틀림없었다. 황보재가 자기곁으로 다가오는 리유를 눈치채지 못할 민호가 아니였다. 민호는 보재가 아무리 트집을 부려도 꾹 참으리라 마음먹었다. “여보게 고려가람, 나두 한축 끼는게 어때?” 황보재는 처음부터 악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웃음까지 게바르면서 제법 소탈한양 먼저 말까지 걸어왔다. “난 자넬 ‘꼬리방즈’라구 한적이 없네. 그러니까 나까지 밉게 볼 필요야 없잖아. 그리구 사실 우린 다 한형제간이나 다름없는데 서로 의기상투해야지 안그래? 우리 같이 한번 놀아보자구. 오늘은 류달리 즐거운 날이니까. 다른뜻은 없네. 오늘 나하구 한번 통쾌하게 몽두춘을 해보자는것뿐이야.” 웃는 낯에 침을 뱉을수는 없었다. 민호는 그를 쫓아버릴수 없었다. “이보게! 민호동생, 이젠 몽두춘을 그만하지. 반강자만 해두 두사발도 더마신것 같은데..... 그리구 이사람, 보재! 자네두 그만마시는게 좋잖을가. 더 마시겠거든 다른 사람과 마시게나. 민호동생은 이미 너무 많이 마셨어.” 보재가 찾아온 뜻이 심상찮음을 눈치챘는지 왕견이 좋은 말로 권고했다. 보재는 왕견의 권고를 개방구로 여겼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순순히 돌아갈 보재가 아니였다. 그는 민호의 손을 꽉 잡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이깟 몽두춘을 더 마신다구 아산이 깨여지나 평택이 무너지나 백산이 무너지나 동해가 메여지나! 젠장 어디 한번 기껏 마셔보자구!” 취중무천자(醉中無天子)라 술기운에 담이 커질대로 커진 민호는 왕견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보재를 앉혔다. 황보재가 앉자마자 둘사이에 겨룸이 곧 시작됐다.   “당조일품경(当朝一品卿)” “량퇴대화료(兩腿大花蓼)” “삼성고조사계도오경(三星高照四季到五更)” “륙합륙동춘(六合六同春)” “칠교팔마구안도화료(七巧八馬眼盜花蓼) “십전복록증(十全福綠增)” “타개창호선(打開瘡戶扇)” “명월조당공(明月照當空)”   그들이 주고받는 주령소리가 점점 높아가자 구경군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기전에 이미 진사해의 고자질에 화가 날대로 난 보재였다. 민호가 자기의 색시감마저 넘보다니. 이자식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구나 하고 보재는 속으로 민호를 저주했다. 보재는 원래 술재간이 있고 벗바리가 좋은지라 술을 마실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둘은 몸을 솟구쳐 찍어박듯이 하면서 게목을 질러대는데 짜장 투계장에서 수탉이 결사전을 벌려놓고 피투성이로 싸우는 꼴을 련상시켰다. 겨룸은 갈수록 치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밖에 민호보다 보재가 지는 차수가 늘어나고있었다. 장난군 몇이 애워싸고 그를 부레끓게 만들었다. 보재는 점점 자제력을 읽기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벌주를 더 많이 마신 그가 먼저 고끄라지고말았다. 보재는 나중에 고주망태가 되어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들려갔다. 보재가 들려가기 바쁘게 민호도 제자리에 폴싹 꼬끄라지고말았다. 민호에게 진것이 분했던지 황보재는 이틑날 저녁켠에 술이 깨자바람으로 다시찾아왔다. 민호는 그때까지 술기운이 가셔지지 않아 정신이 흐릿한 상태였다. 그렇게 정신을 추지 못하는 민호앞에서 보재가 악의에 찬 목소리로 다시한번 도전했다. “우리 내기를 한번 더하자!!” 민호는 자기앞에 다시나타나 집적거리는 보재를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시합을말인가?” “그래. 시합을 또 하잔말이다. 이번에는 좀 무사답게.” “어떤 시합을?” “뽐창던지기를 해보자.” “뽐던지기를?” “드래. 듣자니 너두 그걸 잘 한다지? 어때? 거리는 십보. 모두 다섯개를 뿌리되 작대기처럼 한일자로 쭉 내긋잔말이야, 어때?” “정말 그렇게 하자는말이지?” “그래. 누구든 다 그렇게만 하면 피장파장이 되니 비긴 것으로 치구 내기를 그만두자구 어때?” “정말 그렇게 하자는 말이지?” “그렇다 시합을 해서 내가 지게되면 네가 내 귀를 하나 베여버려라. 날 병신으루 만들란말이다. 어때?” ‘내가 널 병신으루 만들라 그말이지?“ “그래 병신으루 만들란말이야. 그리구....” ‘그리구 내가 지면?“ “간단하지. 내가 너의 자지끝을 베버리겠어. 길게두 말구 말랑말랑한 끝머리만 살짝. 자지는 남의눈에 뜨이질 않으이 베버려도 괜찮지 않은가! 어때? 시합은 다음달 이날에 하는 것으로 정하는게 어때?” 보재의 말은 장난의 소리가 아니였다. 악의와 야심이 꽉 찬 그놈의 속창을 민호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랑아야심이 끝내 드러나고야만것이다. 자기가 그처럼 부러워하고 증오해오는 그것을 페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써 울분을 풀어보자는 황보재였다.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쁘드득 이를 갈았다. 그에게 있어서 뽐창은 결코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전에 의렬단에 있을 때 테러를 목적으로 권총사격과 비수다루기를 련습하고 뽐창뿌리기도 부지런해서 일정한 기교는 장악하고있는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뽐창뿌리기련습을 해보았다고 해도 서로 목숨을 내걸만큼 숙련된 솜쌰는 아닌게 뻔했다. 제길할 뽐창뿌릴줄을 안다고 큰소리칠건 뭐람?! 어쩐다? 나의 뽐창재간이 저자만 못한게 뻔한데.... 그렇다고 나 스스로 주눅이 들어 기권할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 겨뤄도 못보고 손부터 들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것은 죽는것만큼이나 자존심이 꺾이는 일이였다. “할테면 한번 해보자!”     “좋다!” 황보재는 벌씬 웃으면서 민호의 어깨를 툭 쳤다. “아니, 너 미치지 않았니!” “그자하구 뽐창시합을 하다니 원!” 왕견과 하진국이 보재가 가버리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펄펄 뛰였다. “할수 없지. 그자식의 보복이 무서워 물러설수야 없잖아.” 민호는 두친구에게 이일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한달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호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였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련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마침 반에 뽐창을 가지고있는 새자가 있어서 민호는 그들로부터 즉시 5개를 빌리수 있었다. 그는 빌린 뽐창을 가지고 언젠가 포두한테 사격검사를 받던 사격장으로 갔다. 거기에 오그라진 양푼을 걸어놓았던 나무를 과년으로 삼고 그는 부지런히 련습하기 시작했다. 뽐창던지기시합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목숨을 내건것이나 다름이 격투였다. 민호는 뽐창련습을 하느라 침식마저 잃어가고있었다. 밤에도 강심을 먹고 달려들어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를 향해 걸탐스레 뽐창을 뿌렸다. 보복의 칼날이 자신의 남근을 베여갈때까지 앉아서 기다릴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두 친구가 민호를 도와나섰다. 그러나 뽐창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도 민호보다 별로 뛰여나지 않아 련습은 지지부진이였다. 긴장은 민호의 신경을 오리오리 일으켜제웠다. 보재에 대한 공포심이 그의 등골을 싸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조급증은 민호의 간장을 바질바질 타들게했다. 바로 이런때에 향란이가 문득 나타났다. 그녀는 민호가 여러날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온것이다. “어머! 요즘 왜 안보이는가 했더니 여기서 뽐창련습을 하고있었네요!” 향란이는 창뿌리기에 여념이 없는 민호를 보고 몹시 놀라는 기색이였다. 정신이 뽐창에만 쏠린 민호는 향란이가 가까이 다가온것도 모르고있었다. 향란이가 화나서 목청을 돋구어 야멸차게 내뱉았다. “여봐요, 그놈의 뽐창에 정붙었나요?” “오ㅡ 아가씨구만! 여기로는 왜?” “내가 언제 온줄도 모르다니. 정말 열심하네요.” “하하하....” “웃으면 단가요. 날 좀 동무해줘요. 같이 서산골에 한번 가보자요.” “아가씨, 미안합니다. 나 지금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뭐라구요? 벌써 그렇게 식어버렸나요?” 향란이는 눈살이 곧게 일어섯다. 마침 이때 하진국이와 왕견이 와있었다. 그들은 향란이가 약이 올라 펄쩍뛰는 모양을 보고 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민호가 한달 뒤면 보재와 뽐창시합을 하게 된 사연을 알려주었다. 향란이는 그들의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보재를 저주했다. “비렬한자식!” 민호의 말 못할 사정을 알게되자 향란이는 자기가 뽐창뿌리는것을 도와주겠노라며 나섯다. 향란이는 쌍수도(双手刀)와 쇠채찍(鐵鞭)을 다루는외에 무림세가(武林世家)의 딸이였던 어머니한테서 전수받은 특기 하나를 더 갖고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뽐창다루는것이였다. 보재의 뽐창재간도 바로 그녀가 배워준것이다. 그런데 오늘 보재가 자기가 배워준 재간으로 이따위 앙갚음을 하다니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만 했다. 어느덧 민호와 보재간의 무서운 한판겨룸의 날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용히 비밀리에 하자던 겨룸이 보재가 들어있는 산채로부터 소문이 새여나오는바람에 위두령과 사량팔주를 제외한 염왕산의 류자 모두가 다 알게 되었다. 장소는 남산기슭이였다. 량쪽 다 감적관이 나왔는데 저쪽은 서은괴가 맡고 이쪽은 왕견이 맡았다. 그들외에도 수백쌍의 눈길이 감적(監的)하고있었다. 그들은 승패를 겨루는 당사자들의 감정도착(感情倒錯)을 저마끔 떠보면서 얼굴에 각양각색의 표정을 띠였다. 짝자꿍이가 벌어졌다. 속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 된 어떤 새자들은 누구의 귀가 떨어지고 누구의 자지가 떨어지나 잘 보자면서 왁작 고우기까지 했다. 신심이 고무풍선같이 부풀어오른 보재의 얼굴에서 적수를 얕잡아보고 멸시하는 거만스러운 빛이 력력히 내비쳤다. 흥분과 소란이 한데 엉겨붙고있는 피의 대결장이였다! 누가 먼저 뿌리고 누가 후에 뿌려야하는가? 둘은 선후를 정하기 위해 먼저 제비뽑기부터 했다. 결과 민호가 먼저 뿌리게됏다. 민호는 긴장 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이미 시합에 나섯으니 뒤로 물러설 자리마저 없었다. 민호는 마음을 도슬려먹으면서 주먹을 불끈쥐였다. “자, 시작해보지!” 적수의 감적관 서은괴가 소리쳤다. 그들은 벌써 면밀히 서로 짜고들어 민호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민호는 숨을 크게 들이그어 마음을 진정시킨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수백쌍의 눈길이 하나같이 민호의 한몸에 집중되고있었다. 민호는 침착하게 제가 서야 할 자리에 나섰다. 그리고는 뽐창 5개를 꺼내 손에 거머쥐였다. 이때 향란이가 여유작작하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여보이며 민호에게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민호를 바라보는 향란의 눈에는 “당신은 해낼수 있어요!” 하는 말이 담겨있었다. 민호는 잠간 목표를 노려보고있다가 순발적인 “앗!” 소리와 함께 과녁을 향해 힘껏 뿌렸다. 그의 손바닥을 벗어난 뽐창들은 날파람소리를 쌩ㅡ 내면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더니 일직선으로 나무에 쭉 내리박혔다. 뽐창과 뽐창사이의 간격도 하나같이 일정했다. “야!ㅡ” 류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다음은 보재차례였다. 그도 민호처럼 과녁을 한동안 겨누다가 “앗!” 소리를 내지르며 뽐창을 힘껏 뿌렸다. 그런데 그가 뿌린 뽐창 5개중 마지막 하나는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무에다 흔적만 약간 남기고는 아래로 잘랑 떨어지고말았다. “와!ㅡ” 맹랑과 기쁨이 반죽된 탄성에 새들이 놀라 날아났다. 거만하던 보재의 얼굴이 단통 흙빛이되고말았다.      ............................................................................................................................................. 2008년에 민족출판사에의하여 펴낸 나의 세 번째장편  제1부 12절의 한 대목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정민호는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라도 함)’ 때 흑룡강에 뛰여들어 다른 한 군인과 함께 생사를 헤매다가, 4일만에 한 허저인 어부의 손에 의하여 구원, 그곳에서 허저인 세습향장의 딸과 결혼, 임신한 몸으로 원쑤에게 랍치된 안해를 찾으러 떠났다가 그만 북만의 유명한 염왕산토비ㅡ위삼포손에..... 전기적색채를 띈 소설은 스토리가 매우 굴곡적이다. 허저인의 풍속과 토비들의 생활은 허구가 아닌 사실그대로다. 작품에 나오는 할빈, 가목사, 의란, 밀산, 당벽진, 가진구 등 북만지구의 지명들도 모두 그대로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세계를 독자들은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한국 ASIA출판사에서 곧 재판하고있다. 여기 조글로에 올린 나의 네 번째 장편이 되는 3부작 대하력사소설 은 출판을 기다리는 중.  
31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5ㅡ7) 댓글:  조회:3248  추천:1  2013-09-15
                                   5        가을철을 잡아들어 찾아온 비는 여름내 쏟아부은 폭염을 한꺼번에 식혀버릴 양 밤새껏 끊지 않고 구질구질 내리더니 새날이 휘영청밝아서야 맥을 버리고 그쳤다.    초가의 처마밑에서는 지렁물이 똑똑 떨어진다.    동산머리에 감빛노을이 비끼더니 해가 떠올랐다.   《꼭-꼭-꼭-》    잠을 일찍 깬 멧새가 이 나무 저 나무 옮아가면서 명쾌한 기분으로 노래를 불렀다.    청신한 아침대기였다.    시르맨커서켠의 울바자안에서 싱싱하게 자라고있는 무우와 가을배추는 마치 록색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이 산듯했고 거기에 이어붙은 개암나무뙈기건너산의 들쑹날쑹한 바위들은 밝은 해빛에 만물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당날로 돌아가리라던 남병호는 박로인을 도와 물고기를 잡아주다보니 꼬박 한주일을 눌러지내다가 마을로 돌아갔다. 그지간 로인과 함께보낸 즐겁고도 유쾌한 시각들은 그의 마음을 점점 더 풀어버리기 어려운 바오리로 묶어 여기에다 잡아두고 있었다. 그는 갈 때 우선 거둘낟알이 거의없을 지경으로 페농이 되고만 논판에다 불을 콱질러놓고는 할빈 큰형님네집에 가 딸을 만나보고다시오리라했다. 와서는 박로인의 바쁜일손이나 더 도와주리라는거다. 박기섭은 그가 아무때찾아와도 자기는 환영하리라했다.    젊은이는 과연 낙언을 지키였다.    서로지간의 신임과 인정은 아마 이렇게 해서 구축되고 도타와지는모양이다.    날이갈수록 가을 빛은 짙어가고 있었다. 여름내내 청일색이였던 온갖나무들이 이제는 저마끔 제멋대로 울굿불긋 아롱다롱한 옷을 바꿔입고 치장을 해서 산간은 여름철보다 한결 화려해졌다. 이것은 오로지 자연의 고칠수 없는 섭리에 따른것이리라.    하다면 자연만 화려할가? 그런건아니였다. 화려함은 인간에게도 있는 것이다. 헌데 그 화려함이 자연에 비겨 대체어떨지?    제일보기실은 것은 렴치모르는 불청객이였다. 그런자는 오지 않아도 여지껏 경건히 살아온 박기섭이였다. 한데 그자들이 나타나면서부터 박기섭의 평온은 위협받고 기분잡치였다.    일은 이러했다.    날이 건뜩들리고 명랑해진 어느날 오전. 생각밖에 이제는 다시오지 않으리라여겼던 부향장이 토지관리일군 김씨와 함께 웬 1남1녀를 배동하여 일호동에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정말 반갑지 않았다. 아니 저건 그 녀석이 아니여! 박령감은 저쪽 1남1녀중 사나이는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장용팔의 아들 근식인지라 저으기 놀랬다. 과연 오래간만이다. 그는 지금은 때와는 모양이 다른 상고머리를 했고 입은 옷은 값비싼 검정가죽쟘바였다. 로인은 껍질이 벗은 딱정벌례를 알아보듯 그이임을 첫눈에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건만 저쪽은 흡사 면목을 모르는양했다. 과연 기억에 없어서 그럴가? 남을 해쳐놓은 일로해서 대할 면목이 서지 않을 때 속이 켕기면서도 허심하지 못하다보니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은 반성할 용기가 모자라는 사람이면 거개가 그러하듯이 그도 대하기가 뭣한지라 일부러 자기는 이쪽을 아예 잊은양 아닌보살을 하고있었다. 네놈이 그래도 좋다. 그를 곱게대해줄 박령감이 아니였다. 이쪽은 눈길을 옮겼다. 그의 곁에 붙어 아양떠는 해사스레 생긴 젊은 한족녀인은 아마 비서아니면 정부일 것이다. 성품이 진중치못한 사람은 돈잘벌면 그걸 자랑하기위해서 이런모양으로 냄새피우면서 다니는게 지금은 류행병처럼 되어가고있는 세월이 아닌가. 자식이 네놈이 팔자는 좋은모양이다 멋부리는 꼴보니 하고 박령감은 속으로 뇌깔이였다.   《아유, 참 아름답네요!》    녀인이 사위를 둘러보면서 요란스레 감탄을 뽑았다.   《어때 맘들어? 명당이야.》    상고머리가 입을 그녀귀가에 가져다대며 낮게 말해놓곤 마주보며 헤벌쭉 웃었다.   《무슨수작질이냐. 네년놈들이 감질을 내고있어.. 어리석은 것들, 여기가 네놈들 손에 차레질줄을 아느냐, 흥!》    열어놓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박기섭은 코방구뀌였다.    개가 다시짖어댔다. 무슨일인지 나가말리지 않았다가는 일칠것같았다. 그래서 밖에 나갔더니 왕부향장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왜 또 왔소?》    로인은 그를 시들히 바라보면서 달가와하지않는 투로 물었다.   《내가 접때 가면서 뭐랍디까. 다시오마구하잖습디까. 이건 꼭 해결이 나야 될 일이라서 다시온겝니다. 저 이렇게…》    대방의 쌀쌀한 태도에 부닥친 왕부향장은 신경질이 빡 나는 것을 참고 되도록 부드러운낯색을 지으며 변명쪼로 해석을 했다.   《가만! 해결이 나야 될 일이라니 날 기여히 여기서 떠나라는건가? 아무리어째두 그놈의 해결은 잘 되지 않을거우. 》    박기섭은 여유를 주지 않고 잘라버렸다.    로인의 저력있는 목소리는 단판하러 찾아온 저쪽을 땀을 빼게 만들어버릴 잡도리였다.   《로인님,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구 좀 차견히 잘 토론해봅시다. 제 생각에는 이 일이 얼마든 량편이 다 좋게 협상이 될것같습니다. 》    김씨가 안달증이 나서 참지못하고 나서서 참견했다.   《저번때 뭐라구했소. 향에서는 여기를 팔려구한다했지. 그래 누구한테 팔자는거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구 그냥 이럴판인가?》    박기섭이 그하고 제 조선말로 걸고들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재간이 없는 왕부향장은 낯을 돌려 김씨에게 물었다.   《이 령감이 이제 뭐라했는가?》   《누구한테 파는지를 알자는구만.》   《우리가 아무사람한테 팔든 그걸 알아서는뭘해.》   《난 알아야겠소.》    데퉁바리같은 박령감은 고집스레 나왔다.    심정이 자못 불쾌해진 왕부향장은 사무린눈길로 보다가 입을 열어 알려주었다.   《정 알고싶다면 알려주지. 우린 늪과 저 산을 여기 이분한테  팔겠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보화건축회사 장경리입니다.》   《보화건축회사 장경리라, 장경리가 그래 대체 뭘하자구 이 먼데까지 와서 물웅뎅이하구 돌산을 사잔다오?》   《그것까지 꼭 알아야겠습니까. 그렇다면 알려주지요. 저분은 여기다가 집을 하나 지어볼 계획입니다. 》   《집을 하나 짓는다? 거 참 별랋구만. 버덕은 놔두고 왜 하필 산골에다는 집을 짓는다오?》   《허, 되겐 까다롭게 노네. 남이야 왜서짓던 령감이 그것까지 상관하려들건뭔가.》    젊은사람이니 성미가 달랐다. 전번부터 박령감을 고깝게 여긴 왕부향장은 부아가 동해 끝내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두 사람지간의 입씨름을 듣고만있던 김씨가 이마살을 찌프리며 슬쩍 눈짓해놓곤 무어라 귀속말로 소곤댔다. 아마 그러면 협상도 못하고마니 참으라고 충고하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누구와 잠간 통화하고난 상고머리가 신경을 바싹 도사리면서 왕부향장이 로인과 입겨룸하고있는 것을 옆에서 보고듣더니 상판이 무거운 짐에 깔려 형태를 잃어가는 양철통같이 이그러졌다. 그는 자기가 계획하고 온 일이 그만 뒤틀려지고마는 것 같아서 안달증이 나는지라 그저 참고만있을 수 없어 입을 열고야말았다.   《로인님, 별게아닙니다. 난 여기다 별장을 하나 지으려고 사자는겝니다.》    박기섭은 고개를 돌려 얄밉고 아니꼽살스러운 그를 아느새여겨보다가 물었다.   《뭐라, 별장을 짓는다. 누구핼말인가?》   《거야 물론 내해지요 뭐.》   《임잔 누구요? 장용팔령감의 아들아니여?》   《예. 옳습니다. 제가 그분의 둘쨉니다. 로인님은 저?…》   《자네가 그래 이 박기섭이를 몰라그러는가?》   《뭐랍니까? 아, 그럼 저…하하하! 정말 깜짝 몰라볼번… 이거 참 죄송하게됐습니다.》   《세월이 너무두오래서 그럴수도있겠지. 안그래?》   《그렇습지요. 로인님인걸 제가 진작알았다면야 어째 인사를 올리지 않았겠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기에 그래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왔단말인가? 그럴수가 있을가? 박기섭이 잠간 능청떠는 그를 실까스를 말을 찾느라 함구무언이자 저쪽이 입을 먼저열었다.   《이런데서 어떻게 혼자삽니까, 병나도 그렇구. 안그렇습니까.그러니 임자가 나졌을 때 자리를 제꺽내놓으십시오. 아까워할게 뭠니까. 협상이 제대로만되면야 로인님도 리득을 택택히 보지요. 정말입니다. 