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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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여자가 꿈에 오줌을 싸면? 댓글:  조회:6992  추천:74  2008-05-05
여자가 꿈에 오줌을 싸면?      하나님은 실수였는지 의도적이었는지 하여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리구조를, 남자는 하나의 ‘쟁기’로 오줌배설과 생식을 하게 만들었고 여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오줌도 누고 성교도 하고 애도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리구조 특징에 의해 사람들은 흔히 오줌과 생식을 연관시켜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를테면 남자나 여자나 오줌발이 세야 성교도 잘하고 생식력도 강하다는 것이다. 변강쇠는 오줌발이 세기로 아름드리나무가 꺾어지고 옥녀는 오줌을 누면 땅이 파여 큰 움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실생활에서 이루지 못하는 일들을 꿈에서 이루는 현상이 많고, 따라서 우리민족은 분뇨와 연관되는 꿈을 길서의 꿈(吉瑞之夢)이라 해몽한다. 꿈에 분뇨가 옷에 묻어도 대길, 분뇨통을 지고 집에 들어와도 대길, 분뇨를 싸도 대길이라고 한다. 인동권 씨는 “분뇨에 관한 것은 복록, 부귀, 재부에 관계된다고 믿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분뇨몽의 실제적 의미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멋대로 풀이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분뇨몽은 실제로는 생식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민속에 나타난 여러 방뇨몽을 살펴보자.  <<삼국유사>>태종춘추공편에 보희와 문희 자매의 방뇨몽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동생과 꿈 이야기를 하매, 문희가 듣고 가로되 내가 이 꿈을 사겠다 하였다. 언니가 “무엇으로 사려하느냐?” 가로되 “비단치마를 팔면 되겠오?”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하니 언니가 “어제 밤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동생은 비단치마로 갚았다. ······ 문희는 춘추공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고 진덕왕이 돌아가자 영미 5년 갑인년에 춘추공이 즉위하였다. ······태자 법인과 인문, 문왕, 노단, 지경, 개원,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서 나타났다.    김춘추는 체격이 엄청 큰 거인이었다. 이러한 거인과 맞을 상대는 생식력이 강한 여인이어야 한다. 문희는 비록 거녀로 등장하지 않지만 언니 보희의 방뇨몽을 사서 ‘음력(陰力)’이 강해졌다.  이와 같은 유형의 방뇨담이 <<고려사>>에도 실려 있다.  보육의 둘째 딸 진의는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아름답기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언니가 꿈에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천하에 가득 찼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언니는 동생 진의를 보고 꿈 이야기를 했다. 진의는 그 꿈이 길몽이라는 것을 알고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팔기를 청했더니 언니는 승낙하였다. 꿈을 산 진의는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었다.  당시 당숙종(唐肅宗)은 아직 잠저에 있을 때에 천하 산천을 유람코자 송도에 이르러 보육의 집에서 기숙하게 되었다. 숙종은 보육의 두 딸의 미모에 반하여 옷 떨어진 곳을 꿰매 달라고 청하였다. ······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진의는 숙종과 인연을 맺고 임신하게 되었다. ······진의를 후에 정화왕후라 불렀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경종과 사별하고 사제에서 과거하는 헌정왕후는 어느 날 조령에 올라가 방뇨 하여 국중이 물바다가 되어 은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이때에 헌정왕후는 안종과 몰래 정을 통해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는 8대인 현종이었다.  위 방뇨몽담은 여자들의 생식운이 왕후가 되었거나, 아이를 많이 낳거나, 낳은 아이가 왕이 되는 등 대운(大運)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민족의 방뇨몽담처럼 짜임새나 내용면에서 멋들어진 방뇨몽담이 없다.      
39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댓글:  조회:5269  추천:55  2008-04-28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류가 부권제사회에 진입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주동이고 여자는 수동이요, 남자는 압박자이고 여자는 피압박자이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천함이요 ······ 등 이원론으로 흘러왔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은 이러한 이원론을 성립시킨 종교적, 철학적 근거에 분명히 차이가 있다.  먼저 서양의 종교적 근거를 살펴보자.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먼저 흙으로 아담이란 남자를 빚어 만들어 놓고, 그가 심심해 하니까 그를 잠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라는 여자를 만들어 짝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하나님의 <창세기>설화가 서양에서 선남후녀(先男後女)의 관념을 성립시킨 강력한 근거로 되어왔다.  우선 어학적으로 보면 영어에 중국어 女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영어로 여자를 WOMAN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자 남자를 뜻하는 MAN 앞에 WO를 덧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아리스토델레스의 말을 들어보자.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태이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을 자연 상태의 결함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장 7~9절에 다음과 대목이 있다.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고, 이에 반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 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    현재까지도 천주교에서는 여신도들이 성당에서 베일을 쓰고 있다.  <<구약성경>>에 이브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무화과를 뱀의 유혹에 의해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을 먹게 함으로써 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양에서는 이 이야기를 2천 동안 물고 늘어져 여자들을 압박해왔다. 즉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원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음문은 죄를 창조하는 지옥의 문이므로 교회에서 설교를 받고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양다리를 꼭 오므려 음문을 가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월경이 불경하므로 월경 중의 여성은 교회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한 여자들을 마녀로 둔갑시켜 처벌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 여성사는 동양에 비해 훨씬 잔혹하고 처절했다. 서양의 여성해방은 겨우 1920년대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에 따라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동양여성사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여자를 범죄의 원흉리라든가, 여자의 음문은 지옥의 문이라든가, 여자를 악마(혹은 마녀)로 취급해온 사례는 없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도 여자를 천시하고 천대해왔으며, 남존여비사상을 음양이라는 철학적 근거에 의해 성립시켰다. 이에 관해서 <<중국의 남자와 여자>>의 저자 역중천은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우선 남자와 여자의 생리적, 심리적 특성에 근거하여 양의 성질은 굳세고 음의 성질은 부드러우며, 양의 특징은 동적이고 음의 특징은 정적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남성은 거칠고 열정적이니 이는 강(剛)이라고 할 수 있고 여성은 온화하니 이는 유(柔)라고 할 수 있으며, 남성은 싸우기를 좋아하니 동적이라 할 수 있고 여성은 내향적이니 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은 강하고 동적이며 음은 유하고 정적이다. 이를 일러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에는 상도(常道)가 있으니 강과 유가 판명된다.”고 하였다.  다음 음양의 범주를 확대하여 모든 영역에 이를 널리 적용시켰다. 예를 들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며,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햇빛을 비롯하여 비와 이슬 등을 내려주니 이는 남자가 정액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땅은 동식물 등 만물을 낳으니 이는 여자가 분만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또 햇빛은 강열하므로 양에 속하고 달빛은 부드러우므로 음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다음 철학적인 범주를 윤리학적인 범주로 전환시켰다. 예를 들어 철학적인 범주에서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므로 ‘천존지비(天尊地卑)’ 라고 했다. 천지의 관계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리하여 하늘과 마찬가지로 양과 강에 속하며 동적인 남자는 존귀하고, 땅과 마찬가지로 음과 유에 속하며 정적인 여자는 비천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존여비’의 논리이다. 따라서 강하고 동적인 자는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지만 유하고 정적인 자는 다만 집안에서 빨래나 하고 밥이나 지을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남자는 바깥일을 주도하고 여자는 안의 일을 관장한다(男主外, 女主內).’는 말도 생겼다. 이렇게 하여 비천한 자는 고귀한 자의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고, 유순한 자는 당연히 강건한 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인류의 큰 변화 중에 여성해방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남권중심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남자와 여자의 포괄적인 평등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국가나 민족은 없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일지도 모른다.
38    강강술래는 섹스의 축제였다. 댓글:  조회:6134  추천:65  2008-04-23
32. 강강술래는 섹스의 축제였다.      한국인은 대재다난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되어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학자인 임동권(任東權)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강강술래를 억지춘향으로 ‘强羌水越來’라고 한문으로 적고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고 어쩌고저쩌고 풀이하는 것은 견강부회의 표현이므로 이는 강강술래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놀이라 한다. 임동권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 <<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었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37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 댓글:  조회:13266  추천:125  2008-04-17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고대 중국에는 섹스를 통해 남자에게 도움을 주는 여인을 ‘입상여인(入相女人)’이라 했다. 입상여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천성이 온순하고, 기와 음성이 부드러우며, 가는 머리칼은 검고 약하며, 근육은 약하고 뼈는 가늘며, 키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맞춤해야 한다. 뚫어진 구멍이 높고, 음문 위에 털이 없고, 분비물이 많은 여자로 나이 5x5=25 사이에서 30세 이내로 아직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자이다. 교접할 때 분비액이 흘러넘치고, 몸이 요동치면 스스로 진정이 안 되고, 땀이 흘러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상대남자에게 잘 순응하는 행동을 취한다. 남자가 가령 방중술의 법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여인과 교접하면 손상되지 않는다.  <<황제·소녀진경>>에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의 조건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여자와 섹스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젊고 아이를 안 낳은 여자, 근육과 살이 탱탱한 여자, 실같이 가는 머리카락에 눈이 작은 여자, 동자의 희고 검음이 분명한 여자, 얼굴과 몸매가 부드럽고 매끈한 여자, 언어와 음성이 조화롭고 낮은 여자, 24지와 백 마디의 뼈가 다 같이 굴곡이 제대로 된 여자, 뼈가 굵지 않고 그 음부와 겨드랑이 아래에 털이 없거나 있더라도 가늘고 매끄러운 여자를 취하라.  가령 교접해서 좋지 않는 상은 쑥대머리에 노린내 나는 얼굴, 망치처럼 굵고 맺힌 여자, 이가 보리처럼 누렇고 목소리가 걸걸한 여자, 입은 크고 코가 높은 여자, 눈의 정기가 혼탁한 여자, 입과 턱이 높고 수염 같은 털이 나고, 뼈마디가 높고 크고, 머리칼이 노랗고 살이 적고, 음모가 굵고 억세고, 털이 많고 거꾸로 나있는 여자, 이런 여자와 교접을 하면 모두 사람을 해친다.  여자의 근육과 피부가 거칠면 교접하지 않는다. 몸매가 마른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남자 목소리에 기고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음부가 냉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정강이와 넓적다리에 털이 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쾌감을 못 느끼는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여자 나이 40이 넘으면 교접하지 않는다. 몸이 항상 냉한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음모가 거꾸로 난 여자와는 교접하지 않는다. 뼈가 강하고 단단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겨드랑이에 냄새나는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음수(淫水)가 계속 흐르는 여자와는 교접하지 않는다.  위 섹스하기 좋은 여자의 조건은 그렇다 치고 섹스하기 싫은 여자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상기의 조건을 다 따진다면 이 세상에서 ‘좋은 여자’가 극히 적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이 여성을 보는 기준과 현대인이 여성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고대인은 양귀비처럼 키가 자그마하고 아담지고 야무져 보이고 오동통한 몸매를 가진 여인을 최상의 미인으로 꼽았다. 이와 다르게 현대인은 키가 쭉 빠지고 조금 마른 몸매가 있어야 미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또 고대인은 머리카락이 노란 여자를 매우 꺼려했으나 현대인은 일부러 검은 머리를 노랑으로 염색하기에 분주하다.  더욱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고대인은 한 때 음부에 털이 없는 여자를 선호했으나, 과거 장시기 동안 특히 현대인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가 없다’는 관념이 뿌리 깊다. 그리고 옛날에는 여자 나이 40 대면 아이를 보통 예닐곱 많게는 열 명 정도 낳기 때문에 여자는 섹스에 대한 감각이 무디고 남자는 재미를 덜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래서 돈깨나 직위가 있는 남자들은 젊고 예쁜 여자를 첩으로 들이거나 기방출입을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사회 여성들은 기껏해야 아이를 하나 내지 둘밖에 낳지 않기 때문에 성적 기능이 별로 떨어지지 않고 또 옛날처럼 고된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있고 아이가 이미 컸고 해서 할 일이 적어 상대적으로 섹스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 그래서 여자 나이 40 대면 ‘호랑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바람 피우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대가 바뀌움에 따라 여성에 대한 기준도 변하는 것 같다.       
