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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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8 ]

158    가정교육은 흥정이 아니다 댓글:  조회:1975  추천:1  2014-01-13
    요즘 들어서서 일부 가정들에서 자식의 교육을 일종의 흥정이라는 천평우에 올려놓는 경우들을 어렵잖게 볼수있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시간적으로 랑비가 적은줄로 인식이 되였는가 싶다. 즉 빠른 시간내에 효익을 얻을수있는 라고도 생각하는 심정으로 리해가 간다. 동시에 어느정도 가장들의 그런 심정도 동감이 가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진정한 교육의 이미지를 산생시키지 못하고 기껏해야 호기심만 키울뿐이다. 서로의 협의가 일정한 정도에서 달성이 되면 가장으로서는 교육에서의 성공으로 착각하고 자식으로서는 일종의 보수를 위한 자아희생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느라니 가장은 언제면 알알히 여문 알곡을 거둘가고 고대 기다리기만하고 자식으로서는 자아성찰이 아니라 일종의 물욕의 압박으로 피곤을 이겨가려고 모지름을 쓰게된다. 이러 현상은 기껏해야 임시의 어려운 순간을 넘길뿐이지 절대로 평생교육의 질에 도움을 줄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수단은 나이가 어리고 리해가 차한 어린아이들을 넘기는 얄팍한 장난이지 머리가 넘은 큰 애들에게는 내들 방법이 못된다. 비록 교육에서 어느 정도 효력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연장선을 긋는다는것은 해볼바가 안된다. 이를테면 매번의 흥정에서 서로가 만족이 되였다할지라도 그 흥정의 눈금이 불변한다면 호기심도 동시에 줄어들면서 효력을 잃게 되는것이다. 그러자면 부득불 흥정의 한도를 높여야 한다. 말하자면 물직적인 량을 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늘이고 또 늘이다보면 구경 남는것은 무엇일가?! 그리고 애들은 자신의 물욕에 공제하는 능력이 약하다보니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에 이르고나서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시키려는 생각부터 나선다. 흥정이 주요하게는 애들의 공부성적에 대하여서인데 자식이 어느정도 성적이 제고 되였다할지라도 그걸 무작정 믿고 흥정을 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글쎄 참다운 애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수분의 함량이 곁들가 걱정이 되는것이다. 어떤 애들은 자신의 물욕을 또 제3자와의 흥정을 걸고 계획하는데 이는 생각만 하여도 근심부터 앞선다. 일단 자식이 그런줄도 모르고 흥정을 계속 진행한다면 마지막에 남는것이란 구경 무엇일가?! 유태인의 경전 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물고기를 먹고 싶다하면 즉시로 물고기를 사다가 끓여주는것이 아니라 애들 데리고 함께 강가에가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 부터 배워준다. 이것이야말로 평생교육이자 생존의 가장 유기력한 무기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자식이 고기를 먹고 싶다하면 아마 백에 구십구는 두말없이 즉시로 고기를 사다가 끓여서 택밑에까지 받쳐준다. 이런 교육이 낳은것은 또 무엇일가?! 교육은 눈앞의 리익을 위해 하는 너절한 장난이 아니다. 교육은 반드시 평생의 생존을 위하여 머리와 마음이 함께 만들어낸 위대한 실천이다. 교육과 실천은 반드시 동보해야 하는데 관건은 자아성찰이 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에는 너무 많은 필요없다. 지나친 말은 가끔 교육에 역작용을 하기도 한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로자의 이런 이야기가 있다. 로자의 스승은 상용이란 사람이 였다. 스승은 늙고 병들어 이제 곧 숨을 거두려고 하였다. 로자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에는 스승이 입을 크게 벌렸다. 상용은 나이가 너무 많았기에 이빨이 다 빠지고 없었다. 스승은 곧바로 제자에게 말했다. 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스승은 돌아누우며 이렇게 우리의 교육도 가끔은 그렇게 복잡하고 요란스러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우기 흥정같은것은 해볼바가 안된다. 항상 조요한 교육속에 큰 교육이 숨쉬는것이다.  자식들에게 억지로의 교육보다는 진정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생각할수있는 그런 교육의 순간 순간들이 쌓여서 보다 큰 교육을 낳게 되는것이다. 하루밤사이에 룡을 만들려는 어리숙한 생각들은 깡그리 버리고 하나를 교육해도 자식의 평생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될수 있는 그런 교육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 아닐가?!  
157    헤여짐의 미학 댓글:  조회:1923  추천:1  2014-01-13
     봄바람이 똘랑- 하고  내 마음의 호수에 던지고 가버린  사색이 아지랑이처럼 피여올라  마음의 뿌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줍니다.  사색의 문고리를 살며시 부여잡고  빠끔히 열려진 문틈새로 새여나온  그 향기가 어느덧  내 가슴에 보라색여운을 심어준다. 순간 헤여짐의 아픔에 시달리는 모습들이 주마등같이  하나 둘 고개를 쳐들며  나름대로의 메아리로 울려온다. 그가운데서도 가장 아프게 울려오는것이 바로  헤여짐이 남기고 간 빨간 그리움에서 피여오르는 연분홍 그림자이다.  거기에 또박또박 찍혀진 깜찍한 발자국들이  내마음을 사로 잡는다. 순간 사색의 보슬비가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다.    뭉쳐도 살기 힘이드는데  자꾸 헤여져야하는 리유는 구경 무엇인지!  글쎄 보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헤여진다고들  하면서 자아위안도 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날따라 스러져가는 진정만은 감추지 못한다.  그처럼 생기가 흘러넘치던 마음의 운동장도 언제부터 황페한 황무지로 변하고 있었는지 알길이 없다.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던 가로등들도  이젠 성한데없이 병신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도 티끌만한 원하도 없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여린 마음으로 인간의 삶에 한가닥의 빛이라도 뿌려주기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에 어쩐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마음의 이곳 저곳에 묻힌 아픈 사연들을  하나하나 몰아내면서 삶의 잔디밭에 진정을 수놓아간다.   고독에 몸부림을 쳐대는 남자, 설음에 토닥이는 녀자, 아픔에 시달리는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아픔에 절여진 상첩한 몰골로  삶의 벼랑을 톺아오르는 현장은 그야말로 인간의 비극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연장선에서 그라프를 그리려니 심정은 오죽하랴!   봄이면 꽃이 피여 기쁘고  여름이면 구질구질 내리는 비가 더 좋았고 가을이면 만물이 알차게 여무는 그 소리가 구성지였고  겨울에는 천당에서 보내는 하아얀 편지가  그대로 삶의 그늘을 마련해주어  다소 마음의 평온이라도 잡을수있어 편한것같았다.    축도 없는 인간이 세상살이에 맞춰  잘도 돌아가는 그 모습에 하늘도 땅도  성스러운 신이되여  헤여짐의 밑바닥에 거미줄을 쳐준다.  사슬보다 더 믿음직하고  마음이 편하여  령혼에는 생기가 흐른다.    헤여짐은 결코 리별이 아니다.  보다 멋진 만남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헤여지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소나기 뒤의 찬연한 무지개처럼,  뭉게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방싯 웃는 해님처럼  하나같이 살안가는 이 세상에  부끄러움은 나름대로 감추고  피로함은 스스로 비춰보는 그 멋에  인생의 거미줄에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  사과배따는 처녀의 눈시린 모습을 련상하듯이 ,  피리부는 소몰이애의 너그러운  마음이 인간세상에  하나의 고운 무지개 다리가 되여 ,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의 든든한 축이되여 , 오만가지 꿈에도 대견스레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필경은 헤여짐의 끝에 피여나 한송이의 채송화이기도 하다.    나그네 한숨소리는 인생렬차의 만남의 기적소리요,  안해의 애절한 마음은 삶의 호수에 조용히 인  잔잔한 파문이요,  아이들의 그리움의 목소리는 삶의 현장에서 울려오는 씩씩한 행진곡이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은 렬차의 기적소리는  항상 힘과 용기를 베풀어준다. 늘 들어도 싫지가않다. 오염없는 호수에 피여나는 잔잔한 파문은  어머님의 살결같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퐁당 뛰여들어  편안히 누워보고 싶은 생각이 불길처럼 피여오른다.  경사에는 항상 행진곡이 뒤받침을 해준다.  현자의 분위기를 보다 높은 경지에로 끌고가는 할아버지의  휘파람소리이다.    삶은 헤여짐과 만남의 반복이다.  만남에도 만나야 할 만남이 따로 있듯이 헤여짐에도  가치있는 헤여짐을 위해서라면  선뜻이 모든것을 버릴줄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자연에 퐁당 뛰여들어  자연의 샘물로 마음의  오물을 깨끗이 씻으면서 바람따라  구름따라......                   