내 솔직히 알려주지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니 절대놓치지마시오.》    어쩌면 이렇게 성근한 충고가있을가. 자기는 제법 로인을 생각하는 것 처럼 나오는 그 리면에는 영락없이 대방을 어리숙하게 보면서 감언리설로 얼려넘겨 제 리속을 채우려는 어리석고 비렬한 본바탕이 철판깥이 깔려있었다. 그따위 이뭉수에 호락호락 넘어갈려고 머리백발이 되도록 살아온 령감이 아니였다.    박기섭이 입을 열고 물어보았다.   《자네가 정말 날 생각해 그러는가?》   《그렇잖구요. 전 솔직한 사람입니다.》   《솔직한 사람이라? 좋아.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네. 언제 오토바이를 타고 여길왔다간일이 없는가?》   《내가 오토바일 타고요?》   《그렇네 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였네.》   《아, 그렇지! 있습니다. 저…》   《그때 말리누라 걸어놓은 고기를 가져갔지?》   《예. 그건 저…》   《남은 흙집에서 사는데 돈많이 벌었다구 별장까지 져놓구 살자구드는 사람이 그래 고기를 못먹어서 남의 핼 훔쳐갔나?》    자기의 행실을 고깝게 여겨온 이쪽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태도에 부딧치고보니 가슴이 섬찍해났다. 창피를 당하고 있는 상고머리는 이 자리에서 무여지게 추락되는 자기의 위신을 건지기위해 급급히 발명했다.   《사실은 이렇게 된겝니다. 우린 그날밤에 동창생들이 한데모여 강가에 가 우등불만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마끔 술안주감을 준비해갖고 가기로했습니다. 난 여기에 오면 말린고기쯤은 사갈수 있겠다여기고 그날낮에 내 비서 하나를 데리고 오토바일 타고왔더랬지요. 그런데 와보니 집이 비여있더군요. 그래 주인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서게된건데 마침 장대기끝에 마른고기가 뀀채로있는게 눈에 띄이길래.... 도리대로하면 응당 기다리고있다가 그걸 사갖고가야지요. 그런데 그러자니 시간이 너무갈것같아 에라 주인없으면 뭐라나 우선먼저갔다먹고 후에 값을 곱으로 쳐 갚아주자했지요. 그런것이 그만…..미안하게됐습니다. 미처 사과못한 벌로 값을 열배로드리지요. 그게 모두 스믈다섯마리더군요. 한 마리에 50원씩 쳐서 1250원을 드리면안될까요, 지금 당장말입니다.》    심정이 언녕 토라졌던 박기섭은 상고머리가 제법 사내답게 통크고 대범한체 노는 꼴을 째려보다가 그의 말에 언질잡아 비꼬는 투로 뱉었다.    《값을 열배로주겠다? 돈많으니 과연 못해보는 짓없네. 값을 이제야 주느라 부산떨지 말구 부끄러운대로 도루집어넣게. 내가 그 고기를 개한테 먹인셈치지. 》    《하 이거 로인님이 대단히 노여운모양이네.》    《노엽잖구. 바꿔놓구 자네면 그래 노엽잖겠는가. 어디 대답해봐. 안그런가구.》    《야 이거정말 이러면 단판두 곤난하겠네.》    상고머리는 안달증이 나서 뇌이고는 탐욕이 끓고있는 눈으로 산과 늪을 한 번 휙 쓸어보았다. 박령감의 눈도 따라돌았다.   내놓을수 없었다. 남에게 줄수 없었다. 너무나 정든 곳이였다.   《나하구 뭘 단판한단말인가. 늪을 팔라구? 흥. 꿈은 잘꾸네.  난 도적놈한텐 똥물도 안주는 사람이야. 그렇다는거나알구 망신 더하지 않겠거들랑 오솝소리돌아가, 알아들었는가, 돌아가란말이야, 냉큼!》    정중하고도 어딘가 분노와 멸시가 차있는 로인의 축객령은 비수마냥 대방의 가슴을 콱 찔러놓았다.    어느새 제주인의 의사를 알아채기라도한듯이 개까지 큰입을 사려물면서 으르렁거렸다.   《어! 어! 이 개! 이 개!》    덴겁한 사나이는 자기가 당장 물릴 것만같아서 비실비실 뒷걸음치면서 넋빠지는 소리를 했다.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니 요몇년사이 이러한 변비에도 장사를 하거나 기업을 꾸려 벼락부자로 된 사람이 적잖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사아서 기껏 향락을 누려보자고 한다. 하여 형세를 보고 별장을 지어 팔아서 큰돈을 더 벌던지 아니면 그것을 팔지 못할시는 아예 자기가 향수하려는 것이다. 상고머리가 바로 그러했다. 한데 그는 말도 더 꺼내보지 못하고 그만 물에빠진 장닭모양이돼갖고 돌아ㄱ4ㅏ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돌아간지 얼마안되여 남병호가 경쾌한 오토바이소리를 휘몰아갖고 일호동에 나타났다. 열흘전에 여기에 왔다가 돌아가서는 전처럼 친구들과 휩쓸려다녔건만 어쩐지 가깝고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그를 내재적인 리심력이 여기로 떠민 것이다. 젊은이는 오토바이를 세우자바삐물어왔다.    《그 사람들이 어째 또 왔댔습니까?》   《가는걸봤나?》    예. 까만〈오디〉를 채석장에다 주차해놓구서 여기루 들어왔던모양이죠. 네사람 함께 그것에 앉아가는걸 제가봤습니다.》   《꼴보기싫게 허튼수작들을 하구있어.》    박기섭은 일의 자초지종을 그한테 아려주고나서 의미시장하게 말했다.   《철이 오니 알리는구나. 여름에는 그처럼 청일색이던 나무들이 변해버렸지. 단풍든 잎들이 색갈은 모두 제마끔아닌가. 세월이 달라지니 인간도 량심들이 저모양으루 고약해진거야..》                                                                    6        마가을이 지나고 땅거죽이 꺼둑꺼둑 얼기시작하는 초겨울의 어느날 남병호가 일호동으로 왔다. 헌데 신색이 이전만달랐다.   《 네 모양 어째그래. 옘병하잖았어. 보기가 구차하구나.》   《제가 어떻게요?》    젊은이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울적한 심기는 감추지 못했다.    박기섭은 그가 지금 내신 어떠한 일로 모진고뇌속에서 방황하고있음을 직감했다. 젊은이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머밀머밀하다가 고개만 외로탈아버린다. 아무리봐야 심상치 않았다.   《웬일이여. 무슨일이라도 생긴거아니냐?》    박령감이 바싹 다조져물었더니 젊은이는 뜻밖에 응대는 하지 않고 울었다. 두줄기의 눈물이 핏기없이 매말라가는 그의 뺨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니 사내녀석이 울기는 원.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벙어리속은 난에미도 몰라. 말이나해야알지.》    박기섭은 젊은놈이 바보같이 그러는게 보기가 민망스러워 꾸짖었다.    그제야 젊은이는 입을 열어 제 신세를 하소했다.   《난 이젠 어쩔까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말이다.》    남병호의 손이 호주머니를 더듬다가 그만뒀다. 한국에서 안해가 붙인 편지를 아침에 받아 읽어보았는데 너무나도 믿기어려운 기막힌 내용이라 화김에 찢어던지고말았던 것이다. 안해는 편지에 자기는 그렇게 한국남편을 따라온 후 기실은 갈라지지 않고 그냥 부부로 되여 지금은 사내애까지 하나 낳아 살고있다는 것, 하늘이 정해준 운명인데 이제 더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러한줄을 알고 다시 더 기다리지말아달라는 것, 이전에 아기자기살았던 정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는 것, 딸애의 공부할 돈은 장차 더 부쳐보낼테니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 애정은 가꾸기에 달린것이니 자기보다 더 좋은 대상을 새로얻어 잘살아달라는 것 등이 그 내용이였다.    아무렴 이럴수야있는가, 남병호에게는 그것이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였다.   《그럴줄을 알았어. 내 그래 뭐라던가.》    박로인은 얼굴에 딱한 기색을 지으면서 자기앞에 앉아 여지껏 속히워온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쿨쩍거리는 젊은이를 원망스레 보았다. 네 각시가 어디서 무슨일을 하는가를 알아보라했더니 내보고 사인정탐을 내놓아 뒷조사를 하라는건가 그러면 부부감정이나 벌어지게되는게아니냐며 듣지 않던 그, 자기들은 약속을 단단히 하고 가짜리혼을 했길래 안해가 마음이 절대 돌아지지 않으리라 굳게믿고있던 그, 자기 안해는 이제 돈을 많이벌어갖고 꼭 돌아오리라던 그를 그는 한바탕 되게 꾸짖고싶었다. 그가 만약 남이 아니고 제 자식이라면 야 이 무럼생선같은 녀석아 어른의 말을 들을건 들어야지 고집은 웬 고집이였더냐 하고 따귀라도 한매 불이 펄쩍나게 갈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식이 아니니 그럴수는 없었다. 젊은이는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닥다들이고보니 실망한 나머지 어쨌으면좋을지 몰라 진정못하면서 지어는 생의 용기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박기섭은 그가 고민에 잠겨 모대기는 꼴을 아느새 지켜보고있노라니 가슴이 물큰하도록 측은한 감이 들어 열려던 입을 닫아버렸다. 실은 그만 소매 할 일이 아니였다. 하늘의 조화를 예측키어렵듯이 알기어려운 것이 사람의 속마음이였다. 안해를 고지식하게 너무믿어온 그가 그저 병신스러울뿐이였다. 병신을 왜 병신됐느냐고 욕해선 뭘하는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마음의 아픈상처나 무마해 그것이 되도록 빨리아물게 하는게 보다나은 처사일 것 같았다.   《나하구같이 서남골에나 갔다오자.》   《거기는왜서요?》   《오소리놈 어데숨었는지 정찰해둬야지. 그리구 바람두쐴겸. 그모양돼갖구 집안에만 들어박혀있다가는 울화병날라.》    젊은이는 박령감의 권에 끌려 시르맨커를 나갔다. 헌데 서남골에 들어간 그들은 해종일 헤맸거만 털빛이 새노란 황가리와 뾰족한 주등이가 감실한 족제비만 몇 마리 보았을 뿐 오소리는 구경못했다.   《그따위걸 내놓구는 아무것두없구만요.》    늙은 것은 말이 없는데 젊은 것이 더 지쳐서 주절댔다.   《왜 아무것두없다나? 제대루찾지 못해 그렇지 많구두많아. 각가지 짐승두 있구 약재두 있구. 어디 그것뿐인가 다른 필요되는것들두 있지.》    자연은 완연히 탈바꿈을 했다. 모든게 발가숭이로 돼버렸다. 나무들은 아무것도 없이 뼈만남았다. 겨울은 모든 것을 매몰해서 유(有)를 무(無)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남병호가 시각으로부터 받은 감수이자 인식이였다. 헌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직 농사를 지으면서 돈을 퍼줘야만 비료를 쓸수 있다는 생각과 그런 생각으로 하여 굳어버린 습성때문에 그는 농민이지만 가석하게도 응당알아두어야 할 상식마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풍들어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나무가지에서 말끔히 떨어졌다. 바위산을 내놓고는 다른 산들이 모두 두터운 나뭇잎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나무잎이불이 차츰썩어 부식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름에 계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해면을 밟는것만같은 감을 주는 유기질함량이 많은 그런 검은 흙은 실농군이 얻고싶어하는 좋은 비료였다. 하건만도 젊은이는 그저 잡아팔면 돈가치가 대단히 갈 짐승만을 찾아볼 궁리나했지 그런 흙같은 것에 대해서는 근본 생각지도 않았다. 전혀 애착이 없었던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래 땅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랴. 따져놓고보면 그는 지금 촌에서 살기는하지만 온전한 촌사람도 아니고 도시사람도 아닌 얼간이변종이였다.    시대가 인간을 조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세대의 젊은이들은 시대를 잘만났으니 참으로 행운이다. 그들은 보수적인 환경속에서 속박받으며 살아왔던 전세대의 사람들보다 더 대담하길래 사상을 해방하는 것도 빠르고 신생사물을 접수하는 것도 빠를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박령감같은 늙은이들의 그 나이 때에 비해보면 자주의식도 독립의식도 더 강해진 것이다. 헌데 지금 모든 젊은이가 다 그렇게 되고있을가? 아니다, 그런것은아니였다. 시대가 만들어준 팔부도 있고 기형아도 있는 것이다. 박기섭의 눈에는 남병호가 바로 시대가 만들어준 오작품인 그 두가지중 어느하나같이 보이였다.    그런 오작품을 곁에 두고 속이 뒤번져 어떻게 보고만있겠는가. 박기섭은 남의 일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절망과 타락의 변두리에 이른 사람은 구해내야한다는 인간적인 자각에 의무감에 떠밀려 남병호를 한 번 더 깨우쳐주어 제구실을 하게 만들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서산골에서 시르맨커로 돌아오면서 헐망해진 집을 수리하듯이 젊은이에 대한 개조공정을 벌리였다.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낼테니 어디맛혀보게나.》    《좋습니다 내시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제일불쌍한가?》    《그거야 집도 없이 떠도는 거지지요 뭐.》    《틀렸어.》    《그럼 뭠니까. 거지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있단말입니까.》    《있잖구. 내 알려주지, 세상에 제일불쌍한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일세. 알아들었는가 제구실못하는 사람.》    《아, 그렇습니까!》    남병호는 알았노라하고는 그만 머리를 뚝떨구었다.    박기섭은 수수께끼를 더 내지 않고 그가 홀로 생각에 잠기게 아느새 내쳐두었다.    젊은이는 밤이 되어 자려고 자리에 눕기는했어도 오래도록 속잠은 들지 않고 궁싯거리였다.        날은 점점 더 여물어가고 있었다. 늪에는 살어름이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개가 짖어 남병호가 나가보니 웬 노루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시르맨커에 왔다가 그만 굴속에 엎디여있던 억대스런 개한테 들켜 혼줄이 빠지고 있었다. 개는 노루를 멀리달아못나게 이리쫓고 저리쫓고했다.    이거야말로 절로굴러든 고기덩이였다.    뒤미처 밖으로 달려나온 박령감이 개와 젊은이를 지휘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내가 서쪽을 지키겠으니 넌 북쪽을 지키라! 간다! 간다! 그놈을 늪에다몰아넣어라! 늪에다!》    개가 쫓으며 뒷다리를 물고 사람이 아우성이쳐대면서 앞을 막으니 포위를 뚫지 못해 진퇴량난에 빠진 노루는 하는수없이 끝내 늪에 뛰여들고야말았다.    네다리 다 얼음을 구멍내고 들어간 노루는 그것을 뺄수도 없고 더 뛸래야뛸수도 없어서 마침내 사람의 손에 잡히우고말았다.    《나는 그저 조급할 뿐 미처궁리안납디다. 그런데두 로인님은참 묘합니다. 노루를 늪에다몰아넣어야 잡는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제꺽생각해냈습니까?》    《이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네. 나는 허저족친구네 집 사람들하구 같이있을 때 그들한테서 배웠네. 해마다 물이 어는 이맘때면 우린 바로 이런 방법으루 노루를 잡군했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갖구는 인생을 살아가는것두 그렇네.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게 될 때는 남이 사는걸 보구 따라배워야하는걸네》    젊은이가 묻는 말에 박기섭이 하는소리였다.   《그래야지요. 로인님의 그 말씀이 옳은거같습니다.》    남병호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금신세를 놓고 다시생각하니 문득 새삼스레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반성하게되였다. 수께끼에도 세상에서 제일불쌍한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하지 않는가. 나는 그래 제노릇을 하고살았던가? 그렇지를 않았지. 눈이 멀정해갖고 제 녀편네까지 남한테 떼우구.....이건정말 머저리중에서도 상머저리였지. 언녕 변심한 녀인을 제것이라 굳게믿구 부쳐오는 돈이나 받아쓰면서 그걸 자랑으로 여겼으니.... 남을 얼마나 웃길 노릇이였는가. 사람살아가는 옳은 방법이 무었인것도 모르고있었으니 나는과연  인간구실을 못한게 아닌가..... 남병호의 속쓰라린 깨달음이였다.       첫눈이 내렸다. 그것이 벌방에서는 녹아버려 자취를 감춰버리겠지만 여기는 달랐다. 아예 자리를 잡는 눈이였다. 첫눈인데도 와도 모질게왔다. 그래서 산이며 늪이며가 밤새에 온통 두터운 솜이불을 덮은것만같았다. 이럻게 깨끗할수야있는가! 해가 뜨니 새하얀 눈이 밝은 빛에 반사되여 눈부시였다. 그렇게 정결하고 새하얀 눈으로 단장한 산이며 바위츠렁이며 바위너설로 형태를 이룬 산이며 다가 한결 아름답고 신비해보였다. 그야말로 여기는 사시장철 경치좋은곳인가보다!     박기섭령감은 아침을 먹은 후 다커투에 올라가 착고 세틀과 모양이 활비슷한 사냥도구 두개를 가져왔다.   《이건 뭡니까?》    남병호가 자기는 생전처음보는 물건인지라 호기심갖고 쥐여들고 물었다.   《그것말인가. 그건 허저족이 사냥하느라 옛날부터 써온 서르미라는 걸세. 짐승이 다니는 길에다 그걸 노끈갖구 비끌어매놓고는 뒤를 당겨서 살을 메우는데 짐승이 가다가 길에 느린 줄을 발로 걸어놓게 되면 그놈의 살이 벗겨져 쌩 날아가 맛히게 되어있네.》   《높이는 어느만큼쯤해서 매놓는가요?》   《여우나 승냥이나 놀가지를 잡자는거니까 그놈 짐승들의 키를 가늠해서 매놓네. 이제 내가 그놈을 어떻게 놓는갈 제 눈으루 친히 보구서 배우게.》   《오늘부터 사냥을 나가렵니가?》   《그래볼가구.》    남병호는 기뻤다. 취미를 붙이는데가 있어야했는데.... 박령감의 권유대로 그와 함께 있으면서 겨울한철 짐승잡이나 해서 고뇌풀고 걷잡기어려운 마음도 안착해보려는 그였다.    짐승들이 눈우에다 군데군데 지도를 그려놓았다. 두사람은 황가리나 족제비를 잡아보자고 시르맨커부근에다 덫을 놓고 나서 짐승이 새로낸 눈길에다 작은 디딜착고도 놓았다. 그리고는 승냥이, 여우를 잡을 서르미도 놓고 너구리굴을 들추려고 개를 데리고 서남골로 들어가기도했다. 시르맨커를 떠날 때였다. 남병호가 거기갔다가 만일 곰이라도만나면 어쩔가요해서 박기섭은 그럼 이것을 들라면서 지다창을 하나 주었다. 그건 량변이 칼날같고 끝이 뾰족하며 길이가 한자푼한 창날을 길다란 참나무대에다 꽂은건데 창목에다는 손가락 두넓이만한 가죽오리를 탱탱 감아놓았다. 전에 허조족사냥군들은 곰을 잡을 때 이것을 썼던 것이다. 곰이 일어서거나 덥칠 때 이 창으로 목아래의 허연데를 겨누고 숨통을 드립다찌르는데 우둔한 곰은 창을 쥐여당긴다. 그래서 그걸 쥔 사람도 자연히 앞으로 딸리게되기마련인데 창날만 들어가곤 더 들어가지말라고 그렇게 가죽을 가락지모양으로 감아놓은 것이다. 박령감은 그것의 사용방법을 알려주면서 이런 창을 허조족의 말로는 《지다》라 한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렴치없는 녀석을 오소리잡놉이라구하는데 왜서 그러는지를 아는가?》   《모릅니다. 내가 그런걸 알리있습니까. 왜 그러는가요?》    박령감은 재미있는 이야기 한가지를 그한테 들려주었다.   《내 먼저 너구리얘길하지. 그놈들은 과연 재간둥이들이라네. 그놈들이 제가 사는 굴을 만들어놓은것만 봐도 그렇지. 잠자는   굴, 먹거리를 장만해두는 굴, 똥오줌을 누는 굴 …너구리를 내놓구서야 어느 짐승이면 제굴을 그렇게 층층 만들어놓고살가. 그놈들이 그런 굴을 지을 때는 함께 살 씨족들이 다 동원하는건데 그 가운데는 전문 흙을 파는 놈이 따로있고 판 흙을 나르는 놈이 따로있고 안벽을 두드려 단단하게 다듬고 장식하는 놈이 따로있는거네. 말하자면 각자의 기술과 능력 특장에 따라 분공을 한다는거네. 그놈들이 공정을 어떻게 하는지 아나. 흙파는 녀석이 앞발로 흙을 팔 때 한놈이 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뜩 누워있다네. 다른놈이 파낸 흙을 그놈의 배에다 올려놓고는 눌러놓고 올려놓고는 눌러놓네 그래서 무지가 되면 다른 것들이 누운녀석의 귀를 물어당겨 흙을 다른데에 갖다가 던져버리는거네. 그러니 운반도구로 된 그 너구리가 꼴이 어떻게 되겠나. 공정이 끝나 굴이 다 되면 그놈의 등가죽의 털은 긁히고 째져서 말이아니지. 그걸 보고 여렀은 보기참 안돼서 아프겠구나 이걸 어쩌나 하면서 홀홀 불어준다네. 털빠진 놈은 아프지만 자기는 집체를 위해 헌신했다는 자호감으로 해서 분해하지두않는다네.》   《아니, 고놈들이 어쩜 그렇게! 하하하!》    꾸며낸 동화같지 않았다. 짐승들도 인간을 본따면서 살아가는게 하도기특하고 감탄돼서 젊은이는 소리내여 웃었다. .    박령감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오소리란놈은 어떤가봐. 그놈은 제살굴도 짓지 않구 여름내내 빈들빈들 놀다가는 겨울이 와 추우면 남이 그같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굴에 기여든다네.》    《그래서 오소리와 너구리가 한굴에서 사는모양이죠.》    《그렇네. 렴치짝없는 놈이지.》    《그래서 오소리를 잡놉이라 욕하겠구만요.》    《그렇지.》    이날 그들은 여우가 낸 눈길에다 서르미를 두틀놓고나서 산기슭의 넘어진 오랜고목근처에서 너구리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런데 개가짖어댄데다 남병호가 방법도모르고 지다창을 무턱대고 굴에다 들이민통에 안에 있던 놈들이 앞통로를 제꺽맊고 다른통로로 해서 깊이숨어버린탓에 잡지 못했다. 세밑에 가서야 내굴을 쐬여 몇놈잡았다. 어쨌든 종자는 남긴거다. 그들은 쪽제비와 황가리를 여러마리잡아팔았다. 개와 싸워보자고 찾아온 승냥이를 세 마리잡고 여우도 두 마리잡아 가죽을 벗겨팔았다. 산짐승잡이는 재미 있었다. 남병호는 자동차의 부르릉거리는 소리도 사람의 떠드는 소리도 없이 조용한 산간의 맑고도 아늑한 서정적인 환경속에서 번뇌를 잊고 그 겨울을 박기섭로인과 함께 유감없이 즐겁게 보냈다.                                                                         7      이듬해의 봄. 남병호가 박기섭로인을 찾아와 자기는 이젠 농사지을 생각도 외지에 벌이갈 생각도 없으니 함께있도록해달라 사정했다. 박기섭은 그 청을 선듯받아주지 않고 머리속에 생각을 굴리였다. 함께있으면서 늪에다 양어를 좀 더 크게하면 자기도 덜적적해서 좋지만 젊은이마저 중같이 만들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이보고 자기처럼 늙어죽을때까지 홀아비로 살아갈셈인가 그러지 말고 농사를 계속지으면서 알맞는 색시감이나 얻어 장가나 어서가라했다. 생각해보니 하긴 그것도 틀리지는 않는 말이였다. 이젠 아예 속세를 떠나 중질을 하자고들면모르겠지만 아직 정욕은 펄펄 살아있는 숫놈이였다. 그래갖고 산에만 들어와있는다면 사실 다시장가간다는것도 어려울것이였다. 하여 그는 지금은 우선 박령감의 의사에 쫓도록했다.    