36    섹스는 양생지도이다. 댓글:  조회:5040  추천:66  2008-04-14
섹스는 양생지도(養生之道)이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중국춘추전국시대의 고자(告子)는 “식과 색은 인간의 본능이다(食色, 人之本也.).”라고 말했다. 이는 인류가 먹고 성교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자 기본 본능이라는 뜻이다.  다종다양한 생활패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류도 먹고 성교하는 것이 가장 큰 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너도나도 좋아하는 성교가 종교의 출현과 보급에 따라 천한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금구(禁區)’로 터부시되어왔다.  세계 4대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불교는 모두 정도가 다르게 성(性)을 금기시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을 담론하는 것을 회피하고 성을 천한 대상으로 여겨왔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불교는 독신주의를 제창했고, 이슬람교와 유교는 여성을 천하게 여기고 가령 성교를 하더라도 여성은 주동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남자가 하는 대로 피동적으로 따르기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을 단순한 후대번식의 수단(중세기 유럽에서 남녀가 섹스할 때 살과 살이 닿지 못하게 옷을 입은 채로 여인의 하체에 남자의 거시기를 들이밀만한 구멍만 빼고 했음.) 으로 여겼을 뿐 성을 통한 인간의 쾌락을 몰랐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 사회에서 성을 인간의 쾌락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섹스를 건강을 추구하는 ‘양생지도(養生之道)’로 여기고 제창한 사례도 있는바,  도교가 바로 그러했다.  도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황제소문경(黃帝·素問經)>>, <<황제영추경(黃帝·靈樞經)>>, <<황제소녀진경(黃帝·素女眞經)>>이 있다. <<황제소문경>>과 <<황제영추경>>을 합쳐 ‘황제내경(黃帝內經)’이라 하며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의서이다. <<황제소녀진경>>은 방중술에 관한 ‘연구서’이다.  <<황제소녀진경>>은 <방중술의 비결과 이해>와 <교접의 체위와 병고침>으로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방중술의 비결과 이해>에는 ‘많은 교접과 적은 배설’, ‘애무의 필요와 성감대의 마찰’, ‘애무의 예술적 표현’, ‘성교의 규칙’, ‘성기의 지켜야 할 윤리’, ‘여성의 성감의 측정’, ‘여성의 생리수요’, ‘여성욕구의 징표’, ‘발가락 운동에 따른 성생활의 관찰’, ‘방중술의 중요성’ 등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성교를 해야만 남녀가 모두 진짜 성의 즐거움을 맞볼 수 있다.  <어울림의 체위와 병고침>에는 9법, 8익, 7손이 소개되어 있다.  9법(九法)이란 용, 호랑이, 원숭이, 매미, 거북이, 봉황, 토끼, 물고기, 학 등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여 성교를 하는 아홉 가지 체위를 소개하고 아울러 이 ‘9법’을 통해 각종 부녀 병이 치료된다.  8익(八益)은 부동한 체위를 통해 정액을 진하게 하고, 기를 편안하게 하고, 장(腸)을 이롭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고, 맥의 조화를 이루고, 혈을 쌓고, 정액을 더하고, 온몸을 다스리게 한다.  7손(七損)은 여러 가지 체위를 통해 정기가 끊어지고, 정액이 흘러넘치고, 전신의 맥박이 불순하고, 기가 배설되고, 기관궐상(器官闕傷)하고, 모든 것이 닫혀 있고, 피가 마르는 등 일곱 가지 병 증세를 고친다.  이렇듯 세상에서 도교처럼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방중술을 연구한 사례가 없다. 이로부터 중국인이 얼마나 성교를 중시했는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교생활을 원만하게 하려는 분들은 한 번쯤은 <<황제·소녀진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35    서울의 중국동포활동실은 뭘 하는 곳일까? 댓글:  조회:4732  추천:55  2008-03-21
서울의 중국동포활동실은 뭘 하는 곳일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연길시에는 골목마다 노인활동실이란 간판이 수 없이 걸려 있다. 들어 가 보면 노인들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십중팔구는 젊은이들이 모여 마작을 논다. 통계수치를 보지 못해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림짐작해보아도 족히 수 백 곳이며 대다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 연길시 노인활동실이 요 몇 년 사이에 한국에 ‘이사’ 왔으며 개칭 ‘중국동포활동실’이란 간판을 걸고 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 대림동, 구로동, 봉천동, 신림동, 신대방동, 영등포, 건국대입구, 안산, 안양 등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곳에 퍼졌고 역시 대다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땅에서 중국동포활동실을 개설하는데 투자는 집을 맞는 보증금 1,000만원에서 2,000만 정도이고, 월세 30~60만원 정도, 마작기계를 수입하는 데 대당 100만원 들고 기타 비용을 다 합쳐봐야 200만원이면 된다고 한다. 수입은 기계 한 대 갖고도 밥벌이는 된다고 하니 3~4 대이면 수입이 짭짤할 것이다. 중국동포활동실은 마치 한국의 여느 기원처럼 푸른 혹은 노랑 종이를 붙여놓은 창문에 장기, 바둑, 마작이라고 써 붙이지만 실제로 장기와 바둑은 찾아보기 힘들고 기계마작만 갖춰져 있고 50대 초반이면 나이가 많은 편이고 20대부터 40대 사이가 많으며 실제로 돈 내기를 한다. 한국에 와서 돈 내기를 놀던 뭘 하던지 모두 나름대로의 자기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싱거운 소리할 일이 아니지만 아래와 같은 사례를 들어보니 안타까운 맘을 금할 수가 없다. 연길시에서 온 장모(41세)는 2006년 재입국으로 중국에 가 1년 머무는 동안 1,000만원 가까이 썼고, 2007년 11월 재입국할 때 100만원을 들고 와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해놓고 취업교육수업을 기다리는 며칠 사이 친구 따라 00중국동포활동실에 갔다가 마작을 놀았는데 처음에는 300만원 땄고 이에 재미 들어 계속 다니기 시작했는데 요 4개월 동안 취업교육도 받지 않았고, 집도 맡지 않은 채 매일 마작 판에 붙어 있었고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빌릴 만한 사람한테 모두 돈을 빌려 놀았는데 1,100만원을 잃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타산인가고 물었더니 이미 발이 푹 빠졌는데 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 나에게 되묻는 것이었다. 용정에서 시집 온 박모 여인(35세)은 2년 반 동안 열심히 다방을 운영하여 돈을 꽤 벌었다고 한다. 지난 구정에 우연히 친구 따라 00중국동포활동실에 가게 되었고 손이 근질거려 놀게 되었는데 1주 사이에 800만원을 땄고 이에 재미 들어 계속 놀기 시작한 것이 요 몇 달 동안 1,500만원을 잃었다. 한국인 남편이 마누라가 마작 판에 붙어 있으면서 가정생활에 등안 해 화가 나서 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서 일 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작만 놀고 살아가는 조선족의 수가 꽤나 된다고 한다. 물론 중국동포활동실에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업으로 마작을 노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수요가 많으니 공급이 생기고 따라서 중국동포활동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34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김정룡) 댓글:  조회:4412  추천:53  2008-03-1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5.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생활을 수년간 해본 조선족이라면 한국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당황한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국에 귤이 있나요?”, “중국에 전기밥솥이 있나요?” “중국에 00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조선족들은 ‘저것들이 중국을 보기로 더럽게 보네.’면서 속으로 욱하고 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반응이 조금씩 달라진다. 수년 전에 내가 창동에서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할머니는 나를 자기 아들은 몰라도 조카만큼은 생각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할머니로부터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름 아니라 맛 나는 음식과 과일을 자주 가져다주시면서 중국에서 이런 걸 마음대로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니 생겼을 때 기껏 먹으라고 하신다. 나는 처음에는 할머니의 성의를 생각해서 별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예, 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얼마 후 나는 “중국에서도 이런 걸 흔하게 먹는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나의 말을 믿지 않으셨다. 어찌되었든 지금도 나는 그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다. 며칠 전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사무실은 냉방이 없어 사우나처럼 더워 난리다. 한국인 셋, 조선족 셋이서 더위를 물리쳐 보려고 냉장고의 수박을 꺼내 쪼개 먹는다. 한참 시원하게 먹고 있을 때 한 한국인이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조선족 한 분이 “중국에 왜 수박이 없겠어요?”라고 화난 기색으로 대답한다. 한국인은 “아니, 우리 한국에서는 60~70년대까지 잘사는 집에서만 수박을 먹어볼 뿐 일반 서민들은 먹어보지 못해 현재 중국도 그렇지 않느냐는 뜻으로 묻는 겁니다.”라고 해석한다. 나는 듣다가 “당신, 이런 말을 조선족 앞에서 함부로 하면 한방 얻어터질 수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오.”라고 경고했다. 그날 시원하게 먹던 수박이 갑자기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식처럼 생각해주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소위 조선족을 상대로 일을 하는 한국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아무튼 기분이 찜찜하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00가 있나요?”라는 질문 속에는 물론 중국을 몰라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한 면으로 너희 조선족은 그토록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심리를 전제로 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사람도 값싼 중국산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전여옥은 저서 <<일본은 없다>>에서 일본인이 “한국에 가스레인지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세계화를 부르짖는 일본인이 우물 안에 개구리”라고 맹비난했다. 나는 거창하게 글로벌시대를 운운할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이 그저 한국인들에게 중국을 조금이나마 더 알기를 바랄 뿐이며 대다수가 먹고 살지 못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자식공부 혹은 더 나은 노후의 보장을 위해 한국에 왔기 때문에 너무 값싼 중국산을 대하듯 조선족을 대하지 말아 주십사! 고 부탁하고 싶을 뿐이다.  다음 한국인들도 조선족들 때문에 황당해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호박잎을 먹는가 하면 배추 푸른 잎을 가려내지 않고 김치를 담그는데, 조선족들은 한국인 앞에서 “이런 걸, 우리 중국에서는 돼지나 먹여요. 참 여기 사람들은 별난 걸 다 먹고 사네!”라고 쏘아붙인다. 이런 말을 듣는 한국인들은 겉으로든 속으로든 아무튼 “꼴깝들 하고 자빠졌네, 중국에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믄서 와 한국에 돈 벌려 왔디야?”라고 비꼴 것이다.  한국은 50~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조선족들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호박잎이나 돼지를 먹이는 어떤 산나물을 사람이 먹는다.  문제는 조선족이 한국인 앞에서 사실과 진실을 말해도 꼴깝 떤다고 비꼬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며, 한국인은 “중국에 00가 있느냐?”는 질문이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당하는 쪽은 조선족이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33    조선족은 왜 깨끗한가? (김정룡) 댓글:  조회:4925  추천:65  2008-03-1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4. 조선족은 왜 깨끗한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이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위생이 제일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즉 조선족은 가장 깨끗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어떤 민족은 깨끗하고 어떤 민족이 깨끗하지 못한 데는 모두 그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유태인은 개개인이 깨끗하게 목욕하고 몸을 가꾸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항상 깨끗한 형상을 보이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책임진다고 여긴다. 고대 인도와 중동지역에서 물에 뛰어들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로서 몸을 씻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 의례로 취급했다. 기독교에도 세례(洗禮)라는것이 있는데 물로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때문에 세례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종교를 신앙하는 민족들은 깨끗하다. 중국인은 동방문화를 창조했고 주변민족들의 개화를 도와왔지만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세례의식이 없었다. 중국인은 외면보다 내실을 다지는 민족이다. 고홍명(辜鴻銘)은 그의 저서《중국인의 정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실제로 진전한 중국인은 영혼이나 정감적인 생활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꼭 필요한 인간적 욕구마저 지나치게 무시하면서 생활한다. 중국인이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못하고 청결하지 않는 생활환경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민족은 역사적으로 내실보다 외면에 더 신경 쓰는 민족이다. 그리하여 조선민족은 깨끗하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역사적으로 목욕재계와 세례의식이 있었다. 이에 관한 실례로서《삼국유사》에 기재된 이야기만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박혁거세와 알영의 목욕 이야기 박혁거세는 2천 년 전 신라를 세운 초대왕이고 알영은 그의 부인이다. 그들 부부탄생설화에 목욕재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 양산아래 나정 옆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전광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백마 한 마리가 꿀어 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보니 한 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모습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경이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한지라. 이로 인해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 …… 당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인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할 것이라 하였다. 이날에 알영정 하에 계룡이 있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동녀 하나를 탄생하니 자태와 얼굴은 유난히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가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빠짐으로 그 내를 발천(拔川)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에 신화적 색채가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하여튼 2천 년 전부터 조선민족은 이미 목욕재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와 알영이 목욕을 통해 불온전 했던 인으로부터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가락의 계욕일 가락을 가야(伽倻)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경상도남부에 있었던 나라였다. 2천 년 전 그나라에 수로왕이 탄생하기 전에 이미 계욕일이라는 종교행사가 있었다. 계욕(禊浴)이란 요사를 떨어버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과 음력 7월14일에 물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킨다. 계욕이란 말 그대로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하고, 목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러운것을 씻어버리고 청결한 상태를 보존함으로서 요사가 인간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는 일종 액막이 세례의식이었다.  세째 목욕으로 징악하다 옛날 신라에 익선(益善)이라고 하는 한 지방관리가 있었는데, 탐욕심이 많고 부패해서 조정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정에서 익선을 잡아다 버릇을 고쳐주려고 했으나 눈치 빠른 익선이 도망갔기에 대신 그의 장자를 잡아다가 한겨울 극한의 날에 성안 못에서 목욕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더러운 탐욕심을 목용을 통해 씻어버리게 하려는 징악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넷째 목욕을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 옛날 신라에 부득과 박박이란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도를 닦으려고 산속에 들어갔는데, 부득이 남암에, 박박이 북암에 기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 질 무렵 나이 20된 여자가 있어 그 자태가 아름답고 향기를 풍기며 북암에 찾아와서 기숙하기를 청하였다. 박박은 “사찰은 청정을 중히 여기므로 너는 가까히 할 곳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남암에 찾아가니 부득이 불쌍히 여겨 기숙을 허락했다. 이윽고 밤이 늦어지자 여자가 불러 말하되 내가 마침 불행히 산고가 있어 바라건대 스님은 짚자리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아니든지를 못하고 은근히 초불을 밝히니 그녀는 이미 해산하고 또 목욕하기를 청하였다. 부득이 애달피 여겨 마지못해 통을 준비하여 여자를 그 가운데 앉히고 더운 물로 목욕시켰더니 물에서 향기가 풍기고 금액으로 변하였다. 부득이 크게 놀라니 여자가 가로되 “스님도 이 물에 목욕하시옵서.”하니 부득이 그 말에 쫓아 하니 홀연히 정신이 맑아짐을 깨닫게 되고 살결이 금색이 되고 그 옆에 연대(蓮臺: 부처님이 앉는 곳)가 생긴 것을 보았으며 마치 자신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느껴졌다. 박박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밤에 염계(染戒: 스님은 여자를 범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어긴다는 뜻)했을 것이니 놀려주려 하고 이르러보니 부득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박박이 넙쩍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니 도와 달라”고 말했다. 부득이 말하기를 “너도 저 물에 목욕하면 부처  님처럼 될 수 있다.” 과연 박박이 목욕을 통해 역시 부득처럼 되었다. 이상 네 가지 이야기에서 첫째는 목욕이 불온전한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수단이었고, 둘째는 액막이 행사였으며, 셋째는 징악수단이었고, 넷째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이었다. 조선민족은 옛날에 제사를 굉장히 중시했는데 제사용 술을 빚거나 떡쌀을 다른 때 반드시 깨끗하게 목욕하고 입에 백지를 물었다. 조선민족이 백색을 숭상하고 흰옷을 입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깨끗함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역사를 알고 보면 백의동포라는 말속에 조선 사람은 깨끗한 민족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목욕을 단순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수단으로만 간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인 더러움도 함께 씻어내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해왔다. 즉 목욕을 통해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여겨왔다.1635년 청나라가 조선반도를 침략했을 때 60만에 달하는 인질을 잡아갔다. 무능했던 조선왕조는 9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도 귀향시키지 못했다. 충신 최명길이 조정과의 합의를 거쳐은 2천5백 냥을 갖고 청에 가서 2만9천여 명을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인질중 절대다수가 여자였으므로 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환향녀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귀국했으나 그녀들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냉대와 비방과 욕설과 버림뿐이었다. 그 주요 이유는 “전개를 버리고 몸을 더럽힌 아녀자들이 어찌 선조님의 제사를 받들 수 있는가는 것이었다. 우의정 장유(張維)마저 소환되어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어 죽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길가에는 시신이 즐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은 자신의 비정 (정치를 잘못했다는 뜻)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초라고 탄식했다.이 난리판에 최명길이 다시 입궐하여 왕에게 진언했다. “전하, 궁여지책이긴 하오나,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오시고, 정해진 날에 환향녀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써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환향녀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리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왕은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지라 최명길의 건의에 따라 교지를 내렸다.“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 함경도는 압록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최명길은 슬기롭게 본래 조선민족역사에 있었던 목욕재계와 세례의식을 궁여지책으로 내걸고 수많은 환향녀를 구해냈다. 조선민족이 깨끗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체면의식이 강한데서 비롯되었다.중국인과 일본인도 체면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중국인의 체면의식은 겉보다 속을 챙기는 체면이고 일본인은 수치를 허용치 않는 체면이다. 중국인은 겉이야 어떻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의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체면을 강구한다. 그래서 중국인은 외면이 깨끗하지 못하다. 일본인은 모든 면에서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깨끗하다. 조선민족은 내실보다 외면에 대한 체면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즉 조선민족은 외면의 형상에 대단히 신경 쓴다. 세상에서 조선민족여성처럼 화장을 짙게 하는 민족은 없다. 그리고 옛날에 조선민족은 서로 뉘 집의 두지에 쌀이 얼마 있는 것까지 알정도로 터놓고 살았다. 이는 그만큼 서로 남남이 한집안식구처럼 지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동시에 조선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유난히 남의 말을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고 특히 남의 흉보기를 좋아한다. 이런 관습이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즉 조선민족은 남한테 흉을 잡히지 않게끔 노력하고 남의 말밥에 오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개개인의 외면형상과 집안을 늘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매우 중시해왔다. 농촌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마을에 한두 집은 꼭 게으르다. 마을사람들은 늘 게으른 집을 말밥에 올리고 또 제집안식구나 혹은 주변사람들이 게으른 표현이 있으면 아무개네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으로 말한다. 조선민족은 절대다수가 그 ‘아무개’에 속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더욱 깨끗하다. 조선민족이 왜 깨끗한가는 데 관해 역사적으로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 깨끗한 민족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썼다.