156    리혼은 장난이 아니다 댓글:  조회:2100  추천:2  2014-01-12
    가정은 사회의 한 세포로서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다. 더우기 민족사회가 온정성을 확보하려면 우선 그 세포인 가정이 흔들리지말고 알뜰하게 가꿔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부터 민족의 마음에 수많은 상처자국을 만들었다.   언제부터 녀성의 직위가 사회의 인정을 받으면서  점차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는데  그것이 악성순환으로 변질되면서  무형의 압력이 남성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래도 얄팍한 자존심하나때문에, 너무도 어렵게 세워진 가정이라는 이 위대한 공정을 지켜나가기위해  서슴없이 집을 떠나 설음많은 타향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꾹 참고 열심히 일을 해나간 남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부모그리움, 안해그리움, 자식그리움에 마음은 언녕 피눈물이 고였어도 열심히 고된일에 자신을 팽개친 남자들이 너무너무도 많다. 육체적인 피로함이나 아픔은 그런대로 몇잔의 술로 달랠수있으나  마음의 그리움이란 견디기가 너무너무 힘겹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용케도 몇년씩 참아견디면서 손에 어느정도 돈을 쥐고 귀국하였는데  들려오는 그런 헛소문에  처음에는 믿기가 상당히 어려웠지만 현실은 언제든 감추지못하듯이 마음이 무너짐을 어쩔수가 없었다. 그래도 녀자쪽에서 더 우쭐한다나?!  너도 마찬가지라는 그런 헐망한 리유하나로 물고늘어지는 현실은 참으로 가슴에 못을 박는 격이다. 그것이 도화선으로 가정의 대들보에  폭파약을 다진다. 언제가 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또 하나의 세포가 너무도 아프게 여리디 여린 원한을 품고 이 세상에서 자리를 감춘다.  너무도 떳떳하게 나서는 그런 단미디 소행에 녹아나는것은 자식들이다. 다큰것들은 글쎄 제좋은 멋에 살겠지만  어린것들이 불쌍하다는 말이다. 실상 리혼이란 어찌보면 어른들이 자신을 위한 그런 욕심에서 생겨나는 아둔한 행위라는 생각이다. 글쎄 간혹 리혼이라는 그 뒤에 보다 멋진 인생이 있을런지는 몰라도 아마도 백에 구십은 언젠가는 후회의 쓴맛을 단단히 볼것으로 인정이 간다.   말은 그래도 듣기 좋게  하는 현실들이 많다. 뭐 정말 살기가 너무너무 힘들다는둥, 근본상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둥, 그런 무골충같은 남자와 살아가는 내가 너무도 아깝다는둥, 돈도 벌지못하고 여기아프오 저기 아프오 하는 그런 남자와 내가 어찌 고생스럽게 살아간단말이요! 하면서 푸념질 하는 녀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 모든것은 그저 하나의 허줄한 핑게에 지나칠뿐 아무런 공감이 없는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하는 식의 멋진 랑만들도 만들어낸것만은 사실일것이다. 저들이 좋으면 좋다가 말거지 애매한 자식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질거면 아예 기막히게 좋아나 하지말거지 하는 안타까움도 가슴에 아픔을 심어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던 어제의 그 약속들은 실상 오늘에 와보면 한낱 나발에 불과한것이다. 그렇게 좋아했으면 고만한 고험도 이겨내지 못하고 항복할거면 아예  신성한 결혼에  어지러운 자국들을 남기지나 말거지! 이제와서 완전히 180도로 돌아선 그 마음을 정말 리해하기가 너무너무도 힘이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슨 해결못할 특수한 정황이여서 부득불 헤여진다할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물지는 말자는 권고이다. 돌아앉으면 서로에게 있는죄 없는죄를 다 들씌우면서 자신의 청백함을 보존하려고 애를 써가는 사람들을 보는라면  도리질부터 나간다. 아무리 갈라졌다할지라도 서로의 결점같은것들은 감싸주고  아픔같은것들은 될수록이면  고집지 않는면이 더 낳지 않을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태진아의 가 감명깊게 가슴에 울려온다. 그렇다 사랑은 정말 아무나 하는 그런 허줄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도 의심할 정도로 그런 신성한 존재이다. 그럼 결혼도 아무나 하는 그런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름대로 머리를 쳐들고  일어선다. 그렇다! 결혼도 아무나 다 하는 그런  가벼운 행위가 아니다. 여기에는 우선 책임이라는 무거운 존재가 토대로 되여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첫지리에 놓여 항상 그것이 삶에 윤활제로 되여 가정을 보다 알뜰하게 가꿔가는 제1임자가 되여야 한다.   그럼 리혼도 아무나 하는 그런 순간적인 결론이 아니다. 아무리 어떻게 문제가 엄중할지라도 서로가 조용히 마음에 맺힌 옹을 풀어나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부부간이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사이에 말 못할 사연이 또 무엇이랴! 관건은 이 가정이라는 위대한 공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있는것이다. 일단  성의가 있고 너무도 힘겹게 세워진 이 가정을 아끼려는 생각만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확 풀어놓고 시원스레 마음을 헤쳐보이는것이다. 그러느라면 리혼도 아무나 하는 그런 장난이 아니다. 돌아서면 후회할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그 얄팍한 자존심 하나때문에 결국은 생각보다 무서운 후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니 리혼도 아무나 하는 애들의 소꿉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해도 그때 만난 그 사람이 최고라는 철학쯤은 마음의 호주머니에 넣고 이 세상을 내다봄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절절하다. 이제라도 리혼이라는 어지러운 생각들을 깡그리 버리고 얼었던 마음도 살며시 녹이면서 자신의 삶도 삶이지만 자식들의 아픈마음도 헤아려주면서 너무도 여린 세포에 새겨진 상처자국들도 열심히 지워가면서  서로 대방의 존재를 무엇보다 아끼면서 열심히 살아보자!  그리고 리혼이라는 말은 그렇게 쉬이 꺼내는 헛소리가 아니다. 아무리 화가 치민다해도 언제든 리혼이라는 생각만을 버리자!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인제 해결못할 문제가 무엇이랴!   리혼은 장난이 아니다! 애들이 하는 그런 소꿉장난은 더욱 아니다! 