여름이 되니 어떻게 여기 늪에 고기가 많다고 소문이 나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낚시꾼이 하나 둘 달려들기시작했다. 그들중에는 자기는 도시에서 일부러찾아왔는데 제발잡게해달라고 비라리청을 하다싶이 사정을 하는 낚시질열성가들도 있었다.    박기섭은 안된다고 딱 막아버리려다가 그러면 먼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사람을 너무나 랭혹하게 대하는 것 같거니와 자기는 그들로부터 괴벽한 깍쟁이라는 나쁜 평을 받을게 빤해서 생각한 끝에 돈을 얼마간씩 받기로 하고 그네들이 늪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허락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어 일호동의 작은 늪은 대외로 개방이 되었다. 헌데 또 정작 그렇게 하고보니 전만 수입은 썩 되는데 돈 몇푼내기실어 도적낚시질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기섭은 그런 사람이 발견만되면 개를 풀어놓았다. 그러면 저쪽은 덴겁하여 달아났다.    여기에는 죽탕같이 발을 어지럽힐 길이 없었다. 일호동에서부터 지금은 돌을 캐지 않는 남쪽의 채석장까지는 자동차는 들어오기 어렵지만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서는 얼마든 다니는 오솔길이 예날부터 나있었는데 그것이 모래길이여서 좋았다.    어느날 남병호는 자기가 다루고있는 논 일곱짐에다 비료와 약을 다 치고나서 일호동에 왔다.    《로인님, 한가지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직은 일러그렇지 이제 좀 더있으면 낚시질꾼이 형편없이 쓸어들겝니다. 》    《그건왜서?》    《내가 요즘 시내에 갔다가 도는 말을 들을라니 거기 낚시협회에서는 올해부터 여기 일호동늪을 자기들의 중점활동장소로   선정하고있답니다.》    《좋아 어디 그렇게만하라지. 나두 손해볼건없으니까. 그런데 그럴려면 그네들이 나하구 협의가 있어야하지.》    《거야물론이지요. 그렇게 않하구야됩니까. 그들도 이제 그러자고할겝니다.》    《내 그 사람들이 어째 여기를 특별히 맘들어하는지를 알만하다. 그건 고기잡이도 고기잡이려니와 여긴 경치까지 유별나게 좋으니까 그러는거네. 작년에 장근식이가 왜 여기를 그토록 욕심냈겠나. 빤하지 않아. 밑천얼마넣어 별장만 하나 지어놓으면야 여긴 좋은 료양지로 되어 영락없이 뗏돈을 벌것같아서였네.》    《그런데 시내사람들은 여기가 좋다는걸 어떻게 알았을가?》    《모르지 그자식이 여기를 달라구왔다가내한테 퇴박맞고는 일부러 훼방을 놀게만드느라 시내낚시질꾼들한테 소문낸것이 이같이 번져가는지두. 아무리생각해봐두그래.》    《정말그렇다면 이건 해가 복으로되는게 아닙니까.》    《세상일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지. 이것두 아마 하늘이 이 령감을 알아주는건가봐.》    《아마그런거같은데 저 로인님.》    《무슨일 또 있나?》    《우리가 여길 아예 료양지로 만들어버리면안될까요.》    《안될거야있나. 그러잖아 작년에 그 일이 있은후부터 나도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가고있는중이네.》    정보를 중히여기고 장래를 설계해보는 이런 대화는 적시적이거니와 중요한것이였다.    박기섭은 가불간 장가를 한 번 다시가야 할 남병호가 그일에 대해서는 대체 어느정도나 신경쓰고있는가를 알아보았다. 남병호는 자기가 보아둔 녀자가 하나있다고 하면서 일이 되겠지요했다.    《제마을녀잔가?》    《아닙니다. 외지녀잡니다.》    《뭐라, 외지녀자라?》    《예. 교련하쪽에 있는데 작년에 본남편과 이맞잖아서 끝내리혼하고 지금혼자살고있습니다. 일곱살난 딸애 하나데리구요.》    박기섭은 그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기웃거렸다.    《교련하쪽에서 이리로 시집오자구한다지. 아마두 딸린 새끼있어 거기서는 재가하기 어려운모양이지.》    《그래그런게 아닙니다. 녀자측이 딸린자식있어도 꺼리지 않으니 같이살자고 청혼들어오는게 여럿된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먼데루 시집오자구하나.》    《거야 연분이 줄을놓아서 그렇겠지요. 올해 나이 서른넷인데 고향에 와서 살고십답니다. 우리는 서로 면목아는사입니다.》    《면목아는사이라?》    《예. 우리가 그쪽에서 살 때 중학을 함께다녔습니가. 그는 이고장서 태여나서 여섯 살 때 그쪽으로 이사를 갔던겁니다. 그리곤 거기서 학교를 다녔구 스므다섯살을 먹어서는 바로 지난해에 갈라진 본남편한테 시집갔던겁니다. 》    《성명이 뭔데?》    《로영애입니다.》    《로영애라!》    박기섭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늘 빨간 명주댕기로 종종머리를 매고다니던 한 깜찍스런 계집애의 동그란 몰골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 계집애가 바로 로명호의 딸이다. 딸만 셋이였던 로명호가 아들생각이 간절해서 뭐니뭐니해도 사람의 인소가 제일이라는 구호를 죄치면서 끈기있게 자식생산을 계속해서 다시본 것이 결국은 제언니들모양으로 달고나오라는 고추는 달고나오지 않고 어미배속에다 떼놓고 나온 그녀여였던 것이다.    남병호가 박기섭이 낯빛까지 흐려가면서 저으기놀라는 모양을 보고 괴이쩍어했다.   《어째그럽니까?》   《대상이 로영애라니 그러네.》   《그럼 로인님도 로영애를 압니까?》   《알다말다. 그게 죽은 로명호의 셋째딸아닌가. 걔가 바로 도시서 살다가 〈하방〉한 이듬해에 태여났지.》   《아, 그런가요! 로인님은 무어나 다 아는구만요!》    이번에는 남병호쪽이 되려놀랬다. 그는 마을사람들한테서 들어 항미원조 때 조선전쟁판에 나가 피흘리며 싸운 박기섭로인이 문화혁명기간 억울하게도 목에 패쪽달고 투쟁받았다는건 알고있어도 그를 그토록만든 장본인이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영애의 아버지였다는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박기섭은 그 일은 말하지 않으리라 작심했다.    남병호는 자기는 아직도 련애중인데 이제 어느때 한 번 자기가 기회를 봐서 대상을 데려다가 꼭 인사를 시키겠노라했다.    이렇게 공교로울변이라구야. 저녀석을 빨리 재처를 하라 독촉했더니만 하필이면 로가놈의 딸을 눈에들어할건뭔가. 과연 말과같이 데려온다면 어떻게 대해줘야하는가. 그를 만나면 자연히 로명호를 또 한번다시 상기하게될것인데 그러는게 결국 무슨 좋은점이있는가. 상처입은 과거는 꿈속에서도 재생되지말아야했다. 이제는 분하고 쓰라린 기분만을 자아내게하는 지난날을 다시회억하기싫었던 박령감은 난감한 일에 봉착하게되였다.      주인이야 어떻든 일호동의 새날은 산새들의 즐거운 노래속에서 막을 올리고 막을 내리였다. 흙에서 진주를 캤다면 누구나 그것이 과연정말 진주일가고 의심할것이고 대체 어떤모양인지 보자고하듯이 일호동역시 상고머리가 갖고싶어서 침을 흘린 곳이라 소문나는바람에 자연히 차츰차츰 여러사람의 안목에 들게되였다. 시내의 낚시질꾼만이 아니였다. 남병호가 왔다간지 한주일만에 저 앞마을의 20여명되는 젊은이들도 자전거를 하나씩 타고 일호동에 나타났다. 일부러 계획하고 원족을 온 것이다. 전에는 이런일이 없었다. 그곳도 산을 의지하고 있는 촌이여서 도시사람들모양으로 산이 그렇게 그리운 것은 아니였다. 그역시 하나의 양생법이라 할가 자아안위라 할가, 어느때부터였는지 그 마을에는 아무데도 벌이를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농한기를 무료하게 그저보내자니 멋없어 계(契)를 묻듯이 제 동갑을 찾아 띠끼리모여노는.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언중에 또래와 또래끼리 마치 경쟁이라도 하다싶이 놀아주는판인데 오늘 그중의 한또래가 이왕과는 색다르게 활동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활동의 조직자가 다른사람이 아니라 여기를 제집같이 드날들고 있는 남병호였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한것은 로영애가 좀 더 두고보자던 청혼을 수락하고 이젠 같이살자면서 교련하에서 일부러 찾아왔기때문이다. 동갑들은 남병호보고 잔치를 하라느니 빨리한턱내라느니 닥달을 놓았다. 이에 당자는 좋다 내마 그깟거야 문제냐. 그런데 우리는 곧 려행잔치를 떠나겠으니 술한잔 얻어먹을 결심이 있거든 어디 따라오라해서 오늘 이렇게 원족이 조직되였던 것이다.    박기덕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조직되여 자기의 독립령지로 놀러온 것을 무척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가 요즘 기억속에 더듬어보았던 녀인이 나타나 그의앞에 다가왔다.   《인사하오, 나를 늘 친자식같이 여겨주고있는 박로인이요.》    남병호는 박령감의 앞에서 자기가 로인의 동의도 수소문도 없이 문득 한무리를 데리고 오게된 연유를 말하고나서 영애를 그에게 인사시켰다.   《네가 로명호의 딸이라지. 그러구보니 어렸적의 모색이 약간알리는구나. 넌 제 누나들보다 어미의 모색을 더많이 닮았네라.  .애기때부터 빨간댕기를 특별히 좋아하구. 내가 누군지 알만하냐. 넌 아마 이 늙은이가 좀 기억날게다. 》   지울수없는 것이 세월이 남기는 흔적이였다. 박령감은 얼굴이 아직은 젊은바탕이나 아이어머니로 되어서 눈가에 벌써 잔주름이 잡히기시작해 초로의 증상이 보이고있는 젊은녀인이 머리를 공손히 숙이여 하는 인사를 받고나서 튀여오르려던 격정을 삭히면서 온화한투로 말했다.    그때는 비록 학령전의 나어린 계집애였지만 벌써 지력이 트기시작한 때였기에 로영애는 얼굴이 강마르고 다리 하나를 살룩살룩 절면서 자기네 집에 자주놀러다니던 한 사람을 지금도 잊지않고 있으리라. 그는 영애를 무척고와했다. 어느핸가 그가 알사탕을 사주어서 영애가 그것을 받아먹은적도있다. 어찌나좋던지. 그래서 영애는그를 좋아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갑자기 발길을 끊고 다니지 않았거니와 목에다 글을 쓴 커다란 패쪽을 걸고 마을사람들한테 자주몰리우기만했다. 그가 왜서 그렇게 험악한지경이 됐는지? 영애가 초중을 다니면서 아버지한테 물었더니 아버지는 계집애가 공부나할게지 쓸데없이 그건알선 뭘하느냐면서 알려는주지도 않고 신경질만 부리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땐가 한 번은 어머니가 아버지보고 당신은 그래 무슨낯짝에 그 사람을 다시대하겠소 하면서 지청구하고는 탄식하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다. 영애는 어머니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다리를 절는 어른이리라여기고  어머니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고 캐물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도 쓸떼없이 네가 그런거나알아선 뭘하는가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영애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세월이 오래되니 한때 의문되고 미타하던 일이 이제는 머리속에서 영잊어지나답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이렇게 만나게될줄이야! 로영애는 물기어린 눈매로 그를 마주보면서 말했다.   《제가 왜 모르겠어요. 로인님께서는 절 무척 고와하면서 사탕도 사주지 않았던가요. 로인님은 정말좋은분이였어요.》   《내가그랬던가, 허허허!》    박로인은 웃음으로 이제 영애를 마나면 하려했던 지난때의 말과 감정을  뭉때리고말았다. 대방이 안겨주는 한마디말에 열층두께의 얼음이 녹고 가슴은 후련해진 그였다.      비누거품같이 떠있는 하얀구름사이로 해가 웃으면서 얼굴을 내미니 맑고 청신한 대기속에 함뿍잠겨있는 일호동의 초가와 늪과 산은 한결 아련한 정취를 자아내고있었다.    놀려고 온 마을의 젊은이들은 시르맨커서쪽의 바위산을 올라가보고 내려와서는 그 산기슭에 있는 한 너럭바위우에다 저마끔준비해갖고 온 음식들을 꺼내여 놓고는 빙 둘러앉았다.    돌을 고이고 걸어놓은 가마안에서는 고기국이 끓고 있었다. 남병호의 결혼잔치삼아 조직된 원족이였다니 아끼고싶지 않았다. 박로인은 물고기가 얼마든지있다 너희들은 오늘 해먹고푼걸 마음껏해먹고가야한다 그러지를 않는다면 이 늙은건 성을 내리라했다.   《로인님,갑시다! 갑시다!》    젊은이 하나가 그를 상석에 모시였다. 그리고나서 결혼례식순서대로 한다면서 남병호와 영애를 끌어다 그의 앞에서 큰절을 하게했다. 남병호와 영애는 오늘부터 정식부부로 된다. 그런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신랑도 신부도 살아있는 친부모는 없었다. 량측 다 형제자매들이있긴해도 그들은 다가 바깥벌이를 하느라 헤매고있으니 없는거나다름없다. 오기어려운 그들을 꼭 생빈으로해야 할 리유가 뭔가. 아무리 윤기간이라해도 인정을 모르면 그는벌써 남이되고마는 것이다. 내가 변을 당했을 때, 고민 할 때, 방황 할 때, 절망 할 때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포섭해 주는 사람― 인애가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친구고 형제고 부모인것이다. 젊은이들은 불행했던 두 사람의 새로운결합을 축하하면서 한결같이 남병호의 얼었던 가슴을 녹여주고 이끌어주고있는 박기섭로인을 높이 칭송했다.     박기섭로인은 전해에 자기가 만들어두었던 말린 산사편을 몽땅 내놓고 그들의 술좌석에 끼이였다.    《이건뭐라는겝니까?》    가마에 쪄낸 아가위를 으깨여서는 꿀을 치고 록말을 넣어서 그걸 끓이면 산사편이 되는데 모두들 생전처음먹어보고 있다.    점심식사가 다되자 록음기에서 유쾌한 음악이 터져나오기시작한다. 오락이 시작된 것이다. 술이 얼근하게 된 젊은이들은 저마다 재간껏 마음껏 노래도 하고 춤도 췃다.   《이눔의 유축에서두 오락을 놀아보는 때가 있구나!》    젊은이들이 많이와서 이렇게 놀아주니 유쾌하고 만족스러운지 로인도 환락과 기쁨에 도취되여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오늘부터 살렵니다.》    이날 남병호는 돌아가지 않고 영애와 함께 일호동에 남았다.     례식을 꼭 올려야 하는건가. 박기섭로인은 새결혼증을 보고는 두말않고 시르맨커를 비우고 자기는 다커투에 올라가 잤다.      가을에 시르맨커를 허믈고 그 자리에 아담한 벽돌집 한채를 일떠세웠는데 호적부에 등록된 이 집의 식솔은 모두 다섯이였다. 젊은부부에 녀자애 둘 그리고 로인한분. 마을의 이름은 여전히 일호동이라했다.                                                                                                할빈에서                                               1997, 10, 4
30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1ㅡ4) 댓글:  조회:3839  추천:0  2013-09-13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   김송죽    1       토끼꼬리만큼이나 짧아 긴 꿈은 꾸기조차어려울 삼복철 한밤. 게으른 부엉이가 심야의 정적을 몇 번 건드려놓곤 지쳐버렸는지 그만 울음을 그쳐버렸다.     괴괴한 정적이 얼마간 흐른 후   《쮸리쮸리―》     이번에는 단잠을 깬 솔새가 단조하고 되알진 목청으로 어뜩새벽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려놓는다.     칠흙같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먼동이 튼다.     미구하여 귀염둥이가 손에쥐고 놀던 고무풍선같은 붉은 해가 동산머리에 불끈 솟아오른다. 그러자 찬란한 햇빛이 온 대지를 찬란히 비추기 시작한다. 그 빛을 받아 삼라만상이 차츰 제 모습들을 드러내기시작한다.     벌방과 사이떠 외인의 발길이 적게 닿고있는 여기 산간벽지에 자그마한 늪을 한켠에 끼고 오두막모양의 자그마한 집 한채가 옹송그리고 있다.     출입문이 삐걱 열리면서 아직은 해빛이 채 들지 않아 어둑시그레한 집안으로부터 70대의 통바지를 입은 거쿨진 사나이가 맨 런닝그바람에 나온다.   《아―하!》     늙은이는 해뜬쪽을 향해 두 팔을 머리우로 올리면서 하품을 요란스레해댔다. 헝크러진 흰 머리카락이 해빛에 반짝거린다. 꺼진 눈확에 박혀있는 두 눈도 반짝거린다. 그 나이면 고령이건만 허리도 그리 굽지 않은 그는 짜장 만고 풍상을 겪어낸 한마리의 완악한 늙은 승양이를 방불케한다. 성명이 박기섭. 홀홀단신인 이 늙은이가 바로 여기 산간의 주인이자 이 일호동을 주재해온 군주인 것이다.   《까악까악―》     산까치 한 마리 머리우를 날면서 울어댄다.   《허허, 자식이. 무슨 좋은소식있다구저래.》     로인은 저기 백양나무가지에 가 앉아서도 꼬리를 달싹거리며 울어대는 산까치를 향해 입가에 잔웃음지으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린다. 꿈을 꾸곤 그걸 해몽하거나 새소리듣고 점을 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굳어진 습성이다. 그의 하루생활은 늘 이런멋으로 시작되고 이런멋으로 반복되여왔다.    거의 망아지만큼이나 트대큰 개가 주인곁으로 다가오더니 꼬리를 저으며 알찐거린다. 귓등과 꼬리 주둥이만 희고는 온 몸뚱이가 새까만 이 개는 생각나면 먹이를 던져주면서 천대스레 자래우다가 출출할것같으면 잡아나먹자고 자래우는 그따위 하찮은 보통 똥개는 아니였다. 마스티브종인 이 개의 원산은 영국인데 크고 사나와 투견으로나 호신경으로 들고난거다. 이 개가 지금의 주인손에서 자란 것이 이미 다섯해나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약 60여리 상거해있는 변방소에서 이런 개를 기르고 있다. 박기섭은 이 개가 제 어미배속에서 나와 어섯눈을 뜨자 거기서 안아왔던거다. 박기섭은 개를 기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이 개가 각가지의 냄새를 제대로 맡아내게하느라 먹이를 주의해 가려먹였거니와 목기운이 세게하느라 오금이 트자부터 나무방망이를 달아주었고 다 커서는 그걸 벗기곤 목사리에다 대신 못을 촘촘히 밖아 만든 가죽띠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여우나 승냥이를 만나 싸울 때 목이 상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주인이 그같이 알심들여 보살폈길래 개는 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가리지 않고 헌신 할수있는 충견으로 자라난 것이다. 박기섭에게는 한가족 성원인 이 개가 곧바로 유일한 말동무이자 친구였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유감스럽게도 사유가 고등이라는 인간이 행실은 털난 짐승보다도 못한 걸 심심찮게 보게된다. 그것을 박기섭이가 친히 목격했던거다. 력사에 류례없다는 혁명이 이 땅에서 휘몰아칠 때였으이니 이젠 어언 30여년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사람들이 어쩌누라 그리도 심한 광열병에 걸렸던지. 이런 변비와 가까이 있는 도시에서도《붉은해양》을 만든다면서 뼁끼를 통드리로 부어 펀펀한 콩트리트벽들을 온통 피칠갑을 한것같이 만들어놓았었고 촌에서는 집집마다 지붕에다 붉은기를 여러개꽂았다. 그리곤 때마다 밥상을 차려놓고는 위대한 그 사람의 초상앞에서 《삼경삼축》을했었다. 그러는 꼴을 박기섭이는 보다못해 이게 무슨짓이여 산사람놓고 제지를 지내는거야 아니겠지, 이런다구 혁명이 되는건가 제정때두 일본은 이러다가 망한거야 라고해서 그만 《반혁명》으로 몰려 변을 당하고말았는데 하마터면 아까운 제 목숨도 건지지 못할번했던것이다.    박기섭이를 놓고보면 남들처럼 시기시기의 기온에 맟추어 놀지 않고 우둔스레 입바른소리를 망탕죄쳤을 뿐이지 사실은 그 본인의 말대로 그 무슨 이단적인 사상이 머리속에 밖혀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절대아니였다. 22살먹고 장가를 간 그는 이듬해에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남먼저 정부의 호소를 받들어 호미자루를 총자루로 바꿔쥐곤 지원군의 행렬에 들어 압록강을 뛰여넘어갔고 가렬한 전투를 여러번 치루면서도 운수좋아 무사했다. 그러던 그는 5차전역때 지금의 휴전선에 위치해있는 어느 한 무명고지를 지켜싸우다가 그만 적탄에 다리를 상하였고 그 상을 치료하느라 후방병원에 왔다가 정전이 되니 전업하여 고향에 돌아왔던거다. 욕망같아서는 향에서 무장조리노릇이나 하고싶었지만 몸이 남같이 성한축이 아니다보니 하는수없이 민정조리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안해가 너절한 상급과 배가 밪아 돌아가니 눈꼴시고여 차버렷거니와  그결에 지지하던 사업마저 집어던지고말았던 것이다. 남들은 관심해서 퇴직금이라도 타먹어야지 아무렴 계집년때문에 그 좋은 철밥통까지 팽가칠건 뭐냐고 권하면서 나무렸지만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거니와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더 추호의 미련도 두지 않은 박기섭이다. 지금도 한쪽다리를 살룩살룩절고있는 그는 오로지 용맹과 회생만이 약속되여있었던 그 가열처절한 전투의 나날에 겪은 가지가지의 일과 추억들을 지금도 의연히 중히 간수하고있는 군공메달 세 개와 함께 가슴속에다 깊이 묻어두고 홀로살아왔던 것이다. 왜서 홀로사는가?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다니? 하면서 그를 리해못하는 사람은 지금도 의연히 그를 괴짜로만 보고있다. 워낙 말수더구가 무거운편인 그였는데 안해의 배신이 괘씸하고 부화가 동해 자주 음질을 쓰면서 심청을 뿌리다보니 성질사나운 남자로 돼버렸고 말새질하기 좋아하는 동네집아낙네들이 그것을 입끝에 올려놓고 찧고까불려서 소문이 좋지 않게 파다히 퍼졌다. 아마 그런 미열이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모양이다..    이런 사람이 문화혁명에 끌려나왔으니 그 꼴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로건달말인가. 그녀석 인피를 썻으니 사람이지 어디 사람인가. 개만두 못해 개만두 못해.》    박기덕이 이렇게 욕하는 로건달이란 몇해전에 위암에 걸려 죽어버린 로명호다. 그는 시내에서 무직업자로 돌다가 60년대초에《하방》바람이 부니 더는 배겨낼수 없어서 잔밥을 데리고 박기섭이네 마을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그런데 털면 먼지밖에 없을지경 사는 꼴이 그야말로 말이아니였다. 형편이 그러하니까 워낙 민정사업을 했던 박기섭인지라 그저 보고만있을수는 없었다. 같은 제 동포요 더구나 한계급내의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나서서 동지적인 우애정신으로 그를 보살펴주었던것이다. 마을의 간부들을 설복해 식량을 무상으로 내주게했고 국가에서 잔페군인에게 내려보내는 정양비를 자기는 쓰지 않고 그에게 주어 그걸로 아이들의 병을 보게하거나 옷을 해입게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서로 가까운사이로까지 되였다. 