32    장례식장에서의 남녀교합(김정룡) 댓글:  조회:6193  추천:70  2008-03-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6. 장례식장에서의 남녀교합의식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장주(庄周:장자의 본명)가 젊었을 때 초나라(楚國)에 여행을 갔다. 그가 본 초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중원에 비해 너무 달랐고, 따라서 그들이 인이니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인위적이고 허위적인 문화속박이 없이 자연의 섭리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 몹시 부러웠다. 또 초나라 사람들이 손님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고, 성격이 모두 낙천적이어서 마치 고민을 모르고 살아가는 듯 했다. 또한 장주는 초나라의 어떤 풍속에 대해 몹시 놀라기도 했다.  어느 하루 장주를 도와주었던 젊은 오누이가 미친 듯이 경쾌하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장주가 물었다. “무슨 굉장한 기쁜 일이 생겼나 보지요?”  오누이가 대답한다. “그럼요, 우리 어머님이 지난밤에 죽었어요.”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듯 기뻐하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니요?”고 장주가 의아해 물었다.  오누이는 장주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중원처럼 사람이 죽으면 비통한 심정으로 울며불며 곡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生과 死는 모두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똑같이 기쁜 일이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고대사회에서 초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족들이 인간의 죽음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고 기쁜 일로 취급했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장사법과 제사법도 천차만별이다.  중국신화연구학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중국운남성(云南省)의 하니족(哈尼族) 등 여러 소수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젊은 남녀들이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광란하게 섹스를 한다고 한다. 만약 그 장소에서 서로 섹스 상대로 된 젊은 남녀가 부모들에게 혼인을 청하면 부모들이 거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볼 때 장례식장에서 마땅히 슬프다고 한바탕 곡을 해야 하나, 그들이 기쁘게 오락을 즐기고 섹스까지 하는 것은 굉장한 불효를 저지르는 행위로 인식될 것이다. 허나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행위야 말로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 효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례식장에서 오락을 즐기고 섹스까지 하는 풍속은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왜 그렇게 할까?  아득히 먼 옛날 인류는 남녀교합을 생식행위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신력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고 죽음에 항거하는 신적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인류의 생식순환이 사자의 부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고 사자 앞에서 열심히 남녀교합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주나라 역대 천자들이 매년 매신(媒神)에게 농업풍수를 기도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수많은 청년 남녀들을 모아 놓고 들판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난 후, 쌍쌍이 짝을 지어 후미진 곳을 찾아 ‘야합(野合)’했다고 한다. 공자님의 부친 숙양흘도 그런 장소에서 16세 꽃다운 안씨(顔氏) 녀를 낚아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던 것이다.  ‘매신’은 조상신이며 사람이 죽으면 모두 ‘매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자 앞에서 섹스 하는 것은 섹스의 생명 신력을 빌어 생명순환을 지속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1    조선족은 왜 냄비성이 강한가?(김정룡) 댓글:  조회:5014  추천:82  2008-03-0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3. 조선족은 왜 냄비성이 강한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민족은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한국에서는 ‘냄비정신’이라 하고 연변에서는 ‘쟁개비사상’이라 한다. 즉 조선민족은 흔히 쟁개비처럼 보르르 끓다가 일단 불이 꺼지면 바짝 식어버린다. 고추장 맛보기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조선민족이 흔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현상을 두고 생겨난 말이다. 여기 한 샆 저기 한 샆 뜨나가는 결국 물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민족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민족은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을까? 그 주요 원인은 멋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민족은 멋의 민족으로서 멋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생활철학처럼 굳어졌다. 멋의 특징은 시대성이나 유행성이 강하다. 조선민족은 늘 시대성과 유행성을 쫓다보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릴 수밖에 없다. 처음에 멋이 있는 일처럼 생각되어 시작해놓고는 새로운 멋이 눈에 뜨이면 당금 본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달라붙는다. 새로운 멋을 추구하는 것은 상향심이 높은 표현으로서 긍정적인 면이 있는 동시에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첫째 지구력과 인내력이 부족하다. 중국에는 《우공이 산을 옮기다》라는 우화가 있다. 이 우화는 중국인이 지구력과 인내력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반영한 대표적인 이야기다. 문화혁명 때 이 우공이야기가 《노삼편(老三篇)》이라 하여 당시 조선족도 글자를 때운 사람이면 전부 암송했다. 하지만 그저 정치적인 흐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웠을 뿐 그 내용을 음미할 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은 저마다 우공이야기를 외울 정도라면 다소나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이 개변되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우공이야기를 골백번 외웠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민족성격이란 아무리 태풍과도 같은 정치바람이라 할지라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민족성격은 그만큼 생명력이 질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지구력과 인내력이 강한 민족이다. 돈황막고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 벽화는 모두 4, 5백년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한무제한테 궁형(宮刑: 불알을 거세당하는 형벌)까지 당했고 또 한무제가 사마천이 애써 써놓은 원고를 수차례 불에 태웠다. 그러나 사마천은 중도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써냈다. 사마천의 지구력과 인내력의 덕분에 중국은 세상에서 역사기재가 가장 빠르고 완벽한 사서를 남기게 되었다. 당나라 무측천이 집정할 때 누사덕(婁司德)이란 재상이 있었는데, 동생이 지방 주자사(州刺使)로 부임되어갈 때, “만약 다른 사람이 너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화를 내지 말고 닦지도 말고 스스로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고 교육시켰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이 누사덕을 많이 헐뜯었지만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자기가 할일에만 몰두했다. 결국 누사덕은 오래 동안 관리노릇을 해먹었으며 재산도 많이 모았다. 일본인은 평생 사전을 하나 만들고 세월을 보낸 학자가 있다. 일본에서 만든 전쟁시대를 반영한 영화를 보면 중국이나 조선처럼 멋이 있는 전투장면을 많이 담는 것이 아니라 날씨가 춥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에 묵묵히 수일동안 강행군하는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다른 민족이 보면 대단히 갑갑증을 느낄 수 있으나 이것이 곧 일본인의 지구력과 인내력을 담은 내용이다.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얼씨구절씨구 띵까당 땡까당 하기를 좋아하여 역사기재를 남기지 못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사서가 있기는 하나 주로 중국사서의 기재를 근거로 하여 지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 조선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역사기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굉장히 애를 먹는다. 현재 한국에서는 쥐꼬리만 일을 놓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아무리 큰일이라도 일단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을 공부시킨다든가 소까지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하는 조선족이 일단 어른이 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연변도서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식인이 모인 직장의 직원들이 열 명 중 두세 명이 일 년에 책 한두 권을 읽으나마나 하고 나머지는 일 년 내내 책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연변사람들이 아무리 대학을 나와도 술판에서 한다는 얘기가 탸오펑(挑風: 남녀가 서로 끼어 앉는다는 뜻)이요, 정부요, 돈이요, 거기다 여자들 앞에서 걸쭉한 쌍소리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영양가가 있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지식인들의 처지가 이러하니 기타 사람들의 정황이야 더 말해 무얼 하랴. 한국도 인구 당 독서율이 1,5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은 10,7권이고 일본은 9,8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국과 일본의 국민소질이 그냥 맹목적으로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들 나라들이 세계앞자리를 달리고 있는 데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흥미만으로는 안된다. 반드시 지구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다. 조선족이 문화수준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지금의 상태대로 나아간다면 앞으로 곤란하다. 연변의 학부모들 중 적지 않는 사람들이 하루건너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다니지 않으면 동네 마작 판에 붙어있으면서도 애한테는 공부를 하라고 한다. 어른들이 이 모양인데 자녀들이 어떻게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연변의 학부모들은 정신을 차리고 인내력이 있게 집에 붙어 있고 또 아이들의 곁에서 공부를 도와야 한다. 나의 사촌형수는 문화혁명시기의 고중생이라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딸애가 매일 저녁 늦게 까지 공부하는 것을 동무해주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도 아닌 세월을 몇 년 간 보냈다. 엄마의 정성덕분에 딸애가 중점대학에 갔고 성품도 매우 밝다. 만약 엄마가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딸애가 성공할리가 만무하다. 유태인이 과학자가 많은 것은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유태인 엄마들은 우리연변의 엄마들처럼 술판, 노래방, 동네 마작 판에 붙어있지 않는다. 둘째 빨리 빨리하는 성격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것은 빨리 끓고 빨리 식어버린다는 뜻이다. 조선민족은 두뇌가 민감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에 빨리 달라붙는다. 이는 매우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뒤를 꼬아야하는데 중도포기가 많다. 세상의 모든 민족은 거의 다 마지막고비가 관건이라고 말하지만 조선민족은 “시작이 절반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일을 일단 시작해놓으면 마치 다 된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자마자 돈을 벌기도전에 돈을 쓰는데 신경 쓴다. 한국지하철역에 가보면 사람마다 뛰어다니거나 걸음이 대단히 빠르다. 필자의 걸음이 중국에서는 빠른 편에 속하지만 한국에 가면 만만디에 속한다. 한국 사람들이 굳이 이번 차를 놓치면 큰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냥 생활습관과 생활절주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마다 마치 집구석에 불어라도 난 것처럼 뛰어다닌다. 한국인이 생활절주가 빠른 것은 자본주의생존경재의 압박도 있겠으나 본래부터 전승되어온 관습이다. 조선에서도 천리마속도로 사회주의건설을 한답 시고 맨날 뛰어다닌다. 조선민족은 어릴 때부터 밥도 빨리 빨리 먹으라 하고 신부름도 빨리빨리 하라고 하고 …… 모든 일에서 빨리빨리 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에 냉수에 밥을 말아서 삽시간에 후르륵 하고 먹어치우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다. 중국인은 밥상이 오랜 것이 특징인데, 중국인은 먹었다는 결과보다 먹는 과정을 WMF긴다. 이에 비해 조선민족은 먹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었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중국인은 요리를 먹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민족은 술을 마시기 위해 안주를 먹는 것이 절대적이다. 조선민족이 술주정뱅이 많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로 급하게 빨리빨리 마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해외동포를 포함해서 7천만인데 그중에 노벨과학수상자가 단 한명도 없다.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라고 소문났는데 왜일까? 일본에서는 대학교수도 아닌 평범한 직원이 2002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조선민족은 일단 대학을 나오면 빨리빨리 성취하는 것이 급선무다. 조선민족이 추구하는 성취는 빨리빨리 진급해서 멋있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민족은 진경윤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더욱이 평범한 직원이 연구 성과를 올려 노벨상까지 받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없는 일이다. 연변의 경우 조선족사회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가히 “지식 세계를 대상하는 지식이 아니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자연분야가 아니고 사회분야를 말한다. 중국조선족지식인이 《4서 5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연변대학 사회과 교수가 《성경》을 보고 이해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즉 조선족지식인은 중국고전지식도 없고, 자민족역사지식도 없고, 《성경》지식도 없고 불교지식도 없다. 《코란: 이슬람교경전》에 대한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조선족들이 발표한 글들을 읽어보면 배울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조선족지식인들은 모두 성취감에 빠져있다. 셋째 대충대충하는 성격 세상에서 조선민족만큼 모든 일에서 ‘괜찮다’ , ‘일없다’고 하면서 대충대충, 건성건성, 어지간히 하는 민족은 없다.조선민족이 대충대충하는 성격이 조선시대에 “무슨 일이나 따지고 들면 양반이 아니다”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민족이 대충대충하는 성격은 과정보다 결과를, 즉 무슨 일에서나 빨리빨리 결과를 얻어 빨리빨리 성취하려는 심리소질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멋에 대한 추구가 마치 종교처럼 굳어져왔는데, 멋에는 그렇다할만한 기준이 없다. ‘제멋대로’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멋은 제나름이다. 그 어떤 기준이 설정되지 않은 것을 신앙하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충대충하는 성격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서양 사람과 일본사람은 애를 키울 때 칼로리가 어떻고 영양가가 어떻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키운다. 절대 애가 하자는 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족엄마들은 거개가 애가 하자는 대로 해준다. 조선족엄마들이 애한테 모질지 못한 것은 정의 문화 때문이다. 정의 문화는 합리(合理)보다 합정(合情)에 치중하기 때문에 대충대충하게 된다. 넷째 높은 데만 바라보는 성격 조선민족은 큰일은 못해내고 작은 일은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또 하나의 성격특징이다.우리주변에는 작은 일은 시시하게 여기고 놀고 있으면서 맨날 떵대 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현상도 역시 빨리 또 크게 성취해서 멋있게 살아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어떤 일에 반짝 열을 올리다가도 어느 천 년에 부자가 되겠느냐면서 금방 때려치운다. 우리주변에는 미용원을 꾸렸다가 식당을 경영하고 다방을 챙겼다가 안마방을 운영하다가 결국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무슨 일을 벌렸으면 꾸준하게 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 산에서 바라보면 저쪽 산이 더 높아 보이고 저쪽 산에서 …… 맨날 높은 산만 쳐다보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한 민족의 성격이 일단 형성되면 세세대대로 전승된다. 아무리 외부환경의 지배가 있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조선반도는 수천 년 동안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중국인의 깊이와 넓이를 배워내지 못했다. 36년 동안 일본인의 지배를 받았지만 일본인의 정확함, 진지함, 완벽함을 배우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타민족을 따라배우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태인처럼 자기네 것을 지킬 것은 지키면서 타민족의 우수성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만 세계에 소문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조선족이 무수한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좀 느긋하게 깊이와 넓이 그리고 세밀함을 갖춰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30    조선족은 왜 음주가무를 즐기는가?