155    나그네 수첩 댓글:  조회:1714  추천:1  2014-01-12
 하늘아래 나그네들은 아마 거개가 자신의 수첩이 하나쯤은 있을것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존엄에 적어두는 귀중한 수첩입니다. 페지도 없이 그저 닥치는대로 적어놓을뿐입니다.  가끔 가만이 펼쳐보기도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건 눈으로 보는수첩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수첩이기때문입니다.  비밀번호도 상당히 길다보니 그 누구도 훔쳐볼 가능성이 매우 적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훔쳤다하여도 의미터득이 잘 되지않습니다. 우선 문체는 절대다수가 대화의 형식으로 씌여지다보니 어찌보면  용납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리해가 되지않아서 뻥해지는 경우도 가끔은 있습니다.  그럴때엔 리해에 촉매를 가해주는 매개물이 바로 담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맞춤한 소주도 주제포착에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가장 두려운것이 너무도 지나친 격동입니다. 너무 격동이 되다보면 수첩의 글발들이 저절고 마악- 흘러나옵니다 .  이럴때에는 마음속으로 참을 자를 세번정도 되뇌이기도 합니다.  이상하게도 새여나온 글발을 도로 담을수있는 자리를 찾기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면 일단은 버려야 하는 아픔과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월의 고무지우개로 지워도 상처자국은  회복이 되지않지만 다소 마음의 평온을  잡을순있습니다. 하지만 수첩은 공백의 아픔을 상당한 시간이나 겪어야 합니다. 자신의 수첩에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하여 부지런히 자신의 수첩에 보다많은 기록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래일도, 그냥 ......    수첩속에는 꽃의 향기도 맡을수있고 산간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들을수있으며  길가에 홀로 피여난 민들레꽃의 하소연도 들을수있으며 천길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도 들을수 있으며  녀자의 순결한 냄새도 맡을수 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도 눈물에 얼룩이 유표합니다.  그중에서도 나그네의 냄새가 가장 진하게 풍겨옵니다. 나그네의 수첩은 미녀앞에서 열리지 않으며 간사한 녀자앞에서도 열릴줄모릅니다. 나그네의 수첩을 열어볼수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남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자식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는 그런 착한녀자의 마음이라야  비집고 들어갈수있으리만큼 열려질것입니다!!!  나그네 수첩  하늘아래 나그네들은 아마 거개가 자신의 수첩이 하나쯤은 있을것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존엄에 적어두는 귀중한 수첩입니다. 페지도 없이 그저 닥치는대로 적어놓을뿐입니다.  가끔 가만이 펼쳐보기도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건 눈으로 보는수첩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수첩이기때문입니다.  비밀번호도 상당히 길다보니 그 누구도 훔쳐볼 가능성이 매우 적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훔쳤다하여도 의미터득이 잘 되지않습니다. 우선 문체는 절대다수가 대화의 형식으로 씌여지다보니 어찌보면  용납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리해가 되지않아서 뻥해지는 경우도 가끔은 있습니다.  그럴때엔 리해에 촉매를 가해주는 매개물이 바로 담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맞춤한 소주도 주제포착에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가장 두려운것이 너무도 지나친 격동입니다. 너무 격동이 되다보면 수첩의 글발들이 저절고 마악- 흘러나옵니다 .  이럴때에는 마음속으로 참을 자를 세번정도 되뇌이기도 합니다.  이상하게도 새여나온 글발을 도로 담을수있는 자리를 찾기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면 일단은 버려야 하는 아픔과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월의 고무지우개로 지워도 상처자국은  회복이 되지않지만 다소 마음의 평온을  잡을순있습니다. 하지만 수첩은 공백의 아픔을 상당한 시간이나 겪어야 합니다. 자신의 수첩에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하여 부지런히 자신의 수첩에 보다많은 기록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래일도, 그냥 ......    수첩속에는 꽃의 향기도 맡을수있고 산간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들을수있으며  길가에 홀로 피여난 민들레꽃의 하소연도 들을수있으며 천길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도 들을수 있으며  녀자의 순결한 냄새도 맡을수 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도 눈물에 얼룩이 유표합니다.  그중에서도 나그네의 냄새가 가장 진하게 풍겨옵니다. 나그네의 수첩은 미녀앞에서 열리지 않으며 간사한 녀자앞에서도 열릴줄모릅니다. 나그네의 수첩을 열어볼수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남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자식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는 그런 착한녀자의 마음이라야  비집고 들어갈수있으리만큼 열려질것입니다!!!
154    마음의 열쇠 댓글:  조회:1989  추천:1  2014-01-12
    가끔 상점을 돌다 보면 저도 몰래 각양각색의 자물쇠와 거기에 달랑 매달린 열쇠들을 보느라면 자연 마음이 끌려 얼마간 흔상하기가 쉽사리다. 알심들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물쇠가 가슴을 쭉 펴고 자리지킴을 하는 그 모습에 믿음이 생기고 안전감도 저으기 커만간다. 그러면서 엄마품에 매달린 귀여운 애처럼 달랑 거리는 열쇠를 보느라면 소중함도 피여난다. 저렇게 멋진 자물쇠도 일단 존엄의 열쇠만 사라지고 보면 어쩔수 없이 페물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느라니 저으기 근심과 괴로움이 마음의 골짜기를 꽉 메우면서 안개처럼 피여오른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수리공이라도 만나면 다소 아픔의 진통을 적게 겪으련만 못난 주인을 만나고 보면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삼켜야 한다. 그러면서 열쇠를 살그머니 만져보기도 한다. 형언못할 그런 고마움을 마음에 걸어두면서 .     순간 심령의 계곡에서 울려오는 잔잔한 여운이 어느덧 내 마음의 모래밭에 보라색여운을 심어준다. 여운에서 애처롭게 울려오는 그 멜로디가 마음의 쪽문을 뒤집고 사색의 불꽃을 지펴준다. 수많은 사색에서 똘랑- 하고 마음의 호수에 던져진 크고큰 여운이 내 몸을 휘감으며 사색의 골짜기로 몰아넣는다. 순간 인간이 마음의 열쇠를 잃으면 어쩔가 하는 생각이 여운에 여운을 물어온다. 우선 자물쇠처럼 진통을 겪어야 할것이다. 뭐 몸이 부서지는 그런 육체의 진통보다는 정신적 진통을 겪어야 할것이다. 어찌보면 마음의 열쇠는 인간령혼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차가 기사의 운전을 잃으면 그이상 더 무서운것이 없으리만큼 인간도 마음의 열쇠를 잃고 보면 죽음의 신이 항상 신변에서 자신을 어두운 골짜기로 밀고 감을 느끼게 될것이다. 듣기좋게 말하면 령혼을 잃은 시체가 지구의 인력을 잃고 마구 움직이는 현상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고 보면 가장 두려운것이 아픔보다도 수많은 눈길의 조소에서 떨어진 비애이다. 