그래서 한 번은 술마시면서 그런 속맘의 말을 그하고한건데 량심을 떼어 개를 먹였는지 그가 박기섭을 적발했던거다. 그랬은즉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박기섭이는 냉큼 잡혀나와 투쟁대에 올랐고 소문난 건달이였던 로명호는 문화혁명을 위해 한차례 대공세운 “맹장”으로 인정되여 마을의 혁명위원회에 들어갔거니와 거기서도 주요한 지도성원으로까지 발탁되었던것이다. 그래서 개잡은 포수모양으로 대가리를 내저으면서 우쭐거렸으니 과연 소웃다 구럭터질일이였다.      그런일로해서 지금도 가슴에 맺힌 적원(績怨)이 풀리지 않고있는 박기섭이는 누가 로명호의 이름을 거들기만하면 코빠는 애들한테서마저 온갖수모를 당했던 그때의 일이 머리속에서 다시다시 고패쳐 얼굴에 노기를 피우면서 침을 뱉군한다. 그러니 로가는 죽음으로써도 그이 앞에서 지은 죄만은 의연히 씻지못하고만거다.    박기섭이한테는 청매죽마는 아니지만 조선전장에 지원군으로  나가기전부터 면목익히고는 아주가깝게 지내였던, 지금 그가 살고있는 이 집의 원주인이자 성명을 유덕환이라 부르는 허저족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식솔들은 3년재해년간에 살아가는게 과연 말이 아니였다. 그런 꼴을 보고 박기섭은 잠이오지 않았다. 하여 그는 돌아오자 제 배를 채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식량을 모아 그들을 먹으라고 보내주엇거니와 때론 옷가지도 보내주군했다. 오는 정 가는 정이라 유덕환이가 그 은공을 어찌잊으랴. 몇해후의 어느날 그는 안해와 리혼하고 혼자사는 박기섭이를 보러왔다가 마침 목에다 문짝만큼한 패쪽달고 투쟁받는 그를 발견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마을밖을 숨어돌다가 그날밤으로 박기섭을 빼돌려 자기집에 가져다 숨겨두었던거다. 마을에서는 그가 갑작스레 실종되는바람에 한바탕 벅작끓어번졌다. 박기섭이가 투쟁받더니 죄가 두려워 자살해버렸다는 둥 멀리 뺑소니를 쳤다는 둥… 실상 그랬던들 온 나라가 혈안이 돼서 상대자만 나지면 무자비한 전정을 들이대는판인데 제따위가 도망가면 어디에 가 오래배겨낸단말인가. 헤매며 찾느라말고 기다려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그러했다. 살아서는 승천입지(昇天入地)할수없었던 박기섭이는 만 5년만에 마을과 20여리떨어진, 이런 변비의 산속에서 타민족의 집에 숨어지낸것이 끝내드러나게되었던것이다. 허지만 시종 되붇잡히지는 않았다. 유덕환이네 온집식구는 물론 개까지 그를 보호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난날의 한가닥 이야기다.      그 허조족친구는 10년전에 벌써 위암으로 저세상에 가버렸다. 그리고 그가 위암으로 세상뜨자 그의 아들도 이듬해에 거의 한 대를 살아왔던 이 집을 가장어려웠던 나날에 자기네와 고락을 함께 해왔던 이 조선족로인에게 무상으로 념겨주곤 자기는 식솔들을 데리고 현성으로 이사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박기섭이가 이 일호동의 주인이 되어 그냥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배게 누으면 장정 다섯까지는 잘 수 있는 돌구들에 부엌이 달린, 앞쪽에 출입문과 창이 붙어있고 뒷쪽에 뙤창이 있게끔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이런 반토굴식의 집을 허조족들은 시르맨커라부른다. 그리고 집앞에 십여보쯤 떨어져 통나무 네 개를  땅에 밖아 기둥하고 물개암나무를 엮어서 벽을 한 자그마한 다락이 하나있는데 고기를 말리우거나 창고삼아 여러 가지 어수렵도구들을 넣어두기도하는 이런 다락을 허저어로 다커투라부른다. 박기섭은 시르맨커와 이 다커투를 물려받으면서 조대로부터 어업과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로부터 고기잡이술과 짐승잡이술도 배워두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와서는 나라정책에 따라 큰짐승잡이는 그만뒀지만. 변칙적인 운명이랄가 그역시 지금은 옛주인모양으로 반은 어부로 반은 산장이로 살아가고있는 판이였다.    국계인 큰강과 가까이에 있는 여기가 바로 변방지도에서나 향지도에 꼭같이《일호동》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그것은 허저족주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여기로 사람이 퍽 적게다니였었다.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 순라를 할 때 들리거나 되거리장사군이 고기를 사느라 오군했을뿐이다. 잔페군인인 박기섭은 지금도 자기에게 나오는 정양금을 타러 향민정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뉘집에 대사가 있어 부득불 가봐야 할 때를 내놓곤 벌방으로 자주나가지 않는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혼자사노라니 적적하다못해 심하게 느끼군하던 고독감도 세월이 감에 따라 사그라져 이제는 아무렇지도않지만 사교를 그닥즐기지 않다보니 어쨌든 성미가 남보다는 류다른데가있었다.      이러한 그한테도 사귈만한 친구는 있었다. 몇달전부터는 제 안해를《위장결혼》시켜서 한국에 벌이를 내보낸 남병호란 젊은이가 꽤나자주다니고 있다. 처음은 누구의 심부름을 하느라 나타난 것이 지금은 고기잡이에 정신이 팔려찾아오는 단골손님으로 되고말았다. 때론 왔다가 밤을 자고가기도했다. 그럴때는 적적하던 시르맨커에 활기를 더해주군했다. 박기섭은 그러는 그가 좋았다.                                                                                     2.           해가 바지랑대만큼 기여올랐다. 하늘의 한모퉁이에서는 솜같이 뭉실믕실한 더미구름이 떠돌고 있다.    《사람을 삶아낼판이냐. 오늘두 비는 안오겠구나… 통그믈이나 손질해야지…건데 까치놈은 왜 그렇게 울어댔을가?》     박기섭은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다커투에 올라가 망가진 통그믈을 내려오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개가 궁둥이를 땅에 붙인채 제 주인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면서 대가리를 갸우뚱거린다. 말을 알아듣곤 요사스런 까치가 매일 그모양인걸요 뭐 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이자식아. 고놈이 오늘아침은 내 머리우를 날면서 유별나게 울었단말이다.》     개는 참 그랬군요 하고 맛장구를 치듯이 꼬리를 살살 저었다.     박기섭은 집가까이에 있는 아름드리 백양나무그늘에 가 자리잡고 앉자 방금 다커투에서 꺼내온 통그믈을 앞에 놓고 손질하기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코노래를 되는대로 흥얼거렸다.     정오가 거의되어 올 무렵. 날은 찌는 시루같이 무더워졌다.     개가 컹컹 짓다말고 꼬리 젓는다.     《누가왔느냐?》     《내가왔어요, 로인님.》    박기섭이 개와 말했는데 사람의 말소리들려왔다.     그는 일손을 멈추고 고개들어 방금 소리가 날아온 쪽을 보았다.    중등키에 다부지게 생긴 젊은이가 이켠을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늘 다니는 남병호였다. 해가림모를 삐딱히 쓴 그의 울기오른 얼굴은 땀으로 맥질했고 팔짜른 셔츠는 앞단추를 채우지 않아 펄럭거렸다. 손에는 그가 늘 갖고 다니는 쟉크달린 검은색나는 인조가죽가방이 들려있다.     로인은 얼굴에 반색을 지었다.     《어! 자네왔나. 그러잖아 왜 오잖나구그러는데…그래 요새받은 신문은 가져왔나?》     《그럼요. 가져오구말구요, 로인님께서 부탁하신건데 안갖고오면됩니까.》     젊은이는 흐르는 땀도 닦지 않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쟉크를 열더니 갖고온 신문부터 끄집어냈다.    《아니 그건 뭐.》     늙은이는 가방속에 배갈 두병도 들어있는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나도 좀…》    《어 그래?! 하하하…》    로인은 아무리 좋은 술이라 해도 동무있어야 맛이 나는건데 잘됐다면서 입을 뻐개가며 웃었다.    젊은이는 해가림모를 벗어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해댔다    로인은 손을 재게 놀려 하던 일을 매기단하고나서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누워있던 개도 일어나면서 꼬리를 저어댄다.    박기섭은 늪쪽으로갔다. 늪은 시르맨커 바로 동쪽에 있었다. 수면에 피여난 수련이 뜨고 늪가에는 장포와 갈과 여러 가지 잡풀들이 무성했다. 어디선가 물오리들이 박박박 울면서 자맥질하고있었다. 음향과 미묘하게 조화이룬 경물이랄가 작고 고요한 늪은 산간의 자연미를 한결돋구어주고 있었다.     남병호도 어느새따라왔다.    《로인님! 여기 경치가 이리두좋은걸 전엔 왜 몰랐을가요. 》    《생각해보게 왜 몰랐겠는가구. 거야 사람들이 모두 혁명하는데만 정신팔다보니 자연같은건 알아볼 념도 안했기 때문이지.》    《아무렴어쩜…》    전세대의 사람들은 감정이 과연 그리두 말라지냈단말인가. 젊은이는 로인의 말에 리해가 잘안가는지 말을 더 하려다말고 눈만 찡긋했다.    박기섭은 무성한 부들숲가에 이르러 거기 말둑에 매여있는 배를 풀어냈다. 그건 봇나무껍질로 만든건데 길이가 기껏해야 둬발밖에않되였다. 깜찍한 수공예품을 방불케하는 그것이 허저족어부들이 고기잡이철이 돌아오면 누구라없이 요긴하게 사용하는 우머르천이였다.    《건너에 가보렵니까?》    《가보려네. 몇놈들었을텐데.》     로인은 재우쳐 묻고나서 머쓱하니 서있는 젊은이를 의아쩍게 보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왜 그러나?》    《이눔의게 달걀껍질같아놔서 난 정말 …》    《뒤집어질가봐 근심되나?》    《솔직히말해서.....》    《겁쟁이같이!》     여기는 물고기가 흔했다. 이 늪 아니고도 시르맨커 뒤 저기 작은 물동아래 물후미거나 늪이 작은 내와 합치고 있는 물드리에다 낚시를 집어넣어도 길이가 둬뼘씩되는 메사구와 크기가 손바닥만큼한 붕어가 물려나왔다. 남병호는 자기는 낚시를 빌려갖고 차라리 거기에 가서 정심찬거리를 잡아오고싶었다. 그런데 로인이 마지막내던진 겁쟁이같다는 말에 살을 맞아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그는 낯이 확끈해났다. 등신같이 겁쟁이로되다니 원.    《내가 갔다오지요.》    남병호는 용기내여 먼저 성큼 뛰여올랐다    여지것 한사람만 태웟던 봇나무매생이는 심하게 요동쳤다.    《번져질라, 조심해라!. 》    로인은 소리쳐 주의줬다. 그리곤 이런 배는 어떻게 몰아야한다는 것을 알려주고나서 풀어낸 배줄을 넘겨주지 않고 제손에 그냥쥔채 말을 이었다.    《고기잡일 제대루하자면 뭣보다두 이걸 잘 다를 줄을 알아야 해. 병호 너도 우리 이 늪에는 초어가 많은걸 알겠지.》    《알아요.》    《건데 여적 그놈을 한 마리라도 잡기나해봤는가. 못잡았지.》    《예. 못잡았어요.》    《거봐. 남은 잡는 데 왜 못잡았나. 이걸 타구서 고기잡일하자면 먼저 요령부터 장악하는게 관건일세, 알겠나 요령부터 장악하는게 관건이란말이여.》    《그렇지요.》    《적과 싸워 이기자면 우선 정찰을 잘한 기초상에서 작전방안을 잘짜야하는거구 그 기초상에서 또 전투원 각자가 취할 행동을 알아두어야하는거네.》    《그렇겠지요.》    《그렇겠다는게 뭔가. 이게 바로 꼭 알아둬야 할 요령이란말이야. 그놈이 알을 쓸고나서 먹이를 되게 찾을 때는 잡기가 제일 알맞춤인데 어떻게 해야 그놈을 잡는지 알어?》    《모릅니다. 일후 배워주십시오.》    《일후는 일후고 지금부터알아두는것두 괜찮아.》     박기섭은 이러면서 요약해 알려주었다. 우선 초어가 잘 모이는 곳부터 알아두어야한다는 것, 그 정찰이 끝나면 작고 가벼운 우머르천을 썩 바투 소리도 안나게 살살 몰고가 내심하게 기다려야한다는 것, 그리구있다가 초어가 풀잎을 물고는 그것을 대나 가지에서 떼여내느라 흰배를 해뜩 뒤번지면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작살을 뿌려야한다는 것 등등.    제법의 리론강의였다.    그는 겨울이 오면 끝이 뾰족한 빙천을 갖고 고기들이 모여 월동하는 늪의 깊은 곳이나 강에 얼음구멍을 여러개 동그랗게 뚫고 는 그 속에다 이 구멍에서 저 구멍까지 그믈을 넣어 늘이거나 아니면 후리그믈을 넣어 돌려서 잡군했는데 그건 다음날 아무때든 젊은이가 들어두어야 할 강의내용이였다.    건너편물목에 싸리로 튼 통발을 하나 놓은 것이 보였다. 우머르천을 그곳까지 조심스레 몰고간 젊은이는 그것을 들추었다. 그 속에는 손바닥만큼씩 큰 살찐 붕어가 근 20여마리나 들어있었다. 박령감의 표현구대로 말하면 《OK!》였다.    남병호가 통발에서 털어낸 물고기를 갖고갔더니 로인은 보고서과연 만면에 희색을 가득담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튀기였다.    《ok! 오늘점심은 성찬을 차리게됐구나!》    남병호도 웃었다. 그린곤 의아쩍은 낯색을 지으며 물었다.    《로인님은 젊은이들이 쓰는 그런 현대말 언제배웠습니까?》    《현대말이라니? 어느거말인가?》    《ok라는거말입니다.》    《아니 뭐라?!…이런 까막바보라구야 원!》    더 괴이해하는건 젊은이가 아니라 외려 로인쪽이였다.    남병호는 낯이 또다시 뜨거워났다. 아까는 로인한테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까막바보란 말을 듣고 있다.    로인은 무안을 당하고 거북해진 젊은이를 향해 물었다.    《자넨 지금 나이 얼마라지?》    《올해 설흔여덟입니다.》    《음. 그러니까 난 자네가 아직 어미배속에두 있지 않았을 때 벌써 그 외국말 한마디를 배웠던거로군. 조선전쟁판에 나갔다가말이네. 그게 영어가 아닌가. 그런데는?… 내 자네한테 한가지 묻겠어. 외국말이면 다가 현대거로되는건가? 그게 지금 젊은이들의 리해인가? 아주 그럴싸한 사유로군!》    《…  》    남병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시열고 변명 할 재간이 없었다. 무었이라 대구하겠는가. 조소로 벼려진 로인의 말은 실랄한 비난으로 들렸다. 적잖은 사람들이 개혁개방이 시작된지가 이젠 꽤 오래건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외국것이면 다가 좋고 선진적인것으로만 보는데 습관이 되여있다. 지어는 그들의 언어와 문자마저도 신선한것같아서 그것을 현대적인 표징으로 여기고 있다. 색갈도 가릴줄모르는건 오로지 색망뿐이다. 어딘가 병들어 비탈린 사유가 아니겠는가. 수치스러웠다. 남병호는 자기의 무지가 이 자리에서 동배의 젊은이들을 몰잡아 모욕준것만같아서 부끄러웠다.    《이걸루 뭘해먹을가.》    《아무거나하지요.》    《주장을 내놓아보게. 내 오늘은 자네가 먹구푼걸 해줄테니.》    《로인님두 참.》    남병호는 속이 인츰 개운해졌다.    둘은 함께 고기밸을 땃다.    그들은 절반고기로는 생회를 만들고 나머지로는 고추장을 넣어 밭게 끓이였다. 식욕을 일으키는 구수한 물고기국냄새가 방안을그득 채워주었다.    상이 차려지자 젊은이가 병마개를 따서 술을 먼저 로인의 잔에다 부었다. 그리고나서 자기 잔에다도 조심스레 부었다.    《로인님 드셔요.》    박기섭은 술잔을 들려다말고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런데 오늘 이거 어떻게 된 술인지. 알기나하구 마셔야지.》    《다른일아닙니다. 어제 돈 좀 부쳐왔길래…》    《돈이라니 한국간 각시한테서 왔다는말인가.》    《그렇습니다. 5000딸라를 보냈습니다.》    《5000딸라라, 거 적잖은 돈인걸! 집을 떠난지가 얼마라지?》    《딱 여섯달입니다.》    《그러니까 반년이 되는군. 그 돈이면…》    《가느라 꾼돈은 리자까지 다 물어주게됩니다.》     돈이라느것이 무엇인지! 개도 먹지 않는 그놈의 돈때문에 아글타글하느게 인간이요 아웅다웅하는게 인간이요 죽고사는것도 인간이 아닌가! 젊은이는 안해를 이국멀리에 훌 보내놓고는 내내 속빼운 얼간이 같이 허전하면서 무겁던 시름이 인제야 좀 풀려지는지 기쁨실린 어조로 말해놓고는 로인더러 어서 술을 들라고 권했다.    주량이 좋은 로인은 첫잔을 단모금에 비웠다. 그래놓고는 얼굴에 웃음실린 젊은이를 다시금 쳐다보면서 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자네의 소울주(疏鬱酒)를 마시는군.》    《예, 그렇다구할수도있지요. 거기로 건너가서 소식 몇번 오긴했습니다만 사실 벌이를 어떻게 하고있는지 지울 수 없는 근심때문에 울적했던 내 마음이 다소 해소되니까요..》    《이제는 시름이 놓인다 그 말인가?》    《그렇지요. 벌지 않았으면야 돈을 보냈겠습니까. 정말이지 그 돈만 아니보냈더면 이 병호는 한평생 빚더미에 눌려 일어나지도못하고 죽어버고말겁니다. 3만원넘는 돈 몽땅 5푼리자로 꿨거든요.》    남병호는 이렇게 말해놓고는 지금세상에는 돈없는 사람은 똥값에도 못가요 하고 보탰다.    박령감은 미간을 모으고 그를 보았다.   《하긴 그놈것이 없으면야 간장 한봉지두 사먹질 못하지. 안그래? 그렇다구 돈없이살면 정말 모두가 똥값에두못갈까?》    그러했다. 돈이란 있어야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건 필경아니였다. 젊은이는 자기가 은연중 도리에 맞지도 않은 환금만능을 주장한지라 입을 다물고말았다.                                                                                 3  습먹은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날의 어스름저녘켠.    《왝-왝-》    《왜갈왜갈》     늪쪽에서 왜가리들이 유별나게 겨끔내기로 울어댔다.     왕-왕-》     밖에 누워있던 개도 짖었다.    《저것들이 왜 저래?》     벽가에 이불을 꿍쳐놓고 등을 붙인채 비스듬히 누워 반도체라지오에서 나오는 가정프로를 한창듣고있던 박기섭은 이상쩍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 밖에 나와 보았다. 흰 종이장같은 형체가 아직 뚜렸이 보이고 있는 왜가리 두 마리가 늪에 내려와 앉으려다말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 소란떨고 있었다. 다른때는 이러지를 않았다. 더구나 개까지 곁들어 짖어대니 그저일갖지 않았다. 하여 눈주어 늪을 살펴보았더니 저기 통발을 놓은 건너쪽에 무언가 검은 것이 쭈크리고앉아있는것이 분명하게 안겨들었다.    《아니, 저게뭐야, 곰이구나!》     박기섭은 찔끔 놀라 뇌였다.    《허, 그자식이 렴치두 좋다!》     그놈은 분명 고기를 먹자고 통발을 들추고있는중이였다.     여긴 먼 옛날부터 워낙 짐승이 많았다. 늪동쪽도 그렇고 늪서쪽도 그렇고 산고랑을 얼마파고들지 않아도 여우, 승냥이는 물론 노루나 사슴, 메돼지같은 짐승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북으로 한 5리가량 들어가면 로씨야와 중국 량국간의 국계로 금이 그어지는 흑룡강이 있고 남쪽으로 3리밖에 있는 채석장을 지나 20여리를 더 나가면 박령감이 추억을 묻어두고 온 그 조선족동포만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채석장에서 돌을 캐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거의 무인지경모양으로 조용한 산간지대인것이다. 하길래 국가에서 사냥을 금지시키고 채석장에서 울리던 발파소리가 영원히 멎어버린 후부터는 여기가 진정 산짐승들이 안거를 하는 자유의 령지로 되여버린것이다.      《저놈 안되겠구나.》     박기섭은 시르맨커로 제꺽되들어가 양철세수대야를 얼른찾아 손에 들고 나왔다. 생각같아서는 총을 한방 갈겨 그놈을 멀리 쫓아버리고싶었지만 전해에 현공안에서 치안을 위해 사창은 말끔히 걷어들이는바람에 지금 그한테 쓸만한 큰 흉기라고는 칼과 창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 사용할 정황이 아니였다.     박기섭은 주인이 나오니 더 악패듯 짓어대는 개를 우선말려놓고 우머르천에 올랐다. 그리고는 노젓는 소리를 죽여가면서 가까이로 살살 몰고갔다. 그때까지도 곰은 세상모르고 셈평좋게 앉아 퉁발속에 들어있는 고기를 들춰먹고있었다. 로인은 우머르천이 곰의 등을 떠박아놓을지경 바투접근했을 때 갑작스레 소래기를 치면서 세수대야가 깨질지경 마구두드렸다. 그 소리가 꼭마치 폭죽터지는 것 같이 요란했다. 몹시놀랜 그놈은 와닥닥 뛸쳐일어나더니 그만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아 어디론가 멀리사라져버렸다.       통발은 곰발에 뜯기워 영못쓰게되였다. 그래서 박령감은 그 자리에다 전날손질한 통그믈을 놓고는 이틑날 서산에 싸리비러갔다. 통발을 하나 새것을 만들어야하거니와 고기말릴 발도 하나 새로 크게 결어야했다. 하나있긴해도 삭아서 이젠 아궁이에다 넣어버리기나 할 것이였다.    그는 싸리두단을 베여다놓고 계획대로 통발 하나와 발을 하나 훌륭하게 만들었다. 그러고서도 손은 얼마놀사이가 없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한시간가량 낮잠을 자고나서 그는 늪에 나가 거기다 늘여놓은 그믈을 들추었다. 무계가 거의 반근씩은 나갈것같은 초어가 여나무마리나 걸려있었다. 박기섭은 자기가 저녁에 끓여먹을 놈 한 마리와 개한테 줄놈 한 마리만 골라 내놓곤 나머지는 등때기를 갈라 밸을 끄집어냈다. 그런 후 그는 그것들을 싸리꼬챙이에 꿰어 장대기에 높이올리걸었다. 아직은 건들바람부는 한가을철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쉬파리들이 좋다고 달려들어 하루새에 거기에다 후대를 번식하여 개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버릴것이였다.    이틑날도 아침을 먹자 박기섭은 다래끼를 갖고 시르맨커를 나왔다. 머루가 익었을테니 이제는 그것을 딸때가 된거다. 혼자사는 박기섭이한테는 그같은 유취의 일이 곧 소일거리기도했다. 그는 해마다 늪의 고기를 잡아 팔아서 손에 목돈을 쥐거니와 철이 되면 머루와 다래를 따다 팔거나 잣도 따 팔아 소비돈을 장만했다. 그런건 그가 직접 갖고다니며 싸구려를 부르지 않아도 얼마든 처리되였다. 부근의 한족마을에도 향소재지마을에도 해마다 제발로 찾아오는 되거리장사군이 있어서 산을 나가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값을 쳐 넘겨만주면 그만이였던것이다. 박령감이 지금기르는 마스티브종개를 안아오던 전해까지만해도 맡아놓은 임자가 따로없는 그따위 산열매들은 그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였다. 푼전벌이라도하자고드는 한족들이 철이 채 되기전부터 그것을 제가먼저따려고 짓꿎게달려들군했던거다. 그러다가 한 번 그들중의 누구엔가 횡래지액이 떨어져서야 모두 맥을 놓고 다시는 감히 올 념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한 젊은 사나이가 머루따러왔다가 나무에도 바라오를줄을 아는 사나운 달곰을 만났는데 엉겁결에 소래기를 내질러서 짐승을 놀래워놓곤 미처피하지도못하고 그놈한테 잡혀 각을 뜯기웠던거다. 