(김정룡) 댓글:  조회:4967  추천:56  2008-03-0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중심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2. 조선족은 왜 음주가무를 즐기는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필자가 관광업에 종사할 적에 중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당지사람들로부터 당신네 조선족은 술을 잘 마시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는 조선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관습이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이다. 우리민족의 일상 언어에 ‘수작을 걸다’ ‘수작을 피우다’ ‘개수작을 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수작이란 말은 음주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술상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혹은 손님에게서 받은 잔을 되돌려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술을 붓거나 스스로 따라서 마시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아무튼 ‘수작’이란 말은 술판에서 유래된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을 욕되게 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왜일까? 조선민족은 하도 술판이 많고 또 술판에서 이래저래 명분을 달아서 권하면서 마시다보면 귀찮을 때가 많다. 그리하여 ‘수작’이란 말이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조선족은 술만 마셨다 하면 노래와 춤판을 벌리는데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전승되어왔다. 그럼 조선족은 왜 술판 노래판 춤판을 벌리기를 좋아할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제천의식 제천의식이란 농경문화에 있어서 주로 5월 파종이 끝난 후와 10월 수확이 끝난 후 하늘에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 3세기 중국학자인 진수(陳壽)가 동이족들의 제천의식에 관해 <<위지동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흔히 5월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남녀노소가 모여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손에 손 잡고 땅을 쾅 밟고 머리는 땅을 향했다가는 하늘을 쳐다본다. 손발이 한데 어울리는 춤동작이 마치 중국의 탁무와 비슷하다. 10월에 수확을 마치고 반복해서 이러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위의 기술은 마한의 제천의식에 관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민족의 여러 갈래가 모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내용도 비슷했다. 고구려의 경우 그 민중은 가무를 즐기는바 나라 안에서 촌락마다 저녁이면 남녀가 모여서 서로 노래유희를 하였으며··· 5월 제천의식 때에는 나라 안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우리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 년 역사는 족히 된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연변의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끝나거나 가을 수확이 끝나면 마을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놓고 남녀노소가 모여서 됫놀이를 하였는데 이 관습이 역시 위에서 말한 조상들의 제천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둘째 한의 역사  한국의 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고 한다. 우리민족은 비록 유태인처럼 나라를 잃지 않고 용케도 버티어냈으나 너무나도 빈번한 외래침략 때문에 나라는 늘 쑥대밭이 되었고 백성들은 가슴에 멍들고 한이 맺혔다. 그리고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 양반과 상놈간의 차별이 심했고 관리들은 당파싸움에다 부패했으며 또 자주 발생하는 자연재해 때문에 조선민족은 더구나 가슴에 한이 맺히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 낙천적이었던 우리민족은 술과 노래와 춤으로 한 많은 인생살이를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아리랑’ 인데 ‘아리랑’은 바로 한 많은 조선민중의 심정을 반영한 노래이다. 우리는 흔히 ‘아리랑’이 무슨 고개이름인줄로 알고 있는데 실제 ‘아리랑’은 한 많은 인생살이 때문에 가슴이 아리다는 뜻이고, ‘쓰리랑’은 가슴이 쓰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바로 조선민중의 아리고 쓰린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아리랑’이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는 것은 곧바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한 많은 민족인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팔도에는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울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아리랑 노래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셋째 명분의식 우리민족은 체면이 강한 민족이다. 매사에 있어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한다. 즉 음주가무 하는 데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술판에서 타인에게 술을 권할 때 꼭 무슨 명분을 찾아서 연설하고는 권한다.  우리민족은 슬프면 슬프다고 마시고 기쁘면 기쁘다고 마시고 심심하면 심심하다고 마신다. 이래저래 술 마시는 데는 모두 명분이 있다. 연변축구팬들은 연변축구팀이 이기면 기쁘다고 마시고 지면 슬프다고 마시고 비기면 아쉽다고 마신다. 그러니까 축구경기결과가 어떻든 간에 술을 마실 명분은 다 있다. 넷째 판의 문화 판이란 말은 우리민족만이 쓰는 특이한 언어이다. 술판, 노래판, 춤판, 도박판, 오락판, 개판, 한판 벌리다는 등 이러한 말은 타민족언어로 정확히 번역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필자의 가문에서는 어른들의 생일이면 마치 큰잔치처럼 친척들이 모여 술판, 노래판, 춤판을 한바탕 벌리었다. 아마 조선족가문에서는 거의 다 이러한 관습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세상에서 노래방이 가장 발달한 곳이 곧 한국과 연변이다. 이는 역시 과거 조선민족의 판문화의 연속의 표현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연길에는 돈을 빌려서라도 노래방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판에 참여하기를 즐긴다는 표현이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민족은 없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다. 우리민족이 자신의 속마음을 타인한테 털어놓는 것은 역시 옛날부터 각종 판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주 벌어지는 술판, 노래판, 춤판에서 서로 자신의 고충을 얘기하면서 서로 도우려고 하고 기쁨은 함께 나누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정신이 매우 강했다. 우리민족이 타민족에 비해 타인의 일에 관심이 많거나 동정심이 많은 것도 역시 각종 판의 문화에서 형성된 관습이다. 조선족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판의 문화에서 생겨난 민족성격이다. 예하면 출국바람을 하나의 출국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무슨 큰 판이 생겼다 하면 너나없이 뛰어든다. 연길에 수백 곳의 노인활동실이 있는데 거기에 모이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판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표현이다. 그 내용이야 오락이든 도박이든 하여튼 판에 뛰어들기 좋아하기 때문에 노인활동실은 늘 만원을 이루고 있다. 판의 문화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2년한일월드컵> 때 길거리에 나선 7백만에 달하는 붉은악마의 참여사건이다. 축구의 종가인 영국도, 터밭이 없이는 살아도 축구장이 없이는 못 산다는 브라질도, 국내리그로 세상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붉은악마와 같은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민족과 민족 간의 문화 차이이며 한국인만이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옛날부터 흘러온 판의 문화의 우월성이 표출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응원열기는 하나의 노래판 춤판으로 여기고 한바탕 멋있게 벌려보려는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낸 사건이다. 다섯째 종교가 없는 민족 중국에는 유교와 도교가 있고 또 도교이론으로 해석한 중국식대승불교가 있다. 일본에는 신도가 있다. 허나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신선사상과 무속신앙이 발달했을 뿐 교리교의가 있는 그렇다할 만한 종교가 없었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교와 불교가 발달했으나 유교는 주로 윤리도덕과 제사의식에 많이 사용되었고 불교는 기복신앙이 위주이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혹은 서양이나 인도처럼 또는 중동의 이슬람처럼 뚜렷한 종교 신앙이 없었다.  우린민족은 그렇다할 만한 종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옛날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 관습이 하나의 생활상의 종교로 되어왔다. 서양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민족은 반드시 둘 이상 모여서 판을 벌려야 술을 마신다. 즉 우리민족이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세상에 술을 마시면서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거나 잔칫집에서 바가지를 물독에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다. 이상 다섯 가지 이유로 하여 우리민족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 추기를 즐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음주가무관습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생활신앙이 되어왔으며 본래는 매우 좋은 관습이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 관습이 많이 변질되어 부작용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예하면 사촌이 병들어 죽는다 해도 술을 권하거나 술판에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왕따 시키거나 갓 시집온 색시한테 기가 넘어가도록 술을 권한다. 조선족은 이상하게 애를 유치원에 보내놓고는 쩍하면 학부모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간다. 분옥(가명)이란 여인은 애를 조선족유치원에 보냈다가 끊임없는 술판에 지쳐서 소학교는 기를 쓰고 한족반에 보냈더니 세상 편안하다고 말한다. 소학교와 중학교 학부모회의는 학부모들이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가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었다. 어린이절에 애를 하나 놓고 가족 및 친척들이 적게는 대여섯 많게는 열 명 정도 모여 음식을 갖추고 맥주를 둘러메고 야외에 가서 기껏 먹고 마시고 한바탕 노래와 춤판을 벌린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또 노래방에 간다. 3.8부녀절이 오면 남자들이 여성들을 위로한답시고 연일 기껏 먹고 마시고 논다. 3.8부녀절에 술판이 없는 남자는 인기나 센스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변했다. 서울시는 50명당 음식점 하나가 있고 기타 유흥업소도 세상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업소가 가장 많다는 뜻이다. 필자는 세상에서 인구비례를 따지면 연길이 먹고 마시고 노는 업소가 가장 많다고 생각한다. 출국해서 번 돈을 연길에다 투자하는 항목을 살펴보면 절대다수가 먹고 마시고 노는 업소를 꾸린다. 조선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본래 좋은 관습이었는데 오늘날 도를 넘어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데 앞으로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사람마다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9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김정룡) 댓글:  조회:5010  추천:58  2008-03-07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07년 8월 말 필자가 중국에 갔을 때 연변00잡지사 사장님이 <<장백산>>, <<도라지>>, <<연변여성>>, <<청년생활>> 등 조선어 잡지들을 나에게 한 보따리 주었다. 무거운 대로 메고 한국에 와서 시간 나는 대로 뒤적여 보았는데 한 가지 ‘아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조선족문학평론가들이 아직도 조선족문학을 평론하는 글에서 이른바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민족대학 00교수는 조선족문학사를 평론하는 장편의 글에서 ‘봉건’이란 어휘를 무려 수십 차례 사용하면서 ‘봉건’으로 도배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 생각된다. 잘못된 표현의 요점을 말하자면 조선족문인들은 아직도 중국과 조선의 수천 년의 봉건역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고, 우리민족전통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500년을 거쳐 생겨나고 자리매김 된 것을 마치 수천 년 동안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민족역사에는 아예 봉건사회가 존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역사에서 봉건제는 서주시기 중국, 중세기 유럽, 중세기 일본 등 세 곳에만 존재했을 뿐 기타 지역과 나라들에는 아예 봉건제가 없었다. 이른바 봉건제란 왕이 기존의 토지 혹은 군대를 이끌고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생겨났으며, 땅을 분봉 받은 영주들은 장원 내에서 정치적으로 인사권이 있고, 경제적으로 세금을 받아들일 권리가 있고, 군사적으로 군대를 소유할 권리가 있어 독립적인 왕국의 형태를 갖춘 소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봉건제는 중국, 유럽, 일본 등 세 곳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중국은 서주 초기 정전제와 분봉제에 의해 봉건제가 실시되었고 따라서 각 제후국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왕은 허수아비가 되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춘추전국시대에 진입했고, BC221년 진영정이 천하를 통일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시대에 접어들었고 중앙집권제는 청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중국은 진나라부터 청말까지의 정치제도가 봉건제가 아니라 통일중앙집권제였다. 중세기 유럽은 왕이 각 지방호족들에게 군대를 내줄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장원영주제가 실시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왕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영주들이 소유한 땅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고 한다. 영주들이 실권을 갖고 있는데 비해 왕은 虛權에 허덕이었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봉건제였다.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과 달리 이민족의 땅을 정복하여 장원영주제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 백성과 최하층 관리로부터 자신들이 개척한 땅을 층층이 위로 헌납하는 데서 장원영주제가 생겨났고, 이것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다른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이며 봉사의 문화이다. 현재 한국인들이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하여 봉사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즉 봉사란 일본인의 특유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쇼오군은 백성을 다스리는 행위를 통치라 여기지 않고 천황에 대한 의무적인 봉사라고 여긴다. 봉사란 일본인의 神道에서 유래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개념에서 형성된 특이한 문화이다. 그러므로 횡적이거나 위로부터 아래로의 복무를 봉사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어폐가 있다. 봉건제의 개념은 대충 이러하다. 그런데 왜 현대중국에서 봉건이란 말을 그토록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예로부터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 즉 역사관이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맹자가 말한 태평시대가 되었다가 혼란시대, 혼란시대로터 또 다시 태평시대를 반복하는 一治一亂의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사회는 목저지가 있고 역사는 마치 우리가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해서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 것처럼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기독교적인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이다. 칼·맑스는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에 의해 인류사회를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 등 5단계로 나누었는바, 이것을 이른바 맑스 역사5단계설이라 한다. 칼·맑스의 이론을 천하의 유일진리로 받아들인 현대중국은 그의 역사5단계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울러 중국역사를 5단계설에 두들겨 맞추느라 애썼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획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고 곽말약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시대 획분에 각기 다른 설을 내놓았다. 결국 곽말약이 권위를 갖게 된 이유로 중국역사 시대 획분은 그의 설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근대사회라 금을 긋고 그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진의 통일중앙집권제 역사까지 봉건사회라고 단정해버렸다. 아울러 전통사회 문화, 사상, 습관 등등을 통상적으로 ‘봉건’을 붙혀 말해왔다. 중국문화환경에서 자라고 배워온 조선족들은 필터의 여과장치 없이 현대중국역사관, 즉 맑스의 역사5단계설에 물젖어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왔고 아울러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쩍하면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가 ······”라는 말을 쓴다. 