이때라도 고마운 사람의 충고를 열심히 듣고 마음의 열쇠를 알심들여 찾는다면 다행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삶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나타날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깜짝할사이에 천당의 비자를 받고 아시아나항공편으로 천당에 도착할는지도 모른다. 이때에는 조급함보다는 침묵으로 자신을 반성하면서 마음의 열쇠가 구경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다보면 하나님께서도 깜찍하게 반짝 빛나는 하나의 새 열쇠를 선물해줄것이다. 오직 한개 뿐인 그 열쇠를 .      남자들이 마음의 열쇠를 잃으면 갈팡질팡 헤맨다. 모든것을 저주하는 그런 이상의 심리로 범을 때려잡는 용기가 받침되여 폭탄자살이나 10층 아빠트 꼭대기에서도 서슴없이 몸을 던진다. 이럴쯤에는 각별히 녀자의 따스한 온기가 매우 보람있는 작용을 한다. 얼어든 마음을 살짝 녹여주고 잃어버린 방향도 어린애처럼 손잡고 걷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갑자기 두 눈이 밝아오며 마음의 열쇠가 조용히 제 위치에 자리잡음을 느끼게 된다.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을 향해 열심히 뛰는 한 남자의 형상이 기쁨의 눈물을 타고 녀자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다. 동시에 녀자의 얼굴에 피여난 회심의 미소도 향기가 되여 삶에 동력을 가해준다. 남자가 어떻게 위대하고 어마어마할지라도 결국은 녀자의 존재로 하여 항상 믿음을 지니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상 남자들에게는 마음의 열쇠가 따로 없다. 항상 녀자가 만들고 다듬고 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남자들의 마음의 열쇠는 녀자인지도 모를일이다. 어떠하던간에 남자들은 하나밖에 없는 그 귀중한 열쇠의 존재를 망각하지 말고 항상 열쇠에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것이 보다 더 보람있고 가치있는것이 아닐가?!      일단 녀자가 마음의 열쇠를 잃고 나면 후과가 상당히 무서운것이다. 하늘땅을 뒤집는 무서운 부르짖음에 남자들의 가슴에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낄 정도이다. 녀자들은 일단 마음의 열쇠를 잃으면 어두컴컴한 골짜기로 자신을 몰아넣기가 일수이다. 그저 신음소리가 그칠새없이 령혼에 먹칠을 해댄다. 이때에는 남자의 향기가 놀라운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커피향같은 남자의 존재가 녀자의 마음에 너무도 짙은 여운으로 남아 늘 희망의 불꽃을 지펴준다. 이때에야 남자의 너그러운 마음이 꽁꽁 잠겨진 녀자의 마음의 자물쇠를 아무런 싫증도 없이 열심히 열어가고 있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향기가 무형의 열쇠로 탈바꿈하여 얼음에 씌워진 녀자의 마음의 자물쇠도 척척 열어간다. 무형의 열쇠, 짙은 남자의 향기가 갈라터진 녀자의 마음에 깨끗한 이슬비로 삶의 희망과 빛을 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남자와 녀자가 반드시 어울려 살아야만 인생의 진미를 터득할수 있는것인지 모른다. 인간의 운명에 딸려나온 열쇠, 인생의 대문을 하나하나 열어가야만 하는 너무도 소중한 열쇠, 오직 마음으로만 가꿀수 있는 무형의 열쇠가 어느덧 마음에 깨끗한 락인이 되여 서서히 안겨온다. 순간 행복의 물결이 심령의 계곡에서 제법 폭포처럼 하아얀 은빛모래를 휘날리며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 더러운 오물들을 깨끗이 깨끗이  밀어낸다.
153    생활의 계단을 밟으면서 댓글:  조회:1794  추천:1  2014-01-12
  생활의 진속을 알기도전에 벌써 나는 생활의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알고 모르게 어언 30여개의 생활의 계단을 밟아왔건만 생활이 점점 모호하게만 느껴짐이 별스럽기만 하다.                                                                         1.  한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깊은 추억으로 자리를 잡는것이 동년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의 오색찬연한 꿈들을 여린 가슴에 키워가면서 즐거운 순간들을 자신스레 만들어가면서 동년의 필기장에 수많은 락서로 남긴다. 질서없는 지저분한 락서이건만 그것의 존재가 생활에 생기를 부여할때 다시금 발버둥치던 동년에로 미끄러져 가보는것도 별미로 마음을 적신다. 매일마다 어리석은 꿈들을 호주머니속에 불룩하게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자랑스레 여기던 그때가 지금에는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비록 생활은 구차한 시대였음에도 마음만은 부유하여서 그 무슨 부러움도 모르고 잘도 컸었다. 고향의 산에는 먹을것도 많아서 산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저 주기만 하고 바람은 전혀 모르는 산앞에서 우리들은 마음의 살을 잘도 찌웠다. 뿐만아니라 산은 생각의 천사와도 같이 우리들의 생각의 힘을 날마다 날마다 키워주었다. 그러다보니 동년은 거의 산의 품속에서 자란거나 다름이없다. 그래서 동년에는 마음속에 산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것이다. 산의 참된 삶의 방식이 저도모르게 마음속에 비석으로 세워졌다. 그때로부터 생활의 연줄이 우리들의 마음을 동여매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산의 옳바른 가르침아래서 하냥 거짓을 모르고 항상 깨끗하게 자신을 키울수 있었던것이다. 생활의 달콤함을 한컷 맛보면서 그토록 즐거운 동년의 그림자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묶어두었다. 동년은 수많은 꿈들가운데서 오직 문학의 꿈이 장하게도 싹을 틔워 지금껏 건강하게 자라고 있음에 항상 만족을 느낀다. 그러면서 동년에 항상 미련을 두고 슬프거나 힘들때에는 살며시 동년의 쪽문을 열어보기도 한다. 동년은 내 생활의 잔디밭이 였다. 알쏭달쏭 고운 꽃송이들이 오염도 모르고 해죽이 웃으며 즐겁기만 하던 그때가 모질게 그립다.                                                                              2.  동년의 렬차에서 몸을 내리고 보면 여기저기 두려움도 생기는것이였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기만 한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마음속을 쓰다듬었다. 그 무엇이든 용기를 내여 해보려는 사나이의 패기가 번개불꽃을 피웠다. 여기저기에 부딪쳐 다치기도 하였건만 아픈줄도 모르게 하고싶었던 것이다. 참 이상도 했다. 여하튼 모든것이 그처럼 신기하고 호기심은 무섭게 커만갔다. 이성에 대한 욕심도 슬그머니 마음을 간지럽히기도 하였다. 하여 때로는 밤잠도 설쳐가면서 어설픈 사랑편지에 빠지기도 하였다. 토끼꼬리만한 문장을 다사스럽게 꾸미면서 마음을 보이는라 꽤나 설치기도 하였다. 꼭 마치 낚시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걸리면 그 이상 더 큰 행운이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던지는 낚시마다 꿩구워먹은 자리였다. 그래도 그 뭐가 좋은지 해가 그렇게 짧을수가 없었다. 환한 달빛을 피해가면서 도둑놈처럼 누구네 집뒤에서 떨어본적도 새롭게 떠오른다. 그렇게 떨어도 어쩐지 그것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아마 저절로 되는줄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시간가는대로 생활을 꿰매여 놓으면 생활인줄로 알고있었던 그때가 유치하게만 안겨온다. 그리고 생활에 아주 자신도 있었고 어느정도 용기와 신심도 화산처럼 뜨거운 마음을 뒤집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자신이 걷는 길이 그토록 평탄하지 않음을 너무도 놀랍게 자각하게 되였다. 그러면서 또 다른 멋진 꿈을 마음의 그릇우에 올려놓는다.                                                                             3.   아마도 결혼은 내 생활의 또 다른 계단이기도 하였다. 우선 생활을 배워야하는 그런 시급한 생각이 나를 가로 막았던것이다. 