그런 횡사가 있게되니 박기섭이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 지금의 개를 가져다기르게된거다. 전에 개가 두 마리있긴했어도 기운이 세지 못하니 똥개만 별반나은게없었더랬다.    《이놈아, 너도가자!》    박기섭은 개를 집지키게 놔두지 않고 데리고 산속에 들어갔다.    온갖나무들로 혼성림을 이룬 산은 쨍쨍 내리쬐이는 땡볕에 빛을 바래였고 새들은 재잘거렸다.    《저것좀 봐, 고약한 놈들이지. 면목아는 사람왔는데두 나와서 반길 념은 안하구 그늘속에 숨어 떠들기만하는구나.》    박기섭이 새를 놓고 사설하니 개가 컹컹 두마디짖는다. 그러자 새들은 내던 소리를 딱 그친다.    짙은 잎들을 떠인 느릅나무는 묵묵히 서있고 사시나무는 미풍에도 떨고있었다. 박기섭은 참나무에 겨우살이덩굴이 감긴 것을 발견하자 가까이에 다가가서 손을 댔다.   《잘 만났다. 먼저 네 잎부터 좀 뜯고봐야겠구나.》    박기섭은 겨우살이덩굴잎을 차대신쓰고있었다. 한방에서는 잎과 줄기를《인동》이라부르고 꽃은《금은화》라 하는데 약재로쓰인다. 그래서 박기섭이는 한때 품놓고 그것을 전문채집한적도있다. 그것뿐이아니였다. 여기의 산들에는 다른 초약재들도많았다. 그래서 약초캐기꾼과 심마니들이 드나든다.    거기서 몇발짝가지 않아 머루며 다래넝쿨들이 구름처럼 엉킨 숲이 있었다. 박기섭은 발이 먼저간데의 머루부터 따기시작했다.    새콤달달한 머루들은 과연 탐스러웠다. 오로지 따는 품만 팔면 제 입에 들어올 수 있는 고마운 자연의 과실이였다.    시간이 얼마걸리지 않아서 딴 머루가 반다래끼나되였다.    개가 보이지 않고 가까운 숲 어디에선가 쌕-쌕-하는 소리들려왔다.    박기섭은 팔에 끼고있던 다래끼를 얼른내려놓고 달려가봤다.    개가 오소리를 만나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약자인 오소리는 겁을 대단히 집어먹었지만 개가 자기를 건드리느라 앞발을 들때마다 그렇게 소리내면서 입을 사려물었다.   《조 앙증한놈이 대항하는 꼴보지. 그러다가 물릴라! 관둬!》    박기섭은 개를 말렸다. 개는 주인의 명령을 알아듣고는 더 집작거리지 않았다.    굴에서 나왔다가 재수사납게 사지판에들어 하마터면 목숨잃을번 한 오소리는 어디론가 정신없이내뺐다.   《어허. 이거 왜이래!?》    박기섭이 머루를 다 따갖고 시르맨커에 돌아와보니 꼭 닫아놓고갔던 문이 제대로아니였다. 바람이 그럴순없다. 누군가가 열었다가 제대로 닫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제길헐거. 내가 널 데리고갔더니만 이런 일 생겼구나! 어느 몰상식한 녀석이 주인없는 사택을 맘대루건드리는지 원!》    주인의 말에 개도 분하다는 듯 머리를 기웃거린다.    고맙게도 집안의 물건들은 다친것같지 않았다.    헌데 밖에 나가 돌아보니 장대기꼭대기에 달아놓았던 고기궴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도적맞힌거다. 기분잡칠일이였다. 여직 이런 도난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변방순라병들은 들리면 물이나 달라해 마시고갔을 뿐 주인없어 인적기나지 않을 때는 문도 열어보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리고 전에 여기를 찾아오군했던 물고기되거리꾼도 돌캐던 채석장이도 산열매따기꾼도 산장이도 모두 제 볼 일이나 보고 주는거나 받아가질 뿐 감히 더러운손짓은 하지 않았다.  박기섭이 비록 다리는 성하지 않지만 겉모양부터 호락호락하게 생기지를 않고 점잖으니 누구든 그를 허술히 보지 않고 행동거지를 례절바르게 가꾸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일이 발생하다니!.   《내가 정신없었지. 이제는 자물쇠를 사야겠구나.》    결코 태평가만 부를 세월이 아니였다. 로인은 자기가 이제야 우뢰소리듣고 문득 잠을 깬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박기섭이 여직 너무나도 무경각했던 자기를 속으로 한창 책망하고있는데 마침 마을에서 남병호가 왔다. 여기에 왔다간지 열하루만이다.   《로인님 그지간 무사하셨습니까?》    젊은이는 벙글거리며 문안하고나서 검은색인조가죽가방가방 쟉크를 열었다.   《로인님 부탁하시던 전지약을 사왔습니다. 그리구 신문도 빠짐없이 갖고왔구요.》    전번에 갈 때 사오라고 부탁한 물건외에 이번에도 술을 두병갖고왔거니와 깜빡잊어먹고 미처부탁도못했던 정통편까지 1000여알사와서 로인은 더 고맙고 감사했다.   《거 다음번에는말이네 날 자믈쇠 하날 사다주게.》    로인은 젊은이가 갖고온 신문을 읽으려다말고 말을 꺼냈다.    남병호는 대방의 안색이 어딘가 흐려있음을 보아내고 물었다.   《아니 갑자기 자믈쇠는 왜서요? 여기야 문잠그는 법 모르구사는 고장이라면서두?》   《이제부터는 아닐세.》   《이제부터는 아니라니요? 그러니 내없는연에 도적이라도 들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네. 어느 불청객이 와갖고 기분잡칠노릇했네.》    로인은 그한테 머루따러갔다오는 사이에 고기뀀이 읺어진 일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참 깜빡잊었다면서 따온 머루를 먹으라내놓으면서 도적이 어떤녀석인지 모르겠다고 말꼬리를 붙였다.    남병호가 그 말을 듣고보니 문득 생각나는바가 있어서 먹자고 입가로 가져갔던 머루송이를 도루내렸다.   《근식이는 왜 여게왔더랬습니까?》   《근식이라니! 그게 누군가?》   《누구겠습니까, 지금 현에 가있는 근식이지요. 장용팔의 아들을 모릅니까?》   《장용팔의 아들이라?…현에 가있다지?…그럼 그게 장용팔의 둘째아들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지요. 그가 지금 거기가 무슨 건축회살 하나 꾸렸는데 들을라니 돈을 대단히 잘번답디다.》    박기섭의 눈에 어깨가 딱바라지고 철색의 얼굴에 늘 상고머리를 해갖고 다니던 한 사내의 몰골이 밟혀왔다. 잊어지지 않는다. 동란이 한창심하던 때 그는 중학생반란퇀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헤덤벼치던 맹장ㅡ깡패였던 것이다. 박기섭이 향내를 한바퀴 조리돌림하며 투쟁받고나자 그가 학생반란퇀을 대표해갖고와서《계급원쑤》를 현에까지 끌고가 투쟁했던 것이다.   《아니 그자식이 그래 여기루왔더랬나?》   《로인님은 그래 모릅니까, 오토바이뒤에다 웬 사람을 태우고가던데요. 나는 오다가 마주쳤습니다. 그네들이 여길내놓구서는 어디메루왔다가 가갔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로인님!》   《음-도적은 그놈들이였구나!》    로인은 굳어진 얼굴에 노기를 피여올렸다.    점심때가 됐으니 배속에 넣을 것을 넣어야했다. 그래서 남병호는 박로인먼저 서둘러 우머르천을 타고 늪저켠에 가 로인이 새로만든 싸리통발을 털어왔다.   전번과 꼭같은 물고기요리 두가지가 제꺽만들어졌다. 이번의것은 남병호의 솜씨였다.   《요즘은 어떤가? 거 모두들 출국수속하느라 밀어넣구는 가지두못하구 떼운 돈은 그래 찾기나했는가.》   《못찾았습니다. 어떻게 찾습니까.〈보안〉은 해놓았답디다.》   《그놈을 붙잡아야될텐데.》    어쩐지 남의일로만돼보이지를 않았다. 제 동포가 아닌가. 어쩌면 이렇게 되어가고있는가. 할빈어디서 산다는 사람이 사업고찰단을 조직한다 한국가고푼 사람은 기회를 놓지지말고 자보하라 보증코되니 믿으라면서 인당 예약금 2만원씩 열사람치 20만원이나 제꺽챙겨갖고 어디론가 내뺀것이다. 사기꾼한테 속지말라고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그토록 강조했건만 왜 아직도 눈을 펀히 뜨고 그꼴로 당하기만하는지?…로인은 가슴터질 일이라면서 한탄을 뽑았다.    이백여호되는 동네가 외국나들이바람에 한창 두부장끓듯이 끓고 있었다. 로씨야에 간다 리비야에 간다 한국에 간다…이미 가서 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 가자는 사람도 있다. 이 마을도 외현의 여느고장과 마찬가지로 가는 도경이 여러갈래였다. 친척방문으로 가는 사람, 로무로 가는 사람, 연수이름으로 가는 사람, 고찰단에 들어 가는 사람…헌데 진짜는 적고 거의가 가짜였다. 수속이 그렇게 엄함에도불구하고 지난해의 봄을 이어 올년초에도 젊은녀성 둘이 제 남편과 가짜리혼하고는 생면부지의 한국사내를 따라갔다. 하나는 경상도집며느리 봉금이고 다른하나는 남병호의 각시였다. 그런모양으로 가서 만들어낸 비극이 그래 적은가?   《간 사람한테서 요즘은 소식있는가?》   《이천원들이고 전화를 가설했습니다. 제때에 소식알려구요.》   《그래 통화를 해봤는가?》   《저쪽에서 받는 사람은 있는데 본인이 자리를 옮겨 지금 거기에 없다는 답이 왔습니다.》    《그러니 자기사람하구는 말을 못해봤다 그건가?》    《예 아직은 그렇습니다. 이제 소식오겠지요. 제 딸이 보고싶어서도 오래못견딜겁니다.》    《뉘집의 가정보모로 들어갔다했지?》    《예. 건너가자부터 하는 일이 그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가 무슨일을 하는지.... 딸보고싶어서도 이제 소식보내겠지요, 않그렇습니까.》     젊은이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하는 말이였다.    《농사는 잘되여가고있는가?》    《약을 제때 쳐주지 않았더니 벼가 도열이 숱해갔습니다. 》    《저런! 일곱짐논도 제대로 다루지못하다니? 그렇다면야 올해는 페농이 아닌가!》    《그깟거 먹을알도 없는 농산데요 뭐.》    《먹을알도없는 농사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은 가졌는가?》     늙은이는 제 각시를 보내놓고는 안착해서 농사도 제대로짓지 않고 들떠지내는 그가 낯선사람같아 다시쳐다보았다.                                          4        해맑던 하늘에 갑자기 비를 머금은 매지구름이 떠돌고있다.    남병호가 돌아가자 사흘만에 향정부에서 사람 둘이 박기섭로인을 위문하러왔다. 하나는 면목이 아리숭한 한족젊은이고 하나는 향에서 토지를 관리하는 성이 김씨인 조선족 중년사나이였다. 그 둘은 자그마하고 고요한 늪을 품고 있는 수려한 산색에 심취하면서 피서하기 좋은 여기가 휴양지로는 과연 들고났다고 감탄사를 올리기도하고 왜 여직 이런데가있는것도 몰랐을가하기도했다. 헌데 그들이 노는 거지를 보니 말이 위문이지 속은 딴판이였다.    《로인님 그사이 잘 지냈습니까?》    동포사나이가 로인을 찾아 하는 첫 인사였다.    《덕분에 잘있네. 건데 이 사람은 누구요?》    《모르는모양이구만요, 올년초에 새로올라온 부향장인데요.》    로인이 아 그런가고 인사를 차리려는데 저쪽이 대방을 눈빗질해보다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차림했다.    《왕덕보입니다. 늦게뵈여서 참 미안합니다. 응당 진작와봤어야할건데 몸뺄새가 없어서 인제야 이렇게…》    《미안해할거있소 향장분이 나같은 령감을 잊지 않고 먼길도 마다하구 왕림해주셨는데..... 외려 내가 송구스럽구만.》    김씨가 이켠이 말을 끝맺기바쁘게 얼굴에 웃음을 바르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로인님은 아직두 건재하시군요. 무병하다니 우리도 정말기쁨니다.》    《그런가. 감사하네.》    로인이 만면에 희색이 피자 부향장이 입을 다시열었다.    《그런데 로인님, 로인님은 이젠 년세가 적잖은데 그러다가…지금은 무병한 것 같지만 모릅니다. 혼자 그냥 이런 산지에 있지말고 이젠 벌방에 나가지내는게 어떻습니까.》    《날 여기서 가라는말인가?》    《현에 양로원있는데 거길가면 곁에서 돌봐줄사람이 있지요.》    《그건 나도아네. 그래 날 부양 할 사람 없는것같아서 념려되는가. 있네, 있어. 심양에 내 조카 하나있구 북경에두 하나있네.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구하네. 둘다 여기루 왔더랬지. 심양조카는 지난겨울에 왔다갔구 북경조카는 올봄에 왔다갔지.》    《아 그랬습니까. 그럼 따라가실거지 왜 가지않았습니까?.》    《왜 가지않았는가말이지. 그건 내가 여기서 혼자래두 그냥살고싶어서였지.》    《성미두 참 별낳네. 그래서야되겠습니까. 조카들이 자원해 모시겠다면야 거기루가야합니다. 가시오.》    《안가겠네.》    《안가서됩니까. 가시오.》    《왜 이러는가. 가고 안가는거야 내 일이 아닌가.》    《물론그렇기도하지만 충고하니 로인님은 노여워말고 꼭 들어야합니다.》    《내가 당신의 충고를 꼭 들어야 한다? 대체 무슨 리유에?》    로인의 안색이 좋지 않게 돌변하는 것을 보고 김씨가 왕가먼저 입을 열어 해석조로 알려주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여기를 이젠 우리가 써야겠기에.》    《여기를 쓰겠다? 무슨말인지? 》    《정말입니다. 써야합니다.》    《아니 뭐라? 향에 그래 부쳐먹을 땅없어 나더러 여기를 내놓으라는건가. 보다싶이 여긴 산골이구 있다는건 늪뿐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구온게 아닙니다.》    《그럼? 내가있는 여기 땅속에 꼭 캐내야 할 보배라도 있다는건가. 과연 그렇다면 난 지금이라도 두말않고 떠나겠네.》    《그런게아닙니다. 사실은…》    《사실은 어떻다는건가?》    《향에서 여길 더러 팔아버리자구그럽니다. 늪하고 산 얼마가량을요.》    느닷없이 닥쳐든 골치거리였다. 남의 보금자리를 빼았자고들다니. 심기사 단통 뒤틀린 박기섭은 찌무룩해서 보다가 화가 솟아 토라진 음성으로 캐물었다.    《무슨소린지. 그래 누구한테 뭘 하느라구 팔자는건가?》    《저…잠시 그건 말못하겠습니다.》    《잠시 말못하겠다? 좋아. 그럼 말하지말게. 그런데 자넨 저 늪의 소유권이 누구한테있다는거나 알구와서 이러는가?》    로인이 감사납게 심사를 부리니 김씨는 두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인데. 원래의 주인이 떠나면서 로인한테 넙겨주었으니 지금 소유권이야 물론 박로인께 있지요. 우리도 무리하게 내놓라는게 아닙니다. 늪면적만한 땅을 떼어드리거나 아니면 늪을 돈으로 값을 쳐 드리면안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야 박로인은 리익보면 보지 손해는 절대안볼겝니다.》    《내가 그런걸 따질 사람인가. 돈이 아니라 금덩이를 준대두 난 싫네.》    박기섭은 괘괘떼면서 청간을 퇴박놓고는 두사람 다 두말다시 번지지 못하게 입을 막아보냈다.    향간부 둘은 돌아갈 때 이제 곧 다시오리라 했다. 한데 그리고 간 사람들이 한달이 지나도록 다시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느라니 어느덧 추석이 돌아왔다.    하늘높이 비구름이 깔렸다.    이날 아침 일찌기 남병호가 전에 늘 타고다니던 자전거를 타지 않고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새것이였는데 외국제였다.    박령감이 물었다.   《제건가?》    그것을 신나게 타고온 남병호는 벙글거리며 대답했다.   《예. 제거아니구 남의거겠나요. 하나샀습니다.》    박령감은 담통 큰 자식이 멋이 좋구나 하는 눈매로 그를 피끗훝고나서 차체에 한자(漢字)로《飛燕》이라 씌여있은 것을  보고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비연패라!》   《예. 비연패입니다. 한국제지요.》   《값이 얼만데?》   《이만원입니다.》   《뭐! 이만원이라?》    값이 기껏해야 몇천원일줄로 알았는데 입이 딱 벌어질지경 인지라 박령감은 일시 멍해졌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 돈 안주고야 어떻게 이런걸 만지기나한다구요.〈혼다〉는 한 대에 만원 더 붙어 삼만원인걸요.》    산품자랑인가 값자랑인가? 박기섭은 자전거를 타고서도 얼마든 다니는 시골길에 값비싼 오토바이를 타고 멋부리는 젊은이의 소행이 순간 한심하게만 보일 뿐이다.    전화를 놓고서도 저쪽에서 련락이 없어 취향이 오리무중이여 속을 은근히 태웠던 남병호는 요즘 뜻밖에 또 안해가 부친 돈 2,000딸라를 받았다. 요즘 딸라와 인민페교환시세가 8,2밖에 안되니 그 돈만 갖고는 20,000원짜리 물건을 살수도 없는거다. 남병 호는 부족분은 남한테 꾸어서 보태갖고 그것을 샀던 것이다.    《이제 또 벌어서 붙이겠는걸요 뭐.》     박기섭은 그사이 값비싼 외국제오토바이를 사갖고 그것을 모는 재간을 배우느라 그슬러그런지 아니면 부러 자랑하느라 여기저기를 싸다녀서 그런지 전만 더 감숭감숭해진 젊은이의 얼굴을 다시보며 물었다.    《애의 엄마는 그래 지금 어디에 가 있다는가?》    《서울시 서북구 어디라구 돈깍지에 썼습디다. 》    《전화나 편지로 말은 없구?》    《없습니다. 아무튼 돈을 부치니 됐습니다. 아무렴…》    《그래두 그게 어떻게 무슨일을 해서 번 돈인지는 알구서 써야할게 아닌가.》    《전번같이 또 어느집 보모노릇하거나 아니면 거기 어느 식당에 들어가있겠지요, 뭐.》    《식당일도 여러 가지야. 거긴 말루는 식당이라지만 술집인거  많아 그런데를 들어가서 접대원아가씨노릇이나 작부노릇할지두 모르잖아. 내놓구 사내들의 돈빨아내느라 허리춤푸는 요리간두 아주많다던데.》    《요리간은 몰라두 술집이야 여기두 쌔쿠버리지 않은가요.》    《그래두 환경이야 여기완 판다르지. 사회제도가 달라 거기서는 개방이 돼도 여기서는 안되고 금하는게 있어.》    박기섭은 외국에서는 허락이 되고있는 성자유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비록 나이 많아 늙기는했어도 직감력은 무디지 않고 살아있는 그였다. 리혼했으면 이젠 남이지 뭔가. 뼈마디에 피가 한동이씩 고인 녀석이 제힘갖고 살아가지두못할주제면야 아예 뒤여지기나할거지 분에 없는 향락을 남처럼누려보겠다고 지지 아기자기살다가 불쪽에 달린 제 장기는 쓰지도못하고 가두어 넣고 썩히면서 고운 각시를 생면부지의 한국남자에게 주어 따라보내다니! 애초에 그렇게 해서 돈벌어보자고 타산한것부터가 원체 틀려먹은 한심한 노릇같아 로인은 한마디 일깨워주었다.     《사람의 마음은 바위에 새겨놓은 글이 아니야. 자넨 제 각시가 마음변하지 않을거라구 어떻게 장담을 하는가. 돈보낸다구 그저 시름놓지 말구 어디서 무슨일을 하고있는지를 알아보라구. 면목아는 사람 거기가있는게 여럿된다했지.》    《사인정탐을 내놓으란 말씀인가요. 그렇게 하면 부부지간에 감정이나 상하게 만들지 않을가요. 우리는 정말 가짜리혼을 했습니다. 전 그가 이제 돈 다 벌구는 꼭 돌아오리라믿습니다. 약속을 그렇게 단단히 하고 갔으니까요.》    《그런가. 녀인이 마음 정말 철과 같다면 어디 그렇게 믿어보라구. 늙은 것이 젊은이가 들기좋아하지 않는 말을 곱씹으면 로망으로 보일거니 더 말치않겠네.》    남병호의 귀에는 그의 충고가 과연 쓸데없는 소리로들렸다. 그는 로인한테서 낚시를 달라해서 그걸갖고 시르맨커뒤의 물후미에 가 점심먹을 념도 하지 않고 한나절 혼자서 낚시질만했다.    오후가 되자 날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습기를 머금은 강바람이 북쪽골을 타고 불어왔고 찌프린 하늘밑으로는 해묵은 솜같은 구름장이 몰려다녔다.    《에구, 이거! 빨리 집에나가야겠구나!》    온갖잡념에 몰려 시간가는줄을 모르고있던 남병호는 인제야 정신을 벌떡차리면서 고기잡이도구들을 급급히 거두었다.    《아니, 날이 저무는데 가자구그러는가. 집에 가두 혼자아닌가. 날이 저문데 있게나.》    박령감의 권고였다.    홀아비신세에 이제는 학교를 다녀야 할 딸을 데리고 살아가자니 지겨운일이였다. 그래서 남병호는 학비와 식비를 대주기로 하고 이곱살먹은 딸애는 할빈에 있는 튼형님네 집에 보내여 거기서 학교를 다니게 하고 있다. 하니까 박로인의 말과같이 가봐야 혼자인 것이다. 이제 떠난다면 락자없이 가다가 중도에서 비를 맞을것이다. 그래서 남병호는 가지 않고 묵기로 작정했다.    날은 스산했다. 두 사람은 어둑시그레한 집안에 앉아 바람에 흩날리면서 소란스레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면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지리한 장밤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둘다 일찍부터 드러누워 잠충이같이 잠만잘수는 없었다. 이럴때는 말주머니를 풀어놓는게 상책이였다. 꺼내놓고 할 수 있는 화제거리는 많고많았다. 박기섭은 젊은이의 기분을 잡치우지 않으려고 한국과 거기로 간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더는 입밖에 내놓고 운운하지 않았다. 신문을 보거나 방송을 듣거나 떠도는 풍설만들어도 근년들어 외국에 벌이를 나갔다가는 돌아오지도못하고 잘못된 사람이 적잖았다. 이를테면 어느 신문사의《하해》한 기자가 로씨야에 장사를 갔다가 돈도얼마못벌고 사소한 오해로 인해 마찰이 생겨 그곳의 폭력조직인《마피아》의 손에 살해되여 묶이운채 종이곽속에 들어 쓰레기장에 처밖혀있다가 경찰들에 의하여 발견된 일이며 아재비조카가 거기의《얼모즈》와 짜고 벌이를 나간 제 마을사람들을 털어먹은 일이며 로무로 한국의 원양어로선에 오른 사람이 거기의 뱃놈과 등지고 지낸탓으로 리유불명하게 바다에 떨어져 목숨을 잃은일이며 리비야에 차몰이를 갔다가 정체모를 악당손에 차를 빼앗기우고 목숨까지 빼앗긴일이며…이런것들다가 다시씹어보면서 사고해볼만한 이야기였다.    긴 한담 끝에 남병호가 지금의 자기태도를 설토했다.   《솔직히 말해 전 그래서 지금두 외국에는 돈벌이를 나가고싶은 맘없습니다. 벌어도 안전하게 벌어야지요.》   《그러면 돈벌이를 어디에는 갈수있다는말인가?》   《심수에 가고십습니다. 듣자니 거기는 우리 동포가 가는 교회가 둘있는데 어려운 사람 밥먹여주고 일자리알선도한답디다.》   《그게 어느때의 일인가. 전에는 그랬다는 신문글을 내가 본것같네. 거기에다 밝혔더군 수천명이 맹목적으로 몰려드니 그네들도 받아당하기 힘든형편이라구.》   《그렇다구합디다. 그래서 전 아무리 가고싶어도 거기는 가지 말아야겠습니다. 》    남병호의 결졍이다.    로인이 흥미를 가지면서 캐듯 물었다.   《외국에는 안전이 념려돼서 못가구 심수에는 일자리찾기힘들어서 못가구 그럼 어디루 가기싶은가?》   《북경에 가기싶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사람들이 들어와서 꾸리는 기업이 숱하답니다. 》   《한국기업이야 어덴들없겠나. 산동성 하나에만도 천여개나 된다잖어. 거기 청도나 위해로도 갈수있겠는데 왜 하필 발불이기 제일어렵다고들하는 북경에는 가려는가?》   《거기는 다르지요. 나가서 생활할바에야 차라리 수도가 낫지요. 나라의 지도자들을 볼수도 있구 외국사람두 자주볼수있구… 아무튼 그 어디보담도 볼거리많아 식견도 자연히 더 넓어질것만은 사실이 아닙니까. 안그렇습니까?》   《허허허…》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서 로인은 웃기만했다.    솔직히 말해 일은 하기 싫고 돈은 쓰기싶고 나가벌자니 능력은 없고 그래서 머리통박을 굴려가면서 기껏생각을 했다는 것이 , 궁여일책(窮餘一策)이라는 것이 제 녀편네를 한국에 시집보내는것이였다. 리혼했으면 리혼이지 가짜라는게 뭔가. 법은 그런 사정을 보아주지않는 것이다.    박기섭은 자기를 존중하고 믿어주면서 가까이 접근하는기간에 어느덧 친근한사이로 되여가고있는 이 젊은이가 초중공부까지해서 판무식은 면했지만 허우대뿐 정신은 만신창이니 바보나답지 않은 안타까운 인간존재임을 오늘에야 똑똑히 알게되였다.   《우후ㅡ우후ㅡ》    비는 점점 그쳐가고 어디선가 칡부엉이 운다.     두사람은 장밤 애기하나니 늦잠이 들었다.    