물론 이북이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체제였고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을 받아들여 줄곧 통일중앙집권제로 흘러온 우리민족역사를 이 이론에 두들겨 맞추고 추광해왔기 때문에 중국과 이북의 영향을 받은 조선족들은 더구나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인 예와 효, 이혼불가, 재가불가, 여성의 정조문제 등등은 근근이 조선조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일 뿐 “수천 년의 봉건사회를 통해 수립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려 말기까지 이혼자유 재혼자유였다고 한다.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丈家에 간다는 뜻인데 조선조 초기까지 남자가 결혼하면 먼저 여자 집에 가서 일정 시간을 살다가 여자를 데리고 남자 집에 와서 사는 관습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민속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소위 우리민족의 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전통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유교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현재 조선족들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말할 때 쩍하면 수천 년의 봉건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수천 년 역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문화혁명시기와 후기까지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등으로 말하던 것을 근래에는 중국에서 TV매체에 돌풍을 일으킨 易中天 교수를 비롯해 학자들과 문인들이 역사에 관련해 쓴 글들을 보면 ‘전통사회’, ‘전통사상’, ‘전통문화’, ‘전통습관’으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대신에 ‘전통’이라 말한다. 중국인이 말하는 ‘전통’이란 본능적으로 도교를 받들고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해온 전통(물론 불교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을 의미한다. 우리민족의 수천 년 역사는 ‘멋’을 의미내용으로 하는 풍류도의 仙史이며, 1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 적게나마 받아들인 도교적 요소,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때 정치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두들겨 맞춰 놓은 ‘봉건’이란 말을 버리고 ‘전통’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8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김정룡) 댓글:  조회:4613  추천:42  2008-03-05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11.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은 본래 '총명하고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예절 밝은 민족'이라고 소문났었다. 허나 오늘날 이러한 소문은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로 되어버렸다. 조선족은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한탕 치기를 하고, 말썽을 일으키고 일하 기 싫어하는 것이 현주소다. 조선족은 이러한 현상 때문에 '본가집사람 (한국 인)'한테도 환영받지 못하고 '시집식구 (한족)'들로 부터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대에 장춘에 있는 각 대학에서 조선족학생을 적게 모집하는 바람이 일어났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혀 받지 않겠건만 상급의 소수민족정책 때문에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고 해서 적게 모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조선족학생들은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쩍하면 술을 마시고 사람을 쥐어 패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기율이 산만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족이 예절바른 민족이라는 형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일단 조선족학생이라면 학교  측에서 도리질한다. 1990년대 조선족과 한국인간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서로간의 기대가 컸다. 허나 한국인에게 심어준 조선족의 인상이라면 한탕 치기를 하는데 정신팔고 오늘 좋고 내일 나쁘고 등등이다. 조선족가운데서도 특히 연변사람들이 문제라는 것 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연변조선족가운데 일부사람들이 자신이 연변사람이라는 것을 속이고 있다. 그 이유는 연변사람들은 약아빠지고, 거짓말이 많고, 남의 등을 쳐 먹고,……등등의 나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이다. 예전에 흑룡강 조선족이 연변사람이라면 도리질했는데 현재 한국인마저 도리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화두는 역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꼬집고, 혹자는 사회적 환경지배문제라고 역설한다. 필자는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보다 사회적환경지배문제가 더 크고 사회적 환경지배문제는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으로 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조선민족처럼 부모자식간의 정이 두터운 민족은 없다. 서양인과 일본인은 자식이 성인이 되면 저절로 살게끔 독립시킨다. 멀리 말고 한족도 자식이 자립하게끔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 한족은 자식들이 공동분담으로 부모의 양로문제 를 해  결한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자식이 성인이 되어도 끼고 있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우려고 애쓴다. 조선족은 부모의 재산이면 나의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그래서 부모가 잘사는 집 애들은 분발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족은 부모가 돈벌이하는 것이 ‘나의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끼를 위해서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애들은 당연히 부모의 것이 곧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일하기는 싫어하고 돈쓰는 데 신경 쓴다.  다음 조선족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옛날 양반문화가 뿌리 깊어 더욱 그러하다. 서양인은 직업적 차별이 없다. 즉 공부를 잘 해야만  출세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다. 공부를 잘했건 못했건 또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치 않고 열심히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하다. 서양인이 직업적 차별이 없는 것은 예수가 목수출신이기 때문이다. 일개 목수출신이 공부를 잘 했을리가 만무하다. 이와 반면에 유교를 뼈 속까지 절어들 정도를 받아들인 조선민족은 공자가 공부를 잘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맹모삼천이란 이야기와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란 이야기가 조선족사회에 널리 전해진데 비해, 옛날에 장사해서 부자가 되었다거나 도자기를 만들어 잘살았다는 얘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족은 이러한 역사적 영향 때문에 막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천시하고 아울러 사회적으로 천시 받는 일이기에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기피한다.  이상 두 가지 원인 외에도 조선족이 멋을 추구하고 체면의식이 강하고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등 기타 원인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원인을 갖고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족의 역사가 150년 정도라고 본다면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현상이 근근이 20~30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선조들은 만주 땅에 이주해 와서 개간한 땅이 조선반도의 두 배나 된다. 만약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면 어떻게 그 엄청난 땅을 개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현재 연변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 팔던 사람들도 일단 출국해서 환경이 바뀌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 간 조선족의 90%이상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막일을 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실례만으로도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다면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주요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연변의 사회 분위기에 있다고 본다. 즉 현재 실업자들만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하면 무릇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해 서는 얼굴을 보이고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10시가 넘으면 그놈의 핸드폰이 울어 대기 시작하면 점심약속이 되고 점심에 술을 마시고는 오후에는 끼리끼리 모여서 마작 판을 벌리지 않으면 노래방에 간다. 심지어 “약은 사람은 대낮에 노래방에 가고 저녁이면 오솝소리(고스란히) 집에 붙어  있는다.”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특히 손님접대를 책임진 사람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2002년 연변민속 절에 참가했던 일본대표단 5명은 “죽어도 다시 연변으로 가지 않겠다.” “죽어도 연변 사람들의 피는 수혈 받지 않겠다.”는 등등의 말을 하면서“연변행이 고생 행” 이였다고 볼멘소리를 했다고 한다. 즉 연변에 머무는 동안 식사 시에 술을 기껏 마시게 하고 안마방에 노래방에 줄 끌리워 다녀서 지쳤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들은 연변에서 큰 행사가 있은 뒤에 반드시 따라붙는 얘기들이다. 왜 연변사람들은 돈 팔고 “실컷 대접”해 놓고는 고맙다는 소리보다 오히려 불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기회에 자기 들이 놀기 위해서인가? 그 사정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연변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모임을 벌려도 마찬가지다. 같은 피를 물고 난 한국인은 무슨 일 때문에 모임을 갖는 것이 지 연변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해 모임을 갖지 않는다.  지식인이 모여 있는 직장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업여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작 판이 아니면 술판 노래방에 정신팔고 있다. 이것도 역시 일하기 싫어하는 표현이다.  필자는 1993년에 태국에 갔을 때 매일 낮에 보고 들은 것을 저녁이면 메모했다가 홍콩에 머문 3일 동안 바깥구경도 못하고 호텔에 쑤셔 박혀 글을 썼다. 연변일보에 한 면을 다 치지하는 글이었다. 당시 나는 직업상 연길에 돌아와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연변에서는 전문 학자가 아니 사람이 글쓰기 위해 청하는 술판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웃기는 얘기가 된다. 본래 글쓰기가 나의 흥미였는데 어쩐지 연변분위기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최근 몇 년 간 한국에 가서 공자, 부처, 예수 등 엄청난 공부를 많이 했고, 심지어 예전에 단군이란 ‘ㄷ’자도 모르던 형편에서 우리민족역사공부도 많이 했다. 만약 내가 전문학자도 아닌 사람이 연변에 계속 머물고 있었더라면 그 많은 공부를 했을리가 만무하다. 하여튼 연변은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이미 사회적인 분위기로 되어버렸다. 이는 실로 큰 악재다. 이러한 악재가 수십 년간 더 지속되어간다면 곤란하다. 연변을 떠나 관내거나 출국해서 공부한 사람들이 연변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데는 경제적 문제나 연구 환경 등 여러 가지 여건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으로 돌아가면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연변의 사회분위기가 “금”을 “돌”이 되게 할 소지가 많다. 하다면 연변의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한때 큰가마밥 정책 때문에 사람들이 나태해진 원인도 있고, 다른 하나는 개혁개방바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그 어느 민족보다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획일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가장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집체 때 조선족마을이 한족마을보다 보편적으로 잘 살았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집체생산방식이 해체되니 조선족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피를 집지 못했다. 예하면 필자는 개혁개방초기에 농촌에 있었는데, 한족들은 농사철에는 열심히 밭을 다루고 농한기에는 비를 틀거나 광주리를 틀어서 도시에다 팔았다. 그들은 일 년 내내 쉬지를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대충 농사를 짓고는 그 긴긴 겨울에 내내 화토놀이 등 오락에 빠져 있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한족은 열심히 돈을 벌고 있지만 조선족은 돈을 벌기 앞서 돈을 쓰는 것부터 배웠으며 일단 내 돈이든 남의 돈이든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먹고 마시고 노는데 탕진해버린다. 연변에서 “한족은 돈을 벌고 조선족은 돈을 쓰고  있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연변의 한족은 조선족의 돈을 벌고 있다.”는 말도 이미 아주 묵은 얘기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때 본래 얼씨구 절씨구를 좋아하던 조선족이 문화혁명이란 “호랑이”가 없어지자 일단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났노라고 마음껏 실컷 먹고 마시고 놀게 되었다. 연변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가장주요 이유는 페쇄성에 있다. 조선반도는 예로부터 주체문화가 아닌 언저리 문화였다. 조선족일세들은 여전히 그 페쇠적인 언저리문화를 갖고 왔으며 우리후대들은 여전히 그 페쇄적인 언저리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일부에서는 어릴 때부터 우리말, 우리교육, 우리풍속습관,…… 모든  면에서 우리 것을 고수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들의 민족심은 매우 기특한 일이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라면 우리조선족은 ‘우리 것’때문에 더욱 페쇄적인 언저리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혹시 예전에는 ‘우리 것’이 훌륭한 문화였다고 말할수는 있겠으나 오늘날 격변하고 있는 시대에 언저리문화인 ‘우리 것’이 낙후된 측면이 많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연변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바뀌려면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바로 중국내지에 진출하든 출국하든 여건만 허락된다면 갈 수 있는 사람은 다 떠나라! 필자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에 대해 일부 조선족공동체해체위기에 아우성을 치고 계시는 분들은 펄쩍 뛸 것이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페쇄적인 언저리문화를 계속 고집하다가 ‘망하기’보다 차라리 떠날 수 있는 자는 모두 떠나서 바깥세상을 배우고 돌아온다면 우리조선족사회는 해체되지 않을뿐더러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물론 목전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류동이 사회적문제로 떠오르고 있으나,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한국 간 조선족의 99%가 아무리 연변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도 결국에는 본고장에 돌아가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내지에 진출한 다수가 젊어서 돈을 벌고 늙으막에 연변에 돌아가 살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지든 외국 이든 그곳의 선진적인 것을 배우고 터득하게 되어 그들이 돌아온다면 페쇄적인 언저리문화가 많이 바뀔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사람이 되기”에 크게 노력하고 있기에 그러한 생활방식을 갖고 돌아온다면 조선족사회는 한결 더 밝아질 수 있다.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이지만 일단 여건이 허락된다면 모두 떠나라! 더구나 조선족은 자식을 품에 끼고 있기를 원하는데, 자식을 사람이 되게 하려면 내지든 외국이든 보내서 인생 공부를 시키라! 한국한양대학에 유학 간 이군은 연변대학을 다닐 때까지 엄마가 식사 시에 간을 맞추는 일까지 챙겨줄 정도로 마마보이였다고 한다. 엄마의 모든 배려 하에서 오로지 공부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서 처음 에는 자살할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모든 것이 막막했다고 한다. 3년이 자나고 보니 이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집 생활이 넉넉해서 돈근심은 없지만 한국학생들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따라 하게 되었는데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생활이 매우 충실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한다면서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하라고 늘 전화 오는데, “이것이 곧 연변조선족의 잘못된 자식교육방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절로 돈을 버니 재미도 있고 돈이  귀중한 줄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집에서 보내온 돈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부모한테 되돌려드릴 계획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큰 변화이며 또 얼마나 기특한 일안가? 이런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연변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가 계속 연변대학에 남아 석사, 박사 공부를 했더라면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병이 위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 받아 재생하는 도리를 잘 알고 있다. 페쇄적인 언저리문화가 바뀌려면 외부의 ‘피’를 수혈 받는 길밖에 없다.   