자신을 점점 울타리속에 가두는 재주도 배워야했고 자그마한 마찰앞에서 자신을 질책할줄도아는 참을성도 배워야 했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대한 자신의 책임감을 세워야했던것이다. 오직 자신뿐이아니라 가정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언제 어디서든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랭정한 두뇌도 키워야했다. 사랑은 가지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줄줄도 알아야한다는 사랑철학도 어느정도 익혀야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해줄말들도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함도 놀랍게 인식하였다. 랑만이라는 고집스레 믿어오던 사랑에도 어제부턴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함을 새롭게 느끼게 되였을때 자신의 성숙을 다시금 점검해보는 필요성이 예리한 화살로 마음에 꽂히였다. 서로에게도 너그러움을 열어젖히고 될수록이면 불빛같은것은 피하려는 작심도 하였다. 용납이라는 마음의 우물을 더 깊이 파면서 허줄한 모습은 될수록이면 미련없이 던져버리는 용기도 세워봐야했다. 가끔은 길가는 로인들의 뒤모습도 종용히 지켜보면서 세월의 흔적앞에서 자신을 반성해보기도 하였다. 그늘에 가리웠던 자신의 그림자들을 비춰보면서 삶을 보다 높은 경지에로 승화시켜보는 그 멋도 참으로 편안하기만하였다. 하루하루 침착성과 책임감이 날로 커만 가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도 심으면서 비록은 평범한 생활이건만 항상 서로의 화목을 열심히 이끌면서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으로 인생의 뒤안길을 밟는다. 또 하나의 믿음직하고 든든한 생활의 계단을 향해 자신을 힘차게 밀어준다.
152    가지는 것과 잃는 것 댓글:  조회:1800  추천:1  2014-01-12
  어느 선인이 하신 말씀인지는 잘 몰라도 여하튼 내 마음속에 너무도 력력한 락인으로 남아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는 아마도 사람이 세상에 태여날적부터 꼭 그렇게 되여있는 숙명적 법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누구나의 삶을 공평하게 하느라고 취한 현명한 판단(?)이라고 혼자 웃으며 넘기군 한다. 나는 얻는것과 잃는것에 대한 각도에서 이 생각을 풀어본다. 사람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것은 그 누구도 잘 알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아마 생전에 가지기에 그렇게도 미련을 두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뭐든 가지고 싶어 하는것이 사람으로서의 가장 큰 흠이라는것이다. 글쎄 가지는것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소유하는것만 가져도 엄청 많을 텐데 자꾸만 타인몫까지 욕심스레 가지자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가지기에 미칠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것 같다. 형제간에도 부모님의 재산을 차지하고자 눈이 어두운 현상을 현실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어느 형제가 조금이라도 더 가질세라 눈이 빨개가지고 밤을 설치기도 한다. 가진다는것은 어디 까지나 생존을 위해서라고들 하고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도를 넘으면 재미가 슬하다는 말이다. 여직 살아오면서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옥노를 놓았고 함정을 팠는지 모른다. 또한 그것이 함정이고 옥노인줄을 뻔히 알면서도 가지기 위해 서슴없이 뛰여드는 장면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더우기 조선족은 가지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 치르는 대가가 더 큰 경우가 많다. 즉 눈앞의 자그마한 리득에 속고 속히우는 경우가 더 많다는것이다. 어쩌면 귀가 그렇게 너른지도 모를일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한족보다 우리 조선족이 치른 대가는 훨씬 크다. 다른 것보다 한국이나 일본행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상상하기도 두렵다. 아마 대가를 통계한다면 가진것보다 훨씬 초과될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리고도 가졌는가 하면 실상은 가진것도 없이 그저 고생과 아픔만 묻었을 뿐이다. 가지기위해 그 높은 리자도 두려움이 없이 꿔대는 현상들을 지켜보느라면 가슴아픈것외에 남는것이 없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그보다도 모든것이 산산히 부서지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소리에 설음만 커간다. 그것은 오직 개인의 설음뿐이 아니라 민족의 설음이고 사회의 설음이기도 하다. 실상 필자가 살고있는 고장에도 한국에 갔다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돈도 많이 벌어왔고 개변도 많지만 그것이 오래 펴서 향기를 남기지 못하고 인츰 시들어 버리는것이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다가 가진것이 밑굽이 나면 또 가지려고 고행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느라면 착잡한 그 마음 달랠길이 없다. 그렇게 힘겹게 가진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열심히 살았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가지는 욕심은 비할데 없이 큰데 그걸 버리는 재간이 너무도 비상한것이 큰 흠인것이다. 물론 가지는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잃는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여하튼 가짐과 잃음의 론리앞에서 정확한 가늠을 세워가지고 자신의 삶을 옳바르게 운전함이 넘넘 필요하다. 그리고 너무 가지려는 욕심만 세우지 말고 어느 정도 잃는것에 대하여서도 너무 발발 떨 필요가 없다. 관건은 잃음의 가치에 초점을 두고 판단함이 명석한 것이다. 잃음의 즐거움도 가끔은 만끽하느라면 세상을 보는 눈도 더욱 밝아지는것이 아닐가?! 그렇다! 전반생에 어느 만큼 가졌으면 아마 후반생에는 어느 만큼 잃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짐과 잃음에 어느 정도 평형을 이루면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운영함이 우리가 해야 할 중대한 수업이다. 무작정 많이 가져야 행복한것도 아니고 뭐 어느 정도 잃는다해서 불행한것도 아닌것이다. 우리는 항상 가짐 앞에서 만족할줄알고 잃음앞에서 진정할줄 알아야 한다. 어찌 보면 오늘의 가짐은 래일의 잃음을 위한 준비이고 오늘의 잃음은 래일의 가짐을 위한 든든한 준비가 아닐가?! 가지기에만 너무 신경을 세우지 말고 그것 때문에 친구간의, 형제간의 의리인정마저 끊지 말고 항상 소중한것에 미련을 두면서 삶의 가장 중요한 매개물인 정에 항상 미안함이 없도록 자신의 인생길을 개척해야 한다. 잃음앞에서 너무 속을 썩이지 말고 랭정한 두뇌로 잃음의 슬픔을 삭일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자그마한 잃음 때문에 옆사람들까지 아픔을 겪게 말고 항상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나머지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잃음 앞에서는 항상 대범하고 가짐 앞에서는 항상 만족하는 그런 인생행로의 개척자가 되는것이야 말로 진취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잃음과 가짐은 공존한다. 너무 가지려고만하면 그만큼 잃게 되는것이고 적게 가졌으면 언젠가는 그만큼 적게 잃는것이다. 자신이 남보다 적게 가졌다고 하여 급해말고 기다려보라. 언젠가는 너에게도 그만큼의 가짐이 차례질것이다. 먼저 가지면 먼저 잃고 늦게 가지면 그만큼 늦게 잃는것이 아닐가?! 오늘의 잃음앞에서 너무 슬퍼하지 마라 오늘의 가짐 앞에서 너무 흥분하지 마라 가지고 잃는것은 네 생각대로가 아니노라.