29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댓글:  조회:3552  추천:1  2013-08-30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1959년, 기아가 사천성에 만연될 때 26세의 나이였던 주전삼(朱全森)은 원달현전구 비묘향 중심교교사 (原达县专区碑庙乡中心校教师)였는데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적인 자산계급우파분자였다. 수십년 후 그는 세권의《达州市志》편찬공작을 맡고 대약진 등 그 세월의 각골명심(刻骨铭心)의 정치운동에 대해서 실사구시적으로 밝혀냈다.  (来源:南方都市报)   아래것은 그가 쓴 의 부분적인 글이다. 주전삼은 말했다. “3년재해기간에 달현전구에서는 볓십차례나 사람을 먹는 안건이 발생했는데 지금도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사람을 먹은것이 그 한곳뿐이 아니였다. 그런일이 재해지구에서는 거의다 발생했던 것이다.” 주전삼의 그 말들은 과연 틀리지 않는다. 전에는 탄압을 받을까봐 무서워 감히 말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하나하나 비밀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있다. 류소기부인 왕광미(王光美)와 류원(刘源) 등 사람이 쓴 (河南人民出版社2000年版)에 보면 류소기는 “7천명대회”때 이미 모택동과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사람이 이같이 많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를 기록해놓을것이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있는데 그래 고발이 올라오지 않을수있는가.”   《달주시지(达州市志)》는 1959년~1961년사이 달현전구에서 련속삼년간이나 가물이 들었다면서 그 가물이 1959년 6월 30일부터 시작해서 달현、선한 등지에 련속 49~67일이나 지속됐고 1960년에는 각현에 가뭄이 보편적으로 20일~47일이나 지속됐노라고 밝히였다. 1961년여름에는 중남부에 가뭄이 들었는데(54일간)그로인하여 련3년간 량식이 감산을 하게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전삼은 그것이 순전한 “인화(人祸)”였다고 밝히였다. 한편 그러고는 그래도 물은 있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이였더면 사람이 굶어죽을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것이라면서 원인은 촌마다 강철을 제련하는데 동원되다보니 곡식을 다 지어놓고서도 가을철에 그것을 제때에 걷어들이지 못해 밭에서 그저 썩어버리게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밝혀놓았다. 문제는 에 밝힌것과 같이 그것이 전적으로 1958년 5월에 중공8대 2차회의에서 “열의를 다내여 앞장서기에 힘쓰며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총로선을 내와서 “대약진”을 일으킨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총로선, 대약진에 뒤를 이은 인민공사화를 덛붙여 이른바의 세폭의 붉은기라했는데 그것은 아시당초 만들지도 높이들지도말았어야 했을 것이였다. 아무러한 경제적인 기초도 없이 경험도 없이 더구나 능력도 없이 공산주의에 빨리뛰여든다고 떠따고운것은 순전히 국가발전규률을 무시한 맹용(猛勇)에 불과한 무모한 짓이였던 것이다. 무슨필요가 있었던가? 그것은 그 어떠한 창조도 변혁도 력사적의의도 전혀없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중국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속심말도 감히하지 못했다. 대약진전에 ‘정풍운동’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기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중앙에서 하달하는 지시라면 옳건 그르건 무조건 집행해야했다. 그리하여 기층간부들은 어떻게 했으면좋을지 몰라서 쩔쩔맸다.”   “세폭의 붉은기를 좋다고만해야지 나쁘다했다가는 끝장을 보고마는 것이다.” 이것은 주전삼(朱全森) 그 한사람만의 말이 아니였던 것이다. 민중에 대한 그같은 탄압과 통제는 오로지 상층의 무능한 폭압을 과시했을 뿐 그것을 그 이상의 어떤 유용한 명책(明策)이였다고 할수있는 근거라고는 지금까지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다.   중앙의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아 증구량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엄한 책벌이 내렸다. 하여 그것이 무서워 아래에다 중앙의 지시를 그대로 내리먹인 자의 두손에는 많은 혈채가 묻게되였던 것이다. 그 집행자의 운명은 또 어떠했는가? “1961년, 정책이 좀 돌아져 달현은 기층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체현된 것인데 그것인즉 곧바로 ‘군벌작풍반대운동’이였다. 하여 어떤 사람은 애써 사업하고도 나중에는 비판투쟁을 받은것이다.”라고 하면서 주전삼(朱全森)은 달현 안운공사 쌍하구촌지부서기 정도복(郑道福)의 죽음을 례로 들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였는데  투쟁맞고는 속을 끝내풀지 못해서 현초대소변소에서 목을 매 죽고말았다.”   다음것은 지난해 5기에 난 문장인데 그것을 쓴사람은 최민(崔敏)이고 문장제목은 라는 것이다. 핵심제시(核心提示) “모택동이 내린 장편지시는 이러했다: 우경기회주의분자와 반당분자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주류가 무엇인지 전혀모른다. 그들은 하찮은 일(鸡毛蒜皮小事)을 쳐들고는 위대한 당과 위대한 인민의 사업을 창궐히 진공하니 대부등에 곁낫질하듯 가소롭기 짝없다. 요즘 우리는 많은 성, 시, 구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있는데 그것들은 다가 그릇된 기풍은 적어지고 정기가 오르고있다는 첩보다. 형세가 제일좋은데는 귀주다.”         과연그렇단말인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때 벌써 기황은 광활한 중국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굶어죽는 현상이 가장엄중한 곳은 사천, 하남, 안휘, 감숙, 귀주, 청해, 하북, 산동, 호남, 광서 등 성과 구였는데 예로부터 곡창이라 불리웠던 강소, 절강, 광동 등 성들도 마찬가지로 적잖은 사람이 굶어죽은 것이다. 아사(餓死)현상이 그같이 엄중했건만도  모택동은 정신을 차릴념은 하지 않고 현실반영을 우파의 악의적인 공격으로만 치부했거니와 무자비한 탄압수단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게 그래 지모쏸피(鸡毛蒜皮小事)란 말인가? “귀주성에 굶어죽은 사람이 제일많았다. 가장엄중한 시기는 1959부터 1960년 5월사이였다.... 미담현(湄潭縣)은 지형이 평탄하고 경치가 수려하거니와 귀주의 곡창이라 불렀다. 백성들이 전에는 풍의족식했다. 그러나 ‘대약진’이후부터 이곳의 백성들은 엄중한 재난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위판공실책임자가 소개하는 것을 보면 1958년에 전현의 인구가 62만이던것이 1959년부터 1960년 5월사이 정상적인 사망 1만명외에 비정기적인 사망이 12.5만명이나되여 전현총인구의 20.16%에 달했다. 남은 사람이 49만인데 전현적으로 전멸된 가정이 3001호나 되고 5000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그 외에 외지로 도망친것이 5000명도 넘는다. 전현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지고있다.....정황을 료해하느라 안락공사(安洛公社) 안락대대에 갔다. 그 대대는 모두 29호에 인구가 150명이라는데 가보니 몽땅 굶어죽고 산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금사현(金沙縣)은 실지 8만명이나 굶어죽었건만 조광옥(趙廣玉)은 숫자를 썩 줄이여 4.7만명이 굶어죽었다고 말한것도 죄가 되어 붙들려가 판결받아 8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1961년 3월 12일에 그 사(社)에 와있었던 공작대가 철거하게되자 나는 다른 두사람과 함께 남아서 뒷처리를 했다. 3월 20일, 우리 셋은 현에서 개최하는 정풍에 참가하느라 남개공사(南開公社)를 지나게되였다. 도중 산을 넘고보니 목이 마른지라 물을 먹으려고 길가에 있는 한 농가에 갓더니 거기서 40대의 부녀가 마당에 앉아 채도자(菜刀子)로 어린애의 시체를 찍고 있는것이였다. 이미 팔과 다리각이 떨어졌고 잘라낸 머리는 한켠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각을 뜯고있었는데 보기끔찍했다. 내가 왜서 아이는 죽였는가고 물었더니 녀인은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죽인게아니요, 애가 아침에 굶어죽었어요. 온집사람 다 굶어죽는판인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했다. 그러면서 ‘저 독한 사람이 제새끼를 먹자구해요!’ 하면서 남편을 저주하는 것이였다.....그것말고도 이 마을에는 사람이 죽으면 먹어버리는 일이 벌써 여러번발생했다고 한다..... 나는 1961년5월에 그곳을 떠났는데 전 수성현(水城縣)에 굶어죽은것이 8만명이나 된다.“   등자력(邓自力ㅡ1920—2010)은 사천광안(四川广安)사람인데 193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공작을 했다. 혁명전쟁년대에 그는 섬감녕변구 류수병탄사령부의 정치교원, 연안대학체육지도대지도원, 사회과학원연구실간사, 359려민운고고장, 2야전군민운과과장, 하남로남현현위위원, 사평현위부서기, 호북통성현현장을 지내다가 새중국이 건립되여서는 천남행서합강현위서기,사천성총공회부주석을 거쳐 성문화국국장, 당조서기 등 여러직무를 맡았었고 사천성정협과 인대부주임을 지내다가 3년전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3년재해기간에 사천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면서 자기는 사람고기를 먹은 사람을 제눈으로 직접보기까지했노라했다. “ 기황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했다. 그래서 끝내는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고 그것을 파는 현상까지 발생한 것이다. 의빈시에서는 어린애를 얼려 제집에 데려다가는 죽여 삶아먹었거니와 그후부터는 죽여 삶아서는 토끼고기라 속혀 팔아먹기까지 했다. 사람고기를 먹으면 부증(浮症)을 고친다는 소문이 나돌아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은 사람고기를 찾느라헤맷다. 전국이 식량난에 몰려 아사지경에 이르었건만 그 누구나 감히 입밖에 말을 내지못했다.” 그가 한 말이다.     서방의 어느 한 인사가 중국의 그시기의 력사진상을 언녕밝혀냈다. 그러니 관방에서는 서방의 그 인사는 고의적으로 중국을 모욕하느라 “중국에서는 재황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참상이 생겼다.”고 요언을 날조했다면서 질책했다. 그것이 어쩌면 날조였단말인가?    “1961년3월,흐루쇼브는 우리 나라에 대해 태도를 표시했는데 그것인즉은 대부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에다 밀 100백만톤과 들여온 큐바사탕 50만톤을 공급해줄수있다는 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제2선으로 물러나 사업을 하지 않고 광주에에 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대한 문제는 간섭했다. 주은래, 등소평, 팽진 등은 비행기를 타고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소리를 듣자 단마디로 량식은 싫다 사탕은 받을수 있다면서 남이 던져주는 턱찌끼는 받아먹지 않는다고했다.” (楊尙昆日記) 양상곤이 일기에 쓴것같이 모택동은 자력갱생의지가 과연 견강한것 같아보인다. 그런데 그따위배짱이 도대체 무슨소용이 있단말인가? 큐바사탕이 그래 중국의 아사(餓死)를 해결했던가?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할줄을 아는 부모래야 부모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000만이 넘는 백성의 생명으로 제 패기(覇氣)를 바꾼것밖에 뭐가있는가?!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래 鸡毛蒜皮没小事이란말인가?.....봉건독재자의 랭혹하고도 잔인함 !  
28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댓글:  조회:3188  추천:0  2013-08-30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전에는 옛말에서나 들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세계가 차츰 글로벌화되면서 좀이라도 컴퓨터를 다룰줄을 알면 모르던 세상일을 많이알수 있게되는것이 오늘의 실태다. 정보가 열리여 연줄이 사통발달했다. 보아하니 그래서 이 세상에 아마도 영원히 감춰질 비밀이란 있을것 같지 않다.   문화대혁명(1966년5월16일~1976년10월)이 끝난지도 어언 37년철이 되건만 그 후유증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고있다.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보거나 인터넷을 보면 그때를 회억하고 의론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내가보건대도 그것은 공연히 묵은장부를 뒤집고 되씹는 무료한 짓거리는 아닌것 것 같다. 그당시 광활한 중국땅 각처에서 불상사(不祥事)들이 너무도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바다. 한데 헤아릴 수 없는 그 많고많은 원안(怨案)들 중 여지껏 그 발생원인이 해명되지 않은것, 특히는 인명과 관계되는것들, 이를테면 자살(自殺)이든 타살(打殺)이든 멸족(滅族)이든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않될것들이 많고도 많은 것이다. 이게몇핸가? 문화혁명이 끝난지 오랬어도 꼭마치 뒤를 보고 씻을것을 씻지 않은것 처럼 뒷처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적잖은 문제가 의연히 생기여 꼬리를 물고있다. 하긴 력사의 장하에 비기면 물방울에 불과하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결코 등한히 지내버릴 일이 아닌것이다. 늦기는 해도 지금이라도 밝힐건 밝혀야한다.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는 아무때건 풀이되여야 개운한 것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란 순 유토피아를 꿈꿧던 로망한 독재자의 도용물(盜用物)이였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지? 그어떤 위대한 장거가 아니였다. 그것은 온 나라를 인위적으로 혼란에 빠뜨림으로 하여 하마터면 세상에 천년문명고국(千年文明古國)이라 자랑해온 강산을 망하게할번했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 조작자는 이제 아무 때던 력사의 심판을 철저히 받고말것이다!   장마비에 미친개날뛰는 격이였다. 그때는 자기야말로 위대한분에게 가장 충성하는 “보위자”인양, 무산계급의 철저한 “혁명자”인양 분장하여 나서서 보복적인 분풀에 혈안이 되여 날뛴 악한이 너무나많고도 많않았던 것이다. 뒤에서 철부지 “홍위병”들을 추기고...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어떤 학자는 지난때의 문화혁명을 “애들의 장난” “악한들의 보복놀음”였다고 총괄해 말하기까지 했다. 문자그로 문화적인 혁명이 되지 못하고 야만스런 놀음과 보복이 되고만 그것을 “전대미문의 생사람잡이 혁명”이였다고 평론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기 의도와 좀만 맞지 않아도 배척하면서 펀펀한 사람에게도 죄를 만들 씌워서는 전정대상으로 몰아 목에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 우롱하고 지어는 죽게까지 만들었다. 이 세상에 원귀(寃鬼)가 많아진건 바로 그때문이다. 보복자의 살기가 충천하면서 너울쳤던 그 세월에 어떤곳서는 지어 “사류분자”, “오류분자”하면 아예 멸족까지 시키는 잔인무도한 학살마저 주저없이 감행되였다는것은 이미 들어난 사실인데 온 세상사람이 다 알아야 한다.    한때 당장 공산주의로 돌입한다면서 야만의 짓을 했던 캄보쟈ㅡ 크메르루즈(紅色高棉)를 내놓고는 이 세상에  그런 야만이 더는없는줄로 알았었는데 지내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가 태여나 자란 여기 중국이였다!  협오가 괴여오른다.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하고 내내 불신을 하고 미심쩍어 했던것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해명이 되고있는 것이다. 나는 인민의 복지를 만든다는 사회주의제도하에서야 아무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야 발생했으랴 했는데 오늘에 이르어 알고보니 전혀 그런것이 아니였다. 아직껏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채 점철된 죄악의 사사건건들이 감춰진것이 너무도 많고많다는것을 근년들어서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앞에 쓴 에세이에 처럼 현대식인종으로 살아온 인간이 아직 얼마더있을지...    우리 나라가 왜 그모양 그꼴이였던가? 생각하면 낯이 뜨거운일이라 시야를 돌려 국경너머를 보니 “식인종”의 행실이 결코 우리 중국에서만 생긴건 아니였다. 다른 어느 나라에건 거의 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이 생기게 된 원인과 그 정도는 판달랐고 포악과 잔인의 정도역시 다른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찾아낸 결론이라면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식인사건도 중국에 비하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2002년12월12일,독일의 에 “식인광대작면포권”이라는 모골이 송연한 참안을 보도한바있다. 46살에 나는 아민메이Weisi는 동성련애자였다. 경찰에서는 1997년에 그가 벌써 사람 하나를 먹은것을 알게되였다. 교외에 있는 그의 집 랭장고에서 살점과 사람의 뼈를 조사해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진에서 벌어진 그 “식인광”안건은 그당시 온 독일을 들썽케했다고 한다.   어느땐가 하버드대학에서 사람이 사삼의 고기를 먹는 안건을 놓고 공개적인 변론을 한적이 있는데 강사의 전달에 학생들의 반영은 대단해서 들끓었다고 한다.  안건은 이러했다.  호주를 떠난 “제미요”배가 항행중에 침몰하게 되였는데 선장 더들리, 항해사 스티븐, 선원 브룩스와  17살나는 웨이터 이렇게 넷이 요행살아났던 것이다. 바다에서 한주일이나 표류하다보니 먹을것이 다 떨어졌다. 웨이터는 다른사람의 권념도 듣지 않고 바닷물을 먹어 몸이 형편없이 허약해졌다. 이때 선장이 말하기를 한사람은 죽어야 남은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항해사 스티븐이 반대해나섯기에 결정짓지 못했다. 또 하루지났다. 선장은 항해사가 머리를 저쪽으로 돌려 정신을 딴곳에다 파는 사이 선원 부룩스에게 눈짓하여 웨이터를 죽이게 했다. 물론 선장은 사전에 웨이터를 위해서 기도를 올린 것이다. 항해사는 잔인한 살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살기위해서는 웨이터의 고기를 먹는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들 셋은 다행히 구원되여 마침내 영국으로 가게되였다. 그러나 그들 셋은 다가 체포되고말았다. 살인죄로 기소되였던 것이다.  그들의 변명은 사람하나를 죽였기에 세사람의 목숨은 살려낼 수 있은게 아니야였다. 하지만 법원측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원인이야 어떻던간에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은 모살죄임에 분명하다면서 겨우살아온 그들 셋을 다 사형에 언도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서 개인의 리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도덕론에 드는 하나의 안건을 례로 든 것이다. 내가 만약 피고라면? 내가만약 법관이라면?... 나는 어떤태도를 가질것인가?   미국력사에서 있었던, 사람이 사람을 먹은 안건을 하나 더 알아보다.  전세기 40년대, 미국에서는 서부로 금캐러가는 이민이 붐을 이룬적이 있다. 지점은 캘리포니아였다. 황금몽을 품은 사람들이 사면팔방에서 그리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가 행운의 시기라고 여겼다. 하여 “만족할 때”라 명명한 대오가 형성될 지경 캘리포니아로 진군하는 무리가 형성된건데 그들의 장거리 려정이 기실은 “사망의 길”이기도했던 것이다.   1846년 여름의 어느날, 그들먼저 여러패의 인마가 벌써 포드브릿지에 모여  캘리포니아를 바라고 출발했던 것이다. 한편 이쪽의 “만족할 때”무리에서는 대장 헤이스팅스가 우선 길을 알아봐야겠다며 홀로 먼저떠난건데 그는 지름길을 택했던 것이다.   “만족할 때”대오의 사람들이 포드브릿지에 도착하고보니 만나야 할 사람 헤이스팅스는 언녕가버리고 거기에 없었다. 향도자(向道者)를 만나지 못하게 된 그들은 부득불 자체로 달리 방법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분은 전부터알려진 길을 따라 가고 일부는 헤이스팅스가 택한 지름길로 가기로했다. 그들은 모두해서 87명뿐이였는데 마차 23대를 보유하고있었다. 새로 선거된 대장은 이름이 조지맥도널드라는 중년의 사나이였다.     7월 31일,그들은 포드 브릿지를 떠나 머나먼 장도에 올랏다. 그런데 두주일되자 그 “만족할 때”의 대오는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이 유타바사산에 이르러 보니 산비탈이 몹시 가파롭거니와 너무험해서 마차를 넘기기 과연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등골에 땀을 흘려가면서 모지름을 쓴끝에 6일만에 60Km되는 험지를 끝내넘고야말았다.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그들은 가고가서 9월 30일에는 마침내 네바다주에 이르었던 것이다. 거기는 전부터 알려진 길들의 교합처였다.   그곳을 떠난 그들은 11월1일에 터내기호(후에 “만족할 때 호수”로 고침)에 이르었다. 터내기호는 해발 1800m인지라 10월인데도 벌써 눈꽃이 날리였다. 그달말이면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판이다. 하여 길을 재촉한건데 그들이 높이가 2200m에 이르는 산어구에 닿고보니 때는 이미늦다. 그들은 그곳의 맹렬한 폭풍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별방법없이 기나긴 엄동을 터내기호수가에 되돌아와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보다 더 험악한것은 식량이 다 떨어져 기아를 이겨내기 어려운 그것이였다. 사실은 그들이 터내기호로 되돌아오기전에 벌써 사신(死神)이 덮쳐들기시작했으니 “만족할 때”의  대오는 멸망에 직면한 것이다.   8월 29일,루크하 Luolan이 죽었다. 그는 페염에 걸렸던 것이다. 10월 5일,제임스리드가 자위를 하느라 그만 존 스니드를 죽였다. 3일후,루이스 키스버그가 차를 타지 못한채 뒤에 떨어진 베른쿠퍼라는 로인을 찾자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로인을 찾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로인은 대오를 따라오지 못했다. 아마 홀로헤매다가 죽어버렸을 것이다. 10월 13일이 지난후의 어느날, 그들을 따라오던 두 독일이민이 돈을 빼앗느라 짜고서 저희들과 함께오던 다른 한 독일사람을 죽이였다. 10월 20일,윌리엄파커가 총을 닦던 삼촌이 오발하는통에 그만죽었다.    그밖에 4명의 성원이 먹을것을 구하느라 대오를 떠나 SAT 시험포트에 갓다. 그중에서 찰스 스탠이란 사람이 10월 19일에 돌아왔는데 그는 과연 먹을것을 가져왔거니와 인디안인 둘까지 데리고왔다. 그러고보니 원래의 87명에서 남은 79명에다 인디안인 둘을 더 합쳐져 호수가에서 엄동을 지내게되였던 것이다. 기한을 정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나머지량식마저 다 먹어버리니 극도의 아사지경에 이른것이다. 하여 그들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길러온 개를 잡아 먹었고 나중에는 수레를 끌는 말들을 하나하나 잡아먹기시작햇다. 그러다가 더 잡아먹을것이 없게되니 짐승가죽과 담요를 삶아 묵을 만들어 먹었다.    10월 16일,24살나는 발리 윌리엄이 먼저 굶어죽었다. 그러자 같은날, 성원들중에서 신체가 가장 든든하다는 사람 15명이 어떻게 하나 먹을것을 구해와야겠다면서 엄한을 무릅쓰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났다. 남자열가운데 넷은 식솔이 있었다. 