27    음모(陰毛) 없는 여성은 왜 재수 없나? 댓글:  조회:9420  추천:61  2008-03-03
   음모(陰毛) 없는 여성은 왜 재수 없나?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이야기 1.  옛날 조선에서 왕이 음모 없는 여인과 교접을 해보니 기가 막히게 좋더라. 그래서 뭇사람들이 탐낼 가봐 “음모 없는 여인과 교접하면 3년 동안 재수 없느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의 이 말이 민간에 퍼져 사람들이 음모 없는 여성과 교접하면 재수 없다고 믿고 음모 없는 여성을 기피하는 관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야기 2.  조선시대에 13세에 장가갔던 아버지가 18세에 장가가는 아들보고 “계집이란 시집와서 애를 낳아야 아래에 털이 나는 법이니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공자님의 말씀처럼 받들던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있다가 첫날밤 동방에 들어보니 마누라의 아래에 털이 무성해 있는 것을 보고 ‘처녀가 아니’라고 한바탕 소동을 벌렸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혼사를  파하고 며느리를 친정에 돌려보내라고 고집을 부렸고, 기타 친인척들은 여자 나이 17세인데 왜 아래에 털이 없겠는가라고 하면서 털이 있는 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주장하여서야 시비가 가라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3.  고대 유럽과 중국의 상층 계층의 여성들이 한때 음모가 미에 손상이 있다고 밀어버리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자들이 음모가 있거나 무성한 여성들을 꺼려 하는 데서 생겨난 ‘해프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4.  한중일 동양 삼국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에서 거시기가 큰 남자들은 활개 치고 다니고 거시기가 작은 남자들은 위축되어 있다고 한다. 또 음모가 있는 여성들은 당돌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음모가 없는 여성들은 ‘앞’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 5.  수년 전 한국KBS9시뉴스에, 음모 없는 젊은 여성들이 병원에 가서 음모를 심는 수술을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자가 “왜 음모를 심으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들 왈 “음모가 없으니 남자들이 재수가 없다고 하길래······”    아무튼 여성의 음모에 대해 역사적으로 또한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의 음모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모두 남권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성들에 대해 임의적으로 ‘잣대’를 적용해놓고 자신들의 ‘쾌락’으로 관습을 만들어 생겨난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과거 한때 음모 없는 여성을 선호하다가 현시대 사람들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 없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현재 한국인들 대다수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가 없다는 관념이 상기 이야기 1에 의해 생겨나고 전해 내려와 그렇다고들 믿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이런 인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다만 중국인의 음모 없는 여성을 재수 없다고 여기는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중국인은 본능적으로 도교를 숭상해왔다. 도교는 자연주의를 제창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에 속한다는 것이 도교의 관념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리구조도 역시 자연의 원리와 같다고 보는 것이 도교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은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소출이 낮은 땅을 불모지지(不毛之地:인재가 나지 않거나, 어떤 분야에서 성적이 매우 낮은 것을 뜻함)라 하는데, 여기서 毛는 초목을 뜻한다. 풀이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은 곡식을 심어도 소출이 나지 않는다. 메마른 땅(불모지지)을 아무리 가꾸어도 힘만 들뿐 소출이 나지 않아 헛수고로 재수가 없다. 중국인은 여자의 생산성과 땅의 생산성을 연관시켜놓고 여성을 땅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여성의 음부에서 아이가 생산되므로 생산부위는 반드시 대지의 풀을 상징하는 음모가 있어야 생산성이 풍부하고 또한 가꾸어도(성교) 기분이 좋다. 거꾸로 음모 없는 여성과 열심히 교접해봐야 마치 불모지지를 가꾸는 것처럼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인은 성교를 교미(交尾)라 하는데, 원의(原意)는 털과 털이 교접한다는 뜻이다. 만약 음모가 없으면 ‘교미(성교)’의 참뜻이 상실된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이 털이 있는데 비해 극소수 여성들이 음모가 없으니, 이런 여성들과 교접을 하면 진정한 성교의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위와 같은 중국인의 관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즉 음모가 없는 여성이 성교를 잘 못한다거나 아이 낳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시대 사람들은 마땅히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 없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26    점심이란 말의 유래(김정룡) 댓글:  조회:4446  추천:56  2008-02-23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24. 점심(點心)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 각종 퀴즈대회에 ‘아침, 점심, 저녁 중에 어느 것이 한자어인가?’는 문제가 잘 출제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맞추는 자는 반도 안 된다. 답은 점심이며 한자로 ‘點心’이라 적는다.  점심이란 말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사람들은 아침을 늦게 먹고 저녁을 일찍 먹었으며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후 점심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한 스님이 아침을 먹고 먼 길을 떠났다. 도중, 갈 길은 멀고 저녁시간도 멀었는데 너무 많이 걸어 배가 몹시 고파서 현기증이 나고 쇼크 할 직전에 이르렀다. 길 가던 손님이 뭔가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은 구걸했다. 손님이 스님을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주어, 스님이 그것을 조금 먹고 나니 기력이 회복되고 정신이 버쩍 드는 느낌이었다(아마 현대인들도 이런 경험을 거의 다 해보았을 것이다). 점심이란 바로 배가 몹시 고플 때 기력을 회복시키고 정신이 들게 만드는 음식을 말한다.  그런데 왜 그 음식을 점심(點心)이라 했을까?  현대인은 정신을 비롯한 사유, 생각, 의식 등등이 두뇌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서양문화의 유입에 따라 우리 의식 속에 박힌 개념일 뿐이다. 중국의학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두뇌에서 산생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생겨난다. <<황제내경>>에 “심장이 신을 주재한다(心主神).”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모든 의식 활동을 가리키며 마음이 곧 심장과 동일한 개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 머리  속에 ‘심주신(心主神)’의 의식이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인은 정신을 비롯한 모든 의식 활동을 생산하는 곳이 곧 심장이고 ‘점(點)’이란 터치한다는 뜻이며 정신이 나게 만드는 것을 ‘點心)’이라 했고, 그 점심이 바로 ‘심’을 ‘점’하게 만드는 간단한 음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은 간식을 ‘點心’이라 하며 정오에 먹는 음식을 오반(午飯)이라 한다. 우리민족은 하루 세끼 중 정오에 먹는 음식을 점심이라 하는데, 이것이 곧 중국인과 다른 점이다.  중국인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점심을 좀 잘 먹고 저녁을 굉장히 잘 먹는다. 우리민족은 아침저녁을 잘 먹고 점심을 대충 먹으니 아마 정오에 먹는 음식을 ‘점심’이라 했을 것이다.                      -한중동포신문 제117호   
25    연변이면 주체성, 옌볜이면 친한(漢)파?(김정룡) 댓글:  조회:5030  추천:60  2008-02-2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자료집연변이면 주체성, 옌볜이면 친한(漢)파?  -발음법에 대한 논란, 언어학적 접근이 필요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연변을 옌볜이라 부르지 말아주세요!”라는 글이 발표되자 이에 대한 한국 주요언론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글 쓰는 이들이 모두 문제의 본질을 떠나 정치적인 논쟁으로만 비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대단히 유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여 논의해 보려 한다.  첫째, ‘음독이냐? 중국어발음식 표기냐?’의 논란에 대하여  세인이 다 알고 있는바와 같이 우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한문을 사용해왔다. 한문은 우리민족 언어와 발음이 다르다. 그리하여 한문을 우리말 발음으로 읽는 음독법을 발명해냈는데, 하늘 천(天) 따 지(地)라 하는 이른바 천자문이 바로 음독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 음독법이 우리민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현재 우리말 중 75%가 한자어에서 온 어휘이다. 한문의 발원지가 중국이므로 우리민족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도 역시 음독으로 표기해왔다. 이 수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한문음독법이 한글전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중국어발음 식 그대로 옮기는 표기법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한국정부에서 지시를 내리고 방송, 신문들이 따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北京을 북경이라 하는 것과 베이징이라 부르는 것에 논쟁이 생기게 되는 근원이 곧바로 수천 년 전통의 음독법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음독법을 타파하고 현실적으로 중국어발음을 따르겠는가에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한국정부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한중수교가 건립되었고 양국 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정부는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전통적인 음독법을 포기하고 중국어 발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이 중국을 빨리 알고 교류를 더 활성화시키는 지름길이라 판단하고 선택한 표기법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정부는 중국과의 교류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하여 한중교류에 있어서 한국과 한국인이 보다 빠르고 보다 쉽게 중국에 접근하려는 의도 하에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통일로 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음독법보다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면 이것이 진보적인 개혁조치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北京에서 장기체류하고 있는 한국 분에게 “‘북경’에 와 있다는 느낌과 ‘베이짱에 와 있다는 느낌 중에 어느 쪽인가?”고 물었더니 “당연히 ‘북경’이 아닌 ‘베이짱이란 느낌이 훨씬 더 강하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 듯 한국정부의 조치가 근거 없는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음독을 따르면 주체성이고 중국어 발음을 따르면 사대주의? 음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것을 쓸개 빠진 사대주의의 표현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인이 東京을 ‘동경’이라 하면 주체성이 있고 ‘도쿄’라 하면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못난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유치할까? 이는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한국인의 피해의식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한국인은 이러한 잠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단순한 언어학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약시키기고 있다.  넷째,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역사문제와 연관시키는 것이 바람직 한 일이 아니다.  음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연변’과 ‘옌볜’의 표현을 놓고 고구려를 들먹이고 항일을 거들고 그 땅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역사와 연관시키고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한국정부와 방송, 신문 등을 민족의 얼을 잃은 00이라고 공격하고 있는바, 이는 올바른 행위라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과거 역사가 어떠하든지 현재 연변은 엄연히 중국 내 속하고 있는 땅이자 행정구역일 뿐이다. 물론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라는 특징 때문에 우리 것을 지켜가고 있고, 또 특히 언어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전부 전통적인 음독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허나 우리 조선족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이를 한국과 한국인에게 반드시 우리조선족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하거나 한국이 중국어발음을 따라 ‘옌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할 필요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연변을 제외한 중국의 모든 지명은 중국어발음을 따라도 상관없고 오직 연변만 ‘옌볜’이라 부르지 말라고 호소하거나 항의하는 것은 편협한 지역주의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개척한 땅이 연변뿐만이 아니라 동북3성 및 내몽골 지역을 포함해 한반도의 두 배나 된다. 우리선조들의 얼과 넋이 연변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조선족들이 연변, 연변···만을 고집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한국정부는 연변을 중국 내 일부로 여기고 있을 뿐 중국과 동떨어진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연변에 있는 延吉, 龍井, 圖門을 중국어 발음을 따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 방위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연변을 제외한 기타 중국지명을 따로, 연변을 따로 하지 않고 통 털어 통일적인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허물이 될 수가 없다. 조선족이 한국과 한국인에게 연변을 내세워 특수하게 따로 대해달라는 주문은 중국 내에서 스스로 고립만을 자초할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다섯째, 한국학자들은 3류급 코미디 발언을 그만두고 품위를 지키기를 바란다.  한국인 김창진 교수는 그의 <<金昌辰의 방송언어 바로잡기>>란 글에서 길림성을 지린성이라 하는 표현에 대해 “거기가 무슨 지린내가 나는 지역입니까?······”라는 3류급 코미디 같은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욕은 듣는 자가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 이 글을 본 필자는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김창진 교수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지린성’에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을 지린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교수가 할 얘기가 아니라고 본다.  소위 교수라는 분의 입에서 이렇듯 천박한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천박한 감정을 갖고 대하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이런 천박한 표현이 결코 주체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여섯째, 청도와 칭따아오란 호칭이 불러온 혼란  한국에서 현재 중국의 지명과 인명에 대해 음독과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것이 혼재하고 있어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 김00는 작년 3월에 청도에 가려고 00여행사에 티켓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곳이 청도가 아닌 사천성 성도(成都)였다. 그는 중국어 한마디도 모르고 당지에 지인도 없어 1주간 죽도록 고생하고 나서 청도에 갔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00여행사를 찾아 항공료와 추가비용을 환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00여행사에서는 ‘청도는 발음이 청두(成都)와 비슷하므로 우리는 成都로 가는 줄 알았다. 당초에 왜 칭따아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우리 여행사에서 책임 질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떠나 하여튼 전통적인 음독과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 사이 혼란이 존재하고, 또 이로 인해 실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와 방송, 신문 및 기업체들에서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실행하고 있다면 국민들도 하루 속히 이에 적응해야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중국어발음을 따르려면 올바르게 쓰자는 것이다. 중국에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발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들을 보면 90% 이상이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귤이 탱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江澤民을 장쩌민으로, 蔣介石을 지앙제스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실로 웃기는 일이다. 