151    댓글 댓글:  조회:2026  추천:2  2014-01-12
아무리 소박한 댓글일지라도 마음의 그릇이 깨끗하면 그냥 그렇게 즐거울수밖에 아무리 심각한 댓글일지라도 마음의 주머니가 치사하면 벌레를 씹은듯한 심정일수밖에 둥근 머리속에 털이 나있음을 어느 못된 인간의 구멍으로 보았다 빠알간 마음속에 가시다 돋쳤음을 어느 덜된 인간의 구멍으로 보았다 부질없는 질투의 그릇을 버려라 질투는 무식함의 감투인가하노라.
150    눈물의 참의 댓글:  조회:2032  추천:1  2014-01-12
누워서 흘리는 눈물 열린 두 귀가 주책없이 빚어낸 하늘과 땅사이를 적셔주는 아픔과 슬픔의 뒤섞임 차디찬 그 뼈절임의 녹물 그래서 조용히 귀속을 흘러가는 하나임의 따끔한 충고 서서 흘리는 눈물 마구 풀어놓은 입이 만들어낸 머리와 가슴을 오리오리 찢어내는 후회와 반성의 혼합물 뜨거운 그 치욕의 양치물 그래서 말없이 입속으로 흘러가는 자연의 명지한 타이름 눈물의 진정한 참의는 내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다. 만물이 공동으로 지닌 생각의 이슬이다.
149    댓글:  조회:2232  추천:1  2014-01-10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조금은 힘이 들어도 아무런 하소연도 모르고 그처럼 신나게 다가설 때 우리는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게 되는데 그속에서 별다른 감동을 만들게 된다. 우주에 공존하는 만물간에 우리는 서로의 소중함을 바르게 깨치고 그런 소중함속에 성장을 심어본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손과 발이 동심일체가 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설 때 우리는 우리 답게 바로 서게 되는법이다. 그렇지 않고 손이 손대로 배짱을 부리고 발이 발대로 마구 날뛴다면 삶의 언저리는 언녕 령혼의 흔들림으로 갈팡질팡 헤매게 될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탁하면서 자신만의 어떤 욕구에 넘친다면 손은 손이 아니고 발도 발이 아닐것이다. 각자 자신의 하얀 넋을 알뜰하게 가꾸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바르게 인식하면서 가끔은 손이 발이 되여주기도 하고 발이 손의 다정한 존재로 다가선다면 삶의 풍경은 더욱 애채를 띨것이다. 가끔은 손이 발에게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쏟으면서 살다보면 그 풍경 또한 너무도 멋질것이다. 손만 손이 되지 말고 가끔은 발도 손에 어떤 힘으로 다가선다면 얼었던 마음도 순식간에 녹아내리면서 어떤 새로운 준비를 열심히 하게 될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간에 보다 더 따스한 공간으로 삶의 이미지를 개척함이 곧 효의 본질이 아닐가 싶다. 입과 귀도 마찬가지로 다가서야 한다. 귀는 항상 입에 대하여 너그러운 존재로 다가서야 한다. 들은 말들중 어떤것은 슬쩍 지워버리는 모습으로 많이는 순하고 착하게 다가서야 한다. 귀가 순하면 곧 효가 머리를 쳐들게 된다. 그래서 귀를 잘 다스리는것도 남다른 효를 가꾸는 아름다운 소행인것이다. 듣는 소리에 덕을 세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진정 귀다운 귀로 간직하는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입도 귀처럼 순하고 어진 모습을 가꿔야 한다. 입이 무서운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입을 조심스레 놀리면서 바르게 다가서야 한다. 입과 귀가 어떤 하나의 삶의 공동한 목표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리해하는 자세로 오지가 하나의 믿음에 진정을 쏟는다면 또 다른 세상이 빛을 드리울것이다.  눈도 귀와 한마음이 되여 때로는 감을줄도 아는 그런 재주를 배워두는것도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한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눈으로만 보려는 그런 헐망한 사유를 집어 던지고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누닝 본것이 진정 본것이 아님을 명기하고 귀가 들은것이 다 들은것이 아님을 새겨두고 들은것이 다 좋은것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믿음으로 편하게 기댈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가는것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다.  보이고 들리는게 어찌 할진대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무엇보다 바람직한 노릇이요,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상대방을 위하여 어떤 준비가 잘 될 때 우리는 스스로 효라는 행복의 물결우에 눕게 되는법이다.  손과 발, 눈과 귀, 입 모든것이 순간 순간에 빛을 더한다면 구경 세상은 어떠할가?   그렇다, 효는 마음으로 가꾸고 마음으로 닦으면서 오직 정성의 우물을 말없이 깊이 파간다면 기필코 효는 낯선 존재가 아닐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조금은 힘이 들어도 아무런 하소연도 모르고 그처럼 신나게 다가설 때 우리는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게 되는데 그속에서 별다른 감동을 만들게 된다. 우주에 공존하는 만물간에 우리는 서로의 소중함을 바르게 깨치고 그런 소중함속에 성장을 심어본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손과 발이 동심일체가 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설 때 우리는 우리 답게 바로 서게 되는법이다. 그렇지 않고 손이 손대로 배짱을 부리고 발이 발대로 마구 날뛴다면 삶의 언저리는 언녕 령혼의 흔들림으로 갈팡질팡 헤매게 될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탁하면서 자신만의 어떤 욕구에 넘친다면 손은 손이 아니고 발도 발이 아닐것이다. 각자 자신의 하얀 넋을 알뜰하게 가꾸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바르게 인식하면서 가끔은 손이 발이 되여주기도 하고 발이 손의 다정한 존재로 다가선다면 삶의 풍경은 더욱 애채를 띨것이다. 가끔은 손이 발에게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쏟으면서 살다보면 그 풍경 또한 너무도 멋질것이다. 손만 손이 되지 말고 가끔은 발도 손에 어떤 힘으로 다가선다면 얼었던 마음도 순식간에 녹아내리면서 어떤 새로운 준비를 열심히 하게 될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간에 보다 더 따스한 공간으로 삶의 이미지를 개척함이 곧 효의 본질이 아닐가 싶다. 입과 귀도 마찬가지로 다가서야 한다. 귀는 항상 입에 대하여 너그러운 존재로 다가서야 한다. 들은 말들중 어떤것은 슬쩍 지워버리는 모습으로 많이는 순하고 착하게 다가서야 한다. 귀가 순하면 곧 효가 머리를 쳐들게 된다. 그래서 귀를 잘 다스리는것도 남다른 효를 가꾸는 아름다운 소행인것이다. 듣는 소리에 덕을 세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진정 귀다운 귀로 간직하는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입도 귀처럼 순하고 어진 모습을 가꿔야 한다. 입이 무서운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입을 조심스레 놀리면서 바르게 다가서야 한다. 입과 귀가 어떤 하나의 삶의 공동한 목표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리해하는 자세로 오지가 하나의 믿음에 진정을 쏟는다면 또 다른 세상이 빛을 드리울것이다.  눈도 귀와 한마음이 되여 때로는 감을줄도 아는 그런 재주를 배워두는것도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한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눈으로만 보려는 그런 헐망한 사유를 집어 던지고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누닝 본것이 진정 본것이 아님을 명기하고 귀가 들은것이 다 들은것이 아님을 새겨두고 들은것이 다 좋은것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믿음으로 편하게 기댈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가는것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다.  보이고 들리는게 어찌 할진대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무엇보다 바람직한 노릇이요,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상대방을 위하여 어떤 준비가 잘 될 때 우리는 스스로 효라는 행복의 물결우에 눕게 되는법이다.  손과 발, 눈과 귀, 입 모든것이 순간 순간에 빛을 더한다면 구경 세상은 어떠할가?   그렇다, 효는 마음으로 가꾸고 마음으로 닦으면서 오직 정성의 우물을 말없이 깊이 파간다면 기필코 효는 낯선 존재가 아닐것이다.