그리고 다섯은 녀성이였는데 그중 셋은 아이를 남기고 떠나온 것이다. 그들이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나온지 6일만에 기진맥진한 스탠튼이 14명을 그냥 앞으로 가라해놓고는 자기는 떨어져 고스란히 죽음의 신을 맞았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다. 떠나온지 열아흐레되니 남은 14명은 자연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을 화제에 올리게되였다. 그결과 그들은 누가 죽으면 누구를 먹어버리기로 결의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별수없었던 것이다. 한데 숨도채 거두기기전에....  23살의 홀몸인 앙투안이 비몽사몽간에 자기의 팔과 어째가 떨어져 불속에 들어가는것을 의식했던지 눈을 떳다감는것이였다. 그모양을 보면서도 누구도 그를 살리주려하지 않았다. 젊은 앙투안은 이렇게 죽고말았다. 이어서 프랭클린 Gelei푸, 그다음에는 패트릭고언, 그리고는 그를 이어서 르 사무엘머피... 산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살코기를 베여내여 불에 구워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제집사람과 친척만은 먹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시체를 그같이 다 먹어버린 후에는 낡은가죽신을 먹었다. 이듬해의 1월 5일에 23살난 르 사무엘머피가 죽었다. 포스터부인은 그의 시체를 먹어버렸다. 이어서 정신이상에 걸린 포스터선생이 인디안인 둘을 잡아먹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15명이던것이 이제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    33일간 세찬 눈보라를 뚫고 나온 나나머지 그 일곱사람은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이르러 백인정착지에 닿고야말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의 1월 31일에 첫패의 구원소조가 “만족할 때 호수”로 갔고 뒷이어 세 개소조가 그리로 구원하러 떠나갔다.   한데 그먼저 두달반사이 훨씬많은 사람들이 사신을 막아내지 못해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2월말에 이르러 호수가 캠프장(营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3월 13일, 윌리엄 포스터가 13명의 구원대원을 이끌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와보니 그사이 두아들은 키스 버그와 다른 사람 넷과  함께 다른데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어서 만나지도못했다. 하여 그는 게속 아들을 찾으러 떠났다. 한편 4월 17일,마지막구원조가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는 숨이 붙어있는것이 키스버그 한사람뿐 그 외는 다가 말라버린 시체였다. 키스버그는 자기가 다른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견결히 부인했다. 결국 "만족할 때"는 성원 87명중에서 죽은것이 40명뿐, 반수이상이 어쨌든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여기서 끝맺고, 아래의 두편은 이미공개된 우리 중국의 사천달주3년재해실기(四川达州三年灾害纪实)중의 단락이다.   1). 포양공사 팔관구 삼대(蒲阳公社八管区三队) 반소화(潘素华) 녀인은  당년에 나이 41살. 가정성분 지주. 본남편은 1951년도 일찍죽었다. 반소화(潘素华)는 군중개조를 피하느라 1952년도에 빈농 당전무(唐前武)와 결혼했다. 하지만 부부감정은 좋지 않았다. .....3월 16일 밤, 남편 당전무(唐前武)가 물에빠져죽었는데 그녀는 이틑날에야 관리구에 와서 관을 만들어 그를 이미파묻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밤 반소화(潘素华)는 슬픈것처럼 울더니 밤중에 채칼을 갈아갖고 가 모를 파헤치고는 남편의 사지를 뜯어내고 살고기를 발라냈으며 내장은 꺼내갖고 집에 돌아와 먼저끓여먹었다. 그리고나서 살코기는 전부삶아 곰고기라 속혀 한근에 5원씩 11근 12냥을 팔았다.....식당사무장 황영태(黄荣太)가 이일을 눈치채고 그의 집을 수색한결과 손과 변비물, 뼈 등이.... 발견되였다. 반소화(潘素华)는 골수에 사무치는 계급한이 있었기에 계획적으로 그런짓을 한것이라 인정된다. 계급의 적을 힘있게 때려엎기위해서 법에 의하여 반소화(潘素华)를 체포했다.      2). 주옥광(周玉光), 녀, 부유중농. 숭의공사삼관구이대(崇义公社三管区二队)사람. 현녕 39세. 남편은 해방전에 군인몸으로 병사했음. 주옥광(周玉光)은 토지개혁시기 사업을 적극했기에 부녀대표로 되었다. 그러나 통구통소를 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이 부단히 신입되고 두갈래길간의 투쟁이 첨예하게 되자 그녀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거니와 자본주의사상이 농후하여 합작화의 길을 가지 않으려하다가 공사화후에야 입사했다....3월 16일오후경 그 대대의 두지전(杜之田)의 죽은지 2일되는 어린애(2살) 를 파내여 그의 머리를 떼내고 사지를 찍어냈고 내장은 강에 버리였다. 그리고는 시체를 집에가져다 삶아먹었다. (四川灌县县委办公室关于“两起不正常死亡事件”给温江地委办公室的报告。 一九六O年三月二十六日)
27    에세이 현대 식인종 댓글:  조회:3939  추천:1  2013-08-24
                                에세이 현대 식인종   지난일요일, 가족별 야외놀이를 가게되였는데 자가용차 한대로는 두집식솔 아홉의 자리가 되지 않아 나와 로친과 큰며느리는 손주녀석을 데리고 부득불 택시에 올랐다. 목적지는 동쪽시교에 있는 대운하삼림공원(大運河森林公園). 택시운전수는 로탕(老湯)이였다. 그는 늘 우리 아파트단지에서 손님을 맞길래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로탕(老湯)은 차가 천진방향으로 뻗은 널다란 국도에 오르자 말문을 여는것이였다. “김선생도 신문을 봤겠지요? 요즘 또 부패분자를 한무리나 잡아냈다고합니다. 과연잘한일이지! 이제 문화대혁명이 다시오면 그런놈들을 싹 다 잡아서 깝지를 발카놔야합니다!”   이건 뭐 잡아낸 부패분자의 깝지를 발카놓기위해서 문화대혁명이 다시와야한다는 말인가?!.... 그 소리를 들으니 속이 꿈틀해났다. 오늘에 이르러 국가의 당정일군가운데서 부패분자가 많이 생겨나고있길래 백성이 텃뜨리는 불만인데 그의 그러한 불만속에는 상상키어려운 살기가 너울치고있었다. 개혁개방을 한 이래 국가의 경제가 고속도로 발전하고있는 반면 당정기관에 부패분자가 너무도많아서 생기는 불만이니 자연스러운데 그렇다고 지나간 문화대혁명이 다시오기를 기대해서야되겠는가? 과연그런다면 그것은 삐뚤어도 한심하게 비뚤어진 사유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당정기관인원이 부패해지는데 대해서 저주하고 격분하는건 옳으나 탕쓰프처럼 문화대혁명을 다시금 불러와서는 절대안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리용가치가 없는 고목이 있다해서 불을 놓아 삼림전체를 태워버리면야 그건 현명한 방책일수 없잖은가? 쓰지 못할 고목만 베여버리면 문제는 해결될 일이라고 본다..   우리 국가가 지금은 이전처럼 개인이 독재를 부려 민주를 압살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만하면 이제는 법제가 제대로세워졌다고 본다. 그러니 법제를 밀어놓고 혼란스러웠던 그 군중의 집체전정을 다시바라는건 력사를 역전시킬뿐이다. 아직까지도 적잖은 사람들이 탕쓰프와 같은 의식에 매이여있는것 같아서 저으기 불안스럽다. 나는 우리 나라는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면서 따라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없애기위해서는 전국민에 대한 한차례 의식정돈이 과연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더더구나 전날 로류(老柳)가 나와 한 말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흉벽을 치고있다. “광서대도살(廣西大屠殺)을 연구해온 사람이 말하는데 글쎄 그가 방문을 한 당년의 식인자(食人者)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죄를 느끼기는 새려 되려 당당해하더랍니다. 뭐라는지 압니까, ‘그때는 계급투쟁이였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는 판인데 그래 살려줘서야되겠는가’하더라나! 그게 사람을 죽인 리유라는게지!” 사실보면 “혁명자”들의 손에 살해된것은 다가 이른바 “흑오류분자(黑五類分子)”아니면 그때 새로나타난 “반혁명”이였다. 그들 대부분이 문화혁명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거나 서로 태도가 다른것이였다. 한데 그들은 억울하게 살해되면서도 거의가 반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녀자면 자기를 강간해도 륜간을 해도 꼼짝못하고 당하기만 했고... 그러다가 결국은 무참히 살해됐고. 살해된자에 대한 만행이 그저 그정도가 아니였다, “혁명자”들은 그들을 살해하고나서 칼을 빼들고 간과 심장을 뜯어내여 그것을 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올해의 2월 에도 그같이 실렸다니 믿지 못하겠거든 한번 찾아 읽어보기바란다.   나는 전에 일제가 동북을 점령하고 대륙을 침략하면서 그같은 식인마(食人魔)의 짓을 감행한걸로 알고있었는데 어쩌면 말끝마다 백성을 위한다는 공산당체제하의 국가에서 그같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험악한 일이 다 발생한단말인가?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무지한들 아무렴 어쩌면 그렇게까지 야만이 된단말인가!?....   어느 문건에선가 통계낸것을 보면 “문혁”기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00만이 넘는데 그 원인과 경위와 형태가 각각이였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내지 못해 자살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혁명자”의 야만스러운 폭팽에 자살로 항거한 이도 있고 “혁명군중”의 시달림에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산계급전정기관에 잡혀 총살당한 자도 있는데 거기다 패거리싸움에 죽은건 숫자를 알아낼 수 없을지경 기지부수라 한다.   우도우(武斗)는 위대하다는 훙태양이 제창한 것이다. 그 무슨 요무(要武)니 문공위무(文攻武卫)니 전면내전(全面内战)이니 “천하가 복잡해져야 천하를 크게다스린다”느니 그 외에도 있다. 위대한 령수의 뜻이라면 백성은 찍소리말고 그대로 움직여야했으니 그의 요구대로 전면내전이 일어나 성마다 거의 패거리싸움 우더우(武斗)를 한 것이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몽둥이로 뚜드려패는것은 너무도 원시적인 놀음으로 치부했던지 무기를 썻다. 각가지였다. 총, 기관총에다 각종대포 지어는 땅크, 군함까지 동원되는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그같은 우도우(武斗)에 그래 죽는 사람이 적을수있겠는가?!   이만줄이고 광서(广西)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일을 좀 더 상세히 말해보자. 그곳에서는 발생한 각가지의 죽음에서도 가장상상키어려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먹히운건데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무섭거니와 참혹하기 그지없는것이여서 누구나 들어보면 가슴떨릴것이다. 사람이 야수에게 먹히웠다면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력사에 기재된것을 보면 농민기의자 황소(黄巢)무리들이 사람을 잡아 고기를 먹었다했고 대약진시절 3년재해기간에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는일이 발생했다고 여러사람이 쓴 자료들이 폭로했다. 한데 그것들은 다가 량식이 없어 극도의 기아상태에서 발생한 것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기간에 광서(广西)에서 생긴 정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것이다. 굶어서 사람고기를 먹은게 아니였다. 그들은 다가 가장위대한분께 무한히 충성하는 군중과 간부로서 그들이 사람을 잡아 고기를 먹은것은 개인감정이 아니라 계급감정과 혁명각성이였다고 지금까지 변명을 한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고 간을 뜯어먹느라 두손에 살인자의 피가 랑자하게 묻었던 자가 지금까지도 벌을 받지 않았거니와 그때의 맘이 퍼렇게  살아 머리를 쳐들고다닌다니 한심한 일이다. 누가 그에게 사람을 잡아먹은 일을 물으면 그는 좀치도 주저없이, 지어는 떳떳이 대구를 하더라는거다. “그랬어, 내가 그를 죽였어. 그누가 물어봐도 난 겁날것없다, 나는 붉은마음갖고 혁명을 했으니까. 온마을 사람들이 나를 옹호한거다. 모주석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를 죽이지않으면 그가 나를 죽인다고! 그때는 너죽고 나죽고하는 판이였지. 계급투이였지!” 그는 사람을 죽여 심장을 뜯어내여 그것을 썰어서는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집에갖고가 먹으라했다고 한다.   광서에서 사람을 잡아먹은건 개별적이 아니고 우연한 행동인것도 아니였다. 그같은 일은 보편적이고 조직적이고 집체적인 것이였는데 지어는 상급의 격려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광서의 상림(上林)、몽산(蒙山)、융안(融安)、종산(锺山)、박백(博白)、령산(灵山)、귀현(贵县)、무명(武鸣)、륭안(隆安)、대신(大新)、무선(武宣) 등 현에서 모두 빼놓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그중에서도 무선(武宣)이 가장흉악했다고 한다.   맨처음에는 몇이서 사람을 잡아먹고는 무서워서 벌벌떨었다. 그랬다가 그들은 차츰 판을 크게벌리고 기세도도해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마지막에는 사람잡아먹는 운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많은 혁명군중과 간부들이 같이먹었다.      그들이 나중에는 사람을 먹는것에 인이 박혀 며칠건너 한패씩 붙잡아 투쟁하고는 꺾꾸러뜨리였다. 그러고는 죽었던 살았던 가리지 않고 살을 베내고 심장을 오려내여서는 말끔히 먹어버렸다. 살, 간, 심장, 신장, 팔, 다리, 손, 발 다 먹어버렸다. 먹는 방식역시 여러 가지였다. 삶아먹고, 끓여먹고, 지져먹고, 볶아먹고, 튀겨먹고... 먹히운 사람은 이른바 “계급적”이라는 지주, 부농, 반혁명, 우파, 반역자, 특무와 대립파의 성원이였다.    “계급적”의 친지들, 말하자면 그의 부모나 자녀들마저 불행을 면치못했다. 지어는 젖먹이 어린애마저도 살려두지 않았다. “계급적”의 보복을 방지한다면서 “계급적”을 잡아먹어버린 후에는 전가족을 죽여버렷으니 그야말로 멸문(灭门), 멸족(灭族)을 한 것이다.    1968년 6월 15일에 무선(武宣)현에서 사람고기를 먹는 대규모적인 야만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오성대대(五星大队)의 “련지(联指)”민병  리곤수(李坤寿), 팽진흥(彭振兴), 리진화(李振华) 등은 “조반대군(造反大军)”의 류업룡(刘业龙), 진천장(陈天掌) 등 네사람을 끌어다 조리돌림투쟁을 하고서는 그들을 때려죽였다. 그리고나서 간을 뜯어내고 살을 베여 대대부(大队部)에 갖고가서 한끼먹었다. 그러고는 그날부터 8월말까지 그 현의 “조반대군(造反大军)”의 간부를 비롯하여 자기들과 관점이 같지 않은 군중 75사람의 심장과 간과 고기를 먹었는데 먹히운사람가운데는 남, 녀, 로, 소 다 있고 공인과 농민, 국가간부와 당원도 있었다.  무선동령중학부교장 황가빙(武宣桐岭中学副校长 黄家凭)은 일찍이 혁명에 참가하여 유격대 18대대장을 했고 해방후에는 창오현부현장(仓梧县副县长)을 지냈다. 그런데 “문혁”이 시작되자 그는 “반역자”로 몰려 7월 1일밤에 학교의 혁주부주임(革筹副主任) 사동(谢东)이 주관하여 연 투쟁비판회의에서 살해되였다. 그런것을 다음날새벽에 황패농(黄佩农)과 장계봉(张继锋) 등 몇이 먹었는데 일부의 골격(骨骼)만을 남겼다. 그같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바람이 온 동령중학교(桐岭中学校)에 불었기에 도처에 벽돌장을 고이고 기와장을 올려놓은 작은 가마들이 생겨나 연기가 하늘로 피여올랐던 것이다.  무선현(武宣县) 무선중학(武宣中学)에서는 후에 선생과 교장을 다 투쟁하고나서는 교정에다 부엌이 있는 간단한 화로를 만들어놓고서는 그들을 하나하나 배를 갈라죽이고는 삶아먹는 참극까지 빚어냈던 것이다. 아직 미혼전이였던 녀민병 하나는 남자만 죽이고는 그의 생식기만을 먹었기에 이름이났거니와 입당하여 관리가 됐는데 무선현혁위부주임(武宣县革委副主任)으로까지 급을췃다.    한가지 더있다. 로파하나는 어디서 사람의 눈알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하루종일 비판투쟁을 하는데만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맛다들면 피해자를 땅에다 엎어뜨리고는 바구니에서 가위를 찾아서는 눈알을 뽑아갖고는 가버렸던 것이다.  령감태기 몇은 전문 사람의 대골속에 있는 뇌장만 빼먹었다. 그들은 가리반(돌이숫둘)에다 갈아서 예리하게 날을 세운 가느다란 철관을 갖고다니면서 사람이 죽은것을 발견하기만하면 대골을 깨고 전문 뇌장을 빨아먹었던 것이다.   무선현(武宣县)에는 잡혀먹힌 사람이 백몇십명되는데 그중에 살코기를 먹히우고나서 머리까지 잘리운 사람이 1명, 심장과 간을 떼운 사람이 56명, 생식기를 잘리운 사람이 13명, 발까지 몽땅먹히운 사람이 18명, 살아서 배를 갈리운 사람 7명이였다.  “有人说,武宣县被吃的人不少于200人。《武宣县志》第418页称全县非正常死亡526人”。   광서의 기타다른현에서도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잡아먹은 숫자가무선(武宣)보다는 못하다. 그러나 잔폭하기는 무선(武宣)만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1968년 4월 25,포북현북통공사정경대대(浦北县北通公社定更大队)에서는 24사람을 네 번에 나눠서 죽이였는데 그들의 배를 가르고 간을 떼여서는 술안주를 했다. 그 공사에서는 180명을 죽이였다. 흉수 류유수(刘维秀), 류가금(刘家锦) 등은 류진견(刘振坚)을 때려죽인 후 17살도 채안되는 그의 딸을 륜간한 후 때려죽였다. 그러고는 배를 가르고 간을 끄집어냈고 유방을 잘라냈으며 음부를 베여냈다. 그일을 조작한 자는 죽은 사람의 처를 재가하라 칙령을 내리고서는 그녀한테서 증명비(证明费)까지 받아냈던 것이다. 이러루한 일들을 라렬하자면 아직많지만 여기서줄인다. 더알겠거든 인터넷을 뒤져보기바란다. 한데 말해둘것은 광서의 그 많은 살인자, 식인자(食人者)들이 아직까지도 처벌을 받지 않았거니와 의연히 권리를 잡고 해먹는다는 그것이다. 광서의 군중들은 이미 “사람을 잡아먹은 자를 다시는 간부를 시키지 말라!”고 강렬히 요구했다. 한데도 광서의 최고당국(듣는말에 의하면 원 자치구혁위주임이며 후에는 해방군총정치부주임으로 오른 韦国清)의 대답인즉은 “왜서 간부질을 계속하지 못한단말인가?ㅡ 사람을 먹은 사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할게 아닌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성은 어쨌든 해야한다. 반성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걷은 사람같지만 의연히 야만인 것이다. 중국은 언제면 백성이 다 깨여날지?  이것이 문제다!  
26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2) 댓글:  조회:4227  추천:0  2013-08-21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2)    “성적” 6월 14일부터 9월중순에 이르는 기간, 명령에 의해서 활동을 정지할 때 까지 우랑구에서만도 심신원(审讯员), 간수원(看守员), 순라원(巡逻员)을 포함한 435명에 이르는 전안인원(专案人员)들이 반혁명추종(反革命追從)을 한 결과 “홍위병”, “위병단”, “청년단”, “청년군”, “기의단”, “동맹당”, “신민당”, “자위당”, “백호단”, “맹군”, “홍색전투대”, “방공자위당”, “상서회향단”, “571”, “517”, “703” 등 무려 36종류에 이르는 온갖의 반혁명무리를 들춰냈는데 “반혁명”이라는 딱지를 붙인 검은명단에 오른 사람이 모두 1359명, 그중 우랑구사람이 1253명이였다. 그때 우랑구의 총인구가 35160명이였지만 로동력은 부녀까지 포함시켜 얼마안되였기에 5명중 1명은 “반혁명분자”로 몰린셈이도였던 것이다. (《中共铜仁地委关于松桃苗族自治县牛郎区“追反”冤案平反昭雪情况的报告》,1978年10月11日)   “교대반”에 들어간 “학원”들이 교대한것을 보면 강령이 있어서 군사조직인것 같기는했지만 그 활동과 수단은 꼭마치도 어린애들의 작난과도같았다. 반혁명수단: 1, 간부집의 닭을 도둑질한다. 그러면 간부는 고양이가 닭을 도적질하는줄로 알고 밖에 나올것이다. 그럴때 손쓴다.   2. 집체창고에 불을 지른다. 그러면 간부가 불끄러나올테니 기다렸다가 그때 손쓴다.                [ 转自铁血社区 http://bbs.tiexue.net/ ] 반혁명암호: 왼손을 머리우로 올린다. 반혁명표식: 왼손에다 풀묵음을 쥔다. 반혁명강령: 1. 빈하중농에 나눠줫던 집을 지주한테 되돌린다.   2. 부업을 틀어쥐고 번돈은 꼭 생산대에 들여놓는다.   3. 주민은 공급을 받는다. 4. 새집을 짓는다. 5. 젊은이는 녀편네를 얻게끔한다. 6. 먼저 당원을 죽이고 후에 단원을 죽이며 크고 작은 간부를 다 죽인다음에는 빈하중농 절반쯤 죽여버린다.    “반혁명”성원이 제공한 최고직위는 사장(師長)이였다. 이러한 “반혁명”조직과 “반혁명분자”는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현공안국 형정고 고장 전은지(田银芝)가 1976년 9월 13일에 현위에다 회보한것을 보면 “사패공사‘반혁명’조직명칭은 오헌보로부터 교대한 것이다. 오헌보가 룡무운을 발전시켰다는데 룡무운의 교대를 보면 그런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룡무운이 전명량을 발전시켰다는데 전명량은 말하기를 ‘농민혁명당’이라했다. 전명량은 류상모를 발전시켰고 류상모는 말하기를 ‘민주당반공군’이라 했다. 류상모가 진해성을 발전켯는데 진해성은 말하기를 ‘반공구국군’이라했다. 오헌보가 구륙장과 오병성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민공대’라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오병성은 그것이 ‘지하당’이라했다. 사패공사의 오헌보가 1976년 4월 25일에 교대한 기록을 보면 “심문이 멎지 않고 그냥 계속되는데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니 방법이 없다. 모른다고 하면 상급에서는 믿지 않지 하는수없이 아무렇게나 ‘국민군’이라고 이름을 지어댔다.” 우랑공사 중재대대의 한 간부가 1978년에 성(省), 지(地), 현(縣)에다 바친 자료에다는 다음과 같이 썻다. “7월 13일, 오모(某)와 양모(某)는 회보하러 공사에 올라갓다가 우랑구위서기 룡문비와 마주쳤다. 룡문비는 그를 향해 “전명량이 룡후생을 ‘반혁명’영장이라 적발했다는데 자료는 하나도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돌아가서 자료를 하나 만들어내라구.”했다. 공사의 무장부장 룡모(某)도 “당신들이 단단히 틀어잡지 않구서야 ‘반혁명’을  어떻게 잡아낸단말인가?” 고 했던것이다.  하여 7월 15일밤에 대대지위의 다섯사람이 룡후생을 심문했는데 다른 한 민병소분대의 7명해서 모두 12명이 하나를 놓고 기세를 부렸다. 그들은 담을 키우느라 그전에 돼지고기를 안주하여 술 5근을 마셨다.  마모(某)가 먼저 룡후생을 소학교에 끌어다 높이달아매고 때리면서 단독으로 심문했다. 룡후생은 아픔을 이기지 못해 자기가 영장이 옳다했고 전건화와 전수화도 같은성원이라했다. 민병 양모(杨)가 캐물었다. “영장이라했지? 그렇다면 련장은 느구고 패장은 누구며 반장은 누군가? 또 지도원은 누군지 그것도 대라!” 이에 룡후생은 없는것도 있다면서 대라니 어떻게하라는가했다. “나는 승인하지 않을테다. 너희들이 나를 때리니 승인한거다. 또 나보고 련장, 패장을 대라니....”  양모(某)는 화나서 웨쳤다. “저자식을 죽게 때려라!” 하여 7월 16일새벽 3시좌우에 룡후생은 과연 맞아서 죽고말았다.  우랑대대민병부련장 막강은 “교대반”의 학원을 우선 달아매고 뚜드리기부터했는데 독하기가 그지없었다. 그자는 참대꼬챙이로 호회(胡淮)의 얼굴을 때려 볼모양없게 만들어놓았다. “학원” 서전문(舒典文)이 쪽지를 써서 호회(胡淮)에게 주어 막강전(莫刚前)역시 “반혁명”조직에 가입했다고 물어먹게했다. 이미가르켜준방법 준칙ㅡ 한사람의 공술은 듣기만하고 두사람의 공술은 믿으며 세사람의 공술이면 결정짓는다고 한데 따라서 전안조(专案组)는 막강전(莫刚前)의 입에서 말을 받아내려했던 것이다. 막강전(莫刚前) 하도 억울해서 입을 다물고말았다. 그러니 그들은 두 손목을 뒤로 묶어 달아매고 입을 열때까지 뚜드려팼다. 막강전(莫刚前)은 과연 견디지 못하겠으니 자기가 “반혁명”이 옳다고 “승인”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오른손은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했기에 병신이되고말았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의 “반혁명추적”동기는 무엇이였던가? 