江과 蔣은 중국어로 모두 JIANG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는 장으로 다른 하나를 지앙으로 옮기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또 우리민족 언어에 분명히 쌍모음이 있어 한문 JIANG을 능히 ‘쟝’으로 정확히 옮길 수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장’이나 ‘지앙’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한국에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일보 박승준 중국전문기자는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옮길 경우 통일적으로 쌍모음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결과다.” 그렇다면 정확히 옮길 수 있는 쌍모음을 무시하고 단모음을 사용하여 이상하게 옮기게끔 한 결정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럼 한국에서 진정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옮길 경우 쌍모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가? 답은 아니다. 연변을 ‘옌볜’이라 말하는 것은 그래 쌍모음이 아닌가?  더 한심한 것은 연변은 한글로 중국어발음을 정확히 따르면 분명히 ‘얜뱬’이지 결코 ‘옌볜’이 아니다. 어느 유식한 양반이 ‘얜뱬’을 ‘옌볜’, ‘얜지’를 ‘옌지’라 지어냈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는 표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방송, 신문을 비롯해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정확하게 옮긴 것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한국에서 한문에 도사라 자부하는 도올 선생마저 山東을 ‘싼똥’으로 옮기고 있다. 아니 산동이면 산동이고 싼뚱이면 싼뚱이지 뭐 뚱딴지 같은 ‘싼똥’이란 말인가? 그는 또 孔子를 쿵쯔라 옮긴다. 子는 중국어에서 輕聲으로서 성조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子는 ‘쯔’가 아닌 ‘즈’로 옮겨야 한다. 도올 선생이 이러할진대 기타 분들의 상황이야 더 말치 않아도 너무나도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한국인이 제멋대로의 표기법으로 중국인을 만나 대화할 경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물론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정확히 옮길 수없는 것들도 있다. 예하면 福建省이란 福에 F음이 들어 있어 우리말로 정확히 옮길 수가 없다. 이 F음을 제외하고는 우리민족 언어가 발음이 풍부해서 거의 정확하게 옮길 수 있다. 허나 한국에서는 중국어 발음과 거리가 먼 제 나름대로의 표기법을 남용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중국에는 또 邯鄲學步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한단은 조나라의 수도였는데 거기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매우 세련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 시골소년이 한단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이불짐을 메고 한단에 가서 오래 동안 머물면서 열심히 배웠다. 헌데 그 소년은 한단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려 기여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나의 생각이 기우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이 전통적인 음독법도 잃어버리고 중국어발음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한단학보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필자는 한국에서 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음독을 고수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한국과 한국인에게 우리와 같게 할 것을 주문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독이든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이든 이는 한국과 한국인의 선택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한국이 중국어발음을 따르겠으면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귤이 탱자가 되는 현상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24    "사이트는 노가다 판?" 댓글:  조회:4867  추천:45  2008-02-15
“사이트는 노가다 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리차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은퇴 후 <<미래의 영수들에게>>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세계적으로 반향이 컸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젊은이는 전도가 없다. 그 시간이면 책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라.”는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70~80년대 어떤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병들게 만든 주범이 곧 텔레비전의 출현이다.”고 지적했다. 인간세상이 텔레비전의 출현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인터넷이란 새로운 ‘통신문화’가 나타났으며 인류역사 이래 인터넷처럼 급속히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은 유례가 없다. 세상만사가 ‘이’와 ‘폐’가 동반되듯이 인터넷의 출현도 인간사회에 신속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많은 ‘이’를 갖다 준 동시에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 정도로 ‘폐’ 또한 적지 않다. 어찌되었든 현대인으로서 인터넷을 모르면 미개인으로 취급되리만치 인터넷은 널리 보급되어 있다. 필자는 남들이 다 하는 인터넷을 모르는 미개인으로 살다가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겨우 2006년 8월부터였고, 인터넷 검색은 겨우 2006년 12월부터였다. 웃기는 얘기를 하자면 2006년 2월 내가 조선족문제에 관련된 주제로 8 편의 시리즈와 1만자에 달하는 <<한류의 우와 열>>이란 글을 원고지에 써서 들고 연변여성, 연변문학과 예술, 연변문학 등 잡지사를 찾아갔더니 책임자들이 나보고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맞냐? 중국에서도 웬만한 사람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나는 내 배짱대로 귀 잡지사의 취지에 맞으면 원고지에 쓰던 컴퓨터로 쓰던 무슨 상관이지? 관건은 작품성아니냐였다. 결국 나의 작품은 실렸다. 연변문학의 김삼 사장은 초면에 나를 대놓고 컴퓨터 배우기가 아주 간단한데 아직도 원고지에 글 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컴퓨터를 몰라 수치심을 느낀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글만 잘 쓰면 되지않느냐였다. 2006년 4월 말부터 동포들의 자진귀국 프로그램 때문에 나는 4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바쁘게 보냈고 매 신문에 한 두 편의 글을 써야 했는데 역시 원고지에 쓰고 타인이 타이핑해서 신문에 올리다보니 너무 미안해서 8월부터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원고지에 쓴 글이 잡지와 신문에 수 십 편이 발표된 후 2006년 11월 27일 동북아신문 이동열 편집국장이 나한테 전화가 와서 나의 글 <<사례로 본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국제결혼실태>>를 인터넷에 올리려한다고 했다. 또 웃기는 얘기지만 그 때까지 나는 세상에 인터넷신문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 후에 주변사람들이 나의 글이 여러 사이트에 올라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사이트가 뭐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접촉하게 된 것은 겨우 2007년 1월부터였다. 그 시기 이동열 국장이 나의 과거의 글들을 올리자고 제의해왔다. 그래서 동북아신문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질적으로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양적으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되고 말았다. 나는 글 쓰는데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쓴다. 첫째 현실적이면서도 이색적인 주제를 선택한다. 둘째 어려운 지식을 통속화하여 대중성이 있게 한다. 셋째 나만의 독특한 필법을 구사한다. 넷째 직설법을 사용한다. 나의 글이 한창 많이 발표되고 있을 때인 2007년 여름 나와 같이 일을 하던 한국인이 사이트는 노가다 판이니 김선생이 글을 많이 올리다 보면 후회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글을 많이 올렸고, 2007년 8월 말 연길에서 김삼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나의 글을 조글로에 올리자는 제의에 대답했다. 사이트가 노가다 판이라는 한국인의 말을 들은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게 되었다. 우선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접촉한 이후로 나는 한 해 100권 정도의 독서량이 10권을 맴돌 정도로 현저하게 떨어졌다. 물론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보는 책도 있지만 웬지 서책을 읽기보다 기억에 못한데도 이제는 서책을 펼치는 일에 게을러져 인터넷을 배운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 개인적인 사정이고 객관적인 사정의 요지를 아래와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하겠다. 첫째 댓글문화 예전에 잡지나 신문에만 글을 발표할 시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가 카페나 사이트들에서 나의 글을 올리기 시작해서부터 솔직히 기분이 나쁠 때가 많았다. 한 인간이 작품을 쓰는 데는 많은 정력이 소모되고 그 만큼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나는 작품을 많이 쓰지만 매 편의 글마다 오랜 기간을 거쳐 사색하고 쓴다. 작품을 쓰는 것은 뼈를 깎는 노릇이다. 그런데 나의 작품이 나의 허락이 없이 아무 곳에서나 게재하고 불필요한 인신공격까지 받는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나는 실리적이므로 명예나 이름 따위에 연연하는 인간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카페나 사이트들에서 나의 글이 인기가 높고 클릭 수가 확실히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따위 인기나 클릭 수에 연연할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다. 어떤 네티즌들이 아니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인신공격을 해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불필요한 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없다. 물론 어느 매체나 카페 사이트들에서 나를 지지하는 수가 나를 공격하는 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관리자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는 몰라도 일부 카페나 사이트 관리자들이 악성 댓글을 제지하는 관리를 하게 되면 클릭 수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 그냥 놔둔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관리가 안 되면 결국 저자와 네티즌 사이에 불쾌한 일이 일어 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내가 며칠 전 조글로에 글을 올리면서 조선족대모임카페나 모이자 사이트 사회 어중이떠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문맥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인신공격한 네티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일부사람들이 내가 마치 조서족대모임이나 모이자 회원을 모두 어중이떠중이로 비하한 것처럼 떠들고 있으니 참으로 불쾌하다. 하지만 나는 변명이나 사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글이 다 맞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토론이나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악성댓글을 용납할 생각은 없다. 나는 본래 조선족사회에서 글 썼던 사람이 아니다. 1993년 연변일보에 3 편의 글을 발표한 후 13년 동안 글에 손을 대지 않다가 2006년 3월부터 현재까지 100 여 편의 글을 써냈다. 나는 직업 문인이 아니고 업여 흥미로 글을 쓰기 때문에 그 따위 인기나 명예를 따지지 않는다. 나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밥 먹고 남한테 인신공격을 받으면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분명한 것은 차라리 나를 대놓고 때려죽일 놈이라든가, 머저리, 바보 이런 식의 악성댓글은 그렇거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필법에서 드러나듯이 나의 성격은 매우 직설적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설적으로 나오는 사람한테는 악감을 갖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문인들의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취하는 척하면서 상대를 비하하는 수법이며 분명히 누가 봐도 A라고 인정할 사실을 A가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발뺌하려는 문자유희를 일삼는 문인의 얄팍한 처세술에 나는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나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한 말에 대해선 책임을 진다. 이런 용기가 없으면 나는 글을 쓰지 않는다. 둘째 저작권의 문제 내가 알기로는 작품은 저적권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동북아신문의 이동열 국장과 조글로의 김삼 사장이 나의 허락을 받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작권을 존중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요녕일보와 같은 정규화된 매체에서 마저 나의 글을 나의 허락이 없이 자기네 마음대로 게재하고, 조선족대모임, 모이자, 아리랑 등 많은 카페거나 사이트에서 나와 한마디 말도 없이 나름대로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여러 곳에서 많이 글을 올려주면 지명도 어쩌고저쩌고 할지 몰라도, 나는 지독할 정도로 바보스런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즉 나의 글을 찬성하는 네티즌들한테 여태껏 감사하다 고맙다는 인사의 댓글을 올린 적이 없고, 다른 사이트들에서 나를 홍보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본 적이 없다. 볼거리가 있으면 읽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 나는 나의 허락이 없이 글을 마음대로 올리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나의 글이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글이 값어치가 없이 아무 곳에나 떠돌아다니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정중하게 나의 입장을 밝힌다. 동북아신문과 조글로 말고는 다른 그 어떤 신문매체나 카페 사이트들이 나의 허락이 없이 나의 글을 올리지 말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메일 : kzl0917@naver.com 전화 : 010-7921-0109
23    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김정룡) 댓글:  조회:4791  추천:54  2008-02-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일부 한국민족주의학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세기 초 소장학자로서 중외(中外)에 명성을 떨쳤던 호적(胡適)은 “대담하게 가설하고 소심하게 증거(증명)를 구하라(大膽假設, 小心求證).”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겼다. 곽말약(郭沫若)은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되 실사구시 해야 한다(卽異想天開, 又實事求是).”고 말했다.  학문이 발전하자면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고 대담하게 가설해야 한다. 하지만 학문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고 실사구시 해야 한다. 허나 한국의 일부 민족주의학자들은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지 않고 기상천외하게 가설만 내놓고 마치 그 가설이 정설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1> 이일봉(李一峰) 씨는 저서 <<환단고기실증>>에서 “동아세아 땅은 한민족의 땅이었고, 아세인은 한민족의 후예이고, 환인이 동아세아를 지배했던 우두머리였고, 도교는 한민족이 지어낸 것을 중국에서 역수입해서 사용했고······” 등등의 증거도 명확치 않은 주장을 어처구니없이 수두룩하게 펴냈다. 너무도 한심한 주장이라 반박해야 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 그대로 ‘분서처리(焚書處理)’되어야 마땅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례 2> 1980년대 중 후반에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설치다가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례 3> 요즘 한국에서는 증거도 없이 청동기역사 연대를 500년 앞당겨 서술하는 것을 고교국사 교과서에 넣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허나 민족주의학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동북공정에 맞서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다. <사례 4> 단군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신화로 취급하는 데 반해 일부에서는 단군은 실존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단군이 신화인물이냐? 실존인물이냐? 는 논쟁에 끼어들어 어느 ‘입장’에 손을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군에 대해 신화를 말하던 실존을 운운하던 역사, 종교, 신화 등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을 갖고 논하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닌가는 소견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단군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서 강무학(姜武鶴) 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강무학 씨는 <<세시풍속(歲時風俗)>>, <<단군은 실존했다>> 등 많은 저서를 펴낸 학자이다. 