148    백양나무 댓글:  조회:2305  추천:1  2014-01-09
     길다랗게 늘어선 백양나무숲을 걷느라면 이름못할 흥분으로 부푸는 가슴을 누를길 없을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마음의 뒤꼭지가 조용히 말해준다.   그들의 삶의 자세에는 항상 굽은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듯이 항상 곧은 마음 하늘 향해 가슴을 펼치고 성장을 기약한다. 몸체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오직 한번 먹은 마음 변치않고 일편단심 살아가는 모습앞에서 행복은 늘 물결치며 다가선다.  그들의 위치도 참으로 묘하다. 마을의 변두리가 아니면 강의 량뚝을 따라 시원하게 뻗어나간다.  물질이 모든것을 대체하는 살벌한 시대에도 그들은 오직 성장에 필요한 물질만 간직하지 절대로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욕심에 령의 취급을 받는듯한 시대의 동떨어진 존재라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모습들도 없는건 아니지만 한점 아랑곳없이 스스로의 삶을 장식하는 자세에는 자랑도 행복도 어느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맑고 시원하게 솟아오른다.  머언 옛날에 량반들이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심어놓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남아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처럼 잊지 못할 기생들에 한해서 량반들은 자신의 정성을 담은 백양나무가지를 꺾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기생들은 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평생 잊지 않으려는 절절한 마음에서 자신이 가장 마음이 드는 곳을 찾아 그 백양나무가지를 꽂아둔단다. 그러면 용케도 그 가지들은 그들만의 마음을 소중히 담은채 뿌리를 내리고 건실하게 자란다고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이들은 아픈  정이 슴배인 그 백양나무를 보면서 어제를 떠올리군 하였다. 이처럼 백양나무는 뿌리도 필요없이 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자리를 굳히고 살아갈수 있는 그런 특유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단다.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가느다란 백양나무의 가지에 억매인채 오랜 시간 저들만의 이야기를 하늘 향해 머리를 풀군하였다. 거짓을 모르는 그런 깨끗한 마음 하나로 하늘 향한 그 자세에서 우리는 뭔가를 사색하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그러고보면 백양나무라는 색다른 군체는 그 생명력도 남달리 돋보이지만 마음이 정착하면 삶도 함께 뿌리를 굳히는 그 자세가 다욱 자랑스럽고 대견스럽다. 세상에 억매여 자신의 주장을 잃고 타인의 운전대로 움직이는 그 어떤 모습과는 달리 억세게 생존을 고집하면서 스스로의 개성을 지키고 주장을 풀어가는 고상함에 자연은 더욱 아름답고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하얀 마음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늘 감추는 그런 겸손함과 그 어떤 어려움도 선뜻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큰 그릇마다에는 빛이 차고 넘친다. 마음은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늘 안으로 감추면서 살아가는 존재와 부질없는 말보다는 믿음직한 행동으로 자신의 일체를 가꿔가는 자세도 너무너무 자랑스럽다. 어찌보면 백양나무는 우리 민족과 같다는 생각이 어느날 백양나무숲을 거닐면서 문득 떠올려보게 된다. 삶의 역을 항상 먼저 물곬으로 정하고 그 주위를 가꿔가는 자세가 우리의 삶과 너무 흡사하다. 뿌리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영위해 나갈수있는 그 자체가 정말 대단하다. 우리 민족은 뿌리를 떠나 그 어떤 곳이든 상관없이 마음이 내려앉기만 하면 얼마든지 멋진 인생을 개척한다. 뿌리를 두고 온 그 아픔에서 과감히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또 하나의 깊은 뿌리를 위해 고생의 쪽문을 시원스레 열아가는 자랑찬 움직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우리를 만들군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든 물론하고 조상들의 삶을 그대로 뿌리 내리고 가지를 벗고 잎을 가꾸는 모습이 넘 장하기만하다.    뿌리를 붙안고 한탄하며 살아가는 모습과는 달리 과감히 또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용기만으로도 우리는 우뚝 솟을수밖에 없었다. 그 솟는 과정에 보다 많은 아픔과 고생은 동반하지만 받아들일수있는 그런 용기를 이미 갖추었다는 마음가짐이 모든것을 감동시키군하였다. 뿌리를 떠나 또 다른 무수한 뿌리를 내리면서 스스로의 삶을 뿌려가는 우리 민족의 당찬 모습에는 그보다 더 밝은 력사가 빛을 그려가고 있는것이다. 항상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지켜가는 자연의 도리를 누구 먼저 바르게 깨치면서 늘 뒤떨어진 모습이 아니라 항상 선두자의 역할로 민족의 색다른 이미지를 깊이 깊이 뿌리 내린다. 한일자로 곧게 자라면서 하늘 향한 그 마음 변함없이 구름인들 두려우랴 비인들 두려우랴! 바람앞에서 몸을 피할줄 알고 비앞에서 몸을 낮출줄 알면서 인생의 참도리 하도나 밝아서 가는곳마다에는 부러움과 자랑이 잔잔한 파문을 이룬다. 바람에 맞서지도 않고 가끔은 강한 마음 연하게 다루면서 지구촌의 곳곳에 이름못할 풍경들을 열심히 수놓아 간다. 백양나무같은 우리 민족, 그래서 백양나무숲을 지날 때면 늘 마음이 설레이고 가슴이 부푸는가싶다.  
147    충고 댓글:  조회:2226  추천:2  2014-01-09
네 강 내 강 분명하게 옷을 벗었거늘 어이하여 남의 강 함부로 건느랴 건너야 할 강과 건느지 말아야 할 강이 우리를 향해 무겁게 머리를 떨구었다. 물이 얕은 강이라서 마구 헤덤비지 말구 물이 깊은 강이라서 지레 두려워 말구 나의 강이면 나대로 편하게 건너고 나의 강이 아니거든 아예 생각을 꺾어라 내 강에 서서 저쪽 강에 미련을 날리지 말구 내 강의 가슴팍에 사색의 비수를 박아라 내 강이 싫어지는것은 강의 오염과 상관없는것 내 마음이 메마름에 너무 성급한거늘 내 강의 줄기들에 산소를 불어 넣어라 긁히고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강의 심장에 단비를 채우라 어리숙한 손발에 죄를 그만 들씌우고 내 강에 드리운 장막을 갈기갈기 찢어라 찢기는 오리마다에는 령혼의 씨앗들이 송알송알 조심조심 새벽을 깨운다.