사건을 심입조사하라고 우랑에보냈던 현공안국의 형찰고 고장 전은지(田银芝)지가 당시 현상위원이며 현혁명위원회 부주임을 지낸 마수청(麻树清)을 만나자 그한테  한 말을 보면 알수있는 것이다. 마수청(麻树清)은 회억록에다 대개 1976년 8월쯤인데 자기가 장흥에서 현으로 돌아오니 한 공작원이 우랑에서는 “반혁명추적”이 대단하다면서 이미벌써 20명이나 죽었다고 알려주었다했고 이 소리를 들은 마수청은 곧바로 공안국에 가서 전은지(田银芝)를 불러 정황을 물어봣노라했다. 이에 전은지(田银芝)는 그와 아래와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구위서기가 급을 추기위해 성적을 올리느라 막짓을 하고있습니다! 내가 몇 번 궈고했건만 소용없습니다. 듣지 않고 점점 더합니다. 반혁명을 추적하는 일이야 본래는 공안부문에서 맡고 군중을 배합시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데도 룡문비는 지금 군중을 발동해서 ‘반혁명추적’을 한다합니다. 그래서 ‘반혁명’을 이미 많이들춰냈거니와 날이갈수록 자꾸 더 많아진답니다. 무슨 반혁명이 그리많을까? 따라서 매를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하니 그저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빨리 석맹명서기께 알려야겠습니다. 그이만이 룡문비를 말려낼것 같습니다.”  조사 7월 7일,현공안기관에서는 우랑구의 “반혁명추적”방식을 알게되자 당장 “교대반”을 걷어취우라했다. 그러나 현위서기인 룡문비(龙文飞)은 공안국의 의견을 절대접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공안에서 해내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해내는데 뭐가 잘못인가! 끝까지 해낼테야다!” 7월말 8월초에 전현적으로 열린 간부회의기간에 지위서기 위립정(魏立政)이 우연히 룡문비(龙文飞)와 마주쳤는데 룡문비(龙文飞)는 그에게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정황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의 말인즉은 교대반학원가운데서 반혁명명단에 오른것이 600명이 넘는데 죽은것이 8명이라는 것이였다.  이에 위립정(魏立政)은 룡문비(龙文飞)를 향해 될수록 사람은 죽지 않게끔 하라고 했다. 8월 3일,룡문비(龙文飞)는 처음으로 현상무위원회에다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상황을 회보했다. 그는 첫째는 자살한것이 여럿되고 둘째는 죄를 교대하지 않고 도망치려했길래 격분한 군중들손에 얻어맞아죽은것이 꽤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다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이 주대없이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은 성적이 주요하다느니 큰방향은 정확하다느니했고 우랑에는 반혁명조직활동이 확실히 있다느니 600명가운데는 반혁명이 확실한 자가 있는가하면 가짜반혁명도 있을수 있다느니 풍을 쳤으며 “교대반”은 거두지 말고 계속조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느니 사람이 죽게는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했다. 회의는 공안국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우랑의 “반혁명추적”공작을 접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8월 4일,현공안국형정고 고장 전은지(田银芝)가 공안인원4명을 거느리고 우랑으로 갔다. 그가 가보니 마침 그곳의 “교대반”에서 사람을 달아매고 뚜드려패고있었는데 과연 지독했다. 하여 당장거두게하는 한편 8월 11일에 전화로 현공안국장 류장학(刘长学)에게 류청석(刘请石)과 석맹명(石孟明)을 데리고 우랑에 와서 제눈으로한번 보라고했다. 8월 13일,우랑에 온 석맹명(石孟明)은 전은지(田银芝)의 회보를 듣자 몹시화를 냈다. 그날녁에 회의를 열었는데 석맹명(石孟明)은 말하기를 우랑구에는 “반혁명”이 있으니 꼭 밝혀내야지 손이 물러서는 안된다고 했다. 현공안국에서는 한사람더보내여 협조케했다. “교대반”에 든 주요인원에 대해서는 꼭 철저히 밝혀야한다했다. 그러면서 석맹명(石孟明)역시 정책에 주의해야한다, 죽는일이 다시생겨서는안된다고 했다. (《中共铜仁地委关于对石孟明同志在牛郎区“追反”中所犯错误及处理意见的报告》,1978年11月22日)   8월 27일,전은지(田银芝)는 현위에다 지구정법령도의 지시를 전달했는데 그것인즉 우랑에서는 “반혁명추종”을 함에 증거를 중시해야지 강박하여 진술한것을 믿고 증거로해서는 안되거니와 사람이 또 죽어서는안된다, “교대반”은 구1급으로 보류한다, 공사대대의 “교대반”은 전부 걷어치운다는 것이였다. 그때 “교대반”에 의하여 죽은것이 이미 24명이나되였던 것이다.    9월 8일,성위는 동인지위에 전화로 성공안청의 림부처장 등 4명을 송도(松桃)에 파견하여 우랑의 “반혁명추종”정황을 조사하게된다는 것을 통지하면서 “교대반”을 당장거둬야하며 이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겠끔 주의하면서 “교대반”인원을 우선 돌려보내지 않고 정상적인 대우를 해주며 병있는 사람은 치료해줘야야 한다, 령도가 잘못한것은 솔직히 자아비평을 해야한다, 지위는 인원을 파견하여 조사료해하게 하고 상세한 보고자료를 작성하여 성위에 올리고 처리의견을 들어야 한다. 지위는 송도자치현위에 통지하여 성위의 의견을 철저히 관철집행하게 하며 사람이 죽는 현상이 재발하지 않도록해야한다, 현위에서는 우랑에 사람을 보내여 선후사업을 잘하게 해야하고 정황을 상세히 조사하여 지위에 써올리고 처리의견을 들어야 한다.   9월11일,동인지위는 송도자치현위에다 다음과 같이 통지했다. 지위에서는 석맹명(石孟明)동지가 직접 우랑 “반혁명추종”의 공작을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교대반”에서 병이났거나 잔페됐으면 치료해주어야한다. 성공안청 림부처장、지구공안국 륭명성(隆明星)부국장이 송도에 와 현위와같이 련3일간 구헌정(欧献庭), 전은지(田银芝) 등 사람들이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에 관한 상세한 상황회보를 들었다. 이때에 “교대반”에서는 사람이 이미 29명이나 죽은 것이다. 전은지(田银芝)는 회보를 끝내면서 “중국청년당”이란 근본없다, 자료를 보면 맞지않고 서로 모순된다. “복흥당”이라는게 뭔가, 그런것이란 없었다, 다 그렇다, 지금의 자료들은 몽땅 강박적으로 말하게해서 받아낸 증거들인 것이다라고했다. 성공안청의 림부처장이 말했다. “성위의 지시는 ‘교대반’을 전부거두라는 것이다. 회보에 볼것같으면 우랑에는 ‘반혁명’조직이 있다고했다. 그런데 그것을 파내느라 29명이나 죽게만들었으니 이건 전성의 력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이 말했다. “상급에서는 우리보고 중지하라는데 마치우리가하는 일이 다 틀리는것 같다, 그래 조금도 성적이 없단말인가? 너희들이 나를 내려줄러도 나는 굽어들지 않을테다. 너희들이 성위에 일러바쳐 어디 나를 철직시켜보라!”   9월15일,현위에서는 연구를 거쳐 “교대반”의 사업을 전부중지하고 없애라는 상부의 지시에 응부했다. 허나 성과 지구에서 의례 안건전체에 대해서 조사해야 할 것이였다. 만약 그저 죽은 사람에 대한 처리에 그치기만 한다면 실제상 그것은 모든 억울한 사람에게 찬물을 끼엊는 짓으로밖에 되지 않을것이였다. 반면에 또한 군중의 적극성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계급적들의 파괴활동을 타격하자고나선 군중의 적극성을 보호함에 불리할 것이였다. 이럴때 책략이 나와야 했다. 류장학(刘长学)의 회억을 보면 9월 15일후의 어느날(20일전),석맹명(石孟明)이와 류장학(刘长学) 등 우랑에 가서 우랑구위의 회보를 들었는데 우랑구위는 구기관에서 의연히 “반혁명추적”학습반을 꾸려야한다는 것이였다. 이에 류장학(刘长学)은 견결히 반대했고 석맹명(石孟明)은 우랑지구의 요구를 믈리쳤다. 9월 20일,성과 지구의 공작조와 현위부서기 오건덕(吴建德)일행은 우랑에 가서 조사했다.  9월 22일,성과 지구의 공작조는 돌아가고 오건덕(吴建德)과 전은지(田银芝) 등은 우랑에 그냥남아서 조사를 더 깊게했다. 11월 15일,오건덕(吴建德)、정은지(田银芝)등은 조사료해한데 근거하여 정황을 현위에다 보고하였는데 얻어낸 결론인즉은 우랑공사에는 반동조직인 “복흥당”과 “청년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목은 송도인(松桃人)이 아니고 아직도 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였다.  사패공사의 조사를 책임졌던 공안인원 리시발(罗时发)은 회보하기를 사패에는 “반혁명”집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오헌보(吴宪保)、오병성(吴炳成), 구륙장(欧六章)에게는 반혁명언론이 있다. 기층군중의 의견은 오헌보와 오병성 두 사람은 “반혁명”으로 정해야한다고 했다.    은암공사의 조사를 맡앗던 공안인원 사세선(查世鲜)은 회보하기를 은암공사에서는 “반혁명”활동을 발견하지 못했고 “반혁명”언론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어 오병칭(吴炳称)이 “투기도박”을 하고 약담배를 팔았다는것도 다 거짓말이였다. 이때로부터 1976년에 우랑에서 들끓어올랐던 “반혁명추적”운동은 윤수응(尹修应)을 주요성원이라고 했던 “복흥당”과의 그 골간이라는 윤수응(尹修应)을 10년도형에 떨구는 것으로서 일단 혼란을 아퀴지었다. (1978년에 피해자들을 평판하자 윤수응도 따라서 평판을 받았다)   박해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갓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약을 쓰려하니 촌의 어떤 간부들은 의연히 그들을 적대시하면서 약재도캐지 못하게 회방을 놀았다. 상소하다  뻔한일이였다. 죄없이 뚜드려맞고 병신되고 갖은 고통을 받고서도 어찌 묵묵히 그저참고견딘단말인가! “교대반”에서 풀려나간 그들은 다가 가만히 참고있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발신을 써서 유관부문에다 보내기시작한 했던 것이다. 송도현위(松桃)에 올려보낸 고발신은 거의가 구위서기인 룡문비(룡문비)의 손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미 죽도록 박해받았던 사람들은 웃사람의 위협속에 또다시금 박해받을 지경에 아르었다. 이렇게 되자 우랑구의 피해자들은 부득불 이웃현인 동인(铜仁_), 강구(江口) 지어는 호남(湖南)에가서까지 신소장을 올렸다. 했으나 소식은 깜깜하니 바다물에 돌던진 격이였다. 1년넘어 휴양하니 매맞은 상처가 맣이 나아지면서 원기가 회복된 양재덕(杨再德)이 21번째의 신소장마저 소식이 없자 22번째 신소장을 써갖고 자신이 직접 북경을 바라고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피해자가족들에서 그때 돈 79원을 모아 려비로 내놓았던 것이다. 대는 1978년 6월 25일, 동행자는 그와 전흥화(田兴和), 진계창(秦继昌) 세사람이였다. 그돈갖고서는 택부족이였다. 세사람의 차비도모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걸어서라도 수도에 가고말리라는 결심에 모두들 집사람들과 고발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했다.     단거리차표를 산 그들은 렬차에 오른 후 승무원에게 몸에 생긴 상처투성이를 뵈이면서 눈물을 흘려가며 억울함을 하소했다. 모두들 동정했다. 감동된 승무원들은 차비돈을 받지 않았거니와 많은 편리를 주었다. 한 군관의 도움까지 받아 북경에 이르자 그들은 마침내 신소장을 등소평의 판공실에 들여놓았다. 성공이였다!    등소평부주석은 이 일을 화국봉주석과 말해 화국봉주석은 귀주성위에 반영된 사건을 조사해보고 그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원안(冤案)이되니 평판해야하거니와 군중을 해친자에 대해서는 엄숙하게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松桃苗族自治县档案局档案:全宗号23,目录号1;年度1978;案卷号125;标题:县委常委会整风会议记录,1978年7月-8月)   평판  결과가 어떤거야 빤했다. 귀주성위와 동인지위에서는 즉시 공작조를 내와 1976년도에 우랑에서 있은 “반혁명추적사건”을 참답게 조사하고 “반혁명”으로 몰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다 평판하여 억울함을 풀게하며 사망자와 그의 가족에 무혈금을 발급하고 잔페로 된 사람의 생활은 보장하게 만들며  병자는 병을 고치도록하였다. 한편 우랑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책임을 벗어메칠 수 없는지라 1978년 8월 16일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따라서 당적마저 긁히우고말았다. 그 외에 팽충순(彭忠顺)、등구선(滕久先), 오구량(吴求亮) 등8명은 도형에 떨어졌고 송도현위서기노릇을 하다가 그사이에 벌써 급을 올리춰 동인지위부서기(铜仁地委副书记)가 된 석맹명(石孟明)은 직무를 철소당했거니와 1978년 9월 27일, 우랑의 “반혁명추석”을 평판하는 군중대회에 나서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빌게했다. (석맹명은 1981년 11월에 지구행서부전원으로 다시출임하였다가 1983년 5월에 지위부서기、지구행서전원으로 승임하였으니 그 썩 후의 일이다)。   이로서 자라나는 후대들은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 위대하다고 떠따고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그 리성을 잃은 발광적이고도 진부한 몰골의 한 층면과 진리를 씹어버렸던 죄악의 단층면을 얼마든 그려볼 수 있을것이다. 그런 재난이 이제다시와서는 안된다. 영원히 다시오지 말아야 한다!  
25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1) 댓글:  조회:4077  추천:1  2013-08-21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1)    1976년, 귀주동인지구(貴州銅仁地區) 송도묘족자치현(松桃苗族自治縣)의 우랑구(牛郞區ㅡ지금은 우랑진, 내흥진, 사패향으로 나뉘여졌음)에서는 “반혁명”을 잡아낸다면서 한차례 성세호대한 “반혁명추적”공세를 일으켰는데 들춰낸 반혁명조직이 36개, 조직성원은 1359명이였는데 그들중 맞아죽은것이 37명이고 시달림에 몸이 불구로 된 자가 263명에달했다. 반혁명조직이라고는 근본 존재하지도 않건만 그것을 잡아낸다하여 벅작끌었던 큰 원안(寃案)이였다. 귀신이 들어도 놀랠 그런  한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도화선은 다른게아니라 그마을의 지주아들이 뀐 방귀로 인한것이였다. 웃지도울지도못할 그 방귀사건의 경과는 이러하다.     화근 그해의 1월 18일날 밤이였다. 우랑대대 계공전촌 사차대대의 사람들은 피곤한 하루의 공정이 끝나자 저녁을 먹고는 난로주위에 빙둘러서서 불을 쬐였다. 그속에는 그 마을의 지주아들 룡정운(龍政云)이도 끼여있었다. 이날따라 술을 한잔씩 얼근히 마신지라 다들 기분이 좋았는데 누군가 방금 약혼한 룡정운이를 놓고 놀려주었다. 룡정운은 아무런응대도없다가 방구를 “빵”꼇다.  모두들 와ㅡ하하 웃었다. 그래서 무참해진 저쪽은 그 무참을 뭉때리느라 룡정운이를 더 놀려주었다. 룡정운은 그가 하도그러니 밸이 꼬여 “이제 또 더 놀려봐라 싹 다 잡아죽여버리고말테다.”고 했다. 그러서 또 한바탕 웃음이터졌다. 이는 본래 흔히들 하는 작란이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대대의 빈협주임(貧協主任) 전(田)아무개가 씽 달려들어 룡정운의 멱살을 잡고 “이자식 죽고푸냐?”하면서 “공사로 끌어가라!”했다. 다들 장난쓰느라그러는건데 뭘 그렇게까지야 하고 말렷다. 그 자리에 정운룡의 아버지 정덕찬이도있었는데 보아하니 아들이 입을 잘못놀려 경을 치는것같아 사정사정해 빈협주임 전(田)가는 손을 뗏다.   워낙은 이로서 끝내야했건만 누군가 훗날 이일을 공정지휘부에다 고자질을 하는통에 일은 그만 잘못번지고만 것이다. 어느날 룡정운은 공정지휘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기시작했다. 그들은 그를 손쓰지 못하게하느라 뒷짐을 묶어놓고는 그보고 너는 꼭 제무리가있어서 배짱이 세진것 같은데 바른대로대라면서 뚜드려팼던 것이다. 룡정운은 악이 치밭이는데다 아프고 견디지 못하겠으니 아버지 룡덕찬(龙德灿), 숙부 룡년찬(龙年灿), 족형 룡무운(龙戊云)은 다자기가 이렇게 매맞는것을 알면 이제 가만있지 않으리라했다. 그러자 공정지휘부(工程指挥部)에서는 그 세사람마저 잡아다 너희들은 무리를 지은것 같은데 누구누구 또 한편인지 대라했다. 그 셋이 편은무슨편인가, 아무것도 없다하니 그들은 아니다 거짓말이다, 바른대로 대라면서 달아매고 때렸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받아낸 말인즉 먼 사패공사에 있는 룡정운의 고모부 오헌보(吳憲保)도 이일을 안다면 가만있자고하지 않을것이다 이제 천여명이라도 데리고와서 무지하고 지악한 너희들을 때려엎고말것이라했다. (中共贵州省委信访处:,载,上册,群众出版社,1981年)   때리고 핍박해서 그렇게 없는 말을 받아낸 우랑대대의 무장부장은 그것을 선색이라면서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 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에게 회보했던것이다. 구헌정(欧献庭)은 즉시 사패공사에다 전화를 쳐서 오헌보(吴宪保)를 끌어다가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두주일이나 심문해봤자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그들은 오헌보(吴宪保)를 집에 돌려보냈다.   계속조사  1976년 4월 5일,북경에서 각성한 군중들이 “문화대혁명”에 불만하여 항의를 하는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다. 그때는 이 일을 “반혁명사건”이라 결정함으로하여 국세는 한동안 몹시긴장해졌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오헌보(吴宪保)는 다시금 공사에 불려가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심문을 받기시작한 것이다.   4월 12일, 송도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은 성에서 온 촬영기자를 접대하게되였는데 석맹명(石孟明)은 그와 말하기를 “우랑에서는 사업을 잘하고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을 잘틀어쥐요. 듣자니 우랑에는 반혁명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면서 “반혁명은 경솔이볼게 아니니 되게 답새겨야합니다. 첫째는 진압, 둘째는 징벌. 절대 손이 물러서는 안되지요.” 했다.      5월 7일,현위에서는 확대회의를 열고는 “계속심입하여 반혁명정치요언을 조사하고 반혁명파괴활동을 타격하며 심입하여 등소평을 비판하고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투쟁을 해야한다”고 했다. 5월 10일,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은 우랑구위상위회에서 공안부의 “요언을 추격조사”하고 “반혁명을 추격조사”하라는 두가지 긴급통지를 전달하면서 우랑구에는 “확실히 반혁명조직이 있다”고 했다. 5월 19일,송도현삼급간부회의에서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은 “우경번안풍과 반혁명을 계속조사하는 고조를 일으켜야한다”면서 “즉시 군중운동을 발동하라”고 호소했다. 6월 6일과 7일, 우랑구에서는 각공사의 서기들이 다 참가하는 구위확대회의를 열고 반혁명을 “계속추격조사”하는 부서들을 내왔는데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구(區), 공사(公社), 대대(大隊)는 문제를 조사해내는 교대반(交待班)을 내와야한다면서 일반성원은 생산대에서, 골간분자는 공사에서, 주요두목은 구에 잡아다 교대하게끔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인 포치를 한 것이다.   한편 오헌보(吴宪保)는 그전에 벌써 지독한 고형을 이겨내지 못해 따지고 캐묻는대로 근본있지도않는 “지하당”, “민공대” 등 반혁명조직이 있다고 “승인”했던 것이다. 성원은 20명이 더되였는데 매부 구륙장(欧六章), 처자의 족혁 룡덕찬(龙德灿), 룡년찬(龙年灿), 처자족질 룡무운(龙茂云), 중학시절의 동창생 양재덕(杨再德), 향옥후(向玉厚)、서전월(舒典月)、전흥화(田兴和) 등이라 주어댔다。 이상의 잡아낸 사람 20여명의 수자를 갖고서는 전 구(區)의 5개 공사 28개 대대 “교대반”에서 짐작하는 수자에 근본미치지 않았기에 1975년에 이미 찾아낸 동인(铜仁)과 관련이 있은 이른바 복흥당(复兴党)성원이라는 윤수응(尹修应)、양정영(杨正荣) 등 사람과 전에 투기도박을 해서 검거되였던 윤수무(尹修武)、오병칭(吴炳称)을 다시잡아다가 “교대반(交待班)에다 넣었다”. 그러면서  손때매운 혁명자들은 구의 교대반(交待班)을 집접틀어쥐고 생사람잡이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회의때 교대반(交待班)에 들어간 “반혁명분자”는 다섯가지를 꼭 교대해야한다고 했다. 1). 반혁명조직의 명칭을 교대해야하고 2). 반혁명목적이 무엇이며 3). 반혁명강령은 무엇이고 4). 반혁명활동방식은 어떻고 5). 우와 아래의 련계인은 누구라는 것. 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은 심문할 때는 기록을 잘해야하고 각 공사는 서로 련계를 잘하여 다같이 정황을 제때에 장악해야한다고 강조했다.   7월 10일,우랑공사에서는 “반혁명추적동원대회”를 열면서 동시에 로개석방인원인 룡후생(龙侯生)과 “로실하지 못한 사류분자”를 다시잡아다가 한데넣고 투쟁했다. 이날있은 투쟁대회에 다른 여러공사의 대표들도 참가했는데 구장 룡금명(龙金明)이 집행하고 구무장부장과 “반혁명추적소조”조장인 팽충순(彭忠顺)이 발언을 했던 것이다.   7월 19일 20日,이틀간은 목채공사에서 우랑、사패、목채 등 세 공사의 서기가 참가한 회의를 열었는데 현무장부장이 그 회의를 틀어쥐고 그지간의 “반혁명추적”을 분석하고 한단락의 사업을 총결지었다. 그러면서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우랑공사는 “반혁명추적”에 진보가 있고 효과도 있다했거니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한다고 한바탕 표양도 했다. 그는 다른 한 곳 사패는 일찍이손썻길래 적잖은 선색을 제공했지만 아직까지도 몇사람만이 혁명을 하고있다고 했고 다른한곳 목채공사는 담이 너무약하다했고 또 다른 은암과 대흥 두 공사의 “반혁명추적”을 보면 성적이 하나도없길래 차라리 저쪽으로친다고 불만스러운 소리를 했다.   54가지 혹형,37개 인명 전안조(專案組)는 규정하기를 한사람의 공술은 듣고 두사람의 공술은 믿으며 세사람의 공술은 결정짓는다고 했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초는 불을 달아야 밝아지고 ‘반혁명’은 때리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면서 전안조(专案組)에서는 형구(形具)를 갇추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54가지에 달하는 고형방법이 나왔는데 그것이 “교대반”의 “학원”들을 극도로 못살게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를 대고 형이 동생을 대며 친척이 친척을 대고 벗이 벗을 대여 서로물어먹는 형국이 생기였던 것이다. 목채공사(木寨公社) 모평생산대(毛坪生产队)는 남성주요로동력이 다해봣자 19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12명이나 반혁명으로 되었고 그중 9명은 “교대반”에 들어갓던 것이다. 그야말로 전에없은 혹독한 반혁명추종운동(反革命追從運動)이였던 것이다! (, 1978年10月11日)   석달이나 지속되였던 그 반혁명추종운동(反革命追從運動)으로 하여 선후 486명이 “교대반”에 들어가 그곳의 “학원”이 되었는데 그중 6명이 총살당하고 13명이 학사(虐死)했으며 13명은 자살했다. 그러고도 살해된 자의 친척이라 연루(連累)되여 사망한 것이 5명이였으니 모두해서 37명이나 목숨을 잃은것이다. 매를 맞아 불구로 된것이 263명. 죽이려다가 미처죽이지 못한것이 18명이였다. (《中共铜仁地委关于松桃苗族自治县牛郎区“追反”冤案平反昭雪情况的报告》, 1978年10月11日)    “교대반”에 들어간 사람 대부분이 개인보복에 든 것이였다. 례를 들면 사패공사 홍성대대 량풍요생산대의 진조전(陳祖前), 진인배(陈仁培), 진조무(陈祖武) 삼형제는 전에 당질녀를 묶어놓고 강간하려한 민병련장 진술병(陈述炳)을 혼뜨검내운 일로 하여 잡혀들어가 그자의 손에 매맞아죽었다. 우랑공사 우랑대대의 당지부부서기 향(向)모는 1969년도에 생산대에 진 빚 200원을 몇 년째 종시 값을 념을 하지 않으면서 생산대회계이자 보관원인 호회칭(胡淮称)보고 량식을 그냥달라했다. 이에 호회칭(胡淮称) 규정대로 량식을 주지 않았더니 그는 그를 “교대반”에 잡아넣어 “학원”으로 만들어놓고서는 협박과 고형을 받아 끝내 죽게만들었던 것이다.    은암공사 파동대대의 룡세항(龙世恒)이 죽게된건 전에 지부서기 룡(모)가 어머니를 강간하려다 그한테 들켜 성사못한 일로(당시 룡세항은 14살) “교대반”에 들어 물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일을 잊지 않았던 룡세항(龙世恒)은 커서 몇 번 지부서기 룡(모)를 공산당간부라해도 렴치없고 도덕이 없다했던 것이다. 그비슷한 안건은 은암공사 첨파생산대대에서도있었다. 은암공사 첨파생산대 대장 룡세명(龙世明)은 룡흥무(龙兴茂)의 녀편네와 통간하려다 못하고는 기회가 왔다고 여겨 룡흥무(龙兴茂)를 “교대반”에 너어 “학원”으로 만들어서는 거기서 매맞아죽게하고는 그의 녀편네를 끝내 차지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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