그런데 필자는 강무학 씨의 저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민족 선사(仙史), 풍류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에 대한 이해가 매우 결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자와 노자의 ‘별칭’조차 모르고 단군의 실존을 서술하다보니 설득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보아내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강무학 씨가 어떻게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을 잘못 해석했고 또 이로 인해 그가 얼마나 우리민족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최치원(857~950?)은 통일신라 말기 사람으로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갔고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있다가 29세에 귀국하여 저물어 가는 신라를 구해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토황소격문(討黃巢激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20여권이 있으며 특히 <난랑비서문>이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영향이 가장 크다. <난랑비서문>의 원문: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虛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번역문 :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일러 ‘풍류도’라 한다. 그 가르침의 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삼교(유 불 도)가 이미 자체 내에 들어 있어 모든 군생을 감화시킨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다.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 강무학 씨는 이 <난랑비서문>을 완전히 주관억측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현묘’란 낱말은 한나라 초기부터 도가에서 흔히 쓰던 말로서 당나라에 와서는 그 낱말의 뜻이 좁아져 오두미교(五斗米敎)와 방술 등을 현묘한 도라고 했다······.  ‘현묘지도’란 한나라 초기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시대부터 있어왔던 말이다. <<장자>>에서 ‘득의망상(得意妄象)’, ‘득의망언(得意妄言)’을 제창하면서 ‘언’은 도구이고 ‘의’는 목표라 보고 ‘의’를 얻으면 ‘언’을 버리라 했다. 여기서 ‘언’은 말을 지칭하고 ‘의’는 현묘한 도의(玄妙之道意)를 뜻한다. 그러므로 현묘지도란 말은 ‘의’를 뜻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강무학 씨는 계속해서 ‘노사구(魯司寇)’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라서 다음과 같이 엉뚱하게 해석했다.   이 문사에서 선생(최치원)은 ‘사구’라고 했는데, ‘사구’는 죄인을 다스리는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중간에서 사도의 ‘도(徒)’가 잘못되어 ‘구(寇)’자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라면 더욱 좋을 듯싶다······.  이 해석은 필자가 접해본 중 가장 엉망으로 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중국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자가 노나라에서 잠깐 ‘사구’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슨 사도가 어쩌고저쩌고 할 것 없이 ‘노사구’란 곧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원문을 이해 못해 무엇이 잘못되었다느니 어떻게 하면 좋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학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무학 씨는 ‘노사구’가 공자를 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주주사(周柱史)’가 곧 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도 역시 몰라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위’라는 말을 썼을망정 유교적 입장에서 설명한 사상이 짙다. 또 ‘주주사지종(周柱史之宗)이란 주나라의 역사를 꾸미는 기둥과 마루라고 했다. 이 문사는 존주사상이 짙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석이 너무 한심하다. ‘주(周)’는 주나라를 뜻하고 ‘주(柱)’는 기둥역할이라는 의미이고 ‘사(史)’는 역사가 아니라 곧 사관이다. 옛날에는 관리를 ‘사관(史官)’과 ‘무관(巫官)’으로만 나누었다. 노자는 당시 주나라 ‘중앙도서관’ 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문에서 ‘주주사’는 주나라 으뜸가는 사관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노자를 지칭한다. 강무학 씨가 ‘역사를 꾸미고’, ‘존주사상이 짙다’는 등의 해석은 완전히 얼토당토한 억측에 불과하다.  강무학 씨는 <난랑비서문>의 해석 끝 부분에서 최치원을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면서 “선사와 풍월은 단군의 선사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나무랐다.  사실 최치원은 강무학 씨의 견해와 완전히 달리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민족주의자였다.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공자를 ‘노사구’로, 노자를 ‘주주사’로 표현한 것은 공자와 노자가 별로 대단한 것 없이 그저 공자는 노나라의 일개 관리였을 뿐이고, 노자는 일개 도서관 관장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중원문화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이 주체성을 갖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  또한 최치원은 우리민족역사를 타민족역사와 다르게 선사로 규명하고 따라서 선사는 풍류도를 맥으로 흘러왔고, 풍류도에는 삼교의 종지가 다 들어 있으며, 단군으로부터 시작되고 화랑으로 이어졌으며 민족의 ‘얼’을 형성시킨 역사는 독특한 ‘풍류의 멋’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려고 <난랑비서문>을 함축성이 강하게 지어놓았던 것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역사를 연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단군실존을 확실하게 말하려면 최저한도로 <난랑비서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곤란하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역사기재를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국고경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국고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역사를 운운할 수 있다. 강무학 씨처럼 ‘노사구’가 공자를, ‘주주사’가 노자를 가르키는 말인 줄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면 아무런 설득력도 얻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부터 조소를 받게 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22    23.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자에겐 돈을 빌려주지마라" 댓글:  조회:5325  추천:54  2008-02-12
  23.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자에겐 돈을 빌려주지마라”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아침에 이불 밑에서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놈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유행어가 있다.  성인 사내는 보편적으로 아침에 자고깨나 눈을 뜰 무렵이면 거시기가 꼴려 있다. 만약 거시기가 꼴리지 않으면 성적기능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 왜 위의 유행어가 생겨났을까?  사내는 삼대 욕(慾)이 있어야 한다. 즉 식욕, 성욕, 일욕이다. 이 삼대 욕 중에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며 일욕은 후천적인 것이다. 한 인간이 식욕이 떨어지면 성욕도 떨어지고 따라서 일욕도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먹는 것은 병신을 포함해 그 어떠한 인간도 다 먹고 산다. 먹는 인간이라 해서 모두 성생활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잘 먹는 인간도 거시기를 잘 못 쓰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남자가 남자다운 가장 기본조건이 거시기를 잘 쓰는 것이다. 만약 거시기를 잘못 쓰는 인간은 마누라에게 구박당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사라지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거시기를 잘못 쓰는 자는 다른 일에서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거시기를 잘 쓰는 사내는 마누라에게도 큰소리 치고 밤일을 잘해주면 아침 밥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고, 또 밖에 나가서도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고, 또한 그러한 사내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거시기를 잘 쓰는 사내는 아침에 이불 밑에서 거의 100% 꼴린다. 거꾸로 거시기를 잘 못 쓰는 자는 아침에 이불 밑에서 꼴리지 않으며, 이러한 남자에게는 희망이 없으므로 돈을 빌려주면 돌려 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시기가 잘 꼴리고 성생활을 잘하는 것을 ‘정력이 좋다’ ‘정력이 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력이란 말은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음양설에 의하면 인간은 양인 하늘기와 음인 땅기에 의해 생겨났으며 따라서 인간의 몸은 음양으로 나눈다. 즉 혈은 음이고 기는 양이며, 백은 음이고 혼은 양이며, 정은 음이고 신은 양이다.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는데 혼은 양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올라가고 백은 음이기 때문에 땅에 흩어진다. 혼은 양이고 몸은 음이고 땅에서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시체는 땅에 묻는다.   ‘정(精)’은 쌀 미(米)와 푸를 청(靑)으로 합쳐졌다. 옛날 사람들은 정자(精子)를 곡정(穀精)이라 했다. 즉 남자의 정자는 쌀에서 오기 때문에 곡정이라 했던 것이다.  서양문화가 동양에 유입됨에 따라 칼로리가 어떻고 에너지가 어떻고 하는데, 동양문화에서는 영어 칼로리나 에너지에 해당되는 것이 곧 정(精)이다. 그런데 이 정(精)이 바로 곡식섭취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굶으면 온몸이 기력이 없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다가 뭔가 먹으면 정신이 벌쩍 든다.  우리는 영어 ‘mind’를 우리말로 정신이라 무분별하게 번역하고 아울러 정신을 단순히 두뇌의 그 무엇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기실 동양음양사상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란 정과 신이 합쳐진 것이며, 정은 땅에서 오고 신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신은 정이 받침 되어야 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으로 말하면 신은 독립적인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정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자를 고단백질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곡식을 섭취해서 몸 안에 남는 것 중에 가장 알맹이가 바로 정자라는 뜻이다. ‘정확(精確)’, ‘정통(精通)’, ‘정병(精兵)’, ‘정소(精巢:고환)’, ‘정수(精髓)’, ‘정수(精粹)’, ‘정밀(精密)’ 등등에서 ‘정’은 알맹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인은 지나친 화학성분에 휩싸여 생활하고 있고, 식생활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정신적인 노동에 너무 시달려 발기부진 자가 많다고 한다. 여자들이 조기폐경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평균수명은 길어졌지만 남자나 여자나 제구실하는 데는 옛날사람들보다 못하다.  아침에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사내들은 돈을 빌려줄 사람이 없을 터이니 분발해서 꼴리기에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21    천박한 일부 조선족문인 댓글:  조회:4753  추천:44  2008-02-10
천박한 일부 조선족문인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며칠 전 나의<<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글이 조글로에 발표되자 일부 소위 조선족사회 문인이라 하는 자들이 매우 흥분, 아니 격분해 하고 이지를 잃고 저를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는 결코 지식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인은 반드시 지식인의 체신을 지켜야 하고 최저한도로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상식을 갖춰야 한다. 나는 글을 많이 쓰고 남의 글을 많이 읽지만 종래로 타인의 글에 댓글을 달지 않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아울러 나의 글에 그 어떠한 입장으로 댓글을 달든지 간에 나는 대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예하면 나의 글은 주로 조선족문제를 다루는 글과 역사문화이야기인데 후자에 대해선 별로 반응이 없지만 전자에 대해선 찬반양론이 격렬하고 심지어 조선족대모임카페, 모이자 등 일부 사이트 네티즌들(사회 어중이떠중이들)은 나를 천하의 때려죽일 놈이라고 인신공격을 해도 여지껏 일률로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번 소위 조선족 문인이라 하는 자들이 함부로 나를 ‘망발’이니, 김문학이 어쩌고저쩌고 싸가지 없는 인신공격에 대해선 결코 참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나도 어쩔 수 없이 독은 독으로 치라는 식으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우선 지식인이라면 타인의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斷章取義’해서 타인을 매도하고 인신공격을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천박해지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글에 대해 요약해 말하자면 첫째 나는 결코 조선족언어와 문화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애를 연길시 신흥소학교부터 연변일중을 졸업시켜 대학에 보냈을 만큼 결코 조선족언어를 무시하거나 더욱이 무용론자가 아니다. 다만 연변대학 김강일 교수와 나의 사례를 볼 때 조선족학교는 소학교까지만 다니고 초중부터 한족학교를 다녀도 여전히 조선족언어로 글을 쓰고 그 누구 못지않게 조선족청체성을 비롯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많이 써내고 있는 사실을 보면 반드시 소학교부터 고중 그리고 연변대학이나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부를 나와야 만이 조선족정체성이 있고 애족심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둘째 내가 말하는 예수, 부처 등은 결코 단순한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식의 범주에서 한 말이다. 아직도 일부조선족문인들은 예수, 부처 하면 종교로만 사고하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 문학작품을 싸내도 예수, 부처, 공자, 마호메트, 노자 등을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세상만사의 지식으로 습득하고 작품에 반영한다면 세계성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조선족문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족언어로 글을 쓰기 때문에 중국 시장 나아가 세계 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비애라고 변명하고 있는데 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세계성적인 명작을 써내는 문인들이 결코 여러 가지 언어를 반드시 구사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언어로 쓰든지 간에 작품성만 인정되면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출판이 가능하다. 관건이 세계성적인 지식습득이다.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600 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연변문학>>잡지가 300부만 달랑 찍어낸다고 하니 그래 우리 조선족문인들이 왜 요 지경 요 꼴이 되었는가는 것에 전혀 반성이 없이 내가 조선족 지식인들이 세상만사의 지식을 습득하라고 한 것에 대해 그토록 흥분하고 인신공격을 해야만 답이 나오는가? 셋째 연변사회분위기에 먹고 마시고 노는 풍토가 분명히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부인한다면 애족자가 아니라 반민족자이다. 이에 대해선 많은 분들이 지적이 있었기에 생략하겠다. 넷째 조선족사회 교육에 분명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해 있다. 교육이란 학교, 가정, 사회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분명히 가정과 사회교육이 후대양성에 문제가 많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연변사람이 아니라 진공 속에서 사는 인간이다. 다섯째 연변도서관 관장의 방송강의에 의하면 연길 00지식인들이 모인 직장 직원들이 1년 평균 책 한 두 권을 읽으나 마나한 통계가 있다고 한다. 내가 조선족 지식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문제를 지적했다고 한국이 어떻고 타민족이 어떻고 하는 식의 변명을 하는 문인이야말로 억지춘향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의 글은 조선족 사회가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만 더 큰 도약을 이룰 수 있다는 취지에서 쓴 것이지 결코 일부 문인의 지적처럼 자기 민족을 팔아먹는 망나니가 아니다. 나의 글 뜻도 모르고 나를 두 번째 김문학으로 몰어부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머리로 작품을 읽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으로 나의 글에 대해 토론은 허락하나 인신공격은 용서치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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