146    둥지의 향기 댓글:  조회:2231  추천:2  2014-01-06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둥지에서 모든 욕심 깡그리 털어버리고 아침을 환하게 열고 저녁을 조용히 닫는 너무도 평범한 하나의 아늑한 둥지 나랑 너랑 우리랑 하나의 약속을 씹으면서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차곡차곡 접으면서 행복의 물결소리 심장을 깨운다 피곤도 설음도 아픔도 걱정도 이 둥지안에서는 조용히 살아지는 우리들만의 아담한 눅거리 둥지 겉치레에는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고 정성스레 쌓아가는 안으로 커가는 사랑 네가 있어 살멋이 아지랑이처럼 피여오르고 내가 있어 너의 존재 파아랗게 싹틔우고 우리가 있어 마냥 즐거운 허줄한 둥지하나 마음에는 오직 한갈래의 오솔길뿐 우산같은 우리들의 존재가 그늘을 만들면 하늘은 다시금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145    세월의 향기 댓글:  조회:2007  추천:1  2014-01-05
놀랍게 다가서는 세월앞에서 한번쯤 옷깃을 슬쩍 잡아당기니 수많은 향기가 새여나온다. 여기저기 막아보지만 숨김을 모르는 향기들은 나름대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내 몸에도 이름못할 향기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스스로의 감동 서서히 막을 내리는 새로운 모습엔 희망의 돌멩이들이 뾰족뾰족 돋아난다 감동의 메아리에 마음이 풀리니 희미하던 방안에 밝음이 흐른다 처음으로 헹구는 내 마음에도 언제부턴가 성숙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네. 모든것이 각별히 소중하게 다가서는 이 순간 엄마의 잔소리는 창가에서 구수하게 들려온다 송송 썰어 말린 세월의 쪼각들을 곱게 꿰매여 대들보에 걸어두니 내 마음 노오랗게 물든다.
144    리유 댓글:  조회:2240  추천:2  2014-01-03
그 어떤 리유를 묻기전에 리유를 만들기에 분주한 우리 리유가 리유답게 다가서면 슴슴한 미소라도 헐값으로 사련만 장사군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웠으니 사구려의 가리움은 구멍이 펑 뚫렸다. 국산이든 미국산이든 한국산이든 모두가 리유없는 존재로 다가서기전에 우리는 리유의 베일을 벗겨야 한다. 리유는 영원히 리유도 다가설수없고 그런 리유의 밑바닥은 구멍이 펑 열렸다. 한점의 물기도 없는 그런 구멍들이 숭숭 뚫렸다. 우리는 리유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의 리유는 한겨울을 울리는 잔잔한 바람의 그늘이다. 리유란 근본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어떤 허물일뿐이다. 허물이 마르기전에 우리는 리유를 잃어간다. 찬겨울에 창턱에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무더운 여름에 솜옷을 껴입고 락엽이 물든 겨울을 갉아먹는다.
143    무제 댓글:  조회:2000  추천:1  2014-01-01
한줄기 빛이 내 마음에 드리우면 환하던 마음이 더욱 어둠으로 싸인다 한줄기 어둠이 내 령혼에 걸리면 어줍던 내 령혼이 더욱 활기를 띤다 한점의 바람이 내 가슴에 앉으면 조용하던 내 가슴이 활랑이기 시작한다 한쪽각의 구름이 내 눈을 가리우면 삶의 드라마가 무지개처럼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우리는 순간에 묻히워 세월을 쪼아내면 또 다른 세상이 우릴 향해 미소를 짓는다 바람이 아닌 바람이 바람처럼 다가서고 눈물이 아닌 눈물이 눈물처럼 들먹이고 아픔이 아닌 아픔이 아픔처럼 펄럭이고 그리움이 아닌 그리움이 그리움처럼 홀락거리고 사랑이 아닌 사랑이 문턱에 쪼크리고 앉는다 우리의 존재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하늘아래 가장 미약한 존재중의 하나이다.
142    민들레 댓글:  조회:2340  추천:1  2013-12-31
누구를 기다리려고 저렇게 힘들게 사시는지 누구 온다고 저렇게 애타게 기다리는지 다른곳도 아닌 깡깡 마른 길녘에서 굽은 허리 펴가면서 온종일 물러설줄 모르신다 하얀 머리 하늘로 오를 때 엄마는 아픔으로 세월을 풀어놓는다.
141    어떤 기대 댓글:  조회:2057  추천:1  2013-12-22
기대가 앞서면 삶은 풍요롭지만 기대가 뒤서면 삶은 메말라간다. 아침의 기대가 하늘의 뜻이라면 저녁의 기대는 땅의 뜻인가하노라. 봄의 기대가 아지랑이에 걸리면 겨울의 기대는 치마끝에 드리운다. 자신의 기대가 영상을 만들면 타인의 기대는 허상에 불과하다. 하늘이 높고 땅이 넓은건 마음이 스스로 알아야 즐겁고 하늘이 낮고 땅이 좁은건 리지가 스스로 깨쳐야만 우리가 우리답게 세상을 마주한다. 적은 것이 곧 많은것임은 모두들 모르고 고집을 만들지만 실상은 적은것이 곧 많은것이다. 적은 자는 적은걸 모르고 많은자만이 적은것을 절감하게 되느니라. 적어서 나쁜것이 아니고 많아서 좋은것이 아님을 스스로의 깨침이 곧 기대인가 하노라. 어떤 기대에 기대여 기대가 커지면 기대는 기대답게 기대를 만든다.
140    어떤 아픔 댓글:  조회:2117  추천:1  2013-12-19
누렇게 말라가는 한포기의 풀앞에서 나는 그만 발목을 묶이우고 말았다. 이상한 눈짓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가슴을 허비며 몸부림을 치건만 나는 그만 바보가 되여버렸다. 슴벅이는 두눈은 혈기를 잃었고 부러진 흉벽에는 거미줄이 드리웠었다. 저어기 안개가 가쁘게 몰아오면서 길을 열어가건만 내눈에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언덕너머로 앙상한 락타 한마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어딘가를 향해 길게 설음의 가락을 푼다. 점잖게 다부산즈를 차려입은 선비가 깨여진 안경알을 닦으면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있었다. 여우가 털빠진 엉덩이를 탈싹거리며 주인집 아저씨의 수염을 핥는다. 부뚜막에 쪼크리고 앉은 할머니의 등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타래치며 솟는다.
139    아픔의 색갈 댓글:  조회:2107  추천:2  2013-12-16
아픔에도 색갈이 있답니다 빠알간 그리움에 하얀 속살입니다 어제를 묻어버리고 오늘을 파헤칩니다 묻음은 멀어지고 파헤침은 가깝습니다 손끝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파헤쳐도 아픔은 색갈을 잃어갑니다 수많은 묻음은 눈동자를 희롱하지만 들려오는 아픔만으로도 하늘은 차디찬 비줄기를 만듭니다 줄기줄기 찢기는 상처마다에는 하아얀 속살이 고르롭게 약속을 묻어줍니다 허허벌판에도 난데없는 개구리울음소리 들려오고 까치의 울음소리에는 노을이 비낍니다 색갈없는 노을앞에서 무릎을 꿇고 남쪽하늘을 향해 기인긴 머리태를 풀어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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